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21화 (21/54)

21화 ? 외출 (4)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민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뭐 있어. 오는 여자 안 막았잖아. 안 그러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뭔가 달라지니까 혹시 진심인 여자가 생겼나 해서 물어본 거지.”

“음, 그렇게 티 났나.”

민현은 리모컨으로 아야세 안에서 작동하던 로터를 끄고는, 이와타에게 던졌다. 이것으로 이와타의 물음에 대답을 해 준 것과 다름없었다.

날아오는 리모컨을 능숙하게 받은 이와타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여자야? 지조 따위 없었던 네가 차려 놓은 상도 마다할 정도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미인이야?”

“아. 뭐.”

민현은 아야세의 팔을 놓고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더는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물러난 그는 다시 이와타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민현이 부탁했던 물이 올려져 있었다.

민현은 목을 축이며 자세한 대답을 생략했다. 이와타의 관심에 그다지 응해 주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와타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민현이 물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이 좋은 건수를 놓칠 수는 없지.’

이와타는 섭섭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이렇게 굴 거야? 좀 더 말해 줘 우리 사이에. 응? 어떤 사람이야?”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해.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까.”

“어? 그 말은?”

귀찮다는 듯 민현이 빙빙 돌려 말했지만 이와타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는 말은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와타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벌써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된 건가?

“설마 벌써 결혼 준비를 마친 건 아니지? 예를 들어 나한테 줄 청첩장이 있다든지.”

이와타는 과장스럽게 민현의 주변을 살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 저 여자 계속 세워 둘 거야?”

“아야세라니까.”

“뭐든.”

민현은 관심이 없다는 듯 소파에 비딱하게 기댔다.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린 채로 반쯤 누운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귀찮게 질문을 해 오는 이와타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너무 들떴나.

이와타가 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그 저의를 알면서도 민현은 못 이긴 척 힌트를 주었다. 머리는 입을 다물라고 하는데, 자꾸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나도 아직 멀었어.

복잡한 감정으로 민현은 옅게 웃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가시가 돋을 것처럼 입안이 간지러웠다. 묻지 않아도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고 싶었다. 슬그머니 미소가 짙어지려 하자 민현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젠장. 어떡하지.

가혜와 선을 본다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살면서 감정을 숨기는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가혜가 내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뜻이겠지.’

민현은 자신의 변화를 신기하게 여기면서 억지로 얼굴을 굳혔다. 이쯤에서 이와타의 관심을 적당히 끊어 내는 게 좋았다. 분위기를 달리한 민현은 눈을 뜨면서 기대 있던 등을 바로 세웠다.

“사업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아야세를 내보내라는 뜻으로 턱짓을 했다. 이와타는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와타가 민현을 향해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었다.

“잠시만.”

이와타는 아이패드의 화면을 터치했다. 직원 호출 버튼을 누르자 매니저와 민현에게 쫓겨 나갔던 어시던트들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거.”

이와타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아야세를 데리고 가서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와 어울리는 액세서리와 구두,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줘. 그리고 안 입어 본 드레스까지 함께 계산해.”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이와타의 카드를 건네받은 매니저는 어시던트들에게 아야세 옆에 걸려있는 두 벌의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다.

직원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이와타는 아야세를 손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그는 손을 뻗어 아야세의 풍만한 가슴을 만졌다. 얌전히 이와타의 손에 몸을 맡긴 아야세는 엉망으로 주물러지는 가슴에 신음을 흘렸다.

“흐읏, 으응.”

흥분으로 유두가 바짝 서자 이와타는 손바닥으로 유두를 꽉 누르고는 가슴을 빙글 돌렸다.

“하아…… 으음, 아.”

느끼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아야세를 칭찬하듯 이와타는 마지막으로 유두를 비틀었다.

“앗! 사카구치 님.”

무릎까지 후들거리는 아야세의 모습에 이와타가 입꼬리를 올렸다.

“밝히긴. 아야세, 따라가서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 봐.”

“네.”

“쇼핑이 끝나면 먼저 맨션으로 가 있어. 여기서 못 한 걸 거기서 할 테니.”

“네.”

아야세의 대답을 들은 이와타가 지분대던 손을 거뒀다. 언제 여자의 몸을 탐했냐는 듯 냉정한 얼굴이었다.

매니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른 직원에게 아야세의 안내를 맡겼다.

“아야세 씨를 안내해 드려요.”

