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7/19)

CHAPTER 5

새하얀 대리석을 이용해 축조한 웅장하고 장엄한 대 예배당은 제국민들의 자랑이었다. 색유리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빛은 새하얀 공간에 온기를 더해 주었고 섬세하게 조각된 신상은 성스러움을 더했다.

하지만 오늘 라일에게 있어서 대 예배당은 그저 서늘하고 삭막한, 기분 나쁜 공간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네.’

그건 아마 예르넨 포트넘 헬리오, 제국에 단둘밖에 남아 있지 않은 황손이라는 핏줄 덕에 그의 황후가 된 오메가에게 붙어 있는 날파리 한 마리 때문일 것이다.

라일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한 채 삐딱하게 대리석 의자에 앉아, 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포트넘 공자와 테네스 트리지아가 있었다.

‘테네스 트리지아.’

라일에겐 항상 뾰로통한 얼굴이나 쓸쓸한 얼굴만 보여 주던 그의 황후는 어처구니없게도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테네스에게 유한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다.

“…….”

라일은 현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어제 대 예배당 뒤켠의 황실 묘지를 방문했을 때. 몇 달 만에 동부에서 돌아온 테네스가 반란의 조짐을 알렸다.

무너진 동부 세력의 잔당이 힘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규모가 상당한 데다 일이 한창 진행되어 꽤나 복잡한 문제였고 바로 군사회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소식을 가지고 온 테네스가 어쩐 일인지 회의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몸이 안 좋다며 회의실을 나선 것이다.

그 후 테네스는 회의실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고, 러셀은 포트넘 공자가 날이 춥다며 황후궁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테네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궁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라일은 확신했다. 그때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이야기가 오간 거라고.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워졌다.

그 원인 모를 감정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골몰히 생각에 잠길 무렵이었다. 누군가 라일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든 페트라였다.

라일은 그를 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그만큼 새하얀 예복과 붉은 비레타가 어울리지 않는 놈도 없다고 말이다.

이든은 제 핏줄대로 후작위를 잇는 게 더 나을법한 사이하고 뱀과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성직자가 될 만한 인상은 아니었다. 딱히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그와는 적당히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도, 다시 돌아온 후에도.

기억에 남는 거라곤 녀석이 항상 예르넨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정도.

녀석은 예르넨에게는 간간이 말을 걸고는 했었지만 그 곁에 있는 라일에게는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다. 라일도 그에겐 관심이 없었기에 무시했고 말이다. 그랬기에 이건 처음으로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겠습니까?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폐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황후 폐하와… 트리지아 경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지?”

라일은 나른하게 팔을 걸치고 삐딱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테네스 트리지아를? 내가?”

우스운 말이었다. 포트넘 공자는 늘 아닌 척했지만 라일은 알고 있었다. 그가 라일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그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헌데 그런 그의 오메가가 그를 두고 테네스 따위에게 눈을 돌릴 리가 없지 않은가.

테네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저 무뚝뚝한 놈은 결코 기혼자를 노릴 성격은 아니었다.

“테네스는 남의 부인을 노릴 만한 녀석이 아닌데… 성하께서 녀석을 잘 모르나 보군.”

하지만 이든으로부터 건네져 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하지만 닮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닮아?”

“황후 폐하께서 말입니다. 선황을 닮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저 정도면 똑같다고 할 수 있죠.”

라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널리 퍼진 이야기라서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계셨군요. 트리지아 경께서 선황, 예르넨 헬리오의 밤 상대였다는 것 말입니다.”

“…”

“선황은 황위에 오른 후 시동을 방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트리지아 경만이 선황의 시중을 들 수 있었죠. 그리고 선황이 재위한 2년간, 황제궁에서 나온 세탁물에는 침구류가 없었습니다. 그게 둘이 관계를 했다는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 남의 침대 사정에 대해 관심들이 아주 지대했나 보군.”

라일은 얼음장같이 굳은 얼굴로 기가 찬다는 듯이 말하고는 침묵했다. 허나 관심 없다는 어투와는 달리 손가락은 초조하게 등받이를 두드렸다.

“…그게 둘이 관계를 했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

“글쎄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저 호사가들의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었으니.”

라일은 여전히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목석같기로 유명한 테네스가 재미있는 소리를 했을 리도 없는데, 그의 황후는 어쩐지 옅게 미소를 띤 얼굴을 한 채 테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 웃고 있었다.

그와 같이 있을 때는 빨리 방을 나갔으면 좋겠다는 얼굴만을 하던 사람이 말이다.

“이만 예배를 시작할 시간이군요.”

그리 말한 이든은 라일의 곁에서 몸을 일으켜 단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라일의 얼굴은 그가 찾아오기 전 머물렀던 여유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진 뒤였다.

* * *

“어땠지?”

“황후 폐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러셀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이제 저 말만 들어도 그의 주군이 누구의 안부를 묻는지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기실 세 시간에 한 번씩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허나 성실한 기사는 늘 주군의 명을 최선을 다해 지키기에, 그가 모시고 있는 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소상히 읊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트리지아 경과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계십니다.”

“테네스 트리지아?”

“네.”

러셀은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늘 여유로운 얼굴을 하곤 하던 주군의 미간이 무참히 구겨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러셀의 예상대로 잔뜩 미간을 구긴 라일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가 봐.”

“네.”

러셀이 집무실을 나가고 온전히 혼자가 되자 라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황후궁이 있었다.

“하.”

라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테네스 그놈을 오늘도 만났다고?”

긴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몸을 누인 라일은 팔짱을 낀 채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연신 팔꿈치를 두드렸다.

