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유리스와 대화를 나눌 만한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그녀가 병영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공성전을 위한 행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라일이 알기로 유리스는 마법과 연금술에 미쳐 있었다. 한번 대화에 몰두하면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그랬기에 라일은 스테핀에게 명령해 출발 전, 미리 유리스가 흥미를 느낄 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라고 명했다.
예상대로 유리스는 스테핀과의 대화에 과몰입하며 출발을 할 무렵에도 열띤 토론을 하는 데 한창이었다. 그 때문에 유리스는 마치 도토리에 이끌린 다람쥐처럼 자연스럽게 라일의 곁에서 나란히 말을 몰게 되었다.
하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던 대화도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 행군을 하는 병사들에게도 휴식을 주어야 할 지점이었으니 이쯤에서 슬슬 예르넨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라일은 앞서 걸어가고 있던 오스턴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오스턴은 그의 손짓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서 쉬어 가도록 한다!”
그 소리를 들은 여기저기서 행렬을 멈춘다는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을 멈춘 병사들은 휴식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해야 할까. 라일이 유리스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난처한 얼굴을 한 기사 하나가 그에게 달려왔다.
“폐하, 잠시 확인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라일은 그의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말을 걸어온 기사가 맡은 임무는 보급이었다.
다른 것과 관련된 일이라면 기다리라고 말했겠지만, 그는 보급에 있어서는 꽤나 강박적이게 구는 면이 있었기에 기사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이쪽입니다.”
그리고 라일이 보급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그 아주 잠깐의 사이에 유리스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라일은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말을 매어 둔 나무 곁에 멀뚱하게 앉아서는 초콜릿이 잔뜩 묻어 있는 비스킷을 입에 욱여넣고 있는 제 부관을 발견하고는 등짝을 거칠게 찼다.
“어억…! 아니, 갑자기 왜 멀쩡하게 쉬고 있는 사람의 등짝을 차십니까!”
철푸덕 소리를 내며 엎어진 스테핀은 갑작스러운 봉변을 당한 게 억울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라일은 입가에 초콜릿이 잔뜩 묻힌 채 엎어져 있는 제 부관을 그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네놈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쉬고 있는 거지?”
“아니…!”
스테핀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자작과 이야기를 나누라고 명하셔서 여섯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입을 놀렸는데 제가 한 일이 없다니요!”
그 원통한 목소리에도 라일은 그저 간지럽다는 듯이 귀를 한번 긁을 뿐이었다.
“그래서 유리스 카멜리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예? 카멜리언 자작이라면 분명 물을 뜨러….”
“물?”
스테핀은 그제야 제 죄를 알았는지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라일의 명은 정확히 말해 유리스와 수다를 떨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유리스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붙잡아 놓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나게 수다를 떨던 스테핀은 어느 순간인가 그에게 내려진 진짜 명령을 까먹어 버리고 말았고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유리스를 손까지 흔들며 보내 주고 말았다.
스테핀은 겨우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싹수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 주군이 어찌나 빈정댈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거 뭐라 막기도 좀 그러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리로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돌아올 때 즈음이면 휴식시간은 끝날 테고, 다시 동부 직할령으로 향해야겠지.”
“아, 아하하! 그건…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6시간 내내 떨어 온 수다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였다. 애초에 스테핀이 휴식시간까지 수다를 떤 건 유리스가 도망갈 구석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가 컸다.
아무리 그녀가 라일과의 대화를 피하려고 해도 말도 짐도 내버려 둔 채로 떠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뭐 어떻게 하겠는가.
“…됐다. 내가 찾으러 가면 되니. 유리스 카멜리언이 어느 쪽으로 갔지?”
라일은 가득 차 있는 수통의 물을 바닥에 버리며 말했다.
“그게… 저쪽이긴 한데… 아니 폐하, 어느 제국의 황제가 자기 수통을….”
무어라 중얼거리는 스테핀을 뒷전으로 한 라일은 스테핀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막 봄이 찾아오는 시기라고는 하나 아직 살갗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는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어제는 눈이 오기도 했다. 때문에 행군은 평소와 달리 꽤나 느지막한 오전에 시작되었다.
또한, 겨울의 낮은 짧았고 노을이 지는 시간은 다른 때보다 일렀다. 그랬기에 그가 스테핀이 가리켰던 방향에 있는 강가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라일은 마치 은어 떼가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반짝이는 강물에 잠시 시선을 준 뒤, 이내 주위를 살피며 유리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리스보다도 먼저,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곳에도 있군.’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강가로 가는 좁은 길목에 자리 잡은 작은 돌탑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근방을 비롯한 동부를 돌아다니는 내내 몇 번씩이나 발견한 것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지만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라일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알기로 제국에서 돌을 쌓는 것과 관련된 문화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를 때.
평민들의 문화였기에 그도 전쟁터에 가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전쟁통에 그의 병사들이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묻고 그 위에 돌을 얹었을 때, 그제서야 알게 되었지.
하지만 라일이 저 돌탑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돌탑이 놓여 있는 곳이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길목이나 강가, 마을 정중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에 시체를 묻을 만한 미친놈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나온 길에서 만난 이들이 저 돌탑을 마치 신을 섬기는 것처럼 섬겼다는 점이다.
신실한 신도들로 가득한 제국에는 크고 작은 신전들이 있었으며 백성들이 어디에서나 신을 기릴 수 있도록 거리마다 작은 조형물들을 놓곤 했다. 그랬기에 굳이 돌탑을 쌓아가면서까지 신을 모실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아온 이들은, 저 돌탑을 마치 신처럼 섬기기라도 하듯이 무언가를 바치곤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번에도 돌탑의 앞에는 ‘그것’이 놓여 있을 것이다.
때마침 촌부들이 떠나갔고, 라일은 방문객이 떠나간 작은 돌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역시.’
돌탑의 앞에는 꽃들이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왔던 곳들과 똑같이.
라일은 돌탑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말린 꽃 중 하나를 들어 올리고는 노을에 비춰 보았다.
본디 새하얀색이었을 국화는 눌린 채로 말려진 탓인지 조금 빛바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다른 평범한 국화와는 달리 초록색이 아닌 새하얀 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꽃이었다.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이 꽃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줄기에 옅은 솜털이 돋아나 새하얗게 보인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줄기를 이렇게 노을빛에 비춰 볼 때면… 잿가루를 뿌려 놓은 것만 같은 옅은 금빛을 띠었다.
마치 누군가의 머리색과 꼭 닮은.
그랬기에 그는 어린 시절 수소문을 해서 이 꽃의 종자를 들여와 그 누군가에게 이 꽃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러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꽃이 이곳에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이 꽃이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이유는 아주 강렬한 햇빛을 받아야 해서였다. 만약 동부에서 꽃을 기른다면 한여름에, 그것도 아주 많은 품을 들여 길러야 했다. 그런데도 동부의 돌탑 앞에는 이 꽃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럴 수 없을 게 분명한데.
의아한 심정에 한때는 돌탑 앞에서 묵념하고 있는 이를 불러 세워서는 이 돌탑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러세워진 자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차마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비장한 얼굴을 하고 도망을 쳤더랬지.
그랬기에 라일은 이 돌탑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왠지, 이 무덤이 누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저벅.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일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뒤로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는군.”
나타난 이의 입가엔 여전히 다정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러게요.”
유리스는 천천히 그의 곁을 지나 돌탑 앞에 섰다.
“동부에는 이런 돌탑을 쌓아 놓는 경우가 많더군.”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그리 말한 유리스는 몸을 굽히고는 돌탑 앞에 놓인 말린 국화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마치, 돌탑과 그 앞에 놓인 국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처럼.
“돌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이나 가지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는 않고.”
“그러셨던가요?”
유리스는 여전히 라일과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열의 없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이건 누구의 무덤이지?”
라일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라일은 유리스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의심에, 확신이 얹어지는 순간이었다.
“황제로서 제국민들 사이에 이상한 문화가 향유되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 말뜻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리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동부의 영주들에게 돌탑을 모두 부수라는 명을 내리겠다는 소리였다.
그 말에 그때까지와는 달리 유리스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행동이라니요. 황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일 뿐, 모든 행동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돌탑은… 돌탑은….”
유리스는 주저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라일은 그런 유리스가 완벽히 말려들었음을 눈치챘다.
“예르넨을 기리기 위한 무덤인 모양이군.”
“…!”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표정에 드러나니, 따로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저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게 하려면… 좀 더 압박할 필요가 있겠지.’
“참으로 볼만하군.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선황을… 아니, 황제라고 불러 주며 황실 묘지에 안장하는 것조차도 과분한 녀석이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게.”
“…….”
유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쉽지 않은지 시뻘게진 얼굴색은 잠잠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런 거. 여긴, 선황의…. 백성들이….”
유리스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평소 영리하게 구는 모습만을 보아 왔기에, 이토록 감정적으로 구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봐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죽은 선황의 기사였지.”
“…그저 신의 피를 이은 자이기에 억지로 섬긴 것뿐입니다, 폐하. 폭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
“예. 정말로.”
라일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유리스를 보며 마치 사냥을 끝마치고 목숨줄을 끊어 놓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사자처럼 나른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듣자 하니 죽은 폭군이 테네스 트리지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던데.”
“…….”
“황제의 침실에서 피가 묻은 침대 시트가 나왔다던가, 밤마다 난교 파티를 즐겼다던가… 소문이 아주 가관이더군.”
‘아무런 감정도 없기는.’
라일은 피식 웃으며 유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스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유리스는 떨려 오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황제의 배에 주먹을 사정없이 내리꽂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황제의 몸에 손을 댄 죄를 물어, 끌려가겠지. 빼도 박도 못할 현행범이니 예르넨조차도 그녀를 구해 줄 수 없으리라.
하지만, 화가 났다.
‘이리도 무례한 작자일 줄이야…!’
유리스는 사실, 마지막에 가서는 다른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예르넨을 진정한 황제로서 인정하고 섬기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리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예르넨을 나쁘게 본 것도 아니긴 했지만.
유리스는, 예르넨을 동정했다.
그녀는 연금술에 박식했고 마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녀가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예르넨의 몸을 돌보았었다.
예르넨은 몸을 보이기를 극도로 꺼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으니까.
그렇게 유리스는 예르넨의 몸에 퍼져 나간 마물의 피를 억누르고, 그 몸에 채워진 마도구를 제거하고, 검게 새겨진 문신의 일부를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예르넨이 겪어온 학대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울분이 생기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예르넨은 그간 그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기에, 유리스는 예르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조리 알게 되었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영상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사들마저 제대로 믿지 못하던 당시의 예르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한 모습만을 보였다.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유리스는 그 일을 알고 있는 귀족들과 모든 식솔을 죽이고, 영상구들을 박살 낸 뒤 저택을 불살랐다. 그러고는 불타오르는 저택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그녀의 황제를 대신해서.
그녀가 모시게 된 주군은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악인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싫었고, 약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싫었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너무 싫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그 누구에게도 보답받지 못할 삶을 살아갔던 그녀의 주군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유일하게 마음에 품었던 대상이 바로 라일 벨티모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다.
유리스는 예르넨이 라일에게 수많은 것을 안배해 주고, 황제의 자리까지 내어주는 모습을 모두 보았다.
예르넨은 심지어 모든 악업을 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다며, 라일이 무사히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며 그녀와 다른 기사들에게 바람잡이 노릇을 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가 죽음을 결심한 그 날에.
자기는 죽어도 못한다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냐고 악을 쓰던 저스틴을 대신해서 웃는 얼굴로 명을 받든 유리스는 그날,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틀어박혀 펑펑 울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은 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라일이 저리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모두 예르넨이 안배한 대로 흘러가는 일이었다.
심지어 유리스는 다시 살아난 예르넨이 여전히 라일이 이대로 가만히,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들어 온 소문이 모두 맞다고, 정말 악독한 자였다고. 그렇게 말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세상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지 않은가?
난교 파티라니, 테네스와 관계를 맺었다니. 어떻게 그 하나만을 그리면서 그 긴 세월 고통받아 온 사람에게 씌워진 그런 터무니없는 누명을 믿을 수 있는 건지.
