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피에 젖은 투구가 벗겨지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라일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전장을 바라봤다. 마치 재앙이 휩쓸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폐허가 된 성벽의 여기저기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폐하, 여기에 계셨습니까.”
그때, 스테핀이 바쁜 걸음으로 라일에게 다가왔다. 이번 전투에 라일은 스테핀을 대동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임무를 명한 차였는데 그쪽도 얼추 끝이 난 모양이었다.
“다 끝났나.”
“예.”
그리 말한 스테핀은 라일의 투구를 받아 들고는 라일과 함께 성벽을 내려다봤다.
“이걸로 전부 끝이네요.”
“그래.”
라일은 자신이 수도를 떠난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셈해 보았다.
‘삼 주 정도 지났나.’
이로써 동부 직할령을 제외한 모든 반란군에 대한 섬멸이 끝났다. 앞으로 벌어질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사전작업이 마무리 지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했다.
동부 최고의 요새이기도 한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명성에 걸맞게 성을 빼앗기에 무척이나 까다로운 곳이었다. 더욱이 배후에 적을 둔다면 더더욱 불리한 곳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라일은 다른 영지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해 동부 직할령을 고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예상대로 작전은 쉽게 성공할 수 있었고 놈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됐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으니 아마 모든 반란군을 처리하고 수도로 돌아가는 데에는 이주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소리다. 난공불락의 요새 안에 들어 있는 반란군을 고작 2주 만에 진압하겠다고 한다면.
완벽한 자급자족이 가득한 그 거대한 성과 깎아질 듯이 높은 요새를 점령하는 것은 못 해도 반년의 시간이 걸릴 만한 일이니.
그러나 라일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는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해 본 적이 없는 전장의 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치열한 북부의 전쟁터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구른 그에게 있어서 동부의 반란군 따위는 그저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그에겐 전과 달리 잘 훈련된 병사, 위계가 확고하게 잡힌 지휘체계, 완벽한 타이밍에 주어지는 적절한 보급이 있었다.
‘황제라는 게 좋긴 좋군.’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전투가 순조롭게 잘 풀려가는 것과는 다르게 라일의 마음속은 번잡스러울 뿐이었다.
“…….”
내전이 끝나면 그는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돌아가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의 황후이자… 2년 전에 죽은 전 약혼자와의 대화를.
죽은 사람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믿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라일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는 늘 목에 걸고 다니는 펜던트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린 날의 예르넨이 있었다.
이 펜던트를 몇 번이고 버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치 예르넨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예르넨의 정체를 알게 된 날 밤. 라일은 잠이 들어 있는 예르넨의 곁에 앉아 그 얇은 목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저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고.
그것이 라일이 품은 마음이었다. 지독한 증오에 가득 차서 당장이라도 예르넨을 죽여 버리고 싶은.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지독하게 비틀린 마음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을 애증이라고 한다지.
“…….”
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사진 속 예르넨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인상을 쓰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는 어린 예르넨은 그저 아름답고 화사할 뿐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이랬지.’
처음 보았을 때,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것보다도 조금 더 어렸던 예르넨을 처음 보았던 그 날. 라일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화사하다고. 그러고는 가슴 속에 순수한 애정을 품었다.
“…하.”
라일은 조소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지.’
지금과는 다르게, 그랬던 시간도 있었다.
* * *
다섯 살 무렵의 라일 벨티모어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으면 하물며 부모에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는 치기 어린 아이였다. 게다가 황가에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기도 했다.
그는 황가를 떠올릴 때면.
“재수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궁에서 강제로 입궁을 명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가 황자의 약혼 상대로서 어울릴지 살펴보겠다는 명목으로.
참으로 어이가 없는 사유였다. 황자와 약혼식을 올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황자에게 얼굴을 보이고 선택을 받기 위해서 황궁을 방문한다니.
라일의 자존심상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헌데 그의 부모님은 그런 황제의 명을 따르는 것이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라일을 데리고 수도로 향했다.
어린 라일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벨티모어 대공가는 북부의 왕가나 다름없는 가문이었다. 북부는 제국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라일의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그런 북부를 호령하는 왕이었다. 때문에 제국에 편입된 다음에도 독자적으로 북부를 다스릴 자치권을 인정받아 대공이라는 직위를 하사받았다.
제국에 있어서 대공 위를 받은 것은 벨티모어 대공가가 유일했기에 대공가는 황가의 바로 다음 가는 가문이었으며 심지어 황가라고 할지라도 대공가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가신들은 라일에게 누누이 말했다.
그런데 북부의 왕이나 다름없는 라일의 부모님이 황가에서 약혼을 하자는 말도 아니고 그저 황자에게 라일을 선보이기 위해 들르라는 명을 내렸을 뿐인데 그 명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데리고 수도행을 택했다는 사실을 라일은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뭔데. 감히 명령을 내리는 거야?’
그랬기에 그는 황가에 잔뜩 반감을 품은 채로 황궁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그대로 도망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일은 그 막내 황자 예르넨이라는 녀석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선택권도 없이 바로 약혼을 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처사인가.
그래서 라일은 황궁을 탈출해서 북부로 향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황궁에 처음 방문하게 된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황궁이 무척이나 광활하다는 사실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군.’
한참을 걸어간 끝에 라일이 내린 평이었다. 그리고 라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미아가 되었다는 사실을.
사람의 눈을 피해서 황궁을 나가겠다는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이곳은 결코 길이 익숙한 누군가의 안내를 받지 않는 이상 나갈 수 없는 구조였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라일은 바로 주변을 살폈고 개중 제일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어디든 이 궁 밖으로 안내해 줄 사람만 찾으면 될 일이니 재고 따질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어느 면에서는 나쁘지 않았고 어느 면에서는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궁의 주변에서는 확실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그가 원하던 황궁 밖으로 안내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가 그리 반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데이브에게 그딴 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린아이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부류였다. 분명 귀한 피를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있는 성깔 없는 성깔 다 부리며 제멋대로 구는 애새끼겠지.
