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어쩐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기분 나쁜 감각에 예르넨은 미간을 작게 찡그렸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비의 날개같이 얇은 속눈썹이 작게 움찔거리며 들어 올려졌다.
역시나, 누군가가 잠을 자고 있는 예르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일이었다.
“뭐야. 언제 왔어.”
예르넨의 입에서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헌데 이상하게도 라일은 그런 예르넨에게 달려드는 대신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예르넨은 라일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어두운 침실에서 창을 등지고 있는 이의 표정을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라일의 손이 뻗어져 왔다.
라일은 예르넨의 두 눈을 감겨 주며 말했다.
“더 자는 게 좋을 거야.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그 목소리는 평소 예르넨이 듣던 목소리와는 어딘가 달랐다.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차가운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안 좋은 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은 어떻게 보냈지?”
라일은 늘상 건네는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질문을 듣는 예르넨은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뭘 하긴 뭘 해? 누구 때문에 하루 종일 잠만 잤지.”
변명의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예르넨은 기분이 팍 상하는 것 같아 괜스레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짜증이 올라오는 듯했다.
‘내가 라일 벨티모어 따위에게 변명해야 한다니.’
“그래?”
그러나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대답에 늘 하던 것처럼 잔뜩 풀어진 얼굴을 하고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지껄이는 대신 불쑥 고개를 숙이며 다가와서는 말했다.
“뭔가 냄새가 다른데.”
“…!”
예르넨은 라일을 거칠게 밀쳐 냈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왔다.
‘젠장, 하는 짓이 개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코도 개 코일 줄 몰랐는데.’
잠이 들기 전, 예르넨은 테네스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곤 피곤한 나머지 그 채취를 지우지 않고 잠이 들었다.
이미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페로몬은 모두 공기 중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주 미묘한 잔향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라일은 아마 그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다른 알파 페로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놈이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작정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밤마다 그를 들볶아서 침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못 하게 하는 이유를 말이다. 혹여나 밖에 나가 테네스 같은 다른 알파랑 눈이라도 맞을까 가둬 두려고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테네스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혼자 있지도 못하게 맨날 제 부하들을 곁에 하나씩 붙여 놓을 게 뻔했다.
“뭔 개소리야?”
예르넨이 짜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라일이 여전히 눈가를 가린 손을 거둬 가지 않았기에 예르넨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그냥 넘어갈지, 더 파고들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예르넨은 십중팔구 라일이 더 파고들기를 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집요하디 집요한 놈이니까.
그러나 예르넨의 예상과 달리 라일은… 무척이나 뜬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동부의 반란군이 기승이라더군.”
그것은 동부의 반란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
예르넨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놀라운 것도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라일은 여지껏 예르넨에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일전에 대성전에서 갑작스럽게 회의를 가졌을 때조차도 예르넨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줬을지언정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이 몸, 포트넘 공자의 안에 들어 있는 게 적군인지 아군인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늘 유지하던 기조였다.
심지어 몸을 섞은 뒤에도 라일은 여전히 예르넨을 신뢰하지만은 않았기에 일에 대한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시답잖은 집무에 관한 것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라일이 그에게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르넨이 놀라든 말든 라일은 말을 멈추지 않고 이었다.
“그래서 오늘 온종일 그 문제에 대한 회의가 진행됐지. 쟁점은 하나였어. 동부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에 있어서 누가 선봉으로 나설 것이냐였지.”
예르넨은 입을 꾹 다물고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그가 이다음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당연했다. 가장 적합한 사람은 사실, 정해져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기로 결론지어졌어.”
“…….”
헬리오 제국의 황제는 언제나, 항상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제국의 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의무는 황제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달라졌다. 라일은 황제이되 신의 피를 잇지 않은 자였다.
라일은 전쟁 영웅이자 제국 제일의 기사였고, 지략가였다. 그랬기에 그는 불안정한 황권을 지키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위업을 쌓아야만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바빠질 거 같다고. 그사이 신혼을 즐기느라 밀린 일을 처리하기도 해야 하거든.”
예르넨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이 없으면 편해지겠네. 밤마다 귀찮게 들러붙는 놈이 없어지는 거니까.”
‘잘된 일이네.’
본디 예르넨은 라일을 자주 볼 생각이 없었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밤을 보내고 헤어져서 최대한 마주칠 일을 줄일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었고 심지어 예르넨이 처음에 세워 둔 그 계획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녀석은 제집이 없어서 남한테 얹혀사는 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밤을 황후궁에서 보냈고 일도, 식사도, 훈련도 모두 황후궁에서 진행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이젠 녀석이 어떻게 하든 포기한 지 오래였다. 꺼지라고 소리쳐도 말을 알아듣고 꺼질 놈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더 들러붙으면 들러붙었지.
어차피 길어 봤자 일 년 안에 끝날 일. 예르넨은 그냥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예르넨에게는 황궁을 떠난 이후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철썩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놈을 어떻게 떨어뜨릴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떠나 준다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
참으로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왠지 오늘 녀석은… 이상했다.
예르넨은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는 감각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 밤은 혼자 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가던가.”
“…그래.”
그 말에 라일은 어딘가 미묘한 목소리로 답했다.
눈가에 올려졌던 크고 따스한 손이 떼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나간 모양이었다.
“…….”
늘 그랬듯이 카펫을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발소리였다.
그리고 그제야 예르넨은 라일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인지는 짚어 낼 수 없었지만… 확실히 녀석은 평소와 달랐다. 늘 예르넨에게 보여 줬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어딘가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어쩐지,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럴 리는 없어.’
