24화 ? 쫓고 쫓기는 (1)
가혜는 앞머리를 넘기는 손길에 두 눈을 떴다. 잠기운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는 그녀답지 않게 기겁을 하듯 번쩍 눈을 떴다.
“어?”
가혜는 제 눈에 보이는 단 후의 얼굴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에서 조금은 바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단 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하던 행동을 이어 했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고 있는 가혜의 앞머리를 만졌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이마를 지나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에 닿았다.
“깼나.”
몇 번이나 들어도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가혜는 자신의 목소리와 전혀 다른 단 후의 저음에 꼴깍 침을 삼켰다.
이 최악의 남자에게 조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와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바리톤의 목소리는 반박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가혜는 슬그머니 미간을 접었다. 그를 만든 이가 신이든 악마든 그들은 엄청난 것을 세상에 내놓았다.
가혜는 제 시선을 빼앗은 그의 외모에 욕을 하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단 후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오만한 눈빛에 저 멀리서 편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얼마든지 보라는 듯 이마를 만지던 손을 치운 그는 꼼꼼하게 가혜를 살폈다.
“자는 동안 씻기긴 했는데 어디 찝찝한 데가 있나?”
연인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사뭇 다정한 음성이었다. 가혜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의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누가 나를 씻겼나.
이 남자가? 손짓, 턱짓으로 사람을 부리는 이 남자가? 가혜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는 그와 자신 둘뿐이었다. 머릿속 어딘가에는 자신을 씻긴 사람이 이 남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다지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가혜는 필사적으로 제 생각을 누르고는 단 후의 말을 억지로 지워 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단 후의 말만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제 머리가 다 말랐네. 넌 정말 잠귀가 어두워. 드라이어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더군.”
정액투성이었던 갈색 머리칼에서는 상큼한 꽃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와 또 한 번의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처럼 달라붙은 샴푸 향이었다.
두 번의 기회.
가혜는 속으로 자신이 가진 기회를 헤아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향은 더욱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좋은 향기였지만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가혜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씻겼나요?”
“그럼, 누가 했겠어.”
“왜요?”
가혜의 물음에 옅은 미소를 달고 있던 단 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질문이 이상해. 최가혜.”
의도를 파악하듯 그녀를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눈이 날카로웠다.
그 시선을 견디며 가헤는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네 곁에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난 항상 널 씻겨 줬었는데. 이제야 내가 널 씻긴 것이 중요한가?”
“아…….”
전혀 몰랐다는 가혜의 얼굴을 보면서 단 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단 후에게 안긴 상태로 기다란 소파에 누워 있던 가혜의 몸이 흔들렸다.
“모르고 있었던가. 하하, 자고 있는 넌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어.”
비록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었지만 가혜는 단 후의 웃는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고 말았다. 평소처럼 입꼬리만 올린 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배에서부터 올라온 진동이 그의 딱딱한 얼굴까지 바꿔 놓았다.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아무런 사심 없이 웃는 것이 낯설었다. 가혜는 쨍하니 얼어붙은 것처럼 그가 웃는 걸 눈에 담고는 매력적인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에 가혜는 눈썹을 찌푸렸다.
말간 웃음이 걸린 그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에 휘청하고 걸려 넘어진 것 같은 기분에 도저히 그 웃음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 웃어요. 지금이 몇 시죠? 내가 얼마나 잤나요? 여기 직원들에게 폐……를 끼친 거니 어서 나가요. 어서요.”
일루젼에서 데려온 상대와 섹스를 하는 건 무척이나 흔한 일이었다. 개인실 안에는 침대나 욕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고급 란제리 매장 정도로 생각한 가혜에게, 단 후와 그녀가 치른 정사는 민폐 그 자체였다.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옷가게에서 관계를 맺는 변태라고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까. 그들끼리 자신을 두고 쑥덕거릴 걸 상상하니 머리가 핑 어지럽게 돌았다.
“어서 가요.”
“어딜?”
어디라니.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겠어!
가혜는 시치미를 떼는 듯 눈썹을 올리고 묻는 단 후를 보았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웃음기가 여전히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당신 집이요. 빨리 돌아가요.”
“흐음. 글쎄?”
애가 타는 가혜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듯 단 후는 느긋하게 굴었다.
가혜는 인상을 썼다. 속이 타는 건 나밖에 없지.
“빨리요! 어서!”
가혜는 위에서 자신을 누르고 있는 단 후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쓸데없이 에너지 소모를 하는 대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자신은 진심으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 당장!