딱 질색하는 부류였다.
쨍그랑!
‘얼씨구.’
찻잔까지 집어 던지다니. 정말 제대로 된 망나니의 자질이 보이는 놈이었다.
이쯤 되니까 라일의 머릿속엔 작은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저 성깔 더러운 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그런 궁금증이었다.
아마 다가간다고 해도 놈을 달래는 데 여념이 없을 사람들은 그를 황궁 밖으로 안내를 해 줄 만한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다른 궁을 찾아서 떠나는 게 나았다.
그래. 평소의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라일은 왠지 모를 묘한 충동을 느꼈다. 저 소리를 지르는 있는 놈의 어린애 특유의 쨍한 목소리가 꽤나… 거슬리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안에 섞여 들어가는 발음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우아한 말씨여서 그랬을까.
라일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르넨, 리지를 너무 미워하지 말렴.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한 가족이 될 사이잖니?”
“에이씨, 짜증나. 형한테 파혼하라 해!”
그리고 낮은 나무 덤불을 헤치고 도착한 곳에서 라일이 본 것은….
“어….”
천사였다.
“너는 누구인데 감히 내 궁의 정원에서 나온 것이냐.”
“어….”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일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햇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금발 머리도, 새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얼굴 안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화려한 이목구비도, 우아한 몸가짐도. 심지어 성격 더러워 보이는 표정까지도. 정말….
“…….”
어린 라일에게 그 아이는 너무도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때, 천사같이 생긴 아이의 곁에 서 있는 아이와 같은 색의 머리를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네가 라일이니?”
라일은 그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예.”
그리고 그제야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고 라일은 깨달았다.
잿빛이 섞인 금발. 그것은 황족에게서만 발현되는 머리색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눈앞의 두 사람은 황족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현재 라일과 또래의 황족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예르넨 헬리오. 그의 약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황제가 그토록 애지중지한다는 막내 황자였다.
“그러고 보니 벨티모어 대공의 외아들 이름이 라일이었던가?”
“맞아, 라일 벨티모어. 아바마마가 우리 아기 약혼자로 짝지어 주려고 입궁을 명하셨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날이 오늘이었구나.”
“아, 오늘 온다던 내 부하 후보가 네 녀석인가.”
그 말을 듣고 라일은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저 천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황제의 막내아들 예르넨 헬리오라는 사실을. 그리고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 황자가 그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을.
“얼간이는 부하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 소리는 예르넨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아진다는 소리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라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가 약혼을 거부하고 황궁을 탈출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깔끔하게 지워진 후였다.
“혹, 당신이 예르넨 황자 전하십니까?”
“그래.”
예르넨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어쩐지 라일은 그 태도가 예르넨에게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 태도가.
라일은 시원스레 웃으며 우아한 중부식 예법으로 의자 위에 서 있는 예르넨에게 손을 건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예르넨은 제법이라는 얼굴을 하며 손을 건넸다.
라일은 예르넨이 안전하게 내려온 것을 확인한 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예르넨의 손등에 키스했다.
“벨티모어 대공가의 라일 벨티모어가 황자 전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 네가 내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날 처음으로 라일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갈망하는 게 생긴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게 되었다. 아마 세상을 채우고 있는 색이 그토록 선명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을 것이다.
* * *
‘… 그랬지.’
이후 라일은 예르넨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 얼굴을 보고 반한 거였지만, 같이 있게 되고 예르넨을 점점 알아 가면서 그는 예르넨 헬리오라는 사람, 그 자체에 미쳐갔다.
그랬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존심을 부리던 그는 예르넨 앞에만 서면 머저리같이 속 편한 놈이 되어 버렸고, 종국에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기라도 할 듯 예르넨이 바라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개처럼 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을 한 대가로 그는… 버려졌다.
* * *
어느 순간부터 예르넨은 그를 피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다른 녀석들을 채워 갔다.
예르넨의 앞에서는 한없이 유순한 척을 하던 그놈들은 예르넨이 없을 때면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는 라일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예르넨이 진짜 너와 혼인을 치를 거라고 생각하냐고. 이제 너는 곧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거라고.
치기 어린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내뱉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에 라일은 그 말들을 모조리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도 둘 사이에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엇갈려가는 사이를 풀어내기 위해 라일은 끊임없이 예르넨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와 제대로 된 말조차 나누려고 하지 않았고 외면했으며 밀어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라도 해 보려고 겨우 예르넨과 독대할 기회를 마련했을 무렵, 대공령에서 비보가 전해져왔다.
그것은… 부모님이 급사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충격적인 비보를 전해 들은 라일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다니. 마지막으로 보았던 부모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강했으며 갑작스러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나이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며 라일은 처음으로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쩐지 모든 정황이 수상했다. 그의 직감은 그에게 수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한 경고를 보내왔다. 지금 떠난다면, 다시는 예르넨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라일은 그 찝찝한 감각을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 버렸다.
그도 그의 직감이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그는 느낌이 이상하다는 그런 불확실한 사유 하나만으로 대공령으로의 귀환을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일은 벨티모어 대공 위를 승계해야만 했으며, 그가 없어 아직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부모의 시신을 영면에 들게 해야 했다. 그랬기에 라일은 예르넨의 곁에 머무르는 대신 북부로 떠나기를 택했다.
사실 그것은 라일이 아주 조금만 제정신을 유지했었더라면 결코 택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직감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파헤쳤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경솔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 *
‘… 아주 개 같았지.’
라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 * *
그 이후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대공령에 도착한 바로 그날. 장례식도 승계식도 제대로 치러지기도 전에, 중앙에서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에게 씌워진 죄명은, 반역 모의죄였다.
라일과 그의 가신들은 그 갑작스러운 급습에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그는 마나 구속구가 채워진 채로 지하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하며, 부모의 시체가 끌려나가고 흙발로 쳐들어온 이들에 의해 대공령이 엉망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지민들은 소유한 사유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농노로 격하되어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채 광산에서 노예로 부려졌다. 매일같이 채찍질 소리와 비명소리가 두꺼운 벽을 뚫고 지하 감옥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라일이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를 구하러 온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는 것뿐.
