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외출 (2)
단 후와 본가를 나서면서 가혜는 이곳이 야쿠자 조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가 저택을 구경하면서 보았던 조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남자들이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까지 서 있었다.
가혜는 양쪽으로 정렬해 있는 이들을 보면서 기가 질렸다. 하나 같이 험악한 인상에 체격까지 좋은 이들이었다. 밤길에 저들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길을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위압감 조성은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혼자 있어도 무서운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으니 사나운 분위기가 배가 되고 있었다. 가혜는 가급적 조직원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에게 쏠리는 그들의 시선은 막을 길이 없었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가혜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가혜는 이토록 열렬한 관심이 자신이 그들의 조장인 단 후에게 안겨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실상은 단 후의 명령으로 가혜의 얼굴을 외우려는 것이었다.
“무서워?”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단 후가 제 가슴팍에 고개를 묻으려는 가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조직원들을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에 그보다 더 창백해진 가혜의 얼굴은 달빛처럼 여려 보였다.
가혜는 갑작스러운 단 후의 질문에 낯설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한국어로 이야기를 했던 터라 갑자기 일본어로 물어 오는 게 영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 조직원들 앞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한다고 했었나.’
윤석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가혜는 자신이 한국어를 쓸 수 있을 때와 아닐 때를 구별할 줄 알았다. 단 후가 일본어를 쓸 때는 자신 역시 일본어로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일본어는 극히 적었고, 당연히 그의 질문을 이해하는 것과 대답하는 것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혜는 자신을 보는 단 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빤히 그를 바라보자 보석처럼 요요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대체 뭐라고 말했던 거지?
가혜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서워?”
단 후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혜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자신을 보는 단 후의 시선에서 대략 어떤 뉘앙스인지는 파악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위협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익숙해져야 할 거야.”
단 후는 알아듣지 못해 두 눈을 가만히 깜박이는 가혜의 모습을 잠시 응시하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였는지 뜻을 알 수 없었다.
가혜는 단 후의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문득 이 장면이 자신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으리라는 어떤 예감을 느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미소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결국 독이 될 터였다.
가혜는 제게 달라붙은 단 후의 눈빛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끊어 낼 듯 두 눈을 감았다.
어서 이 악몽에서 깨고 싶었다.
* * *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은 명품 브랜드의 부티크처럼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지하 3층에서 6층으로 이뤄져 있는 건물은 속옷부터 파티용 드레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객이 원하면 옷에 어울리는 구두나 액세서리도 함께 구매가 가능한 이곳은 까다로운 회원 심사를 통과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주로 재계의 상류층이나 정부의 고위관계자가 찾는 이곳은 멀티샵인 동시에 그들의 은밀한 놀이터였다.
이곳을 이용하는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나 정부 혹은 첩을 데리고 와 인형 놀이 하듯 여자를 꾸미고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 음탕하게 놀았다.
고급 의류 매장을 빙자해 가진 자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곳.
물건의 값만 비싸게 치른다면 이곳에서 그들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었다.
“흐응, 아앙!”
사카구치 이와타는 개인실의 소파에 앉아 앞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는 전신 거울로 벽면이 채워져 있었고 무대처럼 단이 올려 져 있었다. 이와타는 턱을 괴고는 단 위에 서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거울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녀의 모습을 빠짐없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진동기의 리모컨의 강도를 올렸다. 그러자 간신히 서 있던 여자가 허리를 튕기더니 헉헉대는 신음을 뱉었다.
“사카구치 님……. 으읏…….”
여자가 간절히 남자를 불렀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사무적이었다.
“아야세,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어. 조금 더 노출이 있는 쪽으로.”
“아아…… 예.”
순종적으로 대답했지만 아야세는 질 안에서 진동하는 로터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옆쪽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아…….”
아야세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길게 신음을 흘렸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성욕이 끓어올랐다. 이미 아래는 자신의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야세는 맞은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와타를 보았다. 그는 미남이라기보다 인상이 좋은 이미지의 남자였다. 꾸준한 관리로 근육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보던 아야세는 이와타의 중심부를 응시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자신과 달리 그의 것은 반응조차 없었다. 그 무심함에 아야세는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녀는 어여쁜 입술을 움직여 그를 불렀다.
