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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사육법-16화 (16/54)

16화 ? 손바닥 위 (2)

귀신에 홀렸나? 윤석은 멍하니 앞서가는 가혜를 보며 속으로 중얼댔다.

‘토끼가 당차 보인다니 진짜 귀신에 홀린 거 아닌가.’

윤석에게 가혜는 어린애처럼 울던 여자 혹은 기절을 밥 먹듯이 할 정도로 연약한 여자라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욕실에서 씻고 나온 가혜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굳건해 보였다. 눈에 총명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히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이런 타입이 또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장난이 아니지. 서이령도 그랬으니까.

자연스럽게 이령을 떠올린 윤석은 혀를 깨문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이것도 병이지. 서이령은 이제 그만.’

윤석은 표정을 가다듬고는 제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했다. 안이 보이지 않는 까만 선글라스는 세상을 순식간에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이 많네요.”

“본가라서 그렇습니다.”

주변 정리를 하는 조직원부터 밤새 일을 하다가 이제야 자러 들어오는 조직원까지 다양한 이들이 본가 안을 오가고 있었다. 토키와 회의 본가는 전통 일본식과 현대식이 어우러져 있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는가 하면 새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도 있었다.

가혜와 윤석은 그중에서도 제일 크고 웅장한 저택의 엔가와(툇마루)를 걷고 있었다. 저택을 두르듯 길게 펼쳐진 엔가와는 신발을 신고 따로 정원으로 내려서지 않아도 주변 환경을 볼 수 있었다.

가혜는 정원을 오가는 이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다 야쿠자인가요?”

“집안일을 해 주는 몇 명 빼고는 다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본가를 구경한 지 삼십 분째였다. 오백 명은 거뜬히 숙식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윤석의 설명처럼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고, 건물을 연결하는 길이 정원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나 같은 길치는 나가는 문도 못 찾고 길을 잃어버리겠네.’

가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을 쳐 보라는 단 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듯 그는 씻고 나오자마자 가혜가 입을 수 있도록 흰 원피스를 준비해 주었다. 마치 가혜의 결심을 알아차린 듯한 행동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어디를 가나요?

─본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본가요?

의문을 표하는 가혜에게 윤석은 친절히 이곳이 토키와 회이고 그들이 정확히 누구이며 본가는 얼마나 넓은 곳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곁들어서 그녀를 잡고 있는 단 후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그러니까 그 단 후라는 사람이 5대째 조장이라는 말이죠. 우리식으로 한다면 조직의 보스?

─네. 그렇습니다.

─5대째라면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 같은 느낌인데 그 사람은 한국 사람 아니에요? 이름도 단 후잖아요.

준비 동작 없이 훅 치명타를 꽂는 스타일이었다. 윤석은 잠시 당황했다. 그녀는 너무나 간단히 단 후의 공공연한 비밀이자 콤플렉스를 건드렸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윤석은 중요한 부분을 빼고 대답을 해 주었다.

─혼혈입니다. 조직의 일을 할 때나 대부분 생활에서는 일본식 이름인 토키와 류노스케라고 불리십니다.

─그런데 왜 내게는 토키와 류노스케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고 단 후라고 부르라고 했을까요?

그건, 단 후는 제가 토키와 류노스케라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죠. 이게 맞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말하면 저 커다란 눈망울에 호기심과 궁금증을 담아 묻겠지. ‘왜요?’

윤석은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남의 비밀을 떠벌리는 것도 싫었다. 이 이상 단 후와 가혜의 관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개 경호원이라고. 암, 그렇고말고.

윤석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건 가혜 씨가 한국인이니까. 부르기 쉬우라고 그러셨을 겁니다.

─아……

수긍을 했다는 탄성이 가혜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던 가혜는 정원을 구경하는 척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뒤에 서 있는 윤석을 곁눈질로 보았다.

방안에서 물었던 자신의 질문에 그는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을 해 주었지만, 병원 생활로 다져진 그녀의 눈치와 감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단 후라는 사람에게 비밀이 있어.’

그 비밀이란 게 자신이 도망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할지도 몰랐다.

‘어쩐다.’

가혜는 입술을 물어뜯는 대신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쓸었다. 주변에서 조직원들이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를 모르니 그냥 보이는 대로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눈 뜬 장남이 따로 없었다.

‘결국 그 남자의 비밀을 알아내려면 본인에게서 알아내든가, 윤석을 이용하라는 거네.’

가혜는 정원 중앙에 있는 커다란 연못으로 시선을 옮겼다. 색색의 비단잉어들이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 한가로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제가 단 후의 새로운 비단잉어가 된 것 같았다.

‘초조해하지 마. 천천히 생각해 보면 분명 길이 보일 거야.’

이 부분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가혜는 몸을 틀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곳으로 가요.”

* * *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윤석을 대신해 경호팀 팀장을 맡게 된 기욱이 의외라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게 보이나.”