도망치는 내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영지민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그의 발을 잡고 늘어지며 가슴속의 죄책감을 한 뼘씩, 한 뼘씩 자라나게 했다.
그렇지만 라일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지금 돌아가는 건 다 같이 함께 개죽음을 당하는 길이나 마찬가지라고. 모두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공가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예르넨만 만난다면, 예르넨이 그의 부모님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주기만 한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그는 마음속에 부피를 키워가는 거대한 짐을 한편으로 밀어 넣은 채로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수도로 가는 긴 여정 동안. 그가 쫓아오는 추격을 따돌리고 가신들과 함께 수없이 생사를 넘나들며 겨우겨우 취한 연락에 예르넨은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전해진 건 예르넨의 수석 시동 데이브의, ‘지금은 예르넨이 연락에 응하기를 원치 않아 한다.’는 응답뿐.
‘…….’
라일의 마음속에는 점점 의심이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 예르넨이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
‘이 모든 것이 황자 전하의 부탁을 들어준 폐하의 명이시다.’
‘정말 황자 전하께서 네놈과 혼인을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미 폐하께서 전하의 새 약혼자를 내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네놈은 모르고 있는 건가?’
대공령의 지하 감옥에서 라일을 고문하던 귀족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그런 말을 지껄였었다. 물론 당시의 그는 그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쩌면 그 말이 모두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동안 느껴 왔던 예르넨과의 알 수 없는 거리감과 뒤엉키며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예르넨이, 그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결론을.
몇 달에 걸친 고문과 고된 여정은 라일의 육체를 좀먹고 정신을 갉아먹어 갔다. 그랬기에 그의 약해진 마음은 그 터무니없는 의심에 점점 힘을 실었고, 수도에 다다를 때 즈음 라일의 머릿속은 온통 예르넨에 대한 의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라일을 키워왔던 대공가의 오랜 가신들은 그런 그를 다독이면서 아닐 거라고, 예르넨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예르넨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가신들은 늘 라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수를 잡는 법도, 산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검을 다루는 방법마저도.
라일은 대개 사람을 인정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의 가신들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라일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사였던 그들은 정직하게 쌓아 올린 세월의 나이테가 연륜이 되어 빛나는 지혜로운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는 대개 틀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들이 틀렸고 라일이 맞았다.
수도에 도달하기까지 정말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처음에 그를 지하 감옥에서 구출할 때 함께했던 가신들은 무려 열 명이나 되었지만, 수도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백발이 성성한 기사는 벨티모어 대공가의 기사들을 이끄는 이이자, 가장 오래된 기사였으며 라일에게 검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전하.”
온통 피범벅이 된 입술에 호쾌한 미소를 담은 늙은 기사가 말했다.
“꼭, 사십시오. 살아서 예르넨님을 만나서, 저희의 모든 억울함을 다 벗겨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기어코 라일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라일 혼자만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과연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라일은 끊임없이 되물으면서도 그를 붙잡으려는 이들을 따돌리며 예르넨의 궁으로 향했다.
대공가의 가신들은 모두 대단한 이들이었다. 무너진 대공가를 뒤로 한 채로 달아나서 다른 귀족에게 몸을 의탁한다면 그 누구라도 흔쾌히 받아 줄 만큼.
하지만 그들은 그를 위해, 영지민들을 위해 그들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기억하는 건 그뿐일 텐데도.
그렇게 라일은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희생하여 겨우 예르넨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그에게 건네진 것은, 차가운 외면이었다.
“아인즈.”
“네, 전하.”
“물려라.”
예르넨은 그렇게 말한 뒤 떠나갔다. 그 믿을 수 없는 처사에 라일은 분노에 차서 절규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보다도 원통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는 너무도 큰 희생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값을 치른 뒤에야 겨우 예르넨에게 닿았다. 그런데 예르넨은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길조차도…!
부모도, 가신들도 모두 잃은 그에게 남은 소중한 이는, 이제 예르넨뿐이었다.
그가 지켜야 할 존재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도 예르넨뿐이었다. 그런 예르넨이 그를 거부했다. 마치, 그가 품어온 모든 의심이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황제의 기사들에 의해 구속되었고 황제의 앞으로 끌려갔다. 대전에 시립해 있던 귀족들은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처박힌 그의 몰골이 기껍다는 듯이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그리고 여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한가득 비웃음을 띄운 황제는 황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르넨이 네게 전쟁 노예의 낙인을 찍어서 북부로 보내 버리라더군.”
“뭐…?”
황제가 내뱉는 충격적인 말에, 라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웃기지 마.”
라일은 이를 갈고는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예르넨이 그럴 리 없어, 예르넨을 만나게 해 줘…!”
“예르넨은 네놈 따위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군. 마지막 할 말은 그게 다인 모양이니….”
그리 말한 황제는 라일을 결박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벗겨라.”
명을 들은 기사들은 우악스럽게 라일의 상의를 잡아 뜯었고 그와 동시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대전 안으로 화롯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스스로 황좌에서 내려온 황제는 손수 화롯불에 인장을 달구고는 라일의 왼쪽 견갑골을 지졌다.
“으아아악!”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워갔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이들은 억세게 쥔 손에 힘을 더할 뿐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라일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비참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하하하!’”
여기저기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바르작거리는 꼬라지가 통쾌하다는 듯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끌고 가라.”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고 황제의 명에 기사들은 마치 짐승을 제압하듯이 끝이 갈라진 쇠막대기로 그를 구속한 채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질질 끌고 나갔다.
라일은 거칠게 반항을 했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한 몸에는 그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마력을 구속하는 노예의 낙인은 그의 몸을 납덩이를 매단 것 마냥 무겁게 만들었다.
결국, 억압하는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라일은 황제의 기사들에 의해 낡고 오래된 철창 안에 갇혔고 북부의 전쟁터로 향하는 마차에 실리게 되었다.
