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덫 (3)
단 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나만 더요.”
제법 넘어온 듯한 가혜의 행동에 단 후는 마음이 몹시 너그러워졌다. 동시에 그녀가 또 무엇을 요구할지 흥미가 돋았다.
단 후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말해.”
가혜는 단 후를 내려다보며 그를 꼼꼼하게 살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냉철한 남자가 어딘지 모르게 배부른 맹수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여전히 공간을 꽉 채우는 존재감과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동안 겪어 왔던 것보다는 많이 유해진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내 조건을 들어줄 수도…….’
가혜는 자신에게 닿는 단 후의 시선을 흘리며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과연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일까. 조마조마 떨리는 가슴을 안고 입술을 뗐다.
“……주 ……주인님이라고 꼭 불러야 하나요.”
이대로 계속 그를 ‘주인님’이란 호칭으로 불렀다간 인간성을 상실해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그를 ‘주인님’이라 부르면 제 존재가 무가치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관계를 가질 때 그에게 ‘주인님’이라 부르면 정말 이 행위를 위한 도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주인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장난감이 되고 싶지 않아.
‘최가혜, 나는 최가혜라는 사람이야. 장난감이 아니라.’
가혜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에 반감이 있을 때, 이 호칭을 정정해야 했다.
‘더는 익숙해지면 안 돼.’
그 순간 낮은 저음이 욕실을 울렸다.
“싫어?”
물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에 습기가 차서 차가운 타일에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벽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처럼 그의 목소리가 제 몸을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 습하고, 서늘하며, 자극적이었다.
“고개 들고 날 봐.”
그의 명령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가혜의 눈과 단 후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눈빛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려다가 멈칫거렸다.
‘봤을까?’
당황한 눈빛으로 가혜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떡하지?’
가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큭.”
단 후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가혜의 행동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가혜의 반응을 더 지켜보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물론 네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가혜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그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다가올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라는 신체 차이에 앞서 그는 다른 남자들과도 체격 조건이 달랐다. 그 거대하고 탄탄한 몸은 인간에서 진화된 다른 종을 보는 것 같았다.
벌어진 붉은 입술 아래로 송곳니가 살짝 보였다. 가지런한 치열 속에서도 돋보이는 송곳니는 맹수들의 그것처럼 그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또 맞게 되는 걸까.’
가혜는 제 실수가 뼈아팠다. 그에게는 책잡힐 여지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단 후는 자신을 살피는 가혜의 시선을 즐겼다.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데굴데굴 구르는 갈색 눈동자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단 후는 기다란 팔을 움직여 욕조에 걸쳤다.
갑자기 물이 출렁대자 가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가 일어서서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았다. 제 손보다 두 마디 이상 큰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쳤던 기억은 이미 공포로 본능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가혜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잘, 잘못했어요.”
입술을 깨무는 건 남자가 싫어했다. 잘못을 빌었지만 가혜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귀에다 대고 북을 치는 것처럼 심장 소리가 둥둥대며 울렸다.
가혜는 조심스럽게 단 후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말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욕실에 내려앉은 침묵이 거북했다.
“알아서 잘하네. 교육이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야. 최가혜.”
픽, 웃음소리가 단 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깨물지는 않았으니 봐주지.”
그의 말투는 중세 시대에 왕족이 노예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들렸다. 제 명령을 잘 지킨 개에게 하는 주인의 너그러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혜는 미간을 찡그렸다. 입술을 깨물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내내 듣고 자랐음에도 고치지 못했던 습관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습관을…… 그는 며칠 만에 고쳐 버렸다.
오한이 듯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주인님’이라는 호칭에 왜 그렇게 거북함이 치밀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두려움이 삽시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계속 그를 주인님이라 불렀다간 정말 익숙해져 버릴 거야. 그러면 결국에는 이 사람에게 의존해 버리겠지.’
개 목걸이를 하고 개처럼 주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재롱을 떨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이라는 여자.’
가혜는 단 후의 명령에 황홀한 듯 표정을 짓던 제이를 떠올렸다. 제이가 하고 있던 옷차림과 피어싱, 애널에 꽂혀 있던 꼬리가 어느새 제 몸에도 있었다. 음란한 몸짓으로 단 후의 명령을 따르는 미래가 그려졌다. 가혜의 턱 끝이 떨렸다.
‘실제로 그가 내 실수를 용서한 건, 날 자신의 개라고 여기고 있어서야. 그에게 난 이미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개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훈련이 필요했다.
