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sweet (17/19)

외전 1. sweet

맑은 타악기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두운 밤, 바닥을 수놓은 불빛 위에 선 예르넨은 얇은 꽃 모양의 양초를 받아 들었다.

야트막한 수면위로 새하얀 예복을 입은 예르넨과 교황의 정복을 입은 루디가 비춰졌다.

긴장으로 바들바들 떠는 루디의 손에 들린 종이의 타오르는 불꽃은 이내 예르넨의 손에 들린 양초의 심지로 옮겨 붙었다. 그리고 그 양초는 허리를 숙인 예르넨의 손을 따라 천천히 수면 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성화에 나오는 천사와 같이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경건했기에 모두는 손을 모으고, 떠내려가는 꽃잎에 각자의 소망을 실었다. 선선한 봄바람이 그들의 손끝을 휩쓸다 이내 스쳐 지나갔다.

바야흐로, 완연한 봄의 시작이었다.

예르넨은 떠내려가는 꽃 모양의 양초를 바라봤다.

‘잘 떠내려가는군.’

저토록 얇은 양초가, 심지어 심지에 불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물 위를 떠내려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금방 녹아서는 가라앉아 버리는 게 당연할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저 양초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게 고안된 물건이었다. 아마 교황청으로부터 수도의 한복판까지 깔린 물이 자박하게 깔린 대리석 길목을 모두 지나가고 수로에 들어선 다음에도 꺼지지 않을 테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황조가 세워지기 이전, 온 대륙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지독한 가뭄은 몇 년씩이나 계속되었고, 신을 향해 간절한 기원을 올리던 이들은 모두 돌아서서 신을 불신하고 원망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은 더 이상 신에게 그 어떤 재물도 바치지 않고 그 어떤 기원도 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통에 찬 울음마저도 메말라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절망의 시기에, 한 왕국의 공주는 밤마다 왕성을 빠져나와 강가를 찾았다. 그러고는 비가 오기를, 강이 가득 차오르기를 기원하며 메마른 강가에 꽃 모양으로 된 양초를 한 송이씩 태우며 홀로 기원을 올렸다.

비를 내려 달라고.

신은 봄비와 함께 공주를 찾았고, 공주는 신과의 하룻밤을 보낸 뒤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아이는 황제가 되었고 신의 비호를 받았던 왕국은 부강해져가 현재의 제국이 되었다. 그랬기에 초대 황제는 매년 봄, 신과 그녀의 반려를 기리기 위해 밤의 연회를 열었고 그 기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이 행사는 제국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제국은 근원적으로 농본 국가였고, 제국민들은 이 밤을 기준으로 파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본디 황제가 주관해야 하는 행사였으나, 오늘 행사의 첫 시작을 알린 것은 예르넨이었다. 라일의 순서는 그 뒤에 이어졌다. 하지만 순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모두의 눈에 맺혀 있는 감정은 평화였다. 대영주들의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웃음이 맺혀 있기까지 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올해 농사가 반드시 풍년이 될 거라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금실로 자수를 새긴 새하얀 교황복을 입은 루디가 떨리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라일의 손에 놓인 양초에 심지를 밝혔다. 밝게 타오르는 불빛은 이내 새하얀 양초를 주황빛으로 물들였고 라일은 꽃잎을 물 위에 실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이 대리석 길목의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귀족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꽃에 불을 붙이고는 물길 위에 꽃잎을 띄웠다.

이 꽃잎이 모두 떠내려가 황궁 밖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수도의 백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나와 물 위에 꽃을 띄울 것이다.

부유한 이들은 황성에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꽃 모양을 한 화려한 양초를 물 위에 띄울 것이고 그렇지 못하는 이들은 들꽃을 꺾어 기원과 함께 실어 보낼 것이다. 올 한 해가 평온히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저잣거리의 한편에는 야시장이 열릴 것이고 흥겨움에 취한 이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선선한 봄밤의 낭만을 즐길 것이다.

물론 축제가 벌어지는 것은 저잣거리뿐만은 아니었다. 황궁에서도 마찬가지로 한밤의 야유회가 펼쳐졌다. 그랬기에 교황청부터 본궁까지 이어진 정원을 매운 것은 평소 이 시간대 즈음 찾아오는 고요가 아닌, 맑고 가벼운 타악기 소리였다.

이곳저곳을 빛의 구로 장식한 봄의 정원은 마치 요정들이 뛰어놀 것만 같은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예르넨은 라일의 손을 잡고는 그 정원의 한 가운데에 발을 디뎠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예르넨은 그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담담한 얼굴을 하고는 라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실 연회에서 황제 부부가 첫 춤으로 연회를 여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의무였다. 그리고 시선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예르넨에게는 무척이나 당연한 것이었다.

라일의 팔이 예르넨의 허리를 감싸자, 그것이 마치 시작 신호라도 되는 듯 주변이 고요해지더니 진정한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현악기의 예리한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댄스를 리드하는 쪽은 알파였기에 예르넨은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라일의 팔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런 예르넨을 바라보며 라일은 얼굴 가득 뺀질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몸을 꽈악 끌어당기며 짓궂은 질문을 건네 왔다.