예르넨은 막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예르넨의 정체를 아는 건 테네스와 유리스, 저스틴. 단 셋뿐이었다. 셋은 어딜 가서 예르넨의 정체를 발설할 만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저 착각일 뿐이다. 성깔이 더러운 놈답게 다른 대신들이랑 트러블이나 있었던 거겠지.
예르넨은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걸로 끝일 거라고. 앞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예르넨의 예상과 달리 그날부터 라일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지긋지긋할 정도로 황후궁을 떠나지 않았던 녀석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예르넨이 잠이 든 늦은 밤에 찾아와서는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떠나갔다.
새벽에 문득 눈을 떠 헝클어진 옆자리를 만져 볼 때면, 미약한 온기와 옅은 페로몬 향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라일과 밤에 관계를 맺지 않게 됐다.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이어진 혹사에 몸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계속해서 잠이 몰려왔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이처럼 새벽에 눈을 뜨곤 하는 날이면 라일의 온기가 남아 있는 시트를 끌어안은 채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라일과 단 한마디의 말조차 섞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예르넨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 * *
“뭐?”
예르넨은 지금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옆에서 저스틴이 추임새를 넣었다.
라일이 황후궁을 자주 찾지 않게 되면서 이점이 하나 생겼다면 그것은 바로 기사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예르넨은 물빛 나비가 날아들 때면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유리정원으로 향했고, 기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사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통신구를 통해 이리언과 접촉 한 뒤 수도에서의 일이 마무리 지어지는 즉시 플뢰르 영지로 향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던가 그가 죽기 전, 기사들에게 명한 일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었는지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든가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기사들과의 네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된 예르넨은 테네스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예르넨은 팔걸이에 몸을 삐딱하게 기댄 채로 테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왜 네가 망국의 전 왕세손을 처리해야 하는 건데?”
그것은 바로 테네스의 좌천에 관한 이야기였다.
겉으로 보기에 직위가 달라진 것은 아니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좌천은 아니었지만… 맡겨진 임무를 따지고 든다면 좌천이나 다름없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일이 테네스에게 멸망한 북부, 카일렌 왕국의 전 왕세손을 추적해서 암살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제국에서 직위도 이름도 없이 드러낼 수 없는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하는 이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예르넨의 치세 하에 제국은 대륙의 북부를 완벽하게 통일했지만 모든 일이 마무리 지어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카일렌 왕국의 전 왕세손을 없애지 못한 것이었다.
대다수의 왕국민들은 왕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아직도 왕가를 신봉하고 있었고 그중 과격파는 왕세손을 중심으로 다시 카일렌 인들을 위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제국은 왕세손을 끊임없이 추적하고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야 그 힘도 뭣도 없는 왕세손이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왕국 최고의 기사가 놈에게 붙어 있다는 점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자가 붙어 있었기에 평범한 기사들로는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라일은 테네스에게 북부로 떠날 것을 명한 것이다. 그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하라며.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다른 녀석들도 많잖아?”
비록 테네스가 제국에서 수위에 드는 강자이긴 해도 라일에게는 그런 테네스를 대체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부하가 분명히 있었다. 차라리 늘 라일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그의 측근 중 하나인 발렌을 보내는 것이 더 그럴싸했다.
그는 북부의 정복 전쟁 내내 라일의 뒤를 따라다니며 보필했던 자이니 북부에 한 번도 발을 디뎌 본 적이 없는 테네스보다는 훨씬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터였다. 북부에서 구르는 동안 그 기사에 대한 정보도 들어 봤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네스를 보낸다는 소리는 어딜 봐도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예르넨과 테네스가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테네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괜찮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혹여나 그가 라일의 말을 듣지 않아 예르넨에게 해가 갈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녀석다운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예르넨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테네스는 이게 라일이 그를 예르넨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내린 명이라고만 생각하는 듯했지만… 예르넨의 생각은 달랐다.
예르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유리온실의 위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소리는, 곧 라일이 온다는 소리였다.
하루, 이틀 쌓여온 시간이 이제는 일주일이 됐다. 일주일동안 라일은 단 한 번도 예르넨의 얼굴을 보러 오지 않았다.
이제는 예르넨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라일이 명백하게 그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피한 거라면 도리어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녀석이 정체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랬기에 기꺼움이 쌓여야 할 심계에는 짜증이 가득 쌓여 가고 있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덮친 테네스의 좌천은 잔뜩 쌓인 마른 장작 위에 불씨가 내려앉은 격이었다.
예르넨은 다짐했다. 오늘 기어코 라일과 담판을 짓고 그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내겠다고.
예르넨은 신경질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팔짱을 낀 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모가 의자 위에 깔아주고 간 부드러운 양털 담요 때문일까, 아니면 늘 잠이 들어 있을 시간이어서 그럴까. 졸음이 몰려왔다.
예르넨은 자꾸만 내려오려고 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을 주어 들어 올린 채 라일을 기다렸다.
오늘은 꼭 결판을 지을 것이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침실 안에서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시계의 제일 긴 바늘이 하루의 끝을 알리고도 한참이나 더 돌아가고 있을 무렵, 침실의 문이 열리고 지친 기색이 가득한 라일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예르넨을 보며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라일을 노려보는 예르넨의 얼굴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비싼 상판대기인지 일주일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눈초리가 싸늘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눈빛을 보았는지 라일은 놀란 얼굴을 걷어 낸 채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로 안 자고 있어? 이 시간에는 늘 자고 있었잖아?”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라일은 여전히 예르넨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는 문가에 몸을 기댄 채 예르넨에게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예르넨의 기분은 서서히 더러워져 갔다.
