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잠을 깨운 것은 끔찍한 격통이었다. 아니, 격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이 돌아오면서 몸의 곳곳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그제야 격렬하게 인식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옳았다.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눈을 뜬 예르넨은 끔찍한 복통을 느끼며 차마 허리를 구부리지도, 피지도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으윽….”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누군가 그런 예르넨의 고개를 조심히 들어 올리고는 입가에 컵을 대어 주었다.
예르넨은 차가운 물을 천천히 두어 모금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몰려오는 복통에 입을 떼고 배를 부여잡았다.
‘여긴, 어디지.’
오두막은 아니었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돌바닥도 그랬지만 귓가에 잡히는 발걸음 소리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두막에는 이렇게 물을 입가에 대어 줄, 친절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르넨은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아내기 위해 눈을 뜨려 했으나 눈두덩이가 뜨거워서, 쉽게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런 예르넨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십니까.”
테네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예르넨은 그제서야 현실을 자각했다.
그는, 일리안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기억을 잃은 듯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테네스가 헤리엇의 목을 베는 광경을 본 것만 같았지만… 착각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됐지?”
그랬기에 예르넨은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테네스에게 물었다.
“국장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
“두 황족에 대한.”
그 말은 작전이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에 보았던 장면은 꿈이 아니었다.
“이곳은, 황성 밖입니다. 전하.”
“황성, 밖이라고…?”
“예.”
예르넨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가 이내 다물어졌고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뜨거운 눈두덩이 아래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뜨기 무척이나 힘겨웠지만 한참을 노력한 끝에 예르넨은 겨우겨우 작게나마 눈을 뜰 수 있었다.
쇠창살 너머로 광장이 보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
8년 만에 보는 바깥세상이었다.
그제야 예르넨은, 자신이 정말로 섬을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전하.”
“…그래.”
예르넨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었다.
때때로 예르넨을 희롱하는 이들은 그를 비참한 몰골로 만든 다음에 수도 한복판의 광장에 던져 놓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밑바닥 하층민들이나 다니는 매음굴에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겁이 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섬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져 그전까지 알고 있던 지식을 서서히 잊어 갈 때도, 황궁 밖으로 쫓겨나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게 될 미래를 생각할 때도 종종 두려움이 밀려오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은 아주 잠깐이었다. 예르넨은 섬에 갇혀 있는 내내 간절히 바랐다. 바닥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깊고 검은 이 끔찍한 호수의 근처를 벗어나기를.
바람 소리와 나무 부딪치는 소리, 가끔 들려오는 물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지독한 고요에서 벗어나 부디 몇 마디라도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그러나 그것은 예르넨이 섬 밖으로 나와 보지 못했기에 품을 수 있었던 허상이었다.
섬 밖을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처음, 예르넨은 짙은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오랜 기간 다수의 군중이 밀집해 있는 걸 보지 못했던 예르넨은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을 볼 때마다 현기증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고, 누군가의 시선이 그의 몸에 닿는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헛구역질을 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누워있어도 모자랄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일어나서는 테네스를 보호막처럼 앞에 세운 채 구석에 기대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예르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가득한 헐벗은 몸과 부목이 감긴 오른팔 위에는 테네스의 예복 겉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겉옷 아래로는 새하얀 다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삐져나와 있었다.
예르넨은 드러나 있는 몸의 다른 부분들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테네스의 거대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 몸의 면적을 줄이자 넉넉한 망토는 예르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충분히 가려 주었다.
이 정도면 밖에 있는 누구에게도 몸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나 등에 새겨진 글씨는, 정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테지.
“…….”
몸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자 조여 오던 숨통도 울렁이던 속도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기에 예르넨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울퉁불퉁한 돌벽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지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끈적한 액체가 여기저기 고여 있는 지저분한 돌바닥은 지푸라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지저분해 보였다.
그리고 눈앞의, 광장과 마주한 벽에는 녹이 슨 굵은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어딜 보아도 감옥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예르넨은 이곳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 스쳐 지나가듯이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곳은 고위 귀족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조롱하듯이 집어넣곤 하는 빈민가의 중앙, 북부 광장에 위치한 감옥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예르넨이 선황의 아들이고 헤리엇이 황족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한들 표면적으로만 따지면 예르넨은 황제를 죽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위 형제를 한 명 더 살해하기도 했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이라 해도 즉결처형될 감이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황족이었다. 신의 피가 흐르는 황족인 그를 차마 처형할 수는 없을 테니 이곳에 가둬 두었겠지.
모두 예상 범위 안의 일이었기에 거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이상했다.
“테네스.”
“예, 전하.”
“왜 저들은 이쪽에 시선을 두지 않지?”
그것은, 광장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디 북부 광장에 갇힌 불명예한 이들에게는 광장을 지나다니는 이들의 조롱이 쏟아진다 들었는데.”
참으로 이상했다.
“그렇기에 다들 이곳에 갇히기를 꺼려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보군.”
“최근엔, 그러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지?”
끄무레한 하늘에서 하나, 둘 눈송이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예르넨이 알기로 이 눈은 올해에 내리는 첫눈이었다.
“눈이 오고 있습니다, 전하.”
테네스는 그 눈을 보며 철창 너머로 손을 뻗었다.
“이리 눈이 오는 것을 보니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르넨은 옅게 미소가 떠오른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다.
“저들은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안에 갇히는 이들이 더 이상 불명예한 자들이 아니라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요.”
테네스의 얼굴에서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전하께서 사라지신 후 그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테네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예르넨은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헤리엇 님은 동부의 고위 귀족을 중심으로 권력을 개편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서부와 북부에 있는 수많은 가문을 몰락시켰고 그 가문들의 영지와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
“그 과정에서 지난 10년간 수많은 귀족이 이 감옥을 거쳐 갔습니다. 그 안에는 백성들이 조롱해야 할, 부정하고 부패한 죄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가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더 이상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돌을 던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감옥을 거치는 귀족들이 많을수록 점점,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테네스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예르넨은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헤리엇의 손아귀에서 몰락한 수많은 가문 중에는 예르넨의 외가도 있었으며, 라일의 가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 많은 서부와 북부의 가문이 있었을 테지.
