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폭군의 해피엔딩 3권
CHAPTER 7(2)
탁.
저스틴은 떨어지는 물빛 마석을 받아 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던져 올렸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날아오른 마석은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향해 다시 떨어져 내렸다.
탁.
떨어지는 마석을 받아 쥔 저스틴은 이번에는 던지지 않은 채 마석을 쥔 손을 꽉 쥐었다. 연구를 위한 마석이라며 조심히 다루라는 유리스의 말은 이미 모조리 지워 낸 후였다.
내일은 드디어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저스틴이 새 황제를 모시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참.’
머릿속이 복잡했다.
믿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저스틴은 황제의 시동 겸 호위기사로서 다른 기사들보다 자주 붙어 다녔다. 뭐, 말이 시동이지 사실은 청소부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황제의 곁에 머물며 황제에 대해 꽤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도에는 새 황제가 성적으로 문란하다 못해 밤마다 남자를 찾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지어 괴이한 성벽 때문에 유폐되어 있다가 황궁으로 돌아온 첫날엔 테네스와 침대 시트를 피로 물들일 정도로 격렬하게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져 있었다.
그랬기에 저스틴 역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보아온 황제는 소문과는 꽤나 다른 사람이었다. 비록 턱 끝으로 사람을 부리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애새끼였지.’
곁에 머무르며 이미 황제에게 지나치게 유한 태도를 보이는 기사도 몇 생겼을 정도였다.
‘바로 저놈들처럼 말이지.’
저스틴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셋을 바라봤다.
숨긴다고 로브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태가 났다. 훌쩍 솟은 키의 둘을 데리고 다니는 꼴은 영락없이 그가 모시는 주군의 행차였다.
저스틴은 가벼운 몸짓으로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어디 가십니까, 폐하?”
그 말에 덩치들 사이에 있으니 상당히 가녀려 보이는 이가 제 로브를 훌렁 하고 벗어젖혔다.
그리고 저스틴은 꽤나 감탄했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금발이 은사같이 빛났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얼굴. 그 얼굴은 정말이지 몇 번을 보아도 매번 넋을 놓을 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 야밤에 위험하지 않으십니까. 근 한 달간 밤손님이 몇이나 찾아왔는지… 저는 이미 셈을 포기할 지경입니다. 헌데 심지어 내일은 즉위식 아니십니까? 내일이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아득바득 찾아올 텐데… 이렇게 외출하셔도 됩니까?”
저스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말끝에는 미묘한 귀찮음이 서려 있었다.
“안에는 유리스가 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무책임한 거 아니냐고 말하려던 저스틴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는 짐승 같은 노란 눈을 보고는 움찔했다.
‘미친 새끼.’
에런 파르타슈. 저 미친놈.
저놈은 황제에게 유한 태도를 보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미쳐 있다.
놈은 그날, 맹세를 나눈 후 황제와 따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후 자기가 무슨 새끼오리라도 되는 듯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황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이제는 찰싹 붙어서는 숫제 왼팔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정작 황제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괜스레 짜증이 나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차는 저스틴에게 뜬금없는 말이 건네어져 왔다.
“그러고 보니 불을 써야 할 일이 있겠군. 네놈도 따라와라.”
“…예?”
“내가 암살이라도 당할까 봐 그러는 거 아닌가? 기사를 셋이나 데리고 가면 적어도 암살을 당할 일은 없겠지.”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어째 말하다 보니 그가 황제를 걱정한 것 같이 들리는 듯했다. 그건 결코 아니었기에 저스틴은 정정을 하기로 했다.
“뭐, 걱정한 건 아닙니다. 폐하께서 암살을 당하시면 곤란한 건 이쪽이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게 저스틴은 얼떨결에 야밤의 외출에 합류하게 되어서는 황궁의 외곽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준비가 되었던 건지 말 두 필이 매어져 있었다.
“말이 두 필밖에 없는 게 문제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제는 테네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말 위에 올랐다.
“이렇게 둘씩 같이 타도록 하지.”
그리고 그 때문에 저스틴은 얼떨결에 에런과 함께 말을 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젠장.’
저스틴은 끔찍함을 가득 담은 표정을 하고는 옆을 바라봤고 마찬가지로 옆으로부터 극도의 혐오가 담긴 눈빛을 받아 내야 했다.
“가자.”
하지만 그 표정은 황제의 시선이 닿자 금세 충직한 얼굴로 탈바꿈했다.
“예, 폐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진 건 덤이었다.
저스틴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태세전환을 보며 토를 하는 시늉을 했고 황제가 출발을 한 틈을 타서 기어코 에런에게 한대 얻어맞고야 말았다.
* * *
타박타박.
황제와 테네스를 태운 말의 움직임은 느려지다 어느새 멈췄고 낌새를 기민하게 알아챈 에런은 그 곁에 찰싹 붙어 말을 대었다.
저스틴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말 위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광장은 어둠이 내려앉았음에도 번잡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녔고, 가장자리에는 갈 곳 없는 이들이 구겨져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에겐 그리 낯선 장소는 아니었으나… 황궁에서 나고 자라 바깥세상 따윈 구경해 본 적도 없을 법한 황제에게 익숙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어쩐지 불쾌해진 저스틴은 불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긴 왜 오는 거지? 뭐 즉위식 전에 가난한 백성들을 보면서 다짐이라도 다지셔야겠대? 그렇다면 중앙 광장 쪽이 더 낫지 않겠어? 폐하께서 보시기에는 중앙 광장의 사람들이나 북부 광장의 사람들이나 비슷할 거 아니야.”
그도 황제가 꽤나 나쁘지 않은 황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별개였다.
‘이건 우롱이지.’
뭐, 황제가 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는 있지만 그게 이곳인 건 마음에 안 들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저마다의 치열한 삶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삶은 비록 누군가가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했다.
그렇기에 기분이 나빴다. 이게 바로 지척에서 황제를 모시지만… 저스틴이 다른 귀족 놈들과 달리 황제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는 이유였다.
황제는 말했다. 백성들을 위해서 동부의 귀족들을 숙청하겠다고. 그렇다면 그렇게만 하면 됐다. 사실상 고리대를 놓는 개 같은 동부 귀족들과 그들의 끄나풀들만 정리해도 백성들의 삶은 한층 나아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찾아와서 위선적인 적선을 하듯이 한두 번 둘러보며 백성들이 어떻게 어렵게 사는지 살펴보는 건… 선을 넘었다.
어차피 황제는 진정한 백성의 삶을 알지 못한다. 신의 피를 이은 고귀한 이들은 바닥을 굴러다니며 처절하게 생을 위해 고군분투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에 늘 그랬듯이 찌그러져 있는 낮은 계급의 이들은 무시한 채 그저 적당히 제 시야에 닿는 이들만 정리하면 될 터였다. 헌데 이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저스틴을 불편하게 했다.
