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흐으, 흐.”
예르넨은 예쁜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될 정도로 펑펑 울어 댔다.
“예르넨.”
예르넨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기에 라일은 우는 예르넨을 달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어찌할 줄을 몰라한 채 그저 예르넨의 곁에 쭈뼛거리며 앉아서 손을 잡아 줄 뿐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울고 있는 것이야?”
“…!”
헤리엇이였다.
“폐하.”
라일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예를 취했고 헤리엇은 손짓을 하며 일어나라고 한 채 예르넨을 슬쩍 가리켰다. 라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달래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헤리엇은 그런 예르넨을 다정하게 얼러 주었다.
“헤리엇…!”
예르넨은 마르고 낭창해서 사슴 같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키가 꽤나 커서 또래 곁에 있으면 작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체격이 좋기로 유명한 황가의 피를 타고난 데다 알파이기까지 한 헤리엇의 품에 안기자 그저 어린아이 같았다.
헤리엇은 제 막냇동생을 도닥여 주고, 라일의 도움을 받아 묽은 수프를 먹인 뒤에 잠자리를 봐 주었다. 예르넨이 잠이 들었음에도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가만가만 머리를 쓸어 주는 헤리엇은 정말이지 그의 어린 동생에게 다정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예르넨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지극하건만. 어째선지 황궁에는 암암리에 예르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저… 전하…!”
예르넨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엎드려서는 덜덜 떠는 시동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했냐는 말이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예르넨!”
당장에라도 시동에게 큰 소리를 내지르려던 예르넨은 흠짓 놀라면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에서 라일이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척까지 다가온 라일은 예르넨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시동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사람 하나의 목 정도는 가볍게 떨어뜨릴 눈빛이었다.
“…별거 아냐.”
예르넨은 괜히 그에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을 했다.
“폐하께 데려가라.”
“알겠습니다.”
“저…! 전하! 그것만은…!”
끌려가면서도 시동은 한 번만 봐 달라며 찢어지게 비명을 질러 댔다.
“…정말 무슨 일인데?”
껄렁한 태도를 집어던진 라일이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재차 예르넨에게 질문해 왔다.
“신경 쓸 것 없어. 아랫사람이 입을 잘못 놀리면 기강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윗사람의 도리이기에 그저 가르침을 준 것뿐이야.”
록시에가 죽은 뒤부터 황궁에는 한 가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세실의 아이, 예르넨과 같은 이름을 이어받은 황손인 예르넨 포트넘 헬리오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황제가 갑작스럽게 급사를 한 것도, 황후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모두 황족이 아닌 존재가 황족인 척 궁에서 살고 있기에 신이 노한 것이라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소문의 대상은 예르넨이었다. 사람들은 예르넨이 크게 다쳤던 사건이 신이 예르넨을 죽이려고 했던 일이라며 입 모아 말했다.
황족이 아니면서 황족인 척 영예를 누리고 살아가는 거짓된 씨앗을 황가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신이 벌을 내렸는데, 황가에서 그런 신의 뜻도 모르고 예르넨을 되살렸기 때문에 해악이 끼쳤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의 피가 흐르는 황가에서 이리도 줄초상이 일어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그랬기에 예르넨을 귀애한 황제는 물론이고 부정을 저지른 황후도 신벌을 당해 급사한 것이라고.
그리고 예르넨이 오메가로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소문을 부풀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알파와 오메가로 일컬어지는 특이 형질은 주로 황족과 귀족 등의 상류계층에서 빈번했기에 특권계층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평민 중에서도 특이 형질인 이들이 종종 있긴 했지만 무척이나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가의 경우 방계의 방계까지 단 한 명도 특이 형질이 아닌 이가 없었고, 발현도 무척이나 이른 나이에 시작되곤 했다. 헌데 예르넨은 이제 열네 살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발현을 하지 못했다.
수많은 시선이 예르넨을 향했고, 그 소문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예르넨을 움츠러들게 만들기까지 했다.
아닌 척 당당하게 굴고 있었지만, 예르넨은 매일 밤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세었다.