오늘로 3일이 지났다. 이든으로부터 예르넨과 테네스의 뒷이야기를 들은 지 말이다. 그리고 지난 3일간 그 이야기는 단 한순간도 라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기분이 무척이나 개 같아졌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믿지 않았다.

예르넨은 라일을 배신했다. 그랬기에 라일도 예르넨이 그 자신이 품었던 것만큼의 감정을 그에게 품고 있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다.

허나, 그와 별개로 예르넨이 누군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든의 이야기를 들은 후 조사를 한 결과… 예르넨과 테네스.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류에 적혀진 내용에 따르면 예르넨이 재위하던 짧은 기간 동안 테네스는 늘 그림자처럼 예르넨의 뒤를 따라다니며 예르넨의 명에 따라 귀족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테네스가 예르넨의 뒤를 따라다닌 것은 밖에서만이 아니었다. 황제궁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테네스는 유일하게 예르넨의 방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존재였고 예르넨의 시중을 도맡았던 이이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서류에는 그것 이외에도 신빙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야사들도 적혀 있었다. 테네스가 늘 예르넨의 밤 시중을 들었다는 것이며, 서로를 마음에 둔 두 사람이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 헤리엇을 죽였다느니, 그 건을 사유로 나란히 공개 재판을 받았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누굴 보고 믿으라는 건지. 아무리 매치하려고 해도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조합인데 말이다.

‘아.’

하지만 그 유언비어들 중 한 가지, 사실에 근접한 소문이 있긴 했다.

테네스를 사랑한 예르넨이 약혼자의 가문인 벨티모어 대공가를 멸문시키고 헤리엇에게 사주해 라일 벨티모어를 전쟁 노예로 보내버렸다는 것 말이다.

예르넨이 헤리엇을 충동질해 그를 전쟁 노예로 보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앞에 붙은 선행 조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예르넨에 대해서 꽤나 알아봤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그에게 이 정보들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하 녀석들의 하등 쓸데가 없는 배려 때문일 테다.

그러나 가십을 전해 들은 다음에도 라일은 예르넨과 테네스 사이의 관계를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예르넨의 최후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보고 싶었어.’

예르넨은 분명, 자결하기 전 그에게 말했었다. 보고 싶었다고.

여전히 그 죽음은 석연치 않았다. 그렇지만 사흘 내내 예르넨과 테네스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자료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긴 했다.

‘글러 먹었군.’

라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둘 사이의 관계 이외에도 현재 라일의 심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람이 있기에 더 그랬다.

예르넨과 동명이인인 바로 그 조카 말이다.

매시간마다 포트넘 공자의 거취에 대해 전해 듣고 같은 궁을 쓰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일은 아직도 포트넘 공자의 안에 들어 있는 자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라일이 알아낸 거라고는 함께 지내면서 점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에게 그가 끌리고 있다는 우습기 짝이 없는 사실뿐.

포트넘 공자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종착지는 결국 황실 묘지를 방문하던 그 날에 닿는다. 제 얼굴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걸치던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검은 예복을 입었던 그 날 말이다.

그래, 젠장.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생긴 작고 하얀 얼굴에 사나운 표정을 새긴 채로 그를 노려보았을 때, 심장이 뛰었다는 것을.

과거의 예르넨에게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이건 뭐, 그 얼굴에 약한 건지. 더러운 성깔에 약한 건지.”

전자든 후자든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바라보면 차이가 없긴 했다. …그 얼굴 앞에만 서면 등신이 된다.

고작 며칠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일은 제가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체를 알아내고, 쓸모를 다하면 버릴 거라고. 그렇게 호기롭게 말하고 다닌 주제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예르넨과 테네스 두 사람의 관계와 포트넘 공자에 대한 생각 때문에 복잡한 머릿속은 정돈이 되지 않았고 평소와 같은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 가지. 결코 변하지 않을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는 현재 그의 오메가에게 붙은 날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 * *

“테네스 놈을 오늘도 만났어?”

라일은 발을 디디는 순간 직감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의 페로몬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그가 아닌 다른 알파의 향이 섞여 있다는 것을. 그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뭐.”

하지만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는지 황후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데면데면하게 맞이했다.

아니. 저건 데면데면한 것도 아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늘 저녁에나 찾아오던 그가 해가 떠 있는 이른 시간에 찾아온 게 별로인 모양이다.

테네스 트리지아. 그 녀석에게는 결코 보여 주지 않을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실낱같이 이어지던 최소한의 자제심을 끊어내는 데 충분했다.

라일은 그날 집무실을 황후궁으로 옮겼다.

“어디 가.”

느지막이 일어나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던 황후는 별 미친놈을 본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안가?”

“여기가 내 집무실인데 어딜 가?”

“거기가 왜 네 집무실이야.”

라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안 쓰는 공간인 것 같던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후궁은 무척이나 거대했고, 개중에서도 황후가 거처하는 공간은 한 층을 전부 사용할 만큼 규모가 컸다. 덕분에 두 개의 침실과 욕실, 하나의 드레스룸과 거실, 응접실과 서재, 유리온실로 구성되어 있는 거대한 공간에는 남는 자리가 많았다. 그랬기에 라일은 오늘 아침, 시동들을 시켜 황후의 거처로 필요한 것들을 옮겨놓으라고 지시한 후 집무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안 쓰건 말건 여긴 내 공간인데 왜 네놈이 차지하고 있냐고.”

그리고 영역 감각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한 그의 황후는 영영 꺼져 줬으면 하는 얼굴을 하고 라일을 바라봤다.

