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baby (19/19)

외전 3. baby

겨울과 여름 사이, 잠깐 머무르는 봄은 마치 입안에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드는 사탕처럼 빠르게 흘러갔고, 그나마 쌀쌀함이 남아 있던 밤에도 서서히 더위가 스며들어 갔다. 더 이상 외투를 입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무더워진 이 계절은, 귀족들이 여름휴가를 위해 바닷가 근처 휴양지의 별장을 찾는 시기이기도 했다.

제국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플뢰르 령이 한해 중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플뢰르 령의 수장인 이리언은 어쩔 수 없이 예르넨의 곁을 떠나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떠나는 이가 있다면 되돌아오는 이도 있는 법이었다. 그랬기에 야외에 준비된 티 테이블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유리스였다.

“어떠신가요? 시원하지 않으세요?”

마법진의 문양을 따라 작은 마석들이 촘촘하게 배열이 되어 있는 유리구슬을 내미는 유리스는 잔뜩 신이 난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예르넨은 그런 그녀가 내미는 유리구슬을 이리저리 살폈다. 차분한 겉모습과는 달리 유리스는 마법과 발명에 제대로 미쳐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종종 특이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는 했고 이번에 가져온 것 역시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테핀을 통해 바람과 물의 기운이 깃든 마석을 주기적으로, 잔뜩 받아 간 유리스는 그 마석을 이용해 한 여름의 야외에서도 일정 반경 안을 차갑게 만드는 마도구를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 예르넨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이었다.

확실히 주변은 덥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풀 내음을 비롯한 자연의 향기는 그대로 물씬 풍겨 오니, 무척이나 쾌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시원하군.”

“그뿐이 아니에요, 폐하. 이 마도구는 주변을 시원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모기나 날파리들이 주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답니다?”

“이야, 이거… 떼돈 벌겠는데?”

흐뭇한 유리스의 목소리에 저스틴은 눈을 번뜩이며 예르넨으로부터 마도구를 받아 들고는 위아래로 들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유리스, 기나긴 세월 동안 내가 너한테 고혈을 쪽쪽 빨리듯이 힘을 쥐어짜 마석을 상납했다는 사실… 잊지 않고 있지? 무슨 소리냐면… 이 마도구에 내 지분도 어느 정도는 있다는 소리야.”

그러나 저스틴의 흑심이 가득한 말에도 유리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으음… 그쪽은 나 말고 슈이탄이 전담하고 있잖아? 그러니 슈이탄한테 한번 이야기해 봐.”

그 말을 들은 저스틴의 표정은 짜게 식었다.

슈이탄은 유리스보다 무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약혼자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업수완을 발휘해 유리스가 만들기만 하고 쌓아 두었던 수많은 발명품을 획기적으로 상품화시켜 카멜리언 자작가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수전노 애늙은이이기도 했다.

물론, 돈을 그저 모으기만 하는 수전노는 아니었다. 그저 그가 앞으로 몸담을 카멜리언 가문의 영달을 위해 돈을 박박 긁어모을 뿐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녀석이 유리스와 달리 무척이나 까다로운 놈이라는 점이었다.

“됐어. 그놈한테 말해 봤자 머리만 아프지. 그럼 그냥 이 마도구가 잘 팔리면 나한테 수도 저택 하나만 사 줘….”

저스틴은 아련한 눈을 하며 유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울컥했는지 예르넨을 보며 불만 어린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지 말입니다, 폐하. 신혈의 기사라는 건 정말 허울밖에 없습니다, 허울밖에!”

“흐음?”

예르넨은 어디 한번 지껄여 보라는 눈으로 저스틴을 바라봤다.

“어릴 적에 스승님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신혈의 기사가 무보수 명예직 수준이어서 내 집 마련 같은 건 꿈도 못 꾼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말한 저스틴은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한명 한명 쏘아보며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세상…! 솔직히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랍시고 이름은 있는데 보수는 형편없지 않습니까! 물론…! 적다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이 수도에 저택으로 시작하는 내 집 마련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에요…! 전 정말 몰랐습니다…! 다른 녀석들이 부유하기에 신혈의 기사직 보수가 많은 줄 알았는데… 그냥 부자 귀족이 기사직을 받아서 부자인 거였어요! 이 돈이면 다인 쓰레기 같은 세상!”

“봉급이 그리 적다고 하지는 못할 텐데.”

하지만 그런 저스틴의 말에 반박을 하고 나선 건… 의외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만 홀짝이던 덴버였다.

“그보다는 그냥 네 씀씀이가 큰 거 아닌가.”

“…!”

조용히 말한 덴버는 다시 차를 홀짝였지만, 저스틴은 이미 크나큰 배신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저스틴을 본 예르넨은 피식하며 미소를 흘렸다. 예르넨 역시 덴버의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부유한 가문에 대대로 신혈의 기사단 직이 내려온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단의 보수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저스틴이 바라는 대로 수도의 저택을 사고 사용인을 부릴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이 여전히 저택이 없는 것은 그가 제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적지 않은 돈을 쓰고 다니는 탓도 있었지만… 그가 여전히 나고 자라온 빈민가를 잊지 못하고 그곳에 있는 많은 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그런 저스틴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저택을 하나 마련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다만 저스틴의 입장까지 챙길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기에 그러지 못했을 뿐이지. 저리도 서러워하니 저택을 하나 내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여유로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던 예르넨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배를 부여잡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윽….”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얌전히 손 싸개를 바느질하고 있던 에런은 마치 예르넨이 피를 토한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굳은 얼굴을 했다.

“괜찮다.”

물론… 예르넨의 상태가 결코 그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태동일 뿐이었다. 조금, 심한.

예르넨은 배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옷깃 아래에 배가 툭툭 하고 튀어나왔다.