북부로 향하는 동안 날은 점점 추워져 갔다. 그리고 추위를 견디지 못한 수많은 노예들이 북부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죽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안은 온통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 차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 안에서 라일은 그들과 함께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에겐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집도, 가족도, 지위도,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라일은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질긴 목숨줄은 그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연고 없는 타국의 격전지에 내던져졌다. 맨손으로 최전방에 던져져서는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칼을 빼앗아 든 채로 수많은 이들을 베고, 또 베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살아남았다.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쉼 없이 그를 구타하고 고문하던 동부 귀족 출신의 상관들이 참혹한 전쟁의 화마에 휩싸여 한 줌의 재로 화할 때도, 대단위 공격 마법이 그의 바로 앞에 떨어졌을 때도.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죽어 갔지만, 그만은 살아남았다.
비록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반신에 화상을 입어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날짜를 세어 보지는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기억할 만큼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목숨줄이 붙어 있는 대로 살아가고 살아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그가, 그저 감정이 없는 도구처럼 무감하게 살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벨티모어 대공령에서 끌려온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목숨을 살려 달라며, 가족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했을 때. 그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이름도 모를 들판에 널려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을 때. 그런 그들의 원통함이 가득 찬 눈을 감겨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때.
그럴 때면 라일의 눈빛은 조금 더 짙은 색을 띠며 가라앉곤 했다.
그는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전장에서 굴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누군가가 그런 그를 찾아왔다.
“전하가 맞으십니까.”
스테핀과 발렌, 그리고 오스턴. 찬란하던 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말했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북부로 겨누어진 황제의 칼은 여전히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가문이 멸문의 길로 들어섰다고. 그들은 그런 황제로부터 달아나, 북부를 재건하기 위해 라일을 찾아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고.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달아나서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 말했다. 하지만 라일은 그들을 따라 전쟁터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가문을 일으키고 싶은 의지는커녕 살아가고 싶은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전쟁 노예의 낙인이 찍혀졌다. 그 낙인은 그의 마나를 봉인했고 그 후 몇 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만약 낙인을 지운대도 힘을 되찾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랬기에 라일은 그들의 간절한 애원을 무시했다.
“이런 건 전하답지 않습니다.”
발렌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그리 말했다.
“…하.”
라일은 그의 떨리는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누명을 벗어내기는커녕 이 전쟁터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기에 감시관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이 전쟁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스테핀은 돌아서는 그의 뒤에 대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전하는 북부의 주인, 벨티모어 대공이지 않습니까…! 전하께는 의무가 있습니다. 북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
“이 전쟁터에 얼마나 많은 북부인이 있는지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매일매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도…! 그들을 모두 찾아서 지키고, 보호해야 하지 않습니까. 늘 예르넨 님이…!”
“그만.”
라일은 두 눈에 증오를 가득 담고는 스테핀을 노려봤다. 스테핀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꺼져라.”
그렇게 라일은 그를 찾아 전쟁터까지 달려온 그의 친우들을 외면한 채로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
‘라일 벨티모어.’
하지만 그런 그에게,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언제 귀족이 가장 귀족다운지 알고 있나.’
익숙하디익숙한,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가장 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 줄 때, 귀족은 가장 귀족다운 법이지. 그들이 원할 때, 그들이 구원자를 필요로 할 때. 그런 그들을 구원할 때. 귀족이란 존재하게 되는 법이지.’
빌어먹을 목소리가.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이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밑바닥까지 추락시킨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라일은 그런 녀석에게 반했었다. 그 올곧은 신념에, 진정한 황족다운 그 모습에.
그랬기에 예르넨의 신념은… 라일의 신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가만히 방기할 수 없게 되었다. 무척이나 개 같은… 일이었다.
때마침 제국은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던 초반의 기상을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제국군은 얻어 냈던 북부의 모든 영토를 잃었으며 심지어 본디 제국의 영토였던 북부의 자잘한 성들마저도 빼앗긴 뒤였다.
그리고 마침내 북부의 주요 거점을 빼앗겼을 무렵, 황제는 더 이상 그가 패배하고 있는 현실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마법사를 보내왔다.
그리고 미친 황제의 수하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정신 나간 마법사는 그들에게 ‘제국을 위한 희생’을 강요했다.
말이 제국을 위한 희생이지 탈영병인 척 성안에 들어가서는 살아 있는 폭탄 노릇을 하라는 소리였다. 제정신이 박힌다면 도저히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지만 정신 나간 마법사는 사람의 몸에 마법진을 새길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누구도 그 미친 작전에 제 한 몸을 바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본 마법사도 지원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그는 북부 출신의 제국민들을 막무가내로 지목하고 그들을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은 사람들을 우악스럽게 끌어내기 시작했고 억지로 끌려나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그들은 그들을 구해 줄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절박하게 소리쳤다. 허나 제가 끌려나가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끌려가는 이들의 눈에는 절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그들 중 몇몇은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으로 라일을 바라보기도 했다. 과거, 그가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며 이내 시선을 떨구었지만.
“멈춰라.”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단 한 번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않았던 라일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내가 성을 탈환해 온다면 이들을 풀어 주겠나.”
그리고 그런 라일의 등장에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지휘관이 나섰다.
“네가?”
얼핏 빈정거림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라일은 알고 있었다. 그 물음은 그저 순수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동부 출신답지 않게 청렴한 문관이라는 이유로 최근 이 지역으로 좌천된 지휘관이었다. 라일에게도 북부인들에게도 악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보기 드문 지휘관이었기에 라일은 그와 말이 통할 거라는 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셈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어떻게 할 셈이지?”
그는 꽤나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라일을 바라봤다.
“내 등에 있는 낙인을 지우고 부릴 수 있는 몇몇의 병사를 내어준다면 성을 탈환해 오겠다.”