‘뭐,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지.’

침실을 공유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몸만 내쫓으면 되는 그때와는 달리 이건 말 그대로 공간을 침범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질색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라일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날파리를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더한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라일은 못된 말만 내뱉는 입이 다시 열리고 무어라 또 독설을 내뱉기 전에 황후의 이마를 짚었다.

“열나네.”

예상했던 대로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의 황후는 까칠한 성격을 지닌 것과는 달리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18년을 침대에만 누워 있던 인간의 몸이 튼튼하다면 도리어 그게 이상한 일이긴 하지. 그렇기에 찻잔보다 무거운 걸 들어 올리기만 해도 손목이 퉁퉁 붓는 허약한 몸의 소유자는 환경의 변화에 무척이나 예민해서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열이 오르곤 했다.

오늘 황후궁에는 새벽부터 책상과 책장, 기타 집기들이 옮겨지면서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라일은 옆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이 그 시끄러운 소리에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걸 보았다.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을 테니 열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오늘은 방에서 쉬지 그래?”

라일은 빙글거리는 얼굴을 하고는 황후를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황후는 괴상한 짓을 한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착실히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컨디션이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더 이상 외출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건 라일이 가장 바라던 바였다.

“너 정말… 안 나갈 거야? 일 안 해?”

“여기서 하잖아.”

그리 말하면서도 라일의 시선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느긋하게 정오의 햇살을 만끽하며 책을 읽던 사람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라일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어디 가?”

그 물음에 질린다는 얼굴을 한 황후가 대답했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더 있다간 아예 화장실 가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하고 가라고 하겠다?”

“뭐, 그러면 좋고.”

“미친놈 아냐.”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일은 시계를 바라봤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점심 먹으러 가려는 건가.”

“…….”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정답인 모양이었다.

“오스턴.”

“네, 폐하.”

“식사 준비시켜.”

“네, 폐하.”

“뭐?”

황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가끔은 방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허나 라일은 뻔뻔한 얼굴을 하며 응수했다.

라일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사유와 핑계를 끌어다가 황후가 밖으로 나갈 일을 원천 차단했다. 하지만 그렇게 눈총을 받아가며 구차하게 굴었지만 결국 소용없는 짓이 되었다. 예정되어 있던 황실 연회 날이 돌아왔고… 그 행사에 테네스가 참석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합방 일을 제외한 모든 황실 행사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라일은 막 욕실에서 나온 예르넨의 곁에 가운차림으로 서서 심기가 불편함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사전에 정해진 합방 일을 제외하고 만나러 올 때는 서면으로 허가받아야 한다는 조항부터 먼저 어긴 게 누군데 그러는 거지?”

“허.”

라일은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황후를 노려봤다.

“준비나 하지? 가운 차림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면 말이야.”

하지만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라일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 문득, 평소와 다른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착각인가.’

그 향은 늘 침대 옆자리에 누운 사람이 잠이 들 때면 살그머니 풀려나던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조금 더,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착각이겠지.’

혹시나 히트사이클이 다가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그렇게 라일의 머릿속을 가볍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여성과 달리 남성체 오메가에게 히트사이클은 반년에 한 번 찾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포트넘 공작저에 있을 때부터 황후를 돌봐 온 황후궁 총관의 말에 따르면 아직 예정된 주기는 한참이나 남았다. 아마 예복의 착용을 돕기 위해 들른 의상실 직원 중 하나의 향일 것이다.

그렇게 라일은 희박한 가능성을 접어 두었다. 그리고 잠깐의 생각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다시 채운 것은… 불쾌감이었다.

“젠장.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라일의 머릿속에는 이미 오랜만에 조우한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고 그것도 모자라 쉬지 않고 재생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 이 상태로 간다면… 필히 현실이 될 장면이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갔다.

* * *

라일은 시선을 내려 바로 곁에서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늘 새하얗던 얼굴은 어딘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또 열이 오르는 건가.’

최근에 라일이 외출을 통제했기 때문에 황후는 좋게 말하면 한가롭고 평온한 일상을, 나쁘게 말하면 황후궁에서 갇혀 사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가 보름 만에 아침부터 연회에 간다며 준비를 했으니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

라일은 자신의 시선이 항상 이 조그맣고 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변화마저도 바로 알아챌 정도로.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늘 시선이 향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마주한 지 고작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왜일까.’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본디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다. 그랬기에 그의 부하들은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미치기라도 했냐고 물어 온다. 그조차도 이상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다.

둘은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라 층계참에 섰다.

라일은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황후에게 호박색 과실주를 건넸다. 그러자 황후는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라도 하려는지 평소와 달리 찌푸리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잔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그 모습을 보면서도 라일은 어쩐지 반응을 할 여유가 없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하는 연설을 하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라일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이 지독히도 신경 쓰일 뿐이었다.

“…헬리오의 번영을 위하여.”

맺음말을 한 라일은 황후와 마주 보았고 잔을 부딪쳤다. 그 찰나에 어쩐지 익숙한 듯 낯선 향이 맡아졌다. 조금 전 황후궁에서 맡았던 그 달달하고 포근한 향이었다.

하지만 잔을 부딪친 후 한 모금 들이켰을까. 옆자리에 서 있던 이는 붙잡을 새도 없이 층계를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하, 그러시겠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 속 한편에서 불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당장 라일의 신경을 모두 붙잡는 것은… 이 향이었다. 황후가 떠나고 난 자리에 아주 옅게 남은 잔향.

