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라일에게 돌아간다면….”
말을 하던 예르넨은 입술을 꽈악 깨물고는 테네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씻을 거니까 꺼져.”
“폐하!”
“테네스 트리지아.”
예르넨은 차가운 얼굴로 테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했던 말을 또 해야 알아들을 건가. 나가란 말 못 들었어?”
“그건…!”
하지만 거듭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테네스는 여전히 방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예르넨은 짜증 어린 얼굴을 하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물을 틀었다.
“옷 벗는 꼴이라도 볼 셈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결국 실컷 빈정거림을 들은 뒤에야 테네스는 묵례하고 방을 나섰다.
예르넨은 테네스가 방을 나서는 내내 물줄기만 바라보며 그에게 한 자락의 시선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테네스가 완전히 방을 나섰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물을 잠갔다.
“…….”
라일에게 돌아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테네스는 그를 어떻게 해서든 라일의 곁에 데려다 놓을 셈인 것 같았다. 설령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는 테네스를 떼어 놓고 저스틴과 둘이 행동할 수밖에.
예르넨은 욕실에서 나와 맞은편에 위치한 창문을 열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비록 지금 머무르고 있는 방은 2층에 위치하긴 했지만 차양이 완만하게 늘어져 있어서 제대로 발을 디디기만 한다면 내려갈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할 만할 것 같은데.’
그렇게 모든 계산을 끝마친 예르넨은 가볍게 창틀 위에 올라서는 차양을 따라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이며 훌쩍 뛰어내렸다. 몸집에 비해 커다란 후드가 바람에 날려 넘어가며 잿빛이 섞인 밝은 금발이 햇살 아래에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던 대로 지상에 착지한 예르넨은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작게 욕설을 흘렸다.
“젠장….”
충격을 받은 발목으로부터 화끈거리는 감각이 올라왔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통증이 심했다. 그렇지만 아프다고 해서 멈춰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예르넨은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메가가 알파 없이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 때문에 곤란해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로 인해 몸이 아프다고 해도…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그러니 예르넨은 설령 어떤 고통이 닥친다고 한들 그것마저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리 반대하고 있지만, 예르넨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테네스도 결국은 별수 없이 예르넨의 말을 들어 줄 것이다.
어찌 되었건 테네스는 예르넨이 진정 원하는 길이 있다면 언제나 곁에서 함께해 줬으니까.
그 길이 설령 가시밭길일지라도.
광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여관을 잡았기에 다시 광장에 도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낯 뜨거운 일인극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인 건지 열연을 하던 배우는 주변에 몰려든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은 괜히 주변을 의식하며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의 벤치에 앉아서 성의 입구를 바라봤다.
성을 나와 여관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이 광장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니 이곳에 앉아 있으면 저스틴이 나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번 샤워를 하면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예르넨의 특성을 아는 테네스는 예르넨이 그를 부를 때까지 우직하게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스틴이 에런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리도 없고.
그러니 저스틴이 성을 나오는 때에 맞춰 중간에 녀석을 채간다면 완벽하게 테네스를 따돌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팔짱을 낀 채로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서는 저스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늘 정중앙에 떠올랐던 태양이 조금 기울었을 무렵이었다.
마차 한 대가 예르넨의 앞으로 다가왔다.
“…?”
예르넨은 주변을 살피고는 얼굴에 의아함을 담은 채로 마차를 바라봤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쓸데없는 동상과 담벼락, 그리고 가로수뿐이었다. 마차에 타고 있을 사람이 들를 가게 하나, 만날 사람 하나 없이 예르넨 혼자만 덩그러니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마차가 서다니…어딘가 수상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한 기운을 느낀 예르넨이 자리를 뜨기도 전에 마차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내렸다. 집사복을 차려입은 어딘가 비열해 보이는 인상 하나와 키가 크고 힘이 셀 법한 덩치 하나였다.
그중 비열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내가 정확히 예르넨에게 시선을 주면서 정중하게 손 인사를 했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
예르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자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렸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가늠하듯이.
그리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으로부터 변변한 대답 한마디 듣지 못하자 남자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시지요.”
“그분?”
“예.”
그렇게 말한 남자는 호선을 그리며 미소지은 채로 성을 흘끗거렸다. 그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간다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 에런 파르타슈, 서부 최강의 기사일 거라는 소리였다.
그럴싸했다. 사내는 집사들이 입을법한 복식을 하고 있으며 몸 쓰는 일을 대신해 줄 몸종을 데리고 있었고, 같이 온 마차는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예르넨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들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에런 파르타슈가 사람을 보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저스틴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리도 없었거니와, 만약 말을 해서 에런이 그가 살아 있는 데다가 현재 파르타슈 령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고 해도, 녀석은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맨발로 성을 박차고 나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광장 한복판에서 미친놈처럼 예르넨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찾으면 찾았지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쳐 두더라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했다. 특히나… 말투가.
황족인 예르넨이 아는 언어라곤 제국어 하나뿐이었다. 신의 자손인 그에게 감히 야만인이나 사용할 법한 타국의 언어를 가르칠 이는 제국에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허나 그렇기 때문에, 제국어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구사하는 예르넨이었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상대의 말투에 섞여 있는 미묘한 타국어의 뉘앙스를.
그리고 막간의 시간을 통해 얻어 낸 정보들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한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타국과 관계된 사람이며, 지금 그에게 닥친 상황이… 꽤나 위험하다는 것.
“자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시 낭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젠장. 하필이면….’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더니 옛말은 틀릴 게 하나도 없었다. 현 상황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 같은 일인극이 다시 시작되고, 온 광장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최악이었다.
예르넨이 지금 있는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광장의 구석이었다. 게다가 거대한 마차가 시야를 가리고 있기에 그가 있는 곳은 광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급함을 알릴 만한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뿐이었다. 소리를 질러서 관심을 끄는 것.
그런데 지금 그 유일한 방법마저 저 낭독회인지 뭔지 하는 빌어먹을 소리와 환호성 때문에 막힐 위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싸움을 해서 도망치는 방법이라도 택하겠지만… 당사자가 예르넨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이쪽이 가진 건 책 한 권 드는 것만으로도 팔이 떨려오는 약하디약한 몸이었고, 저쪽이 가지고 있는 건 예르넨의 몸 셋을 합친 것보다도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부하였으니까.
‘환장하겠군.’
예르넨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생로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잡혀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 잘못 본 것 같군.”
그리 말한 예르넨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서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두 사람이 예르넨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예의 비열한 낯짝을 한 인사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들켰네?”
그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르넨은 그들 사이를 제치고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놈의 부하가 더 빨랐다. 우락부락한 팔이 순식간에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도망치는 예르넨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꽈악 감싸 왔다.
“아윽…!”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강인한 힘이었다.
“감히 지금 뭐 하는…! 으읍…!”
그리고 순식간에 뒤에서 뻗어져 온 두터운 손이 예르넨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축축한 액체가 묻은 손수건으로 예르넨의 입과 코를 감쌌다.
“흐읍…!”
손수건에 묻어 있는 액체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숨을 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챈 덩치가 예르넨의 허리를 감싼 팔에 한층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커흑…!”
예르넨은 배를 압박하는 손을 밀어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호흡은 가빠져만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의식을 되찾고 가장 처음 잡힌 감각은 덜컹거리는 땅의 움직임과 지독한 허기였다.
예르넨은 꿈쩍도 하지 않으려 하는 눈꺼풀을 겨우겨우 움직여 눈을 떴다. 그런 예르넨의 시야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채념한 얼굴을 하고는 손발이 묶인 채로 지저분한 바닥에 널려 있는 열댓 명 남짓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들처럼 꼼짝없이 묶여 있는 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윽….”
예르넨은 꽉 묶인 손과 발을 풀어내려고 몸을 비틀었고 움직이자마자 느껴지는 발목의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젠장….’
예르넨은 직감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고.
주변의 상황으로 돌아봤을 때 이곳은 분명 서부에서 기승을 부린다던 노예 상단의 마차인 것 같았다.
“하.”
어이가 없었다. 테네스와 떨어진 그 잠깐 사이에 노예상에게 붙잡히다니. 그것도 한낮의 광장에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상황을 곱씹고 있는 예르넨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예르넨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것은 어두운 갈색 머리와 녹안을 가진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애였다.