단 후는 그녀의 눈을 한참 보다가 달콤한 어조로 물었다.
“어딜 가자고? ‘우리’ 집 말이지?”
가혜는 단 후의 말속에서 은근히 묻어 있는 속내를 짚어 내지 못했다. 끈적하고 집요한 소유욕이 그의 질문에 담겨 있었지만 가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단 후에게 매달렸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단 후를 움직일 수 있는지 대충 눈치챘다. 가혜는 못 이긴 척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그러자 부드럽게 단 후의 몸이 풀렸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가혜의 속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내 끌려가던 관계에서 이 남자의 빈틈을 발견한 것 같았다. 원치 않은 이에게 아양을 떨고 있는 제 모습에 구역질이 났지만 지금은 납작 엎드려야 할 때였다. 가혜의 눈에 스산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닫혀 있던 가혜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네. 어서 가요.”
그의 입매가 느른히 휘어졌다.
교묘히 ‘당신’ 집을 ‘우리’ 집으로 바꾼 단 후는 가혜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녀의 입에서 기어이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가혜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가혜는 제 머리칼을 만지는 그의 손을 걷어 내듯 밀어내고 상체를 들었다. 모든 사고와 행동이 일시에 멈췄다.
이게 뭐야?
몸을 일으킨 가헤의 얼굴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주변이 가관이었다. ‘나는 비싼 몸이야!’라고 외치던 장식품과 의자 같은 가벼운 가구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가혜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그제야 인식했다.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폭신한 감촉의 이불이 어디서 났는지 알게 되자 더 황당했다.
방 안쪽으로 열 걸음쯤 더 들어간 곳에 침대가 있었다. 캐노피가 쳐진 침대는 침대보까지 매트리스에서 빠져나와 반쯤 땅에 떨어져 있었다. 워낙 이곳저곳 헤집어져 있어 침대는 꼭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긴 몰골처럼 보였다.
“방이…….”
“아.”
어지러운 방 안을 둘러보는 가혜의 시선을 따라 단 후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 역시 방을 보더니 옅게 웃었다.
“신경 꺼.”
“그래도 너무 심한…….”
가혜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단 후의 말이 끼어들었다.
“과격하게 뒹굴긴 했지.”
낮아진 목소리가 과거를 회상하듯 야릇해졌다. 토끼처럼 동그란 눈을 하고 작게 입술을 벌린 가혜를 아래위로 살피며 그가 씩 입술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못을 박듯 남겨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너와 내가.”
* * *
가혜는 목 끝까지 빨개진 얼굴로 단 후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안겨 돌아가고 있었다. 가혜는 스스로 제 시야를 차단했다. 도저히 고개를 돌려 이곳에 있는 직원들과 얼굴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가혜는 앞에 보이는 단 후의 탄탄한 가슴만 노려보았다.
다 이 남자 탓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가혜의 말에 단 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을 불렀다. 그는 입고 왔던 가혜의 옷 말고 다른 옷을 준비해 오라 지시를 내렸고 직원들은 알몸으로 겨우 이불만 걸치고 있던 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다른 여자들처럼 가혜를 데리고 가 옷을 입혀 봐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들 재량껏 옷을 가져와야 하는지 고민되는 눈치였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십니까?”
직원들 중에서 총대를 멘 건 총괄 매니저였다. 단 후가 질문을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총괄 매니저는 난처해하는 직원들을 대신해 의견을 물었다.
“벗기기 쉬운 옷이면 무엇이든 상관없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말에 직원들의 눈이 단숨에 가혜 쪽을 향했다.
갑자기 몰린 사람들의 시선에 가혜는 움찔 몸을 떨면서 목까지 올린 이불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뭐라고 이야기한 걸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셔츠 주머니 안에서 담배를 꺼내는 단 후를 살폈다.
단 후는 가혜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본 그는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까 잘못한 게 있었지?”
가혜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게 하는 말이 분명한데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였다. 잘도 한국어와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남자라 새삼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저 표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그게 좋겠어.”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타들어 가는데도 단 후는 가혜의 두려움을 즐기며 일부러 느리게 중얼댔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알아들어 보라는 듯이.
가혜와 단 후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는 시선을 떼지 않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입으로 가져왔다. 길게 빨아들이자 담배가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팬티는 내가 미리 준비시킨 걸 가져와. 나머지 옷은 알아서 가져오고.”
“네. 알겠습니다.”