라일은 조금 전, 황후에게 잔을 건넸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가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라일은 괜스레 손가락을 비볐다. 그 안에 마치 페로몬의 잔향이 묻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기사들마저 물렸기에 층계참에는 단둘밖에 없었다.

의상실의 직원으로부터 묻어난 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이미 의상실의 모든 직원이 황궁을 떠난 지 두 시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겠군.’

히트사이클이 분명했다.

라일의 시선이 늘 그렇듯이 황후를 쫓았다.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원하는 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습게도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황후는 예상했던 것처럼 테네스 트리지아를 만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장기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일은 터무니없는 가설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알면서 간 건가.”

지금 자신이 히트사이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그의 황후는 생각보다 그런 쪽으로 자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허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사고하기 힘들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든 페트라의 말이 맴돌았다. 라일은 다시 잔을 들었고, 그러고는 잔 안에 남아 있는 술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후.”

평소에 먹는 것에 비한다면 취기조차 오르지 않을 정도로 낮은 도수의 술이었다. 고작 두어 모금에 사라질 만큼 양 역시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라일의 머릿속은 마치 취기가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와 동시에 황후와 테네스가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모조리 둘에게 쏠렸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라일 역시 둘의 궤적을 쫓았고 그 끝에 있는 것이 무어인지 알게 되었다.

정원이었다.

라일은 층계를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의 분노한 표정을 본 귀족들이 식겁을 하면서 비켜섰기에 금세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둘을 향해 길이 났다.

“어딜 가고 있었어? 이쪽에 있는 거라곤….”

훅, 하고 바람이 밀려왔다. 그리고 라일은 다시 한번 그 향을 맡았다. 향은 조금 전보다 더욱 진해져 있었다.

“정원뿐인데.”

“뭐야?”

라일은 황후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아넣고는 숨을 들이켰다. 단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잡아먹어 달라는 듯이.

이제는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황후가 발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테네스 트리지아. 놈은 그걸 알면서도 황후를 정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다. 마치 이든 페트라가 했던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둘이서 정원에 함께 나갈 일이 있나?”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라일은 곧장 황후를 품에 안고 테네스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낸 뒤,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하아….”

‘젠장.’

라일의 속도 모르는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황후는 그의 옷자락을 젖히고는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 솜방망이 같은 손길에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다른 의미로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로 테네스 트리지아랑 단둘이 정원에 나가려고 했다고?’

조금만 늦었다면 무슨 일이든지 간에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을 것이다.

예의상 모두 제 페로몬의 잔향만을 옅게 드러내고 있는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발정이 난 오메가의 페로몬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품에 안긴 이를 바라보는 알파 놈들의 시선에 서서히 열감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제길…!’

기분이 더럽기 그지없었다. 라일은 당장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가는 눈알을 파버린 뒤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눈을 하고는 주변을 돌아본 뒤 연회장을 나섰다.

이후 황후궁의 침실로 향하는 길은 마치 사막에서 열흘을 굶은 사람이 오아시스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당장이라도 맨땅에 황후를 내려놓고 옷을 찢어발기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심지어 황후는 누군가를 미치게 하는데 재능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겨우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다시 환장할 짓을 벌이곤 했다.

“좋아….”

“…하.”

라일은 작게 이를 갈며 말했다.

“미치겠네.”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는 라일의 옷자락을 새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꾸욱 움켜쥐어왔다. 라일은 그 손을 벌건 눈을 하고는 쳐다봤다.

‘하, 젠장.’

누굴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 분명했다.

그 손길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제 욕구를 간신히 참아 내던 라일은 결국 알아내고야 말았다. 스스로에게 건넸던 의문에 대한 정답을 말이다.

늘 알 수 없었다. 이 품 안에 있는 사람에게 가지게 된 감정을.

그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보다도 품 안의 사람이 안위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으면 하는 감정. 가둬두고 영원히 풀어 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싫어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은, 성깔 더럽게 고집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고만 싶어지는 이 감정.

대가 같은 건 바라지 않으면서. 그저,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라면서.

사실, 라일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윽…!”

“왜 그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황후가 몸서리를 치는 게 느껴졌다. 라일은 황후를 침대 위에 천천히 내려놓고는 얼굴을 마주 봤다. 완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열이 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열이 날 때 이런 색정적인 얼굴을 하진 않지.’

“의, 의원이나 신관이나 아무나 불러와.”

“의원?”

우스운 소리였다. 연회장에 있는 그 수많은 알파 새끼들의 눈에서 떼어내기 위해 얼마나 인고를 하며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다시 사람을 부르라니.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뭐…?”

“겨우 알파 새끼들을 떨어뜨려 놓고 여기까지 왔는데 또 누굴 다시 부르라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황후,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허나 애석하게도 그의 황후는 정말로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라일은 한 가지 추측을 하고 있었다. 황후는. 그러니까 이 몸, 포트넘 공자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은 본디 베타였을 것이라는 추측 말이다.

그의 황후는 알파나 오메가였다기엔 형질인의 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제야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테네스 트리지아와 히트사이클을 보내려고 했던 건 아니군.’

생각해 보니 잠시 동안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듯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쪽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우선 그의 황후는 결백했다. 몰랐을 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그 생각 하나로 라일의 기분은 금세… 꽤나 괜찮아졌다.

고작 이런 일 하나로 일희일비하다니. 스스로의 꼴이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 머저리 같다고 느껴졌다.

“지금, 히트사이클인 거 말이야.”

“히트… 사이클…?”

“발정기라고.”

“…!”