“…?”
헌데 왜일까. 어쩐지 오늘 처음 보는 아이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한 것 같았다. 마치, 닮은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예르넨의 물음을 들은 아이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페이넌 왕국으로 팔려 가는 노예들을 가둬 두는 노예 마차 안이에요.”
그 말을 들은 예르넨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 봤지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때, 갑작스럽게 마차가 멈추고는 잘그랑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눈을 감기 전, 예르넨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놔줄 생각을 하지 않던 그 덩치였다.
바구니를 내려놓으려던 남자는 그를 노려보는 예르넨과 눈을 마주하고는 놀란 얼굴로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를 크게 소리치며 누군가를 불렀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덩치의 부름을 듣고 마차 안으로 들어온 것은, 덩치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기 전에 보았던 그 비열한 인상의 남자였다.
“드디어 일어났군. 약을 잘못 써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줄 알고 애가 닳았었는데 말이야.”
남자는 예르넨에게 다가가서는 휙 하고 후드를 벗기고는 턱을 거칠게 쥔 채로 이리저리 돌리며 얼굴을 살폈다.
비열함이 가득한 얼굴에, 약간의 감탄이 번졌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눈을 떴을 때에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하는군. 지금 당장에라도 내 마차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그리 말한 남자는 예르넨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예르넨은 턱을 잡은 손을 뿌리치고는 남자를 노려보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남자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노려보니까 더 꼴리는군. 뭐긴 뭐겠어? 그 잘나신 제국의 황족을 노예로 팔면, 얼마나 가치가 나갈지 재고 있는 거지.”
“…뭐?”
발끝부터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는 듯이 전신이 차가워져 갔다.
당혹감에 물든 예르넨의 얼굴을 본 남자는 잔인한 표정을 짓고서는 결이 가는 머리칼을 콱 움켜쥐었다.
“아윽…!”
“성문을 지날 때 봤지. 이 금발을. 이렇게 튀는 머리색을 가지고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우습기 짝이 없어. 선황이 황족들을 모두 죽였다고는 하나 몇 놈 정도는 떠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일 줄이야.”
남자는 머리채를 쥔 손을 끌어당겨서는 예르넨의 얼굴을 제 코앞까지 가져오고는 말을 이었다.
“서부에 온건 처음인 모양이지? 이곳에서는 방심하면 바로 우리 같은 놈들에게 끌려가는 법인데 말이야. 호위 기사인지 남편인지 알 수 없는 놈들도 냅둔 채로 혼자 돌아다니다니.”
큭큭.
노예상은 이를 드러내며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제국 놈들, 쓰레기 같은 새끼들. 그렇게 떠받들던 신의 핏줄이 왕국에서 성노예로 굴려진다는 걸 알면 아주 체면을 제대로 구기겠어. 게다가 오메가라니. 이거, 앞으로는 제국보다 왕국에 신의 피가 더 많이 흐르게 생겼어? 비록 처지는 딴판이겠지만 말이야. 같은 핏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상인의 얼굴에는 제국에 대한 적대감과 지독한 희열이 뒤섞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경매에 올려서 팔아 버리고 싶지만, 이쪽에 사정이라는 게 생겨서 말이야. 네놈은 귀한 분께 선물로 바쳐질 예정이다. 뭐,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팔려서 밑 빠지게 새끼나 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네놈한테는 다행인 일 아니겠어? 감사히 여기라고!”
말을 마친 노예상은 예르넨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풀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퉁퉁 부은 발목에 가차 없이 발길질했다.
“흐윽…!”
발목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에 예르넨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같이 자존심만 뻣뻣한 놈들은 다리 하나쯤 고장 나는 게 오히려 더 나은 법이지. 국경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망갈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예상은 마차를 떠났다. 나무 문이 닫히고 다시금 잘그랑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노예상이 떠난 마차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예르넨에게로 향했다.
“황, 황족이라니….”
“완전 끝이야…! 끝장이라고…. 황족까지 잡혀 오다니….”
사람들은 저마다 충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가 하면,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지독한 절망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는 옅게 흐느끼며 울기도 했다.
그 안에서 예르넨은 아픈 발목을 감싸지도 못한 채로 고통을 삼키며, 말을 걸어왔던 옆자리의 아이를 불렀다.
“너.”
“네, 넷?!”
아이는 전과 달리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예르넨의 부름에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오고 며칠이나 지났지?”
“이틀이요….”
그 말을 들은 예르넨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허기가 지더니, 녀석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이틀이나 지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안에 있는걸 보면 저스틴이든 테네스든 예르넨이 이들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고.
아마 저희끼리 예르넨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한 놈들은, 에런에게든 라일에게든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나마 이곳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노예상은 분명, 국경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거기에다가 이곳에 머무른 지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보이는 법이다.
아마도 이들이 향하는 곳은 파르타슈 령과 북부에 위치한 로네펠트 령의 중간 부근에 있는 왕국의 상업 도시, 메이슨일 것이다.
메이슨은 제국과 맞닿은 국경지대의 마을을 약탈하고, 제국민들을 납치하곤 했던 왕국민들이 국경 부근에서 노략질한 물건들을 거래하며 성장한 상업 도시였다.
그리고 서부와 북부의 제국민들에게 큰 반감이 있는 데다가 제 나라의 사람들을 팔아넘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헤리엇의 치세하에 메이슨의 노예시장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황제가 된 후 메이슨을 없애려고 했으나 도시의 방비가 지나치게 철저한 데에 비해 제국은 북부로 집중된 병력을 빼낼 수 없었기에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록 도시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군사 작전을 계획하며 조사한 적이 있었기에 예르넨은 메이슨 자체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르넨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은 분명 파르타슈 령에서 마차로 딱 일주일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남은 기간은 앞으로 5일 정도라는 소리군.’
불행 중에 다행인 점은 놈들이 아직 예르넨의 정체가 이 나라의 황후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머리색과 행색을 비추어 보아 숙청에서 겨우 살아남은 뒤 도망쳐서는 정체를 숨긴 채로 떠돌아다니는 황족 정도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이겠지.
물론… 지금 상황도 가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왕국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예르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덴버로부터 이렇게 끌려가서 불행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한 그녀의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조금 전 상인이 말했던 것처럼 다시는 제국 땅을 밟지 못한 채로, 이전의 생애보다도 훨씬 더 참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정체가 밝혀졌을 때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예르넨은 이 땅에 남아 있는 단 둘뿐인 황족이었으며, 손이 귀한 황실의 특성상 어쩌면 단 하나뿐일지도 모를 다음 대 황손을 품고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르넨 개인의 삶이 끔찍한 불지옥의 한복판에 던져지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두 나라가 서로에게 품은 적개심은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분명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예르넨을 빼앗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국은, 아니 라일은 왕국에게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흔들릴 것이다.
자칫하다간 제국 전체가 무너지고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은 엉망이 될지도 몰랐다.
결코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예르넨은 왕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무조건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좌중을 훑어봤다. 딱히 노예상의 끄나풀 같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알아보고자 하는 것들을 편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예르넨은 옆자리의 아이에게 재차 질문했다.
“잡혀 온 지 얼마나 됐지?”
“네? 잡혀 온 지요? 어어… 보름쯤 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노예상에 대해 아는 게 꽤 있겠군.”
그 말에 아이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많이는 알지 못해요. 매일 저렇게 잠가 두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거나 밥을 줄 때만 문을 열거든요. 그래도 요기 보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움직여 등 뒤에 있는 나무 사이의 틈을 보여 주었다.
“요기 나무 틈이 다른 데보다 벌어져 있어서 밖을 종종 보고는 했어요…!”
“그런가….”
조금 전 보았던 노예상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누구인지, 바라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 정도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밖을 꾸준히 관찰해왔다면 상단원들의 구성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테니 그것만 해도 꽤나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노예상들이 총 몇 명이 있는지 알고 있나? 조금 전에 보았던 저 둘을 제외하고.”
“원래는 열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곱 명밖에 없어요. 이틀 전에 무슨 귀하신 분께 연락을 한다면서 세 명이 따로 짐을 꾸려서 떠났거든요.”