그 말에 지휘관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서렸다. 그는 문관 출신이었고 그의 부하 중에는 무에 뛰어난 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라일은 달랐다. 무장으로 유명한 선대 벨티모어 대공의 외동아들이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훌륭한 성취를 일궈 냈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였다.
게다가 라일의 죽음을 바라는 윗선과는 달리 그는 내심 이렇게 잃기엔 라일이 무척이나 아까운 인재라고 여기고 있던 차였다.
“좋다. 열 명의 부하를 부릴 수 있게 허락하겠다. 하지만 신관은 없다. 그런데도… 하겠나.”
그는 위에서 밉보일 대로 밉보여서 좌천까지 당한 자였다. 그랬기에 그의 병영에는 신관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노예의 낙인을 지우려면 생으로 살을 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이미 한차례, 낙인이 찍혀본 적이 있기에 라일은 생살을 지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동안 그가 외면했기에 죽어간 이들의 목숨값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저렴하지 않은가.
라일은 굳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신관 따위는 필요 없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휘관은 뜨겁게 달군 인두를 준비하라 소리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일의 왼쪽 견갑골에 새겨진 인장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가 내리 찍혔다.
생살이 타오르는 매캐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고통을 참는 끔찍한 신음이 그의 목울대를 울렸다.
곁에 있는 이들마저 고개를 돌릴 정도로 바라보기만 해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이라도 금방에 졸도할 만큼 끔찍한 고통을, 라일은 버텨 냈다. 그리고 마침내 잃었던 힘을 되찾은 그는… 성을 탈환했다.
그는 이후 군대를 이끌게 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황제마저도 감히 그를 멋대로 죽일 수 없게 될 만큼 대단한 성과였다.
라일은 성과를 올릴수록 점점 더 많은 이들을 제 휘하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는 북부의 전쟁터 이곳저곳에 끌려와 비참한 취급을 받는 북부인들을 모두 제 아래로 데리고 왔다.
북부인들은 그들을 구해 준 라일에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을 바쳤고 라일의 군대는 수많은 왕국을 복속시켜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일과 그의 군대가 공로를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보급이 전해지지 않았다. 때문에 라일의 군대는 제대로 된 무기를 쥐어본 적도 없었으며 한 번도 배불리 먹어 보지 못했다.
낡디낡은 천막 안에서 잠을 청하며 수많은 이들이 동상에 걸렸지만 신관은커녕 의사조차 배정이 되지 않았기에 병사들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 죽어 갔다.
이제 라일은 전과 달랐다. 그는 수많은 이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참하게 죽어가는 영지민의 곁을 지키고, 눈을 감겨 주는 것뿐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풍년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풍년은 제 살아생전에 본 적이 없어요.”
“그래.”
그날도 그는,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치고 있는 병사의 곁에 앉아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병사는, 전쟁터로 끌려오기 전 아주 깊은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농꾼이었다. 그는 황제의 군대에 강제로 이끌려 가족들과 떨어져 외따로 전쟁터에 던져졌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뭐든지 최선을 다했고, 그런 모습이 라일의 눈에 들어 그를 지척에서 보필하게 된 이였다.
라일은 그런 사내가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를 고요히 들어 주었다.
“수확을 마치신 아버지의 수레에 올라타서는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보았던 그 호밀밭이, 고국이, 그립습니다, 전하.”
“…그래.”
“너무도 원망스럽습니다.”
그는 말없이 병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마지막을… 직감했으니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저는 그저,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사내의 눈은 서서히 흐려졌고 두 눈가에는 마지막을 알리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정말, 너무도… 그리워….”
“…….”
라일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모조리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이나 그의 곁을 지킨 후 눈을 감겨 주고는, 막사로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병영에 있는 사람 중 절반이 죽어 나갔다. 누군가는 적군의 검에 찔려서, 누군가는 적군의 작전에 휩쓸려서 죽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채 죽어 갔고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팔다리를 자르다가 결국은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 갔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왔으나 유독 뼛속까지 시린 기운이 치고 올라오는 이번 겨울은, 불가능할 거라고. 그의 직감이 말해 왔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앞으로 몇 번의 전투가 끝나면, 그동안 버텨 오던 이들마저도 버티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이대로, 그렇게. 고향의 땅을 밟아 오지 못한 채 먼 타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겠지.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앞으로 그에게 닥쳐올 미래가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는 결국, 부모의 억울함도 씻어 내지 못하고, 대공가도 되찾지 못한 채로, 정복 전쟁에 끌려온 수많은 북부인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그렇게 남 좋은 일만 실컷 해 준 뒤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일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이토록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와중에 그래도 누명을 벗어 보겠답시고 겨우겨우 모아 낸 증거를 황실에 보냈다.
그렇지만 아마… 받아들여질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부터 그에게 누명이 씌워지지 않았을 거니까.
들끓는 증오심이 가슴을 녹여 버리는 것만 같았다.
‘예르넨….’
증오하고, 증오했다. 그를 이렇게 만들고, 그의 사람들을 이토록 끔찍하게 살아가게 만든 예르넨을…!
아직도, 그날. 돌아서던 예르넨의 뒷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진짜 예르넨이 너와 혼인을 치를 거라고 생각하냐고. 이제 너는 곧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거라고.
그리 말하던 놈들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말들은 다 진실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그 눈도, 감정도… 다.
‘연기였을까.’
라일은 허망한 얼굴로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연기였겠지.’
이 상황에서도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해해 보려는 스스로가 진절머리가 났다. 그 모든 상황이 다 연기였다는, 억지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
예르넨은, 그가 보낸 그 어떤 편지에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증원이 필요했을 때, 병영에서 아사자가 넘쳐날 때. 그 모든 것이 겹치던 어느 날, 라일은 예르넨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부디 도움을 달라고. 그를 이렇게 만든 원수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라일이 그 모든 상황을 이겨 낼 때까지 예르넨으로부터는 어떠한 도움도, 심지어 대답마저도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이 어려웠던 건지, 한번 편지를 쓰게 되니 어쩐지 예르넨에게 연락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후에도 라일은 때때로 예르넨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답은… 없었지만.’