출산 예정일은 어느덧 4주 앞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배는 최근,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커져 갔고 이제는 몸을 굽히는 것도, 발을 보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리아나는 같은 개월의 다른 태아보다 성장세가 지나치게 빠르다며 주의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은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팔다리를 보고는 차마 식이 조절을 하라고는 하지 못하고 당분만 줄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성장세가 빠른 것과 태아의 활동성이 비례하는지 배 속 아이는 지금처럼 이렇게 배를 찢고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아이가 배 속에서 장기 여기저기에 거칠게 발길질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종종 윗배에서부터 싸한 느낌이 느껴지며 배에 온통 통증이 퍼지기도 했고, 그 때문에 혈액순환이 안 돼서 그러는지 다리가 자주 부어올랐다.

아침저녁으로 라일이 팔다리를 마사지해 주고는 있었지만, 매 순간 함께하며 마사지를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렇게 라일이 자리를 비우는 낮 시간대면 기사들이 대신 마사지를 해 주곤 했다.

지금은 테네스가 마사지를 해 주고 있었다. 마사지를 하던 테네스는 걱정이 어린 눈으로 배를 바라보다 다시 마사지를 이어 갔다.

“의원을, 아니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에런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당장이라도 신관을 찾아 뛰어나가려는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런 에런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얌전해졌으니 정말 괜찮다. 하던 거나 마저 하도록.”

그 말에 에런은 여전히 죽어라 걱정이 된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충실하게 예르넨의 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에런은 신중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제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시선을 돌리고 당장에라도 마수를 반으로 갈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커다랗고 우락부락한 손으로 섬세하게 바늘을 놀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몇 번 더 바늘을 놀리고 쪽 가위로 실을 끊어 낸 에런은 자그마한 매듭을 지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건, 갓난아기의 손에 딱 맞을 법한 사이즈의 앙증맞은 손 싸개였다.

처음 바느질을 시작했을 때는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실력이었지만, 불철주야로 바느질을 한 끝에 에런의 손 싸개를 만드는 실력은 몇 달 만에 가히 수도 의상실의 마담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형상이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에런은 얼굴에 미미한 뿌듯함을 담은 채로 이번에는 한구석에 소담히 놓여 있는 그의 손가락 굵기의 반절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얇고 가느다란 프릴을 쥐고는 손 싸개의 주변에 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정말이지 세심하고 정성스러웠다.

그 광경을 보며 예르넨은 어쩐지, 무척이나 평온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사실은 최근 내내 이런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봄에는 황실 차원에서 주관해야 할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지만, 이맘때 즈음에는 귀족들이 모두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 수도가 한산해졌고, 그만큼 황후로서 해야 할 일 역시 줄어드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초여름이 다가올 무렵부터 예르넨은 주변의 권유 아래 공무를 잠시 내려놓은 채로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라일과 밤을 보낸 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 황후궁을 제 집무실처럼 사용하며 눌러앉아 있는 라일을 본궁으로 쫓아내고는 기사들과 티타임을 가지기도 했으며,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살펴보고 예술품들을 대량으로 사 모으기도 했다.

또 안부를 주고받는 귀족들을 황후궁으로 불러다가 그들의 자식이 연주하는 서툰 악기 연주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에서 몰려오는 선물들을 살핀 뒤 그에 대한 답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귀족들이 보내온 선물들과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 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사용할 물건들을 고르고, 교황청을 찾아 루디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고 배는 점점 불러와 최근에는 몸을 운신하기조차도 힘들어졌다.

그 기색을 살핀 라일은 옳다구나 하며 은근슬쩍 예르넨의 행동반경을 좁혔기에 예르넨은 최근, 황후궁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황후궁에서만 지낸다고 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배가 지나치게 불러와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지난 세월, 다사다난했던 시간을 보내왔기에 평화롭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매일같이 황후궁에서만 지내다 보면 지루하기 마련이었다.

“무료해.”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는 주군의 얼굴은 무척이나 힘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딘가 아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늘 주군의 기색을 살피는 그는 알 수 있었다.

바늘을 쥐고 있는 에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무척이나 중대한 일이었다.

에런은 일전에 그의 주군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도, 몸이 좋지 못했을 때도 도움이 되지 못했었다. 아니,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었다. 그저 머저리처럼 멀뚱멀뚱 서 있었을 뿐.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주군이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무력하게 지내 온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지독히 반성했다. 그리고 낮에는 주군을 보필하고 밤에는 임신과 임산부의 건강과 관련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현재 에런은 임산부의 건강에 대해 무척이나 출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과잉 진료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에런의 귀에 예르넨의 무료하다는 말은, 무척이나 크게 울려 퍼졌다.

저 말이 혹시, 이전의 다른 증상들처럼 알게 모르게 발현되기 시작한 증상이 아닐까. 깊은 마음의 병이 드신 폐하께서 본디 심계를 드러내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넌지시 내뱉으신 작은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에런의 머릿속에는 금방 예르넨이 산전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다 끝내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끔찍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 끝을 생각하던 그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늘을 들이켜는 것만 같이 고통스러워졌다. 결코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됐다.

‘이렇게 다시 폐하를 잃을 수는 없다…!’

굳은 표정을 지은 그는 예르넨의 생활 반경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예르넨이 처해 있는 상황이 확실히, 그 지독하다는 산전 우울증에 걸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주군은 힘겨운 과거의 기억들이 아직 잊히기도 전에 다시금 큰일을 겪었다. 그 피부를 한 겹, 한 겹 벗겨다가 북부의 마물 소굴에 던져 넣어도 모자랄 이든 페트라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몸에 큰 변화를 겪었다. 남자 오메가가 임신을 하게 될 경우 여성보다도 몸의 변화가 크게 나타나니 말이다.

그런데다가 이후 자주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고 그에 따라 운신의 폭이 좁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이가 너무 빠르게 큰다고 달콤한 것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식이 제한까지 받지 않았는가.

그는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주군은 달랐다. 전통적인 중부 태생의 귀족들은 달콤한 음식들을 좋아했고 매일 티타임을 가지며 달콤한 티와 디저트를 먹는 것을 숨 쉬듯이 했다. 마찬가지로 중부 태생인 그의 주군 역시 그랬다.