“왜 이렇게 말랐어?”

하.

그 질문에 예르넨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어이없는 소리였다. 헐렁한 예복의 안쪽에 위치한 배는 지난 몇 달간 착실하게 불러 왔기에 이제 펑퍼짐한 옷을 입지 않으면 더 이상 가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예르넨은 요새 몸을 가릴 수 있는 옷 위주로 입고 다니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빈말이라도 결코 말랐다고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라일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마주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려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맞잖아?”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예르넨은 얼굴에 가득 띄운 어이없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멜리사가 요새 또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던데, 맞아?”

“얼굴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면서 그런 소리는 잘도 전해 듣는군.”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말에 한껏 불쌍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짜증이 나기 시작한 예르넨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짓일 뿐이었다.

“한 사흘만인 것 같군.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게.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말이야.”

예르넨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난처함이 가득 담긴 사과에도 예르넨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라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예르넨도 한때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이맘때 즈음 제국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를.

큰 수확을 끝마치고 세금까지 모두 거두어들인 겨울에는 비교적 한가했지만 봄에, 특히나 이런 초봄에는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사건도 사고도 자주 일어났기에 황제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그 때문에 최근, 라일이 황후궁에 머무르는 시간은 하루 종일 한 발자국도 안 나가던 시절에 비하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헌데 왜일까.

곁에 있으면 한시도 떨어지려고 들지 않아서 그저 귀찮기만 한 놈일 뿐인데… 떨어뜨려 놓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제 바쁜 시기는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오늘 밤부터는 내내 함께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화 풀어.”

라일은 예르넨이 언짢아하는 게 기분이 좋기라도 하다는 듯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런 라일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라일의 뒤에 있는, 잘 차려입은 귀족들 사이에서 눈에 띌 정도로 추레한 몰골을 한 채로 서류를 들고 있는 스테핀을 말이다.

예르넨은 입만 산 놈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신 어린 표정을 지으며 라일을 바라봤다.

“순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늘어놓는군.”

“왜?”

라일은 의아하다는 듯이 예르넨을 바라봤지만, 이내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부관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처리하고 돌아올게. 어차피 별일 아닐 테니까.”

그 미안함이 묻어나는 어투에 예르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난 상관없어.”

진심이었다. 라일 벨티모어 하나 빠진다고 해서 잘 굴러갈 야유회가 잘 굴러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예르넨, 본인이 빠진 것도 아닌데. 서운함? 그런 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상관없었다.

정말로.

하지만 그런 예르넨의 말에 라일은 웃는 낯으로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내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봐도 봐도 보고 싶어서.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죽을 것 같거든.”

“…….”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대답을 들은 예르넨의 얼굴에는 미미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어느새 첫 곡이 끝나고 둘은 그간 나눈 대화와는 전혀 다르게 우아한 중부식 예법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멀어졌다.

라일은 제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멍청한 부관에게 다가가면서도 시선은 예르넨에게 향했다. 귀족들은 마치 그가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예르넨을 향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폐하,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셨습니다.”

“어찌 그리 우아하게 스텝을 밟으시는지요. 정말 대성전의 천장화에 새겨진 헬리오 님의 현신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늘 입은 옷이 무척이나 우아하십니다. 혹, 괜찮다면 의상실의 마담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희 아들이 곧….”

“폐하, 괜찮으시다면 이번 달 말에 저택에서 연회를 여는 데 참석하여 아내에게 축복을 내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이가 곧 출산 예정이어서….”

그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사들 때문에 예르넨의 모습은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 광경을 본 스테핀은 살짝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이야…. 이 정도면 황후 폐하께옵서 예르넨님보다 인기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폐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이구요. … 헉!”

그러고는 눈치를 보며 제 입을 내리쳤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섞여들어 가는 게 보였다. 라일에게 예르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스테핀의 행동은 눈앞에 있는 이가 진짜 예르넨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예르넨이 돌아오고도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예르넨은 전에도 딱히 정체를 숨기는데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돌아온 이후엔 정말이지 일말의 숨김도 없이 당당히 행동하고 있었다. 늘 가까이 지내니 알아챌 법도 한데 스테핀은 지금까지 제 사촌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의 멍청한 놈이었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말마따나 예르넨은… 정말 인기가 많았다.

예르넨 헬리오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긴 했다. 누구든 끌리고 누구든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만드는 그런 사람. 가둬 두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빛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이리 날파리들이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라일은 예르넨을 가둬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예르넨이 어디든 갈 수 있게, 많은 이들에게 추종을 받으며 본래 누려야 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줄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질투가 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예르넨의 곁에는 최근, 예르넨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꼬맹이, 루디가 있었다. 루디의 곁에는 그토록 애틋해 하는 기사, 덴버 로네펠트가 있었으며 뒤에는 빌어먹을 테네스 트리지아를 호위로 세워 두고 있었다.

참으로 빈정이 상했다. 그가 예르넨의 곁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한 일주일 동안 놈들이 예르넨의 시선을 모두 독차지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당장이라도 연회를 뒤엎고 녀석들을 모조리 영지로 쫓아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미움을 살 테니까.