단 후에게 가혜의 나쁜 습관을 고치는 건 일종의 훈련이었다. 그래서 명령을 완전히 어기지만 않으면, 개의 자잘한 실수쯤은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개는 말귀를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거니까.
가혜는 단 후의 말과 행동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차렸다.
훈련한 성과가 바로 나타나는 똑똑한 개는 아니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로 엉망이지는 않은 정도.
“헉.”
작게 숨을 들이켠 가혜는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간신히 딛고 섰다. 세상이 빙글 돌기 시작했다.
“허락해 주세요. 다른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제발, 제발 부탁해요.”
이 어그러지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순응하기 전에 어서, 달아나 야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있을 때 바꿔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가혜의 머릿속에 경각심이 심어지는 동안, 단 후는 그녀를 어떻게 다룰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혜의 나신을 눈으로 훑으며 그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글쎄.”
“제발요.”
“내가 허락해 주면 넌 내게 무엇을 해 줄래? 따지고 보면 난 네게 많이 후한 편이야. 네 말이면 뭐든 들어주잖아. 핥고 빨겠다고 해서 네 입에 내 걸 물려 줬지."
무릎을 꿇고 제 다리 사이에 앉아 페니스를 빨아 대던 가혜가 떠오르는지 단 후는 손을 내려 물속에 있는 제 물건을 쓰다듬었다. 이미 잔뜩 성이 나있는 페니스는 물속에서도 흉흉한 위용을 자랑했다.
"몇 번이고, 네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단 후는 제 것을 보는 가혜의 시선을 즐기며 수음을 멈추지 않았다. 기다란 손이 기둥을 단번에 훑어 내리거나 한 번에 감싸 쥐고 흔들었다. 두 손으로 겨우 페니스를 잡던 가혜의 작은 손놀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혜를 보면서 단 후는 무심히 물었다. 스스로 쾌락을 쫓고 있으면서도 두 눈과 목소리는 변함없이 싸늘했다.
“묻잖아, 최가혜.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어서 내 마음에 들 만한 대답을 꺼내 봐. 그렇게 먹고 싶다는 표정 짓지 말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의 지적에 가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단 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확실해?”
“네. 정말 아니에요.”
단 후는 귀까지 빨개진 가혜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고요하게 빛났다.
제 눈앞에 있는 여자는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 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천천히 제게 물들게 될 것이다. 제게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더욱 가라앉겠지.
“후…….”
자신에게 완벽히 얽매인 그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사정감이 치밀었다. 단 후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서 나락으로 떨어져. 최가혜. 단 후는 가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거칠고 빠르게 제 것을 흔들었다. 팔이 수면에 부딪힐 때마다 찰박찰박 요란스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최가혜.”
“네?”
동그란 눈을 하고서 자신을 보는 시선에 파정을 할 것 같았다. 또다시 절정을 참으며 단 후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 곧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텐데 호칭 정도야 물러나 줄 수 있었다. 단 후는 제 것에서 손을 뗐다.
“내가 명령할 때만 그렇게 불러.”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자신이 물러나 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라는 듯 줄을 그었다. 단 후는 급격히 실망한 표정의 가혜를 보며 당근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이 정도면 그녀도 충분히 수용하리라.
“단 후라고 불러. 내 이름이다.”
가혜가 요구하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알려 주자마자 저 작은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듣고 싶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물을 휘저었다. 잔잔했던 물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갇혀 있던 물이 움직이자 가혜의 다리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물길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물러나야 하나.’
부드러운 물살은 타협하라고 그녀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 후의 흔쾌한 허락에도 못내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명령으로도 그 호칭은 싫어……요.”
“최가혜.”
그녀의 말에 단 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달라졌다. 그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가자 그들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냉랭해졌다.
“기어오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서늘한 그의 음성에 가혜는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평소에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싶어?”
“아, 아니요.”
가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이란 호칭 대신 이름을 알려 준 것이 그에게는 큰 양보일지도 몰랐다. 가혜는 그것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건방지게 굴지 않을게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가혜의 얼굴을 보며 단 후는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그가 느른히 명령했다.
“불러 봐.”
“네?”
“내 이름, 불러 봐. 최가혜.”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까먹었어?”
단 후의 질문에 가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불러 봐. 어서.”
“단…… 후.”
시키는 대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데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단 후라는 이름만 불러도 되나. 또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아닐지……. 가혜는 긴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한 번 더.”
“단…… 후……?”
“크게.”
“단…… 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 후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훌륭한 노래를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번 더.”