이 거리의 사람들은 서서히 알아갔을 것이다. 그들, 낮은 이들을 위하는 귀족일수록, 빠르게 이곳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돌을 던질 수 없게 되었겠지.
예르넨의 시선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하층민의 광장, 수도의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
어느 시대에도 그랬겠지만, 광장의 거리는 무척이나 더러웠고 정돈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르넨과는 연이 없었기에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 예르넨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르넨은, 그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광장의 끄트머리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는 수많은 거지 중의 하나였다.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그가 여성의 옷가지를 안고 있다는 점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예르넨은 아픈 몸을 이끌고 천천히 쇠창살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자세를 바꾸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예르넨은 그가 누구인지 확신했다.
‘아이고오! 도련님! 자, 자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날은 처음으로 라일과 함께 변복을 하고 외유를 나간 날이었다. 중앙광장 근처의 번화가에 도착한 예르넨은 처음 겪는 낯설지만 활기찬 광장의 분위기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런 예르넨을 본 상인들은 순식간에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르넨은 개중에서도 넉살을 부리면서도 비위를 잘 맞춰 주는 그가 마음에 들어 그의 음식점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찾게 된 음식점에서 예르넨은 처음으로 평민들의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투박한 그릇에 담긴 옥수수 스튜는 궁에서 먹던 화려한 음식들과 비교하자면 부족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은 그 따뜻하고 포근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함께 먹었던 저민 토마토와 바질, 훈제한 햄을 끼워 넣은 샌드위치도 입맛에 맞았다.
‘맛이 괜찮구나.’
평민들의 요리임에도 제법이라는 생각에 예르넨은 주인을 치하했고 턱을 괸 삐딱한 자세로 예르넨은 바라보던 라일은 온기가 담긴 눈을 하고 말했다.
‘너는 달기만 하면 다 좋아하잖아.’
예르넨은 그런 라일을 도끼눈을 뜬 채로 바라보고는 발로 정강이를 차 주었다.
전체적으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그 날의 식사는 예르넨에게 만족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익살맞은 주인은 예르넨의 기분을 즐겁게 맞춰 주었으니까.
그리고 주인은 즐겁게 식사를 한 예르넨이 값을 치르려고 하자 어떤 값도 받지 않겠다고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곧 아이를 출산한다고, 값을 치르는 대신에 그 아이를 축복해 달라고. 마치 예르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저자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예르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기억이 온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펑퍼짐했던 전과 달리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예르넨에게는 어쩐지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저자가 분명 그 음식점의 주인이라는.
테네스는 감옥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바실에게 눈짓을 했다.
“저 사람의 이야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합니다.”
“유명… 하다고?”
“중앙광장에서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던 주인장이었는데,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은 뒤 저리 정신 줄을 놓고 가족의 옷가지를 품에 안은 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왜….”
예르넨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 질문했다.
“왜 아내와 아들을 잃었지?”
“지금은 그런 시대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귀족 나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저희 같은 평민들의 목숨은 그저 우습게 사라지는 그런 시대. 물론 저치의 가족을 죽인 건… 귀족 나리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럼 누구지?”
예르넨의 눈치를 살피던 바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황족이었지요.”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그의 얼굴에 옅게 남은 미소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감돌았다.
“하.”
예르넨은 어이가 없단 얼굴을 하며 물었다.
“누가 그랬지? 일리안? 아니면, 헤리엇?”
“그것이 아니라… 방계의 분들이시라고 들었습니다.”
“…….”
“그분들께서 저희 같은 평민 놈들을 핍박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공공연한 비밀이라니. 예르넨으로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예르넨은 어린 시절, 그에게 밝고 싹싹하게 다가왔던 방계의 친척들을 떠올렸다. 예르넨이 보아 온 그들은 결코 누군가를 죽일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실은 씁쓸해하면서도 어딘가 무감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비극은 흔한 일이라는 듯이.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예?”
예르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가만히 있었냐는 것이다. 그런 일을 당했으면 황실에 탄원을 했으면 됐을 것이다. 사실을 전했다면 분명….”
예르넨은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구겼다. 과연 누가 저들의 소리를 들어주기는 했을까? 그보다… 탄원을 할 수는 있었을까.
이 땅의 사람들은 신의 피를 지닌 이들을 신성히 여겼고, 그들의 모든 악업은 쉽게 덮이곤 했다.
“글쎄요. 어렵지 않을까요. 저희 같은 이들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도 이리 전하의 얼굴 한번 뵈는 것조차도 어려우니 말입니다. 그런 말씀을 드리기는 더더욱 힘든 법이고요.”
그렇게 말한 바실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전하. 황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예르넨은 그 말을 듣고는 시선을 돌렸다. 바실의 말대로 저 멀리에서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와 기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거친 움직임에 광장의 사람들은 혹여나 마차에 치이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대로변을 비워 주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예르넨의 눈길을 끌었다.
“전하를 뵙고 이렇게 말을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바실은 그리 말하며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고 녹이 슨 철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내, 마차가 철창문의 바로 앞에 섰다.
예르넨은 마차의 문이 열리고 우아하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오는 여인을 바라봤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장신구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새까만 상복을 입은 여인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예르넨….”
세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누이였다.
“…..”
세실을 본 예르넨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 몸은 쉽게 중심을 잡지 못했고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테네스가 그런 예르넨을 안아서 들어 올렸고 예르넨은 망토를 더욱 깊숙이 뒤집어썼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고,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광장의 시궁창 냄새가 아닌 포근한 냄새가 주변을 감쌌다.
천천히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고 예르넨의 몸은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사치스럽고 우아한 것들에 둘러싸이게 된 뒤에야 예르넨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 * *
“다 나가.”
“하, 하지만.”
“나가란 말 못 들었어?”
예민하게 치켜뜬 눈이 좌중을 훑었다. 그런 예르넨을 본 시동들은 우물쭈물한 얼굴을 하고는 테네스와 세실에게 눈짓을 했다.
어딜 봐도 예르넨의 명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였다. 그 모습이 예민할 대로 예민한 상태인 예르넨의 심기를 거슬렀다.
“뺨이라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고 꺼지겠다는 거야?”