“사카구치 님…….”
아야세는 드레스 아래에 있는 자신의 맨 허벅지를 비볐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당장 이 단에서 내려가 그의 다리에 매달릴 것 같았다. 아야세는 흐릿한 눈으로 간신히 이성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야세는 일 년 전만 해도 힘없고 백 없는 흔한 무명 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찍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그녀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배우 일이 없을 때는 아야세는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온전히 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삶은 충분히 그녀를 고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사카구치 이와타를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이었다. 그를 만난 후 아야세는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탈바꿈하듯 달라졌다.
드라마 출연 섭외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배우.
사카구치의 말을 얌전히 따르기만 하면 제가 원했던 일을 모두 이룰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일본 최고의 여배우였다.
“똑바로 서 봐. 아야세. 옷태를 제대로 보기 힘들잖아.”
그의 말에 아야세는 제 성욕을 억누르기 위해 손바닥에 손톱을 박았다. 주먹을 쥐고서 허리를 세운 그녀는 사카구치를 바라보았다.
“이번 파티에 토키와 류노스케가 온다. 넌 최대한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해. 음, 네 커다란 젖가슴은 봐 줄 만하니까 이런 드레스도 괜찮겠어.”
달콤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아야세와 일을 처리하는 듯한 이와타는 극명한 온도차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타는 아야세의 몸매를 한번 훑더니 들고 있던 리모컨 대신 소파 옆 탁자에 두었던 아이패드를 집어 들었다. 그가 들고 있는 아이패드는 앉아서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제품을 보거나 주문할 수 있는 일종의 브로슈어였다.
이와타는 심드렁하게 아이패드의 화면을 넘겼다. 그가 넘길 때마다 모델이 입고 있는 다양한 드레스가 휙휙 지나갔다.
“흐음. 네가 토키와 류노스케의 눈에만 들면 일이 쉽게 풀릴 텐데.”
아이패드 화면을 보고 있는 이와타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이걸 입어 봐봐.”
이와타는 아이패드의 화면 하단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재깍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일순위로 여기는 원칙답게 이곳의 직원은 개인실에 들어간 손님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는 시스템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가 다가오자 이와타는 아야세가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앞쪽이 파인 검은색 드레스를 보여 주었다.
“이 드레스와 비슷한 디자인을 여러 벌 가져와. 유두만 가릴 정도로 노출이 심한 것도 괜찮으니까, 가슴이 강조된 드레스 위주로.”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무전기로 상황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직원들이 다섯 벌의 드레스를 가지고 룸으로 들어왔다.
“어떠십니까?”
“이거, 이거, 빼.”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의 실물을 확인한 이와타가 다섯 벌 중 최종 세 벌을 골랐다. 직원은 옷걸이가 걸린 행거 채로 아야세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안에는 매니저 급인 직원과 드레스 입는 걸 도와주는 어시던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익숙하게 단 앞에 있는 커튼을 치고 가려진 장막 속에서 아야세의 탈의와 착의를 도왔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이들은 아야세의 몸에 로터가 넣어져 움직이고 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는 여기서 약과에 불과했다. 이곳에 정부나 첩을 데리고 오는 남자들은 그들의 인형에 장난감 한두 개쯤은 기본으로 넣어 두고는 했다.
“아래를 닦아 드릴까요?”
허벅지에 묻어 있는 하얀 액체에 시선을 고정한 어시스턴트가 물티슈를 들고 물었다.
아야세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 이와타와 이곳을 찾았던 그녀는 이곳의 규칙을 몇 가지 알았다. 그 첫 번째가 여성의 애액이 묻은 물건은 무조건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타는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 옷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 입지 않더라도 이대로 제 옷장에 넣어 둘 만한 가치는 있었다. 아야세는 실수를 한 척 입고 있는 드레스에 애액을 묻혔다.