그 말을 들은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역시 자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꽤나 멀쩡해졌던 라일의 기분은 다시 진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제 성질을 드러내는데 가감이 없던 얼굴 위로 서서히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충격과 옅은 공포, 두려움이 묻어나는 얼굴. 마치, 첫날밤에 보았던 그 얼굴처럼 말이다.

숨소리마저 달라진 게 느껴졌다. 가쁘고, 얕은 그 호흡은 마치 사냥감에게 사냥당하기 직전의 여린 들짐승들이 낼 법한 겁에 질린 숨소리였다.

작은 얼굴이 숙어지고 잿빛이 도는 금발의 머리통만이 보였다.

‘빌어먹을.’

라일은 그제야 제 감정에만 앞서서 자신이 황후가 어떤 상태인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자각할 수 있었다.

정체를 알아낸 뒤 겸사겸사 황후에게 험한 일을 한 놈들을 치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웃기지도 않았다.

라일은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가 멱살을 잡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생각을 해도 한참을 잘못했다. 잡아다 족치는 거로는 안 됐다. 산 채로 지옥에서 굴리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발정기를 넘긴 뒤, 살살 구슬려서 정체를 알아내고 그놈들의 신상을 캐내 처리해 버리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자존심이 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대단한 데다가 정체를 밝히기를 그렇게나 꺼리는데 과연 말해 달라고 한들 말해 줄까. 아마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되레 추궁하지 말라며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다.

그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정체를 밝혀내는 것 말이다.

결국은 지금까지 하고 있던 것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안에 담겨있는 목적은 전혀 딴판이 되었지만.

“황후.”

라일이 말을 걸었다. 그제야 작은 머리통이 마지못해 얼굴을 드러내었다.

“…왜.”

잔뜩 긴장한 듯 까끌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일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황후를 본 것도 이제는 반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라일은 이 진짜 이름조차 모르는 반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어린 시절 아주 우수한 교육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는 것. 청결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중부의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이 홍차를 좋아한다는 것. 까칠한 태도와는 달리 사용인들에게 다정한 주인이라는 것.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고,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하다는 것.

그리고… 이럴 때면 아주 약해진다는 것까지도.

라일은 잔뜩 깨무느라 상처가 나 붉어진 입술을 두드렸다.

“…뭐야?”

“입을 열어 주겠어?”

그 물음에 황후는 평소와는 전혀 달리 죽어 있는 듯 빛이 흐려진 눈을 하고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체념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라일은 어딘가 오기가 생겼다. 그 체념을 지워 버리고 싶다는, 그런 오기.

라일은 침대가에 걸터앉아서는 잘게 떨리는 턱을 조심스레 잡고는 입술을 맞대었다. 커다란 눈에 당혹스러움이 번져나갔다.

“아직 어른 간의 관계에 서투른 황후한테 에티켓을 알려 주자면… 입맞춤을 나눌 때는 눈을 감는 게 예의야.”

그 말에 곁에 있는 사람이 한참을 주저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쪽같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 굳이 신경을 긁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일을 어그러뜨릴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라일은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 다음에는?”

“이 다음?”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입맞춤 말이야.”

머뭇거림과 걱정을 숨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건네어져 왔다.

“지금이랑… 같아?”

그리고 차분히 기다린 끝에 라일이 듣게 된 것은 학대의 흔적이 가감 없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기분이 아주… 좆같았다.

“다를 건 또 뭐겠어?”

이 와중에도 철없는 사타구니는 젠장 맞게도 옷을 찢고 튀어나오든 터져 버리든 둘 중 하나일 것 같이 굴어서 라일을 지독히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라일은 이 사람에게 결코 자신의 욕구를 털어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오롯이 위로를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늘 시선으로 황후를 쫓았던 것처럼 라일은 기민한 감각으로 곁에 있는 이의 호흡을 쫓았다.

그리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을 무렵 라일은 제 아래에 있는 이의 가쁜 호흡을 살피며 그의 황후가 여전히 그가 아닌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냈다.

강제로 관계를 맺는다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간단하지.’

라일은 아래에 있는 사람을 가볍게 들어서는 제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하는 거야…?”

“직접 만져 줘.”

“뭐?”

“만져 달라고.”

“…….”

해결법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래에서 고통을 받는 거라면 위에서 직접 한다면, 괜찮다는 것 아닌가.

“네… 가슴… 을… 만져 달라고?”

“그래.”

다행스럽게도 황후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그의 가슴을 애무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내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호흡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말이다.

‘젠장.’

라일은 인내심을 수양하기 위해 속으로 국가를 불렀다.

그를 유혹하는 발정기의 오메가 페로몬은 이제 짙어지다 못해 방을 가득 채워, 숨을 쉴 때마다 미향을 들이키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이 되었다.

아래는 터질 것 같이 부풀다 못해서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배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그의 몸을 만져 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보드라운 손길 하나하나가 거대한 자극이 되어 라일의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새하얀 엉덩이 사이, 그의 몸과 맞닿는 황후의 은밀한 부위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은 라일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그 새하얗고 모양 좋은 엉덩이가 곧게 기립한 그의 성기에 닿았을 때.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렇게, 비비면, 좀 힘든데.”

시선을 마주한 그의 황후는 기겁한 얼굴을 했고 라일은 결국 인내심의 끈을 반쯤 놓아 버리고 말았다.

“어딜 가…!”

“장난해?! 저런 걸 어떻게 넣어!”

“크면 클수록 좋은 거 아니야?”