그런 저스틴을 에런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놈을 본다는 듯이 바라보고 혀를 찼다.
“알 거 없다.”
“뭐, 그래.”
에런은 그리 말하면서 다시 황제의 뒤를 쫓았다.
저놈은 언제 그렇게 감회가 된 건지 저스틴에게 그저 방이나 청소하고 자객이나 막을 것이 아니라 좀 더 열과 성을 다해 황제의 말을 받들고 모시라며 잔소리를 하곤 했다. 뭐, 이젠 포기했는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지만.
저스틴은 그런 에런의 뒷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는 멀찍이 서서 황제의 행동을 훑었다.
황제는 찾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지 한명 한명을 살피는 듯 천천히 걸었고 이내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춰 섰다.
“…….”
황제는 딱 봐도 정신이 나가서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몰골을 한 사람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몸을 조금도 굽히지 않은 채로 당당히 서서는 아래에 있는 이를 내려다보며 명령이라도 내리듯이 무어라 말을 했다.
하.
저스틴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저런 이를 단 한 번도 대해 보지 못한 티가 나는 자세였다.
“저러다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저스틴은 그렇게 낮게 읊조리며 황제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헌데 어쩐 일인지 그 떠돌이가 슬슬 몸을 일으키고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뒤를 쫓듯이 황제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라?’
저런 태도를 보였음에도 따라간다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누추한 곳에 황제같이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황족이 알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딘가에 닿았다.
‘몰락한 귀족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됐다. 그리 생각한 저스틴은 황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헌데 매일 밤마다 피를 토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데다 거지같은 체력을 가진 황제는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지 끝도 없이 걸었다.
저스틴은 주위를 둘러봤다. 점점 정돈된 도보가 사라지고 흙길과 무성한 나무가 그 자리를 채워 갔다. 어느새인가 인기척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테네스와 에런이 주위를 오가며 나무를 줍고 가운데에 쌓기 시작했다.
저스틴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며 이내 둘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제단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것은 떠돌이가 내내 가슴팍에 끌어안고 있던 여자의 옷 뭉치였다.
‘뭐 하는 거지?’
“저스틴.”
때마침 황제가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예, 폐하.”
“불을 붙여라.”
“여기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예.”
여전히 의미심장했지만, 저스틴은 이어진 에런의 타는듯한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제단에 불을 붙였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나무로 된 제단은 잘도 불타올랐다.
저스틴은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불퉁한 얼굴로 황제가 하는 꼬락서니를 바라봤다. 황제는 축문을 읊고 있었다. 아마 대상은 떠돌이가 가슴팍에 안고 다니던 옷의 주인일 것이다.
알던 사람일까. 어쩌면… 정말로 저 떠돌이는 고위 귀족일지도 몰랐다. 황제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인척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지는 않아 보였지만.
사내는 목놓아 울었고 그 곁에선 황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에게 기원의 기도를 올렸다. 얼핏 듣기론 그들의 영혼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다음 생애에 반드시 행복한 삶이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말인 것 같았다.
신관 나부랭이가 올리는 기도였으면 같잖게 느껴졌을 테지만 상대는 신이 총애하는 그녀의 아들이니, 어쩌면 정말로 기도가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가득한 달밤, 앙상한 나뭇가지의 아래에 서 있는 금발의 황제가 외모, 그것 하나만은 진정 고결하게 생겼기에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저스틴은 왠지 가슴 어딘가가 마비된 것 같기도 하고 조여 오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았다.
‘부럽기도 하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불은 꽤나 오랫동안 타올랐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살라진 뒤, 황제는 그에게도 짧은 기도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황제가 떠났음에도 떠돌이는 그곳에 붙박이가 된 듯이 주저앉아 있었지만, 저스틴은 그에게 시선을 거두고는 슬슬 황제를 쫓아가며 생각했다. 의외라고.
그가 아는 황제는 깔끔을 떨어도 아주 더럽게 떠는 사람이었다. 방이 더러운 꼴을 보지 못해서 저스틴에게 매일매일 잔소리를 할뿐더러 몸도 하루에 서너 번씩은 씻어 댔다.
그런데 더럽기 그지없는 떠돌이가 자신에게 안겨서 우는 데에는 가만히 있었다.
‘뭐, 그것도 그렇지만….’
왠지 봐서는 안 될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까칠하기 그지없는 평소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결코 그런 얼굴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다.
꼬르륵.
“…하하!”
저스틴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생각은 생각이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였다. 한참이나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은 데다가 저녁도 안 먹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배가 텅 비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서 뭐라도 좀 먹고 가도록 하지.”
그런 저스틴에게 황제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예, 예? 폐하께서요?”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저스틴은 복잡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입에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토를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는 황제를 근처의 음식점에 데리고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뭐, 자기가 가자니까. 그렇게 원하는 평민 체험을 하고 싶으시다면 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건 어쩌면 치기 어리고 질 나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제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좋습니다! 가시죠!”
그랬기에 발걸음을 옮겨서 음식점으로 셋을 안내하는 저스틴의 입매는 점점 굳게 다물어졌고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는 어딘가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저스틴은 늦은 밤임에도 문을 닫지 않은 빈민가 골목의 허름한 가게로 모두를 안내했다. 어릴 적 자주 다니던 골목이었기에 익숙했다.
“넷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구색만 겨우 갖춰놓은 낮은 테이블 옆 흙바닥에 그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황망한 시선들이 그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이런 데 처음 오십니까? 설마 의자 같은 걸 바라신 건 아니죠?”
“…….”
그 말을 들은 뒤 정말 이 공간에 의자 따위는 없다는 걸 확인한 테네스는 로브 속에 둘러맨 망토를 끌러서는 고이 접어 한쪽에 놓아두었다.
‘참으로 대단한 충정이야.’
저스틴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저 망토가 누구를 위해 준비된 건지 알았으니까. 역시나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모두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음식이 내어져 왔다. 물론 음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뭣한 것들이었다. 놓인 거라곤 감자를 잘게 썰어서 물에 넣고 끓인 수프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것과 검은 빵 한 덩이뿐이었다.
“이게… 단가.”
한참을 침묵하던 황제가 꺼낸 첫마디였다. 꽤나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다.
“이 정도면 훌륭하죠, 뭐.”
저스틴은 제 몫의 빵을 수프 안에 집어넣으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것도 수도니까 이 정도로 먹는 겁니다. 요즘은 특히요. 가뭄이 들었으니까. 애초에 식탁에 빵이 올라오는 것조차도 며칠에 한 번 정도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루에 몇 번 먹지?”
하.
저스틴은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뭘 몇 번씩이나 먹겠어요. 한 번이나 먹으면 다행이죠.”
“그런가.”