직원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 새로운 드레스를 가져왔다. 커튼 밖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데려온 여자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아야세가 커튼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와타의 뒤에 서 있던 매니저는 입구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카구치 님을 찾는 손님이 로비에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다른 손님의 이름을 대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면 경호팀이 알아서 처리를 했을 테지만, 로비에 있는 사람은 VIP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카구치 이와타의 이름을 말했다.
회원이 아니면 안에 들어올 수 없지만 이번은 특별한 경우였다.
사카구치는 일본에서 유명한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친가와 외가 할 것 없이 총리를 배출했고, 내각의 주요 요직에 친인척들이 포진해 있는 일본 정계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더군다나 이와타의 아버지인 사카구치 신타로는 다음 대 총리의 유력한 후보였고, 이와타 본인 역시 앞날이 유망한 중의원이었다.
경호팀과 입구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사카구치의 손님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입에서 이와타가 나온 순간 그들은 몹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으며 그 남자의 편의를 위해 예외적으로 1층의 로비까지 입장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의 귓속에 꽂힌 이어폰으로 새로운 무전이 이어졌다.
계속 그를 로비에 둘지 혹은 돌려보낼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카구치가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남자를 안내해도 괜찮겠냐고 1층 매니저는 초조한지 자꾸만 질문을 해 댔다.
[마이 매니저님, 사카구치 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와타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이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1층 매니저가 왜 이렇게 낯선 이를 로비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됐다. 갑자기 이곳의 주인이 나타나 이 상황을 목격이라도 하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1층 매니저와 마찬가지로 마이는 이와타의 입이 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드디어 도착했나 보네. 외부인은 안 된다는 규칙은 알지만 중요한 손님이니 이쪽으로 불러도 되겠어?”
“사카구치 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알겠습니다.”
이와타의 대답이 떨어지자 매니저는 서둘러서 무전을 전달했다.
* * *
차에 탄 뒤, 단 후는 순순히 가혜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녀는 재깍 그와 반대편 차창으로 달라붙었다.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단 후와 거리를 벌렸던 터라 안 그래도 넓은 뒷좌석이 단 후 혼자 타고 있을 때처럼 공간이 남았다.
단 후는 제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않은 가혜를 보면서 눈썹을 추어올렸으나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주겠다는 듯 등받이에 느른히 몸을 묻자 가혜는 잠시 단 후의 눈치를 살폈다.
움직이지 않는 단 후를 보고 안심한 듯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가혜의 얼굴에 설렘이 떠올랐다. 조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 차는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유유히 움직였다. 가혜는 필사적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그러나 5분쯤 지나자 가혜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적한 시골처럼 길가에는 풀과 나무가 전부였다. 그나마 볼 게 있다면 그녀가 앉은 쪽으로 흐르는 작은 실개천이 전부였다. 다른 때라면 평화로운 장면이라 여겼겠지만 가혜는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무슨 기대를 한 거야.
그녀는 야쿠자 본가 주변으로 인가가 있을 거라 기대했던 자신에게 작게 실소했다.
하긴, 수백 명이나 모여 살고 있는 야쿠자의 본가 옆에서 누가 살고 싶겠는가. 보통 간덩이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가혜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가혜가 바깥 구경에 열을 올리는 동안 단 후는 시시각각으로 표정을 달리하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 작은 머리로 제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이 귀여웠다.
자신이 도망칠 기회를 준다고 했지만 제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품다니.
그 모양새가 너무나 순진해서 단 후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매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여하튼 행동 하나하나 제 입맛을 돋우는 데는 최가혜만 한 존재가 없었다.
단 후는 자신이 싸 놓은 정액을 몸에 담고서 창밖을 보는 가혜를 한 입에 삼켜 버리고 싶었다. 아랫도리에 다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마음껏 밖으로 보라고 자유 시간을 줄까. 아니면, 아래로 데리고 와 저 작은 입에 내 것을 물려 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단 후는 결국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오늘이 아니라도 앞으로 가혜는 몇 번이나 자신과 함께 밖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 유희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편이 나았다. 이번은 제 안에 사정을 허락했으나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혜를 희롱하고 싶은 욕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 것을 위아래 할 것 없이 먹여 주고 싶었다.