“뭐? 이 미친놈아! 크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풀지 않고 관계를 맺으면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라일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듯이 박힌 생각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제국에서 가장 귀한 이를 반려로 맞이하기 위해 약혼자의 몫까지 두 배로 아주 혹독한 성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 교육은 모두 상대를 배려하고 결코 아프지도, 상처를 입히지도 않으며 관계를 맺는 쪽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었다. 그렇기에 라일은 놓쳐 버린 인내심을 다시 끌어모아서는 겨우겨우 붙들고 황후의 사타구니 아래에 있는 은밀한 곳에 얼굴을 묻었다.

“하윽…! 이 미친놈아!”

위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라일은 생각했다. 누군가의 뒤를 넓힌다는 건 생각보다… 꽤나 괜찮은 일이라고.

“하으윽… 흡…!”

특히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신음 소리를 듣는 건 고양감이 느껴질 정도로 흥분이 되는 일이었다.

라일은 점점, 러트가 온 것마냥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질 무렵, 손가락을 넣어 구멍을 넓히기 시작했다.

‘젠장.’

그 손가락을 조여 오는 감각에 금방이라도 엎어 놓고 성기를 박아 넣고만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라일 역시 그의 물건이 평범한 인간들의 가랑이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크기라는 자각은 있었다.

“…넣어 줘.”

허나 그런 그의 심정도 모르고 그의 오메가는 누구 하나 미치게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환장할 정도로 예쁜 소리를 입으로 조잘댔다.

“하윽…! 넣어…! 당장…!”

“후욱, 알겠으니까…!”

라일은 결국 등을 퍽퍽 내리치는 주먹질을 느끼며 이미 붉게 자국이 남은 새하얀 허벅지를 벌렸다. 그러고는 핏줄이 붉어진 성기를 호흡에 따라 개폐운동을 반복하는 가랑이 사이 은밀한 부분에 집어넣었다.

“큭… 너무 조여…!”

허나 그렇게나 넣어 달라고 사람을 볶아 댄 것과는 달리 황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의 성기를 버거워 했다.

그 모습을 본 라일은 입을 겹쳤다. 덕택에 진입은 조금 수월해지는 듯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오늘 끝까지 집어넣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후, 잠시만.”

라일은 주변에 있는 손가락 하나보다 기다란 길이의 링을 찾아 아직 전부 삽입되지 않은 제 성기의 밑동 근처에 끼웠다.

“다… 넣었어.”

그러고는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고작 반 정도만 들어간 상태일 뿐이었지만.

“흐윽…!”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과하게 힘들었다는 듯, 아래에 있는 이의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아직 더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면 뺨이라도 맞겠군.’

씁쓸한 생각을 한 라일은 황후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움직일게.”

이후엔 지독한 쾌감의 향연이었다. 라일은 품 안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매달려오는 이의 속을 파고들며 끝 간 데 없이 올라가는 고양감을 느꼈다.

그러고는 쓰레기 같은 알파 새끼들이 꼬이지 않도록 황후에게 강박적으로 제 페로몬을 뒤집어씌우던 라일은 깨달았다. 어느 순간 그에게도 러트가 찾아왔다는 것을. 아직 주기로 따지자면 한참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후와 달리 오메가의 페로몬을 멀리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는데.

허나, 발정기를 맞이한 알파의 머리는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고민은 짧았다. 기왕 찾아온 김에 같이 즐겨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금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 라일의 정신을 온통 차지하는 일이 생겼기에 이내 의아함은 완벽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발정기의 오메가를 앞에 둔 러트가 찾아온 알파에게는 따라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노팅.

“큭… 젠장…!”

라일은 제 성기의 밑동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허나 둥그렇게 부푼 밑동은 링에 막혀서 올라가지 못했다.

라일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제 품에 안긴 황후가 반쯤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인 게 다행이라고 여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평범하게 발기한 성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럽게 생겼다고 난리를 쳤는데 지금 아래를 봤다가는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다시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할 게 분명했다.

라일은 지독한 고통을 느끼면서 허리 짓을 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큼이나 부푼 귀두구가 기어코 틈을 파고들어 올라가 금속으로 된 링에 막혀서 말 그대로 딱 죽어 버릴 것 같은 고통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링을 끼워서 다행이었다. 이 이상 올라갔다가는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 이로부터 필연 피를 보았을 것이다. 그 고통에 비한다면 금속을 우그러뜨릴 정도로 터질 것 같이 부푼 제 아래 사정쯤이야 참아 낼 수 있었다.

한참을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진 끝에 겨우 노팅이 가라앉았다. 라일은 링을 빼낸 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으흑…!”

한참 동안이나 몸을 붉히며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굴던 그의 황후는 사정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는 듯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늘 판판하기만 하던 아랫배는 마치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임부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노팅으로 인한 정액이 가득 들어찼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라일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황후의 아랫배를 눌렀다.

“큭…!”

“으흑…!”

잔뜩 눌린 성기가 안에서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후, 들어왔네?”

“미… 친놈.”

“그거 알아, 황후?”

“뭘, 하아, 뭘. 이 미친놈아.”

“황후가 욕을 할 때마다… 꼴리는 거.”

욕을 들을 때마다 더욱 흥분하기만 한다는 것을, 모르겠지.

라일은 새로 링을 꺼내 그의 성기에 채웠다.

* * *

사흘 밤낮으로 함께 밤을 보낸 황후는 결국 사흘 밤낮으로 앓아누웠다.

“…….”

그리고 라일은 수많은 이들로부터 지탄 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다. 특히나 그 선봉에 있는 것은 황후의 유모이자 황후궁의 총관인 멜리사였다.