‘일곱이라.’
예상을 웃도는 숫자였다. 하지만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력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되냐는 점이다. 예르넨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눈높이에 맞춰 물었다.
“그중에 힘이 세 보이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지?”
“힘이 세 보이는 사람이요?”
“조금 전에 바구니를 가져왔던 사람처럼 커다란 사람을 말하는 거다.”
아!
아이는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세 명인 것 같아요! 마차가 총 세 대인데 마부 아저씨들은 힘이 세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상단주랑 덩치 큰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바구니를 들고 왔던 아저씨처럼 엄청 커다랗구요!”
예르넨은 나무 틈 사이를 통해 밖을 살폈다. 확실히 아이의 말은 전부 맞는 듯싶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총 일곱 명이었으며 마차는 지금 예르넨이 타고 있는 마차를 제외하고 총 두 대가 더 있었다 그 외에 상단주가 따로 타고 다니는 걸로 추정되는 말이 한 필 더 있었고.
만약 도망친다고 해도…쉽게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상대의 기동성이 의외로 뛰어났다.
예르넨은 계속해서 밖을 살피면서 질문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는 얼마 뒤에 닫기지?”
“오늘이 다른 때보다 긴 편이었어요. 원래는 바구니만 넣어 주고 바로….”
아이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칠 생각인가? 하! 포기해. 한번 잡히면 끝난 거지. 여기서 도망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
예르넨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남자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키가 크고 덩치가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페로몬이 뒤섞여 있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알파인 것 같았다.
페이넌 왕국에서는 여성이나 남성 오메가를 성노예로 삼을 뿐 아니라 남자 알파를 노리개로 삼는 독특한 취향을 가진 귀족들도 있어, 알파 남성도 성노로 잡아가곤 했는데, 아마 그런 귀족들의 입맛을 맞춰 주기 위해 잡혀 온 케이스 같았다.
“소문도 못 들었어? 왕국의 노예상들한테 끌려가면 죽어서도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소문! 우린 그냥 다 끝이야! 끝난 거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격해지는지 절망과 분노가 묻어나는 남자의 어투는 점점 강해져 갔다. 그리고 그가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주변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쏠렸다.
물론, 그리 긍정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그들은 남자처럼 소리칠 힘이 없어서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미 모두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국의 노예상들에게 잡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분노한 눈으로 예르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달아나려고 한 적은 있나.”
“…뭐?”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시도한 적은 있냐고 물었다.”
그 말에 울컥한 남자는 예르넨에게 따지듯이 말을 쏟아부었다.
“도망이야 치고 싶었지…! 젠장! 그럴 마음은 굴뚝같다고! 그런데…손발은 묶여 있고 마차는 쇠사슬로 잠겨있어! 게다가 밖에는 장정들 투성이야! 어찌어찌해서 탈출한대도 밖에 있는 놈들을 따돌릴 수 없을 텐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을 가겠어!”
남자는 마치 예르넨을 원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야! 황족 놈들! 제국민들이 왕국에 노예로 잡혀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네놈들! 아니! 신경은커녕 오히려 잡아가라고 팔아넘기는 것 같이 굴더만! 젠장할, 이렇게 잡혔는데도 구하러 오지도 않고 말이야! 신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섬겼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
예르넨은 남자의 분노가 향한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것은 그의 잘못이기도 했다.
제국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방기한 것은 헤리엇이었지만, 그런 헤리엇이 황제가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예르넨의 잘못이었으며, 메이슨 대신 북부에 집중한 것 역시 예르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의 주장이 모두 맞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아무리 그런들 그것이 탈출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주저앉아 있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대로 국경을 넘어가 순순히 노예가 될 생각인 건가?”
“뭐?”
“누군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예르넨은 가슴속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나가지 않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냐는 말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돼.”
예르넨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하고, 체념하고, 누군가가 구하러 와 주기를 바라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네놈들이 져야 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좌중을 둘러본 예르넨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다.”
“…….”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나가려고 발버둥 쳐 볼 생각이다.”
예르넨은 한 명, 한 명 모두의 눈을 마주했다. 어떤 이는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는 복잡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들을 모두 살펴본 예르넨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중에서, 나와 함께 발버둥을 쳐 볼 사람이 있는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의 눈빛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체념과 포기를 대신해 그들의 두 눈에 자리 잡은 감정은… 혼란이었다.
그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적국에 팔려 가, 노예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함께하겠다고 나서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한 고통이 닥쳐올 거라는 생각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때, 주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
예르넨은 그 손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줄곧 예르넨의 곁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건네던 아이였다.
“저는 천사님이랑 같이 갈 거예요. 여기를 벗어날 거라구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이 마차 안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성인식을 치렀거나 이제 곧 성인식을 치를 예정인 사람들이었다. 어린아이는 단둘뿐이었다. 그런데, 성인조차 탈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망설이고 있는데 아이가 탈출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선 것이다. 어딜 보아도 무력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그건 그저 어린아이의 객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치기는, 때론 용기 없는 어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줄 때가 있는 법이었다.
결국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렇게 체념하면서 끌려만 다니고 싶진 않아요. 뭐라도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저도요, 지금 여기에서도 찐 감자만 주는데 왕국에 가면 더 심할 거 아니에요! 전 그렇게는 못 살아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사람들은 하나둘씩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젠장…. 나도… 데려가… 요.”
줄곧 반대의 말을 하던 남자마저도 예르넨의 탈출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
예르넨은 남자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딘가 재수 없어 보이는 그 표정에 남자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시선을 돌렸다.
순순히 남자로부터 고개를 돌린 예르넨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주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놈들이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말해 보도록.”
* * *
마차의 틈 사이로 밖을 살피고 있던 예르넨은, 곁에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참았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거야 멋있으니까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생뚱맞은 것이었다.
“뭐가 멋있다는 거야?”
“전부 다요! 천사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그렇게 잘 다루시는 거예요? 다들…완전 딴사람이 됐잖아요…!”
“…….”
루디의 말에 예르넨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곳에 있는 건 더 이상 체념이 가득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굳은 의지가 깃든 눈을 하는 사람들이었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예르넨은 방금 그 희망을 불어넣어 줬고, 사람들은 그에 응했다. 그렇게 된 이상 저리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보다 아까부터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그야… 황족이시기도 하고, 천사같이 생기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싫으시면… 음….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호칭이 낯뜨겁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름을 알려 줄 수도 없었고, 지어내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불렸던 호칭으로 부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폐하든, 전하든, 공자든. 전부 이런 자리에서 불릴 만한 호칭은 아니었다.
생각을 끝마친 예르넨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저 낯 뜨거운 호칭 말고는 딱히 불릴 만한 게 없다는 그런 결론을.
“…그냥 마음대로 불러.”
“와!”
루디는 기쁘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환호했다. 그러고는 애정과 흥미가 담뿍 담긴 눈으로 예르넨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있죠. 혹시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지?”
“천사님은 황족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혹시 귀족들도 많이 알고 계신가요?”
“귀족들?”
“네!”
루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사실 저는 고모를 찾고 있거든요.”
“고모?”
그리고 루디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해 주지 않은 말이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저희 엄마랑 아빠는 원래 제국민이었는데, 이렇게 저희처럼 노예상에게 잡혀서 왕국의 노예가 되셨대요. 그리고 그곳에서 두 분이 만나서 도망치신 뒤에 저를 가지셨죠. 비록 아빠는 계속해서 쫓아오는 추격대의 손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오랫동안 저를 홀로 키우시다가 최근에 국경을 넘을 때 돌아가셨지만요.”
“……”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이 있어요. 아빠는 사실 제국의 귀족이셨다구. 그러니 꼭! 꼬옥 아버지의 가문으로 가야 한다구요.”
“그런데 아버지의 가문으로 가기 전에 다시 노예상한테 잡힌 거군.”
“아, 하하!”
루디는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가문의 가주가 네 고모인 모양이고.”
“맞아요!”
결국 루디의 부탁이라는 것은 그녀의 고모에게 데려다 달라는 말이었다.