그가 황족이 아닐 이유는 없었다. 예르넨은 유일하게 황가의 혈족들에게서만 간간이 발현되는 잿빛이 도는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베이넌과 록시에를 정확히 반씩 섞어 놓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라일의 얼굴을 멀쩡한 척 보는 게 점점 힘에 부쳐 왔다.
‘만약 발현하지 못한다면… 라일과 혼인식을 올릴 수 없어.’
그가 아무리 황족이 맞다고 해도 오메가가 아닌 평범한 베타라면 알파의 아이를 잉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공가의 후사는 라일 하나뿐이었다. 그런 라일이 후계를 갖지 못한다면….
‘큰일이지.’
그렇게 된다면 라일을 위해서라도 파혼을 해야 했다. 그게 법도였다. 그런데… 그러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라일 벨티모어는 예르넨의 것이었다. 그런 라일이, 다른 사람에게 예르넨에게 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해 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정말이지 다 엎어 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꼭 오메가로 발현해야 하는데….’
왜 안 하는 걸까. 예르넨은 매일 매일 초조하게 달력을 살피고 또 살폈다.
시간은 흘렀고 소문은 점점 예르넨이 오메가로 발현하지 못할 것을 기정사실화한 채로 커져만 갔다. 매일같이 밖에 나돌기만 하던 일리안이 찾아와서 예르넨에게 그딴 소문 따위 무시하라며 심심찮은 위로를 건넸고 헤리엇이 소문을 크게 퍼트린 사람들을 처형했지만 그럴수록 소문은 더욱 살이 붙어만 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세실은 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열세 살의 겨울은 예르넨에게 무척이나 추웠다. 그리고 예르넨이 열네 살이 된 3월, 황궁에 비보가 하나 전해져 왔다.
바로 라일의 부모님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즈음에 이르러서는 예르넨마저도 그에게 무언가 저주가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건강하던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원인 모를 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벨티모어 대공 부부마저 그리되었으니.
선황과 선황비가 서거했을 때에 라일은 예르넨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랬기에 예르넨도 대공령으로 라일과 함께 떠나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맘때의 예르넨은 무척이나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되도록이면 라일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라일은 꽤나 힘들어했지만 떠날 무렵에는 겉으로나마 멀쩡한 얼굴을 하고 늘 짓는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다녀올게. 라고.
라일은 그렇게 벨티모어 대공령으로 떠났고… 예르넨의 예민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라일이 곁에 없으면 되레 편안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예르넨은 제 성에서 두문불출하며 발현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예민하게 굴었고 헤리엇은 라일이 떠난 사이 그런 예르넨의 곁을 지키며 어르고 달래 주었다.
예르넨은 매일같이 헤리엇의 잘못도 아닌데 헤리엇에게 화를 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헤리엇은 제 화에 못 이겨서 뜨끈해질 때까지 한참을 운 제 어린 동생을 침대에 뉘어 주고는 세실이, 록시에가, 라일이 그랬던 것처럼 예르넨이 잠이 들 때까지 잠자리를 지켜주었다.
종종 잠이 들 무렵 흐린 시야 사이로 그의 표정을 보았을 때,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 사실을 깊게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예르넨의 신경은 온통 발현 여부에 쏠려 있었다.
헤리엇의 보살핌을 받으며 예르넨은 아슬아슬하게, 외줄에서 휘청이는 것처럼 위험한 감정의 외줄 타기를 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고… 라일이 찾아왔다.
“예르넨…!”
“라일…?”
그런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라일은 못 본 반년 사이에 훌쩍 커 있었다. 그러나 예르넨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민이 입을법한 무척이나 더러운 옷을 입고서는 단 한 번도 예르넨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무척이나 화가 난 얼굴.
다른 놀이 친구나 시동들을 상대로, 혹은 예르넨에게 무례하게 군 사람을 대상으로 라일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라일은 단 한 번도 예르넨을 상대로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예르넨이 목검으로 그를 흠씬 두들길 때도, 기분이 나빠서 라일을 때릴 때도, 어리광을 부릴 때도 단 한 번도.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만, 예르넨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이지 못했다.
“…….”
생일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고, 예르넨은 아직도 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소문이 말하는 것처럼, 마치 황족이 아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인즈.”
“네, 전하.”
“…물려라. 지금은… 보고 싶지 않으니.”