세상 모든 사람이 예르넨을 믿지 않아도 그는, 믿어 줘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선황께서 비록… 옳지 못한 일을 하신 분이지만 그런 더러운 소문이 생길 만한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리스는 빈정거리는 말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빈정거리는 말투는 라일 벨티모어, 저 재수 없는 자의 전매특허 같은 거였으니까…! 그러나 안 쓸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그런 상대할 가치도 없는 호사가들이 만들어 내는 저급한 소문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으니 도리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유리스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라일에게 말했다.
“그리고 돌탑에 대해서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틀리신 것 같네요. 이 돌탑은 이곳, 동부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준 이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유리스는 라일에게 이 무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한 적이 없었다. 아마, 백성들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라일이 방금 했던, 이 무덤이 예르넨의 것이 아니냐는 말은 한번 떠본 말임이 틀림없다.
“…그게 누구지?”
‘역시.’
유리스는 완전히 확신했다. 그냥 던져 본 말일 뿐이라고. 괜히 라일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일을 그르칠 뻔했다.
“글쎄요. 하지만… 굳이 알아내실 필요가 있으실까요? 폐하께서도 이곳 동부의 백성들에게 다정함을 베푸신다면 언젠가는 존경받으시게 될 텐데요.”
라일은 제게 쏘아붙이듯이 말하는 유리스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다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휴식시간이라고는 해도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함께 가지.”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유리스는 어쩐지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을 하고는 라일의 텅 빈 물주머니에 힐끗하고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라일은 무척이나 잘 알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알아서 꺼지라는 소리였다.
‘하.’
참으로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신하가 아닌가.
“딱히 목이 마르지 않아서 말이야.”
“그런데 물은 왜 뜨러 오신 거죠?”
“올 때까지는 갈증이 있었는데… 지금 막 없어졌군.”
“그러신가요?”
“그러니 같이 가지. 황제를 보호하는 게 신혈의 기사단의 의무 아닌가?”
“…그러시죠. 비록 저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어서 보호가 필요한가 싶긴 하지만요.”
그리 말한 후 휴식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라일을 대하는 유리스의 태도는 전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꽤나 곱지 않았다.
“저… 폐하. 이거 곤란한 거 아닙니까?”
스테핀이 머리를 쭉 빼더니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그마한 목소리로 라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가?”
라일은 그런 스테핀이 징그럽다는 듯이 머리를 밀어내며 물었다.
“아… 카멜리언 자작이요…! 나눠야 할 말이 있으시다면서요. 다가갈라치면 몸서리를 치고 거부를 하고 작전 회의도 전부 부하를 보내서 이야기만 전해 듣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대체 그날 무슨 소리를 하신 거예요!”
“흐음.”
라일은 느슨하게 앉아서는 유리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선황께서 비록 옳지 못한 일을 하신 분이지만 그런 더러운 소문이 생길 만한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런 상대할 가치도 없는 호사가들이 만들어 내는 저급한 소문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말을 한 유리스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제 수하들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며 말과 짐을 챙기고는 라일과 스테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렬의 끄트머리로 가 버렸고, 지난 며칠간 행렬의 말미에만 머물렀다.
그뿐 아니라 라일과 마주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인지 작전 회의에도 전부 제 휘하의 마법사 하나만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라일은 이미 잠깐 동안 나눈 대화를 통해서 그가 하고 있던 수많은 추측에 대해서 확신을 얻은 상태였으니까.
유리스가 보인 반응을 통해 라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런데 예르넨을 둘러싼 모든 소문이 전부 거짓이고,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예르넨의 모습이 진실이라면… 이상한 놈이 하나 있지 않은가. 마치 그가 예르넨을 의심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충동질을 하던… 그 빌어먹을 놈, 이든 페트라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수상쩍기 그지없군.’
라일은 돌아가게 되면 당장 그놈부터 족칠 생각이었다. 놈에게서 무척이나 수상한 냄새가 났다.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군.”
물론 유리스로부터 직접적인 이야기를 듣는다면, 돌아갈 필요 없이 편하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르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더 완벽하게 알 수 있을 테고.
하지만 당사자가 저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는데 억지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진실에 어느 정도 다가간 이상, 완벽하게 진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예르넨의 곁으로 돌아간 다음 알아내도 될테지.
‘그래서는 안 됐어.’
라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동부로 토벌을 오는 것은, 그가 해야 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찾아보면 분명 그를 대신해서 동부로 보낼 다른 이를 찾던가, 어찌 되었든 황궁을 비우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예르넨과 사이가 좋지 않아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섣부르기 그지없었다.
자객이 들기도 했고, 이든 페트라 같은 수상쩍은 놈들이 대낮에 오가기도 하는 게 황궁이었다. 그 안에 예르넨을 두고 오는 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다.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귀환을 해야 할 사안이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부 직할령을 되찾고, 로지 벨리카를 구출하는 것. 그가 직접 이 머나먼 동부까지 친정을 하러 오게 된 이유를 마무리 짓는 일 말이다.
라일은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 어디엔가 얼핏 거대한 성의 형상이 보였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폐하, 스테핀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오스턴의 보고에 라일은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는 언덕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성벽을 살폈다.
그 자리에 위치한 것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도 불리는 동부 직할령의 성벽이었다.
공성전이 힘든 이유라는 건, 사실 간단했다. 드높게 쌓아 올린 성벽 넘어서, 성안으로 들어가 전쟁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 있는 성을 점령하기 힘든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성을 둘러싼 성벽은 견고하고도 드높았으며,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하나의 성벽을 넘어간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산세가 험한 산맥으로부터 끊임없이 식수가 공급되기에 자급자족할 수 있어 장기전에 유리하다는 점 역시 동부 직할령을 공략하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 중 일부였다.
그랬기에 보통이라면 승리를 쟁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지만 사실 공성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 간단한 방법이란… 넘어가기 힘든 저 드높은 성벽을, 평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을 부순다는 측면에서는 말이다.
그의 앞에 있는 성벽은 무척이나 견고했고,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멀리서 날아오는 거대한 바위를 맞는다고 해도 끄떡하지 않았고, 대단위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자연재해의 앞에서도 멀쩡할 수 있을까? 아마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부터 그 자연재해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라일은 고개를 들어 성벽의 뒤에 위치한 깎아질 듯 높고 거대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산맥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 채로.
“시작하라고 해.”
라일은 제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오스턴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수천, 수만 년 동안 자리를 지켜 왔던 산맥의 일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정교하게 계산된 산사태가 성벽을 휩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새로 생겨난 둔덕의 위를 달리고 성벽을 뛰어넘어 동부 직할령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라일은 전쟁의 양상을 가늠해 보았다.
“하룻밤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군.”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내 온 그는 확신했다. 적장의 목을 따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하루면 충분할 거라고.
그리고 우레와 같은 굉음을 쏟아 내며 생겨난 둔덕을 타고 황제의 군사가 달려들어 성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말로, 고작 하루뿐이었다.
* * *
“그대가 로지 벨리카인가?”
반란군을 모두 진압하고 온 성을 뒤진 끝에 라일은 마침내 지하 감옥 한구석에 구금되어 있는 여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른대도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이라더니, 확실히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든 금발 머리의 여인은 익히 들은 묘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라. 그대는 이제 자유다.”
깐깐한 성미를 드러내듯이 옥살이를 하는 와중에도 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리고 있던 여인은 굳건한 걸음걸이로 성문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백성들의 반응은 라일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로지 벨리카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반기고 기뻐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러 황제가 직접 친정에 나섰음에도 숨죽여 눈치만 보던 이들이 말이다.
동부의 행정을 모두 총괄하는 능력 있는 행정 관료로 알고 있기는 했지만, 관리가 이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니,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지 벨리카를 임명한 것도 예르넨이었다.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물의 상봉을 바라보며 로지 벨리카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자리를 가늠해 보던 때였다.
“폐하.”
먼지가 잔뜩 묻은 로브를 벗지도 않은 스테핀이 다급히 다가왔다.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스테핀의 눈이 슬쩍 성의 앞에 몰려들어 있는 인파를 향했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문제라도 되는 듯 라일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작은 목소리로 방금까지 그가 보고 온 것들에 대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산맥 안에서 수상한 비밀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비밀 통로라고?”
“예.”
무척이나 뜬금없는 말이었으며 확실히 소문이 나면 골치아플 만한 일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은 동부 직할령에 다시금 큰 혼란을 야기할 수는 없으니.
라일의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혔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성으로 가지.”
“예.”
성으로 돌아온 라일은 스테핀이 하는 설명들을 모두 전해 들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아무리 마법이라는 것의 근원이 자연의 인과관계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산맥을 쪼갠다는 것이 그리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구현할 수 있는 다른 마법들과는 달리 여럿의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면서 마법진을 구성해야 했고, 그 마법진을 구동하기 위해서 또 기십의 마법사가 동원되어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고급 인력들이 갈려 나가고 또 크나큰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겨우 발동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마법진이 구동되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과 조우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마법진이 작동을 하지 않거나, 폭발했다면 오히려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수식의 오류로 발생한 것도, 마나의 부족으로 발생한 것도 아닌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멀쩡하게 반응해야 할 마법진이, 방어마법과 부딪친 것이었다. 그것도 산 아래 깊은 땅속에서.
물론 방어마법이 그들이 구현한 마법에 악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가 건 방어마법일지라도 수십의 마법사가 달려들어 만들어 낸 마법진의 앞에서는 그저 태양 앞의 반딧불이일 뿐이니까.
그러나 이상하긴 이상했다. 이토록 거대한 산맥 안에 방어마법이라니. 고대 마법사의 유물 정도가 잠들어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랬기에 스테핀을 비롯한 몇몇 마법사들은 정찰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이들이 조우하게 된 것은 돌벽을 쌓아서 만든 비밀 통로였다. 그리고 그 비밀 통로의 내부에는 동부 직할령 내에 있는 성의 정중앙과 연결된 단거리 전이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확실히 수상하긴 하군.”
라일은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그가 이곳으로 오기 전, 분명 동부 반란군들은 위협적이게 세를 불려 가긴 했지만 이곳, 직할령을 순식간에 점령할 만큼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직할령이 점령당하기 전, 근처에 주둔해 있던 군사들이 미리 방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들은 막을 새도 없이 로지 벨리카를 구금했고 직할령은 하룻밤 사이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했다.
그랬기에 중앙에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공성전도 없이 하루아침에 난공불락의 요새가 점령당했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마저도 공략하기 위해 이런 무식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성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건지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라일은 동부 직할령이 마법에 의해 점령당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할령의 성벽에는 모든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마법을 아예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성에 미리 성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동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더라면 말이다.
이 동부의 직할령이 본디부터 황제의 영토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동부 대영주 중 하나의 영토였다. 그러니 대영주가 갑작스러운 습격을 두려워해 인근에 있는 다른 영지의 저택 내에 비밀스러운 전이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단 말이지.’
비밀 통로가 발견된, 동부 직할령과 험준한 산맥 하나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영지는… 페트라 후작령이었다.
“수상하기 그지없군.”
“그렇죠?”
라일이 한쪽 입꼬리만을 끌어 올린 채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은 것 같았다.
“직접 방문하겠다.”
산사태를 피해서 돌아가야 했기에 산맥의 안에 위치한 비밀 통로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외부에서 빛이 한점도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통로의 내부는 어둡지 않았다. 벽에 일렬로 박혀 있는 마석들이 마치 촛불을 켜 둔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깊은 산맥의,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비밀 통로에 값비싼 마석을 박아 넣어 두다니. 대귀족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였다.
통로는 스테핀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것보다는 꽤나 규모가 작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끝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서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을 확인한 라일은 확신했다. 동부 직할령을 손에 넣은 반군은 분명, 이 단거리 전이 마법진을 이용해 직할령에 숨어든 것이라고.
이건 뭐, 잡아들인 이들을 심문할 필요도 없는 확실한 증거 수준이었다.
“스테핀.”
“예, 폐하!”
“만약에 이 비밀 통로의 주인이 있다면…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지?”
“예…? 그… 그건….”
라일의 말에 그때까지만 해도 대단한 건수를 해결해서 의기양양해졌던 얼굴에 슬금슬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 비밀 통로의 주인이라고 함은 반란군의 주동자를 뜻하는 말과 같지 않은가.