지난 일주일 전과 비교를 하면 확실히 드러났다. 그렇게나 물고 빨 때는 언제고 저런 행동이라니. 어딜 봐도 피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가 예르넨을 피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예르넨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왜 트리지아 후작을 북부로 보내는 거지?”
“…테네스 트리지아?”
“그래.”
예르넨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집안은 제국의 개국 공신일 뿐 아니라 그는 황실 기사단장의 직위까지 역임했지. 후작의 동생이 아직 황실 기사단장직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그에게 사냥개나 할 법한 임무를 내리면 제국의 위계가 엉망이 되는 법인데 왜 그따위 명령을 내린 거냐고.”
“…하.”
하지만 라일은 그런 예르넨의 말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테네스 트리지아랑 언제 봤다고 그렇게 친해진 거야, 황후?”
“…뭐?”
“그렇잖아? 내가 동부의 반란군을 진압하러 간다고 말을 했을 때는 밤마다 귀찮게 들러붙을 놈이 없어져서 편하겠다고 했는데 놈을 보낸다고 하니 이렇게 화를 내니 말이야.”
그 말을 한 라일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더니 이내 예르넨의 앞에 서서는 고압적인 얼굴로 예르넨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 녀석이 간다니까 반대하는 거야?”
예르넨의 오른쪽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가며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라일을 바라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그제야 달빛 아래 라일의 얼굴이 드러났고, 예르넨은 라일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마주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너.”
예르넨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피곤한데 이런 쓸데없는 일로 논쟁을 하고 싶진 않으니… 오늘은 내가 다른 방에 가서 자는 게 좋을 것 같네.”
“…….”
라일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황후궁의 다른 방으로 향하는 건지, 아니면 드디어 황제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예르넨은 그런 라일을 잡을 수 없었다.
라일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 그 눈빛에는 전에 예르넨을 볼 때면 담겼던 간질거리던 애정도, 다정함도 그 어떤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증오였다.
* * *
덜컥덜컥!
찻잔이 거칠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계속될수록 예르넨의 미간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당장이라도 쿠션을 던져서 내쫓고 싶었지만, 딱히 그럴 정도로 기운이 나지도 않았기에 예르넨은 노아가 제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떠날 때까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겨우 테이블 위에 잔이 놓였고 그와 동시에 식기 부딪치는 거슬리는 소리도 멈춰졌다. 그제야 예르넨은 찻잔을 들었고, 얼굴 가까이 댔다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그대로 내려놓았다.
“가지고 꺼져.”
“네, 넷…!”
예르넨의 가시 돋친 목소리에 노아는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다시 덜덜 떨리는 손짓으로 찻잔을 거두어 갔다. 재차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예르넨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패였다. 미간 사이에 어린 짜증은 노아가 침실을 떠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하.”
예르넨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오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기가 찰 노릇이다. 데리고 있다 보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시동 노릇을 한 지 두 달이나 시간이 흘렀는데 노아의 시중 드는 실력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퇴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게 차를 끓여올 수 있는 거지?”
참으로 가지가지 했다.
차를 끓여오라고 시킨 지 한참이나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더니 겨우 내어놓은 차에서는 썩은 우유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매슥거리는 냄새가 났다. 그 때문에 토기를 참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몸이 편하려면 러셀을 시동으로 부리는 게 나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러셀은 어딜 보아도 명백한 라일의 부하였고 지금 예르넨은 본의 아니게 라일과 냉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예르넨은 테네스의 북부행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라일은 결국 테네스를 남부의 군사문제를 조사하라는 명목으로 황제 대행의 직위를 쥐여 주며 남부로 보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하니 이번에는 막을 만한 명분이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예르넨은 테네스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로도 심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심지어 라일은 그날 이후로 새벽에 잠깐 찾아오던 발걸음마저 완전히 끊어 버렸다.
“…….”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쌓이던 고민이 이 주째였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신경을 갉아 먹는 물음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르넨은 결국 참지 않기로 했다.
“그래.”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살피며 고민만 하다니. 예르넨 헬리오라는 인간에게 제일 어울리지 않는 짓이 아닌가.
차라리 그 녀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어떻게 나오는지 하는 짓을 지켜보든 직설적으로 묻든 해서 확실하게 심계를 알아낸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게 훨씬 그다웠다.
어차피… 반쯤은 확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하나 다행인 건 아직 그가 예르넨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알아내지는 못한 것 같다는 점 정도일까.
예르넨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창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햇살 구경 같은 건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중충하기 짝이 없던 하늘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눈이 올 것 같네.’
괜스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벤자민 르크루제와 리지 메리온을 처형했던 날 말이다.
그날의 하늘이 오늘 같아서일까? 마치,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예르넨은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시립해 있는 이를 불렀다.
“마리안느.”
“예, 폐하.”
“노아는 어디 갔지?”
“차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아오라고 해. 그리고 외출할 테니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예르넨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다시 마리안느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노아 대신 네가 차 시중을 들도록.”
“아….”
그 말에 마리안느는 조금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그, 노아에게 말은 들었습니다만… 제가 살피기엔 차에 달리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혹, 무엇이 잘못된 것 같으셨는지요.”
“…?”
예르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데도 못 알아채다니. 다들 코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전부 엉망이었다.”
마리안느는 짙은 고뇌가 서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네.”
마리안느의 결연한 얼굴을 보며 예르넨은 침실로 향했다.
“폐, 폐하…?”
예르넨은 얼빠진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얼굴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멍청한 목소리의 주인, 스테핀을 발견했다.
전 생애에는 사촌이기도 했던 녀석은 마리아쥬 가문의 비상함을 도대체 어디에 흘리고 태어난 것인지 총명함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본디 타고난 태생 하나만은 나쁘지 않기도 했거니와 황족의 사촌이라는 대단한 후광을 뒤에 업고 있었기에 어릴 적부터 라일이 데리고 다니던 놈이기도 했다.