예르넨의 입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런 예르넨의 기색을 읽은 시동들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세실은 그제야 그들에게 눈짓을 했다. 시동들은 눈짓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예르넨.”
그리고 셋밖에 남지 않은 방에서 세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여전히 어린 시절 화가 잔뜩 난 후에 그랬던 것처럼 세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 많이 피곤하구나. 그럼 우선 씻고 나오렴. 씻은 다음에, 누이랑 얘기를… 하자.”
그리 말을 걸어도 예르넨은 돌아보지조차 않았고 세실은 그런 예르넨의 뒷모습을 보고 손을 건네려다 꽉 말아 쥐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조금 이따 보자.”
그랬기에 세실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너도 나가.”
예르넨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테네스를 노려봤다.
“…….”
그러나 테네스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예르넨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감춰진 걱정과 염려, 고집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예르넨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참의 눈 씨름 끝에 테네스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욕실까지 이동하실 수 있도록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겨우 사람들을 떼어 놓고 혼자가 된 예르넨은 천천히 욕실의 중앙을 향해 걸어가서는 망토를 벗었다. 망토가 벗겨지자 그제야 잿빛이 감도는 금발과 제복을 걸친 상체, 그 아래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제복마저 풀어 내렸을 땐…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몸이 드러났다.
“…….”
예르넨은 씻으라고 준비해 놓은 거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서 몸을 씻어 내렸다. 제 손으로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물건들이라 서툴렀지만 몇 번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듯했다.
얼마 가지 않아 몸은 깨끗하게 씻겨 내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하얗게 드러난 몸 위에 새겨진 상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거울이 그 모습을 여실히 비췄다.
예르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힘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 손을 다시 말아 쥐고는 몸을 닦아 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렇게 새하얀 몸의 여기저기에 붉은 기가 남을 때까지 힘을 주어 닦아 내리던 예르넨은 결국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의 여기저기가 거품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 하나 닦이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낡고 지저분해진 것은 아무리 닦아 낸대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니까.
“…….”
예르넨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눈가에 뜨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젠장.’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늘 황성 안에 머물렀지만, 이 궁으로 돌아온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그대로인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달라진 것은 예르넨, 그 자신이었다.
* * *
어색하게 앉아 있던 세실이 몸을 일으키고는 예르넨을 맞이했다.
“식사를… 못했다고 들어서 준비했어.”
“…….”
예르넨의 눈이 테이블 위를 훑었다.
고상한 자수가 놓인 테이블 보 위에는 그동안 예르넨이 맛볼 수 없었던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달콤한 소스를 양껏 발라 표면을 노릇하게 구운 닭요리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폭신한 흰 빵도, 여린 양의 뒷다리를 잡내 없이 구워 새우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스테이크도.
모두 예르넨이 좋아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감히 떠올리지조차 못했던 것들이기도 했다.
위가 조여들어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르넨은 무턱대고 음식에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불편한 오른팔을 대신해 왼손을 들어 제 앞에 놓인 스튜를 뜨고는 아주 조심스레 입에 갖다 댈 뿐이었다. 그리고 몇 술 뜨지 않고는 숟가락을 내렸다.
“왜 더 먹지 않니…?”
세실의 조심스레 물었지만, 예르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예르넨에게 눈앞에 놓은 음식들은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오두막에 있을 적, 식료품은 때때로 느리게 주어졌다. 그랬기에 며칠을 내리 굶어야 하는 날들도 간혹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식사를 거른 뒤 식료품이 전달되었던 첫날, 예르넨은 무작정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약은커녕 돌봐 줄 이 하나 없는 외딴 섬에서 크게 앓았다.
그런 경험이 몇 번이고 계속된 뒤에야 예르넨은 깨우쳤다. 오랫동안 굶은 뒤 처음으로 식사를 할 때는 부드러운 음식을 아주 조금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고작 스튜를 몇 술 떴을 뿐임에도 위가 끊어질 것처럼 조여 왔다. 그랬기에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식탐을 부렸다가는 크게 고생하게 될 거라는 것을.
하지만 세실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자존심이었다.
“왜.”
“으, 응?”
“할 말 있다면서.”
예르넨이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차가운 목소리에 말문이 막힌 세실은 한참이나 테이블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골랐다. 예르넨은 그런 세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목을 조여오는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예르넨.”
세실은 결심을 했다는 듯이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예르넨에게 물었다.
“네가… 헤리엇과 일리안을 죽였다는 말이….”
“…….”
“사실이니…?”
예르넨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
그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떨려 오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누가 그래?”
예르넨은 그제야 세실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잔주름이 곳곳에 새겨진 얼굴을 한 귀부인은 목 끝까지 밀려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기사들이, 그랬다고…. 알버트 공작이, 내게 말하더구나.”
“아니. 안 했어.”
“…!”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믿기는 할 거야?”
예르넨의 입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흑….”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믿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런 세실을 바라보며, 예르넨은 무언가 속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듯이 따지고 싶었다.
그 섬에 있던 것을 알고 있었냐고. 그자들이, 뱀 같은 소리를 속삭인 그 빌어먹을 놈들이 지난 세월 동안 내게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냐고…! 대체 뭘 했던 거냐고. 왜 오지 않았냐고. 한 번쯤 나에 대해서, 찾아보기는 했냐고.
하지만 예르넨은 그 모든 것을 삼켜 내기로 했다.
“누이.”
“으, 응.”
세실은 예르넨의 부름에 눈물이 흥건한 볼을 닦아 내고는 얼굴을 들었다. 고생이라곤 생전 해 본 적도 없을 텐데 새빨간 눈가를 닦아 내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고단해 보였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런 세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 예르넨이 나아가야 하는 길에 세실은 그저 방해물이었으니까.
“황제가 되고 싶어?”
“황… 제…?”
“황위를 비워 둘 수는 없고… 헤리엇에게는 자식이 없잖아?”
세실은 황망한 얼굴로 예르넨을 바라봤다.
“예르넨…!”
책망이 담겨있는 어조였다.
“부황에겐 네 명의 자식이 있었지. 헤리엇, 일리안, 누이 그리고… 나. 그런데 이제 남은 건 누이와 나. 둘 뿐이네.”
세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고 그런 세실을 바라보며 예르넨은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황제 자리를 내게 넘겨.”