그랬기에 그리도 고통을 받는 지난 생애의 끝 무렵에도 달콤한 차를 마시는 순간은 주군의 고단하던 삶에 작은 깃털 같은 안식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내려놓아야 한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지금, 미래의 아기 전하를 위해 손 싸개나 만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물론 이 역시 무척이나 중요하고 숭고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군이었다.

에런은, 마치 희대의 비극 속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고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주군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고뇌를. 그리고 치열한 고민 끝에 그는 결국 생각해 내었다. 주군의 마음에 깃든 몹쓸 병을 몰아낼 방책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태교 여행이었다.

그의 주군이 문화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그의 주군은 충분히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모두 황궁 내에서만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지난 3개월간 그의 주군이 황궁 밖으로 출입한 일은 전무했다.

물론 제국의 귀족으로서 에런 역시 이것이 황족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제국민들은 신의 피를 이은 황족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안전한 황궁 안에서 보호를 하는 게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그 의미가 무척이나 다르게 다가왔다. 그것이 마치 핍박처럼 느껴졌다는 뜻이었다. 그 파렴치한 라일 벨티모어에 의한.

그 파렴치한 놈은 감히 주제에 맞지 않은 황제의 자리를 잠시 맡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이 뺀질거리기나 했다. 게다가 정도를 모르고 그의 주군을 밤마다 힘들게 만들어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데에 일조하고 있는 아주 재수 없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에런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열망이 일었다. 반드시 그의 주군을 황궁에서 나가게 해 마음의 병을 몰아내게 해드리겠다는 그런 열망 말이다.

‘어디가 좋지?’

본래 귀족들은 이맘때 즈음 바닷가가 보이는 남부의 휴양지 플뢰르 령으로 떠나는 것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그의 주군은 물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보다는 근교에 위치한 한적한 여름 별궁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름 별궁은 화원이 아름답게 조성이 되어 있고 밤이면 바닥의 곳곳에 심어진 야광석들이 빛을 발해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하니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거다!’

와락 움켜쥔 에런의 손 사이로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한 바늘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에런은 완벽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는 아기 전하의 손 싸개에 혹여나 구겨진 바늘이 들어가기라도 할까 섬세한 손길로 구겨진 바늘을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 * *

“폐하, 많이 무료하시면 혹, 여름 행궁으로 떠나시는 건 어떠신지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험악한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그 얼굴을 보며 예르넨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름 행궁?”

“예.”

투닥이던 다른 기사들도 의문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에런을 바라봤다.

“수도 근교에 있는 여름 행궁?”

유리스의 높고 가는 목소리에 에런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고갯짓을 본 유리스의 표정은 단박에 밝아졌다.

“‘그’ 여름 행궁이라니…! 저는 좋습니다, 폐하. 그 근처에 중부에는 얼마 안 되는 마석의 산지가 있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도대체 마석의 산지에서 왜 바람이 불어올까, 혹여나 저스틴이 힘을 실어 준 이 마석들처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지 않을까 늘 궁금했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라 답사하지 못했었거든요…! 꼭 가 보고 싶습니다…!”

무척이나 격렬한 찬성의 의사였다. 유리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여름 행궁이라…. 나쁘지 않지.’

아주 어릴 적, 한번 들러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기분전환에도 좋을 것 같았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게 걸리긴 하지만 예정일까지 한 달 정도는 남아 있는 데다가 어차피 마차를 탄 채로 신관들과 의원을 대동하며 떠날 테니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도록 하지.”

그 말에 저스틴이 양손을 번쩍 들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아가던 녀석의 입장에서는 내내 황궁에만 머무르는 시간이 꽤나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폐하, 기예단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잔뜩 신이 난 얼굴을 한 저스틴이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그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예르넨은 정말 단 한 번도 기예단을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의 귀족가에서는 기예단을 저택으로 초청해 기예를 보고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들을 황궁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극단이나 악단의 공연을 본 적은 있어도 기예단을 본 적은 없었다.

예르넨의 표정을 살핀 저스틴은 한층 더 위풍당당한 태도를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참에 기예단을 불러서 감상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비록 이제 여름인 만큼 기예단들이 남쪽으로 내려갈 시기이기는 하지만 폐하의 명이면 다들 다시 수도로 돌아오지 못해 안달이….”

“안 돼!”

하지만 저스틴은 말을 끝맺음 짓지 못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저스틴을 노려보는 에런이 호통을 치듯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네 놈은 태교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건가! 아름다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드셔야 하시는 폐하께 기예단을 권하다니! 생각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그러면서 에런은 임신과 관련된 책을 수없이 읽으며 암기한 태교에 좋은 것들을 줄줄 읊어 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에런의 말에 집중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그래?”

저스틴은 에런의 말을 모두 한 귀로 흘린 채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럼 무희나 악단 같은 거나 부르시던가.”

그 말을 들은 에런은 마치 항복이라도 받아낸 장수처럼 뿌듯한 얼굴을 한 채로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초롱한 눈을 하고 예르넨을 바라봤고, 그 얼굴을 본 예르넨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하루라도 싸우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예르넨은 이럴 때 에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여름 행궁 건은 에런 네게 전적으로 위임하도록 하지. 알아서 잘 골라 보도록.”

“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예르넨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던 테네스가 미소 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예르넨의 얼굴 역시 누그러졌다.

한마디씩 보태는 녀석들은 사실, 데리고 다니기에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특히나 이전부터 상극이었던 저스틴과 에런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로도 말씨름을 했기에 더 그랬다.

그래도, 예르넨은 그 시끄러움마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 테네스 역시 마찬가지겠지.

무척이나 청명한 여름의 하루였다.

* * *

“그래서, 나를 두고 여름 행궁으로 가시겠다.”

“그래.”

예르넨은 불만이 가득 담겨 있는 라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 그 기사 놈들이랑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니야? 나를 제일 특별하게 대해 주겠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라일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얌전히 예르넨의 허리를 부축한 채로 침대에 내려 주었다.