어찌 되었든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일을 끝마치고 예르넨에게 돌아가는 것.

그렇게 생각한 라일은 스테핀의 손에 들린 서류를 뺏어 들고는 빠르게 훑으며 본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서류에 적힌 내용은 그리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왕세자는 삼 왕자가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잘하면 내분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지 않고도 나라를 조각낼 수 있겠어.”

라일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그 안에는 페이넌 왕국 정세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예르넨에게 그런 짓거리를 한 놈들을 가만히 둘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 * *

“예배를 직접 주관하지는 않을 것 같군. 그쪽은 교황청의 영역이니.”

“아아, 그러시군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폐하께서 예배를 주관한다면 꼭 참석해서 아이들에게 축복을 부탁드리고 싶었는데요.”

“다음 황실 행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그때 축복을 내려 주도록 하지.”

“그러기엔 아직 나이가 많이 어려서요. 특히 막내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예르넨은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곳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을 하고 있는 귀부인이 있었다. 딱히…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

이번 야유회는 황실에서 주관하는 행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고로 이 땅에 단둘밖에 남아 있지 않은 황족이자 현재 제국에서 황실 다음가는 가문인 포트넘 공작가의 안주인인 세실이 참여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어쩔 수 없이 야유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세실과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예르넨의 기분은 차츰차츰 하향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고 말이다.

항상 예르넨의 곁에 머무르며 예르넨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테네스는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변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테네스는 예르넨을 후원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고, 그런 둘의 뒤를 에런과 이리언이 따랐다.

본궁에서 교황청까지 이르는 길목에 있는 정원이 모두 야유회장으로 사용되었기에 휴식을 취할만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폐하,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셨는데 허기지시지는 않으십니까.”

자리를 잡자마자 주위의 탐색을 모두 끝낸 에런이 거대한 몸을 굽힌 채로 예르넨의 곁에 서서 물었다.

“…….”

딱히 무언가가 먹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요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가는 또 나라 잃은 표정을 봐야 할 게 뻔했기에 예르넨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가볍게 고갯짓했다.

그리고 그 몸짓에 에런은 험악한 얼굴에 답지 않은 화사한 빛을 띠고는 요깃거리를 가지고 오겠다며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를 한 채 테이블로 향했다.

“…감시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뼈가 박혀 있는 테네스의 말에 예르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런을 혼자 보낼 수는 없다. 혼자 보냈다가는 음식이 놓여 있는 테이블들을 통째로 들어서 앞에 옮겨 놓을 게 뻔했다.

그리하여 예르넨은 이리언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멀리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우아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들려왔지만, 그 번잡한 소음보다는 풀벌레 소리의 그윽한 정취가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그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이리언이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이런 시간이 찾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

이리언은 막내 손자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 같이 애정이 담긴 눈을 하고 예르넨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를 제 영지로 모셔도 좋았겠지만, 전… 사실 폐하께서 수도에 머무르시기를 바랐습니다.”

“왜지?”

“폐하께서 살아가시기를 바랐으니까요.”

“…….”

“저희만으로도 충분히 폐하를 보필할 수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폐하께서 변화하고… 나아지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이리언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평온해지신 모습을 뵈어서, 이 이리언 플뢰르. 선황께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 낸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그 말에 예르넨은 대답 없이 앞을 바라봤다.

이리언이 처음으로 모시게 된 황제는 베이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전히 이리언이 마음속 깊은 곳에 모시고 있을 황제는 베이넌이겠지.

헤리엇의 기사가 되었다고 해도, 예르넨이 죽고 라일이 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예르넨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테네스같이 말이다.

여전히 이리언에게 있어서 예르넨은 아주 어린, 막내 손주같이 느껴지는 주군의 어린 아들일 것이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이리언이 그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에 지독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르넨은 제 손을 도닥여 주는 늙은 기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주름진 손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배는 괜찮으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으시구요.”

그 말에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다정한 기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해서 그럴까.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뜸을 들였을까. 다행히 때마침 도착한 테네스와 에런 덕분에 예르넨은 대답을 회피할 수 있었다.

“폐하, 신 에런 파르타슈…! 돌아왔습니다.”

에런은 묵직한 목소리로 귀환을 알리고는 섬세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것들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는 금세 금세공을 한 은제 식기와 한입에 집어먹을 수 있는 크기의 닭고기 샌드위치, 먹기 편하도록 잘린 스테이크, 간단한 과일, 여러 종류의 자그마한 케익, 빨간 나무 열매가 올라간 푸딩, 달달한 과실음료, 소담한 리시안셔스가 담긴 꽃병, 고급스러운 금박이 새겨진 삼단 촛대로 가득 찼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점점 늘어나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바라보던 예르넨은 테네스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에는 이게 어딜 보아 간단한 요깃거리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테네스는 그 눈짓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피로가 섞인 고갯짓을 해 보이고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잘게 잘라 한입씩 맛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 삶에서 몇 번 독살의 위기가 있었던 다음, 기사들과 예르넨 사이에 생겨난 습관이었다. 이제는 전과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생겨난 습관을 지워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가만히 앉아서 테네스가 음식들을 살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예르넨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이제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르넨은 그 말을 듣고서도 테이블을 딱히 내키지 않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음식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다, 붉은 나무 열매가 올라간 푸딩을 작게 떠서 입 안에 넣었다.