“아니…! 그, 그 시동들도 대동하지 않고 이리 찾아오시면 어쩌십니까…!”
“시동이라면 있지 않나.”
예르넨은 곁을 흘깃거렸다. 그 자리엔 의젓하게 어깨를 추켜올린 노아가 있었다.
“아, 아니… 그… 거 있지 않으십니까. 다른 시동….”
예르넨은 스테핀이 누구를 찾는지 알 것 같았다.
러셀 보어. 라일이 심어 둔 끄나풀을 찾는 걸 테지. 왜 심어 놓은 감시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느냐고 하는 말에 대답할 가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예르넨은 스테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본론을 꺼냈다.
“라일은 어디 있지?”
썩 보고 싶지도 않았고 반갑지도 않은 얼굴이었지만 녀석이 있다는 소리는 주변에 라일이 있다는 소리니 이정표로 삼기엔 제격이었다.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스테핀의 얼굴이 오묘하게 찌그러졌다.
“됐다.”
표정을 보아하니 말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스테핀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라일은 이 황제궁 내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이미 황제궁의 영역 내로 들어온 이상 녀석에게 말이 전해지기도 했을 테고.
예르넨은 사냥꾼처럼 그저 라일이 어디 있든지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놈이랑 대화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있겠지.’
그리 생각한 예르넨은 집무실을 먼저 방문하기로 하며 걸음을 옮겼지만…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 되었다.
라일이 막 황제궁의 정문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상판대기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울컥하며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라일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해졌다.
“…?”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저 멀리서 라일이 고함을 질렀다.
거리가 멀고 사람이 많았기에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갑작스레 섬뜩한 예감이 덮쳐, 예르넨은 재빨리 오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
“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와 귓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정작 당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데.
“헉….”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소리일까.
지금껏 내장을 불사르는 고통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왔다. 단 한 번도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그렇게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을 버텨 낸 적도 있었다. 심지어 죽을 때에는 심장에 스스로 칼을 박아넣기까지 했지.
고통이라는 고통은 수없이 겪어 봤고, 무뎌졌다.
그러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 지낸 지도 2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시간은, 그 어떤 괴로운 기억들도 모두 망각하고 무디게 만드는 법이다. 그랬기에 가슴을 꿰뚫는 칼날은 예르넨에게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뿌드득.
“…!”
가슴을 헤집고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릿한 감각이 입가를 맴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피가 입술 사이를 헤치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달려와서 예르넨의 가슴에 박혀 있는 칼을 거칠게 빼어냈고 뒤이어 달려온 이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지혈했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폐하… 폐하….”
언뜻언뜻 비치는 시야에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스테핀이 예르넨의 가슴을 거세게 압박하는 모습과 그 곁에서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노아의 모습이 비쳤다.
“커…흑….”
밀려오는 고통에 당장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을 가득 채운 핏물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폐하…! 젠장, 신관! 신관을 불러와!”
스테핀이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예르넨의 시야는, 결국 가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통증을 이기지 못한 채 점점 어두워져 가기 시작했다. 그 무뎌지는 신경 사이에서 예르넨은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달리는 감각을 느꼈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예르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무척이나 절박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이런 얼굴을 하면서, 나를 살리려고 하면서.’
왜 그때는 그런 얼굴을 한 걸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예르넨의 시야는 완벽한 어둠에 잠식되었다.
* * *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속눈썹은 그저 눈가를 간지럽힐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은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평온한 감각이 온몸을 맴돌았지만, 예르넨은 왠지 이 평온함이 불협화음 같다고 느끼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그는 라일을 찾아서 황제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라일을 만났고… 가슴에 칼을 맞았다.
“…!”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예르넨은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오른쪽 가슴께를 더듬었다. 하지만, 가슴에서는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분명 예르넨은 가슴을 꿰뚫은 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는 건… 한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신성력… 을 쓴 건가.’
기존의 그로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기에 신성력의 효능을 제대로 자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약 신성력을 사용했다면 이런 몸 상태인 게 이해가 갔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츰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예르넨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봤다.
“…….”
그곳엔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일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더니 얼굴을 천천히 쓸어 올리고는 옅게 한숨을 뱉어냈다.
“하.”
그는 어딘가,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왔어.”
“…뭐?”
예르넨은 예민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라일에게 되물었다.
“왜 온 거냐고. 황제궁에.”
하지만 되돌아온 건 개 같은 대답뿐이었다.
“왜 하필 그때…!”
“지금, 너…. 그게 내 탓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건…!”
“맞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예르넨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낮에 황제궁 한가운데에서 자객의 습격이 벌어질 정도로 황궁 관리를 개판으로 한 게 누군데 지금 나를 추궁하는 거지?”
“하, 그러니까 호위를 데리고 다니기라도 했어야지. 왜 러셀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지?”
예르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심어 둔 게 분명한 사람을 내가 왜 데리고 다녀야 해? 그리고 네놈은 러셀 보어를 호위기사가 아니라 시동으로 들여보냈잖아? 주인이 총애하지 않는 시동이 끈 떨어진 신세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을 해 보니 어이가 없군. 일전에 트리지아 후작을 호위기사로 삼겠다고 한 말에 거부를 한 게 누군데 지금 호위를 안 데리고 다녔다고 뭐라 하는 건지.”
그 말에 라일에게서는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였어?”
“…….”