라일은 계속해서 예르넨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거절당해도, 끊임없이.
예르넨을 떠올릴 때면 심장이 끊어질 것 같은 증오로 뒤덮였다. 그를 이렇게 만들고 그의 영지와 북부의 모든 이들을 짓밟은 예르넨에게 지독한 복수가 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정말 빌어먹게도, 등신 같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매번 마지막에 귀결되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
‘…….’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머저리 같은 놈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그는 차마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버릴 수가 없었다.
공을 세우고 대공가를 재건하고 예르넨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돌아간다면, 다시 돌아간다면….
‘빌어먹을.’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예르넨은 그가 어떤 지위를 갖추든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편지에조차 답장을 해 주지 않는데 퍽이나 다시 그와 혼인을 한다고 하겠다.
라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예르넨을 떠올렸다. 사실은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예르넨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버림받은 개가 평생 각인된 주인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지 않은가.
쓴웃음을 지은 라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의 밖으로 향했다.
시린 바람만이 달음박질하는 황야가 마치 그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버림받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점에서.
그 황야에 서서 라일은 지금껏 그가 지나온 땅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땅들을 지나, 저 멀리에 도달하게 되면… 그곳에 예르넨이 있었다.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단 한 통의 편지조차 답장하지 않는 매정하기 그지없는 약혼자가.
‘너도 가끔은 내 생각을 할까.’
그는 단 한 번도 예르넨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는데 과연 예르넨도, 그와 같을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르넨은 이제 원수나 다음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랬기에 그가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은 그의 부모를, 그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을, 그를 위해 죽어 간 사람들을 모두 모욕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웠다. 사무칠 정도로 보고 싶었다.
너무도….
이젠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을 그의 모습을 그리며, 라일은 또 하루의 밤을 넘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해졌다.
발신인은, 예르넨이었다.
편지를 열어 보려 했으나 손이 계속해서 떨려 와 쉽지 않았다. 라일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편지를 열어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질 좋은 종이의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졌다.
곱게 접힌 편지지를 세 번 펼쳐 내고 나서야 라일은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 있는 것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
그곳에는 처음 보는 필체로 건조하게 대공가의 반역죄를 없던 일로 하고 그에게 다시 대공의 직위와 영지를 돌려준다는 내용이 적힌 공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공문과 함께 그와 포트넘 공자 사이의 약혼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또 다른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곳의 서명란에 도달해서야 라일은 익숙한 필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휘갈겨 쓴 서명.
그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존중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서명에서.
라일은 엄지손가락으로 그 네모 칸 안에 엉망으로 널려 있는 글씨를 찬찬히 쓸었다. 서서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숨통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하.”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그는…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예르넨에게 그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후 제국으로부터 예르넨이 그토록 아끼던 제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과 새 황제가 매일같이 귀족들을 학살하며, 백성들을 대상으로는 공포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풍문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라일은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가 알고 있던 예르넨이 정말로, 모두 거짓이었던 것만 같다는 그런, 감정.
뒤늦게 북부에 찾아온 전령은 여러 이야기를 전하며 황위에 오른 예르넨이 외가인 마리아쥬 후작가를 북부의 새로운 수장으로 세우고 스테핀을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귀띔하고 떠났다.
그 이야기를 들은 스테핀은 황망한 얼굴을 하고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라일은 예르넨에게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 하나를 짓밟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며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 모두를 짓밟는 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것은 라일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예르넨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귀족들의 탄원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수도의 말이 그가 있는 먼 북부까지 전해지는 과정은 아주 느렸고 그 안에서 수많은 이들의 입을 거쳐야 했다. 그랬기에 그는 그 말이 모두 진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 일부는 진실이 섞여 있기도 한 것 같았다.
예르넨이 그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지지부진한 탁상공론을 거쳐 마침내 북부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이 된 그에게 황궁으로부터 전해진 명은 헤리엇이 했던 명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헬리오 제국을 모욕한 이교도들을 모두 복속시켜 북부를 통일하라던지, 그런 것들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미 1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쟁을 벌였음에도 해내지 못한 일을 어떻게 해내라는 건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르넨은 헤리엇과는 달리 제대로 보급을 해 주었으며, 신관을 아낌없이 파견했고, 황제의 군사인 페스티 변경백의 군대를 비롯해 꽤나 많은 부대를 보내 전력을 보강해 주었다는 것이다. 적재적소에 배정되는 보급이며 지원군, 중앙과의 빠른 소통은 전쟁의 양상에 꽤나 큰 영향을 미쳤고 말이다.
형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는 오명을 벗어내기 위해 공적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미친 폭군 노릇을 하느라 깎아 먹은 민심을 바로 세우는 데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예르넨의 그 변덕스러운 자비 덕분에 그와 그의 병사들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좋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라일은 예르넨이 황제가 되고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안에 대륙의 북부를 전부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구른 그와 그의 군대에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라일은 그토록 그리던 고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되돌아간 제국에서 라일이 마주하게 된 것은… 예르넨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에 있어서 그가 납득할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다.
‘대체 왜….’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라일은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극본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모두가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이 맞다고 소리높여 이야기했다. 그랬기에 그는 예르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 원치도 않았고, 그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도 못 했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를 찬양했다.
가진 것을 전부 잃었던 그가 북부를 통일하고 돌아와서는 그를 배신한 폭군을 죽이고 아름다운 약혼자를 손에 넣은 후 모든 것을 바로잡았다고. 그가 전례없는 대단한 성군이 될 거라고.
철 지난 지 한참도 더 된 고리타분한 영웅 서사가 음유시인들의 입을 타고 전 제국으로 퍼져 나갔다.
정작 그는, 그딴 자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가 바라왔던 것은, 사실.