“…….”

그러고는 까끌거리는 것들을 한참을 씹다가 겨우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이 테이블과 맞닿은 순간 에런은 마치 대 전투에서 수하들을 모두 잃은 군주가 지을 법한 침통한 표정을 짓고서는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부담스러울 정도의 표정변화였다.

“준비해 주어 고맙지만 이 정도면 됐다. 아직 야유회가 끝나지 않았으니 끝마치고 식사하도록 하지.”

하지만 테이블 주변을 채운 이들 중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예르넨이 어떻게 식사하는지 아는 이들이 보기에 지금 예르넨의 행동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정말 몸이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폐하.”

“…….”

“이만 쉬러 가셔야 하는 건 아닌지요.”

이리언이 한껏 걱정이 담긴 얼굴을 한 채로 물었다.

다시 신혈의 맹세를 나눈 뒤, 영지의 바쁜 일을 처리하고 최근에야 돌아온 그녀는 다른 둘과 달리 예르넨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예르넨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예르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풍년을 기원하는 건 황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이니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해.”

“그렇지만….”

이리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르넨이 전혀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정말 몸이 안 좋으시면 꼭 말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래.”

그리 말한 예르넨은 건성으로 말하며 일어나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배가… 묵직했다.

이 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기사들을 수도로 불렀고, 황족의 의무에도 철저하게 임하고 있었다.

의무는 금방 익숙해졌다. 늘 해 오던 일이었으니. 도리어 손과 발이 되어 줄 이가 많은 지금이 더욱 편하다고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그 의무 중에서 유독… 익숙해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

예르넨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정말 아무리 헐렁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임신을 했다는 티를 감출 수 없는 수준이었다.

사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족으로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아이를 잃을까 봐 걱정하기도 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일이 무척이나 숨 가쁘게 흘러갔었기에 진정으로 임신을 실감했던 적은 사실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들이 없어지게 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몸이 변해 가는 것도,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도. 전부.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쉽지 않은 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예르넨은 테이블 위에 시선을 주었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커스터드 크림색의 푸딩이 있었다. 작은 숟가락으로 파낸 자국이 있는.

푸딩을 바라보던 예르넨의 눈에는 미미한 감정이 서렸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 * *

이른 저녁에 시작했던 야유회는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끝맺음 지어졌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라일과 함께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곤해….”

라일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침대 위에 풀썩 쓰러진 예르넨의 겉옷을 벗겨 주기 시작했다.

“네 부하 놈들은?”

그리고 예르넨은 신경 쓰지 않는 척,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물론… 누가 보아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명백한 얼굴이었다. 사흘 전에도 이렇게 옷을 벗겨 주다 부하의 호출을 받고 나간 라일이 한참이 지난 새벽녘에야 돌아왔기 때문이다.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물음에 뺀질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띄운 채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안 들어올걸? 지금부터 내가 이 방을 나갈 때까지 근처에 오는 놈들은 전부 북부 미개척지로 보내 버린다고 했으니까.”

예르넨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능청스러운 목소리 안에 서린 깊은 짜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오늘에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게 해 줄 테니 그리 알아.”

“그러시던가.”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얌전히 수발을 받았다. 그리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던 라일의 얼굴은 드러난 예르넨의 몸태를 보고 미미하게 굳었다.

‘확실히….’

분명 식사를 제대로 못 한다는 보고를 듣긴 했지만, 고작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티가 날 정도로 마를 줄은 몰랐다.

배는 변화가 없었지만 드러난 손목이나 다른 부위들은 마치 한 겹 씌워져 있던 살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처럼 가느다래져 있었다. 어쩐지 허무한 것도 같았다. 한 달 동안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며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고작 일주일 만에 그 모든 시간들이 물거품이 될 줄이야.

임신한 상태에서 제대로 식사하지 않는다면 몸이 축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예르넨의 상태는 그보다 심각했다.

본디 남성 오메가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 오메가보다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예르넨이 들어와 있는 몸은 18년 동안 일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왔기에 무척이나 약한 몸이었다. 그랬기에 신관도 의원도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건강에 유의, 또 유의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임신의 모든 과정을 버텨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라일은 그 ‘과정을 버텨 내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혹시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그 빌어먹을 돌팔이들이 말했던 일들의 전조증상이라면, 이대로 예르넨의 몸 상태가 점점 심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젠장.’

최악의 최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자 라일의 기분은 금세 진창에 처박힌 것처럼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일은 그런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예르넨에게 매달리듯이 안겼다.

“아윽…! 야!”

그리고 얼떨결에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을 박아야 했던 예르넨으로부터 짜증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라일은 정말로 개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파묻고는 목덜미에 대고 코를 간질이며 페로몬을 풀었다.

“황제도 황후도 편한 직업은 아니야.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니까.”