“이곳은 동부 직할령과 페트라 영지를 가로지르는 산맥의 안이지.”
“폐하…!”
“그런 산맥에, 산을 쪼개는 무식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 비밀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게… 페트라 후작가 말고 누가 있지?”
스테핀은 이마를 짚었다. 사실은 그 역시 내심 페트라 후작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의심일 뿐이었다. 페트라 후작가는 대대로 교황을 배출해 온 신실하기 그지없는 가문이니까.
아무리 황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문이라는 소리였다.
라일의 발언은… 위험했다.
“그렇지만 심증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안에 있는 거라곤 마석들과 이 마법진뿐입니다. 가문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물증이 없습니다.”
“아니, 증거는 분명 있어.”
라일이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의아해하는 스테핀을 보며 한심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스테핀 마리아쥬, 마법을 쓸 때 말고도 일상에서 머리를 좀 굴려보지? 여길 봐라.”
라일은 제 주위를 눈으로 훑었고, 스테핀도 그런 라일의 시선을 쫓아 주위를 바라봤다.
“완벽한 밀실이었지.”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지?”
“…!”
“돌 틈 사이가 갈라져서 공기가 통했다는 가설을 품었다면 폐기해라. 돌 밖에 있는 거라곤 흙뿐인데 공기가 통할 리가 없지.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통로가 있을 거다. 이 공간이 밀실인 것 자체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소리지.”
“그런 생각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스테핀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는 라일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재빨리 같이 온 기사들을 닦달해서는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들을 살피던 라일도 예리한 눈을 하고는 통로와 통로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을 살펴봐도 숨겨진 문이라던가, 가문의 문양,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이 공간 안의 어딘가에 반드시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존재할 것이다. 몇 번씩이나 들어맞은 그의 직감은, 이번에도 그에게 반드시 그럴 거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라일은 이제 무례하게도 황제를 향해 언짢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의 버릇없는 부관을 무시한 채로 유심히 주변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모든 공간을 또다시 한번 살핀 뒤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마치, 원래 그런 공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저 헛된 망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리 생각하던 라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이 마법진을 다시 한번 살펴보던 참이었다. 뭔가… 바닥에 다른 곳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었다.
“잠깐.”
몸을 낮추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닥을 바라보던 라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태피스트리….”
“예?”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는 라일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스테핀이 건성으로 물었다.
“일전에 교황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교황의 방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지.”
“태피스트리요?”
라일은 되묻는 스테핀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단 한 번, 교황의 방을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특이한 태피스트리를 본 적이 있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에, 네 개의 검을 꽂아놓은 태피스트리였다.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단단한 돌벽으로 구성된 벽과 천장과는 달리 바닥에는 흙과 모래가 흩뿌려져 있었기에 위에서만 본다면 모르고 지나갈 법한 미묘한 차이였다.
하지만 허리를 숙이고 지면과 가까이에서 비교를 해 보니 어딘가 달랐다. 그리고 이렇게 손으로 흐트러뜨리면….
‘역시.’
다른 곳은 바닥에 암석이 드러나는데, 유독 모래가 고여 있는 곳이 있었다. 어둠 속이라 쉽게 구분이 가지는 않지만 그 근처를 쓸자 쉽게 모래가 파여나갔다. 그리고 다른 곳과는 달리 깊이 파여 있는 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드러난 홈의 자리는, 그 태피스트리에 꽂혀 있던 검의 위치와 동일했다.
“검을 가져와라.”
라일은 홈의 위치마다 검을 찔러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검의 종류를 가리는 것은 아닌지 검은 쑤욱 하고 들어갔다. 드디어 그토록 찾아다녔던 또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어….”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폐하?”
특별히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소리도, 갑작스럽게 통로가 만들어지는 마법적인 작용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들어 올려야지, 이걸.”
무력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예…? 이게… 들어 올려질 수 있나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리 말한 라일은 한쪽 검을 쥐고서는 마치 지렛대를 사용하듯이 검을 움직였다. 그런 라일을 본 다른 기사들도 따라 힘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스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단면이 반듯하게 잘린 바위가 경사면을 타고 딸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게 이어진 새까만 계단이었다.
“완벽한 정답이군.”
라일이 삐뚜름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어둠이 가득한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이민 스테핀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 참나! 이러니까 찾기가 그렇게 힘들죠!”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된 비밀은 이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으니… 마저 살펴봐야겠군.”
그리 말한 라일은 고개를 돌려 도열해 있는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 둘은 직할령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너희 둘은 망을 보고 위험한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라간다.”
그렇게 말한 라일은 스테핀의 뒷덜미를 집어 들었다.
“예?!”
스테핀이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아니. 왜 제가 같이 갑니까? 다른 놈들도 있는데요!”
라일은 한쪽 귀를 막은 채 짜증이 서린 얼굴로 뭐가 문제냐는 듯이 스테핀을 바라봤다.
“아니!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 무서운 거 싫어하는 거요!”
“잠시 둘러보고 오기만 할 건데 뭐가 문제지?”
“안에서 귀, 귀신이라도 나오면 어쩝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라.”
라일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스테핀의 뒷목을 가차 없이 잡아챈 후 끌고, 어둠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테핀은 마지막 계단을 내려간 뒤에야 혹여나 위험한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하던 걱정들이 모두 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확실히 이 정도면 이 비밀 통로의 주인이 페트라 후작가인 건 맞겠군요.”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킨 스테핀이 말했다.
“그렇군.”
기나긴 계단을 지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수 세기 전에 만들어졌을 법한 거대한 동공이었다. 그리고 그 정중앙에 새겨진 것은 교황청을 좌표로 새겨진 이동 마법진이었다.
새로이 발견한 공간은 위에 있던 비밀 통로와는 다르게 확실히 거대했으며,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아마도 길의 끝에 있는 것은 페트라 후작령일 것이다.
명망 있는 귀족가라면 대개 저택에 비밀 통로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고 있기 마련이다. 벨티모어 대공가에도 비밀 통로라는 것은 있었고 라일도 과거 대공령을 빠져나올 때 그 통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산맥 속에 귀족가의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이했다.
라일은 천천히 통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위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는 비자금 명목으로 축적해놓은 듯한 금괴가 담긴 상자가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소유주를 찾을 수 없어 그저 전설같이 떠돌기만 하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며 진귀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꽤나 부유한 가문의 후계자로 자라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그가 보기에도 어떻게 쌓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부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라일의 눈길을 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단단하게 자물쇠가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아무것도 놓인 게 없는 방이었다.
“어딜 봐도 수상하네요.”
떨어져서 수색하라고 했더니 절대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서 철썩 붙어서 걷던 뒤의 녀석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다. 녀석은 무엇을 감지했는지 드디어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말하고는 힘을 주어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라일은 문가에 기댄 채 벽에 바짝 붙어서 방을 탐색하는 녀석을 바라만 보았다. 라일도 이 공간에 무언가 마법적인 장치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나가 느껴졌으니까. 그렇지만… 참으로 수상했다.
‘대체 뭐를 숨겨 둔 거지?’
금괴도, 유명한 예술품도, 기밀문서도, 다른 어떤 것들도. 모두 나름 철저하게 보안을 해 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꼭꼭 숨겨 놓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라일은 과연, 페트라 후작가에서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됐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스테핀의 뒤로 탁탁 소리를 내며 벽돌이 정리되기 시작했고, 그 벽돌들이 모두 정리되었을 무렵에는 벽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생겨난 공간 너머로 라일이 보게 된 것은… 강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주먹만 한 유리구슬들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지금 그가 서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그 방은 바닥과 천장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진열장으로 되어 있어 벽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 진열장의 안엔 유리구슬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라일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풍경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모습이라는 듯이.
마찬가지로 현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스테핀은 천천히 진열장의 문을 열고서는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어서 살폈다. 그리고 스테핀은 마침내, 방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유리구슬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건… 영상구인 것 같습니다, 폐하.”
“영상구? 이 방 안에 있는 게 전부…?”
라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예, 확실합니다. 이 장소, 지금 보니 영상구를 보는 방인 것 같네요. 저 중앙에 있는 마도구에 이 영상구를 끼우면 저희가 방금까지 있었던 방의 벽에 영상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라일은 방의 중앙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등을 기댈 수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와 영상구를 틀 수 있는 마도구가 있었다.
“과연 무슨 비밀이길래 이렇게 꼭꼭 숨겨 둔 건지.”
라일은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로 마도구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든은 일전에 그에게 귀족들의 자금 동향에 관한 서류를 내어 준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반추해 보면… 아마 이곳에 있는 영상구에는 높은 확률로 귀족들의 치부가 찍혀 있으리라.
그 기분 나쁜 놈과 놈의 가문이라면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비밀인지 한번 봐야겠군.”
그렇게 말한 라일은 마도구의 중앙으로 영상구를 굴려 넣었다.
우웅.
낮은 소리가 울리며 마도구는 눈앞의 벽에 영상구 안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모난 벽 안에 펼쳐지기 시작한 영상은, 결코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 * *
부스럭 부스럭.
풀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손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족 사내들과 기사들의 모습이 잡혔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숲속을 뒤지고 있었다.
“거기엔 없어요?”
르크루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의 주인인 페트라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습니다.”
“젠장, 어디에 숨은 거야? 이 쥐새끼 같은 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게 어울리지 않게 르크루제 후작의 얼굴에는 질 나쁜 장난을 앞두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나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는 껄렁한 얼굴을 한 채로 바닥을 가리켰고, 페트라 후작의 시선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 풀숲 사이 바닥에 아주 옅게,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페트라 후작은 그 발자국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없는 것 같으니 이만 가 봅시다.”
“그럴까요?”
그리 말하면서도 르크루제 후작의 발걸음은 풀숲 사이를 향했다.
“…라고 할 줄 알았나 보지?”
“…?!”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손을 뻗어 누군가의 머리채를 쥐고는 머릿가죽을 뜯어 버리려는 기세로 억세게 끌어당겼다.
“아윽…!”
그리고 풀숲에서 끌려 나온 것은, 치렁한 머리채를 늘어뜨린,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마른 인형이었다.
“이거 놔!”
거친 반항에도 불구하고 르크루제 후작은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지 머리카락을 쥔 손을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제야 치렁치렁한 잿빛이 섞인 금발 사이로 르크루제 후작에게 붙들려 있는 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의 주인은 오른쪽 눈가의 눈물점이 돋보이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 새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은 다가올 일에 대한 공포에 온통 잠식된 듯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눈가를 불긋하게 물들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민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는 아직도 반항에 대한 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허나 르크루제 후작은 얼굴에 한껏 조소를 머금은 채로 그런 예르넨의 오른쪽 귓바퀴 근처를 쓸어내렸다. 그 손짓에 따라 살갗에 달라붙어 있던 새빨간 글씨들이 일어났고, 이내 그의 손안에서 사그라들었다.
“또 도망갈 줄 알았지.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서 일부러 붙여 놨는데 역시나군. 몸 파는 남창들이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지.”
그렇게 말한 르크루제 후작은 그대로 예르넨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윽…! 이거, 놓지 못해?!”
비명 같은 반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르크루제 후작은 반항을 잠재우기 위해 조그마한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가차 없이 내리쳤다.
퍽 하며 둔탁한 소리가 몇 번씩이나 울렸지만, 입술을 꽉 깨문 예르넨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비참함을 참아 내는 물기 어린 눈동자가 새파란 분노의 빛을 가득 품으며 르크루제 후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풀숲에서 끌어내진 예르넨은 넘실거리는 깊은 호수를 배경으로 한 공터의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윽!”
그리고 예르넨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왼쪽 어깨를 문지르고 있을 때, 누군가 예르넨의 턱을 들고는 잡아당겼다.
“정말이지 매일 도망 다니시는 게 거슬리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페트라 후작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꼴을 당해야 이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를 그만두실지에 대해서.”
그는 조소를 머금은 채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예르넨을 가볍게 제압하고는 양손을 단단히 묶었다.
“짐승보다 못한지, 묶어 놓고 매질을 해도 말을 듣지 않으시니 더 큰 체벌을 해야겠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터를 채우고 있던 사내들로부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에는 하나 같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즐거움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시선은 예르넨의 정신에 깊숙이 박힌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예르넨의 몸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려 오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야.”
