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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사육법-15화 (15/54)

15화 ? 손바닥 위 (1)

그럴 상황도 안 되고 주제도 안 되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몇 번이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가혜는 허락처럼 제 배를 토닥이는 단 후의 손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피곤해.’

일본에 도착하고 난 뒤 지금까지 쌓여 있던 피로가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았다. 가혜는 나약한 정신력에 쓴웃음을 보내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깊고 무거운 수마가 그녀를 어둠으로 끌어당겼다.

단 후는 잠이 든 가혜를 내려다보았다. 경계를 거두고 제게 안긴 그녀는 그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단 후는 새근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하필 너일까. 제 손안에서 넉넉히 남아도는 가혜의 손목을 잡고는 엄지로 그녀의 손바닥을 살살 쓸었다. 해답은 이번에도 찾을 수 없었다.

“상관없겠지. 넌 이미 내 손 안에 있으니까.”

가혜의 하얀 손목을 한참이나 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손목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입매가 올라갔다. 그답지 않은 다정한 미소였지만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듣기 좋은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 그의 본심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났다.

“난 네가 가능한 한 많이 도망쳐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좀 더 네 안에 쌀 수 있겠지.

단 후는 뒷말을 삼키고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야릇하면서도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금욕적인 모습이었다. 상반된 느낌이 공존하는 표정에 주변의 공기가 바짝 조여들고 비틀렸다.

사뭇 기대된다는 듯 그의 눈이 또다시 웃었다. 혀를 내밀어 맥박이 뛰는 가혜의 손목을 할짝인 단 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뇌가 마비될 정도로 혀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좋았다.

“어서 날 유혹해 줬으면 좋겠군.”

말을 마친 그가 맥박 위로 제 입술을 깊게 눌렀다.

* * *

“일어나셨습니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윤석의 목소리에 가혜는 누운 채로 눈을 깜박였다. 마주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보면서 가혜는 기억을 더듬었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뜬 순간 연기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뭔가 심각한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가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걸 잊어버린 느낌이란 말이야.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가혜는 다시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보리색의 천장이었고 머릿속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음…….”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일 듯 말듯, 떠오를 듯 말듯 그녀를 약 올리고 있었다. 가혜는 최대한 생각나는 것들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말을 하다 보면 자신이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연상될 것 같았다.

“뭐지? 뭘까?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지?”

답답했던지 가혜의 미간이 주름이 잡혔다. 답답해! 누가 내 머릿속의 안개를 좀 걷어 내 줬으면 좋겠어. 잠깐, 안개? 가혜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멈춘 채 실마리가 될 단어에 집중했다. 분명 안개 비슷한 상황에 내가 있었는데.

“내 인생을 모조리 저당 잡힌 것 같은…… 헉!”

잠결에 무심코 넘긴 천장이 익숙하다고 느꼈던 건 이곳이 순간 호텔로 착각해서였다. 가혜는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꿈속의 안개는 욕조에서 올라오던 수증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로…… 내가……”

“정말로 우리 잘나신 조장님에게 인생을 저당 잡혔다고 봅니다. 표현을 잘하시네요.”

윤석은 가혜의 혼잣말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첫 만남과 비슷하게 그녀의 얼굴 위로 생수병을 내밀었다.

“목마르지 않으십니까?”

가혜는 그제야 윤석을 발견했다.

“싫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제게 내민 윤석의 손에 닿을까 가혜는 침대 끝에 매달렸다.

“또 같은 패턴이군요.”

난리 통에 또다시 윤석의 손에 들린 생수병이 공중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도로록 제 몸을 굴려 서랍 아래 공간으로 숨어 버린 생수병을 끝까지 응시한 윤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난번과 달라진 점은 이성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 윤석은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을 마주했다.

자, 눈앞의 생물은 토끼다. 토끼, 작고 하얀 토끼.

동물 중에서도 작고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윤석은 가혜를 겁 많고 경계심 많은 토끼라고 여기기로 했다. 사람으로 봤다가 서이령이 겹쳐 떠오르면 또다시 그의 발작이 시작될 테고 그럼 정말로 단 후에게 목을 내놓아야 할지 몰랐다.