“예.”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황제는 저스틴처럼 수프에다가 빵을 넣고는 한참을 녹여낸 다음에 묵묵히 입에 넣었다. 분명 쓰레기 같은 맛이 날 텐데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였다.
까탈스러운 에런 놈은 한입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음에도 황제의 숟가락질은 멈추지 않았다. 분명 한입 먹자마자 구역질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가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그 사이에도 황제의 그릇은 천천히 비워지고 있었다.
“폐하.”
“뭐지?”
묵묵히 식사하던 황제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부르는 테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남자를 더 돌봐 주지는 않으실 겁니까.”
저스틴의 귀가 쫑긋 솟았다. 그 역시 그 떠돌이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황제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뭣 하러?”
“예?”
저스틴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고 모두의 시선이 저스틴에게 쏠렸다.
“아니….”
저스틴은 우물쭈물해 하다 말했다.
“폐하, 그 사람, 그러니까 그분과 아는 사이가 아니십니까?”
“일면식이 있을 뿐, 모르는 사이다.”
“아니, 그럼 모르는 사람에게 축문까지 해 주신 겁니까?”
황제는 저스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그자의 아이와 부인에 대해 장례를 치러 준 것은 그저 해야 할 도리였기에 한 것뿐이다. 이후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그자의 몫이다.”
그 말에 무언가를 알고 있는지 에런은 탄복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의 피를 이었을 뿐 신이 아니니 개개인의 삶에 관여할 수는 없다. 만약 한다고 해도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을 돌볼 수 있겠지. 이 제국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
“나의 역할은 그게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변화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는 개개인의 사정이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오늘도 나와서는 안 됐다. 하지만.”
예르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미를 덧붙였다.
“곁에 넘어져 우는 아이를 보고 가만히 지나가는 어른은 없지.”
저스틴은 여전히 그 남자와 예르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뿐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황성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테니.”
그리고 지금의 말 역시.
황제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년이었고, 그는 황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 안에서 죽을 것이다.
‘…빌어먹을.’
사실은 저스틴도 한 달 동안 황제의 곁을 지키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황제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리 유복한 생활을 하며 살아오지 못했다는 것도, 그 역시 선황이 벌인 폭정의 피해자라는 것도, 그리고 생각보다… 백성들을 대하는 마음이 진지하다는 것도.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크흑.”
옆에서는 쳐다보기 두려운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역시 부담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놈을 바라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가도록 하지.”
“예이.”
저스틴은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 옆에 앉아 있는 놈의 등을 철썩 치고는 일어났다.
하지만 저스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실상은 저도 저 예민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을 가진 놈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저 싸가지 없는 애새끼에게… 감겼다는 소리다.
‘뭐, 기분은… 나쁘지 않네.’
하지만 어쩐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내내 복잡하게 품고 있던 마음이 해소되어서 그럴까?
그는 귀족이라면 질색이었다. 하물며 황족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여전히 놈들의 대다수가 싸가지 없고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결코 귀족도 황족도 누구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저 그가 부리는 정령들처럼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살 거라고 제 스승한테 맹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짐이라는 건 깨부수라고 있는 거 아닌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꽤나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견고하게 만들어진 과거의 자신이 깨어진다면, 같이 깨어지는 거 아닌가.
여전히 그는 귀족이 싫었다. 황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테네스나 유리스, 그리고 에런 놈같이 꽤나 괜찮은 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황족 중에서도 백성의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이제 그는 그 다짐이라는 걸 한번 깨어 볼 생각이다.
내일이면 즉위식이었다. 그 말뜻은 앞으로 그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이게 될 것이고, 제국이 다시없을 혼란에 빠질 거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폭군의 졸개라는 거…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아.”
숨을 내쉬자 새까만 밤하늘 위로 새하얀 입김이 떠오르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2년. 까짓것 얼마 안 되는 시간. 한곳에 얽매여서 어디 이 황족이, 싸가지 없는 애새끼가 정말 괜찮은 황제가 되어 줄지 지켜봐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 *
새하얀 대리석 위에 많은 이들의 발소리가 울렸다. 여덟 명의 기사와 무수히 많은 시동을 대동한 새 황제의 행렬이었다.
행렬은 즉위식장의 문 앞에 다다랐고 앞서간 시동들은 그들이 모실 새로운 황제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도록 재빨리 다가가 황금색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제일 앞에 선 시동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예르넨 헬리오 황자 전하 드십니다!”
그 커다란 외침은 정적이 내려앉은 즉위식장의 허공을 갈랐다. 그에 따라 예르넨에게 결코 즉위식을 반기지 않는다는 듯한 예리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황제의 정복을 차려입고, 우아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예르넨은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조차 않는 듯 오만한 예법이 묻어나는 걸음걸이로 제가 있어야 마땅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준비된 단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예르넨은 시립해 있는 이들을 고고히 훑어본 뒤 황제를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예르넨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방이 적이라는 사실을. 이 따가운 눈초리와 적대감이 감도는 눈빛을 못 알아본다는 건 머저리나 다름없는 일이다.
즉위식장의 그 누구도 예르넨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헤리엇을 지지했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지방의 영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에서 굴러먹고 살았는지도 모를 이가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황위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할 테지.
“…….”
정말이지 곁을 맡길 아군이라고는 몇 되지 않는 기사들뿐인, 외로운 즉위식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들의 눈빛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한대도.
예르넨에게는… 이 자리를 넘겨주어야 할 녀석이 있으니까.
윗사람으로서 그 녀석을 책임지지 못했기에 보상조로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천하의 예르넨 헬리오가 변변찮은 놈을 제 배우자로 선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녀석, 라일 벨티모어는 그런 그가 배우자로 선택한 이였다. 예르넨이 아는 한 라일은 군주로서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였다.
오랜 시간 라일을 보지 못하긴 했지만, 예르넨은 그동안 그가 보아 온 라일을 믿었다.
그러니 예르넨은 이들이 새로운 황제에 대해서, 황가에 대해서 실망하고 반감을 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그리하면 할수록 이들은 황가를 갈아치우는 데에 적극적으로 손을 보탤 테니까.
“시작하지.”
예르넨이 삐딱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황제는 신의 자손이었다. 그러니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즉위식에서 예르넨이 받을 거라곤 충성 맹세뿐이었다.
예르넨의 말이 끝나고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교황의 정복을 차려입은 이든 페트라였다. 그는 짧게 축복의 말을 읊조리고 무릎을 꿇었다.
“저 이든 페트라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제국의 27대 황제, 선황 베이넌 헬리오의 아들이자 신의 피를 이은 그분의 적통, 예르넨 헬리오. 당신을 제국의 29대 황제로 인정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교황청은 폐하의 명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맹세를 끝마친 이든은 예르넨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예르넨은 그런 그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든이 물러나고 다음으로 찾아온 이는 이리언이었다. 교황청의 맹세가 끝났으니 이후에는 기사들의 맹세가 이어질 차례였다.