“네.”

단 후는 픽 웃고 말았다. 입이 무거운 기욱까지 참지 못하고 말을 하는 걸 보니 실제로 제가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단 후는 손을 뻗어 제 입가를 확인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가혜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가슴이 술렁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각오해 왔던 일이지만 그게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은 사실 예상 밖이었다.

나를 얼마나 바꿔 놓을지 기대가 되는군.

단 후는 즐겁다는 눈빛을 하고서 손을 내렸다.

“윤석에게서 그 이후에 다른 보고는 없었나.”

“네. 본가 안을 살피다가 내부 구조를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 외에는 다른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연락해 볼까요?”

“놔둬. 이제 두 곳만 더 둘러보면 되니 다 끝나고 직접 물어보지.”

단 후는 여상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 맞춰 주위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금 단 후가 나왔던 하부 조직의 인원들이 모두 그를 배웅하기 위해 도로까지 줄을 서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장면이었다. 경호원들은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해 단 후의 앞뒤에서 눈빛을 매섭게 빛냈다.

기욱은 자신들이 타고 온 네 대의 차량에 가까워지자 경호팀의 막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단 후가 탈 차의 차 문을 열었다.

곧장 차에 오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단 후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그는 제 몸을 나른하게 늘리고 있었다.

단 후의 의도를 파악한 기욱은 은밀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십여 초 정도가 흘렀으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단 후는 인사를 하는 조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고 앞좌석에 기욱이 탔다.

“봤어?”

“네.”

하부 조직원 사이에 숨어 있었던 건 단 후의 이복형의 수하였다.

“기껏 찌르라고 가슴도 열어 줬는데 시시하게.”

“조장님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좀 더 자신의 신변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기욱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도 그럴 줄 알았는지 다른 주제를 꺼냈다.

“타이치의 세력이 흘러간 것 같으니 앞으로 주시하겠습니다.”

“그래.”

단 후는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며 창밖을 보았다.

“내 아버지 쪽 사람들은 죽고 난 뒤에도 날 귀찮게 하는군.”

무료히 지나가는 거리를 보는 그에게서 적막하고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단 후는 재킷 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기욱이 뒤를 돌아 불을 붙여 주기 전에 익숙하게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길게 빨아들이자 곧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가 내 아들이라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토키와 회의 4대째 조장, 토키와 준이치는 여성 편력이 심한 인간이었다. 하룻밤을 나눈 여자들이 지구를 한 바퀴 돌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그런 것 치고 준이치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본처에게서만 세 명의 자식을 보았다.

아마 단 후가 일본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준이치는 영원히 자신이 완벽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창문을 보며 회상에 잠겼던 단 후가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잔인한 광기가 다시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난 절대 인정 못한다. 일본인이라도 받아 줄까 말까인데 반쪽짜리 따위가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

준이치에게 갑자기 나타난 단 후는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낸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재미로 건드렸던 한국인 여자에게서 제 자식을 보다니. 극우주의에다가 혈통중심적인 준이치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토키와 회는 범죄 조직이었지만 뼈대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선조는 무사였고 영주였다. 토키와 일가는 가문이 세워질 때부터 나라를 위해 피를 묻힐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빛을 받치기 위한 어둠으로 서슴없이 움직여 스스로 암흑가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이 어떠했던, 빛은 언젠가 어둠에 먹히고 마는 법이었다. 단순히 악역을 자처하겠다는 과거와 달리 지금의 토키와 회는 정재계라는 빛을 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준이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모든 권력의 정점인 자신이!

─너 따위 것을 받아 줄 생각은 없다.

─날 인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동안 단 후 역시 아버지가 필요 없었다.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날 왜 찾아왔느냐.

준이치는 단 후의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머니를 만나 주십시오.

─누구를 만나?

─제 어머니이자 당신의 자식을 낳은 단 영이라는 여자 말입니다. 아픈 것도 미련하게 참아 온 그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당신을 보는 거랍니다.

준이치는 하룻밤 회가 동했던 거지만 단 후를 낳은 단 영은 아니었다. 한국 쪽 사업을 진행하는 준이치의 곁에서 통역 일을 맡게 된 그녀는 속절없이 준이치에게 빠져들었다. 사춘기조차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순하고 고분했던 그녀지만 단 영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세상의 기준에서 던져 버렸다.

단 영을 가진 뒤로 준이치는 몇 번이고 다시 그녀를 찾았다. 일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에게 학교와 가까운 곳의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선물로 주었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그녀에게 준이치가 준 것은 평생 받아 보지 못한 관심에다 호화로운 생활이었다.

준이치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커져 갔고 결국 그해 뱃속에 아이를 잉태했다.

─건방지게 몰래 내 씨를 품고 아무 일도 없다는 척 한국으로 도망가 지금껏 숨어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나를 만나러 와 달라?