“벨티모어 대공 각하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차마 라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분명 약혼을 취소하자고 하려는 거겠지.’
예르넨도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예르넨은 다시는 라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건 빌어먹을 자존심이었다. 그저 객기였다. 쓸데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맘때의 예르넨에게는 정말 그 얄팍한 자존심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는 라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예르넨의 면전에다 대고 파혼을 통보하는 것도 싫었고, 그가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게 되어서 그 사람에게 예르넨에게 했던 것처럼 대해 주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라일과 마주쳐야만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인즈가 라일을 끌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라일은 무어가 그리 분한지 절규를 하면서 예르넨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예르넨은… 피가 빠져나가 차가워지는 손을 꾹 쥐고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멀쩡한 척을 가장하며 황자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그때, 세실을 만나러 라일과 함께 남부로 향했을 때 사고를 당하고 죽어 버렸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까. 그때는 모든 게 완벽했다. 선황과 선황후는 살아 있던 그때는.
예르넨은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 황자로서 황궁의 모든 이들에게 귀애받으며 작은 폭군처럼 황궁에 군림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모두들 예르넨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헤리엇은 흉흉한 소문이 돈다면서 그의 기사인 아인즈를 예르넨에게 붙여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뛰어난 기사일지라도 모든 이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황자궁의 시동들마저도 예르넨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소문을 서로에게 속닥거렸다. 아무리 멀쩡한 척해도 속은 전혀 아니었다. 그 시선은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르넨은 침대로 기어들어 가서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도피하듯이 잠을 청했다.
“예르넨.”
“형….”
예르넨은 눈을 부비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달빛 하나 없는 밤이었기에 헤리엇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라일이 찾아왔다고 들었어.”
“…….”
“만나지 않았다고.”
원치 않는 주제였기에 예르넨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떻게 하기를 바라니?”
헤리엇은 다정한 어투로 예르넨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예르넨은 그가 방을 나가기를 바라며 침묵했지만, 헤리엇은 평소와 달리 나가지 않고 침대 곁에 앉아서 고요히 예르넨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예르넨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보고 싶지 않아. 북부로 가라고 해.”
사실은 무척이나 보고 싶었는데.
“알았어. 우리 사랑하는 막내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형이 그렇게 해 줘야지.”
왜일까. 예르넨은 그리 말하는 헤리엇의 미소가 무척이나 서늘하다는 생각을 했다.
‘착각이겠지.’
헤리엇은 늘 다정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됐다.
* * *
일주일이 지났고, 예르넨은 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예르넨에게 그토록 다정했던 헤리엇은 예르넨이 생일을 맞이한 밤 자정, 예르넨의 방에 찾아와 그날 밤 예르넨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꼭 같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끌고 가라.”
“뭐…? 이거 놓지 못해?!”
예르넨은 잠옷 차림에 신발 하나 신지 못한 채로 기사들의 억센 손에 질질 끌려갔다.
“전… 전하!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전하!”
“데이브…!”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폭력적인 처사에 예르넨은 당황했고 기사들의 손에서 그를 빼내려고 달려든 데이브가 벽에 처박히는 걸 보고는 온 힘을 다해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거 풀어!”
“전하…! 전하…!”
하지만 고작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예르넨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단련된 기사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예르넨은 어두운 밤에 안대가 씌워진 채로 황자궁의 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예르넨은 거세게 반항했고, 고작 어리고 작은 황족 하나라고 생각하며 예르넨을 얕본 기사들은 그 대단한 패악에 혀를 내두르고는 예르넨의 목 뒤를 쳐서 기절시켰다.
금세 축 늘어진 예르넨은 황궁 구석에 있는 거대한 호수로 끌려가, 호수 위에 정박하여 있는 배에 짐짝처럼 실렸다.
* * *
“으윽…!”
끔찍한 통증이 느껴지는 뒷목을 부여잡고 일어난 예르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운 얼굴이 금세 찡그려지며 성깔 있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여긴….”
끼익.
몸을 조금 움직이자 녹이 슨 낡은 철제 프레임이 비명을 질러댔고, 오래된 매트리스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예르넨은 작게 기침을 한 다음에 일어나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서서히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예르넨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딱 한 번이지만 와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이를 꽉 깨문 예르넨은 지저분한 바닥에 맨발을 디디고 서서는 낡은 나무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한참을 달린 뒤, 제 가정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하아.”