“예르넨!”
비명 같은 세실의 음성이 만찬장을 울렸다.
“…….”
다시 배가 조여 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고통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예르넨을 괴롭혀 왔던, 배 속 깊은 곳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물러날 수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네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세실 포트넘 헬리오. 그렇게 심약한 정신으로 뭘 하겠다고.”
“예르넨…! 예르넨… 아기… 우리 아기… 흐윽…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세실은 가슴께를 부여잡고는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는 얼굴을 하며 서럽게 울었다.
“테네스.”
예르넨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네스를 불렀다.
“가져와.”
“예.”
테네스는 예르넨의 앞에 종이와 만년필, 그리고 잉크가 담긴 유리 볼과 작은 단도를 내려놓았다. 그 도구들이 꺼내지자마자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목격자가 되어 줄 이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모두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예르넨은 망설임 없이 단도를 들고는 제 손을 그었다.
살이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지며 유리 볼 안으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예르넨이 손을 뻗자 테네스가 새하얀 천으로 환부를 감싸왔다.
예르넨은 천을 받아들고는 손을 지혈했고 새하얀 천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받아 적어.”
테네스는 예르넨의 말이 끝나자마자 만년필을 들고는 잉크를 찍어냈다. 얇은 금속으로 된 촉의 끝에 검붉은 잉크가 고였다.
“뭐가 좋을까.”
예르넨은 등받이에 몸을 걸치고 고심하는 척 말을 골랐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한들 결과는 같았지만, 예르넨은 괜스레 뜸을 들였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세실 포트넘 헬리오는 헬리오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한다.”
“…!”
만찬장에 있는 모두가 경악이 서린 얼굴을 하고는 예르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르넨 헬리오를 헬리오 제국의 29대 황제로 추대하는데 성심을 다한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누이가 황위를 넘기는 데에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르넨의 얼굴이 만찬장을 들어온 직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예르넨은 테네스가 써 내려간 세실의 황위 계승권 포기 각서를 팔랑이며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린 뒤 펜을 내려놓고는 세실을 향해 턱을 치들었다.
“갖다 줘.”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예, 전하.”
하지만 테네스는 그런 예르넨의 앞에 놓인 종이와 펜을 들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눈이 초조하게 테네스의 손에 들린 종이와 세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
세실은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한 채로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며 글을 읽어 내렸다.
황위 계승권 포기 각서.
한참을 눈물을 흘린 뒤 지끈거리는 머리는 제대로 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이게. 지금 벌어진 일이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예….”
세실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겨우 입을 열었지만, 예르넨이 한발 빨랐다.
“세실”
“으, 응.”
“내 열 번째 생일에, 왜 안 왔어? 모후가 말했을 거잖아.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세실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주저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 해엔 왜 안 왔어? 그다음 해엔?”
세실은 여전히 대답 없이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내 열 다섯 번째 생일에는?”
예르넨은 울분을 삼켜가며 말했다.
“내 열 다섯 번째 생일에 헤리엇이, 내가 올해는 꼭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잖아. 어느 누구도 저택으로의 방문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 누이가 유일하게 와 주던 게 내 생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날만 기다리면서…! 와 달라고 했잖아. 그날 와 달라고 한 걸 기억은 해?”
그제야 세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르넨, 내가… 오랫동안 정신이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네 조카가 많이, 아프잖아.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아니, 세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기억하고 있냐고.”
“기억, 그래. 기억해. 전부 기억은 하고 있어. 네가… 그러니까 열다섯 번째 생일에, 올해는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헤리엇이… 그랬던 것 같아.”
“거짓말.”
“응…?”
“웃기지 마, 세실.”
“…….”
“그간 단 한 번도 나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었잖아.”
세실의 얼굴에 황망한 표정이 점점이 번져 나갔다.
“예르넨, 나는… 나는….”
세실의 눈매가 가득 일그러져 갔고,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런 세실이 감정을 삭이며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각서에 서명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애새끼나 붙들고 살아, 누이. 누이는 사실 상관없잖아? 헤리엇이 황위에 있던, 내가 있던. 누이가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세실의 두 눈두덩이에는 지독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예르넨의 말 중에서 그 어떤 것도 틀린 게 없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피곤했다. 너무 피로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두 동생의 부고도, 앙심을 가득 품은 막냇동생의 시선도 모두 오랜 기간 외부와의 교류를 회피한 채 저택에서만 머무르던 그녀에게는 지독한 것들이었다.
세실은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펜을 쥐었다.
예르넨의 피가 섞여 든 잉크였다.
황족인 그녀는 이 펜으로 서명을 하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실은 끝내 서명란을 채웠다.
그저, 모두 다 내려놓고 싶었다.
* * *
만찬장을 나서는 예르넨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전과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완벽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약간의 불쾌함과 호기심이 가득하던 시선 위로 걱정과 두려움, 순종이 아로새겨진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국 내에서 황위는 철저하게 직계 황족에게만 전해져 내려왔다. 방계로 황위가 넘어가는 것은 제국 법상 직계의 황족이 자손을 보지 못하고 전부 사망한 경우에만 해당했다. 그러니 세실이 황위 계승을 포기한 이상 예르넨 이외에는 그 누구도 황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
설령, 예르넨이 자신의 두 형을 죽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자신에게 겨누어져 온 의혹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르넨은 알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황위 계승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줄이 위험하다는 것을.
하루아침에 젊고 건강하던 황제가 죽었다. 그 황제가 죽은 것은 고작 이틀 전이었고, 아직 국장이 치러지고 있었다.
사자의 비호 아래 날뛰던 여우들은 우왕좌왕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 해야 할지에 대한 제대로 된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죽음이라는 건 그들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청천벽력 같은 일일 테니까.
사실 헤리엇이 죽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스페어나 마찬가지인 선황의 두 번째 아들, 일리안마저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제 막 세실이 황위에 앉게 되었을 때 자신들에게 생겨날 손실에 대해서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두 황자와는 달리 세실의 기반은 그녀의 외가와 포트넘 공작가로 대표되는 남부였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도 나쁘진 않았다.