황후는 앓아누운 사흘 동안 물마저 게워 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신관을 부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으나 애석하게 신관을 부를 수는 없었다. 황후의 몸이 약한 이유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게 열여덟 살까지 과도하게 신성력에 노출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간편하게 몸을 치유하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과도하게 노출되면 자가 회복력이 바닥을 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범인은 살아가면서 한두 번이나 받을 법한 치유를 숨 쉬듯이 받아 온 황후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신성력에 대한 노출을 자제해야 했다.

그랬기에 결국 라일은 사흘 내내 모든 집무를 미뤄 둔 채로 병수발을 들어야 했지만 그 시간조차도 무척이나 기꺼웠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라일은 가장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 * *

“흐윽….”

라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신음을 삼키려는 황후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고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 막지 마.”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며 라일의 손가락을 씹어 대던 그의 황후는 이내 이어진 허리 짓에 정신을 놓고는 벌어진 잇새로 자극적인 신음 소리를 흘렸다.

“하으읏, 흐윽… 하…앗…!”

평소 까칠한 얼굴만 하고 있는 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야하고 색정적인 광경이었다.

체력이 바닥인 황후는 잠자리를 함께 한 날이면 꼬박 하루를 앓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더라도 외출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다. 앓고 난 다음엔 외출할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면 라일은 느지막이 오후에 일어나 겨우겨우 밥을 먹은 황후를 다시 침대로 끌고 갔다.

황후는 그런 라일이 달라붙으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꺼지라고 했지만 정작 관계를 맺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조금쯤은 즐기는 것 같았다. 특히나 황후는 그의 몸 위에 앉아서 여기저기를 만져 대는 것을 좋아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관계를 맺으며 라일은 차근히 황후의 몸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고, 황후가 관계에 익숙해지게 된 뒤에는 황후가 좋아하는 자세 그대로 제 위에 앉힌 채로 가는 허리를 잡고는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아 넣기도 했다.

라일은 결국 그의 오메가를 알파 놈들로부터 떼어 낸 채 겨울의 초입 내내 만족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신혼을 즐겼다.

정말 완벽했다. 진작에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외출을 막았던 스스로의 행태가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뜨거운 밤을 보낸 다음 황후를 깨끗하게 씻긴 뒤 갓 건조한 침대 시트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고 나온 그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말이다.

침대에 눕혀 둔 이가 깊게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라일은 대전을 찾았다.

겉으로 보기엔 신혼에 정신이 팔려 국정을 내팽개쳐 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라일은 단 한순간도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저 황후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뿐.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외출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골치 아픈 동부의 반란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 한겨울에 정신 줄을 놓고 수도로 진격하겠다고 배짱을 부리는 꼴이군.”

“그렇습니다.”

포트넘 공작이 복잡하다는 얼굴로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타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라일은 고민에 잠겼다. 내전에 대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사안이 있었다. 그건 바로 누가 선봉에 서겠냐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테네스를 세우고 싶었지만, 트리지아 후작가를 비롯한 서부의 군사를 끌어올 수는 없었다. 서부의 군사가 수도로 오는 데에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서부에는 현재 대륙 내에서 제국이 유일하게 제패하지 못한 페이넌 왕국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렇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부의 군사를 빼내어 올 수도 없었다. 라일 역시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선에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북부는 아직 크고 작은 왕국들을 규합한 뒤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북부에서 뺄 수 있는 군세는 마리아쥬 후작가와 보어 자작가의 사병 정도였으나 둘 다 썩 괜찮은 패는 아니었다. 마리아쥬 후작가는 예르넨의 외가였기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여타 지역의 반 황제파 귀족들에게 불씨가 될 위험이 있었고 보어 자작가는 세가 약했다.

남은 것은 포트넘 공작가를 비롯한 몇몇 선택지였다. 물론 최고의 선택지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라일은 끝내 결정을 미루었다.

“반란군이 선전포고하는 즉시 이쪽에서도 바로 대응을 하도록 하지. 선봉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하도록 하고 우선 회의는 이것으로 파하도록 하겠다.”

“예, 폐하.”

그리 말한 라일은 회의를 마무리 짓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지?”

라일은 목을 꽉 조이는 칼라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말을 걸어온 상대와 마주했다.

이든이었다.

황궁에서는 흔히 마주칠 수 없는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글쎄….”

고민스러운 질문이었다. 시간이 괜찮냐고 묻는다면… 이후에 딱히 정해진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적인 일정일 뿐이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수두룩했다.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당장 황후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굳이 시간이 아니더라도 딱히 이든과 독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라일은 어쩐지 저 뱀을 닮은 교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것은 용무가 무엇인가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무슨 일이지?”

“동부의 반란군 문제로 긴히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이건 또 거부하기 힘든 주제였다.

“제 집무실로 가시죠.”

“그러도록 하지.”

* * *

“동부 교단으로부터 전해져 온 반란군의 자금 동향입니다.”

상석에 앉은 라일은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이든이 건네온 서류봉투를 열었다. 그리곤 꺼내진 서류를 살폈다.

‘의외군.’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건네준 자료의 내용은… 훌륭했다. 그리고 왜 굳이 교황청에서 만남을 요구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른 곳에 넘어가기엔 위험한 정보였다.

모두들 신성한 교황청에서 귀족들이 낸 헌금을 역추적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서류를 살핀 라일은 안에 적힌 내용을 모두 암기한 후 불을 붙여 태워 버렸다.

“꽤나 괜찮은 정보군.”

그러고는… 예리한 눈을 하고 이든을 훑었다.

역시나 생긴 것처럼 성직자를 하는 것보다는 귀족 노릇을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자였다.