“제국 서남부의 수호자, 이리언 플뢰르. 신혈의 기사단의 수장으로서 폐하께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지금부터 신혈의 기사단은 폐하만의 검이 될 것입니다.”
그리 말한 이리언은 늘상 보이는 허허로운 얼굴을 걷어내고 진중한 얼굴을 하며 예르넨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여전히 무감한 얼굴을 하고는 그저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새로운 황제를 향한 충성 맹세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허나 예르넨은 그들의 맹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건성으로 넘길 뿐이었다.
마침내 긴 시간에 걸친 충성 서약이 모두 끝맺음 지어진 후 모든 이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즉위식장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기백의 이들이 서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낯빛은 어딘가 전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예르넨은 다시 한번 아래에 도열한 이들을 훑어보았다.
누군가는 예르넨이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네들에게 어떤 이들이 올지를 계산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예르넨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예르넨을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끌어내리고 싶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색이 좋지 않다는 점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예르넨이 이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히 복종하지 않는 개들에게 자리를 권유하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묵언 시위라도 하는 건가.”
예르넨의 얼굴에 차가운 조소가 새겨졌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보면 즉위식이 아니라… 장례식이라 생각하겠어.”
그리 말한 예르넨은 의자 속으로 더욱더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내 형님이 죽은 게 한 달도 더 전인데 말이야.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예르넨은 몸을 일으켜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미적거리면서 즉위식 날짜를 잡을 때부터 느꼈지만 경들은… 황좌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군데군데 흉터가 남아 있는 새하얀 손가락이 팔걸이를 느린 박자로 건드렸다.
“말을 안 듣는 개가 있다면 혼을 내야 하겠지.”
“…!”
그 모욕적인 언사에 몇몇 귀족들은 모멸감을 느꼈는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예르넨은 입가에 손가락을 얹은 채 시린 눈을 하고 분노하는 이들의 낯을 면면히 살폈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호명했다.
“제스 비센.”
“예, 옛?!”
눈살을 찌푸리며 예르넨을 노려보다 호명된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당황하며 되물었다.
“앞으로 나오도록.”
“…예.”
전통적인 동부 귀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걱턱의 남자는 예르넨에게 불려가는 작금의 상황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예르넨이 눈짓한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쉬어 베를론.”
예르넨은 또 다른 이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는 북부에 속한 영지의 지명을 성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얼굴은 전형적인 동부인이었다. 북부 가문들을 멸문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한 동부 귀족의 방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
조쉬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르넨의 호명은 그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막힘없는 호명에 귀족들은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족족 불려 나갔다. 혼을 내기 위함이라고는 했으나 정확히 무엇을 위해 호명되는지도 알 수 없기에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더러 보이는 듯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될 것 같군.”
그리고 그 말이 나오자마자 호명된 이들도 호명되지 않은 이들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이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예르넨은 오른쪽 손을 들어 올렸다.
쾅!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즉위식장의 사방에 나 있는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파르타슈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수백의 사병들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중앙을 향해 걸어왔다.
뚜벅뚜벅.
그들은 미리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로 즉위식장의 중앙에 모여 있는 이들을 겹겹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광경에 귀족들은 당황해서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대,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기저기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은 견고하게 선 사병들의 사이를 뚫고 뛰쳐나가려는 이들과 그들을 빼내기 위해 소리치며 달려드는 이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종전까지 즉위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고요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즉위식장은 마치 광장의 한복판이 된 것처럼 요란스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허나 그들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예르넨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친들 그들의 저항은 무력할 뿐이었다. 즉위식장에 입장하기 전 모든 무기는 거두어졌으며 마법 역시 황제의 허가를 받은 몇몇의 호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력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앞둔 벌레가 바르작대며 저항하는 것을 보기라도 하듯이 예르넨은 여전히 오만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여라.”
시끄러운 소음과 찢어지는 비명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는 모두의 귓가를 선명히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학살이 시작됐다.
“아악!”
명을 받은 자들은 기계적인 몸짓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꺼내 들었고 중앙에 모인 수십의 귀족들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검은, 그들을 막으려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뻗어졌다.
삽시간에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오랫동안 단장된 연회 홀의 내부 여기저기에 핏물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르넨은 그 난장판을 내려다보면서도 삐딱하게 고개를 기댄 채 지루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죄명은 뭐가 좋을까… 그래. 황제의 즉위식에 불경한 표정을 지은 죄, 정도가 좋겠군.”
그 형편없는 죄목을 들은 이들이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예르넨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아로새겨진 글자가 마치 읽히는 것만 같았다.
‘당했다. 라고 붙여 놓은 것 같군.’
예르넨은 삐딱하게 웃음 지었다.
익숙한 이들의 얼굴에 그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 떠오르니,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익숙한 얼굴.
예르넨은 황궁에 있는 외딴 섬에서 8년을 갇혀 살았다. 그의 약혼자였던 이도, 누이도, 가까운 이들조차 찾아오지 않았던 외딴 섬.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예르넨이 알았던 얼굴들은 자취를 감추었거나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그런 예르넨에게 익숙하다면… 그들의 정체는 뻔하지 않은가.
저들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지난 세월 그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되갚음 해 주고 싶었다. 사지를 자르고 매음굴에 던져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 분노가 넘실거리며 불살라 전신을 태워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르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예르넨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 모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호명한 이들 중에서 그 오두막을 방문했던 이들은 고작 둘 뿐이었다. 나머지 이들은 그저 저들의 팔과 다리 노릇을 하는 조무래기들일 뿐이었다.
예르넨은 지난 한 달간 철저히 준비했다.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를 말이다. 그랬기에 지금 예르넨의 행동은 모두 철저한 계산 하에 나오는 행동들이었다.
섬을 찾은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죄가 없는 이들이 없었다. 그들은 본인의 영지에 속한 영지민들을 수탈했을 뿐만 아니라 북부의 영지들을 손에 넣은 뒤 그곳에 속한 영지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고, 부렸다.
헤리엇의 치세 하에 그에게 세 치 혀를 놀리며 온갖 재물들을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넘어서서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들은 어차피 모두 죽여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르넨은 황제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황제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감정보다도 지켜야 하는 이들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행동은 신중히 행해져야 했다. 단칼에 목숨을 취해서는 안 됐다. 모든 것을 얻어 낸 다음, 그다음에야 이들의 목숨을 거둬야 했다.
예르넨은 분노가 가득 찬 눈을 숨긴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얼굴에 비웃음을 한껏 담았다.