“네. 아야세 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야세와 모든 어시던트들이 방을 나섰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주변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 조용한 가운데 매니저는 이와타와 민현을 번갈아 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곤란한 말을 전하게 되어 무척 죄송하다는 표정이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이와타였다.

“할 말이 있어?”

“저 사카구치 님…….”

몇 년 동안 바뀌지 않고 이와타의 매니저를 하고 있는 마이는 VIP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이와타 역시 그녀의 일 처리에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매니저의 모습에 이와타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것이 토키와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방문을 하셨습니다.”

“토키와 사장이라면…….”

매니저의 말에 대답을 한 건 옆에서 듣고 있던 민현이었다. 그는 흥미를 보이며 매니저를 응시했다.

“그 토키와 류노스케 조장? 토키와 회의?”

“네. 맞습니다. 손님.”

민현의 반응에 이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관심을 가지는지 알겠다는 얼굴로 민현에게 나직이 물었다.

“너 실제로 본 적 없지?”

“응. 어때? 사진과 비슷하게 생겼어?”

“사진? 하하, 사진이랑 비슷한 정도가 아니지.”

토키와 류노스케를 만나본 사람에게 민현의 물음은 순진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차 없는 분위기지.’

처음 토키와 류노스케를 만났을 때 솔직히 오금이 저렸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주변의 수컷들을 밟아 버리는 압박감이었다. 이와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머리 위에 올라설 만한 사람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짜증 나는 일이었지.’

류노스케의 기세를 떠올리며 이와타는 매니저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일루젼의 주인이 급작스럽게 방문했다. 자신의 부탁이라고 하지만 회원이 아닌 외부인인 민현을 들였으니 들키지 않게 조심해 달라, 가 요지일 것이다.

‘내가 하려는 짓을 알면 분명 까무러칠 테지만. 그건 이쪽 사정이고.’

이쪽 세계의 사람들의 사정 따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생각해 볼 마음도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숨긴 채 이와타는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방을 나서려던 매니저를 안심시켰다.

“알아서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 나도 조장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거든.”

“네. 감사합니다. 그럼,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민현의 눈에 환히 웃는 매니저와 이와타가 한눈에 담겼다. 동상이몽처럼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모습에 민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밖으로 나가는 매니저를 끝까지 지켜보던 민현이 한쪽 입꼬리를 말며 중얼거렸다.

“아, 나쁜 남자라니까.”

“누구더러.”

민현은 몸을 틀어 이와타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러 갈 거야? 토키와 조장?”

“그럴까 하는데 아직은 생각 중이야.”

“왜. 나는 파티에서 보기 전에 미리 실물을 보고 싶은데. 너 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이곳에 있는 직원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할 말이었다. 그러나 민현은 나쁜 짓을 꾸미는 악동 같은 표정으로 히죽였다.

“진짜.”

이와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민현에게 토키와 조장의 얼굴을 보여 줄 마음이 있지만 저렇게 ‘나는 야쿠자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아!’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눌러 주고 싶었다.

내가 느꼈던 패배감을 너는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토키와 조장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주제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제 형제들을 죽여 왕좌에 오른 사람.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어떤 한계도 마음의 주저함도 없는 괴물이라고.

이와타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비틀린 마음을 토닥였다.

네가 원했으니까.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쫄았어? 혹시나 내가 여기 온 걸 토키와 조장에게 걸릴까 봐?”

“설마.”

“그럼 내가 가서 봐도 상관없겠네.”

이와타는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민현의 말에 발끈하며 넘어간 사람처럼 연기했다.

모든 선택은 네가 한 거다. 신민현.

어디 한번 당해 봐.

“약아 빠진 놈.”

속내를 숨기고 이와타가 진심을 담아 욕을 했다.

민현은 칭찬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보러 가는 건 정해졌으니 그만 웃어. 사업 이야기나 하자. 얼른 마쳐야 조장이 떠나기 전에 볼 것 아냐.”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이와타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래.”

웃음을 멈춘 민현은 재킷 안에서 담배를 찾았다. 하나를 입에 물고 이와타에게도 한 개비를 건넸다. 각자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곧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몇 모금 담배를 흡입한 뒤 민현이 본론을 꺼냈다.

“네가 보기에 어때? 토키와 회에서 우리 사업을 도와줄 것 같아?”

민현의 물음에 이와타가 손으로 미간을 긁적였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혹은 그 아래일지도.