예르넨도 경험한 뒤에야 알게 됐지만, 확실히 수도와는 달리 서부는 결코 어린아이 혼자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마 홀로 내버려 둔다면 탈출한 뒤에도 다시 노예상에게 잡힐 가능성이 컸다.
그런 사실을 알고서도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데다가 이곳에서 탈출하기만 한다면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예르넨은 루디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승낙의 뜻을 알아들은 루디는 신이 나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그런 루디를 본 예르넨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데…네 아비의 가문이 어디지?”
“그게…뭐랬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려운 이름이었거든요. 엄마랑 여러 번 말하면서 외웠는데도 자꾸 깜빡깜빡하지 뭐예요?”
그렇게 말한 루디는 주섬주섬 뒷주머니를 뒤져서 반지 하나를 꺼내서 예르넨의 앞에 놓았다.
그 반지는 흠집이 잔뜩 나서 빛이 바래진 은반지였는데, 예르넨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귀족들이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가문의 인장을 새겨넣은 채 가지고 다니는 흔히 말해 신분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가주와 후계는 금으로, 그 외의 일원들은 은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곤 하니, 루디의 주장은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이 반지를 간직하고 있기 위해 어지간히도 노력했겠군.’
노예가 되면 보통 몸수색을 당하고 가진 것들을 모두 빼앗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국에 끌려가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반지를 빼앗기지도 잃어버리지도 않은 채 딸에게 물려주다니, 정말 천운이 따라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르넨은 반지에 각인된 문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문의 상징을 확인한 예르넨의 눈에 서서히 놀람이 번져갔다.
“어디 보자, 그….”
반지에 각인된 문양이,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로, 로네페로?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 새겨져 있는 것은 덴버의 가문, 로네펠트 가의 문양이었다.
* * *
쿵!
“윽, 젠장.”
돌부리에 걸렸는지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그 탓에 틈 사이로 밖을 보고 있던 남자, 알렉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온 알렉스는 밖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말했던 것처럼 낭떠러지를 오르고 있어… 요.”
알렉스의 어색한 존대를 들은 예르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준비하라는 듯이.
그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알겠다는 신호를 보내며 조용히 탈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표정들은 자못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면서 예르넨은 늘 박혀 있는 구석의 자리에 가만히 기대었다.
노예상들이 이 길을 택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르넨은 비록 메이슨을 침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슨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머리를 맞대며 지형을 파악하고 작전을 짰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의 머릿속 안에는 제국에서 메이슨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길을, 어떤 운송 수단을 통해 이동하는지를 알게 되면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예측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낭떠러지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 마차는 분명 선다.
비록 아직 노을이 막 번지고 있는 이른 축에 속하는 시간이었지만 이후로는 쭉 내리막길인 데다가 꽤나 험해서 쉴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차는 중간에 멈출 것이고, 그때 녀석들은 마차 안으로 식사를 넣을 것이다.
지난 사흘간 마차에 머물면서 노예상들은 늘 같은 패턴으로 움직였다. 하루에 두 번, 마차의 문을 열고 찐 감자와 물주머니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집어넣었다.
여기까지는 루디가 말해 준 것과 동일했다.
놈들은 노예로 팔려고 끌고 왔음에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든, 지치든,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예르넨에게만큼은 달랐다. 상단주는 늘 예르넨의 손발이 잘 묶여 있는지를 확인했고, 그 외에 몸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겠다는 명목으로 여기저기를 주무르다 떠나고는 했다.
정말이지 젠장 맞은 일이었다. 그 구역질 나는 손길을 느낄 때면, 이마가 축축해지고는 했다. 하지만 그 개 같은 짓거리를 당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놈들이 몸을 더듬는 그때가 바로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니까.
예르넨은 첫날, 같이 갇혀 있는 이들에 대해서 알아봤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르넨을 제외하고 총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었고, 그중에서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첫날 예르넨에게 쏘아붙이듯이 말을 했던 남자 알렉스와, 루디 다음으로 예르넨과 함께 탈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여자, 넬이었다.
알렉스는 말을 다룰 줄 아는 데다가 체구가 크고 힘이 세 노예상의 사람 한 명 정도와는 몸싸움을 할 수 있는 정도였으며, 넬은 놀랍게도… 정령사였다.
비록 다룰 수 있는 건 바람과 땅의 정령뿐이고 그마저도 아주 미약한 힘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작전을 짜는 데에는.
마차가 멈추고 야영 준비에 들어가면 놈들은 둘로 나뉘어 넷은 짐마차의 곁에 천막을 쳤고 셋은 불을 피우고 주변을 정리한 뒤 말에게 건초와 물을 주고 마차에 감자 바구니를 넣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마차에 감자 바구니를 내려놓은 상단주가 예르넨의 몸을 더듬는 그 순간, 넬이 모닥불과 천막 옆에서 건초를 먹고 있는 말의 눈에 모래를 퍼부을 예정이었다.
잠깐이면 되었다. 노예상들이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 마차에 신경 쓰지 못하는 잠깐의 텀만 주어진다면, 알렉스가 바로 뛰쳐나가 마차의 고삐를 잡고 그대로 지금까지 올라왔던 낭떠러지를 따라 내려갈 것이었다.
작전을 위해 지난 사흘간 차근히 준비해 두었다.
마차 문이 열린 틈을 타 정령을 이용해 노예상들이 가지고 있던 단도 중 하나를 들여와 손과 발을 결박한 밧줄을 풀었고, 끊임없이 상황을 살폈으며, 동선과 배치, 이후의 시나리오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법까지 전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시간이 닥쳐왔다.
부산스럽게 준비하던 모두는 완벽하게 제 자리를 잡았다. 알렉스는 문가에, 넬은 마차 틈 사이가 보이는 위치에, 두엇의 사람들은 그런 넬을 가려 주는 위치에, 늘 예르넨의 곁에 붙어 있는 루디는 예르넨의 옆에 있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완벽히 자리를 잡은 뒤 손과 발을 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이윽고 마차 밖에서는 야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예르넨의 귀에는 그 번잡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예르넨의 귓가에 크게 울리는 건, 온통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더니 잠금쇠를 완전히 풀어냈는지 마차의 문이 열리고 상단주가 들어왔다.
“오늘도 얌전히 있었던 모양이네?”
상단주는 찐 감자가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구석에 박혀 있는 예르넨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예르넨의 팔과 다리를 살피는 듯하다가 불쑥,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는 여기저기를 쓸어 대기 시작했다.
“…!”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지금껏 몸을 더듬긴 했으나 이 정도로 노골적인 손길이 건네져 온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리 봐도 이 배는 임신을 한 배 같단 말이지?”
“손, 치워…!”
예르넨은 가빠 오는 호흡을 바로잡기 위해 이를 악물고 상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렇게 식사가 부실한데, 날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잖아? 그렇게 되면 이미 손을 탔다는 소리고 말이야.”
예르넨은 그 말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르넨의 배는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우길 수 없을 정도로 불러 있었으니까.
“내일이면 넘겨야 하는데… 영 아쉽단 말이야?”
그렇게 말한 노예상은 예르넨을 반쯤 끌어안다시피 하며 남은 한쪽 손을 바지에 집어넣고는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 징그러운 손길에 예르넨은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내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상단주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은 채로, 그저 속절없이 떨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히이잉!
“으아악!”
말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밖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웬 소란이야?”
엉덩이 골 사이를 가르고 꽉 다물린 입구에 손가락을 지분거리며 당황으로 가늘게 몸을 떠는 예르넨의 반응을 즐기고 있던 상단주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 뭐야!”
그리고, 벌어진 광경을 살핀 그는 눈을 찢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뜨고는 재빨리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상단주를 주시하고 있던 알렉스 역시 무사히 그의 뒤를 따라 마차를 나섰고 말이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예르넨은 기진맥진한 채로 지저분한 바닥에 쓰러져서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천사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예르넨은 턱에 힘을 주고 이를 깨물며 밀려오는 구역질을 참아 냈다. 그런 예르넨에게 두엇의 사람이 달라붙어 손과 발을 동여매고 있는 밧줄을 끊어 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무사히 마부석에 오른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던 마차는 차츰 속도를 붙이며 거세게 달리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마차가 돌아가며 주변의 전경이 한눈에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마차 밖의 상황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예르넨 역시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움직이는 마차를 보고는 한껏 당황해서는 고함을 지르며 쫓아오는 노예상들, 엉망진창으로 날뛰며 주위의 모든 것을 짓밟고 있는 말, 그리고… 불타오르는 천막과 숲.