“단 후…… 씨……? 단 후 님?”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해서 떨어 대나 싶었는데 귀엽게도 제 이름만 부르는 게 힘들었던 거였다. 가혜가 자신을 불렀던 두 가지 호칭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고민을 하던 찰나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가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정신이 들었다.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조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장에라도 남자가 안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가혜는 눈을 뜬 단 후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놀란 토끼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가혜를 향해 단 후가 입을 열었다.
“타임오버인데. 최가혜.”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파충류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결정을 내렸나.
“조장님.”
노크 소리와 그를 부르는 소리가 가혜의 심장을 힘껏 두드렸다.
“내 부하가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와도 이 제안은 끝이야.”
가혜의 두 눈이 흔들렸지만 단 후는 알아서 하라는 듯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서서히 열리는 문과 단 후를 번갈아 바라본 가혜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알았어요! 받아들일게요.”
“잘 생각했어.”
단 후의 눈꼬리가 휘어진다고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팔이 가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앗!”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가혜는 간단히 그의 품에 떨어졌다. 앉자마자 놀라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몸을 단 후가 힘주어 안았다. 단단한 가슴이 그녀의 등 뒤로 닿자 자연스럽게 그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넌 살을 좀 찌워야겠어. 난 살집이 있는 편이 좋아. 섹스할 때 잡히는 맛이 다르거든.”
단 후는 오목하게 들어간 가혜의 허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문 쪽을 등지고 앉았다. 체구가 작은 가혜는 단 후에게 가려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장님, 술은 어디에 둘까요.”
“줘.”
단 후는 가혜가 보이지 않도록 몸은 틀지 않고 뒤쪽으로 손만 내밀었다. 부하는 그가 잡기 쉽도록 잔을 건네주고는 술병을 욕조 옆 테이블에 두고서 물러났다.
“이제 놔주세요.”
문이 닫히자마자 가혜는 단 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면서도 그녀를 희롱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은 이미 그녀의 젖가슴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대답을 했으니 이제 전 나갈게요. 너무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아요.”
“여기서 할래?”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단 후는 가혜의 정수리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유두를 꼬집었다.
“아, 앗!”
“네 엉덩이 쪽에서 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 자위 후라 페니스가 제법 민감해졌는데 네가 이렇게 움직이면 자극을 받잖아. 사정을 안 해서 욕구불만 상태기도 한데, 할래?”
가혜는 그제야 제 엉덩이를 찌르는 단 후의 페니스를 느꼈다. 뜨겁고 단단한 기둥이 금방이라도 아래를 파고들 것 같았다.
“여기서 하면 너도 재밌을걸. 네가 느끼는 모습을 거울로 보여 주지. 쾌락에 빠진 네 모습을 보면 너도 엄청 흥분할 거다. 사방으로 네 신음 소리가 울려서 자극적일 테고.”
단 후는 가슴을 만지던 손을 내려 검은 숲을 가르고 가혜의 음부를 만졌다. 긴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건드는 순간 가혜는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하읏, 아니요. 안…… 할래요. 그만 만져요.”
“내가 원하면 하기로 했잖아.”
단 후는 가혜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는 입술로 뽀얀 목덜미를 지분댔다. 그는 가혜의 살을 입안으로 빨아들인 후 붉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녀가 아닌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 여자가 누구의 소유인지.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요. 아시잖아요. 저 조금 전까지 링거까지 맞고 있었어요.”
도망갈 핑계를 잘도 찾아냈다. 가혜의 아래를 만지던 손을 빼낸 그는 별 수 없다는 얼굴로 술잔을 넘겼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그녀의 건강이었으니.
단 후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가혜의 사각지대에 의지해 입꼬리를 올렸다.
이처럼 얌전히 제게 기대 온다면 자신은 몇 번이고 그녀가 쓰러질 만큼 몰아붙일 것이다. 단 후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 정신 상태가 정상은 아니야.’
단 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달달한 살내음은 변덕이 심한 바다처럼 그를 한계치까지 자극하다가도 이내 잠잠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봐주지. 네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는 가혜의 행동에 단 후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떠올렸다.
‘죽이는 건 쉬워.’
목덜미와 귓바퀴 뒤로 넘긴 잔머리를 응시하던 단 후의 눈빛이 짙어졌다.
‘내가 어려워하는 건, 살려 두는 거다. 이런 계획과 수고를 하는 이유는 널 살려 두기 위함이야. 그러니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살아 내. 평생.’
가혜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든 단 후는 그답지 않은 감상을 욱여넣듯 들고 있던 술을 단번에 목 뒤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