“글쎄요?”
페트라 후작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예르넨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단검을 꺼내 들었고, 예르넨의 표정은 대번 당황으로 물들었다.
“지금부터 할 일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으니, 쓰잘데기없는 머리카락은 잘라 내야겠습니다.”
“윽…!”
그리고 페트라 후작이 마치 인형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듯이 무감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단번에 잘라 버렸을 때 예르넨의 눈은 지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껏 일그러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하지만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이 느끼고 있을 모멸감 같은 건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예르넨의 새하얀 팔을 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런 페트라 후작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윽…! 뭐, 뭐 하는 거야…!”
예르넨은 그의 발걸음을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뿐이었고 마침내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 예르넨이 도달한 곳은… 호수였다.
깊은 물을 무서워하는 예르넨의 동공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눈치를 챈 것이다. 예르넨은 거칠게 반항을 하며 소리쳤다.
“하지 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후작은 무자비한 손길로 그런 예르넨을 호수로 던져 버렸고, 예르넨은 비명을 흘릴 새도 없이 호수의 표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풍덩 하고 빠졌다.
그리고 그런 예르넨의 꼴을 보며 페트라 후작의 곁에 서 있는 이들은 낄낄거리며 저급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좀 과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오늘 일을 겪고 혹여나 자진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들기도 하고요.”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지금까지 갈 데까지 간 늙은 남창이나 하는 험한 일들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만 살아오셨는데요.”
“이 사람! 지금까지 저희가 고생한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정도는 해야 전하께서 말귀를 알아들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저기서 노닥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한참이나 수다를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표면은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사람이 빠졌다면, 살아 있던지 아니면 죽었든지 간에 분명 물 위에 떠 올라야만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마치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였다.
촤아악!
거대한 몸체를 가진 시커멓고 미끄덩한 무언가가 호수의 표면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커헉!”
새까만 촉수에 의해 오른쪽 발목이 휘감긴 채 거꾸로 끌어 올려진 예르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억지로 삼켜 낸 물을 뱉어 내기 위해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살기 위해 거칠게 기침을 하고 있는 예르넨은 앞으로 제게 닥칠 위험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짙은 음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것 참 대단하십니다, 페트라 후작. 어떻게 저런 것을 구하셨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게 바로 요새 유행한다는 페투시니아군요.”
엉망이 된 예르넨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던 페트라 후작은 감탄 어린 눈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가지고 오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페투시니아는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생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유명한 식물형 마물이었다.
하지만 말이 마물이지, 식물형이었기에 비록 10여 미터에 달하는 시커멓고 거대한 촉수가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광합성만 하며 살아가는 등 평상시에는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결코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온순한 페투시니아가 포악해지곤 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가지는 번식기가 그때였다.
페투시니아는 강력한 번식욕을 가지고 있는 마물로서 죽기 전,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몸 안에 씨앗을 낳고 부화를 시킴으로써 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런 페투시니아의 습성을 이용해 재미난 장난감을 만들어냈다.
바로 살아 있는 페투시니아를 뿌리째 뽑아서 말려 버리는 것이었다.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촉수 식물의 생명력은 무척이나 끈질겼지만, 산채로 말라 버린 뒤에도 생명을 오래토록 유지할 수는 없다. 다시 물 안에 던져지게 되면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에 그 순간부터 서서히 죽어 갔다.
그렇기에 뿌리를 잘린 채 물속에서 뽑혀 나와 생으로 말려진 페투시니아들은 서서히 죽어감과 동시에 후대에 퍼트릴 씨앗들을 몸 안에 준비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페투시니아가 다시 물에 들어가 수분을 빨아들이고 살아나게 되면, 그들은 재빠르게 크기를 불린 뒤 번식시킬 대상자를 찾고서는 상대의 몸 안에 파고들어 알의 형태를 띤 씨앗을 낳았다.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을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진 지하의 매음굴에서 성행하고 있는 놀이인데. 저희의 취지와 너무도 맞지 않습니까?”
페트라 후작이 한껏 조롱을 담은 얼굴을 하고는 다시 예르넨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모여 있고, 비밀리에 남창을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는 말입니다.”
“하하!”
“맞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이제 막 페투시니아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거칠게 반항하기 시작한 예르넨에게 쏟아졌다.
“으흑…! 윽…?”
한참이나 물을 토해 낸 뒤 예르넨은 겨우 정신을 차렸고, 무언가 제 다리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호수 속에서 제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겨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만든 존재라는 것도.
간신히 눈을 뜨고 제 다리를 감싼 것을 내려다본 예르넨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생전 처음 보는 미끌거리는 검은 것이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당황한 예르넨은 대체 이게 뭐냐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등 쪽에서 뻗어져 나온 시커먼 촉수는 순식간에 예르넨의 입안으로 들어와서는, 마구잡이로 자리를 차지하며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말았다.
예르넨은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미끌거리는 점액질의 촉감에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으읍…!”
허나, 뒤이어 튀어나온 촉수들이 오른쪽 발목뿐만이 아니라 팔과 다른 한쪽 다리마저 결박했기에 예르넨은 밀려오는 토악질을 겨우 억누른 채로 반항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이빨로 씹어 대도 사지를 결박하고 입을 막고 있는 촉수는 쇳덩이라도 되는 듯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뻗어져 나온 또 하나의 촉수가 축축하게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어 있는 상의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서는 예르넨의 등 여기저기를 쓸어 내기 시작했다.
“…!”
인간이 아닌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괴물이 온몸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절로 헛구역질이 났다.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그것은 고작 더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감각이었다.
“흐읍…! 흡…!”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등의 여기저기를 쓸어 내며 끔찍한 감각을 선사한 촉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빠져나갔다.
마치 물뱀이 스르르 기어서 옷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끔찍한 감각을 느끼며 예르넨은 생리적인 불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미미한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이걸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참으로 애석하게도 예르넨은 몰랐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을.
옷 위를 오르내리며 탐색을 하던 촉수는, 위로 올라가서 발목이 성큼 보이는 밑단이 해진 바지의 통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상의를 헤치며 몸을 타고 돌아다녔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새하얀 종아리를 타고, 오금을 지나 허벅지 살을 간질이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 으읍! 읍! 으읍!”
그제야 이 촉수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도달하려는 곳이 어딘지 깨닫게 된 예르넨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생물체가 노리는 것은, 그의 엉덩이 사이에 있는 비좁은 구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흐읍…!”
시커먼 촉수가 정확히, 예르넨의 가랑이 사이를 타고 올라가서는 꽉 다물려 있는 엉덩이골 사이를 쑤시고 들어가 힘을 주고 있는 주름 사이를 거칠게 파고든 것이다.
“…!”
예르넨의 눈에서 후드득,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저들은 인간에게 욕을 보이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온갖 괴상한 기구들을 이용해서 예르넨을 능욕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서 이보다 충격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 그는, 마물에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과 비참함, 충격이 뒤섞인 얼굴에서 연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지능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은, 가지고 있는 거라곤 오로지 번식욕 하나뿐인 페투시니아가 예르넨이 느끼고 있는 절망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기계적으로 예르넨의 뒤를 쑤신 페투시니아는 제가 쥐고 있는 생명체가 번식이 가능한 존재라는 확인을 끝마쳤다는 듯이 예르넨의 구멍에서 제 몸의 일부를 빼내고는 거슬리는 옷가지들을 모두 찢어내기 시작했다.
예르넨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새하얀 몸을 감싸고 있던 낡은 거적때기가 벗겨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이어 튀어나온 검고 축축한 촉수들은 예르넨이 도망갈 수 없도록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은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아랫배에 불을 질렀다. 초점이 없는 눈을 하고서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연신 눈물을 흘려 대는 미인의 새하얀 몸을 휘감은 촉수가 무척이나 선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거….”
“…를 ….”
“좋습니다! 그럼….”
고간을 부풀린 사내들이 바로 지척에서 말을 주고받았지만, 충격을 받아 먹먹해진 예르넨의 귓가에는 사내들의 말소리가 들리지조차 않았다.
“흐으, 흐으.”
들리는 거라곤 그저, 스스로의 거친 호흡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은 촉수에 의해 양손이 한데 묶여 결박당하게 되었고, 그 상태로 상체를 들어 올리고 양다리를 각각 붙들린 채 벌리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허나 그것도 모자랐는지 촉수는 예르넨의 엉덩이를 튀어나올 정도로 아프게 말아쥔 채로 벌렸고, 예르넨은 허공에서 엉덩이골 사이와 여기저기 찢어진 흉터가 남아 흉하고 색이 짙어진 구멍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예르넨의 얼굴 앞에, 영상구가 떠올랐다.
“…!”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하게 물들었다.
수없이 많은, 비참한 순간들을 찍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만큼은 지켜지는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물에게 범해지는 모습 따위를 찍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리던 예르넨의 얼굴에 서서히, 짙은 체념이 새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처연한 얼굴을 모조리 새겨 넣은 영상구는 예르넨의 몸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영상구는 시커멓고 끈적이는 촉수에 감겨 있는 새하얀 몸, 축 처져서 허공에서 덜렁이는 성기, 촉수에 의해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아프게 쥐어진 엉덩이, 벌려진 엉덩이골 사이로 드러난 흉측한 구멍과 그 구멍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덩치 큰 성인 남자의 팔뚝보다도 굵은 촉수를 차례로 찍었다.
그리고, 그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촉수가 예르넨의 꽉 다물려 있는 구멍을 꿰뚫는 것까지도.
“…!”
예르넨이 눈을 찢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뜨며 허리를 튕겨 올렸다. 그리고 뒤가 거대한 것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는 끔찍한 감각을 느끼며 목을 젖히고 비명을 질러 댔다.
“으으읍! 으으읍!”
거칠게 반항을 하는 예르넨의 엉덩이는 어찌나 힘을 주는지 마치 볼우물이 패듯이 음영이 질정도였다.
예르넨은 지금까지 많은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여 왔다. 그 안에는 늙은이의 끔찍하게도 흐물거리는 조그마한 성기도 있었고, 아랫배가 튀어나올 정도로 거대해서 전부 들어차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드는 커다란 성기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기보다도 거대하고 괴상한 도구들에 의해 몸이 꿰뚫린 적도 무척이나 많았다.
허나, 단언컨대 지금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에 비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상식적인 크기였다고 할 수 있다.
“끄흐으읍!”
푸들푸들 떨리는 예르넨의 양 볼을 타고 굵은 눈물들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 자진해서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입을 틀어막은 촉수는 예르넨에게 죽음을 맞이할 자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가 찢어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두드렸고, 엉덩이 사이가 끔찍하게 쓰라려 왔다. 예르넨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했던 촉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촉수는 배려 따위 없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기만 했다. 정말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내장이 전부 찢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예르넨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쾌감 한 조각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독한 압박감에 느껴지는 거라곤 고통, 고통.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인고했을까.
“흐읍…?”
갑자기 세상이 훌쩍 뒤집어졌다. 시야에 잡힌 것은 새까매서 속을 들여볼 수조차 없는 물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촉수는 예르넨을 하늘로 치켜올린 채로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점액질의 자국을 남기며 새하얀 몸 위를 느릿느릿 탐색하다가 순식간에 예르넨의 성기를 집어삼키고는 자극하기 시작했다.
“…!”
예르넨은 순간, 성기를 애무하는 끔찍할 정도로 자극적인 촉수의 감각에 바닥이 꺼져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은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성기에 거머리처럼 시커멓게 달라붙은 촉수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밋밋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성기와 달라붙어 있는 부분은 전혀 아니었다.
무수하게 작은 입과 혀가 성기의 표면을 물고 빠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전과 다른 생경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대해서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던 촉수가 줄어들더니 내부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는 점막을 온통 간질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끄흡…!”
갈라진 촉수는 잔뜩 개발되어 튀어나온 자극점을 미친 듯이 찍어눌렀고, 아주 가늘어진 촉수 중의 일부는 계속해서 예르넨의 안으로 밀려들어 가 인간의 성기로는, 아니 도구의 힘을 빌려도 닿을 수 없었던 아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기도 했다.
그러고는 여기저기를 찌르고 문지르며, 그동안 개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극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흐읍, 흐으읍…! 하읏읍…!”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자극당한 예르넨은 순식간에 사정을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성기와, 내벽에서의 자극에 발발 떨어 댔다.