그 지독히도 증오하던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그랬기에 황제가 된 뒤에도 라일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예르넨의 죽음을, 그 말도 안 되는 자결의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예르넨이 너무 많은 이들을 죽였기에 헤리엇의 치세 하에 득세하던 이들은 대개 남아 있지 않게 되기도 했거니와 그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은 마치 입을 꽉 다문 조개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가 예르넨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그저 가끔씩 풍문으로 들려오는 지독하기 그지없었던 폭군에 대한 비방뿐.
게다가 그는 온전히 예르넨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산재한 문제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막 정복 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그는 더욱 거대해진 제국의 체계를 세워야 했고 북부를 안정시켜야 했으며, 정통성이 부족한 그를 그 자리에서 내쫓고 포트넘 공자를 쟁취한 뒤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는 이들을 처리해야 했다.
물론 그 안에서 그가 원했던 일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라일은 묵묵히 일했다. 전처럼 죽겠다고 정신을 빼놓고 살 수는 없었다. 그가 정신을 놓고 지낸 사이 그의 백성들이 얼마나 절절하게 죽어갔는지를 바로 곁에서 목도했으니까.
아직도 그들의 눈을 덮어준 손에 묻은 마지막 숨결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치기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리의 무서움을 아는, 소년 시절 예르넨이 그들에게 말했던 책임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인 것이다. 라일은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갔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괴로움이 잊혀진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서서히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해갔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의 그때 그 모습으로.
그의 사람들도, 제국도 그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강렬하게 남은 상흔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아직도 그는, 예르넨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지독한 배신과 끔찍한 시간들을 선물한 그 무정한 전 약혼자를 말이다. 그랬기에 그는… 포트넘 공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도 눈을 감을 때면, 그 마지막 모습이, 피에 젖은 칼날이 예르넨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간 그 순간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내키지 않는다고 하고 싶은 일을 미룰 수 있는 그런 허술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결국 포트넘 공자를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동안 고뇌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그는 무섭도록 포트넘 공자에게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예르넨을 보았을 때처럼 머저리가 된 마냥 굴기도 했다.
그때까지 그 누구를 보아도 뛰지 않던 심장이, 그조차도 그가 이렇게 지조가 없는 개새끼였나 싶을 정도로 뛰어 댔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상대인데,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포트넘 공자에게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 줄 것처럼 굴게 되었다.
그렇게 라일은 포트넘 공자와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포트넘 공자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아한 상류층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음에도 때로는 지독히도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습게도 그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던 라일이 동정과 연민을 품을 정도로.
하지만 그 가볍기 그지없는 동정심을 가졌을 때도 그는 정녕 몰랐다. 그 동정과 연민이 소유욕과 집착으로 변해갈 줄은. 라일의 마음속에서는 그를 다른 알파들에게 보이지 않은 채 혼자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그맘때 즈음 라일은 과거, 예르넨이 테네스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왠지 알 수 없지만, 그 소식을 들은 라일의 기분은 서서히 불안해져 갔다.
통제하에 있던 신경은 온통 미쳐 날뛰기라도 하듯이 포트넘 공자에게로 향했다.
그가 테네스를 신뢰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무의식중에 포트넘 공자가 예르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토록 강렬한 사람이, 세상에 둘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 하늘에 있는 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라일의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이 몸 안에서 쫓겨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같이 살 집이나 구해 둬.”
“정말 같이 살아 주시는 게 맞습니까.”
“테네스 트리지아. 몇 번을 말해야 그만 물어보는 거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폐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조금만 더 곁에 머무를 수 있기를 항상 바라왔습니다. 그리되지 못한 뒤에도. 그래서 이렇게 자꾸 되묻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실 때마다, 좋아서요.”
“…….”
그는 지독한 혼란에 휩싸였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다니,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신은 분명, 예르넨의 영혼이 향한 곳을 묻는 그에게 예르넨의 영혼은 ‘환생의 궤도’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방금 들은 것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포트넘 공자가 예르넨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그 우아한 예법도, 당당한 말투도. 모두 예르넨 그 자체였으니까.
예르넨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기만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 속아 넘어가는 꼴이 말이다.
라일의 머릿속에는 시커먼 목탄으로 거칠게 글이 써 내려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예르넨은 그를 기만하고 농락할 생각밖에 없다는, 차마 그가 곁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견딜 수가 없을뿐더러 테네스 트리지아를 곁에 둘 생각뿐이라는 그런 글씨가.
오랜만에 다시 느껴 보는 익숙한 배신의 감각은… 여전히 아팠다. 심장이 잘 벼린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포트넘 공자는 예르넨이 확실했다.
그의 마음을 짓밟는 것, 그것은 그 예르넨 헬리오가 가장 잘하는 짓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라일은 세상 모를 듯 잠들어 있는 예르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참을 수 없는 살인 충동에 휩싸였다.
저 얇은 목을 꺾어 버린다면, 목을 졸라 숨통을 틀어쥐어 버린다면. 그렇게 해서 다시 되살아나지조차 못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지독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예르넨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녀석을 죽여 버리고 같이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젠장 맞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독히도 병약해서 오래 서 있지도 못하는 예르넨의 새 몸은 정말로 라일이 가볍게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리도 간단히 목숨줄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 가느다란 목에 차마…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하염없이 예르넨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을 느낀 예르넨이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들어 올렸을 때, 졸음에 잠긴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예르넨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잘 훈련되어서 주인에게 이빨 하나 들이댈 수 없는 개새끼처럼 말이다.
그는 예르넨과 거리를 두었다. 예르넨을 죽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었으니까.
그의 인생을 진창에서 구르게 하고, 그를 기만하고, 그가 아닌 다른 이와 미래를 약속한. 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그 빌어먹을 예르넨 헬리오를 말이다.
그러나 그가 예르넨의 손끝 하나조차 건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놈에게까지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길로 군사회의를 소집해서는 테네스 트리지아를 좌천시켜버렸다. 몇 년간은 수도에 발조차 디딜 수 없을 만한 임무를 내리며.
눈을 감을 때면 그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고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상상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전 생애에도, 현 생애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붙어먹었을까. 그의 눈을 피해서. 그를 비웃으며.