라일은 예르넨의 목덜미에 머무는 미미한 잔향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결 안정된 모양이었다.

페로몬을 다룬 지 고작 삼 년이 채 안 된 데다가 숨겨 두기만 할 뿐,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 예르넨은 페로몬을 조절하는 데 있어서 서투른 편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으면, 솔직하지 않은 주인과는 달리 무척이나 솔직한 페로몬은 주인이 느끼는 감정의 결을 세세하게 드러내고는 했다.

라일은 예르넨의 기분이 풀렸음을 확인하고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살펴보아 대개 예르넨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그의 페로몬이 부족할 때였다.

틈틈이 들르면서 최대한 페로몬을 전해 주기는 했지만 늘 곁에 붙어 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 함께 식사한다면 나아질 터였다.

“뭐라도 먹고 씻는 게 어때?”

라일은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예르넨은 늘 투덜거리면서도 말하는 대로 따라 주었으니 이번에도 같을 거라고. 하지만 예르넨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는 무척이나 다른 것이었다.

“…?”

예민하던 신경이 많이 누그러졌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풀려나오던 페로몬이 뚝 끊겼다. 그와 함께 잔뜩 풀어져 있던 몸도 경직이 되었다.

라일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예르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시야에 보이는 건 짙은 잿빛이 감도는 금발의 조그마한 정수리뿐이었다.

“…나는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명백한 거부의 몸짓을 담아 라일을 밀어냈다. 씻으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 거부의 몸짓에 라일은 한 번 더 밀어붙여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며 말했다.

“황후께서 식사하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오랜만에 같이 씻을까?”

“…….”

하지만 의아하게도 예르넨으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

주먹을 꾹 쥐고 라일을 밀어내던 솜방망이는 그대로 가슴팍에서 멈춰있는 채였다.

“예르넨?”

라일은 의아하다는 듯이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러고는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난 마른 어깨가 잘게 떨려 오는 것을 보았다.

“예르넨…!”

당황한 라일은 예르넨을 안아 올리려고 했지만, 예르넨은 그런 그의 팔을 날카로운 손길로 짝 소리 나게 때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건드리지 마.”

예민함이 한껏 서려 있는 목소리에서는 옅은 물기가 묻어났다.

라일은 혀가 잔뜩 굳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에는 그리도 쉽게 나오던 능청스러운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정말이지… 예르넨이 울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잘게 떨려 오는 마른 어깨를 당황스럽게 내려다보던 라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미미하게 페로몬을 푼 뒤 예르넨을 안은 채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가슴팍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다.

폭신한 이불에 감싸인 등을 도닥이며 라일은 예르넨이 진정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본인의 과거를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말실수를 한 걸까.

사실 잘못을 꼽자면 끝이 없긴 했었다. 임신한 반려를 일주일씩이나 혼자 둔 것도,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도 전부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허나 예르넨은 그런 일에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짜증을 낼 뿐.

‘그렇다면 뭐지?’

문득 라일의 머릿속에는 황후궁에 오기 직전, 테네스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고, 행사 중간에 세실과 얼굴을 마주한 뒤로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는 말이었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자세히는 물어보지 못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르넨이 세실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얼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라일은 예르넨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끌어내고서는 물었다.

“예르넨, 혹시 세….”

“…고파.”

하지만 그가 물음을 던지려는 순간, 이불 뭉치 속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라일은 도톰한 이불에 바짝 고개를 대고는 물었다. 그리고 그런 라일의 귀에 대고 예르넨은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배고프다고!”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라일을 확 밀어내고는 이불을 끌어다가 온몸을 감싼 채로 공처럼 몸을 작게 말았다.

“…….”

그러고 보니 테네스가 말했던 건 세실과 관련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늘 예르넨이 먹은 거라고는 물과 라즈베리 퓨레가 들어간 초콜릿 반 입, 푸딩 한 스푼뿐이라는 말도 있었지.

예르넨을 내려다보는 라일의 얼굴이 무척이나 심각해졌다.

그리 며칠 동안이나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데다가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은 한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입덧이 다시 심해진 거야?”

바로, 입덧이 다시 심해졌다는 것.

라일은 예르넨이 먹을 수 있을 만한 게 무엇이 있을지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맛도 향도 나지 않는 크래커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당장 멜리사를 불러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석연찮기도 했다. 일전에 입덧이 있었을 때 예르넨은 분명, 그의 페로몬이 있을 때는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예르넨은 그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라일의 얼굴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입덧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라일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린 끝에 한가지 가능성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라일은 어린 시절, 겨울마다 대공령의 인근에서 기승을 부리는 마물들을 토벌하기 위해 가신들과 함께 북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신들은 함께 하는 어린 공자를 기특해하며 종종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고는 했었다.

그중 막 출산을 한 아내가 있었던 가신은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첫눈이 내린 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라즈베리가 남아 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노력이라도 해 볼 걸 그랬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생라즈베리를 그렇게 찾았는데… 제가 이미 철이 지났다며 설탕에 절인 라즈베리를 가져다주었는데 그 일로 아직까지도 화가 나 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가신은 이거라도 가지고 가야겠다면서 라즈베리를 양껏 따서는 소중하게 자루에 담았었다. 만약… 입덧이 아니라면 그 가능성 역시 생각해 볼 법했다.