몇 달 전, IT업계와 관련되어 새로운 국책 사업이 진행될 거라는 말이 정치판에서 은밀히 이야기가 돌았다. 상당한 돈이 투자되는 사업이라 어느 기업이든 이 일을 따내기만 하면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해타산을 쫓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와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국책 사업은 눈먼 돈이었다. 비록 자신이 직접 관여할 수는 없지만 우회적으로 이득을 얻는 방법은 많았다. 지금처럼 민현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이와타는 담배를 길게 흡입하고는,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상상했다.

국책 사업을 자신의 지역구에 유치한다면 사람들의 표심과 여론이 몰릴 것이다. 다음에 있을 선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입지가 더 튼튼해지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지. 거기다가 부수적인 수입도 무시 못하고.’

이와타는 탐욕 가득한 눈으로 민현을 보았다.

민현은 일본에서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면 상당한 금액을 답례로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다른 업체와 입찰 경쟁을 해야겠지만, 이 분야와 관련해서 신기술과 특허를 가지고 있는 민현의 회사는 정치적 힘만 실린다면 적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와타는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계획대로 이와타의 지역구에 민현의 회사를 유치하는 일뿐이었다. 다른 국회의원들이 납득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 그 땅을 매입하면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이었다.

돈을 주고 땅을 산다. 그 간단하다고 여겼던 일이 문제였다.

그들이 원하는 곳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그것도 토키와 류노스케라는 거물이.

토키와 회에서 땅을 순순히 판다면 이야기가 쉽게 흘러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었다.

“이번 주에 열리는 파티에서 토키와의 호감을 사야 해. 그 뒤에 토키와가 우리 쪽에 땅을 팔도록 이야기를 해 봐야지.”

“아야세를 이용해서?”

“술과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훨씬 나아지지 않겠어? 아야세가 토키와 조장의 마음에 들면 더 좋고.”

이와타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민현이 문득 한쪽 눈을 찡그렸다.

“토키와 회장은 여길 혼자 오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너와 아야세처럼. 파트너와 함께 오는 게 대부분 아니야?”

이와타의 얼굴이 굳었다.

일루젼에 남자 혼자 오는 경우는 없었다. 혹시나 입장은 따로 한다고 해도 방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이와타는 눈썹을 찡그렸다.

토키와 조장에 관한 보고서에는, 운영 상태를 점검할 때만 그가 직접 일루젼에 온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데리고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설마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젠장.”

혹시라도 토키와 조장에게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났다면 미인계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던 계획이 틀어질 위기였다. 이와타는 서둘러 매니저를 불렀다.

“네. 부르셨습니까?”

매니저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이와타가 물었다.

“토키와 조장이 누군가와 함께 왔어?”

“아, 네. 어떤 여성분과…….”

“여자? 어떻게 생겼어. 유명인인가? 배우? 모델?”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에 안대를 하고 있어서…….”

매니저의 입에서 나온 안대라는 말에 이와타와 민현은 순간 뭔가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민현이 허리를 접고 박장대소를 했다.

“안대? 하하, 취향 한번 대단하네.”

민현은 낄낄대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거기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와타가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자신과의 사업이 좌초될 상황인데 웃음이 나오나.

이와타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둘 사이는 어떻게 보였지?”

“아…….”

주저하는 매니저를 보자 민현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거기서 수표를 몇 장 꺼내 매니저에게 내밀었다.

마이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수표에 적힌 금액에 마음이 흔들렸다. 저 금액이라면 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입원비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이는 손을 뻗어 민현의 돈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제 말해 봐요. 마이 씨.”

유니폼에 달린 명찰을 읽은 민현이 듣기 좋은 저음으로 매니저를 불렀다.

잘생긴 남자가 녹아날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건 심장에 안 좋은 일이었다. 마이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여성분을 안고 일루젼 안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개인실로 들어설 때까지 여성분은 안대를 한 채 얌전히 안겨 있었다고 하고요. 경호원이 대신 안겠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굉장히 소중하게 안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인상적이라는 부분에서 이와타가 크게 숨을 뱉었다. 놀란 마이가 말을 멈추자 민현이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

“음 마이 씨, 그 여자에 관한 정보는 없어요?”

민현이 턱을 괸 채 아래에서 위로 마이를 올려다보았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또다시 뛰었다. 냉정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향한 눈은 강아지처럼 순해 보였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남자의 모습에 마이는 사장님의 개인실 담당 직원들의 수다를 떠올렸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인인 것 같습니다.”