예르넨은 시선을 피하는 라일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칼 박아 넣은 놈 누구였냐고. 말해, 라일 벨티모어. 이런 일도 나한테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못 알아냈다는 그런 무능한 말을 하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그 빈정거림이 가득 든 어투에 라일은 감정을 삭이려는지 한참을 가만히 있다 대답했다.
“…동부 반군의 끄나풀이더군.”
“잘하는 짓이네. 군사 관리를 얼마나 개판으로 했으면 반란군이 황궁 한복판에 들어올 때까지 못 알아차리고 있어? 그래 놓고서 지금 내가 황제궁으로 간 게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네놈은…!”
예르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라일을 노려보았다.
“할 말이 그따위 말밖에 없어?”
예르넨은 사람이 죽다 살아났는데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그 태도가 괘씸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는데?”
“뭐?”
예르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황궁 내로 들어온 반군의 끄나풀은 모두 죽였어. 동부에도 선전포고한 상태야. 이 이상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혹시나 했던 심증은,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리도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변했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등신이 아닐까.
“너….”
말을 하려던 예르넨의 시야에, 제 손이 떨리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하.’
고작 이게 뭐라고, 아예 들키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면서. 과거만 모른다면, 정체를 들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르넨은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눈에 힘을 주어 라일을 노려보았다.
“너 사실은 내가….”
쾅!
“폐하!”
막 쏘아붙이려던 차였다. 누군가 침실 문을 제멋대로 열고 들어왔다. 예르넨은 감히 제멋대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노려봤다. 라일 역시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제 부관을 노려봤다.
“무슨 일이야?”
하지만 스테핀은 그 경직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초조함을 잔뜩 담은 얼굴로 말했다.
“그것이, 그것이… 반군이 동부의 직할령을 점령하고 로지 벨리카를 억압하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습니다.”
“…뭐?!”
갑작스럽게 전해졌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소식이었다. 동부의 직할령이 점령당했다니.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곳을 빼앗겼다는 것은 곧, 동부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다.
* * *
예르넨은 평소의 새벽과는 전혀 달리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황궁의 공기를 맞으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준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지원군이 파견되었으며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동부의 직할령을 탈환하기 위해 라일을 포함한 정예들이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동부의 주요 거점, 페스티 영지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다.
그 안에서 예르넨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우두커니 서서 준비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동부의 반란군은 꽤나 큰 규모로 구축되었고 때문에 라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거라는 사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거지 같은 타이밍에 이리도 갑작스럽게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떠난다면, 돌아오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
“…….”
“폐하.”
그때, 가만히 있던 예르넨에게 황제궁의 시종장이 다가와 준비가 끝맺어졌음을 알렸다.
“알겠다.”
예르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동 마법진으로 다가가서는 라일과 마주 보았다.
“…….”
여전히 온기라곤 한 조각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썩은 생선 같은 눈은 보면 볼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당장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야속할 정도로.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가. 과거에는 그토록 그리워했고, 보고 싶었는데…. 다시 보게 된 지금에 와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라일은 왼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었고, 예르넨의 시선은 그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라일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예르넨이 끼고 있던 그 반지는, 제국의 국새였다.
“동부의 반란군이 진압되고 수도로 귀환할 때까지, 황후를 황제 대행으로 지정하고 전권을 넘기겠다.”
그리 말한 라일은 예르넨에게 국새를 내밀었다. 예르넨은 국새를 받아들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일은 더 이상 예르넨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랬기에 라일의 신형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을 때까지도… 예르넨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예르넨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라일을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연장된 것도 화가 나지만, 이 와중에 혹여나 녀석이 다쳐서 돌아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스스로가 정말 넌덜머리가 났다.
짜증이 나기 그지없었다. 재수 없는 타이밍이 너무 연달아 들어맞는 것 같지 않은가. 무슨 불행이 연달아 나오는 희곡 속의 한 장면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 보면 그에게 행해졌던 습격도 다 작전의 일부인 것만 같았다. 황궁이 부산해진 틈을 타서 군을 움직이다니. 누군가가 짠 각본이라면, 정말 그럴싸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예르넨은 가능성을 접어 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억측이었다.
‘그런 짓을 왜 하겠어?’
만약 누군가가 벌인 짓이라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됐다. 그저 착각일 뿐일 테지.
“폐하.”
예르넨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마음이 어지러운 건 그뿐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
지금은 그저 안일하게 바라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전시상황이었으니까. 그것도, 제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리고 라일이 전권을 위임하고 떠난 이상. 예르넨은 이들 모두를 지켜 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이만 가도록 하지.”
예르넨은 복잡한 눈을 하고 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두텁게 자리한 먹구름은 새벽녘의 푸른 빛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 * *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창틀을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이 내려가고, 창 아래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이가 복도를 걸었다.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는 눈을 감고 조금 전 보았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갑옷을 입고 있던 황제와, 새하얀 옷을 입고 있던 그의 황후. 그가 그토록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두 사람.
“하.”
남자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다 그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부 다.
남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르넨의 정체를 알아채고 있었다. 국혼식 날, 라일 벨티모어를 바라보던 그 미련이 뚝뚝 넘치는 눈을 바라봤을 때. 그때 그는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수없이 보아 왔던 눈이었으니까. 그 섬에 갇혀서도, 빌어먹게도 항상 누군가 저 먼 곳에 있는 이를 그린다는 듯이 바라봤으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눈빛을 하며 라일 벨티모어를 바라보는데…!
쾅!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남자는 바로 옆의 벽을 내리쳤다.
“예르넨 헬리오.”
저 새하얀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엉망으로 만들고, 진창을 구르게 한 다음 비참함에 떨게 만들고 싶은, 그런.
다시금 주체할 수 없는 추악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온 그 순간,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 여기 계셨군요!”