동부의 귀족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통 있는 명문가가 즐비한 남부의 귀족들에게는 우호적이었고 세실은 성정이 유약하니 오히려 헤리엇보다도 쉽게 쥐고 흔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손익을 막 따지기 시작한 이 시점에 세실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예르넨이었다.
그들이 남창처럼 굴리고 능욕했던, 결코 황위에 오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 막내 황자.
게다가 현재 예르넨의 곁에서 그의 수족이 되어 주고 있는 건 서부 유력 가문인 트리지아 후작가였고, 예르넨의 외가는 그들이 마구잡이로 짓밟아 놓은 마리아쥬 후작가였다.
피의 복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혼란이 잠재워진다면 그들이 택할 패는 단 하나뿐이다.
예르넨의 목숨을 취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을 만한 방계의 황족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는 것.
황제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즉위식을 늦출 것이고 끊임없이 예르넨의 명줄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예르넨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아야만 했다. 예르넨은 그를 위해 가장 먼저 손에 넣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군권이었다.
“테네스.”
“예, 전하.”
“신혈의 기사들은 어떻지?”
테네스는 예르넨이 하는 말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을 띄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었다. 헤리엇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면 무척이나 유감인 상황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혈의 기사. 그들의 존재 이유를 떠올린다면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가설이다.
결국, 기사라는 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신혈의 기사들에게 주어진 땅은 대체로 변경과 그런 변경의 배후에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부와 북부의 영지라는 소리다. 그간 헤리엇의 치세 하에 박살이 난 바로 그 서부와 북부 말이다.
“헤리엇 님께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던 이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연락해. 즉위식 전에 내가 보자고 했다고.”
예르넨은 장담했다. 그들 모두가 연락에 응할 거라고.
혼인을 하지도 않은 데다가 외가의 기반도 없는 황자라니. 마음껏 손에 쥐고 휘두르고 싶은 요소들뿐 아닌가.
비록 그 대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 * *
예르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의 공간을 훑어보았다. 그 사이 시립 해 있는 시동의 머릿수가 한참이나 늘어 있었다. 권력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예르넨은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고는 말했다.
“다 나가.”
“예, 예…?”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나가란 말 안 들려?!”
한껏 예민해진 목소리가 나왔다. 눈에 익은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 섞여 있는 간자를 골라낼 수도 없다는 소리다.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각오가 있는 놈이 아닌 이상 앞으로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마.”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수록 사용인들의 얼굴은 점점 파래져만 갔다.
그간 어디에 갔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기에 예르넨의 존재는 황성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잊혀져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황성에는 예르넨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남아 있었고, 덕분에 모두에게는 그 잠깐 사이에 예르넨에 대한 정보가 알음알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막내 황자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심지어 귀족일지라도 뺨을 쳤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인성이 더러워졌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모두는 심계가 사나워 보이는 예르넨을 보고 잔뜩 겁에 질려서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낯선 이들이 방을 나섬과 동시에 예르넨은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동안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건지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테네스가 곧바로 그런 예르넨을 부축했다.
“전하.”
“…침대로 갈래.”
배 속의 고통은 이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해졌지만, 결코 내색할 수 없었다. 최대한 멀쩡하고 건재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사방이 적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누구의 귀에 무슨 소리가 어떻게 들어갈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누이고 조금 긴장이 풀리는 듯하자 통증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내 통증이 신경을 찌르는 듯이 압박을 해 오자 주변이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누군가 예르넨의 크라바트를 풀어 내렸다.
“…!”
짝!
예르넨의 손이 제 옷깃을 감싸 쥐는 손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식은땀이 흥건한 얼굴을 들고 상대를 바라봤다. 테네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예르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예르넨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건 그냥….”
무어라 변명을 할 만한 말조차 읊지 못한 예르넨은 서툰 손짓으로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테네스에게 만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화한 환경에 놓인 예르넨은 감정을 쉽게 조절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으니, 옷에는 손대지 마.”
테네스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예르넨을 살폈다. 낯빛이 심하게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르넨의 병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아직도 배가 많이 아프신 겁니까.”
목을 조이는 천 조각을 풀어낸 예르넨은 다시 연약한 상처 부위를 들키지 않으려는 소동물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을… 부를 수는 없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일이 있고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황실 전담 주치의는 노렌츠였다. 그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의원 놈 말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전하.”
“…….”
하지만 그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내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예르넨도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기는 해야 했다.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테네스가 최후의 통첩을 하듯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은 주저했다.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아윽….”
예르넨은 끔찍이 밀려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침대 시트를 잔뜩 움켜쥐었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의 끝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새하얘져 있었다.
“…!”
그때 무언가가 아래에서 왈칵거리며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하으윽….”
하지만 예르넨은 자신의 아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혹여나 신음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걱정하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박고 고통 어린 신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때, 갑자기 테네스가 예르넨의 허리춤에 손을 대고는 막무가내로 바지를 벗기려고 들었다. 예르넨은 놀란 얼굴로 그런 테네스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예르넨이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위협하듯이 테네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예르넨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테네스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테네스의 시선이 아래, 정확히 침대 시트를 향하고 있었다.
“당장 신관을 불러와야만 합니다.”
그 짓씹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예르넨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제야 테네스가 어째서 옷에 손을 대었는지를 알게 됐다.
새하얀 시트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똑똑.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네스가 문을 조금 열고는 밖을 살폈다.
“트, 트리지아 경. 말씀하셨던 사제님을 모셔왔습니다.”
시동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곁에는 금사로 자수가 새겨진 새하얀 로브를 입은 사제가 한 명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로브에 새겨진 자수의 화려함을 본다면 고위 사제일 게 분명했다.
“수고했다.”
테네스는 그리 말하며 문을 조금 더 열어 사제를 안으로 들였다.
“따라와라.”
그리 말한 테네스는 천천히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신관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소리에 예르넨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지독한 고통을 견뎌 내고 있는 눈은 이제 초점조차 흐릿한 지경에 이르렀다.
예르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테네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유하도록.”
신관은 침대 옆에 앉아 예르넨의 팔을 잡았다. 이내 예르넨의 손을 타고 하얀빛이 아른거리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
세포 마디 마디가 뒤틀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아 예르넨은 재빨리 손을 뿌리쳤다.
“아흐윽…!”
“전하!”