단 후는 차갑게 웃으며 가혜를 안았다.
“이게 뭐예요!, 놔줘요. 밖을, 밖을 보고 싶어요!”
애처로울 정도로 간절한 외침이었다.
가혜는 갑작스럽게 시야를 차단당했다. 단 후의 커다란 손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계속 보고 싶어?”
단 후는 어느새 가혜의 뒤에 바짝 다가와 앉아 있었다.
위험하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가혜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잔뜩 긴장한 가혜의 모습에 단 후는 픽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꼭 새끼 짐승이 천적을 발견하고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부디 천적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기를, 간절히 비는 것처럼 보였다. 단 후의 눈빛에 잔악함이 깃들었다.
안 됐어, 최가혜. 난 널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거든.
단 후는 다른 쪽 손으로 가혜의 원피스를 들췄다. 팬티를 입고 있어야 할 아래는 검은 숲만 있을 뿐이었다. 단 후는 제가 던져 버린 가혜의 속옷을 떠올리고는 나직이 웃었다. 집에서는 알몸으로 지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단 후는 가혜를 어떤 식으로 다룰지 생각하면서 마개를 물고 있는 입구 쪽으로 손을 내렸다.
“흐으…….”
관계 후 한껏 예민해져 있던 음부는 내내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더욱 민감해진 상태였다. 속옷을 입지 않은 낯선 감각과 누구나 자신의 맨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극점으로 몰아붙인 듯했다.
“아아, 아아아.”
단 후는 원피스 아래로 바람만 스쳐도 가혜가 몸을 떨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꽃잎을 천천히 문질렀다. 직접적으로 흥분하는 클리토리스를 제외하고 단 후는 가혜의 아래를 마음껏 만졌다. 흥분에 겨워 울어 대는 그녀가 좋았지만 체력이 약한 가혜는 한 번 오르가즘을 겪고 나면 몹시 피곤해했다.
단 후는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체력적인 문제다 보니 오래도록 가혜와 놀기 위해선 작은 자극을 길고 끈질기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단 후는 가혜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응? 묻잖아. 제대로 대답해야지.”
단 후는 가혜를 대신해 그녀가 보고 있던 풍경을 보았다. 이제 토키와 회의 사유지가 끝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가혜는 자신이 살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보고 싶어 했던 것. 단 후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건데 말이야.’
단 후의 눈동자에 시린 빛이 감돌았다.
가혜는 아래를 만지는 단 후의 손길을 체념한 듯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은 포기할 수가 없는지 떨리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단 후의 손을 잡았다.
“네. 보고 싶어요. 손 치워 줘요. 제발요. 제발.”
목소리는 이미 울음소리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단 후는 시야를 차단당한 가혜가 제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것을 즐기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왼편으로 넘겼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뽀얀 목덜미가 먹음직스럽게 드러났다.
단 후는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정말 못 참겠다니까.
단 후는 손을 내려 좌석 아래에 있던 콘솔에서 안대를 꺼냈다. 자물쇠로 잠금장치가 있는 안대는 그가 열쇠로 열어 주지 않는 이상 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최가혜,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나올 거야. 네가 보고 싶고, 알고 싶어 했던 것들이 다 거기에 있겠지.”
“아아, 제발 부탁이에요.”
“그렇게 사정을 하니까 나도 마음이 약해지잖아.”
단 후는 가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의 커다란 손이 사라지자 가혜는 눈을 깜박였다. 그의 손이 눈동자를 눌렀던지 시야가 뿌옇게 흐리기만 했다. 가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간힘으로 창문 밖을 보았다.
그녀는 하나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제 뒤에서 단 후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단 후는 가혜의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맞지 않아 불안하게 흔들리던 초점이 돌아오자 탁했던 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맑아졌다.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단 후는 가혜의 눈 위로 단호히 안대를 씌웠다.
“어?”
당황해하는 가혜의 음성 위로 단 후의 건조한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다시 보고 싶지?”
욕정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는 낮고 으슥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