그는 표정을 굳힌 채 그자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일리아나 님께서 새벽 기도에 이 사태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에 관해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요. 성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그래. 곧 내려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남자는 그리 말을 전하고 재빠르게 뛰어가는 이가 걸친 옷의 끝자락을 바라봤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과 흡사한… 성직자만이 입을 수 있는 복식.
‘하.’
참으로 우스웠다. 그가 성직자라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계단을 내려가던 남자는 잠시 멈추어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색유리로 장식된 조형물에 성직자라기에는 지극히도 귀족적인 얼굴이 비쳤다.
이든 페트라. 신과 그의 혈족인 황족을 모시는 제국에 단 하나뿐인 교황.
대대로 교황을 배출하는 유일한 가문인 페트라 후작가에서, 뛰어난 신성력과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그에게 교황의 자리라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는 게 당연한 자리였다.
전 전대 페트라 후작인 그의 아비는 늘 그에게 말했다. 이 제국의 주인은 그와 그의 가문이라고. 신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신의 말을 전해 들을 수 없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황족들과 달리 페트라 가문은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진언을 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이든은 당연히 그가 제국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이 자리는 그에게 있어서 당연히 가져야 할, 영광의 자리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의 나이 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는.
“…….”
이든은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교황으로 임명되었던 날이자… 처음으로 예르넨 헬리오를 만났던 날.
옅은 잿빛이 도는 금발 머리를 한 그 새하얀 얼굴의 막내 황자를 본 순간… 이든은 처음으로 그가 있는 자리가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살아가면서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페트라 후작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었기에 그는 그의 그림자 노릇을 해 주는 쌍둥이, 엘딘에게 돌아가야 할 후작의 자리도, 교황의 자리도 모두 제 것으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없었다.
단 하나, 예르넨 헬리오를 제외한다면.
성직자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신을 섬겨야 하는 순결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그들은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 모든 능력을 잃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결코 예르넨 헬리오를 가질 수 없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갈망하게 된 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라일 벨티모어를 바라보는 예르넨의 눈에 감정이 섞여 갈수록, 그 감정이 짙어질수록 그는 미쳐 갔다.
매일, 매일 어둡고 습한 분노가 그의 속에서 한 뼘씩, 한 뼘씩 크기를 키워 갔고 이내 그를 잠식해 버렸다. 가질 수 없는 이를 엉망으로 만들고, 부서뜨리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이들을 그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든 채, 잔혹한 비극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그 시나리오가 흘러가는 동안 그는 수많은 이들을 소모품처럼 이용했다. 머저리 같은 선황 헤리엇이라던가 벤자민 르크루제 따위를. 그렇게 되는 동안 제국이 휘청이든, 그의 대역 노릇을 하던 형제의 목이 잘려나가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예르넨 헬리오만을 엉망으로 만들면 됐으니까.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완벽한 결말로 끝맺음 지어지는 듯 보였다.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이가 다시 살아나서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든 페트라는 저를 비추고 있는 색유리를 노려보았다. 그의 모습을 비추는 조형물은 신의 형상을 기리며 빚어 만든 것이었다. 그가 지독히도 증오해 마지않는 신의 형상을…!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 조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예르넨 헬리오를 보여 줘서는 안 됐어.”
가질 수 없는 것을, 닿을 수 없는 이를 보여 줘서는 안 됐다. 자신의 자손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예르넨 헬리오를 보고 말았지.”
이든은 불경하게도 그가 섬기는 신을 향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당신은 그저 지켜봐야 할 거야.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이 진창에서 뒹구는 꼴을 말이야.”
몇 번이고 되살아난대도 상관없었다. 몇 번이고 짓밟아서, 비참하게 살다 초라한 최후를 맞이하게 할 것이다. 그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예르넨 헬리오를 가질 수 없었다.
‘예르넨 헬리오는 황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이 역시, 황제가 될 것이다.’
그는 그에게 처음으로 내려졌던 신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 신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가 결실을 맺을 수 없다면, 예르넨 역시 그래야만 했다.
“이 땅에는 이제 당신의 피가 흐르지 않게 될 것이고, 당신의 말이 전해지지 않게 될 거다. 그렇게 믿음을 잃은 당신은 잊혀진 채로 사그라들겠지.”
많은 이들의 믿음과 달리 페트라 후작가의 핏줄에서만 교황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가장일 뿐이다. 그의 가문에서만 교황이 나왔던 것은, 지금까지 그의 가문 페트라 후작가가 교황이 될 자질이 있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의 가문을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교황이 될 이들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문이 교황의 직위를 독점하는 것일 뿐.
하지만 이제 곧, 페트라 후작가마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예르넨 헬리오를 죽이고 그의 심약하기 짝이 없는 동생, 엘딘이 숨겨놓은 녀석의 아들마저 죽여 버릴 거니까.
그러니 이걸로 끝일 것이다.
“완벽한 결말 아닌가?”
그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을 보여준 신에 대한 복수로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복수였다. 그에게 예르넨 헬리오를 보여준 신에 대한 복수.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예르넨 헬리오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고안해 낸 설계였으니까.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가 새하얀 복도를 울렸다.
* * *
“어… 저… 폐하. 이건 어디에 놓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해도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멍청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펜을 쥐고 있던 예르넨의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고 부들부들 떨려 왔다. 당장 저 뺨에 주먹을 꽂아 넣지 않으면… 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며칠간의 경험을 통해 예르넨은 알고 있었다. 녀석은 화를 내면 낼수록 더 버벅대느라 쓸데없는 잔 실수를 무더기로 한다는 것을. 예르넨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불덩이를 꾹꾹 눌러 삼키고는 선선히 손가락으로 서류 더미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아! 맞네요. 좀 전에 말씀해 주셨는데 금세 까먹었습니다.”