테네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예르넨을 다급하게 안아 들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거친 숨을 내뱉던 예르넨은 힘겹게 기침을 하더니 이내 피를 게워 냈다.
“허억, 헉.”
검붉은 피가 묻은 새하얀 볼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이게 대체…!”
테네스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예르넨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예르넨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만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신관이 사용한 것은 분명 신성력이었다. 그리고 신성력이 낫지 못하게 하는 병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어떤 병자도 신성력이 몸에 깃들면 가장 건강할 때의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예르넨의 상태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예르넨을 끌어안은 테네스가 신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신관이 맞긴 한 건가? 어째서 전하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신 거지?”
테네스와 테네스의 품에 안긴 예르넨을 바라보던 신관은 그때까지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 땅에 나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신관은 아마 없을 거다.”
“…!”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예르넨의 눈은 서서히 커져 갔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 목소리는 호수 한가운데의 오두막에서, 예르넨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이들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예르넨은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눈을 하고는 신관을 바라봤고 그제야 신관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은빛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 귀족적인 차가운 얼굴을 가진 그는 역시나 예르넨이 예상했던 인물이 맞았다.
“엘딘… 페트라…!”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엘딘이 아닙니다, 전하.”
색색 밭은 숨을 내쉬는 예르넨의 공격적인 얼굴에 점점 혼란이 섞여갔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다른 이였다면 믿지 않았을 테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정말로’ 엘딘 페트라가 아닐 수도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든… 페트라인가.”
그에게는 쌍둥이 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 말한 이든은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는 신에게 순종하는 어린 신도처럼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이든은 종종 부황에게 이리 손을 내밀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신의 심부름꾼으로서 신의 자손인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배의 손짓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청에서 예르넨을 정식으로 다음 대 황제로 인정했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검붉은 피에 젖은 새하얀 손이 내밀어졌고, 이든은 그 위에 키스를 했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이었지만 어딘가 경건하기보다는 귀족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예르넨의 손을 놓아준 이든은 예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풀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무리 예르넨을 새로운 황제로 인정했다고는 하나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예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를 고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엘딘의 고해를 들었습니다, 전하.”
이든은 지금 자신이 속한 가문의 수장, 페트라 후작이 저지른 짓에 대한 사죄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일전에 신께서 제게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선황 헤리엇과 그의 동생 일리안에게 부정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
“그랬기에 신께서는 다음 대 황제로 당신을 점지하셨습니다.”
“뭐…?”
이든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이후 저는 전하께서 계신 곳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였습니다. 심지어 저 먼 북부까지 사람을 보냈으나… 전하께서 계신 곳을 전혀 짚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예르넨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리도 가까이에 계셨다는 것도, 엘딘이 전하께 그런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든의 눈매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신의 피를 모시는 것은 성직자의 가장 큰 의무. 의무를 소홀히 한 이상 어떤 책임을 물으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 고통스럽기라도 한 것 같은 음성이었다. 예르넨은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연기라면, 대 극단의 주연 배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라고.
“엘딘 페트라의 사지를 잘라 매음굴에 던져 놓으라고 한대도, 그렇게 할 것이냐.”
“…그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폐하께서 엘딘의 죄를 사해 주신다면, 몇 번이라도. 하지만….”
그리 말한 이든은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며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남은 생의 모든 것을 바쳐 녀석이 저지른 악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으니 녀석에게는, 조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
예르넨은 순종적인 자세로 잘못을 고하는 이든을 예리한 눈으로 살폈다. 하지만, 어느 한군데서도 흠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과연, 믿어도 될까.
아무리 교황이라곤 해도 이든은 딱히 성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꺼림칙한 면이 많았다. 신의 말을 듣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
하지만 그럼에도 이든은 여전히…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부정한 짓을 저질렀으면 그에게 신벌이 내려지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그가 아직 그만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 번쯤은 그의 결백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바로 효수할 테지만.
“네가 한 말마따나 이 대륙에 너를 능가할 신성력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텐데 왜 내 몸에 신성력이 들지 않은 거지?”
이든은 생각해 둔 바가 있는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답을 했다.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이들에 관한 사례를 일전에 접한 적은 있으나…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의심 가는 바에 대해 말해 봐라.”
“그것은… 마물의 피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뭐?”
그리고 이든이 꺼낸 말은 무척이나 뜻밖의 것이었다.
“북부를 정벌하던 초기에 제국군은 아직 부족 집단을 벗어나지 못한 조약한 문명을 가진 이들과 접촉 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부족을 제국에 복속시키고자 그들에게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그들의 상처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치유받은 이들 중 일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그게 그 마물의 피에 중독되었다는 이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사례가 전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북부는 여전히 마물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들이다. 그리고 기사들은 제국민의 안전을 위해 마물들을 사냥하지. 하지만 그중에서 마물의 피에 중독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럴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마물의 피에 중독이 되진 않으니까요.”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 북부의 부족이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그들은 마물을 사냥하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사냥꾼은 죽은 마물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했으며… 이후 자신의 반려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뭐?”
충격적일 정도로 괴악한 풍습에 예르넨은 할말을 잃었다.
“신성력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모두 기혼자였습니다.”
“…….”
“교황청에서는 마물의 피가 신성력과 충돌을 일으켰고 사람의 몸이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해 해를 입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지?”
“신성력에 노출된 몸은 안에서부터 천천히 괴사되어갔지만, 신성력에 노출이 되지 않자 서서히 회복해 갔고 오랜 기간이 지난 뒤에는 별달리 병세가 심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따지면 신성력에 노출이 되는 한 꾸준히 몸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말이다.
“빌어먹을.”
예르넨의 피에는 신성력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앞으로 나아지기는커녕 속부터 점점 몸이 썩어 들어갈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물의 피에 중독이 되었다니. 그럴 만한 일이 벌어진 적이 전혀 없었다.
“…아닐 가능성은?”
이든의 시선이 침대의 중앙,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자리를 향했다.
“이외에는 신성력에 노출된 직후 검은 피를 토혈하는 경우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예르넨은 축축한 땀이 묻어나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저 말이 진실이라면.