“이 정도 정보면…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법도 할 텐데.”

“추후 때가 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라일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대놓고 야욕을 드러낸다면 이쪽도 다루기 편해지니까. 그제야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든의 행보를 조금쯤은 가늠할 수 있었다. 놈은 야심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살폈고 탐색이 끝난 이제야 줄을 고르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교황청은 내내 중립을 유지해 왔다. 그에게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말이 달라졌다. 내내 황후궁에 머무른 것은 교황청같이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심어져 있었던 행동이었으니 호재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라일은 자리를 뜨기 전 이든의 집무실을 한 차례 더 살폈다.

오래된 신학 서적이 가득 쌓여 있는 책장, 유명한 화가의 미공개 연작, 벽을 장식한 독특한 문양의 태피스트리와 그곳에 박힌 네 개의 검. 딱히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뭔가 느낌이 이상하단 말이지.’

여전히 라일의 감은 이든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경고를 해 왔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뭔가가 있긴 했다.

“이만 가 보겠다.”

이든은 작게 묵례를 했다.

“모시겠습니다.”

문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 신관 하나가 길을 안내한답시고 따라붙었다. 교황청으로 올 때 그의 뒤에 고개를 숙인 채 따라붙던 음침한 녀석이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던데.’

“폐하.”

역시나. 줄곧 말을 걸고 싶은 티를 내던 녀석은 계단을 내려갈 때 즈음 말을 걸어왔다.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고 고개를 든 수행 신관의 얼굴은, 제 주인과 마찬가지로 성직자를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두 눈에 지독한 원한이 서려 있었으니 말이다.

“뭐지?”

“제… 형님, 헤리엇 폐하의 호위기사였던 아인즈 경에 관한 것입니다.”

“…….”

라일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기분과는 대조적으로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만이지.’

이런 좆같은 기분 말이다.

이건… 막 노예의 낙인이 찍힌 뒤 북부의 전쟁터로 끌려간 그 날의 기분과 비견이 될 수준이었다.

필립의 형, 아인즈는 예르넨에 의해 살해당했고 기사 작위를 박탈당한 후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과 새들에 의해 시체가 사라질 때까지 가족들이 장례를 치를 수 없도록 명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햇수로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선황의 끄나풀들에 의해 시신을 거두어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필립은 아인즈의 명예 회복과 장례를 치를 수 있게 시신을 거두어갈 수 있도록 황명을 내려 주기를 요구를 해 왔다. 하지만 라일은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라일 역시 헤리엇에 대해서도, 아인즈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르넨의 악행 같은 건 그에게 어떤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도리어 필립의 말 중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말은… 예르넨의 사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폐하께서도 폭군에게 심히 유감이 있지 않으십니까. 형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폭군이 헤리엇 님을 충동질해 벨티모어 대공가를 멸문시키고 폐하를 저 북부의 전쟁터로 보내 버렸다고.’

‘그뿐이겠습니까? 폭군은 색정증이 들어 늘 방탕하게 난교파티를 벌였고 그런 폭군의 그릇됨을 걱정하신 헤리엇 님께 도리어 위해를 가한 뒤 황위에 올랐습니다…!’

‘저는 그 미친 폭군이 제 형제들을 죽이고 그 시체 옆에서 테네스 트리지아와 정사를 나누다 잡혀 와 나란히 헐벗은 채로 북부 광장의 감옥에 갇히는 꼴을 목격했습니다.’

“하.”

그는 늘 입버릇처럼 예르넨이 그를 배신했다고는 말해 왔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며 그 사실을 부정해 왔다.

그랬기에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든에게서 테네스 트리지아와 예르넨이 깊은 관계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데 이제야 그게 아주 등신 같은 짓이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예르넨은. 죽은 후에도 그를 농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러셀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황후는 어디에 있지?”

“폐하께서 떠나신 이후로 줄곧 방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알았다.”

그렇게 말한 라일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왜일까. 지금 당장, 황후가 보고 싶었다.

부드러운 러그의 촉감이 발을 감쌌다. 이 공간에 들어설 때면 늘 그랬듯이.

어쩐 일인지 황후의 거처엔 늘 한둘쯤 돌아다니던 수발을 들어줄 이들마저 없이 한산했다. 그리고 라일은 황후의 공간이 이렇게 고요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있었다.

‘일어난 건가.’

바로 주인이 명을 내렸을 때였다.

라일은 천천히 거실을 지나 침실로 향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아침에 그가 덮어 주고 간 이불에는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황후는 이 안에 있었다. 나갔다면 그의 수족이 그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 테니까.

라일은 발소리를 죽인 채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욕실 안도, 응접실도, 다른 침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황후가 있을 만한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유리온실.

한겨울에도 마치 여름의 정원이 펼쳐진 듯이 울창하고 거대한 유리온실은 라일이 유일하게 살펴보지 않은 곳이었다.

황후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잘 관리된 유리문은 거슬리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라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부드러운 흙바닥 위에 깔린 대리석 길을 걸었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며 그에게 흉터처럼 남은 습관이었다.

라일은 유리온실의 중앙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춰 섰다.

“…….”

예상했던 것처럼 유리온실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둘이었다.

라일은 천천히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뒤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

“저 하늘에 있는 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라일의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이 몸 안에서 쫓겨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같이 살 집이나 구해 둬.”

“정말 같이 살아 주시는 게 맞습니까.”

하아.

작은 한숨 소리와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네스 트리지아. 몇 번을 말해야 그만 물어보는 거지?”

“…….”

라일은 떨리는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릿속에 공황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들어온 말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저게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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