저스틴은 호탕하게 웃으며 예르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서류 더미 위로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려놓았고, 예르넨은 그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진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스틴.”
“예, 폐하.”
이번에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예르넨은 금방이라도 서류 더미를 밀어 버릴 것 같이 살기 어린 눈을 하고는 저스틴을 노려봤다.
“이 정도는 네 선에서 돌려보내야 할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예르넨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는 황궁에 새로운 시동을 선발하는 데에 인가를 내주십사 하는 서류로서 저 아래 말단 관리가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대체 이따위 서류가 왜 섞여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르넨이 팔랑이는 서류를 받아든 저스틴은 한참을 서류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
“…아?”
아 같은 소리 하고 있다며 당장에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껏 정리해 둔 서류 뭉텅이가 모두 엉망이 될 게 뻔했기에 예르넨은 그저 저스틴을 죽일 놈을 바라보듯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서릿발이 내릴 것 같은 눈을 본 저스틴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배를 째라는 듯이 소리쳤다.
“아! 어쩌겠습니까? 못하는걸요! 원래도 저는 이런 책상머리 앞에 앉아 있는 담당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하아.”
그 뻔뻔한 목소리에 예르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눌렀다. 하여간 쓸데없이 낯짝만 두꺼운 놈이었다.
허나 저스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게 다 유리스가 떠나고 책상 앞에 몇 번 앉아본 적도 없는 저스틴에게 어쩔 수 없이 임무가 넘어가면서 생긴 골칫거리였으니까.
라일이 떠나고 예르넨은 황제 대행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스는 그런 예르넨의 부관 노릇을 해 왔다. 본디 예르넨이 황위에 있을 때에도 테네스와 에런, 유리스가 번갈아 가면서 보필을 해 왔고 유리스와는 합이 꽤나 잘 맞았었기에 일은 수월하게 잘 돌아갔다.
게다가 유리스가 카멜리언 자작으로서 행정 업무에 꽤나 능숙하고, 일전에는 황제의 업무를 보필한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몇몇이 존재했기에 일 처리가 잘 돌아가도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가 없다는 것 또한 장점이었다.
덕분에 예르넨은 회의를 하든 업무를 하든 유리스를 앞세워서 모든 일을 막힘없이 처리했다.
헌데 갑자기 반란군의 토벌전을 벌이고 있는 동부에서 마법사의 증원을 요구해 왔고, 현재 황궁에 남아 있는 이들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유리스가 어쩔 수 없이 불려가게 되면서 상황이 난감해졌다.
유리스가 떠나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행정 관료랑 함께 일을 했다가는 유리스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일 처리를 했던 사람이 예르넨이라는 사실이 모두 들통날 터였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유리스는 제 후임이라고 말하며 저스틴을 콕 집어서 지목해 두고 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예르넨은 모르고 있었다. 그 일이 불행의 시작이 될 거라는 사실을.
저스틴은 정말이지 일을 못 해도 더럽게 못 했다. 일을 덜기 위해서 부관을 들인 건데 도리어 부관 때문에 일이 늘어나는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거기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라일 벨티모어. 이 개 같은 놈은 또 일을 얼마나 못했는지 모든 체계가 엉망진창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리스가 있을 때는 유리스가 날밤을 새워 가며 모두 정리를 해 줬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저스틴과 함께 일을 하게 되니 그 참담함이 와닿았다.
이틀 정도 저스틴과 함께 일을 하던 예르넨은 도저히 일을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체계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늘려야만 했다.
평소 황제의 업무에 더해서 전시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거기다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체계까지 세워야 하니 일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 저스틴이 멍청한 짓을 하면 할수록 일은 더더욱 쌓여 갔고 결국 예르넨은 늘어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모두 밤을 새우다시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리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불어나기만 했다.
“후.”
예르넨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정말이요?”
“그래.”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이제 정말 한계였다. 머리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나 예르넨의 항복 선언을 들은 저스틴의 얼굴은 멋도 모르고 화사하게 피어가기 시작했다. 그 재수 없는 변화에 예르넨은 뺨이라도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충동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이내 다시금 생겨난 걱정거리에 서서히 옅어져만 갔다. 사실 최근 예르넨에게는 아무리 처리해도 처리해도 끝도 없이 늘어나는 업무보다도 더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를 이만 끝마친다는 것은 곧 황후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그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르넨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지금 이딴 쓰레기 같은 걸 나보고 먹으라고 내온 거야? 싹 다 치워.”
“예, 예.”
불호령을 들은 노아가 울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의 명을 받은 시동들이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예르넨은 음식이 모두 치워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한껏 당황한 표정을 담은 멜리사는 재빨리 손짓했다. 그 제스처를 기민하게 알아챈 주방장은 그녀에게 빵과 색색의 과일 잼이 옹기종기 담긴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멜리사는 그 빵을 들고는 예르넨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예르넨이 아니었다.
“유모.”
“예…! 도련, 아니, 폐하!”
“안 먹을 거니까 저리 치우고 아무도 내 뒤에 따라붙지 않게 해. 혼자 있을 거야.”
“하지만…! 꼭 보어 경과 같이 계시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셨는….”
“그놈 아직도 안 내쫓았어?”
멜리사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예르넨이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 그것이….”
“빨리 내쫓아. 내 궁에 다른 주인을 모시는 개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폐하…!”
예르넨은 간절히 들려오는 멜리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홀을 나섰다.
“휴.”