“만약 신의 피를 이은 자가 마물의 피에 중독되었다면… 얼마나 살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이든은 천천히 수를 셈했다. 그리고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희망적으로 본다 한들 2년을 넘길 수 없으실 겁니다.”
* * *
겨울의 낮은 짧았다. 그랬기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는 어느덧 노란빛이 섞여 있었다.
이든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들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예르넨은 혼란했고 부정했으나… 결국 마침내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무리 부정해 봤자, 그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나았다.
“…이게 다인가?”
“예, 전하.”
예르넨은 서재의 책상에 앉아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주인에게 도달한 편지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오래되어 빛이 바래진 편지부터 가장 최근의 것까지,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섬에 있었던 긴 세월 동안 글을 읽는 방법을 잊었기에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얼마 없었지만, 예르넨은 그 익숙한 필체로 쓰인 서른여 장의 편지를 보고, 또 보았다.
“…하.”
예르넨은 편지지를 내려놓고, 그 위에 말린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미친놈.’
전쟁터에서 무슨 꽃이란 말인가. 그것도 부모를 죽이고 가문을 멸문시켰다고 여겨지는 대상한테 말이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놈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려면 이런 지루한 시간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의 과거에 부황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부황은 늘 예르넨에게 말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지루한 시간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부황은 수도 없이 말했다.
그때 황제가 되겠다고 말했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훌륭한 황제가 되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수많은 이들에게 닥친 비극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내 책임이야.’
황족의 몸에는 신의 피가 흐른다. 그리하여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부와 명예, 영광이 두 손에 쥐어진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 없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황족에게는 이 땅에 살아가는 그들의 백성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것이 법도이자… 도리였다. 그리고 예르넨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었다.
“가자.”
“예, 전하.”
그러니 이제 책임을 다해야 할 시간이다.
* * *
“그래서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사람인데?”
저스틴이 제 로브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 더러운 로브 좀 벗고 들어올 수는 없었던 건가…!”
붉은 머리를 한 커다란 덩치의 기사, 에런 파르타슈가 폴폴 날리는 먼지가 끔찍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저스틴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을 떠는 붉은 머리의 기사를 흘겨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새하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플뢰르 영지의 주인, 이리언이었다.
“전하? 글쎄… 잘 모르겠구나. 이만한 아이일 적의 모습만 보았으니까. 어린아이는 본디 부쩍 자라는 법이 아니니. 어떻게 크셨을지….”
“아니, 할멈. 그래서 그 어릴 때 보았던 꼬맹이는 어땠는데요.”
그러나 저스틴의 물음에도 이리언은 그저 잔잔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고 저스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웃음을 지그시 바라봤다.
‘웃음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건가?’
만약 정말 그런 의미라면…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저스틴은 꽤나 걱정하고 있었다. 새로운 황제에 대한 소문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색에 미쳐 제 두 형을 죽였다고 하지를 않나. 제 약혼자가 북부 출신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문을 멸문하고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지를 않나. 그 목석같은 테네스 트리지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지를 않나.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제대로 된 놈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저스틴이 머릿속에서 새 황제에 대한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고 있는 사이, 에런으로부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건네졌다.
“흥, 싸가지 없는 애새끼라던데.”
“싸가지 없다고…?”
그리고 그 말에 저스틴의 얼굴은 금세 팍 구겨지고 말았다.
평민 출신의 그는 떠돌이 정령사인 스승을 만나 함께 전 대륙을 유람했다. 그리고 수많은 귀족 나부랭이들을 만나왔다. 흔히 싸가지 없는 애새끼라고 통칭되는 그 부류들 말이다. 그놈들을 상대하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후에 스승으로부터 신혈의 기사직을 물려받았고 지금에 와서는 황가의 기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 때문에 그는 여전히 ‘싸가지 없는 애새끼’들을 볼 때면 치가 떨려 왔다.
물론, 지금은 죽어서 선황이 되어 버린 음흉한 개새끼 부류 역시 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나는 음흉한 개새끼에 하나는 싸가지 없는 애새끼라니. 신의 피를 이었다는 족속들인데 어째 하나같이 쓰레기밖에 없는지.
그간 수도에 머물며 황족의 실태를 알게 된 저스틴은 이미 황족에 대한 경외심 같은 건 모두 던져 버린 뒤였다.
테네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전까지 그는 헤리엇의 곁을 보필하며 위대하던 제국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무력하게 명을 따르는 것뿐.
그랬기에 저스틴은 이제 황가라면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그저 누가 황위에 오르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맹세를 끝내는 대로 이 땅을 훌쩍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제국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그 안에서 그와 같은 평민들이 점점 곤궁해지며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진짜 속마음을 꺼내 보자면 그는 조금쯤,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 자신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인간이 고작 핏줄 하나 타고났다고 떠받들어지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흔들어 대며 멍청한 짓을 하는 꼴을 보는 것에 말이다.
그랬기에 기대가 없었다. 누가 그 자리에 서든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네스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잿빛이 섞인 금발 머리를 한 황족을 보았을 때 그는 조금, 감탄했다.
‘미쳤네.’
조막만 한 얼굴 안에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 이목구비들은 과연 신의 자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섬세하게 조형되어 있었다.
저스틴은 맹세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허리를 곧게 펴고 걸음을 옮기는 그 ‘새’ 황제는 지금껏 그가 보아온 그 어떤 황족들보다도 우아했다.
이윽고 그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을 때 저스틴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그는 생각했다. 비록 충성을 바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 황제랍시고 나온 놈, 저놈의 외모만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이들보다도 황족답다고.
허나 그 새 황제는 단박에 그의 기대감을 무참히 뭉개 버리는 짓을 했다. 새 황제가 그 유명하다는 성깔을 가지고 인성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 닫아.”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테네스 트리지아를 시동처럼 부리며 문을 닫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저스틴은 생각했다.
‘역시 황족은 황족이지.’
그놈이나 이놈이나. 다 똑같았다. 괜한 생각이었다. 역시 새로운 황제라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피가 어디 갈까.
그때까지만 해도 저스틴은 생각했다. 새 황제 역시 선황과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라고.
테네스가 문을 닫고, 외부로 말을 옮겨 대는 이들의 귀가 차단된 것을 확인한 예르넨은 제 앞에 도열해 있는 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모두 일곱. 한 명도 빠짐없이 부름에 응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훑어본 예르넨은 느슨하게 손깍지를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하나 그대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게 있다.”