라일이 본궁에서 돌아오는 건 늘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즈음이었다.

하루라도 같이 식사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구는 녀석은 오늘따라 일이 밀렸는지 평소보다 늦는다는 연락을 전해 왔고, 예르넨이 홀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돌아왔다.

그러고는 함께 몸을 씻으면서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왜 자신을 두고 여름 행궁에 떠나냐고 따져 댔다.

물론, 누가 녀석에게 그 사실은 말해 준 건지는 뻔했다. 그렇게 꺼지라고 말해도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주위를 기웃거리는 러셀 보어겠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남의 외출에나 신경을 쓰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것에나 신경 쓰고… 정말이지, 이 커다란 제국을 대체 누가 굴리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운신하기 편안해지면 한번 행정이 어디까지 엉망이 되었는지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라일이 동부 직할령의 문제를 해결하러 떠난 사이 황제 대리로서 업무를 보며 나라 꼴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 예르넨에게 있어서 녀석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밑바닥이었다.

예르넨의 머릿속에서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라일은 그저 여전히 토라진 얼굴을 한 채로 따뜻하게 데운 오일을 꺼내 곁에 두고는 예르넨의 앞섶을 풀어낼 뿐이었다.

자주 마사지를 해 주는 가슴은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아프지 않았다. 여전히 전과 비교를 하면 조금 부어 있긴 했지만 미미한 정도였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유륜이 조금 더 커졌다는 것과 색이 무척이나 짙은 붉은 색을 띠고 있다는 것, 그 사이에 위치한 자그맣던 과실이 커져서는 툭 불거졌다는 점이었다.

라일은 깨끗한 손으로 부어 있는 가슴을 천천히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매일같이 가슴을 마사지해 온 손이 능숙하게 뿌리 끝을 지압했다.

“읏….”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가슴께를 압박하자 유륜과 그 가운데에 소담히 자리한 유두의 근처에 몽글몽글 유백색의 액체가 고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붉은빛을 띠는 유륜을 타고 우윳빛 액체가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색정적이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자극적인 광경에 예르넨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살짝 시선을 피했고, 그와 함께 가늘고 곧은 목덜미가 드러났다.

라일은 그 새하얀 목덜미를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바라보다 짐승처럼 자극받은 제 하체를 슬쩍 가렸다. 그러고는 물에 적신 깨끗한 수건을 들어 예르넨의 가슴 주위에 흘러내린 액체들을 닦아내고 오일과 로션을 적당히 섞어서는 만삭의 배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예르넨은 그 능숙한 손길을 느끼며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발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불러 온 배는 여전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임신 마지막 달에 들어선 배는 초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불러 왔기에 적응할 틈조차 없어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더는 몸을 굽힐 수 없다는 것도, 시도 때도 없이 손발이 붓는 것도,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 것도 전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제일 익숙해지지 않는 건 제 배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하는 라일의 손길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사용인들에 의해 마사지를 받긴 했지만, 라일의 손길은 그때 받았던 것들과는 어딘가 달라, 가슴 속 한편을 간질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사지를 받으며 분위기가 따스하고 또, 상당히 미묘하게 흘러갈 무렵이었다.

“…이렇게 배가 뭉쳐 있는데, 멀리 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까? 요새 다리도 자주 붓잖아? 예정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무래도 행궁은 무리 같아. 아이를 낳은 다음에 가는 게 어때?”

유하게 풀어져 있던 예르넨의 눈이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진중한 얼굴을 하고 마사지에 집중을 한다 싶더니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행궁에 보내지 않을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

예르넨은 제가 개를 키우고 있는 줄 알았다. 그만 보면 기다란 꼬리를 붕붕 흔들어 대는 커다란 늑대 같은 대형견을. 하지만 요새는 그간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무래도 개가 아니라 여우를 키우고 있었던 모양인 듯, 하는 짓이 아주 잔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갈 거야.”

그러나 예르넨은 제집 여우의 잔망스러운 꼬리 짓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일이 표정을 굳히는 게 보였다. 웃기지도 않았다. 라일 벨티모어 주제에 표정을 굳혀 봤자 뭐 어쩌겠다는 건지.

딱히 황궁 밖을 나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르넨을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하는 짓은 과한 면이 있었다.

잠시 귀족들의 초대를 받아 수도에 있는 저택을 가려고 해도, 기사들이 근교에 나들이를 떠나자고 해도, 온갖 핑계를 써가며 못 가게 했다. 마치 테네스를 만나게 하지 못하려고 황후궁에 붙잡아 두었을 때처럼 말이다.

하는 짓이 꽤나 귀여워 가만히 내버려 두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렇게 풀어 줬다간 버릇이 한도 끝도 없이 나빠질 것을 알기에 예르넨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예정일은 어차피 한 달 뒤야.”

그리고 라일은 그리 말하는 예르넨의 표정에 서린 단호함을 읽었는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래야지.’

예르넨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하라는 듯이 라일을 바라보고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라일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면 나도 가.”

“…?”

예르넨은 편안히 감았던 눈을 느슨하게 뜨고는 라일을 바라봤다. 이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일은?”

그러나 라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예르넨의 턱을 스윽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황제가 행궁을 가겠다는데 누가 막겠어? 허락해 줄 거지?”

나른한 목소리가 건네져 오고 이내 입술이 겹쳐졌다. 보드라운 혀가 순식간에 예르넨의 입 안을 점령하듯이 들어와서는 입천장을 간질였다. 정말… 바지 속에 여우 꼬리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매달리듯이 입술을 겹쳐오는 몸짓도, 어서 허락하라는 듯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 끌고 가서는 어린 강아지처럼 약하게 깨물어오는 감각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정말 글러 먹었다.

예르넨은 입술을 떼어 내며 씨익 미소 짓는 뺀질거리는 얼굴을 보고는 픽 웃음 지었다.

“그러던가.”