눈가가 금세 새빨개졌다. 눈앞에 넘실거리는 것은 거대한 호수였다. 거대하고 넘실거리는 새까만 물.
남부로 떠나는 여정에서 크게 다친 이후, 예르넨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을 무서워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 예르넨의 눈앞에… 그 두려움의 대상이 있었다.
다가갈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을 담그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못 하는, 보기만 해도 몸이 떨려 오는 강을 닮은 호수가.
황성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무척이나 깊고 넓기에 맨몸으로는 절대 건널 수 없어 배를 타고서야 겨우 오갈 수 있는 아주 거대한 호수였다.
아주 추운 겨울이 온다고 해도 얼지 않을 만큼 수심이 깊은 그 호수의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섬에는 황실에는 걸맞지 않은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몇 대 위의 황제가 취미생활을 위해 만든 그 오두막은 종종 황실 아이들의 놀잇감이 되고는 했다. 예르넨도 아주 어린 아이일적 세실과 헤리엇, 그리고 일리안과 함께 한 번이지만 이 오두막에 온 적이 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은 무척이나 낡고 더러웠었다. 황실의 아이들이 온다고 여기저기 쓸고 닦았지만 그럼에도 세월의 때를 모두 씻어내지 못한 모습이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예르넨은 오두막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예르넨은 그곳에 있었다.
“젠장.”
예르넨은 멍청하지 않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안 좋은 소문이 돈다고는 해도 예르넨이 황족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매한 민중들은 예르넨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선황과 선황후의 얼굴을 쏙 빼닮은 예르넨을 본다면 그런 소문은 입에서 쏙 들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예르넨이 황족임을 입증한다고 해서 그가 오메가로도 알파로도 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르넨은 여전히… 단 한 번도 베타가 태어난 역사가 없는 황실에서 태어난 유일한 베타였다. 약혼자의 향도 맡지 못하는, 베타.
그것은 황실의 크나큰 흠결이었다. 그러니 그런 예르넨을 밖으로 나돌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피가 흐르는 황가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헤리엇은, 황제는 예르넨에게 명한 것이다.
황궁이되 황궁이 아닌 외따로 떨어진 이 섬에서 홀로 비참히 살다가 죽으라고.
* * *
꼬르륵.
“… 배고파.”
예르넨은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밥을 챙겨 줄 사람도, 예르넨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예르넨은 머뭇거리며 일어났다. 사실은 배만 고픈 게 아니었다.
지난 이틀간, 충격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먼지가 폴폴 날리는 침대 위에 앉아만 있었기에 몸이 찝찝해서 씻고 싶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목도 말랐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몸이 으슬으슬하게 춥기도 했다. 향긋하고 따스한,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 한 잔이 절실했다.
그러나 14년을 내리 보살핌만을 받아온 예르넨은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음식을 해 본 적 없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혼자서 목욕물을 받아 본 적도 없었으며 스스로 씻어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옷도 제대로 못 입었다. 늘 시동들이, 그것도 아니면 라일이 수발을 들어 주었으니까.
허나 이곳에는 시동도 라일도 없었다. 예르넨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모든 행위를 혼자서 해야 한다니. 무척이나,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삐죽 나올 것 같았다. 눈물이 곧장 이라도 눈물샘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운다고, 투정을 부린다고 해서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존심을 찾는 것보다… 배고픔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틀을 내리 굶었다. 단 한 번도 세끼 이상을 굶어 본 적이 없었기에 예르넨은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허기를 느꼈다. 예르넨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지탱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잖아.”
비록 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르넨의 몸에 흐르는 신의 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신의 피가 흐르는 황족을 아사시키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먼지와 모래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바닥에 새하얀 발을 디딘 예르넨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 뭐가 있긴 하네.”
예르넨은 덤덤하게 혼잣말을 했다.
나무뭉치들이 가득한 부엌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있었다. 다행히 그 안에는 평민들이 입을법한 조금 낡고, 거친 천으로 만든 평상복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예르넨은 단 한 번도 신어보지 않은 평민들이 신을 법한 신발도 하나 있었다.