준이치는 도코노마(방 안의 장식품을 두는 곳) 위에 두었던 칼을 빼 들었다. 잘 관리된 칼의 서슬이 파랗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준이치는 망설임 없이 상석에서 내려와 단 후에게 칼을 휘둘렀다. 손속에 사정이 없었다.

단 후가 급히 피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그날 준이치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아들의 정을 느끼지는 않더라도 혈육의 당김은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준이치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과 같은 것을 준이치도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정체를 숨기며 살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어긴 거였다.

갑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자신이 낯설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 단 영을 보러 와 달라 말을 꺼내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네 목을 베어 그년 앞에다 던져 주마. 네 머리를 가슴에 품고 오열을 하는 걸 지켜보다가 내 손으로 목을 졸라 죽여 버리겠다. 나를 농락한 죗값을 죽음으로 갚게 하겠어!

어머니, 왜 이런 남자를 일평생 사랑하신 겁니까.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그 잘난 토키와 회를 부숴 버리고 싶었던 건.

친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자부심 그 자체였던 조직을 빼앗기는 고통을!

아끼던 가족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비통함을!

‘당신에게 주겠어.’

단 후는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깊게 숨을 뱉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분노를 기억하는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게 살의든 성욕이든 자신을 진정시킬 것이 필요해졌다.

“차 돌려.”

단 후는 무감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기욱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각 차량의 경호원과 조직원들에게 무전을 넣었다.

“모두 다시 차 돌려. 이즈미 지부로 돌아간다.”

지시를 마친 기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핸들을 꺾었을 뿐인데 차 안이 혈향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서둘러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다. 절실히.

* * *

바깥쪽도 복잡하더니 집안도 왜 이리 복잡해! 가혜는 울상을 지었다.

“그 사람 나 도망 못 갈 거 알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 아니야?”

괜히 집이 큰 게 아니었다. 일본 여행 책자에 다다미가 몇 개 깔려 있는 지로 집안의 크기를 가늠한다고 자투리 글로 나와 있었다. 재미삼아 다다미 개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는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까먹어 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개수에 다시 헤아릴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가혜는 팔짱을 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아까 우리 오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죠? 나에 대해 따로 조사했어요?”

“네. 경호 대상의 기본 사항을 아는 건 경호원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제가 지독한 길치에다가 방향치라는 것도 나와 있어요?”

“지도조차 제대로 못 보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윤석의 말에 기가 찼다. 단 후가 경호원이랍시고 붙여 준 윤석이 안다면 그도 모를 리가 없었다.

가혜는 말없이 미닫이문을 열고 제일 가까운 툇마루로 나왔다. 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진정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자신에 놀란 듯 물러나는 조직원들을 보면서 보란 듯이 툇마루에 앉았다.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나 여기서 조신하게 앉아 있을 만큼 낭창낭창한 성격은 아니었다.

“양반다리로 앉아 있으면 어떡합니까?”

윤석은 조직원들이 왜 기겁을 하며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재킷을 벗어 들었다. 얼른 그의 옷으로 허벅지까지 올라간 다리 부분을 가리려는데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짚는 손이 느껴졌다.

윤석의 기감에 잡히지 않고 등 뒤로 다가올 수 있는 이는 단 후뿐이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피비린내에 윤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도 한판 거하게 했구만.

뒤를 돌아보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서 조용하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단 후가 있었다. 나른한 듯 요사스러운 분위기였다. 단 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다가 피가 묻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윤석의 손에 들린 재킷을 빼앗았다.

그리고 윤석에게 그랬던 것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고 토라진 가혜의 뒤로 다가갔다. 드러난 흰 살결을 보면서 단 후는 담요를 두르듯 재킷을 무릎 위로 덮어 주었다.

“집 구경은 재밌었어? 예쁜아.”

단 후의 목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를 그가 날렵하게 잡아챘다. 단 후는 순식간에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몸에 올라탔다.

“앞으로 내가 돌아오면 인사는 키스로 해.”

단 후는 놀라 신음을 터트리는 가혜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입술이 벌어진 찰나 그는 달려들어 제 혀를 집어넣었다. 거칠게 파고든 혀는 그녀의 입안에서 난폭하게 굴어 댔다. 그녀가 넘겨주는 것들이 여전히 부족하다 집요하게 움직였다.

“하아…… 으응…….”

혀로 혀를 비비고 타액을 하나로 섞어 버린다. 어설프게 움직이는 혀를 잡아채 제 입안으로 가져왔다. 자꾸만 도망가려는 혀를 달래고 얼러 제 입안을 맛보게 했다.

“으, 응…….”

“제대로 내 타액을 삼켜 줘. 오늘은 억지로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

단 후는 인상을 쓰는 가혜의 이마를 엄지로 문지르면서 그녀의 신음까지 즐거이 받아 제 안으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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