예르넨의 성기 위에 붙어 있던 촉수는 성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정액의 세례를 맡고는, 물을 찾게 되어 흥분했는지 갑작스럽게 성기 안으로 파고들어서는 요도 속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끄으읍…!”
결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혀가 닿지 않아 본 요도관 안에 수없이 많은, 핥고 깨무는 자극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끊임없이.
때마침 뒤를 간질이던 촉수들은 제 짝에게 또 다른 자극을 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속에서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로 둥그렇게 뭉쳐져서는 예르넨의 뱃속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허읍…! 흡!”
마치 뱃속을 정으로 쪼개는 것만 같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뱃속을 얻어맞을 때마다 예르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광 근처를 잘못 얻어맞았는지 예르넨은 끔찍한 통증과 쾌감의 중앙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새하얀 허벅지를 허공에서 푸들푸들 떨어대며 실금을 하기 시작했다.
성기를 감싼 시커먼 촉수의 틈 사이로 노란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통과 쾌감이 합쳐진 끔찍한 감각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이 분했는지 예르넨은 쉼 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은 모두 허공에 떠 있는 영상구에 기록이 되었다.
비참함에 몸을 떠는 모습도, 새까만 촉수에 의해 벌려진 구멍 사이로 춤을 추는 것 같이 벌름거리는 속살도, 지나친 쾌감을 못 이기고 본능적으로 천박하게 허리 짓을 하는 모습까지도.
예르넨은 이 모든 상황이 지독히도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저 영상구가 얼마나 퍼져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들의 말처럼 정말로 모든 귀족의 서재에 하나씩 구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돈깨나 있는 평민들마저도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방에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
르크루제 후작은 늘,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예르넨의 천박한 허리 짓을 보며 자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말한 최악의 상황이 맞다면 인간도, 도구도, 하다못해 짐승도 아닌. 끔찍한 마물에 의해 이리도 비참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모든 이들이 보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혀를 빼물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칼을 심장에 박아 넣고 싶었다. 저 깊은 검은 물에 뛰어들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예르넨의 안일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예르넨의 몸을 감싸 쥔 촉수의 모습과 색이 점점 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시커멓던 촉수의 색은 점점 투명해졌고 굵어져서 마치 유리관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때에 다다라서야 예르넨은 볼 수 있었다.
제 엉덩이로부터 시작되는 투명한 유리관처럼 보이는 촉수의 반대쪽 끝에서, 무언가 어둠이 응집된 듯이 아주 새까만, 알 같은 게 꿀렁거리는 움직임을 따라서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흐읍…! 읍! 아읍!”
예르넨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관계의 끝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항상 씨를 뿌리는 행위였다. 그러니 지금 저 투명한 관을 통해서 굴러 들어오는 새까만 알은 마물의 씨인 것이다.
이제 짝이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깨달았는지, 아니면 그저 최후의 번식을 앞두고 모든 힘이 소진된 건지. 예르넨의 입을 감싸고 있던 촉수가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르넨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갔다.
“아악! 하지 마!”
온몸을 비틀고 고갯짓을 하며 거부했다. 울부짖으며 제발 놔 달라고 살려달라고 비참하게 빌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어떤 반항과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하나, 둘. 묵직한 것들이 구멍을 지나 내벽 속으로 굴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잘하게 나뉘어진 촉수들이 제 씨앗을 깊숙이 찔러 넣기 위해 깊이, 깊이 알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제 짝의 내부에 대한 파악을 모두 끝낸 촉수는 알이 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알을 무자비하게 내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결국 첫 번째 알이 결장 너머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 선연한 감각에 예르넨은 전신을 떨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흐윽… 으흑…! 하지 마…! 제발… 흑….”
마물이 어떻게 생식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같은 마물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게 제 씨를 심어 넣는 마물로부터 그 마물의 자식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도.
일부의 마물은 모체의 배를 찢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 일부의 마물이, 지금 그의 뒤를 꿰뚫는 마물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턱이 덜덜 떨려 왔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마물의 알은 예르넨의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랫배는 점점 묵직해졌고, 판판하던 배의 여기저기는 이미 불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하나의 알이 예르넨의 안으로 들어왔다. 알은 이미 들어왔던 알들을 밀어내며 자리를 잡았고,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알들은 밀려나며 예르넨의 몸속 여기저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예르넨의 동공은 공포로 온통 확장되어 있었다.
“흐윽…!”
미칠 것 같았다.
이름조차 모를 마물의 씨앗을 배고, 이제 곧 마물의 알이 부화해 배를 찢고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몸은 자극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자극에 성기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알까지 총 열다섯 개의 알을 흘려 넣은 촉수는 제 짝이 뒷구멍에 애써 싸놓은 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 엉덩이를 옆으로 밀며 구멍을 좁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르넨의 요도 속으로 투명해진 촉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흐윽…!”
촉수의 끝이 예르넨의 요도 구멍에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촉수는 투명한 관을 쭉 잡아당겨서는 예르넨의 요도 구멍에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는 촉수의 다른 쪽 끝을 예르넨의 구멍 사이에 처박고는 마찬가지로 빠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였다. 짝의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로 태어날 씨앗들을 적시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번식을 위한 마지막 작업을 끝마친 촉수의 거대한 몸은 이내 쪼그라들었고, 예르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다시 시커먼 호수의 물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우욱…! 콜록…! 커흑…! 흑….”
예르넨은 물을 진탕 토해내고는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짝!
누군가가 그런 예르넨의 젖은 머리채를 쥐어 잡고 끌어 올린 채로 뺨을 때렸다.
“흑…!”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새하얗게 질린 뺨에 금방 붉은 손자국이 났다.
그제야 시야가 제대로 잡혔기에, 예르넨의 눈에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가죽 구두들이 들어왔다.
“…….”
그리고 조금 전, 그가 당했던 일들도, 기억이 났다.
“…!”
정신을 차린 예르넨은 당장 제 엉덩이 사이에 있는 뒷구멍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바로 곁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 의해 가볍게 결박되고 말았다.
“놔아!”
예르넨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 거센 몸짓에 기사들은 예르넨을 잡고 있던 손을 몇 번 놓치고야 말았다. 하지만 뒷구멍을 향해 손을 뻗는 예르넨의 시도는 번번이 묵살되고야 말았다.
“흐윽… 흑…. 놔아….”
그렇게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완전히 힘이 떨어진 예르넨은 절망한 얼굴을 한 채로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 눈물을 떨궜다.
이대로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마물의 아이를 낳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오욕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왔지만, 이토록 욕되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마물의 씨라니. 예르넨은 제 머릿속 한편을 지탱해 온 무언가가 산산이 조각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런 예르넨을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길래 제가 다음번에 또 도망가면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하.”
페트라 후작이 조소를 머금은 채 예르넨의 볼을 찰싹 소리가 나게 약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지독히도 모욕적인 손짓이었다.
“이제 끔찍한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얌전히 오두막에서 주인님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예르넨은 밀려오는 눈물을 겨우겨우 참아 내었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모멸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저 말을 듣는다면 마물의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저들이 뱃속에서, 이 끔찍한 알을 빼내기를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예르넨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은 마치, 아무리 더럽히고, 더럽혀도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이가 모욕을 당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구하러 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페트라 후작은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닳고 닳은 남창이 된 주제에, 아직도 그 고매한 정신만은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듯이 구는 태도가 지독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너는 결코 예르넨 헬리오를 더럽힐 수 없다고, 빌어먹을 신이 그녀의 종인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감각은 그에게 예르넨을 완전히 망가뜨려서 라일 벨티모어의 앞에 설 수조차 없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충동질했다.
애초에 여기에서 끝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저 모습을 보니 역시나, 끝까지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 끝의 끝까지 가도 그 빌어먹을 고고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면, 몸소 출산을 해 보면서 머리에 새겨보심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또 도망을 가면, 다시 마물의 새끼를 출산하게 된다는 것을 머리에 각인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예르넨의 얼굴이 순식간에 충격으로 물들었다.
“뭐…?”
“못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럼 쉽게 말해드리지요.”
페트라 후작이 예르넨의 턱을 아프게 쥐고는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지금 새끼를 출산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말이죠.”
“도망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예르넨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도망가지 않는다고…! 흐으, 흐윽…! 말했잖아!”
“전하.”
페트라 후작이 예르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저번에도, 그전에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러니, 아둔한 전하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수밖에요.”
“너!”
예르넨은 분노에 가득 차서는 소리 질렀다.
페트라 후작은 금방이라도 그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을 한 채로 그를 노려보는 예르넨의 양다리를 쥐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아흑…! 하… 하지 마…!”
그 손짓에 뱃속의 알들이 속으로 굴러가며 예민한 부위를 후비듯이 파고들었다.
“이 마물의 씨앗을 부화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까?”
페트라 후작의 손이 예르넨의 낭창한 허리를 쓸면서 천천히 내려가더니 성기와 구멍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투명한 관을 튕겼다. 마치 악기의 현처럼 튕겨진 관을 따라 성기에 떨림이 전해져왔다.
예르넨의 얼굴이 순간, 수치심에 화악 붉어졌다.
“간단합니다. 이 씨앗은, 물을 머금으면 머금을수록 커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충분히 물을 머금게 되면… 펑. 하고 터지면서 부화하게 되는 거죠.”
찌이익!
페트라 후작이 관을 확 잡아당겼다.
“아악…!”
구멍 주변에 붙은 관은 새빨간 속살을 아프게 잡아당기면서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페트라 후작의 흉악한 성기가 새빨갛게 부어오른 예르넨의 구멍을 단박에 꿰뚫었다.
“…!”
예르넨은 알을 밀어내며 들어오는 커다란 성기의 끔찍한 감각에 숨조차 쉬지 못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페트라 후작은 그런 예르넨의 머리칼을 쥐고는 아프게 끌어당기며 귓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이건 모두 당신의 죄입니다. 내 앞에 나타난, 죄 말입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악, 하악.”
예르넨은 마치 탈수 직전의 개처럼 혀를 빼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호흡을 하려고 애써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으윽….”
즈윽 소리를 내며 또 한 사내의 성기가 예르넨의 구멍 속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예르넨의 뒷구멍에서는 한 방울의 정액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예르넨은 마치 물속에서 끌어 올려진 물고기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배가 터져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들이 예르넨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다. 또 한 명의 사내가 예르넨의 부풀어 오른 허리선을 끌어안고는 성기를 박아 넣었다.
“…!”
예르넨은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예르넨의 구멍 속에 성기를 박아 넣은 사내는 그런 예르넨의 배를 연신 꾹꾹 눌러 댔다.
“하… 아학…! 하… 하지 마….”
예르넨은 비명을 지르느라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거부의 말을 흘리며 사내를 밀어냈다. 하지만 사내는 결코 밀려나지 않고 예르넨의 배를 더욱 거세게 누를 뿐이었다.
사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괴물 같군요.”
“…!”
지독히도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예르넨을 더 상처받게 만들었다.
뱃속에 심어진 씨앗들은 사내들이 흘려 주는 정액을 모조리 흡수하며 순식간에 자라났다. 때문에 예르넨의 배는 마치 만삭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심지어 그 배는, 정상적인 임산부 같지도 않았다. 여기저기가 올록볼록 부풀어 오른 흉측한 모습이었으니까.
괴물이라는 말에 무척이나 걸맞은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예르넨의 눈가는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젠 더 이상 흘릴 눈물마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예르넨은 무의식적으로 사내의 허리 짓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마치 싸구려 남창이 하는 것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토정을 했고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예르넨의 구멍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음 사내는 예르넨의 구멍 안으로 성기를 집어넣으려 하지 않았다.
“…….”
예르넨은 혼미한 시선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르크루제 후작이었다.
“이제 끝인가 보군.”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예르넨은 그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진창이 된 머리로는 그 말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파스락.
배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알이, 깨져 버린 것이다.
파스락. 파스락. 파스락.
쉬지 않고 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난 새끼 마물들이 뱃속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아아악! 하지 마!”
예르넨은 괴로움에 흙바닥을 손가락으로 마구 긁어댔다. 손톱이 깨어져 나가며 피가 났지만, 절망에 가득 차서 울부짖는 예르넨은 그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계속해서 흙바닥을 기었다.