“…….”
어쩐지 옷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입고 싶지 않았지만, 이 더러운 바닥을 맨발로 다닐 수는 없기에 예르넨은 바구니를 덮고 있던 천으로 발을 닦고 신발을 신었다.
“…이상해.”
신발이 너무 딱딱했다. 보드랍지도 폭신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신을 만한 게 이것뿐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답시고 저 먼지 나는 바닥을 계속 밟고 다닐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천 같은 거에 물을 묻혀서 바닥을 닦던데.’
예르넨은 황궁을 지나다니면서 청소하는 시동들이 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냥 물을 묻혀서 바닥을 닦으면 깨끗해지는 걸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예르넨은 그 생각을 저 멀리 밀어둘 수밖에 없었다. 뱃가죽이 찢어질 것처럼 극심한 허기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배를 부여잡은 예르넨은 드디어 신발 아래에 있는, 식료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살폈다.
“이게 뭐지…?”
바구니 안을 들여다본 예르넨은 동그랗고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과일 같은 것을 꺼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괴상한 것이었다.
이게 대체 뭘까. 한참을 고민하던 예르넨은 기어코 그 괴상한 채소의 정체를 추측해내었다.
“감…자인가?”
얼핏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늘 먹던 감자는 새하얗기만 해서 잊고 있었지만 분명 감자는 조리 하기 전에 이렇게 생겼던 것 같다. 하지만 바구니 안에는 그 외에도 한가지가 더 있었다. 감자는 몰라도 이건 알고 있었다.
“이건… 당근이잖아…!”
그건 예르넨이 제일 싫어하는 채소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당근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예르넨을 당근과 친해지게 만들어 주기 위해 세실이 농민들이 직접 밭에서 기르는 당근을 뽑아내는 광경을 보여 줬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세실은 농부들의 구슬땀을 보아서라도 당근을 먹으라고 하려고 보여 준 것이었지만 그런 세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은 끝내 당근을 먹지 않았었다. 그리고 당근에 대한 혐오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배가 고픈 상황에서도 당근은 정말 아니었다. 예르넨은 당근을 빼서는 저 멀리에 밀어 놓았다. 그리고 바구니의 밑바닥을 살핀 끝에 거친 천으로 감싼 물건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커다랗고 까만 진흙을 뭉쳐놓은 생김새의 것이었는데 도저히 먹을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예르넨은 그 이상한 물체를 두드려보았다.
탁탁.
뭔가… 딱딱한 물체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났다.
“먹는… 건가?”
아무리 봐도 먹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예르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도 일단 당근 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 외에 아래에 있는 거라곤 소금 조금뿐이었다.
예르넨은 고민 끝에 감자를 두 알 들었다.
그동안 먹었던 것들을 되짚어본다면 당근은 몰라도 감자는… 분명 먹을 만한 음식이었다. 그러니 이걸 먹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예르넨이 주로 보았던 감자는 이렇게 구형이 아니었다. 포슬포슬하거나 흐물흐물한 상태였다.
예르넨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감자를 조리하는 방법 따위를 전혀 모르는 예르넨은 한참을 고민하다 사과를 먹듯이 베어 먹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비록 포슬포슬한 감자만 먹어 왔지만 감자는 대체로 어떻게 조리하든 맛있었으니 생으로 먹는다고 해도 맛있을 것이다.
예르넨은 감자에 묻은 흙을 열심히 천으로 닦아 내고는 한입 베어 물었다.
“욱…!”
툭.
그리고 감자를 뱉어 내고 헛구역질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이야…!”
평소에 먹던 달고 보드라운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느껴지는 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떫고 이상한 맛이었다. 게다가 입안 여기저기에 모래 알갱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예르넨은 다 엎어 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를 느끼며 허기때문에 미약하게 떨려 오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빌어먹을.”
신경질이 가득한 눈매가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 * *
“하아.”
또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하루가 시작됐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예르넨은 덜덜 떨면서 눈을 떴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은 감각이 없을 만큼 굳어 버렸기에 품속에 넣고 한참을 녹여야 했다.
벽난로를 보았다.
역시나. 벽난로는 어제도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젠장, 바람도 안 부는데 불이 왜 이렇게 자주 꺼지는 거야.”