윤석은 해치지 않는다는 표시로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 웃어 보이기도 했다.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일은 앞으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가혜는 자신을 보고 웃는 윤석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귀찮음을 의무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가렸던 첫 만남과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 있어?

영 믿지 못하는 가혜의 시선에 윤석은 하하, 짤막한 웃음까지 입에서 흘려 보냈다. 로봇의 입에서 나오는 기계음 같았다. 무섭게 생긴 얼굴을 억지로 편 듯한 표정과 스스로도 어색해서 미치겠다는 웃음소리는 한편의 코미디였다.

“아, 그, 풉.”

참으려고 했는데.

가혜는 얼른 웃음이 튀어나오려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웃을 상황은 아닌데 심각한 제 환경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반응이라 그 갭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된다는 명제 아래서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 기묘한 느낌에 폐가 간질간질했다.

왜 웃으면 안 되는 때에 배가 아프도록 웃고 싶은 걸까. 사람은 모순적인 부분에 약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낭패였다.

가혜는 윤석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진정시켰다. 그녀의 시선이 서랍 아래로 향했다.

“저…… 제가 많이 놀라서…… 또 생수병을……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윤석은 가혜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지나가고 있을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도했다는 듯 깊이 숨을 내쉬는 가혜를 보면서 윤석은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는 갑자기 웃은 가혜의 얼굴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녀가 손으로 입을 재빨리 가리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오래 보고 싶어? 뭘?’

윤석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털어 내듯 머리를 작게 흔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물은 어떻게 할까요?”

“주세요.”

“네.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가혜의 대답에 뒤돌아선 윤석은 냉장고에서 새로운 생수병을 꺼냈다. 내친김에 옆에 놓인 물잔까지 집어 든 그는 병을 따서 컵에 물을 따르고 나서야 가혜에게 내밀었다.

“컵으로 마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손에 들린 컵을 입가에 간 가혜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는 동안 목이 탔던지 윤석이 컵에 부어 준 물은 그녀가 두세 번 넘기자 바닥을 드러냈다.

“더 드릴까요?”

“조금만요.”

가혜는 윤석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부어 준 물까지 시원하게 마신 그녀가 잔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윤석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가혜의 손보다 두 마디쯤 더 큰 듯한 손이 컵을 건네받았다.

가혜는 컵을 가져가는 윤석의 손을 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속말을 밖으로 꺼냈다.

“우리 오빠 손도 컸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군복무 중이라고.”

흘러가듯 컵을 치우면서 대답하자 가혜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또 말로 했었나요? 속으로만 생각한 줄 알았어요.”

“괜찮습니다. 조장님에 대한 욕만 조심하세요. 어차피 이곳에서 가혜 씨의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겐지나 저, 그리고 단 후의 경호원들 정도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 하십시오.”

윤석의 깔끔하게 대답했지만 가혜는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고 맞았어요.”

“누가, 아! 조장님이 일본어를 쓰실 때만 일본어를 쓰시면 됩니다. 조장님이 사용하는 언어에 맞춰 말을 해야 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혜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듯한 윤석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남자였다. 거칠고 무섭게 자신에게 윽박지르던 이였는데 고작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준 것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계를 해야 하는데…… 일순간이지만 이 사람에게 의지를 하고 동질감을 느꼈어.’

타인에 대한 벽이 쉽게 무너지는 건 좋은 게 아니었다. 이건 사소한 말에도 감동을 받을 정도로 내가 약해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가혜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위기감을 무시했다. 다시 벽을 쌓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평범하게 대답을 해 준 건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성함이 윤석이라고 하셨죠?”

“민윤석입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십시오.”

“저보다 나이가 많지 않으세요? 저는 스물하나인데요.”

“압니다.”

“그런데도 말을 놓으라고요?”

“전 가혜 씨의 경호원입니다. 나이가 어쨌든 전 아랫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이 차이 얼마 나지도 않습니다.”

윤석의 말에 가혜는 집중을 하듯 눈 주변의 근육을 당겼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 봤자 자신이 직접 만난 이는 단 후와 겐지, 그리고 윤석이 전부였지만.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장신에다가 길쭉하게 뻗은 다리, 그리고 작은 얼굴에 조각을 한듯 깎아 들어간 눈코입까지. 여자들이 줄줄 따랐을 것 같은 외형적 조건이었다.