“외국인? 어느 나라 사람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와타가 물었다. 마이는 민현의 시선에서 벗어나 이와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카구치 님.”

화가 난 듯한 이와타의 얼굴에 마이는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사장님과 새로운 여자의 등장에 왜 그가 화를 내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야세도 안타깝네.’

직원들을 따라 액세서리를 고르고 있을 아야세에게 동정을 보내느라 민현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

“놀랐어요?”

마이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아래를 보았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크고 기다란 손은 살짝 체온이 낮은지 기분 좋게 시원했다. 손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놀랐다는 핑계로 그대로 잡혀 있었다.

“저 왜 그러시는지…….”

민현은 자신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매니저를 보고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마이 씨가 저를 좀 도와줬으면 해요.”

“제가 뭘…….”

“토키와 조장이 데려온 여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내게 말해 줘요.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아, 마이 씨나 그 여자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다시피 우리가 조장을 위해 아야세를 준비해 두었잖아요? 서로가 난처할 만한 일은 피하고 싶어서.”

민현은 다정하게 웃었다. 해사한 미소에 마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난처하게 되는 건 싫었다.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알게 되면 이쪽으로 연락해 줘요.”

민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대신 마이의 손에 자신의 명함을 쥐어 주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마이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민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 우리가 봐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이와타?”

* * *

단 후의 품에 안겨 있던 가혜는 주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안대를 풀어 달라 말하고 싶은데 주변에 단 후의 조직원들이 있을까 봐 한국어를 쓸 수도 없었다.

개인실 소파에 앉아 가혜를 무릎에 앉힌 단 후는 그녀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작은 동물이 주변 소리에 민감하게 구는 것처럼 가혜 역시 잔뜩 웅크린 채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총괄 매니저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혜가 자신의 셔츠를 잡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의지하고 있었다. 단 후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긴 머릿결을 만지던 손을 풀어, 가혜의 등을 다정히 두드렸다. 긴장하고 있던 가혜의 몸이 풀어졌다. 제 손길에 안도감을 느끼는 그녀가 귀여워 정수리에 키스를 했다.

“사장님, 여기 태블릿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말소리가 나자 움찔 떨어 대는 가혜를 또다시 손으로 토닥였다.

“쉬. 괜찮아.”

“아…….”

단 후의 일본어를 알아들은 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 안대를 씌운 사람이지만 낯선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후뿐이었다. 가혜는 힘없이 단 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단 후는 총괄 매니저가 가져다준 태블릿을 받아들고 란제리 쪽을 살펴보았다.

“어떤 속옷이 네게 어울릴까.”

총괄 매니저는 그들의 사장이 여자에게 어울릴 속옷을 사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공주님처럼 소중하게 안고 이곳까지 올 때부터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짐작했지만 일반 연인들처럼, 속옷을 선물하려 할 줄이야.

“이것과 이거, 갈아입힐 때 아래에 있는 건 꺼내지 마. 어시던트들은 물론 여자들로 하고.”

원하는 란제리를 고른 단 후는 총괄 매니저에게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넘어져서 다치지 않게 조심해.”

눈이 보이지 않는 가혜가 혹시라도 다치지 않을까 총괄 매니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서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저기에서 옷을 갈아입나?”

단 후는 자신의 앞에 마련된 단을 보았다. 남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아래에는 조명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여자와 함께 이곳을 찾은 건 처음이지만 자신의 사업체인 만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네.”

“그럼 가지.”

단 후는 가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대를 한 그녀가 타인의 손에 이끌려 더듬더듬 떨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성큼성큼 직원들과 거리를 두고 움직인 그가 가혜의 귓가에 한국어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네 옷을 벗겨도 놀라지 마.”

“네?”

“속옷을 사러 왔으니 입어 봐야 할 것 아냐.”

“그, 그래서요? 제가 입을 수 있어요. 안대만 풀어 주면.”

“이럴까 봐 안 풀어 주는 거야. 넌 안대를 풀어 주면 내게 속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을 거잖아? 그런 실랑이는 됐어. 너 대신 내가 판단해 주지.”

가혜는 얼굴을 붉혔다.

“어째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가혜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단 후는 능글맞게 대답을 해 주었다.

“약속했잖아? 네게 어떤 속옷이 어울리는지 지켜봐 준다고.”

웃음을 흘리며 단 후는 가혜를 조심히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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