“오늘 죽은 이들의 목을 모두 성문에 효수해라. 그래야 지금 머저리같이 눈을 끔뻑이고 있는 놈들이 그 광경을 보며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지 아둔한 머리에 새겨 넣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늦든 빠르든, 예르넨은 그들에게 반드시 알려 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지옥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을.
* * *
예르넨은 터질 것처럼 불안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거기엔 없어요?”
말소리가 들려왔다.
“없습니다.”
“젠장, 어디에 가서 숨은 거야? 이 쥐새끼 같은 게.”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소리가 난다면 바로 들킬 만한 위치였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그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로 떠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은 날이 없었기에 오늘도 들킬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만은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가봅시다.”
“그럴까요?”
예르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놈들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다른 곳을 살피자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떠나면 한동안은 이곳을 찾지 않을 테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긴장이 역력했던 얼굴에 작은 안도감이 맺혔다.
“…라고 할 줄 알았나 보지?”
“…?!”
그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풀숲으로 파고들었고 단박에 예르넨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아윽…!”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갈 것만 같은데도 상대는 단단히 틀어쥔 머리채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들킨 이상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예르넨은 거칠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르크루제 후작이 조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을 하고는 그런 예르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힘을 줘서 아프게 쥔 머리채를 제 앞까지 끌어온 다음 남은 한 손으로 예르넨의 오른쪽 귓바퀴 근처를 쓸어내렸다.
“흐윽…!”
그 손길이 지나자 마치 귓바퀴 근처가 화상을 입기라도 하는 것처럼 뜨거워지며 살이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또 도망갈 줄 알았지.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서 일부러 붙여 놨는데 역시나군.”
그렇게 말한 르크루제 후작은 그대로 예르넨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질질 끌면서 숲속을 빠져나왔다.
“아윽…! 이거, 놓지 못해?!”
예르넨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풀숲에서 끌어내졌다. 날카로운 나뭇잎에 베인 얼굴 여기저기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이 지척에서 들려올 때 즈음 르크루제 후작은 그들의 한가운데로 예르넨을 던졌다.
“윽!”
정통으로 부딪친 왼쪽 어깨가 시큰거려 왔지만,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누군가 예르넨의 턱을 들고는 잡아당겼다.
“정말이지 매일 도망 다니시는 게 거슬리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페트라 후작이었다.
그는 손안에 영상구를 쥐고 있었다. 오늘도 영상을 찍으려는 게 분명했다. 최악이었다.
저 영상구가 대체 어디까지 퍼졌을지, 혹시나 그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까지도 전해진 게 아닐지.
그 생각만 하면 전신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아졌다.
예르넨은 이를 갈면서 영상구가 들려 있는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도리어 양손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이 분노가 가득 담긴 검은 눈동자가 페트라 후작을 노려봤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전하께서 이 이상 무슨 꼴을 당해야 도망을 그만둘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는 그 눈빛을 보고서도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페트라 후작은 가볍게 예르넨을 제압하고서는 양손을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짐승보다 못한지, 묶어 놓고 매질을 해도 말을 듣지 않으시니 어떻게 체벌을 해야 말귀를 알아들을까. 하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에는 하나 같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즐거움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
턱이 잘게 떨려 왔다.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다음에는, 항상 끔찍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예르넨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힌 채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글쎄요.”
페트라 후작은 짙게 미소를 지으며 예르넨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 여자애가 멋대로 인형을 가지고 놀듯이 단검을 꺼내 머리카락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지금부터 할 일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으니, 쓰잘데기없는 머리카락은 잘라 내야겠습니다.”
“…!”
짙은 잿빛이 감도는, 굽이치는 긴 금발이 형편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예르넨의 커다랗게 뜨인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당황의 빛이 새겨졌다.
“윽….”
그리고 이내 커다랗던 눈은 금세 일그러지고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왜일까. 귀찮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이었는데. 칼을 쓸 수만 있었다면 당장에 잘라 냈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하곤 했는데.
하지만 예르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의 얇고 새하얀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흐윽…! 뭐, 뭐 하는 거야…!”
예르넨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향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페트라 후작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오두막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오두막과는 정반대였다. 이 길의 끝에 있는 건… 호수였다.
“…!”
이내 시야에 잡힐 정도로 호숫가가 가까워졌고 예르넨의 동공은 공포로 물들었다.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놈은, 예르넨을 호수에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커다란 강에 빠진 이후 예르넨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을 무서워하게 됐다. 그랬기에 제정신이 아닐 때를 제외하곤 호수 근처에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 마…!”
하지만 예르넨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한들 억센 손은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이내 예르넨은 깊은 심연이 넘실대는 호수에 던져지고 말았다.
풍덩.
온몸을 때리는 거친 물살을 느끼며 예르넨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고, 숨을 머금지 못한 채로 괴로워하는 얼굴을 하며 공기 방울을 뱉어 냈다.
“흡…!”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도 손을 풀어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미끄덩거리는 것이 발목 근처에서 느껴졌다.
“…!”
그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찰나의 순간에 예르넨의 발목을 휘어 감고는 더 깊은 물속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헉!”
잠에서 깬 예르넨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른쪽 발목을 더듬었다.
없었다. 아무것도.
하아, 하아.
쿵쿵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와 숨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떨리는 손으로 짚은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젠장.”
예르넨은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종종 그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꿈을 꾸곤 했지만… 이번 꿈은 유독 심했다.
하필이면 그날의 꿈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나날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그렇기에 잊을래야 잊히지 않는 그 날의.
하지만 예르넨은 왜 이 꿈을 꿨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지난밤, 그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영상을 담은 영상구가 여기저기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제길….”
명을 내리긴 커녕 당황해서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린 예르넨을 보며 기사들은 반드시 모든 영상구를 전부 없애겠노라 맹세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봤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잠에 취해 무뎌져 있던 감각들이 돌아왔는지 다시 배를 찢을 듯한 끔찍한 복통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예르넨의 신형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이내 예르넨은 보드라운 침대 위에서 완전히 몸을 웅크렸다. 새하얗기만 한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예르넨은 조금씩, 조금씩 몸을 더 웅크리며 잘게 떨었다.
그리고 예르넨의 기척을 느낀 테네스가 조용히 작은 종이봉투와 잔을 들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테네스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예르넨을 한 손으로 안아 들고는 작은 알약 하나를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유리스가 조금 전에 가져다준 약입니다.”
테네스는 곧장 주저 없이 잔에 입을 대고는 안에 들어 있는 액체를 마신 뒤 예르넨에게 내밀었다. 잔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예르넨은 작게 입을 열고는 테네스가 기울여 주는 잔에 들어 있는 액체를 약과 함께 삼켰다.
독한 알코올의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고,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으윽…!”
그리고 예르넨은 다시 한번 배를 부여잡고는 몸을 떨었다.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러지 않으면 약이 효과를 보이지 조차 않았다.