뜨거운 입술이 다시 한번 더, 예르넨의 입술에 겹쳐져 왔다. 아무래도 오늘도, 말 안 듣는 여우 녀석의 버릇을 고쳐 주기는 요원할 것 같았다.

* * *

에런은 심기가 불편하기 그지없는 눈을 하고 제 주군을 부축한 채로 마차 위를 오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주군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는 이, 라일 벨티모어를 말이다.

제 주군은 저 놈팡이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에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특히나 더했다.

여름 행궁의 총책임을 맡으라는 명을 받은 에런은 그 순간부터 수도에 함께 온 제 수하들을 모두 풀어서는 극단과 악단, 예르넨이 평소에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던 귀족가의 주방장, 수도에서 최고라고 소문난 의상실의 마담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며칠 밤을 새우며 일주일간 여름 행궁에 머무를 그의 주군을 위한 완벽한 일정을 준비했다.

헌데… 갑자기 들이닥친 저 놈팽이의 부관놈이 저놈도 함께 행궁을 떠나겠다고 말을 전하며 행궁 일정을 고작 이틀로 줄여버린 게 아니겠는가…!

‘저 간악한 놈…!’

분명 그의 주군에게 저 뱀 같은 세 치 혀를 속살거리며 일정을 바꿔 버린 거겠지.

에런은 가슴 속 깊이 다짐했다. 언젠간 저놈을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제국의 근본을 바로잡겠다고.

“흐음?”

그리고 그런 에런의 시선을 본 라일은 느슨한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짜증이 날 정도로 재수 없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윽….”

하지만 그 여유로운 미소는 작게 들려온 신음 소리에 금세 흔적도 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배가 뭉치는 것 같아서.”

예르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곁에 바짝 붙어서는 배를 만졌다. 확실히 단단하게 뭉친 부위가 느껴졌다. 라일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주기를 세어 보았다. 아무래도 최근 들어 배가 뭉치는 빈도가 조금 잦아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아파하는 것 같은데.”

“그런가.”

라일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최근 들어 자주 배가 뭉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통증이 가시자 그 생각들은 예르넨의 머릿속에서 가볍게 흩어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르넨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말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밖의 풍경은 이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앞머리를 간질이고 스쳐 지나갔다.

황궁 밖을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이른 아침에 출발한 마차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수도 근교의 행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한 행궁에서의 시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결국 저스틴의 밀어붙임에 의해 자리하게 된 기예단은 무척이나 신기한 볼거리였다. 공중에서 얇은 실 하나에 의지한 채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불이 붙은 봉을 들고 저글링을 하는 것도, 화려한 춤사위를 보는 것도, 어디인지 모를 이국의 악기가 자아내는 선율도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와 함께 준비된 요리들도, 왁자하게 떠들며 함께 분위기에 취해 가는 기사들과 라일의 수하들을 구경하는 것도, 해가 진 뒤 밀려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는 것도, 하늘을 수놓은 수없이 많은 별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예르넨은 오랜만에 몸 안으로 선선한 공기가 스며들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확실히 기분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왜 귀족들이 종종 별장을 찾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손안에 들려 있는 거라고는 과일 주스뿐인데 분위기 때문일까. 술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예르넨의 기색을 살핀 라일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이만 방으로 갈까?”

“방에?”

“그래. 스테핀이 그러던데 밤이 되면 그 근처가 꽤나 근사해지는 모양이야.”

그 말에 호기심이 동한 예르넨이 그러마, 하고 말하자 라일은 예르넨의 허리께에 은근하게 손을 두르고는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예르넨이 몸을 일으키자 에런은 당연하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테네스가 그런 에런의 손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답지 않게 순진한 얼굴을 한 에런은 의아하다는 듯이 테네스를 바라보고는 예르넨의 뒤를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본 저스틴은 식겁한 얼굴로 풀쩍 뛰어올라 에런의 목에 제 팔을 걸고는 끌어 내렸다.

“에헤이! 이 사람이!”

“네놈! 지금 뭣 하는 짓이냐!”

에런은 무례하다는 듯이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저스틴을 노려보고는 손을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결코 손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진 저스틴은 마치 기예단의 단원이라도 된 것처럼 거칠게 들썩이는 사나운 소 같은 녀석을 옴짝달싹도 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해 온몸으로 들러붙었다.

“놔라!”

멀리서 우레와 같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라일은 그 소리를 들으며 꽤나 마음에 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을 부축했다. 그나마 예르넨을 붕어 똥 수준으로 따라다니는 녀석 중 저 정령사가 제일 낫다고 생각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 드러났다. 황제의 처소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와중에 둘은 마치 숨겨진 사원 같은 풍경을 두른 새하얀 바닥 위를 걸었다.

그리고 처소 근처에 도착하자 예르넨은 처소가 잠시 들렀던 아까와는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름 행궁은 제국의 보편적인 건물들의 양식과는 미묘하게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처소는 그 연장선이었다.

황궁도 귀족의 저택도 마찬가지였지만 보통 주인의 처소는 위층에 지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여름 행궁은 전혀 달랐다. 이곳은 황제의 처소를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있는 고대 양식을 따라 단층으로 만들어 두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기둥이 세워진 형태였는데 그를 둘러싼 사면은 문이 아니라 거대한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창문을 전부 열면 사면이 모두 뚫려 있는 형태였다.

저번에 들렀을 때 처소 주변의 대리석이 다른 바닥과 달리 두 뼘 정도 낮게 위치해 있던 게 의아했던 예르넨은,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주변은 온통 야트막한 물로 채워져 있었다. 물이 무척이나 깨끗했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바닥과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분명 물이 채워져 있었다.

예르넨은 라일의 손을 잡고 미리 준비되어 있는 쿠션 위에 앉아, 자박하게 깔린 물 안으로 새하얀 발을 담갔다. 그러고는 평소와 다른 것을 또 하나 찾아냈다.

“그런데 왜, 불이 하나도 안 켜져 있지?”