“어이, 남창. 지금 빨리 마물을 싸 내야 할걸? 지금 싸 내지 않으면 네 뱃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는 배를 찢고 나올 테니까.”
“아, 아흑…! 살려줘…!”
예르넨은 르크루제 후작의 소매를 쥐고는 펑펑 눈물을 흘렸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끔찍한 상황은 예르넨을 끝의 끝까지 밀어붙였다.
르크루제 후작은 그런 예르넨을 내려다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그렇게 말한 르크루제 후작은 기사들에게 손짓했고, 예르넨은 그들의 손에 이끌려서 평소에 몸을 씻곤 하는 얕은 물가로 질질 끌려갔다. 새하얀 종아리와 허벅지의 여기저기에 흙과 돌에 쓸린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털썩.
물가의 바로 앞에 던져진 예르넨은 끔찍한 것들이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는 사내들을 올려다보았다. 르크루제 후작이 그런 예르넨의 앞에 불량스럽게 쭈그려 앉았다.
“그 마물은 물속에서 사는 생명체지. 그러니, 물 안으로 들어가서 싸 내면 나올 거야. 어디 한번 해 봐. 그 괴물들이 남창, 네놈의 배를 찢고 나오기 전에. 빨리! 빨리!”
르크루제 후작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지독히도 치욕스러웠고, 너무도 서러웠다.
“흐윽….”
하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은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강한 힘에 의해 불뚝하고 배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정말로 이대로 있다가는 이 괴물들이 배를 찢고 나올 것만 같았다.
예르넨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서는 겨우겨우 기어가서 물가에 하반신을 담갔다. 시릴 정도로 투명한 물은 그런 예르넨의 볼록 튀어나온 배와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가감 없이 보이게 했다.
“끄윽…!”
예르넨이 물가에 나 있는 억센 풀을 잡고는 배에 힘을 줬다. 풀잎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송글송글 피가 맺혔다.
“아흐윽…!”
그리고 한참이나 힘을 준 끝에, 끔찍하게 생긴 얇고 시커먼 촉수들이 예르넨의 엉덩이 사이에서 하나, 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고 웃음을 흘리면서 예르넨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놀림감이 된 처지가 끔찍이도 모멸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빨리, 배 안에 있는 끔찍한 마물들을 모조리 빼내야만 한다.
“끄으윽…!”
그리고 이마와 등줄기에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세 번째로, 꽤나 커다란 마물을 거의 다 싸 내었을 때였다.
“…!”
갑자기 겨드랑이 사이에 들어온 사내의 거친 손이 예르넨을 물가에서 끄집어냈다.
“아아아아악!”
예르넨의 손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거의 다 빠져나왔던 촉수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조한 환경에 놀라 다시 예르넨의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는 뱃속의 여기저기를 쾅쾅 내리쳤기 때문이다.
그 촉수의 움직임을 따라서 배의 이곳저곳이 볼록, 볼록 솟아올랐다.
말 그대로 괴물같이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 끔찍한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르넨은 제 몸을 결박한 사내들을 밀어내고 풀썩 쓰러져서는 풀들을 쥐어 잡고 절박한 몸짓으로 다시 물가로 기어갔다.
아하하하!
주변에 있는 이들은 그런 예르넨의 모습을 보며 한껏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예르넨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겨우겨우 배를 진정시키고, 그런 예르넨의 구멍 사이에서 스멀스멀 촉수가 기어 나오기 시작하자 다시 물속에서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하지 마!”
반쯤 튀어나왔던 마물은 마른 공기에 노출되자 살기 위해서인지 재빨리 저를 품어 주었던 구멍 속을 헤집고 들어갔고 또다시 뱃속을 쾅쾅 내리찍기 시작했다.
예르넨은 그 끔찍한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흐느끼면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고 몇 번이고 끄집어내졌다.
사내들은 예르넨의 진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장난을 치며 괴롭혀 댔다.
그리고 마침내 예르넨이 다시 물가로 기어들어 가지도 못한 채 풀밭에서 나뒹굴며 괴로움에 몸을 떨며 끅끅거리자, 예르넨을 끌고 가서 눕히고는 양팔을 나무 밑동에 묶어 버리고, 왼쪽 다리를 또 다른 나무 밑동에 묶어 버렸다.
“끅… 흑…!”
예르넨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쪽 무릎을 끌어올렸다. 언뜻, 언뜻, 촉수가 튀어나왔다 들어가는 구멍이 사내들의 시선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예르넨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예르넨의 바로 곁에 영상구를 던져 놓고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럼….”
그리고 예르넨의 상태와 영상구의 위치를 살핀 페트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잠시 식사하러 가보실까요, 다들.”
“뭐, 뭐…?”
예르넨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페트라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짙은 절망과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좋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하지만 뒤이어진 말들은 예르넨의 절망에 쐐기를 박을 뿐이었다.
“가지 마! 제발…!”
아악!
예르넨은 격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지독히도 처절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사내들은 뒤돌아서서는 예르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멀어져갈 뿐이었다.
뱃속에서는 여전히 새끼 마물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예르넨은 절망과 공포에 가득 차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울음기가 가득 담긴 여린 목소리가 예르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으흑, 흑. 무, 무서워…. 가지 마… 흑, 제발….”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간절한 애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 * *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돌바닥에 처박힌 영상구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라일은 덜덜 떨리는 나머지 제대로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는 손을 겨우 들어서 머리를 쓸어내렸다.
“이게 씨발….”
그러고는 간신히 심호흡을 하며 밀려 올라오는 감각을 삭혀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체 뭐지…?”
드러난 얼굴은 끝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지독한 분노에 휩싸여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포트넘 공자에게… 아니. 예르넨에게 과거에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됐다.
라일은 분노로 인해 떨려 오는 손으로 장식장에서 또 하나의 영상구를 꺼내 들고서는 마도구에 영상구를 박아 넣었다. 또다시 영상이 비춰졌다.
아닐 거라고, 착각일 거라고,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그 모든 생각은 다시 영상이 비침과 동시에 들려온 비명소리와 함께 전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씨발!”
콰앙!
라일은 그대로 영상구를 뽑아서는 장식장을 향해 던졌다.
장식장의 유리문에서는 박살 난 유리 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상을 비추고 있던 영상구는 본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쪼개졌다.
라일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조금 전 보았던 영상의 선명한 붉은 색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라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영상구에 찍혀 있는 것이 모두…예르넨의 모습이라는 것을.
콰앙!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장식장의 문을 열고는 그 안에 있는 영상구를 모조리 깨부쉈다. 부서진 유리 파편과 마석의 파편이 여기저기에 흩날렸다. 개중 몇몇은 그의 손과 얼굴에 작은 생채기를 내며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라일은 그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부수고, 또 부쉈다. 그럼에도 영상구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말을 하려던 라일은 입술을 꽈악 깨물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실금이 간 영상구를 내리찍어 산산조각을 냈다. 영상구도, 그 안에 찍혀 있는 영상도 영원히 세상에서 지워지도록.
그렇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르넨이 겪었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젠장…! 젠장!”
콰앙!
라일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맺힐 때까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간 라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시킨 대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로 쭈그려 앉아서는 덜덜 떨고 있는 스테핀이 있었다. 영상구에 막 예르넨의 얼굴이 잡히자마자 녀석을 내보냈는데,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녀석을 죽여야 했을 테니까.
라일은 스테핀의 앞으로 걸어가서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테핀 마리아쥬.”
그제야 살그머니 실눈을 뜬 스테핀이 라일의 신발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예, 예! 폐하…!”
라일은 부들부들 떨려 오는 손을 들어 눈가를 꽈악 누르고는 밀려오는 분노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사람의 얼굴을 합성해서 가상으로 영상구를 만들어 낼 수 있나.”
스테핀은 그 말을 듣고는 벌벌 떨었다.
제 상관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인간 말종에 성격파탄자였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막무가내로 방에 있는 물건을 모두 깨부수는 그런 종류의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런 라일이 저 방 안에 있는 것들을 부수고 난리를 쳤다는 건 역시…저 안에 있는 모든 영상구가 예르넨과 관련된 것들이라는 뜻일 테다. 그것도, 꽤나 악질적인.
만약 그의 추측이 맞다면, 그래서 라일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거라면…정말 큰일이었다.
“제가 알기로 그, 그런 마법은…없, 없는데요.”
스테핀의 목소리가 마치 늙은 염소처럼 덜덜 떨려 왔다. 그리고, 라일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스테핀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거짓이면 네 혀를 뽑겠다.”
“아, 아, 아니! 폐하! 제가 왜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해요!”
스테핀이 혼비백산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그 얼굴에서 그 어떤 거짓도 찾아내지 못한 라일은 꽉 잡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풀었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스테핀이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할 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방금 보았던 영상이 모두 사실이라는 소리가 된다.
“젠장…!”
콰앙!
거세게 벽을 내리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일은 방금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영상 속 예르넨은 3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보다도 훨씬 앳된 모습이었다. 따지자면, 포트넘 공자와 비슷한 연배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저건, 황제가 되기 전에 찍힌 영상이라는 소리다.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마른 모습, 관리되지 못해 잔뜩 헝클어진 채로 자란 머리, 손과 발을 비롯한 몸의 여기저기에 새겨진 흉터는 명백한 학대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예르넨의 두 눈에는 아주 오랜 기간 그런 취급을 받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와 채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포트넘 공자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영혼의 정체가 예르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간 예르넨의 삶이 어느 정도는 편치 않았을 거라고 어림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따위의 삶을 살아왔을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전신의 모든 장기들이 지옥 불에 달구어지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대체 왜…!’
그의 부모를 죽이고, 그를 전쟁 노예로 만들었던 무자비한 전 약혼자. 그가 보낸 편지에 단 한 번의 답장도 하지 않았던 매정했던 첫사랑. 두 형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매일같이 피의 강을 만들었다던 미친 폭군. 그리고…그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자결을 했던 예르넨.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퍼즐 조각들.
“젠장….”
콰앙!
이제야 그 모든 조각이 제대로 맞춰지고, 형태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지금껏 계속해서 도달하려 했던 ‘진실’일 것이다.
‘라일.’
‘왜 그러지?’
‘…미안해.’
이제야, 혼인식을 올린 날 그에게 건네져 온 사과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제길….”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검에 의해 가슴을 꿰뚫렸던 적이 있었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진 뒤 근육 하나하나가 끊기는 그 감각은 지독히도 끔찍했다. 검날을 뽑아내고 생살을 꿰매며 라일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끔찍하게도 가슴이 아플 수 있다는걸,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고통 따위는 우스울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 동부 직할령으로 돌아간다.”
사정을 봐주며 서서히 알아낸다는 생각을 했던 과거의 계획 따위는 폐기다. 유리스에게 가서, 지금 당장 대체 예르넨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낱낱이 알아야겠다.
만약 입을 열지 않겠다고 한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낼 것이다.
* * *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그 상흔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온몸을 전율시키는 영광의 시간은 늘 짧은 법이고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현실이었으니까.
찢어진 깃대, 무너진 건물,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무기, 지저분해진 거리. 그 모든 것은 승리한 이후에도 남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결국 상처라는 것은 언젠간 아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끝에 흉터가 남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늦은 밤 술집에서 흥겨운 분위기 아래 과거의 영광을 떠드는 데에나 쓰이는 법이다.
그러니, 전쟁의 상흔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나온 흔적들을 하나둘 지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저 술집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들 만한 과거가 되는 법이다. 그랬기에 동부 직할령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반군의 흔적을 지워 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은 도로를 정비하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지저분해진 거리를 치웠다. 그리고 그렇게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에서는 반군이 점령하기 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형물을 다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돌탑이었다.
“아니, 거! 돌이 삐뚤어졌잖어!”
그 지적에 조금 전, 돌탑 위로 마지막 돌을 올렸던 남자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이게 벌써 몇 시간째에요!”
하지만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사람들은 그저 즐겁다는 듯이 흥겹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해!”