자신을 한 번 바라보고 덧붙인 말에 가혜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분명 제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녀는 슬금슬금 뒤로 엉덩이를 물렸다.
단 후와 거리를 벌리던 사이 가혜는 제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에 눈썹을 올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총괄 매니저는 재빨리 몇 가지 옷을 가져오라고 무전을 내리고 가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친절한 말투였지만 가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을 따라갔다가 또 민망한 란제리를 입게 될 것만 같았다.
가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원피스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나, 주세요.”
‘나’라는 단어와 ‘주세요’라는 단어를 연달아 말하며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키는 뜻은 간단했다. 그냥 제 옷을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총괄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는 제게 지시를 내린 사람이 토키와 조직의 조장이자 이곳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는 행동일까.
총괄 매니저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가혜를 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안타깝지만 그녀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아가씨, 괜찮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가혜는 고개를 젓고 다시 손으로 제 옷을 가리켰다.
“최가혜, 따라갈 생각이 없어?”
가혜의 행동을 지켜보던 단 후는 별수 없다는 듯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담배를 끄려고 하자 곁에 있던 직원이 재빨리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네가 싫다면야. 속옷 가져와.”
담배를 완전히 비벼 끈 단 후는 재떨이에서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체격인 그가 일어서자 가혜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가혜는 위협적인 단 후의 체격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직원들 몇 명 정도가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단 후의 손에 한 줌도 안 될 까만 레이스 팬티를 올려놓았다.
“무엇을?”
짧은 일본어로 질문을 던지자 단 후의 눈썹이 장난스럽게 튕겼다. 겪어 보면 알 거란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싫다면 주인인 내가 해 줘야겠지. 내 장난감은 손이 많이 가서 탈이야.”
단 후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는 고갯짓을 했다.
총괄 매니저는 단 후가 가리킨 곳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소파의 팔걸이 쪽으로 가혜의 등이 맞닿아 있었다. 총괄 매니저는 그런 가혜와 팔걸이를 사이에 두고 섰다.
“잡아.”
단 후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총괄 매니저는 가혜의 팔을 잡아 뒤에서 내리눌렀다. 꺾인 팔이 팔걸이에 닿았다.
“으읏!”
“쉬. 얌전히 있어.”
이불은 가혜가 손을 놓치자마자 그녀의 몸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쪽 가슴이 훤히 드러나자 그녀의 뺨이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이 방에 있는 이들만 어림잡아 열 명. 가혜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이곳에 왔을 때처럼 안대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저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대체 무슨 추태인 건지. 가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으……흑.”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아?”
가혜가 이런 상황을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단 후는 몇 번이나 그녀를 타인에게 내보였다.
싫어하면 할수록 괴롭히고 싶다.
단 후는 아직 남아있는 이불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아아!”
새하얀 나신이 조명에 비쳐 반짝였다. 몸에는 그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붉은 키스 마크가 그가 얼마나 집요하게 굴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씻겨 주는 것도 모자라 옷도 입혀 줘…….”
단 후는 가혜의 매끄러운 허벅지를 쓰다듬고는 가느다란 발목을 잡았다. 반대편에 들고 있던 팬티를 발에 꿰어 넣었다.
“너에게는 물러 빠졌다니까.”
단 후는 팬티를 끼운 발목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싫어. 싫어.”
총괄 매니저에게 붙잡힌 팔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가혜는 날개에 핀이 박힌 나비 박제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애처롭게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뿐이었다.
“울어도 소용없어.”
단 후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마칠 때까지 가혜를 보듬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반대편 발을 들어 팬티를 제대로 입혀 주었다.
“잘 어울려.”
골반 위로 올라간 팬티 선에 맞춰 단 후가 입술을 내렸다. 사이즈가 딱 맞는지 그녀의 엉덩이와 치구가 선명히 보였다.
“으으.”
가혜는 단 후의 뜨거운 숨결이 닿자 허리를 비틀었다.
“이 속옷이 뭐가 재밌는지 알아?”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묻는 질문이었다.
가혜의 눈이 의문에 휩싸이자 단 후는 보란 듯이 손가락을 음부로 내렸다. 두 마디 정도 큰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왔다.
“앗!”
가혜는 익숙하게 아래를 가르며 들어오는 손가락에 신음을 뱉었다. 놀라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그녀를 보며 단 후는 다른 쪽 손으로 소파 아래 서랍을 뒤적였다.
“놀랐어?”
“아래가……”
“그래. 없지.”