주변을 비추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달빛이 밝아 주변이 훤히 보인다고는 해도 바닥에 물기가 가득하기에 위험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라일은 그런 예르넨을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변을 자세히 봐, 예르넨.”

그 말에 예르넨은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주변을 밝히는 빛은 달빛뿐만이 아니었다. 미약하게 주변을 비추고 있는, 작은 불빛들이 있었다. 미묘하게 초록빛을 띠는 노란 불빛들. 그것은….

“반딧불이?”

반딧불이였다.

예르넨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주변을 오가는 작은 불빛들을 바라봤다. 기예단을 본 것도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이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여섯 살 때 여름 행궁에 왔을 때는 늦여름이라서 없었지만, 이 시기에는 반딧불이가 있다고 해. 비록 지금도 끝 무렵이라 많이는 볼 수 없지만.”

예르넨은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이 가득한 대리석 바닥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라일은 혹여나 예르넨이 넘어지면 바로 부축할 수 있을 거리에서 뒤를 따랐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왔는데 하루만 머무르게 해서 미안해.”

예르넨은 슬쩍 고개를 돌려 라일을 바라봤다. 늘 뺀질거리기만 하는 얼굴엔 미약한 미안함이 섞여 든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예르넨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실 라일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황제로서의 의무를 우선시 하는 게 더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리 생각한 예르넨은 다시 반딧불이에게 시선을 건넸다. 물가 위를 나지막이 가로지르는 초록빛은 수면에 비쳐 마치 한 쌍이 나란히 수평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초록빛의 궤적을 쫓는 시선이 내려감과 함께 기다란 속눈썹이 눈가에 드리워지며 음영이 졌다.

“이걸로 충분해. 올해는.”

“…올해는?”

“내년에 셋이 같이 올 때 길게 머무르면 되니까.”

그 말을 하는 예르넨의 귓가가 살짝 불긋해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붉어진 귀를 본 라일은, 어쩐지 참을 수 없어져 눈앞에 있는 사람을 꽈악 끌어안고 말았다.

“아윽, 야!”

“하하.”

등에 내리꽂히는 따가운 손길마저도 너무 좋았다. 좋아서, 정말 좋아서.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매일매일이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좋아해, 예르넨. 너무 많이.”

라일은 예르넨을 꼬옥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둘의 주변을 따라 달빛이 물든 물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물길을 해치고 나아가면서도 라일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럼, 겨울에는 한 달 동안 남부로 내려가 있을까?”

그 말에 예르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일을 흘겨 주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황제가 한 달이나 궁을 비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 빨리 양위하고 함께 제국의 여기저기를 유람하는 건 어때?”

“얼씨구?”

“아이 이름은 어떻게 될까? 시기가 애매하게 걸치잖아?”

“뭐… 미엘르나 에스터 아니겠어? 미엘르가 될 확률이 더 높겠지만.”

라일의 말대로 예르넨의 출산 시기는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 언제 임신이 된 건지를 알 수 없기에 아직 아이가 어떤 이름을 가질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다만 7월 초에 태어난다면 에스터, 7월 말에 태어난다면 미엘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의외로 에스터가 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된다면 좀 참을성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시기를 잘 모른다고는 해도….”

대답을 하려던 예르넨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걸음을 멈췄다. 또, 배가 뭉치기라도 하는 것이 찌르르한 아픔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윽….”

나지막한 신음 소리에 금세 표정을 바꾼 라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예르넨을 바라봤다.

“또 아파?”

그렇게 말한 라일은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고쳐 안았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찌푸려진 미간도, 옅게 식은땀이 맺힌 이마도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고통을 대신 겪어 주지 못하는 게 억울할 정도로.

라일은 품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빨리 침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녀석, 언제까지 예르넨 고생시킬 거야? 빨리 나오지 않고.”

하지만 엄한 말투와는 달리 새파란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스며 있었다.

그날 밤, 예르넨은 눈을 떴다. 여전히 새파란 달빛이 주변을 비추고 있는 밤이었다.

평소라면 그를 끌어안고 있어야 할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곁을 짚어봤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의아함에 예르넨은 주변을 살필 무렵, 우레와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예르넨은 야트막하게 물이 깔린 대리석 바닥 위에 서 있는 험악한 인상의 거대한 용을 발견했다.

달빛을 받은 금빛 비늘이 마치 백금처럼 빛났다.

“…!”

거칠게 포효하며 날뛰던 용은 거대한 꼬리를 틀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예르넨을 발견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고 찰나의 순간, 용은 갑작스럽게 걸음을 떼더니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읏…!”

머리는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몸이 마치 주박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예르넨을 향해 다가오던 용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얼굴을 집어넣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은 그 기세에 예르넨은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바로 곁에 다가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뿐.

예르넨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순하게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는 용과 두 눈을 마주쳤다.

용은 예르넨이 눈을 뜨자 마치 기쁘다는 듯이 머리를 들이밀고는 내려다보며 새파란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헌데 그 눈이… 어째… 누군가를 닮은 것만 같았다.

“…라일?”

바로 조금 전까지 곁에서 잠을 자고 있던 배우자 녀석 말이다.

하지만 용은 그 부름에도 커다랗고 맑은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갯짓을 해 예르넨의 몸에 제 전신을 비비적거렸다.

“뭐야.”

마치 애정을 갈구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몸짓에 예르넨은 자연스럽게 침대맡에 몸을 기대고는 용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러 있던 배가, 판판했다.

“…헉!”

예르넨은 깜짝 놀라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몸을 일으킨 채 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배는 여전히 잠이 들기 전과 똑같았다.

“꿈이었나?”

이해할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한 예르넨은 간밤 사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왜?”

그러고는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역시나 없을 리가 없는 녀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냥 이상한 꿈을… 으윽….”

예르넨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하려다 갑자기 뭉쳐오는 배에 미간을 찌푸린 채로 통증을 참아 냈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송글거리며 이마에 맺혔다.