“그건…안 되지만.”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꿍얼거리면서도 동그란 돌덩이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뭐…그 정도면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한 한스는 주름진 손을 들어 혹여나 무너질세라 천천히 돌탑을 쓰다듬고는 아련한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반란군 놈들이 전쟁을 한답시고 돌들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몇 년씩이나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돌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었지만 놈들은 인간이 아니니 충분히 할 짓이긴 했다.
‘정말 인간이 아닌 놈들이었지.’
한스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반란군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들, 그놈들은 아주 썩을 놈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이 영지도 옆 영지도 그 옆에 영지도 모두 그놈들의 손아귀에 있을 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을 적엔, 그렇게 삶이 힘들진 않았다. 나라는 평온했고 그의 가족들은 적당히 먹고살 만했었다.
그의 할아버지에겐 영주로부터 보장받은 밀 농사를 지을 땅이 있었고 그와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으니까.
햇살은 언제나 적당하게 그의 땅을 비춰 주었고 비는 항상 알맞게 내렸기에 곡식은 늘 옹골차게 여물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척들도 이웃들도 모두 평화롭게 살아갔었다. 할아버지의 대에도, 할아버지의 아버지 대에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 대에도 늘 그래왔었기에 그는 당연히 그의 삶도 그러리라 여겼다.
물론 매 삶이 행복하진 않았다. 소소한 다툼도 있었으며, 때로는 골머리를 앓을 만큼 심각한 문제도 생겨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삶의 기복을 흙바닥에 그려본다면…그리 나쁘지는 않은, 평온한 흐름이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으니 내일도 그렇겠거니. 그는 막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갔다. 그랬기에 그는 알지 못했다. 평화라는 것이…생각보다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신혈을 이은 황족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오름으로서 제국은 신에게 평화를 약조 받는다고는 하나…그마저도 빛바랜 말이 되어 버린 시대였다.
그랬기에 황제 즉위식 날이라는 건 그에게 있어서 그저 하루 편안히 놀고먹어도 아무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그런 날일 뿐이었다.
그는 흥청망청 놀았다. 그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영지를 관리하던 중앙의 관리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영주의 친인척이 차지할 때에도, 세금이 차츰차츰 오를 때에도, 주변에 하나둘씩 고리대로 고통받는 사람이 생겨날 때에도.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벌어졌기에 그는 마치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물속에 가만히 잠겨있는 개구리처럼, 스스로가 익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하던 그마저도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할 정도로 그를 둘러싼 세상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그리고 그가 결국 그렇게 말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도 변해 버린 뒤였다.
천천히 오르던 세금은, 북부 정복 전쟁이 벌어지자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고 어느새 한해 수확량의 절반을 넘어섰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는 지랄 맞게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농사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영주는 세금을 감해 주지 않았고, 무지했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리대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것이 차마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로.
이후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세금과 이자를 떼어 가면 그에게는 한 톨의 밀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결국 한스와 그의 가족들은 영주에게 논과 밭을 경작할 권리를 전부 빼앗기고 농노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는데도 갚지 못한 원금에서는 이자가 발생했고 그는 또 새로 발생하는 이자를 갚지 못해서 다시 빚을 지고, 또 갚지 못하는 개미지옥에 갇히게 되었다.
늘 푸짐하게 살집이 있던 몸은 말라비틀어졌고, 따뜻하고 온화하던 성품은 강퍅해졌다.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마음에 평안함을 품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다 같이 불행해졌으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매일 매일 날아드는 패전보는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토록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제국이 전쟁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그로 인해 지금 살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비참한 패전국 노예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
그는 불행해지고 또 불행해졌다. 밑바닥의 아래엔 늘 또 다른 밑바닥이 있었다. 지금껏 평온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 추락은 그를 더욱더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또 한 번, 황제가 바뀌었다.
‘바뀌어 봤자지.’
그래 봤자 1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그의 불행한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아니, 더 끔찍해질지도 모르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나면…새로운 황제는 정말 최악인 놈이었으니까.
마을과 마을을 오가며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과 음유시인들에게 듣기로, 그 새로운 황제라는 놈은 정말 상종도 못 할 놈이었다.
새 황제는 전 전대 황제가 느지막이 가지게 된 막내 황자였는데, 색정증이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병을 앓고 있어서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않고 밤마다 들러붙어서 난교파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문란함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했던 선황에 의해 탑에 갇혀 유배되었다고.
헌데 탑에 유배되어있음에도 그 색정증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이 다시금 도지자 정신을 놓고 탑을 탈출해서는 형수를 강간하고, 두 형을 죽인 뒤 황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황제가 되고서는 호위 기사랑 매일 밤마다 침대 시트를 피로 물들일 정도로 격하게 붙어먹고 있다고 했다. 정말 황가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패륜아였다.
한스는 확신했다. 모두가 떠들어 대는 그 희대의 미친 폭군이, 결국 제국을 무너뜨릴 거라고.
음유시인들은 영지를 돌아다니며 그 폭군 황제의 행보를 무시무시한 노랫말로 만들어서 불렀고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 노래를 익히고 따라불렀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한스의 불안과 절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온 삶은 충분히 고되고 괴로웠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바에야 그냥 가족들과 함께 콱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스의 삶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만한 일이 생겨났다.
새 황제가 영주의 목을 잘라 버린 것이다.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 아닌가.
영지민들의 입의 입을 타고 새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날개 돋친 듯이 오가기 시작했다. 폭군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제정신이 아닐 줄은 몰랐다고, 제국에 완전히 망조가 들었다고, 그 모든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그리고, 흉흉하기 그지없는 소문이 도는 영지에 황제의 군대인 신혈의 기사단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주의 식솔들과 그 가신들을 몰살시킨 뒤 그 목을 성문에 걸었다.
모두는 앞으로 더한 재앙이 닥칠 거라며 덜덜 떨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날부터 한스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맨날 돈을 갚으라고 찾아오던 영주의 수하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세금을 걷는답시고 괴롭히던 영주성의 관리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주변의 이웃들은, 얼떨결에 자유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뒤,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었다.
자신을 로지 벨리카라고 소개한 관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은 황제의 명이라며 모든 고리대가 소멸했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영주가 영지민들로부터 취했던 모든 돈과 땅을 돌려주었다.
농노로 전락해 가축처럼 부려지던 한스와 그의 가족들에게 다시 농사지을 땅이 생기고, 돈이 생긴 것이다.
그건, 정말…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에게도, 그의 이웃들에게도.
로지 벨리카의 행정 아래 그가 나고 자란 영지와 동부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간 거칠어졌던 이들의 마음은 차츰차츰 다시 예전처럼 평온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그를 잠재우기 위해 공포 정치를 펼치는 황제에 의해 수도에 피의 강이 생겨났다고 했다.
황제를 지탄하고 민중을 선동하는 노랫말이 계속해서 생겨났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노랫말을 읊고 다녔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을 받고, 충분한 비를 맞으며 옹골차게 익은 황금빛 밀밭을 바라보며 한스는 새 황제, 예르넨이…과연 악인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예르넨은, 악인이 아니라 신이 보낸 구원자인지도 모른다는…생각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예르넨의 치세 하에 살아간 3년은 그간 그가 겪어 온 모든 불행의 시간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는 듯이 무척이나 평온했고, 행복했다.
그리고, 어느 날.
“…….”
황제가 죽었다.
황제를 죽인 것은 황제의 전 약혼자였던 벨티모어 대공이었다고 한다. 그자는 황제의 조카인 포트넘 공자의 약혼자로서 황위에 올라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황제를 지탄하는 말을 옮기던 이야기꾼들은 이제, 벨티모어 대공의 위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황제는 또다시 비난받고 희화화되며 하찮은 웃음거리로 팔려나갔다.
그럼에도 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갔다.
그는 여전히 밭을 돌보고, 영글어가는 곡식을 수확하고, 풍성한 짚더미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벨티모어 대공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다시 헤리엇의 치세하에 있었던 괴로운 날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삶은 평온하게 이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영주성 앞 광장의 구석에 작은 돌탑이 하나 생겨났다.
그곳엔, 새하얀 줄기를 가진 국화가 하나 놓여 있었다.
“…….”
쿵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한스, 자네 혹시 이 꽃을 많이 자라게 할 수 있는가?’
그는 저 꽃을 알고 있었다. 저 꽃은 로지의 부탁으로 그가 키워낸 남부의 국화였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꽃을 길러낸 그였기에, 그는 저 꽃의 줄기가, 노을이 질 때면 어떻게 물드는지 알고 있었다.
저 꽃을 가지고, 돌탑 앞에 놓을 수 있는 이는 이 영지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한스는 헐레벌떡 뛰어가서는 영주성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로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는 겨우 그녀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그리고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놀란 로지가 말을 걸기도 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 돌탑…!”
흐읍, 후우.
그는 숨을 고르려고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관리님께서 만드신 건가요?”
“…….”
로지는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꽃을 놓으셨잖어요. 제가 길렀으니까 알 수 있어요.”
한스는 일그러지려는 입매에 잔뜩 힘을 줬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저 돌탑은, 그분의 무덤이잖어요.”
그의 주름진 얼굴은 이미 눈물로 흥건히 범벅이 되어 있었다. 로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맞네. 보여드리고 싶으니까.”
“뭐를요?”
“…그분이 바라던 대로, 평안해진 그대들을.”
늙은 사내의 얼굴에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말은 그동안 해 왔던 어떤 의심에 대한…확신을 주는 말이었다.
한스는 거칠게 목을 울리면서 밀려오는 것들을 꾹꾹 눌러 참았다.
“사실은, 그분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어요.”
수많은 이들에게 폭군이라고 지탄을 받던 그가, 실제로 그와 그의 이웃들에게 전해 준 것은 밀밭이었다. 영주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빼앗으려고 했던 그들의 땅 말이다.
그 땅을 그와 그의 이웃, 그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되돌려 준 그가 오래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스는 수도에 한 번 가보기는커녕, 나고 자란 이 영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무지렁이였기에 이야기꾼이 전해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수도의 황성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거짓으로라도 알지 못했다. 수도는 그에게 너무도 먼 곳이었고 황성은 그보다도 훨씬 더 멀어서 저 하늘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그거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최악의 황제, 제국을 무너뜨린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두가 미치광이 폭군이라고 부르던 그 황제는 사실…누구보다도 그들을 생각해 주는 이였다는 것을.
한스는 여전히 돌탑을 쓸면서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후로 그의 영지와 옆 영지, 그리고 그 옆 영지에도 돌탑이 생겨났다. 어쩌면 더 멀리에도 생겨났을지도 모르지만…그 이상은 가보지 못해서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다시 돌탑을 쌓았으니 빨리 그 새 황제 놈이 오기 전에 후딱 국화를 바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한스는 아들 녀석을 부르려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목에서 서늘한 감각이…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주변이 왠지 고요해진 것도 같았다.
꿀꺽.
한스는 침을 한번 크게 삼키고는 사선으로 눈을 내렸다. 그러고는 발견했다. 제 목의 바로 곁에 대어져 있는…검을.
“으아악!”
한스는 깜짝 놀라서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라.”
어쩐지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만 같았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반란군을 모조리 몰아낸 그 새 황제 놈의 목소리였다…!
“사, 사, 살려 주세요!”
한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쩌면 새 황제는 이 돌탑이 선황을 기리는 돌탑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죽은 목숨이 아닌가.
“이 돌탑, 왜 만든 거지? 넌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돌탑의 정체를 들킨 것이다.
“끄윽….”
목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베일 것만 같았다.
“당장 말해!”
“으아악!”
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그는 죽을 것이고 이 돌탑도, 옆 영지의 돌탑도 그 옆 영지의 돌탑도 모조리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한스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관…관리님…!”
한스는 마치 구원자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 목소리를 들은 라일은 뒤를 돌아봤다.
“하.”
그곳에 있는 건 로지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리스였다. 유리스는 화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라일은 그런 유리스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무언가를 던졌다.
탁.
유리스는 라일을 무뢰배를 보는 것처럼 옅게 혐오가 깔린 눈으로 흘낏 보고는 제 손에 쥐어진 물건을 보았다.
“…!”
그러고는 전과 달리 새파래진 얼굴을 하고는 라일을 바라봤다.
“이건…!”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상이 뭔지도 모를 텐데,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반응이군.”
라일이 한쪽 입꼬리만을 끌어올리는 잔뜩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런 영상구가 한두 개가 아니었나 봐?”