“…!”
시뻘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며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잘하면 작은 불씨 정도는 옮겨붙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장면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예르넨은 그의 뒤에서 열심히 밧줄을 끊어내고 있는 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광경을 만든 당사자이니까 뭔가 아는 게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저도… 저도 모르겠어요. 지금 진짜 당황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할 뿐이었다.
“분명 저는 다 같이 계획했던 대로 말이 물을 마시는 틈을 타서 모래바람을 일으켰어요. 그런데…그게 다예요. 알잖아요. 제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는 거. 저한테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잡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넬은 얼굴 주위에 날리는 머리칼을 바람을 훅 불어서 치우며 말을 이었다.
“계획대로 말은 날뛰었고, 여기저기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던 놈들은 말에게 시선을 집중했죠. 그러다가 말이 모닥불을 찼거든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지 뭐예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날씨를 보세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대기는 잔잔하기만 해요. 아까 전에 마차 구멍 사이로 밖을 봤을 때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갑자기 돌풍이라니. 황당했죠. 그 돌풍 때문에 천막에 불이 붙었고, 천막이 날아가 숲으로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산불이 났지 뭐예요?”
그때 알렉스가 마차를 쾅쾅 두드렸다. 내리막길에 진입하겠다는 신호였다.
그 신호에 말을 멈춘 넬은 제 배를 마차와 이어진 밧줄에 묶고는 한 손으로는 예르넨의 손을, 한 손으로는 루디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 신이 돕기라도 한 것 같네요. 안 그러면 말이 되질 않으니! 뭐… 어쨌든 저희한테는 잘된 일이죠.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손을 꽉 잡아요…!”
마차는 순식간에 내리막길에 진입해서는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그 속도를 이겨 내지 못한 예르넨의 몸은 당장이라도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갈 것처럼 날렸다.
“으윽…!”
버텨내는 일 분, 일 분이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 예르넨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며 배를 꽉 끌어안은 채로 버티는 것뿐이었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 저 멀리에서 언뜻, 말을 탄 노예상들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서서히 티끌에서 작은 점만 하게, 그리고 손톱만 하게 덩치를 키워 갔다.
아무리 같은 말이라고는 해도 마차를 달고 움직이는 말과 사람을 하나만 태운 말들의 기동성이 같을 수는 없었다. 녀석들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같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제길.”
쫓아올 것도 전부 가정을 하고 세운 계획이었으나, 막상 쫓아오는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아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조급함에 손바닥에 땀이 맺혀오는 것만 같았다.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어느 정도 저들과 거리를 벌린 채 내려가기만 하면 됐다.
이 앞에는 제국의 서부와 북부를 나누는 깊고 좁은 협곡이 있었고, 그 협곡에는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 아래에는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은 비록 작기는 하나 관리와 병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예르넨은 황제로 있던 시절 국경 지역 마을 중 일부에 페이넌 왕국의 침입을 알릴 수 있도록 연락소를 설치해 두라고 일렀었는데, 그 마을은 그중 하나였다.
모든 마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은 메이슨의 점령과 관련해서 써먹을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억해 두고 있었다.
비록 황제가 바뀌고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예르넨은 그 연락소가 존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라일이 동부의 직할령을 점령하기 위해 떠난 사이 예르넨은 잠시나마 국정을 운영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라일이 예르넨 시절에 만들어진 체계를 대부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연락소는 유지되고 있을 테고 다리를 넘어가기만 한다면 탈출에 성공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아래로 내려가서, 오래된 숲의 초입에 조성되어 있는 언덕을 오르기만 하면, 금방이었다.
그때, 또다시 알렉스가 마차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도착이라는 소리였다.
“다들, 준비하도록.”
예르넨은 굳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다. 직접 뛰어서 다리로 향해야 했다.
히이잉!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아윽….”
작게 신음을 흘린 예르넨은 배를 부여잡았다. 달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마차가 멈추고 나니 전신을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 여기저기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예르넨은 어지러운 머리를 끌어안고는 비틀거리는 채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고, 뒤따라 나온 루디를 안아서 내려 주었다.
마차 밖에는 이미 알렉스가 말과 마차를 분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알렉스가 머뭇거림이 담긴 얼굴로 예르넨을 보며 물었다.
“뭐가?”
“다리, 안 좋잖아…요.”
알렉스의 시선이 예르넨의 왼쪽 발목을 향했다.
일주일 전 저스틴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던 왼쪽 발목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진 상태였다.
제대로 된 부목 하나 없이 밧줄에 묶여 있었던 것도 발목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를 했지만, 그보다 더 발목에 무리를 준 것은 이틀에 한 번꼴로 행해지던 상단주의 발길질이었다.
“괜찮아. 이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빨리 출발이나 해.”
마차로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말이 달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교란을 하는 게 훨씬 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었기에 몇몇은 로브를 입은 채로 말을 타고 숲을 우회해서 이동하기로 결정이 났다.
말을 몰 수 있는 건 알렉스와 예르넨뿐이었고, 예르넨은 말을 탈 줄은 아나 썩 잘 타는 것은 아니었기에 말을 타는 건 알렉스와 어린아이 둘로 정해졌다. 그리고 지금 알렉스가 하는 말은 아이들 대신 말을 타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리가 불편하다고는 해도 다섯 살, 일곱 살짜리 어린애들보고 달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알겠어…요.”
예르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꽉 잡고 있던 루디의 손을 건넸다.
“천사님….”
루디가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을 거야. 조금 이따가 만날 거니까.”
루디가 새빨개진 눈을 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렉스를 바라본 예르넨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놓치지 말고 제대로 데리고 와.”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예르넨은 어둠이 덮여 가는 숲속으로 향했다.
“하아, 하아.”
폐가 쥐어 짜이는 것 같았고, 턱 끝까지 숨이 차고 올라와 금방이라도 목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제 정말 고지가 코앞이었다.
숲을 지나오는 내내,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기에 예르넨은 서서히 뒤처졌다. 발목이 말썽이었기 때문이다. 상태가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사흘간 땅을 디뎌 본 적이 없었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땅에 직접 발을 디디고 달리기 시작하자 그간 발목에서 느껴졌던 통증은 어린애 장난같이 느껴질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게다가 배가 당기듯이 아파 왔기에 정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언덕만 지난다면… 다리였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정말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쉬익.
“…!”
그리고 그때, 예르넨의 바로 곁에 있는 나무에 화살이 꽂혔다.
‘젠장.’
놈들이 기어코 따라붙은 것이었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예르넨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여기서 잡힐 수는 없었다. 화살을 맞는다고 한들 달려야 했다.
그렇게 겨우 탁 트인 언덕의 초입에 도달했을 때였다.
히이잉!
“아아악!”
말 울음소리와 함께 어린아이들의 쨍한 비명이 들려왔다.
“…!”
기어코 놈들이 쏜 화살이 말의 엉덩이에 맞은 것이다.
언덕을 뛰어오르던 말 위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이 한 번에 굴러떨어지는 게 보였고, 알렉스가 날뛰는 말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 하나를 안고는 다리 쪽으로 달리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그 아이의 머리 색이 금빛인 것도.
말 위에 타고 있던 아이는 둘이었다. 하나는 금발 머리를 한 다섯 살 난 남자아이였으며, 하나는 어두운 갈색 머리를 한….
“루디…!”
루디였다.
예르넨은 재빨리 언덕 주변을 살폈다. 언덕의 저편에 까만 옷이 뭉쳐져 있는 것 같은 실루엣이 보였다.
기절하기라도 한 건지, 그 실루엣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예르넨은 방향을 바꿔 루디를 향해 달렸다.
지금 바로 언덕을 오른다면, 다리를 지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놈들의 사정거리 안에 있기는 했지만, 이미 하늘은 온통 어두워져 있었고 까만 로브를 쓰고 있는 예르넨은 쉽게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냥 이대로 지나친다면, 루디는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다. 저대로 노예상에 끌려갈 거고 그런 루디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덴버는, 유일한 가족을 잃게 된다.