그렇지만 이상했다. 예르넨은 먹고 싶은 게 있다 해도 홀로 앓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예르넨에게 있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촉이 왔다. 예르넨에게 닥친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는.

“예르넨, 혹시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는 거야?”

“…….”

이불 뭉치 속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은 그게 긍정의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라일은 이불 뭉치를 들어 올려서 꼭 끌어안고는 도닥이며 물었다.

“뭔데?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못 구할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원한다면 당장 저 먼 북해에 있는 물범이라도 사냥해 올 테니까.”

그러나 다정한 물음에도 예르넨은 이불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예르넨은 뒤늦게 부정의 말을 했지만 이미 확신한 라일은 전혀 믿지 않아 하며 말했다.

“못 믿는 거야?”

“아니라니까?”

“예르넨, 네 남편을 좀 믿어 봐. 이래 보여도 황제잖아?”

라일은 예르넨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애원의 말을 읊었다. 몇 번이나 제발이라는 말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예르넨은 여전히 부정하며 그를 밀어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결국 밀어내도 밀어내도 뻔뻔하게 들러붙는 라일을 떼어내지 못한 예르넨은 잔뜩 지쳐서는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애초에 무언가를 제대로 먹은 지 너무 오래되어 대거리를 할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예르넨은 어쩔 수 없이 가늘게 떨려 오는 손을 꽉 말아 쥔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섬에 있을 때… 나무 열매를 먹었어.”

“…나무 열매?”

“그래.”

그 말을 듣자마자 라일의 낯빛은 단번에 굳었다. 예르넨이 그토록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르넨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았었다.

“그 열매가 뭔지는 몰라. 그냥… 나무에 열려 있었으니까 먹었어. 먹을 게 없었으니까.”

예르넨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개는 시고 떫었고, 몇 개는 먹으면 배탈이 났지. 그런데 그중 몇 개는… 맛있었어.”

섬에는 과실수는 없었지만 이름 모를 작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은 꽤나 많았다.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될 때면 열매는 무르익었고 허기를 달래 줄 만큼 열리곤 했었다.

빈말이라도 황자궁에 있었을 때 먹었던 것들과 견줄 만큼 맛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예르넨은 그 열매들을 좋아했다. 먹을 수 있는 시기가 한정적이기에 유독 그랬을지도 몰랐다.

열매들은 대개 여름과 가을에 열렸고 겨울엔 전무했다, 봄도 겨울보다는 상황이 낫긴 했지만 비슷했다. 봄에는 열매가 잘 열리지 않았고 무르익지 않아 시고 떫은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한 종류 있었다.

그 열매는… 여름이나 가을에 열리는 것들보다도 훨씬 달았고 맛있었다. 아마도 겨우내 단 한 번도 단 걸 먹지 못했다가 먹게 되어 더 달게 느꼈을지도 몰랐다.

새빨갛고 작은, 새콤달콤한 열매.

그 나무 열매가 먹고 싶었다. 지독히도.

며칠째 그 생각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단 걸 먹고, 섬에서는 먹지 못하는 고급스러운 과일을 먹어도… 맛도 향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물마저도.

충동은 점점 심해져 최근에는 자나 깨나 그 열매를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그 상태로 일주일을 보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평생 스스로가 식탐이 있다고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며 살았는데 이 감정이 정말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열매 하나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끝도 없이 밀려오는 감정이 극에 달해 눈물이 나는 것도 모두 짜증이 났다.

“알았어.”

그리고 라일은 그런 예르넨을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가지고 올게.”

“…….”

됐다고, 그 섬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일은 대답 없는 예르넨을 대신해서 본인도 모르고 있을 속마음을 다정히 속삭여 주었다.

“빨리 올게.”

말을 마친 라일은 이불 위에 옅게 키스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문밖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문을 지키고 있는 이는 총 둘이었다. 최근 시종직에서 예르넨의 호위 기사직으로 보직이 변경된 러셀과… 테네스 트리지아.

“…….”

라일은 냉랭한 눈으로 테네스를 바라봤다.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데리고 갈만한 사람은 저놈 한 명뿐이었다.

홀로 섬에 있을 나무 열매를 찾아 헤매는 멍청한 짓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고 와야 하니까.

그렇기에 섬의 지리를 알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예르넨에게 있었던 일을 모르는 다른 이들이 섬을 밟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여나 말이 새어 나갈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니 선택지는 자연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테네스 트리지아, 놈을 데리고 가는 것.

“러셀.”

“예, 폐하.”

“멜리사와 시동을 불러 예르넨의 시중을 들어라. 10분 정도 있다가 들어가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 말한 러셀은 멜리사를 부르기 위해 자리를 떴다.

테네스는 멀어지는 러셀의 뒷모습을 한번 살피고 라일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예르넨의 곁에 머무르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시선이었다.

그런 테네스를 보며 라일은 가라앉은 눈을 하고는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나와 갈 데가 있다.”