팬티의 아랫부분이 훤히 뚫려 있었다.
“벗길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고.”
단 후는 서랍 안에서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그것을 꺼내 들었다.
“아아, 흐읏!”
단 후는 질 안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질벽을 문질렀다. 자잘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이 느껴지자 단 후는 손가락을 조금 더 깊게 넣어 그녀의 G 스팟을 눌렀다.
“하악!”
허리가 거세게 튕기며 가혜는 비명처럼 숨을 뱉었다. 쾌감에 아래에서 울컥 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래에 들어갔던 손을 빼고 대신 아래를 적신 애액에 서랍에서 꺼낸 로터를 문질렀다.
“으으, 아, 그거, 흐윽!”
로터를 알아본 가혜는 눈을 찡그렸다.
“꽤 좋아하는 거지?”
“흐으…… 아니에요. 켜, 켜면 안 돼.”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는 가혜의 이마에 단 후의 손이 닿았다. 그는 땀을 닦아 주고는 이제는 어떤 식으로 로터를 사용하는지 아는 가혜에게 웃어 주었다.
“안 켜고 넣고만 있는 게 더 힘들걸.”
“하아…… 안 돼…….”
자꾸만 가혜가 거절을 하자 단 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스스로 넣고 작동시키면 돌아갈 때는 안대를 하지 않아도 돼. 어때?”
그의 제안에 가혜의 척추가 찌르르 울렸다. 귓가의 솜털이 바짝 서고 아래에 닿아 있는 로터의 모양과 크기가 선명히 느껴졌다. 가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 이까짓 것.
“뭘 택할래?”
단 후는 손짓으로 가혜의 팔을 잡고 있던 총괄 매니저를 비켜서게 했다. 양손의 자유가 돌아왔다.
“여기 직원들 물려 줘요. 그러면…….”
“요구하는 게 많아. 네 위치를 다시 한 번 새겨 줘?”
단 후의 눈빛이 냉정하게 빛났다.
“흐읍.”
가혜는 빠르게 뛰는 심장과 호흡을 조절하고는 단 후의 손에서 로터를 건네받았다.
이 남자가 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것처럼 하면 돼.
두려운 얼굴로 벌벌 떨면서 가혜는 간신히 제 안에 로터를 밀어 넣었다.
“이것도 까먹지 마.”
진동을 켜는 스위치였다.
완전치 스위치를 건네받은 가혜는 두 눈을 꼭 감고 전원을 켰다.
“하앙!”
기다렸다는 듯이 목을 치고 올라오는 교성에 가혜는 연신 가쁜 신음을 냈다.
로터가 성감대를 자극할 때마다 가혜는 자신을 잃어 가는 기분이었다.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방에 있는 직원들을 담았다. 가혜는 자신의 신음을 듣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을 더는 받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상체를 들고 안기다시피 단 후에게 팔을 뻗었다.
“앙! 다, 단…… 단 후. 흣, 집에 가요. 우리 집에.”
* * *
회상을 마쳤는데도, 똑같은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자 가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는 생각을 끊어 내기 위해 제 눈앞에 보이는 단 후의 셔츠 단추를 기를 쓰고 노려보았다.
다시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야.
몇 번이나 다짐하며 그녀는 타조가 덤불에 고개를 밀어 넣고 제 몸을 숨겼다고 생각하듯 단 후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가혜가 스스로에게 치를 떠는 동안 민현과 이와타는 일루젼의 2층 복도에 서 있었다. 마이에게서 단 후가 이곳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2층으로 나온 참이었다.
이와타는 1층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에 서서 단 후와 가혜를 보았지만 민현은 이와타의 옆에 서 있는 조각상 뒤에 숨어 있었다. 1층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서서 민현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의 갈색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가 볼 수 있는 건 그 여자의 정수리가 전부인데 자꾸 시선이 머물렀다. 묘해.
“저 여자인가?”
이와타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제대로 안 보이는데 넌 어때?”
민현보다 위치가 좋은 이와타 역시 인상을 썼다.
“저렇게 파묻혀 있는데 나라고 별수가 있겠어.”
단 후가 거의 입구를 벗어나려하자 이와타는 아예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댔다.
최대한 몸을 쭉 뻗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거 꽤 곤란하게 되었어. 저렇게 안고 가는 모습을 봐. 매니저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이가 장난이 아니네.”
민현의 말에 이와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은 내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다른 수라도 있어?”
“아, 당연히 최후의 방법이 있긴 하지.”
이와타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