테네스는 예르넨을 천천히 침대 위에 내려 준 뒤 물러났다.
“하아, 하아.”
예르넨은 천천히 몸속 깊은 곳이 마비되어 가는 감각을 느끼며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제길.”
독 때문이 아니라 술 때문에 장기가 썩어 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상태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감금되어 있던 섬에서 풀려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무렵, 예르넨의 상태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던 영양분을 공급받은 것은 물론이고, 비록 신성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의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던 점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르넨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유리스가 만들어 낸 약이었다.
유리스는 기필코 해독제를 만들겠다며 달려들었고 실제로 반쯤은 성공작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녀의 약을 먹은 예르넨은 차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몇 번의 독살 시도가 이어졌고 그 독들이 마물의 피와 만나 어떤 상승작용을 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후 몸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회복하기는커녕 악화 일로를 걷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제는 통증마저 잡지 못하게 되어 세 시간 간격으로 빈속에 약을 털어 넣고 독한 술을 들이켜야 했다.
예르넨은 창을 바라봤다.
밖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먹구름에 가려져서 온통 어두웠다. 그랬기에 창문에는 술기운에 젖어 흐려진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병자가 쉽게도 비쳤다. 예르넨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애써 무시한 채, 수도의 전경을 바라봤다.
수도의 한복판에는 여전히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는지 새까만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반란군이 최후의 발악을 한 흔적이었다.
예르넨은 즉위식에서 수많은 귀족을 숙청했다. 그런 예르넨에게 귀족들이 몸을 웅크리고 순종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칼을 갈았고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르넨의 명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예르넨이 어떤 말을 하든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심지어 종래에는 회의에 나오지조차 않기에 이르렀다.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귀족들이 황제와 힘겨루기를 할 때 사용하는 흔한 방법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설 때, 보통의 황제라면 자신의 이권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서라도 그런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예르넨에게도 통할 거라는 생각은 그들의 오산이었다.
예르넨은 첫날,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귀족 중 하나를 골라서는 재판을 열고 온갖 죄목을 뒤집어씌운 채 목을 성문에 효수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올렸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처사는 매 회의 때마다 계속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그런 예르넨의 처사가 폭정이라며 항의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럴 때면 그들 중의 하나를 더 골라서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나란히 성문에 걸어 뒀다.
그렇게 몇 번이고 숙청이 반복되자 귀족들은 폭정을 참지 못하겠다며 급기야 내전을 일으켰다.
이후 거대한 제국이 휘청일 정도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일 년에 걸쳐 이어진 내전은 최근에서야 끝을 맺게 되었다.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이 겨울에 말이야.’
이 계절에 예르넨은 즉위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예르넨은 다시 이 계절로 돌아왔다.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겨울. 예르넨이 제일 싫어하는 계절.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끔찍한 시간들만이 계속되는 계절.
그런 겨울의,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하늘에서 하나, 둘.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하늘을 바라보는 예르넨은, 그리운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도 이 하늘을 보고 있을까.’
예르넨은 흐리게 미소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이 황궁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내일 살아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으니까.
* * *
자켓을 입으려던 예르넨은 거울에 비친 몸의 테를 훑어봤다.
최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서 그런지 부쩍 살이 내려 있었다. 이 상태로 자켓을 입었다간 헐렁거려서 볼품없는 모양새만 강조할 테지.
미간을 찌푸린 예르넨은 향수를 뿌렸다.
몸이 썩어가는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갈 것을 걱정해서 매일 매일 강박적으로 뿌리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코끝에 맴도는 시체 썩는 냄새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빌어먹게도.
“…….”
그렇게 단장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살이 내린 몸을 가리기 위해 자켓을 걸치자 예르넨은 더 이상 아픈 병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흐린 눈도, 열과 술기운에 닳아 오른 볼도, 고통을 참으며 붉게 물든 눈가도, 제대로 걸치지 않아 미묘하게 흐트러진 옷도. 어딘가 체념한 것 같은 표정과 맞물려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준비를 모두 끝낸 예르넨은 문 앞에 섰고, 그런 예르넨의 기척을 읽은 테네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예르넨은 문가에 테네스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덴버 로네펠트, 서북부의 변경백이었다.
“…왔군.”
그녀는 동부 반란군 진압의 총 책임자로서 반역자들을 압송해 온 장본인이기도 했다.
“예, 폐하. 폐하께 먼저 귀환을 알리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고했다.”
덴버의 노고를 짧게 치하한 예르넨은 걸음을 옮겼다.
“어땠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기분 말이다.”
헤리엇은 그의 수하들이 무엇을 하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설령 불법적인 일이어도 그에게 적절한 금액만 상납하면 없는 것처럼 눈감아 주곤 했다.
그런 헤리엇의 수하로서 르크루제 후작은 마찬가지로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하길 서슴지 않았고, 그 안에는 노예 상단을 운영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르크루제 후작이 가지고 있는 노예상들은 그 주인의 썩어빠진 사상을 받아들여서는 북부인들이라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페이넌 왕국과 카일렌 왕국 등 주변국으로 팔아넘겼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안에는 덴버의 남동생이 있었다.
덴버는 남동생이 실종되자마자 사람을 풀어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수소문 끝에 알게 된 것은 그가 성노예를 가차 없이 다루기로 유명한 페이넌 왕국에, 어느 귀족의 성노예로서 팔려갔고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뿐이었다.
평온하던 가문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고 덴버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덴버는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르크루제 후작이 선황 헤리엇의 측근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로네펠트 가문이 다른 북부의 가문들처럼 멸문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덴버는 충성을 맹세하기 전날 밤 예르넨을 찾아왔고 이야기했다.
르크루제 후작의 목숨을 그녀의 손으로 거둘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만 해 준다면 놈의 목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예르넨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예르넨은 그 제안이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에게 평생토록 충성할 것을 맹세하겠다고 말하는 허무맹랑한 맹세보다는 믿음직한 충성 맹세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덴버의 청을 받아들였고 동부의 반란이 시작되었을 무렵 그녀를 동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덴버는 남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이뤘음에도 덴버는 모호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모르면 안 되지 않나? 그토록 바라던 복수인데. 약속대로 벤자민 르크루제의 처분은 그대에게 일임하겠다. 삶아 죽이든, 사지를 자르고 매달아 피를 모두 빼내고 죽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예르넨에게 벤자민 르크루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 목숨을 건네주는 대가로 북부에서 손꼽히는 기사를 멋대로 부렸으니 싼값을 치른 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덴버로부터 의외의 대답이 전해졌다.
“아니요, 폐하.”
그녀에게서 완곡한 거절의 말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제야 예르넨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덴버와 얼굴을 마주했다.
“전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덴버의 표정은 어딘가 안정되고 평온해 보였다.