라일의 검이 한스에게서 거두어지더니 곧장 유리스의 목으로 향했다.
“당장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유리스는 미간을 구긴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지나치게 빨리 들키고 말았다.
유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얇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곳에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성으로 가시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알게 된 이상…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탁.
중후한 색감의 마호가니 테이블 위로 두 개의 찻잔이 올려졌다.
“아직 복구되지 않은 곳이 많아 시중을 들어줄 손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로지는 둘의 찻잔에 투명한 주홍색 찻물을 따라 주었다. 떨어져 내리는 찻물을 따라 발효된 차의 그윽한 향이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잔을 모두 채운 로지는 도톰한 헝겊으로 감싼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만 말씀 나누시죠.”
그렇게 말한 로지는 둘이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로지가 응접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대치하듯이 서로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
결국,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라일을 바라보던 유리스는 포기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한가지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그 항복 선언에 라일은 그제야 팔짱을 낀 채 유리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조금 전의 그 영상구. 어디서 찾으신 거죠?”
평이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긴 했으나, 그럼에도 기저에 깔린 초조함을 감춰 내지 못한 어투였다. 라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느슨하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알면 어떻게 할 거지?”
“부숴야죠. 전부다.”
“그거라면 괜찮다. 이미 전부 처리했으니까. 그게 마지막이다.”
“그런… 가요.”
유리스는 손에 들려 있는 영상구를 부술 듯이 꽉 쥐었다.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누가 아직까지도 숨기고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건드릴 생각 하지 마. 놈은 내가 끝장낼 거니까.”
라일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유리스에게 경고했다.
“할 말은 더 없겠지. 그렇다면 이제 말하도록.”
“…….”
유리스의 눈빛이 흐려졌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과연 이야기를 해도 될지, 혹여나 예르넨에게 해가 가지는 않을지.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유리스의 마음 한켠엔, 라일이 예르넨에게 있었던 일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유리스는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상관없으니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알겠습니다.”
유리스는 언젠가의 과거를 떠올렸다. 예르넨을 처음 만났던, 그 겨울을.
“예르넨 님을 처음 뵌 건, 6년 전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천천히, 그렇지만 막힘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유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일의 표정은 서서히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빠짐없이 들은 라일은 분노로 떨려 오는 손을 들고서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사나운 겨울밤의 바람이 얼굴을 온통 할퀴며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고, 라일은 한참 동안이나 그 매서운 바람을 맞았다. 그렇게라도 식히지 않으면, 온몸을 불태우는 분노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말씀하세요.”
“예르넨이….”
부들부들 떨려 오는 주먹을 꽉 쥔 라일이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일을 당하기 시작한 거지?”
“저도 질문드리지 않았기에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오래되었을 거라고 추측을 할 뿐입니다. 예르넨님께서 몇 년 동안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고… 관련된 소문이 돌기도 했으니까요.”
유리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그 소문을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문?”
“예르넨님께서 황가의 자손이 아니기에 발현을 하지 못하는 거라는 소문, 말입니다.”
라일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헛소문이 돌긴 했었지.”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쓸데없는 소문이라 한번 듣고 잊어버렸던 듯싶었지만.
“그 소문이 돌고 이후 한 차례 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열네 살의 생일 즈음부터 예르넨님께서 사라지셨다는…소문이었죠. 그러니 저는 아마…그때부터 갇혀 지내셨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
“그 소문. 폐하께는 헛소문이라고 느껴지셨을지 몰라도 예르넨님께는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시지만, 폐하와 관련된 일이라면…종종 약해지시곤 하니까요.”
“…….”
“그 일 때문에 폐하를 피한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르넨이… 그랬다고.”
창틀을 움켜쥔 라일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젠장.”
정말이지… 제대로 알고 있던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거짓이었다. 전부 다.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줄 알았다. 호의호식하면서 늘 그랬듯이 추종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섬에 끌려가서 몇 년 동안 외로이 갇혀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로 비참하게 욕을 보이면서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너진 제국을 일으켜 보겠다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도 몰랐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갔다는 사실도.
‘…보고 싶었어.’
그 마지막 말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 본 그 순간, 한눈에 반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이 모든 걸 바친 사람이었다. 진귀한 것에 둘러싸여 턱을 치켜들고는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리스 카멜리언.”
“예.”
“지금부터 동부 직할령의 전후 처리와 관련된 전권을 네게 위임한다.”
“네…?"
그 갑작스러운 명에 유리스는 당황한 눈으로 라일을 바라봤다.
“스테핀과 함께 처리하고 모든 복구가 끝난 뒤 수도로 귀환하도록.”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지만 라일은 유리스의 당황스러운 되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은 채, 응접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문 앞에 붙어 있다가 나동그라진 스테핀이 벌떡 일어나서 그런 라일의 뒤를 쫓았다.
“폐하, 카멜리언 자작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예르넨님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들으신 겁니까?”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라일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예르넨님께서는 폐하의 전 약혼자이기도 하지만 사사로이는 제 사촌 동생이 되시는 분 아니십니까. 어떻게 보면 저랑 더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한테도 말씀을….”
우뚝. 라일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보폭을 맞추고 있었던 스테핀은 그대로 라일에게 부딪친 뒤 깜짝 놀라서는 뒷걸음질 쳤다.
“오스턴은 어디 있지?”
“예? 오스턴이라면 아마… 마구간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스턴은 왜….”
“사냥해야 할 놈이 생겼다.”
“사냥… 이요…?”
저 사냥이라는 것은 그저 유흥 삼아 짐승들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일이 오스턴을 불러서 사냥을 명한다는 것은….
스테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대체 누구지?’
스테핀은 흔들리는 동공을 하고 라일을 바라보며 대체 누가 사냥을 당할 만큼 잘못을 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명을 떠올렸다.
“서, 설마 폐하! 정말로 교, 교황을…! 아, 안됩니다. 폐하…! 그건…! 그건…!”
“스테핀 마리아쥬.”
“예, 예…?”
“너는 이곳 동부 직할령에 남아 카멜리언 자작과 함께 전후 처리를 지휘하도록 해라.”
“예? 제가요?”
“나는 황궁으로 돌아간다. 오스턴과 함께.”
“아, 아니…! 폐하 정말로 교황을…! 아이고! 어디 가십니까 폐하! 폐하…!”
당황한 스테핀은 라일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라일은 그런 스테핀을 거칠게 쳐 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폐하.”
어깨를 흔드는 거슬리는 손길에 예르넨의 미간에는 짜증이 아로 새겨졌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한마디 쏘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이 마치 납처럼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예르넨은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손을 움직여서는 어깨를 흔드는 손을 가볍게 쳐 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대방은 그런 가벼운 저항에는 꿈쩍도 안 할 끈질긴 놈이었다.
“폐하!”
‘…빌어먹을 놈.’
결국, 예르넨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도끼눈을 뜬 채로 계속해서 그를 깨우는 상대, 저스틴을 노려봤다.
“폐하, 좀 일어나 보십시오. 제가 몇 번을 불렀는지 알고 계십니까?”
“왜 자꾸 부르는데.”
예르넨은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눈두덩이를 눌렀다.
“아, 여기서 이렇게 기절해서는 쪽잠 주무시지 말고 제발 방에 가서 주무시라구요. 이러다가 또 장례를 치르게 생겼어요.”
“뭐?”
예르넨의 눈에 짜증이 한가득 담겼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폐하 지금 본인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계시긴 합니까?”
“내 얼굴이 어떤데.”
“아니, 며칠 동안 침실에 안 가신 건 알고 있었지만 거울도 안 본 채로 살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
“지금 딱 쓰러질 것 같으십니다. 팔도 좀 보십시오. 이게 어디 사람 팔입니까?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데요. 제 얼굴 보면서 밥 먹으면 토 나온다고 따로 먹겠다고 하신 거, 맞는 말이긴 합니까? 그냥 식사 자체를 안 하시는 거 아니에요?”
예르넨의 입이 굳게 다물린 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저스틴은 한숨을 폭 하고 내쉬었다.
“이러다가는 쓰러지시는 게 아니라 돌아가시게 생기셨습니다. 오늘은 진짜 황후궁에 돌아가셔서 식사도 하시고 눈도 붙이시고 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저스틴은 예르넨이 쥐고 있던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네놈을 뭘 믿고 맡기라는 거지? 네놈이 일을 못 하니까 내가 이렇게 과로를 하고 있다는 거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이고, 제가 일을 못 하긴 해도 지금 폐하께서 하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서류 아까 제가 식사하러 가기 전부터 읽고 계셨던 서류 아닙니까? 지금 한 시간째 읽고 계십니다요.”
능청스레 건네져 오는 그 말에 예르넨은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처럼 이번에 한 말 역시 맞는 말이었으니까.
“자, 자. 어서 황후궁에 돌아가셔서 주무시고 식사도 하시고 그러고 다시 오세요.”
그렇게 말한 저스틴은 예르넨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윽… 죽고 싶어?”
예르넨은 그 거친 손짓이 짜증 난다는 듯이 스테핀을 한껏 노려봐 주었다.
“이게 다 충심에서 우러나는 행동 아니겠습니까, 폐하.”
하지만 저스틴은 그저 씨익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차피 예르넨의 협박이 말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황후궁으로 모실 시동도 불러 두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저스틴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예르넨이 마주하게 된 것은…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마리안느였다. 만약 노아나 러셀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폐하, 모시겠습니다.”
예르넨은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장난기가 넘치는 얼굴을 한 저스틴이 살래살래 손을 흔들고 있었고 앞에는 마리안느를 비롯한 다섯의 시동들이 오늘은 기필코 예르넨을 황후궁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의지가 불타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완벽한 진퇴양난이었다.
“알겠다.”
결국, 예르넨의 입에서는 승낙의 말이 나왔다.
그 말에 무표정한 얼굴을 미미하게 밝힌 마리안느는 작게 묵례를 하고는 앞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황후궁으로 향하는 예르넨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모두들 예르넨이 일에 미쳐 과로를 하느라 황후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르넨은 황후궁으로 갈 수 없어서 집무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황후궁으로 가게 되면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식사를 해야 했고,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음식 앞에 앉기만 해도 토기가 치밀었고,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끊임없이 악몽을 꿨다.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버틸 만한 정도이긴 했다. 문제는… 항상 정신을 잃은 채로 라일 녀석의 옷방으로 기어들어 간다는 데에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면 온통 난장판이 된 옷방 한가운데에 파묻혀서 잠이 들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르넨은 작게 미간을 구겼다,
몇 주 전부터 생겨난 그 괴상한 습관은 점점 심해지기만 할 뿐,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차마…황후궁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들키지 않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그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한계이기는 했다. 글자가 읽히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그랬기에 예르넨은 저스틴의 억지가 필요했던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연약한 포트넘 공자의 몸으로 지금처럼 계속 식사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았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건 정말로, 먹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예르넨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스틴을 통해 은밀하게 신관을 부른 적도 있었다. 물론 차도는 없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신성력으로 회복되지 않는 병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텐데.
물론 아주 간혹가다가 이런 경우가 있기는 했었다. 병에 걸린 게 아니라도 몸에 이상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대부분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 경우 의원을 불러 몸을 보이곤 하지만… 의원은 내키지 않았다.
아마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아서 그러는 걸지도 몰랐다. 최근에는 참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니까.
몸 상태도 몸 상태였지만, 밀려오는 일거리도 골치 아팠고… 라일과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고.
“…….”
오늘로 라일이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예르넨은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동부 직할령에서의 전투가 끝났으니 이제 곧, 녀석이 돌아올 텐데도. 만약에 정말로 라일이 정체를 알게 된 거라면….
“폐하.”
“…?”
생각에 잠겨있던 예르넨은 놀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마리안느를 바라봤다. 그녀는 답지 않은 당황한 얼굴로 예르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뒤, 뒤에….”
“…?”
마리안느의 말에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예르넨을 끌어안고는 목에 얼굴을 묻었다.
겨울바람에 오래 노출되었는지 무척이나 차가운 촉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맞닿은 부위에 열감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
예르넨은 그를 끌어안아 온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에게서 익숙한, 페로몬 향기가 났으니까.
“돌아왔어, …황후.”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