“어디입니까.”

“예르넨이… 나무 열매가 먹고 싶다고 하는군. 황궁 북부의 호수에 있는.”

“…….”

그 말에 테네스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커다란 달이 떠올라 어두운 호수의 표면을 비췄다. 노를 저을 때마다 달빛이 이지러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간 끝에 라일은 북부 호수의 중앙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익.

발걸음이 내디뎌지자 나무로 된 낡은 선착장의 바닥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럼에도 둘은 그 길을 말없이 걸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빛 하나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달이 밝은 밤이었기에 주위를 구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군.”

그리고 오두막에 도착할 때까지 주위를 둘러본 라일이 내리는 평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섬에 있는 거라곤 오래된 선착장, 거대한 모래밭과 숲. 그리고 나무로 된 낡은 오두막뿐이었으니까.

라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이후, 이 섬에 온 적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따로 정리하라는 명은?”

“그 역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그대로겠군.”

“그럴 겁니다.”

라일은 이 섬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그의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두막 안은… 아마도 예르넨이 살았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라일은 어두운 낯을 하고는 녹이 슨 문고리를 돌려 낡은 나무 문을 열었다. 거슬리는 뻑뻑함이 느껴지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

열린 나무 문 너머를 구분하는 것은, 밖을 구분했던 것처럼 힘들지 않았다. 커다란 창 너머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을 충분히 밝히고 있었으니까.

라일은 손에 쥐고 있던 랜턴을 들고 주변을 비춰 보았다. 그리고… 빛이 비치자 열악한 내부는 더욱더 여실히 드러났다.

“…하.”

예르넨이 섬을 나오고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두막의 안에는 그만큼 먼지가 쌓이고, 생활감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말하면 그 이외에는 전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일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테네스에게 물었다.

“어떻지.”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과거의 것과 같은 풍경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테네스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뒤, 바닥에 놓여 있는 단검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헤리엇의 수하들도 이곳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런가.”

라일은 걸음을 옮기며 오두막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실은, 살펴볼 것도 없긴 했다. 있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오두막에 있는 거라곤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 갈색 녹으로 뒤덮인 철제 프레임 하나와 그 위에 있는 얇고 지저분한 매트리스, 그리고 벽난로뿐이었다.

라일은 침대로 걸어가서는 이불을 들어 올렸다. 얇은 이불은 여기저기가 헤어지고 찢어져 곳곳에 솜이 드러나 있었으며, 군데군데 핏자국으로 추정되는 지저분한 얼룩이 있기도 했다.

그 곁에는 찢어진 옷가지, 검은 얼룩이 묻어 있는 쇠로 된 도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에 한 꺼풀 내려앉아 있는 먼지가 음산함을 더했다.

그 모든 것들을 살피며 라일은,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맺혀 가는 기분을 느꼈다.

예르넨이 이런 곳에서, 이토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몇 년씩이나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테네스가 아니라고 말하길 바랐던 것도 같았다. 본디 이렇지는 않았다고.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사용인들이 값이 나갈 법한 귀중품이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들고 가 이것밖에 남지 않은 거라고. 본디 예르넨이 살았던 삶은 이보다는 나았었다고.

갇혀 있을지언정 황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받으면서, 몰락한 귀족이 받을 법한 처우 정도는 받으면서 그렇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가 가정한 그 어떤 상황보다도 지독했다.

“폐하.”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라일에게 테네스가 말을 걸어왔다.

“…뭐지.”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라일이 침대에서 두어 걸음 떨어지자 테네스는 침대로 다가가서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철제 프레임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이 낡아빠진 오두막과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장신구였다.

라일은 그 장신구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

그것은 지금 그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꼭 같은 모양새의 물건이었다.

“예르넨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곳에 펜던트를 두고 왔다고. 하지만 이후 섬에 오기를 원치 않아 하셨기에 영영 찾지 못하셨습니다.”

테네스는 말을 끝마치고는 라일의 손 위에 펜던트를 올려 주었다. 받아든 펜던트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으며,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라일은 펜던트를 들고 천천히 살폈다. 자주 여닫았는지 펜던트는 매우 닳아 있었다. 마치 그의 것이 그런 것처럼.

이 오두막에 홀로 갇혀, 몇 번씩이나 펜던트를 열어 보았을 어린 예르넨이 남긴 흔적이었다.

“…하.”

라일은 펜던트를 꽈악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어 오두막의 전경을 한번 훑어본 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우선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나무 열매를 가지고 황후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공간을 살피는 것은 조금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 * *

“어머, 도련님! 폐하께서 오셨네요!”

문을 열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라일의 시선은 곧장 침대에 기대어 앉아 못이 박힌 듯 문을 바라보고 있는 예르넨에게로 향했다.