고통을 참아 내는 예르넨을 본 라일은 마찬가지로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예르넨을 끌어안고는 배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어조를 하며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예르넨은 우중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에 라일은 마치 쓰러진 주인을 발견한 개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예르넨의 온몸을 끌어안아 왔다.

그 따스한 촉감을 느끼고 있자니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게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예르넨은 꽤나 통증에 무딘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가는 통증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오늘 아침은 유난했다. 아랫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고 척추뼈가 빠져 버릴 것처럼 아파 왔다. 정말 지독한 통증이었다.

“마차가 준비되는 대로 부르러 온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오늘 하루 더 머무르는 게 나을까? 일리아나를 부를까?”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얼추 통증이 가라앉은 예르넨은 그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어차피 올 때도 마찬가지였어. 일리아나는 불러 봤자 매번 똑같은 말만 하고. 그냥 준비되는 대로 황궁으로 돌아가자.”

“정말 괜찮겠어?”

라일도 예르넨의 상태가 진정됐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마른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주며 말했다. 하지만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예르넨은 눈을 치켜뜬 채로 그런 라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라일 벨티모어, 똑같은 말을 몇 번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

“듣고 싶은 만큼?”

그 뺀질거리는 얼굴에 짜증이 솟을 대로 솟은 예르넨은 결국 주먹을 콱 움켜쥔 채로 탄탄한 가슴팍을 아프게 내리쳤다.

“아야, 예르넨. 죽을 거 같아.”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도 앓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넨, 예르넨.”

“…왜.”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찮다고 말했잖아.”

마차에 타기 전에도, 탄 후에도 수도 없이 들어온 질문이었다. 예르넨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로 자꾸만 신경 쓰이게 들이밀어 오는 라일의 얼굴을 주욱 하고 밀어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라일은 밀려나자마자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안 괜찮은 것 같아서 그래. 너무 심한 것 같은데?”

라일은 마차 벽에 힘없이 기대어 있는 예르넨의 얼굴을 끌어다가 제 어깨에 기대게 한 채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오늘만 대체 몇 번째 계속되는 건지 모를 통증이 아랫배에 퍼져 나갔다.

“으윽….”

사실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시작된 통증은 평소와 달리 시도 때도 없이 불규칙적으로 찾아왔고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선잠이 들었을 때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몇 번이나 깨어났다가 다시 눈을 감기를 반복해야 했다.

“마차를 세우고 일리아나를 부를까?”

그 말에 예르넨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문득 스쳐 지나간 밖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도 번화가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황실의 인장을 단 고급스러운 마차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를 세우기에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곧 황궁이니까 도착한 다음에 진찰을 해도 안 늦어.”

“…그래.”

예르넨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르넨이 다시금 배를 끌어안으며 아파했기에 라일은 어쩔 수 없이 조그마한 머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예르넨이 얼추 진정한 것 같자 창을 열고는 금방이라도 사람 몇을 죽여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스테핀에게 명했다.

“당장 마차 속도를 높여.”

“하, 하지만 폐하. 번화가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먼저 가서 길을 튼 다음에 마차를 몰라고!”

평이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저속한 비속어를 내뱉는 것같이 험악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러나 예르넨은 그런 라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기대어서 통증을 참아 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흑…!”

아래로부터 물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며, 순식간에 바지가 젖어 들어갔다. 예르넨은 힘없는 눈꺼풀을 바르르 들어 올린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라, 라일….”

예르넨은 순식간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새하얀 옷이 피가 섞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그 모습을 본 라일의 얼굴 역시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당장 일리아나를 불러와!”

고요하기만 해야 하는 황궁의 복도 위로 수많은 사람의 부산스러운 발자국이 찍혔다.

“저쪽입니다!”

라일은 일리아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 품 안에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예르넨이 라일의 셔츠를 꽈악 부여잡은 채로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젠장.’

빌어먹을 에런 파르타슈 그 개잡놈. 예르넨에게 달라붙어 알랑방구를 뀔 때부터 이렇게 사고를 칠 걸 알아봤어야 했다. 행궁 같은 거, 결코 가면 안 된다고 드러누워서라도 말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아, 하아.”

라일은 세상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 먼 거리를 달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숨이 차올랐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불안하게 뛰었다.

“폐하! 이쪽으로!”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산실은 여기저기서 깨끗한 수건과 따뜻한 물, 출산을 돕는 도구들을 옮기는 사람들로 인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라일은 그 한가운데에 준비된 좁은 침대 위로 예르넨을 내려놓았다.

“아으윽…!”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뒤따라 들어온 일리아나가 촉진을 하더니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직 한 달은 남았다고 했는데 왜 벌써…!”

라일은 그런 일리아나의 멱살을 잡으면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는 말했다.

“진, 진정하십시오. 폐하…!”

마찬가지로 뒤따라 들어온 의원들이 라일을 제지하고 들었고 겨우 풀려난 일리아나는 목을 부여잡은 채로 말했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산도가 상당히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이 정도면 진통이 시작되고도 시간이 한참은 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일은 이마를 짚었다. 아침부터 계속 고통스러워했는데 전혀 몰랐었다. 우겨서라도 그때 일리아나를 불렀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흐윽!”

“예르넨…!”

라일은 고통스러운 소리에 재빠르게 예르넨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하아, 하아.”

예르넨은 불긋한 얼굴을 한 채로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은 본 라일은 예르넨의 손을 으스러지기라도 할 듯이 세게 잡으며 뒤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젠장, 당장 뭐라도 해!”

“그것이… 지금 당장은 해 드릴 수 있는 게….”

그 기세에 눌린 산파가 바들바들 떨려 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렇게 아파하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죽고 싶은 건가.”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것만 같은 눈에 산파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눈초리를 받은 신관과 의원들은 예르넨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으윽…!”

예르넨은 다시금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입가에 대어진 천을 꽈악 깨물었다. 정말, 말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줄 힘도 없는데 아래에서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의원은 계속해서 힘을 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으으윽! 하아, 하아.”