그 장면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지독히도 생생하게 떠오를 때면 라일의 가슴속에는 참을 수 없는 증오심과 분노, 질투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런 라일을 기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예르넨이 깨어 있는 시간을 피해 예르넨의 침실에 드나든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늘 세상모르게 잠이 들어 있던 예르넨은 왠일로 멀쩡하게 눈을 뜨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그를 맞이해 주는 예르넨을 보았을 때 라일은… 우습게도 조금쯤은 기쁨을, 느낀 것 같았다.
“웬일로 안 자고 있어? 이 시간에는 늘 자고 있었잖아?”
“왜 트리지아 후작을 북부로 보내는 거지?”
물론 그 감정은 금방 진창에 처박히고 말았지만.
“…테네스 트리지아?”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땐 밤마다 귀찮게 들러붙을 놈이 없으니 편하겠다고 했으면서 테네스 트리지아가 떠난다니까… 안 된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속에서 끔찍한 분노와 추악한 감정이 치솟아 올라와 살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예르넨을 죽여 버릴 것만 같이.
그래서 라일은 도망치듯이 예르넨의 방을 나왔고 그날 이후로 황후궁을 들르지 않았다. 예르넨과 얼굴을 마주한다면, 정말로 예르넨을 죽여 버릴 것 같았으니까.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황성에서 빠져나와 예르넨과 멀어진 뒤에야 라일은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온통 흙탕물처럼 뒤섞여 올라온 지독한 질투와 증오, 분노가 가라앉게 되었을 때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무척이나 찜찜한 감각이었다.
라일이 보아온 예르넨은 항상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르넨이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해도 예르넨을 둘러싼 사람들은 자연스레 예르넨에게 그런 것들을 쥐여 주었다.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아들로서 태어난 그는 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막냇동생이었으며… 커서는 황제가 됐다.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불우함을 겪을 만한 시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 포트넘 공작저에 간 그 순간부터 최근까지, 줄곧 포트넘 공자를 관찰해 왔다. 그랬기에 알고 있었다. 포트넘 공자의 전 생애가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포트넘 공자는 누구보다도 우아한 상류층의 표본 같은 사람임과 동시에 때론 완전히 몰락해 밑바닥으로 떨어진 귀족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일은 포트넘 공자가 지난 생애에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을 해 왔다. 공자가 보이는 수많은 행동이 그 사실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
만약 포트넘 공자가 예르넨이라면, 그 모든 일을 당한 게… 예르넨이라는 소리였다.
예르넨 헬리오는 그에게 있어서 가해자일 뿐이었다. 그와 그의 가문을 그렇게 만든 가해자.
늘 호화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이나 까딱할 줄 아는 사람일 텐데. 누가 예르넨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한번 인지를 하게 되니 이상하게 보이는 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전히 좋아한다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그를 밀어내는 것도, 혼인식 날 그에게 사과를 한 것도,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기 전에… 그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을 한 것도.
그랬기에 동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라일의 머릿속에는 예르넨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사실은 그가 품고 있는 억울한 감정을 모두 지우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쪽이 더 말이 되기도 했고.
그랬기에 라일의 머릿속은 최근, 지독히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머릿속에 결코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선택지 따위는 들어 있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고 라일은 알고 있었다. 예르넨이 진정으로 그렇게 나온다면 그 입으로 직접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듣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상대는 다름이 아니라 ‘그’ 예르넨 헬리오였으니까.
그랬기에 라일은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바로 예르넨의 주변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 말이다.
“유리스 카멜리언은 어디 있지?”
“아마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라일은 동부 직할령을 공략하기 위한 계획에 굳이 마법사가 추가로 필요로 할 만한 작전을 넣어두기까지 한 참이었다.
유리스 카멜리언.
그녀는 부친인 카멜리언 자작의 뒤를 이어 자작 위에 올랐고 신혈의 기사가 된 현재에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예르넨을 지척에서 모셨던 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르넨이 자결한 그 날, 기쁘다는 듯이 예르넨의 죽음을 온 황성이 떠나가라는 듯이 외치고 다니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이상했다.
그가 예르넨을 죽였다는 소문이 너무 빠르게 퍼져 나갔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기쁘다는 듯이 그의 즉위식을 주도했던 그녀와 그녀를 비롯한 신혈의 기사들은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그가 내린 명은 들은 체 만 체하면서 영지에 처박히거나 온 제국을 방랑하듯이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렇게 제국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녀가 2년 만에 수도로 돌아온 시기가 공교롭게도 테네스가 예르넨의 주위를 맴돈 이후라는 것도 뭔가 수상했다.
거기까지만이었다면 라일도 유리스를 동부로 불러들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도 명백한 증거가 그의 앞에 펼쳐졌다.
예르넨의 감시역으로 붙여둔 러셀이 보낸 전서구에 따르면 유리스가 예르넨을 도와 국정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부관 노릇을 자처한단 말인가.
라일이 알기로 둘은 유리스가 수도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남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유리스가 수도에 도착한 뒤에 친분을 쌓았다고는 해도 너무도 말이 안 되는 친밀함이었다.
라일은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띄웠다.
확실했다. 유리스는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전혀 달리… 예르넨과 친밀한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라일이 모르고 있는 예르넨에 대한 진실도 알고 있을 테고 말이다.
라일은 막사의 문을 열어젖혔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로브를 쓴 여인이 그런 그를 보고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그에 따라 짙은 밤색 머리와 녹색 눈동자, 어린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하.’
라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신 유리스 카멜리언, 폐하를 뵙습니다.”
“동부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군.”
라일은 손을 뻗었고 유리스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손을 쥐었다.
“아닙니다. 응당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신하 된 도리로서 어디든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의 선택은 정답이었던 것 같다.
순종적인 신하인 척, 선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과 달리 유리스의 두 눈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적의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 주군을 핍박이라도 한 이를 바라보는 것 같이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일은 호승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반드시 알아내 주지.’
그간 예르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들 그토록 꽁꽁 숨기려고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