“대신, 한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르크루제 후작을 잡았지만, 아직 그 잔당들을 모두 소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생의 원한을 모두 갚아 주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덴버는 어딘가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남은 잔당들을 모두 해치우실 때까지 곁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남은 잔당을 모두 해치운다니. 그건 아마도, 예르넨의 생이 다 끝난다고 해도 모두 이룩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그녀가 예르넨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곁에 머무르겠다는 이야기였다. 진정한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
“…그러던가.”
예르넨은 흘러가는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덴버는 무서울 정도로 굳은 얼굴을 하고는 감사하다 말하며 예르넨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은 연회장에 도착했다.
우아한 빛을 내는 샹들리에가 조명을 밝히는 연회장의 이곳저곳에는 아름다운 조각품과 화려한 음식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웅장하게 흐르는 악단의 연주 소리를 들으며 연회장을 가로지른 예르넨은 메인 홀의 바로 곁에 준비되어 있는 와인잔을 쌓아 올린 탑 앞에 도착했다.
예르넨은 테네스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테네스는 가장 위에 올라가 있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킨 뒤 예르넨에게 건넸다. 예르넨은 와인잔을 들고, 테네스가 입을 대었던 그 자리에 똑같이 입을 대고 와인을 마셨다.
여기저기서 불편한 시선이 쏟아지는 것 같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예르넨에게 바른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르넨은 두어 모금 들이킨 와인잔을 들고는 천천히 걸어서 연회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늘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과 우아한 손짓이 오가던 메인 홀의 중앙은 평소와 달랐다. 오늘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들은 춤을 추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예르넨의 발걸음은 그들의 정중앙, 가장 상석에 있는 이의 앞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반란은 동부 귀족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허나 파죽지세로 나아가는 듯 보였던 그들은 수장인 메리온 공작이 암살됨과 동시에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변모했고 한방에 무너져 내렸다.
그랬기에 본디 이 자리에는 메리온 공작의 딸인 리지 메리온이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리지 메리온은 선황후에 대한 예를 차려야 한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탑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고로 현재 패잔병들의 가장 앞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벤자민 르크루제였다.
“하.”
예르넨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볼품없이 꿇어 앉혀 있는 녀석의 낯을 살폈다.
마나 구속구를 목에 차고 그 무게에 못 이겨 고개를 제대로 들지조차 못하는 그에게서는 어디에서도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간 명치께에 고여 있던 체증이 한방에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예르넨은 잔 안에 들어 있던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켠 뒤 손에 힘을 풀었다.
쨍!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와인 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고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날렸다.
그리고 유리잔이 깨어진 직후, 예르넨은 여전히 붉은 피가 묻어나는 붕대를 매고 있는 르크루제 후작의 배를 거세게 발로 찼다.
“컥…! 끄윽…!”
그 한 번의 발길질조차 버텨 내지 못한 르크루제 후작의 신형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예르넨은 그런 르크루제 후작의 머리를 밟은 채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후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끄아아악!”
바닥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예르넨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머리를 밟고 있는 발에 더욱 강하게 힘을 줄 뿐이었다.
“끄흐흑…! 끅! 그… 그만…!”
“아직도 말을 할 정신이 남아 있나 보네?”
고개를 숙인 채로 르크루제 후작의 귀에 대고 속삭인 예르넨은 그의 몸에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비명소리가 울음소리로 바뀌고 그 소리마저 잦아들 때까지.
뼈가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르크루제 후작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결박당한 채 앉아 있는 이들의 안색이 핼쑥해져 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확인한 예르넨은 다시 한번 후작의 얼굴을 강하게 밟아준 뒤에야 그의 앞에 반쯤 몸을 굽힌 자세로 앉았다.
가까이서 보자 온통 피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 된 그의 얼굴이 더더욱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바닥에 처박힌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한 명쯤은 반란에 대한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 그대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놈 역시 알고 있겠지. 나를 영원히 가둬 두거나 죽이지 않는 이상 밑바닥에 처박히는 건 네놈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뭐가 좋을까.”
예르넨의 말을 듣자 반쯤 정신을 잃은 것 같은 모양새의 르크루제 후작이 작게 움찔거렸다. 예르넨은 그런 그의 몰골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내려다보았다.
“아, 그렇지. 그러면 되겠군.”
곰곰이 고민하는 듯 말꼬리를 늘리던 예르넨은 마침내 그에 대한 처우를 결정했다는 듯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놈은 매음굴을 좋아했으니… 늘 바라던 것처럼 매음굴에서 굴리면 되겠어. 반란을 모의한 놈의 처우로 그 정도면 은혜롭지 않나.”
예르넨은 슬슬 몸을 일으키고는 그의 앞에 꿇어앉아 있는 이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반역자 벤자민 르크루제의 혀를 뽑고 사지를 자른 뒤 매음굴에 던져버려라.”
그 지독히도 잔인한 처우에 모두의 눈에 하나, 둘 공포가 아로새겨졌다.
“…!”
예르넨은 그런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과연 이 오합지졸의 쓰레기들 사이에서 살려 둘 만큼 효용 가치가 있는 놈들이 있을까 셈하면서. 그리고 모든 이들의 낯을 하나하나 뜯어본 예르넨은 결론을 내렸다.
‘쓸모없는 짓이었군.’
하나같이 무능하기로는 이루 말할 데 없는 놈들뿐이었다. 그리고 반역죄를 지은 데다가 제국을 위한 쓰임조차 없는 이들이라면 이들에게 선고될 형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놈들은… 죽여라.”
“아악!”
“폐, 폐하!”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폐하…! 이 모든 게 르크루제 후작과 메리온 공작가가 벌인 일입니다! 저희는, 저희는 협박당했을 뿐입니다!”
“폐, 폐하! 잘못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선고가 내려지자마자 그때까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로부터 폭발적인 비명과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나 예르넨은 그들에게 일절 시선을 건네지 않은 채로 단호히 돌아서서 연회장을 나섰다.
“폐하.”
“…….”
연회장 문가에는 이든이 그런 예르넨을 기다리며 참담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는 서 있었다.
“하.”
그가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페트라 후작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서신을 보내왔고 예르넨은 끈질기게 그 서한을 무시해 왔다.
“참으로 눈물겨운 형제애가 아닐 수가 없어.”
예르넨은 그런 이든을 바라보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 부인이 아이를 임신했다지?”
움찔.
이든의 몸이 작게 튀어 올랐다.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반응은 페트라 후작과 달리 어딘가 온순한 면이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모든 가문의 삼족을 멸하고 평민으로 강등할 것이나, 네 가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동안 제국에 기여한 노고를 인정해 유한 처분을 내리도록 하지.”
“…….”
“후작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아이가 멀쩡하게 태어나게 된다면 네놈이 직접 엘딘 페트라를 끌고 내 앞으로 데려와라.”