한참을 힘을 준 예르넨은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온몸에 힘을 풀고는 숨을 골랐다. 이 짓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지금 쉬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게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지독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제길! 애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아, 아이가 나오는 데에는 원래 시간이 걸립니다, 폐하…! 게, 게다가 황후폐하께오서는 초산이기도 하신지라….”

“네놈은 혀가 뽑히고 싶은가 보지? 대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예르넨이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그… 그것이…!”

“하으윽…!”

“예르넨! 제길! 당장 뭐라도 좀 해 보라고!”

의원들이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밀려오는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와중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꽉 쥐고 있던 라일의 손을 풀어내고는 거칠게 내리쳤다.

“당장 안 꺼져!”

“예르넨…!”

“이 새끼 내보내…!”

그 말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주변에서 라일의 양팔을 붙잡았다.

“황후 폐하의 말이 맞으십니다, 폐하…! 산실에서 이리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얼른 나오세요…!”

“예르넨…!”

“네 녀석이 지금 이 안에서 제일 방해꾼이야!”

그리고 끌려 나가는 라일을 보며 예르넨은 핏발이 선 눈을 하며 말했다.

“들어오면 죽여 버릴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일은 산실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젠장.”

초조한 발걸음 소리가 쉬지 않고 복도를 울렸다. 그 발걸음의 주인을 보며 스테핀은 어색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진정하시지요, 폐하.”

“네놈이라면 진정하겠어?”

“물, 물론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본전도 찾지 못한 채로 꼬리를 말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

라일은 한숨을 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쫓긴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노을 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이미 새까매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산실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라일의 정신줄은 바짝바짝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신성력이라는 건 정말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 어떤 병이든 모두 치료할 수 있다면서 고작 진통 하나 낫게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제길…!”

무력했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그저 복도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아이를 갖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를 낳는 게 이렇게 아프다는 걸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일분일초가 마치 억겁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폐… 폐하…! 황후 폐하께서…!”

주변에서 작은 울음소리와 부산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라일에게는 주변의 말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혀 있던 산실의 문이 열리고 나온 일리아나의 팔에 안겨 있는 작고 새하얀 포대기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폐하, 들어오십시오.”

라일은 그 말에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산실로 들어섰다.

“…….”

산실의 정중앙 침대 위에는 잔뜩 지쳐서는 쓰러지듯 누워있는 예르넨이 있었다. 그런 예르넨을 본 라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려고 해도, 무언가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듯,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모시고 왔습니다.”

일리아나의 속삭임에 잔뜩 지친 눈매 사이로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을 바라보며 라일은 어쩐지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예르넨.”

그제서야 주박이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라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르넨… 예르넨….”

일리아나가 그런 라일의 품으로 아이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것에 비하면 꽤나 무게가 나갔다. 라일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든 채로 예르넨의 곁에 아이를 내려 주었다.

“우리, 아이야.”

“…그래.”

감격이 섞인 라일의 말에 예르넨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건강한 황자님이십니다. 알파이시구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일리아나는 어딘가 복받쳐 오르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럼, 자리 비켜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일리아나는 주변인들을 데리고 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산실을 채우고 있는 모두가 빠져나갈 때까지 아이의 앞머리를 간질이던 예르넨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결국 리암이 됐네.”

“…그러게.”

지난 밤, 아이가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될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예정대로 테어나면 미엘르가, 조금 일찍 태어난다면 에스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이는 예정보다 한참이나 일찍 찾아왔고, 리암이 되었다.

둘은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황족을 상징하는 잿빛이 섞인 금발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작고 빨갰지만 어딜 보아도 어린 시절의 예르넨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선이 가는 미색의 얼굴형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도. 정말이지… 예르넨이 혼자 낳았다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이름이나마 라일과 닮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런 아기를 보고 있자니 예르넨은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는데.

처음 마주하게 된 아이는 빨갰고, 아직 쪼글쪼글했다. 그래도….

“…예쁘네.”

무척이나 예뻤다.

예르넨은 아이의, 리암의 작은 손바닥을 슬슬 간질였다. 그리고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잔떨림이 전해져 왔다.

“맞아, 너무… 예뻐. 내가 지금껏 보아 왔던 것 중에 두 번째로 예뻐.”

그 바보 같은 소리에 예르넨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이마에 와 닿는 입술의 촉감을 느끼며 리암의 볼을 간질였다.

“하움.”

막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렇게 떠내려가라는 듯이 울어 재꼈으면서, 제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며 하품을 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계속,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예르넨은 그가 아이를 편히 볼 수 있도록 어색한 자세로 아이를 안아 옮기는 라일과 아이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정말이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쪽은 시커멓고 커다랬고, 한쪽은 조그맣고 빨갰으니까.

하지만 그런 둘을 보고 있자니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떤 감정이 가슴속 한구석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무척이나 낯선 감각이었다.

“결국….”

예르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 목소리에 어색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라일이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눈을 마주쳐 왔다. 그 빛은, 예르넨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너에게로 왔네.”

오랜 시간 긴 고난의 길을 걸어, 결국 이곳에 왔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길을 지나는 동안 홀로 외로이 바라 왔던 과거의, 간절하던 소망이 어느새인가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아이를 꼭 끌어안은 너른 품이 예르넨을 감싸 왔다. 하지만 예르넨은, 이 품이 위협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라일 벨티모어는 예르넨 헬리오에게만큼은 결코 이를 드러내지 않을 짐승이니까.

예르넨은, 몇 번의 생애를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할, 그의 알파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이내 부드러운 입맞춤이 건네어져 왔다. 바보 같을 정도로 다정하고,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정말, 미련할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좋았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으니까.

그 입맞춤을 받으면서, 예르넨은 어쩐지 가슴 속 한 구석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감정의 이름을 알 것 같았다.

슬프지도 않은데 괜스레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다가도 더없는 환희를 느끼게 하는 그 감정의 이름은… 행복이었다.

<그 폭군의 해피엔딩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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