“무엇입니까?”
예르넨의 시선이 차분한 물음을 건넨 상대가 있는 쪽을 살폈다. 플뢰르 변경백, 이리언이었다.
“나는 2년 안에 죽는다.”
그리고, 예르넨은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이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독살을 당하거나 자객에 의해 죽을지도 모르지. 2년을 채우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말일 테니 그럴 법도 하지.
“헤리엇이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선대 황제들이 일궈 놓은 제국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의 피라는 특권의식에 젖은 황족들과 일부의 귀족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가문을 멸문시켰고 아귀다툼을 하며 백성들을 수탈했지. 그랬기에 모두는 이 위기를 타개해 줄 성군을 바랬을 것이다.”
평범한 제안은 그저 평범한 반응을 이끌어 낼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겐 이 나라를 올바르게 돌볼 능력이 없다.”
예르넨은 이들 모두를 제 수족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그저 평범히 연설하며 제 사람이 되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예르넨은 그들에게 충격을 줄 셈이었다.
“나는 열네 살부터 갇혀 살았기에 배움이 짧고 현재 제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반도, 뒷받침해 주는 외가도 없다. 거기다가 내겐 그 모든 것을 차근히 얻을 시간조차 부족하지. 그러니 나는 성군이 되긴 힘들다. 허나….”
예르넨은 느슨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폭군은 될 수 있지.”
“…?”
“내게 붙은 소문들은 알고 있다. 별의별 게 다 있더군. 색욕에 미쳐 밤마다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인다던가, 광증이 도져 오랜 기간 성에 유폐되어 있었다던가, 헤리엇의 목을 쳤다던가. 하나하나 반박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쉬운 길을 내버려 두고 말이야.”
당황스러운 얼굴들을 바라보며 예르넨은 말을 이었다.
“기록을 전해 들었다. 이미 백성들의 소득 중 반 이상을 귀족들이 세금으로 떼가고 있다고. 또 그 남은 반의반은 고리대로 나가고 있다고. 성군이라면 귀족들을 설득하고 제도를 바꾸고 나라의 방향을 점진적으로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겠지만… 폭군은 그럴 필요가 없지.”
예르넨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즉위와 함께 그들 절반의 목을 치고 시작할 것이다.”
“…?!”
“그리고 그 즉위식을 시작으로 이 땅에 남은 모든 신의 핏줄과 썩은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할 것이다. 그리하여 엉망이 된 이 땅을 바로잡고 모든 것을 짊어진 뒤에는.”
예르넨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서서히 진지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
그와 동시에 테네스가 예르넨에게 계약서를 건네어 왔다. 예르넨은 계약서를 든 채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내게 충성을 바게 된다면 그대들은 나를 죽일 수 없고, 충실한 종이 되어 내 의지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심장이 멎게 되는 순간, 모든 비밀을 짊어지고 함께 죽을 것이다.”
좌중 모두가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르넨이 꺼내 든 패는 그만큼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황제의 서거와 함께 신혈의 기사들이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그 행위는 대를 거듭할수록 서서히 약해져 갔고 최근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예르넨은 지금, 그 시절처럼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나를 따르지 않겠다는 이가 나온다면 목을 베겠다. 하지만 그대들 또한 마찬가지로 아무런 힘도 없는 나를 죽일 수 있겠지. 그러니 택해라.”
“…….”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지, 아니면 폭군을 모셨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지.”
하지만 예르넨은 그들에게 선택을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예르넨이 가야 할 길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받지 못할 외나무다리였으니까.
처음 입을 연 것은 이리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전하를 뵈고 오랜 기간동안 뵙지 못했었지요. 그간 훌륭하게 성장하셨습니다.”
그녀는 어딘가 추억과 회한이 담긴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플뢰르 영지의 주인, 이리언 플뢰르. 폐하의 기사가 되어 기꺼이 이 한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이리언을 필두로 한 명, 한 명 예르넨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했다.
“유리스 카멜리언, 이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폐하의 충실한 기사로서 살아가겠습니다.”
“에런 파르타슈, 폐하의 기사로서 가시는 길에 늘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예르넨은 턱을 삐딱하게 기댄 채 한 명 남은 기사를 바라봤다. 그자는 먼지가 잔뜩 묻은 새까만 로브를 쓰고 있었다. 그 복장만으로도 예르넨은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스틴. 유일한 평민 출신 기사였다.
“네가 마지막이군. 어떻게 할 거지?”
저스틴은 볼멘소리하며 말했다.
“저스틴, 기꺼이 폐하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썩 달갑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마 분위기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해서 충성을 맹세한 것일 테지.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라는 걸 본인 스스로도 알 것이다. 맹세란 그런 것이니.
예르넨은 다시 제 손에 쥐어져 있던 계약서를 테네스에게 건넸고, 테네스는 그 계약서를 모든 기사에게 한 부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살핀 저스틴의 눈에 의아함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예르넨이 냉소하며 말했다.
“앞길이 창창한 제국의 인재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다니. 내가 진정으로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보아하니 그 말을 온전한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 너뿐인 것 같군, 저스틴.”
설마 자신이 정말 그들에게 목숨을 바치기를 강요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저 충성심을 본 것뿐이었다.
당장 내일의 생조차 장담할 수 없는데 그 하나의 목숨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위를 지닌 이들 모두를 함께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르넨은 삐딱하게 턱을 괴고는 저스틴을 바라봤다.
“충성을 바치라고 한들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던 인간에게 하루아침에 그런 마음이 자라나진 않겠지. 알고 있다.”
누군들 그럴 것이다. 그리고 예르넨은 이미 그들이 그럴 거라고 가정한 채 설계를 끝마친 후였다.
그리 말하는 예르넨을 향해 복잡한 시선들이 건네어져 왔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 눈에 담긴 감정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음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제때에 명을 따르기만 하도록.”
신혈의 맹세를 하게 되면 이들은 결코 예르넨의 목숨을 노릴 수 없고, 그가 살아 있는 한 어떤 명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쓸모 있는 도구가 된다는 소리다.
예르넨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