예르넨이 떠난 홀의 여기저기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동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라일이 이끄는 군사가 수도를 빠져나간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 그 사이, 끝도 없이 추워지던 겨울바람도 조금은 선선해졌다.
그리고 누그러져 가는 추위와는 달리, 그들이 모시는 상관의 예민함은 점점 거세어져 가서 이제 황후궁에 있는 모두는 숨을 쉬는 것조차도 조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음식이 차려지자마자 미간에 깊은 골을 판 그들의 주인은 며칠째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불호령을 내리고는 자리를 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와중에 멜리사만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휴, 저렇게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몸이 상하실 텐데.”
어제도 그제도, 예르넨이 먹은 거라곤 흰 빵과 약간의 과일 잼이 전부였다. 헌데 오늘은 심지어 빵마저 거부한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에 있어서는 가리지 않던 도련님이었기에 멜리사는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멜리사를 보며 노아는 조심스레 그동안 품어 온 의심을 털어놓았다.
“저어, 멜리사님. 폐하께서 혹시… 임신을 하신 거 아닐까요?”
“응?”
“그렇잖아요? 식사도 거부하신 채로 빵만 드시고, 성격도 예민해지시고….”
“음….”
멜리사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녀가 사랑으로 키워 온 도련님은 먹을 거에 있어서는 가리는 게 없었다. 그러나… 성격은 딱히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 도련님은… 본디 포트넘 공작저에 계실 때 지금보다 훨씬 더 예민하신 분이셨단다.”
멜리사는 혹여나 예르넨의 귀에 그녀의 말이 들어가기라도 할까 봐 아주 작은 소리로 노아에게 속삭였다.
“게다가 일전에 테스트를 해 봤을 때 임신이 아니라고 나오지 않으셨니?”
“하지만 그건 한 달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저희 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초기에는 테스트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한 석 달은 있어야 정확하다고 해요.”
“그러니?”
멜리사가 입술 께에 손을 갖다 대었다. 확실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하던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임신은 아닌 것 같구나.”
“왜요?”
노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멜리사를 바라봤다.
“황제 폐하께서 자리에 없으신데도 도련님이 멀쩡하시지 않니.”
“어… 그게 영향이 있나요?”
“그럼. 임신한 오메가는 알파 페로몬이 없으면 안 되니까.”
예르넨은 음식을 무르기는 했지만 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임신을 한다면 비위가 거슬리는 냄새에는 참을 수 없이 구역감이 밀려오기 마련임에도.
그뿐이 아니었다. 임신을 하게 된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을 맡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예민해지고 그로 인해 몸이 안 좋아졌기에 끊임없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알파를 찾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안정기로 접어든 다음이면 모를까, 임신 초기엔 더 그런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라일을 떠나보낸 후로 단 하루도 라일을 찾지 않았다. 그 어떤 오메가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멜리사는 자부했다. 그러니 아마 임신이 아닐 것이다.
멜리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내일은 정말로 무언가를 좀 드셔야 하니까 주방장을 잠깐 만나야겠구나. 내가 요리라도 해 봐야겠다. 노아 너는 침실 주변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 좀 전해 주렴.”
“네!”
그렇게 멜리사는 분주하게 주방을 향했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노아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아의 생각에 그의 주인은 어딜 보아도 임신을 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쾅!
예르넨은 신경질적이게 문을 닫고는 바로 잠금쇠를 걸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욕실로 향하고는 변기에 고개를 처박았다.
“우욱…!”
지난 몇 주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렇게 구역질을 해도 나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최근 예르넨에게 생긴 가장 골치 아픈 문젯거리였다.
“하아, 하아. 젠장.”
대체 왜 이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근래 들어 종종 음식 냄새에 속이 안 좋아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매스꺼움은 평소에도 심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하마터면 시동들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일 뻔할 정도였으니.
밀려오는 구역감을 참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예르넨의 이마에는 온통 식은땀이 흥건했다.
최근 며칠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두통이 다시 도졌는지 머릿속이 깨질 것만 같았다.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구역질을 해서 그런 걸까.
한참을 게워 낸 데다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오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예르넨은 변기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며 욕실을 빠져나오던 예르넨은 문득, 어딘가에서 신경을 잡아끄는 향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
예르넨은 홀린 듯 그 향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라일의 드레스룸이었다.
예르넨의 영역에는 세 개의 드레스룸이 있었다. 그중 침실과 가까이에 있는 두 개는 예르넨이 사용했고 가장 깊숙하고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옷방은 라일이 사용했었다.
그리고 라일은 예르넨과 다툰 뒤 몇 주 동안이나 그의 방을 찾지 않기는 했지만 옷을 빼내지는 않은 채로 떠났기에 그곳엔 여전히 라일의 옷가지가 남아 있었다.
옷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 예르넨은 빼곡히 걸려 있는 라일의 옷들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로 쓰러졌다.
투둑, 툭.
그런 예르넨의 위로 라일의 옷가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옷 속에 파묻힌 예르넨은 마치 둥우리에 들어간 새처럼 몸을 웅크렸다.
사방에서 라일의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마치, 라일에게 안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그 향을 맡고 있자니 어쩐지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아졌고, 늘상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불안감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며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한 달간, 애써 무시하고 있던 감정이었다.
‘보고 싶어.’
만일 녀석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다음부터 벌어질 일은 모두 골치 아픈 일들뿐일 테니 차라리 녀석이 오지 않는 게 속이 편했다.
예르넨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무척이나.
참으로 바보 같은 감정이었다
왠지 이곳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걸까. 예르넨은 마치 지상에서 오랫동안 헤매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 인어처럼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었다.
어쩐지 근심도, 걱정도. 모두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