창밖은 여전히 새벽의 어스름에 잠겨, 모두 잠이 들어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잿빛이 내려앉은 금발은 잘 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곱슬기 때문에 여기저기 조금 삐쳐 있었다. 그 아래 자리한 얼굴은 자그맣고 새하얬다.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마르긴 했지만 새하얀 피부는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보드라운 옷감으로 지은 잠옷은 조금 마른 몸을 따스하게 감싸 주고 있었으며, 소매 아래에 놓여 있는 마디가 가늘고 하얀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전의 생애와는 전혀 다른 몸이었다. 그럼에도 예르넨과 눈을 마주하는 게… 어쩐지 쉽지 않게 느껴졌다.

“어느 열매인지는 모르겠어서 작고 빨간 열매는 모두 따 왔어.”

그렇게 말한 라일은 세 개의 바구니를 침대에 내려다 놓았다. 바구니를 보는 예르넨의 눈에 순식간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예르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람들을 둘러보며 자리를 비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울 때까지 시큰둥한 얼굴을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예르넨은 뭐하냐는 얼굴로 라일을 바라봤다.

“너는 왜 안 나가?”

상대를 무안하게 하는 냉한 눈빛이었지만, 라일은 그 냉랭함 뒤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았기에 예르넨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앉고는 말했다.

“그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먹여 줄게.”

“됐어.”

그런 라일의 말에 예르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라일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라일이 앞에 놓아주는 세 개의 바구니를 바라볼 뿐.

라일은 그 눈에 순식간에 맺혔다 사라진 옅은 그리움을 찾아냈지만, 모르는 척했다.

예르넨은 중앙에 있는 제일 붉고, 가운데에 옅은 선이 그어져 있는 열매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이거야. 다른 건 너무 셔서 먹을 수 없거나 먹게 되면 배탈이 나니까 버려.”

“…그래.”

배탈이 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미 먹어 보고 크게 탈이 났었다는 말과 같은 소리였다. 예르넨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라일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라일은 두 바구니를 아래로 내리면서 가라앉아가는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꽤나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르넨은 바구니에 한가득 담겨 있는 열매에 푹 빠져서는 라일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먹는 열매는 무척이나 달았다. 옅게 나곤 했던 새콤한 맛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들어갔다.

오물거려지는 양 볼은 마치 겨울잠을 위해 먹이를 양껏 먹는 다람쥐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작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열매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 바닥을 본 예르넨은 평소라면 결코 짓지 않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며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앞으로 스윽 하고 똑같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작고 붉은 열매에는 이전의 바구니처럼 옅게 물이 맺혀 있었다.

“…!”

새로 생겨난 바구니를 보는 예르넨의 볼이 미미하게 밝아졌다.

“혹시나 내일 아침에도 찾을까 봐 많이 따 왔어.”

그 말에 예르넨은 기분 좋은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잘했네.”

그러고는 다시 바구니를 들어 올리고 안에 들어 있는 열매를 먹으려던 예르넨은 순간 크게 움찔거렸다.

“…….”

서서히 당황으로 물들어서는 새파랗게 질려가는 예르넨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일은 바구니를 받아서 들고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예르넨을 바라봤다.

“왜 그래…?”

“배가… 이상해.”

배에 손을 얹은 예르넨은 다시금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미미하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고, 라일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예르넨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무언가가 라일의 손에 툭 하고 아주 작은 진동을 일으키고는 사라졌다. 그 작은 움직임은 무척이나 이상했지만, 어딘가… 감격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태동… 인 것 같은데.”

“태동…? 이게…?”

“발렌의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 느꼈던 거랑… 비슷한 촉감이야.”

예르넨이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이가, 예르넨과 그의 아이가 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낀 건… 처음이었다.

더없는 환희가 심장을 가득 메우고 넘쳐흘러서는 온몸을 채우는 것 같았다.

“…….”

이 안에, 예르넨과 그의 아이가 있었다.

“귀 대 봐도 돼?”

“…그러던가.”

미미한 쑥스러움이 담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미소 지은 라일은 예르넨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툭, 툭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척이나 힘찬 발길질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라일의 곁으로 미미하게 페로몬 향이 퍼져 나왔다. 마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기가 이 열매가 마음에 들었나 봐.”

“…그럴 만도 하지. 며칠 동안 이거만 찾았으니까.”

예르넨은 새하얀 손을 라일의 곁에 가져다 댔다. 신기하다는 듯이, 또 어색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아이가 신호를 보내기를 바라며.

라일은 그 손을 말아 쥐고는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가볍게 키스했다. 라일은 예르넨의 새하얀 손 위를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며 작게 키스를 남기다 이내 손목에 얼굴을 묻었다.

손목에서는 조절하지 못한 페로몬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어색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주인이 숨기고 있는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속삭여 주는 듯이. 달달하고 포근한 향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라일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향에 빠져 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예르넨.”

“…왜.”

“예르넨, 예르넨….”

예르넨은 말없이 달라붙어 오는 라일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 손길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다정했다.

“나는 어쩌면, 오늘을 위해서 살아온 것만 같아.”

라일은 제 손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지만, 그에게 있어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손등에 키스했다.

어쩐지, 입안에 달콤한 나무 열매의 과즙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순간이 묻어나는 기억은 무척이나 쌉싸름한 맛이 났다. 하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기억이 더없이 달콤하다면,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이 남긴 씁쓸함마저도 모두 몰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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