예르넨은 저스틴과 유리스를 통해서 다른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안에는 예르넨의 어록을 편찬하겠다고 날뛰는 에런의 이야기도 있었고, 여전히 예르넨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로지나의 이야기도 있었으며, 덴버의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덴버는 달랐다. 그녀는, 예르넨이 죽고 난 다음 3년간 단 한 번도 성을 나온 적이 없었다. 저스틴이 만나러 가도 만남을 거부한 채로 홀로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고 한다.
동생을 잃고, 부모님을 잃고, 예르넨마저 잃은 채. 덴버는 단단하던 심지가 완전히 부러져 버린 나무처럼 모든 것을 외면하고는 살아 있는 송장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예르넨은… 단 하나 남은 덴버의 혈육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가능할지도 몰라.’
어찌 되었건 루디가 쓰러져 있는 위치는 예르넨이 지금 있는 곳보다 훨씬 더 위였다. 그러니 루디를 안아 든 채로 달린다면 아슬아슬하게나마 다리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루디를 안아 든 예르넨은 다시 다리로 향했다.
심장이 목구멍에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그렇게 천근 같은 몸을 이끌고 죽을힘을 다해 달린 끝에, 저 멀리에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지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예르넨은 곁에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있어서, 노예상들이 모두 뒤처져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리 위에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한 남자가 나무 판때기를 든 알렉스와 대치를 하고 있었다.
분명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르넨은 익히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저자는, 두 갈래로 나뉘어 왕국으로 돌아갔었다는 세 명의 노예상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예르넨이 그렇게 의심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알렉스와 대치를 하는 와중에도 연신 다리를 건넌 사람들의 얼굴과 다리 뒤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봐도 예르넨을 찾고 있는 모양새였다.
“…젠장.”
예르넨은 루디를 안은 채로, 조용히 언덕 아래에 위치한 오래된 숲속으로 향했다.
“하아, 하아.”
예르넨은 거대한 나무 밑동에 짐승이 파 둔 것 같아 보이는 굴속으로 들어가서는 덜덜 떨리는 팔을 풀고 루디를 내려놓았다.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지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전신이 아파 왔다.
하지만 예르넨은 무너질 것 같은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서는 루디의 상태를 살폈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낙마를 한 데다가 정신을 잃었다. 게다가 안고 오는 내내, 숨소리가 이상하기도 했다. 어딘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루디의 옷을 풀어 상체를 살핀 예르넨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갈비뼈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했으며, 주위에 시뻘건 멍이 들어 있었다.
잘못돼도 정말 한참을 잘못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장 신관에게든 의원에게든 상태를 보인다고 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정말 끝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 하면 돼.’
딱 하나. 방법이 있었다.
예르넨은 주변을 살피고, 필요한 물건을 찾아내고는 꽈악 말아 쥐었다. 그걸 하면 반드시 루디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기였다.
예르넨은 아주 어릴 적, 베이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예르넨, 신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능력은 치유력이지. 그런데… 신의 피를 이은 우리가 치유력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
어느 날 갑자기, 티타임 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예르넨은 평소처럼 열없이 대답하려고 했지만, 되짚어 보니 이상하긴 했다. 신관에게 있는 치유력이, 황족에게는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네요?’
그리고 베이넌은 마치 무시무시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예르넨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치유 능력이 있단다. 비록 그 방법이 신관들과는 다르지만.’
예르넨은 그 의외의 말에 아비의 얼굴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를 이용해 맹약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비가 일전에 말해 주어서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치유력이랑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 있다마다. 신의 능력은, 우리의 피를 따라 전해지지 않니? 치유력도 마찬가지란다. 황족의 피에는 치유력이 깃들어 있어. 심지어 그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이란다.’
‘그런데 왜 알려지지 않은 거예요?’
‘몇 대 위의 교황에게 신탁이 내려왔다는구나. 황족의 피를 먹이는 것을 금기로 한다는 그런 신탁이.’
‘…?’
지금까지 신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신탁을 내릴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 신탁들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신탁이었다.
‘글쎄다. 신의 뜻을 이 아비가 어찌 알까. 그저 금기라고 하니, 뜻이 있으시겠거니 할 뿐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정말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다면 악용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면 능력 자체를 거둬가면 됐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고 금기로 정해진 게 의아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예르넨은 더 이상 의문을 제시하지 않은 채 착실히 금기를 지켜 왔다.
금기.
그것이 가진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금기를 어긴 이들에게 어떤 말로가 찾아오는지, 예르넨은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제국민들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신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키게 하려고 금기를 범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로 엮어서 어린아이들에게 읽히고는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대수인가 싶었다.
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르넨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황족이 신의 핏줄이라고, 신의 사랑을 받는 자손이라고들 말하지만, 예르넨은 이미 그 실상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신이 자신의 핏줄을 소중히 여겼다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할 땐 그렇게 간절히 불러도 대답 하나 않더니 금기 하나 어겼다고 벌을 내린다면, 이쪽도 따질 말이 있는 법이다.
예르넨은 뾰족한 돌을 들고는 그대로 팔을 그었다. 얇고 새하얀 팔에 송글송글 피가 맺혔고, 그 피는 이내 루디의 입속으로 흘러내렸다.
“으, 으음….”
사실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긴가민가했던 게 사실이었다. 말이라는 건 원래 전해 내려오면서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과연, 진짜였던 모양이다.
루디의 숨은 순식간에 고르게 변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지 내내 찌푸리고 있던 미간의 힘이 풀리며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직였고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눈과 마주하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 저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나요? 엄청 아팠던 것 같은데 멀쩡하네요…?”
루디는 신기하다는 듯이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 제 배를 문질렀다. 그리고 그런 루디의 상태를 살펴보고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예르넨은 진지한 목소리로 루디의 이름을 불렀다.
“루디 로네펠트.”
“네…?”
“내가 미끼가 될 테니 넌, 그 틈을 타서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예…?”
루디는 잘못 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양쪽 귀를 잡고는 슥슥 문질렀다.
“아니, 제대로 들었어. 너 혼자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했다.”
“왜, 왜죠? 싫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천사님! 같이 가요!”
옷깃을 꽉 쥔 채로 울먹이는 루디를 보며 예르넨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함께 도망친다면, 둘 다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며칠 동안 봐서 알겠지만…녀석들이 노리는 건 나뿐이다.”
“그건…!”
“그러니 내게 시선이 쏠리는 틈을 타서 도망쳐.”
“안 돼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맞아요! 여기서 아침이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는 방법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르넨도 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예르넨은 경험상 그것이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숲은 그리 좋은 은신처가 아니야. 결국은, 들키게 될 거다. 녀석들은 곧 내가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는걸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된다면 이 숲을 이 잡듯이 뒤질 테니까.”
하지만 루디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같이 방법을 생각해 봐요!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 돼요! 지금까지 신기한 방법들을 많이 생각해 내셨잖아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아니, 이게 바로 그 다른 방법이야.”
“네?”
울상을 하던 루디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예르넨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옅게 한숨을 쉰 예르넨은 말을 이었다.
“그냥 도망치라는 말이 아니야. 원군을 요청해.”
“원군…이요…?”
“네 반지, 그걸 들고 연락소로 가. 그리고 말해. 파르타슈 변경백을 만나고 싶다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내가 그려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팔을 그었던 돌로 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르타슈 변경백이 연락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도록 해.”
“어떻게요?”
“쓸데없는 낭독회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나를 구하러 오라고.”
국경을 넘어가면, 끝장이었다. 제국이 괜히 왕국으로 끌려간 노예들을 되찾아오지 못한 게 아니었다. 왕국에서 작정하고 숨기면, 결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메이슨까지는 최단 거리로도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더 걸렸다. 그리고 루디에게 알려 준 마을은, 아무리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걸어도 오늘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연락을 받은 에런이 덴버의 권한을 이양받아 시간 내에 서부와 서북부의 국경을 봉쇄하기만 한다면, 노예상들은 결코 국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르넨의 단호한 표정을 본 루디는 결국 꼬리를 만 채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변경백이라는 분한테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아직… 저한테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았잖아요.”