‘단 후라는 남자와 눈매나 다른 생긴 것이 닮은 것 같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긴 한데.’

두 사람이 외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가혜는 윤석을 볼 때마다 자꾸만 함께 떠오르는 단 후의 얼굴에 눈을 찡그렸다.

‘둘 다 커다랗고 사람을 내리누르는 기운이 있어서 그런가?’

호랑이나 사자가 생김새는 달라도 맹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단 후와 윤석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타고나길 지배하고 강한 이들. 제 인생에 이런 위험한 사람들과 엮이게 되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 아뇨. 그냥 나이를 짐작해 보려고 봤어요.”

윤석은 자신에 대한 가혜의 관심이 반갑다는 듯 살갑게 반응했다. 경호할 거면 경호 대상의 협조를 얻는 것이 좋았다. 윤석은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몇 살로 보이 십니까?”

“이십 대는 아니시……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가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범위를 좀 더 줄여 보시죠.”

윤석은 은근히 가혜의 반응을 즐기면서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가혜로서는 가시방석이었다. 윤석은 티 없이 좋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보기 좋은 얼굴 또한 그다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도저히 이십 대의 것이 아니었다.

윤석은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가혜를 향해 짧은 미소를 보냈다.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틀리시더라도 화내지 않겠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요. 다만 제 나이보다 위아래로 3살 이상 차이가 나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부탁이요?”

“어려운 것은 아니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충분히 가혜 씨가 들어주실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럼, 어서 정하십시오. 제가 몇 살로 보이십니까?”

재촉의 뜻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가혜는 결국 입을 열었다.

“스물여덟이요.”

눈앞의 남자가 스물여덟이라니. 가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양심이란 게 따끔거리고 있었다.

‘분명 스스로도 절대 이십 대가 아니라고 확신을 했건만.’

하지만 외모와 관련해서, 나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게 이 남자라고 해도 어쨌든 젊어 보인다는 건 칭찬이니까. 가혜는 오차 범위 내에서 제일 어린 나이를 택했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역시나 가혜의 예상대로 윤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잔인한 짓을 하는 이들도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구나. 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이나 어려져서 기분이 좋긴 한데 아쉽게도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가혜 씨.”

윤석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있었다.

가혜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예측에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서른둘이란 말이었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부디 이상한 것만 아니었으면…… 걱정 가득한 가혜의 얼굴을 보던 윤석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가혜 씨에게 실수했던 것 잊어 주십시오.”

“네?”

윤석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부탁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쁜 감정은 털어 내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때리셔도 됩니다.”

머리에 땅에 닿을 정도로 사과를 하는 모습에 가혜는 순간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제멋대로 굴었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한 상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거짓말처럼 가혜는 얼굴을 굳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윤석을 보았다. 왜 사과를 할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나는.

가혜의 눈에 시린 빛이 돌았다.

나는 그래 봤자.

“저는 이곳에서 성욕 처리를 위해 있는 거잖아요.”

이런 위치인데.

가혜의 음성에 냉랭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맺혔다.

윤석도 달라진 가혜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을 거부하는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가혜를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의지를 반한 상황이었다. 어설픈 위로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상처가 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닌 조장님과 가혜 씨의 관계입니다. 단 후가 가혜 씨를 어떻게 대하든 내가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단 후가 가혜에게 집착하는 동안에,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성욕 처리를 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 행위를 섹스라고 부르든지 혹은 그 밖의 다른 말로 부른다고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이 일을 감당하는 그녀가 성욕 처리라고 말한다면 그런 거였다.

“그럴 주제가 아닌데 날 넘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되는군요.”

윤석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적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를 보았다.

“이게…… 풉, 이게…… 하하하.”

당당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가혜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속이 시원하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주제넘어서 미안하다니, 뭐 이딴 사과가 다 있어.

“하하하.”

웃느라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렸다. 가혜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윤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게 이곳의 방식이란 거죠?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네요. 내 처지에 대한 동정도 아니라서 마음에 들고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이렇게 웃고 나자 겨우 한 발을 내디딜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윤석과 잡았던 손을 거둔 가혜는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우린 오늘 처음 만났어요. 민윤석 씨.”

가혜는 입꼬리를 올리고 윤석을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씻고, 단 후를 찾자. 그에게 안긴 다음 도망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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