할 말을 끝마친 예르넨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듯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려고 했다.
“폐하….”
그리고 이든은 그런 예르넨을 절망감이 가득 깃든 어조로 불러 세웠다.
“뭔가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예르넨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문의 수장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습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이든이 눈을 질끈 감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후계가 태어나면, 그 대가로 페트라 후작가는 그 아이를 양육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황실에 아이를 넘기겠습니다.”
‘후계를 볼모로 넘기겠다… 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니 나쁘지 않기보다는, 도리어 내내 페트라 후작의 구명을 요구하던 이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된 말이었다. 그리고 달리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그가 교황이기에, 제국의 미래를 위해 택한 선택이기도 했다.
페트라 후작가는 대대로 교황을 배출한 가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멸문시킬 수는 없었다. 헌데, 그 아이가 그런 가문의 후계로서 분노와 원한을 주입받으며 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미래에 큰 화근이 될 것이었다.
“그러도록.”
그리 말한 예르넨은 이든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제 뒤에 따라붙은 기사들에게 말했다.
“탑으로 간다.”
아직 모든 반역자가 처벌을 받은 게 아니었다. 한사람이 남아 있었다.
탑에는 리지 메리온이 구금되어 있었다.
헤리엇이 죽고 황위에 오른 다음, 예르넨은 가장 먼저 리지의 목숨을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부 귀족들의 머리 노릇을 하는 메리온 공작이 시류를 기민하게 읽고는 예르넨이 황제가 되기도 전에 리지를 영지로 데리고 가 버렸으니까.
허나 반란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메리온 공작과 그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예르넨의 손을 저지할 만한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감옥에 들어선 예르넨은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르넨의 기사들 역시 해괴한 것을 본다는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전에 탑을 들어오며 하녀 여럿이 탑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설마, 하는 심정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어이가 없었다.
예르넨은 감옥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낡고 오래되어 돌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감옥의 내부는 붉은 천으로 단장이 되어 있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초야에 신혼방을 꾸미는 것처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낀 리지 메리온이 서 있었다. 리지는 꿈을 꾸는 듯 몽롱한 얼굴을 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이날만을 그리면서 살아왔어요, 폐하.”
예르넨의 얼굴이 왕창 찌푸려졌다. 늘 리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해 왔지만,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줄은 몰랐다.
“아버지께 놔 달라고 폐하께 가겠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듣지 않으셔서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시나요? 전 늘 폐하께 오고 싶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예르넨은 개소리 따위 집어치우라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리지는 그런 예르넨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제가 하고 싶은 말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황자 전하를 처음 뵈었던 그 날이 떠올라요.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아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전하께 뺨을 맞았죠. 참 이상해요. 기분이 나빠야 할 일인데 도리어….”
리지의 볼이 붉게 물들어 갔다.
“아직도 그날을 잊지 않고 있어요. 일기장에도 적어 놨답니다. 제국력 1005년, 7월 8일. 정원에 꽃이 화사하게 피었던, 그날 말이에요. 전하, 그날 저는 혼자서 온밤을 새우고 신새벽이 떠오를 때까지 전하만을 떠올렸어요. 전하께서… 으윽…!”
덴버는 예르넨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리지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꺾고 구속했다. 하지만 리지는 아프지도 않은지 눈을 깜빡이더니 도리어 희열이 느껴지는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짓밟히고, 망가져서 엉망이 된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는 또 어땠는지요.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그래서 아버지께 수없이 간청을 드렸어요…! 전하의 즉위식을 보게 해달라고, 보게 해 달라고…!”
리지는 격해진 감정과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황제가 된 전하께서 서 계시네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이제, 제 심장에 검을 꽂아 넣으시겠죠?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완벽해지는 거예요.”
“…미친놈이군.”
예르넨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덴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죽여라.”
“예.”
“전하…?”
닫히기 전, 문틈 사이로 리지의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전하…!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내 격렬한 저항의 울부짖음으로 뒤바뀌었다.
예르넨은 탑을 내려갔다. 그 울부짖음이 멀어지다 이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그러면서 방금 전 보았던 리지 메리온을 떠올렸다. 본래부터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도가 심했다. 저택에 갇혀서 영원히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와 약혼을 하고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셈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리고 더더욱 어이가 없는 건, 그렇게나 싫어하던 리지 메리온을 죽였으면 속 시원해야 할 일인데,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자신이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리지에게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늘 이런 기분을 느꼈다. 씁쓸한 기분을.
예르넨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끝에 마침내 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가시고 시원한 겨울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도록 떨어지던 눈은 어느샌가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 정도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길에는 이미 눈이 가득 쌓여 한걸음 내딛기도 힘들 정도였다.
콜록, 콜록.
한참을 눈을 맞던 예르넨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폐하.”
걱정 어린 눈들이 건네어져 왔지만 기침을 쉽사리 멈출 수는 없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았음에도.
“하아, 하아.”
격한 기침을 한 예르넨은 온통 기운이 빠져서는 비틀거렸고 그런 예르넨을 테네스가 붙잡았다. 예르넨은 흐린 눈을 하고 테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온통 걱정이 담긴 시선을 한 채로 예르넨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르넨은 그 시선을 따라 제 손을 바라보았다.
“…하.”
손은 이미 새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색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르넨은 테네스가 내민 손수건에 피를 닦았다. 피에서 시체 썩는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묵묵히 피를 닦던 예르넨은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추웠다. 너무도.
지독히도 추운 계절의 한복판에서 예르넨은 단 하루도, 한시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장기가 모두 불타오를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수많은 이들의 목을 자르고, 멀쩡한 척 연기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매일을, 매일을….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래도 이 길을 걸어 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외줄을 타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몸을 이끌면서도.
녀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라일.’
예르넨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에 예르넨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녀석은 이제 예르넨을 증오하고, 증오해서 복수할 날만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예르넨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가, 예르넨을 증오하며 복수만을 그리며 겨우겨우 살아가듯이 예르넨도 그 하나만을 떠올리며, 버텨 내고 있었으니까.
‘라일, 나는.’
그러나 진실로 예르넨이 바라는 것은,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죽고 싶어.’
* * *
“…이만 가 봐.”
예르넨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건 역시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테네스 역시 마찬가지인듯했다. 테네스는 종전과 달리 한껏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예, 폐하.”
예르넨은 테네스를 배웅해 준 후 유리온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라일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예르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아윽….”
침대에 눕자마자 허리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더니 통증이 몰려와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다닌 건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 대가가 이런 통증이라니. 심지어 함께 밤을 보내도 아픈 건 매번 예르넨뿐이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따뜻한 침대 속에 누워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그른 모양이군.’
작은 투덜거림이 머릿속에 맴도는 듯했지만 그 역시 드문드문 이어질 뿐이었다. 예르넨은 서서히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