이름을 말했다가 혹여나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까 싶어 알려 주지 않았었지만… 루디는 딱히 예르넨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알려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예르넨. 이번에는 잊지 말고.”
“네…! 절대 안 잊어버릴게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루디를 내려다본 예르넨은, 그제야 그 얼굴이 누구를 닮아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늘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몰랐는데… 표정을 지우니 루디의 얼굴은, 덴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네 고모와 닮았군.”
“네?”
그 말에 루디는 퍼뜩 고개를 들고는 호기심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채로 예르넨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의 귀에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들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이다.
예르넨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러고는 입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몸을 일으킨 예르넨은 루디를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아이를 안심시키듯이, 마지막까지 눈을 마주치며.
잊지 마.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전한 예르넨은 나무 밑동에서 빠져나왔다.
예르넨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려다봤다. 흙이 잔뜩 묻어 지저분해진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떨리고 있는 손을 꽈악 말아쥐고는 달렸다. 적어도 도망치는 시늉은 해야 했다. 그래야 얌전히 잡혀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사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정신이 조금만 흐트러질라치면, 기억들이 밀려왔다. 고통으로 점철된 날들의 기억이.
외줄을 타는 것처럼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한 발만 삐끗하면, 과거에 겪었던 것보다도 더한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저기다!”
그래도, 예르넨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셈이었다. 전과는 달랐다.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라일은… 반드시 구하러 올 테니까.
‘빌어먹을.’
참으로 우습다.
그렇게 라일의 곁에서 떠나려고 했는데, 결코 녀석의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며 그렇게 자존심을 부렸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니까 떠오르는 건, 녀석뿐이었다.
“아윽!”
지척까지 다가온 누군가의 거친 손이 예르넨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 새끼가…! 감히 도망을 가?!”
짝!
“아악!”
상단주는 불타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같이 분노한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하아, 하아! 이 개 같은 새끼!”
“하윽….”
연거푸 뺨에 내리쳐진 매질에 예르넨의 오른뺨은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뺨이 정말이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고통은 학습된 공포를 불러일으켰기에, 예르넨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단주를 노려보는 두 눈에 서린 독기어린 기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아 있었다.
상단주는 그 반항적인 눈빛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예르넨의 뺨을 치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가는 부들부들 떤 채로 꽈악 말아쥐었다.
“젠장! 씨발! 그분이 지척까지 와계시지만 않았더라도 네놈은 내 손에 죽었어! 내가 피해 본 걸 다 보상받으려면 네놈을 제일 쓰레기 같은 매음굴에 팔아서 개처럼 굴려야 한다고!”
“아윽…!”
예르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목을 꺾을 듯이 젖힌 상단주는 분노로 온몸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시발, 웬일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더니…! 재수 옴 붙은 거였어! 제길!”
상단주가 다시 예르넨에게 손을 댈 기미가 보이자 조마조마한 눈을 하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던 덩치가 말리려는 듯이 이국의 언어로 말을 하며 상단주의 팔에 매달렸다.
“하아, 하아.”
하지만 뜯어말리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상단주는 예르넨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한참이나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 새끼… 결박하고, 개 목걸이 채워서 마차 바닥에 묶어 놔. 다시 또 도망가지 못하게!”
상단주의 말을 들은 덩치는 짧게 대답하고 거칠게 건네져 온 예르넨을 받아 들고는 어딘가로 끌고 갔다.
* * *
“읍…!”
“시발, 제대로 자세 잡지 못해?!”
퍽!
예르넨의 엉덩이 위로 거친 발길질이 쏟아졌다.
“다행인 줄 알아. 이 새끼야.”
그리 말을 한 상단주는 여전히 분노한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의 몸 위에 발을 올렸다.
“흡…!”
하지만 그 모욕적인 처우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은 몸부림치지 않았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덩치에게 끌려간 예르넨은 입고 있던 옷들이 모두 벗겨진 채로 차가운 강물에 던져져서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몸이 씻겨졌다.
그리고 녀석은 새파래진 입술로 덜덜 떨고 있는 예르넨에게 새까만 가죽으로 된 재갈을 물리고 남창이나 입을 법한 붉은 색의 얇은 레이스로 된 속이 전부 비치는 옷을 입혔으며, 마차로 끌고 가 손발을 묶고 안대를 씌운 뒤 목에 새까만 가죽으로 만든 개 목걸이를 채우고는 그 끝을 마차 바닥에 나 있는 홈에 묶어 버렸다.
이후 차디찬 마차 바닥 위에 결박된 예르넨이 추위에 못 이겨 덜덜 떨고 있을 때, 상단주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와서는 예르넨의 가슴을 밟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곁에 두고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그 때문에 예르넨은 불편한 자세로 바닥에 처박혀서는 사내의 발에 밟힌 채 욕을 들으며 몇 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그러다 그사이 언젠가, 까무룩 잠이 들 듯이 기절을 했던 것도 같다.
“와하하!”
어렴풋이 들려온 경박함이 가득한 웃음소리에 예르넨은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그리고 눈을 뜬 예르넨이 제일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뜨거움이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겨울의 끝 무렵 어두운 밤에, 찬물에 담가진 뒤 차가운 마차 바닥에 묶인 채로 잠이 들었으니 열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긴 했다.
‘…아파.’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무어라 말소리가 오가고 있었지만, 이국의 언어인 데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상단주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 정도가 예르넨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에 대한 협상이 전부 마무리되었는지 마차 문이 열리고 덩치 큰 사내 둘이 들어와서는 마차 바닥에 매달린 목줄을 풀고 예르넨을 들어 올린 뒤 어딘가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작은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두통이 몰려왔기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르넨은 또다시 어딘가의 차가운 바닥 위에 눕혀지게 되었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바닥이 울리는 걸로 보아, 마차 안인 것 같았다.
아마도, 노예상은 값을 받고는 예의 그 ‘귀하신 분’의 마차로 예르넨을 팔아넘긴 모양이었다.
덜컹, 덜컹.
진동하는 마차 바닥에 누워 있는 예르넨의 귓가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예르넨의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는 예르넨의 눈에 씌워진 안대를 벗겨 내고,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끌러 내렸다.
“윽….”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지 못한 예르넨은 눈을 질끈 감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빛에 적응하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예르넨은 드디어 그 ‘귀하신 분’이라는 놈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너….”
그리고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예르넨의 두 눈에 깊은 배신감이 아로새겨졌다.
“네가, 왜…여기에…있는 거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예르넨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차가운 눈으로 예르넨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 그자는… 교황, 이든 페트라였다.
* * *
마차 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셨군.”
신의 대리인에게는 서로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이 어째서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가문은 그 능력을 가문의 사람이 아닌 외부인이 신의 대리인으로 태어났을 때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르넨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신의 대리인을 사냥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아직은 그 말고 다른 신의 대리인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이든이 손을 올리자 말을 타고 그의 곁을 엄호하고 있던 기사가 마차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사냥 준비를 시작하도록.”
“알겠습니다.”
충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인원을 추리는 모습을 살핀 이든은 종이를 꺼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사냥감은 전과 달리 갓난쟁이가 아닌 듯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곧 예외 없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신은 전능했으나 지상에서 힘을 사용할 때에는 큰 제약이 따랐기에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땅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그녀의 자손을 내려 나라를 다스렸으며… 맹약을 맺어 인간들을 그녀의 대리인으로 만들고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인간과 신 사이의 맹약을 이어 주는 매개체는 신의 피였다.
그렇기에 황족에게 전해지는 신의 피를 마시면, 그 맹약에 따라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그 능력은 핏줄을 따라 후손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신탁을 독점하기 위해 신의 대리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방계의 방계까지 모조리 몰살해 왔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후 교황직을 독점하게 된 그의 가문은 거짓 신탁을 내려 황족의 피를 인간에게 주는 것을 금기로 만들었고, 바퀴벌레같이 끊임없이 태어나는 신의 대리인들을 모두 사냥하며 기나긴 시간 동안 신탁을 독차지해 왔다.
그렇지만 아무리 신탁을 독점하고 힘을 키운다고 해도 그들은 신의 피를 이었다는 것 말고는 하등 쓸데없는 황족들을 섬겨야 했으며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드디어 증오해 마지않는 신으로부터의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곧 그는,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에게로 향하는 믿음을 모두 끊어, 더 이상 그녀가 인간계에 개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녀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예르넨 헬리오를 손에 넣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바라왔던 대로.
예르넨 헬리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오롯이 그의 것으로 만들기를 지독히도 갈망해 왔던… 그 빛나던 황족.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무너뜨려 주지.’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만이 찾을 수 있는 지하의 독방에 가둬 둔 채로 그만을 바라보고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인형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구를 대로 구른, 닳아빠진 남창인 주제에 고상한 척하는 그 모습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태생적으로 타고난 천성에 맞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좆에 환장하는 남창처럼 행동하도록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르넨을 보아 왔다. 그렇기에 예르넨 헬리오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누구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할지.
수백, 수천 날을 지켜보아 왔으니까.
그보다 예르넨 헬리오를 잘 알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일 벨티모어가 그의 영상구를 발견한 순간부터 예르넨이 황궁을 떠나, 서부로 올 거라는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예르넨은 금세 라일 벨티모어에게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챌 거고, 분명 황궁을 떠날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예르넨은 반드시 서부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 기사 놈들과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이니.’
이든은 냉소를 지었다.
영상구가 발각된 이상 제국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이든은 아주 오래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어 둔 페이넌 왕국으로 넘어온 상태였고, 왕의 다음가는 권력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왕국으로 넘어간 그는, 국경지대의 노예상들에게 소문을 냈다. 그가, 제국의 황족을 손에 넣길 원한다는 소문을.
국경지대의 노예상들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가 내건 재화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기를 써서 황족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다고 추앙받는 제국의 황족을,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비천한 위치에 있는 성노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게 완벽한 듯했다. 그의 마차 안으로 들어온 예르넨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
미리 준비해 둔, 남창들이 즐겨 입는 옷은 예르넨에게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걸치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손발이 결박된 채로 개 목줄과 재갈을 차고 있는 모습도.
다만, 한가지 어울리지 않는 게 있었다. 그것은 예르넨의 배였다. 그 배는, 결코 임신이 아니라고 우길 수 없을 만큼… 불러 있었다.
이 천박한 남창 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기어코 라일 벨티모어의 애새끼를 배 온 것이었다.
예르넨을, 정확히는 예르넨의 배를 내려다보던 이든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의 목줄을 거칠게 쥔 뒤 그대로 끌어당겨서는 부어 있는 예르넨의 오른쪽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악!”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리가 온통 울려서 예르넨은 결국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고작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입안이 터졌는지 입가에 피가 맺혔다.
이든은 그런 예르넨의 목줄을 잡아당겨 얼굴을 제 코앞에 붙이며 말했다.
“폐하, 그새를 못 참고 천박한 엉덩이를 들썩여 새끼를 배고 오신 겁니까?”
“흐으으….”
소름이 돋아 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리 말하는 교황의 표정과 말투가 평소와 전혀 다르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정말, 미친놈 같았다.
“하긴… 폐하께서는 본래부터 잠시라도 구멍이 비면 참을 수 없어 하셨지요. 하루에도 열이 넘는 사내의 좆 위에서 요분질을 하시던 음탕한 남창 새끼셨으니까요.”
“…!”
“아무리 사내의 맛을 모르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셨다고는 해도, 그 천성을 저버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 깃털보다도 가벼운 엉덩이로 정절을 지키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아니, 개 같다고 해야 할까요.”
“뭐…?”
그 말투는, 그 모욕을 주는 말들은 어딘가…익숙했다. 이미, 겪어 온 것들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예르넨의 머릿속이 차츰, 정리되어 가며 터무니없는 가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너… 설마…!”
예르넨은 경악이 물든 얼굴을 하고는 이든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든은 그런 예르넨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뭐 괜찮습니다. 당신은 이제 온전히 저만의 것이 되었으니까요. 공용으로 쓰는 물건이 아닌. 어렵게 얻어 내었으니 약간의 흠 정도는 참아 낼 수 있습니다. 애새끼라는 건… 낳기 전에 없는 거로 만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예르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진정한 정체를. 그리고 지금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녀석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죽일 셈이었다.
예르넨은 당장이라도 달아나려 했고, 낌새를 알아차린 이든은 그런 예르넨의 머리채를 쥐고는 바닥으로 처박았다.
“아흑…!”
그러고는 얇은 레이스로 된 옷을 거친 손짓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기 시작했다.
“하지 마!”
예르넨은 미친 듯이 저항했다. 하지만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린 이든은 예르넨의 가는 목을 꺾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움켜쥐며, 예르넨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옷을 찢어발겼다.
찌익, 찌익. 얇은 망사가 찢겨나가는 소리를 들려올 때마다 예르넨의 겁에 질려 커다랗게 뜨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윽….”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왔다. 놈이 진짜 배 속의 아이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일….’
눈을 감자 관자놀이를 따라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오래전에 처음으로 놈들에게 윤간을 당했던 날, 예르넨은 간절히 바랐었다. 라일이 찾아오기를.
하지만 결국 라일은 오지 않았다.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바라고 바라다 못해, 모든 희망을 저버린 뒤에도.
이번에도 그럴 것만 같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면,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게 언제일까. 당장 이틀 뒤일 수도 있지만, 일 년이 걸릴지, 구 년이 걸릴지, 아니면 영영 오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버텨 낼 수도, 아이를 지켜 낼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목을 조르고 있는 커다란 손을 긁어 대던 새하얗고 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 갔다. 예르넨의 몸은 마치 숨이 끊어지기 직전처럼 가늘게 경련했다.
그리고, 그때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확 풀어졌다.
“커헉, 컥!”
갑작스럽게 기도를 타고 산소가 들어왔고 예르넨은 미친 듯이 기침을 하며 간절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든은 그런 예르넨을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저항할 생각은 없어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든의 커다란 손이 예르넨의 한쪽 다리를 어깨 위에 올리고는 이미 잔뜩 발기해서 솟아 있는 성기를 두어 번 쓸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성기는 탁한 액체를 흘리며 꺼떡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든은 그것만으로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듯이 예르넨의 엉덩이골 사이에 은근하게 드러나는 꽉 다물려 있는 구멍 위로 침을 퉤 뱉어 냈다.
회음부를 타고 흐른 묽은 침이 구멍을 스치며 마치 애액이 넘쳐흐르는 모양새처럼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뭐,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으신 남창인 폐하께는 필요 없으실 테지만… 예의상 적셔 줄 필요는 있겠지요.”
말을 끝마친 이든은 성기를 쳐올렸으나, 예르넨의 미약한 몸부림에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했다.
“하.”
이든은 한껏 짜증이 서린 얼굴을 하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미 멍이 잔뜩 들어 있는 예르넨의 울긋불긋한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날 정도로 후려쳤다.
“흐으윽.”
살집 없는 엉덩이가 온통 떨려 올 정도의 거친 손짓에 예르넨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안 그러면 이 사내의 좆을 갈망하며 침을 질질 흘리는 구멍을, 평생 다물지 못하도록 온통 찢어 놓을 테니.”
그렇게 말한 이든은 예르넨이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꽈악 잡고는 찢을 듯이 옆으로 벌렸다.
“아으윽…!”
강제로 벌려진 엉덩이 골 사이 옅은 색의 구멍이 벌어지며 붉은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한 이든이 입구 근처에 성기를 갖다 대고 허리 짓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으윽!”
갑작스럽게 굉음이 울리며 마차가 멈춰 섰고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의 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
이든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문을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게도, 문은 마치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마치 힘이 센 마물이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문밖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 파악을 하기도 전에, 기어코 쇠로 된 잠금쇠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구부러져 튕겨 나갔고, 강렬한 정오의 햇빛과 함께 거친 군홧발이 마차 안에 내디뎌졌다.
“하아, 하아.”
그리고 거친 숨을 내뱉는 남자를 바라보는 눈물이 흥건한 예르넨의 얼굴에는 서서히 놀라움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간절히 바라온 상대가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