예르넨은 유일하게 체온을 유지 시켜주는, 얇은 이불을 두르고는 일어났다. 보온을 위해 이불 위에 덮어 둔 잠옷과 평상복 한 벌이 툭 하고는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더럽기만 한 바닥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옷가지를 집어들 체력도 없는 예르넨은 몸을 덜덜 떨면서 나뭇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으으….”
휘잉.
차가운 호수의 겨울바람이 온몸을 찢어발길 듯이 불어왔다.
“짜증 나…!”
예르넨은 실컷 투덜대면서 겨우 오두막 한편의 바람길이 약한 곳으로 파고 들어가 나뭇가지를 비볐다. 빨리 불을 붙여야 했다. 안 그러면 정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새빨갛게 부르튼 손 여기저기 새겨진 크고 작은 생채기 위로 새로운 상처들이 덧입혀지고, 그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붉은 피가 몽글몽글 올라오고 나서야 겨우 조그마한 불이 붙었다.
예르넨은 그 불씨를 살려 보겠다면서 상처가 잔뜩 난 손으로 마른 낙엽과 지푸라기를 긁어모은 뒤 불씨 속으로 던져 넣었다. 손이 너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추운 섬에서 불 없이 버티면 동상에 걸리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일 테니 선택권 따위는 없다.
예르넨은 겨우겨우 커다랗게 만든 불씨를 멍하니 바라보며 몸을 녹였다.
“그래도 이젠 곧잘 붙네.”
괜스레 처음 섬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멋도 모르고 감자에 묻은 흙을 천으로 닦아 내고 깨물어 먹었다가 구역질을 했었지. 이후엔 어떻게든 야채를 삶아 먹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물을 끓여 보겠답시고 불을 찾았는데… 섬에 불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라일이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을 만들어 냈던 사실을 겨우겨우 기억하고는 불을 붙여 보려고 했지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나뭇가지를 비비던 예르넨은 제 성질에 못 이겨서 나뭇가지를 집어 던지고 부러뜨리고 소리소리 질러 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불을 붙여야 배고픔도 해소할 수 있었기에 최선을 다했고 해가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작은 불씨를 붙였다.
그 불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직까지도 그 감동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나마 벽난로나 냄비 몇 개 정도는 있었기에 예르넨은 감자에 묻은 흙을 깨끗이 닦아 내고는 냄비에 물을 넣고 감자를 삶았었다.
애석하게도 굶주릴 대로 굶주렸던 예르넨은 물이 끓어오르기도 전에 감자를 꺼내 먹었고, 설익은 감자에 다시 헛구역질을 했지만 말이다.
“…밥이나 먹자.”
일어난 예르넨의 몸태는 어엿한 성인 같았다. 이제 스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안쓰러울 정도로 마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선으로 이루어진 몸은 사슴같이 우아했다.
예르넨은 시린 손목을 꼬옥 부여잡았다. 제대로 된 옷은 일 년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지금 3년 전에 지급받은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새 훌쩍 자란 팔목과 발목이 훤히 드러났기에 겨울바람이 손목과 발목을 스칠 때마다 무척이나 시려 왔다.
겨우겨우 불을 꺼트리지 않은 채 오두막으로 돌아온 예르넨은 벽난로에 불과 마른 나뭇가지를 넣고는 열심히 바람을 불어 넣었다. 새하얀 얼굴은 금세 재가 묻어서 더러워졌다.
“콜록콜록.”
연기 때문에 기침을 몇 번 한 예르넨은 익숙하다는 듯이 얼굴을 닦아 내고는 주방으로 가서 바구니를 살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다고 해서 안에 들어 있는 식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곤 말라비틀어진 당근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앞으로 언제 올지 모를 식량을 기다리며 내일부터는 쫄쫄 굶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처음에 많이 먹지 말걸.”
예르넨은 고운 색으로 물들어 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남은 당근 한 알을 꺼내어 씻고는 냄비 안에 넣었다.
“밥 먹고 숲을 좀 더 둘러봐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낚시라도 할까.”
둘 다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어제는 숲을 둘러봤고 그제는 낚시를 했지만 두 번 다 허탕을 쳤기 때문이다.
파글파글 끓고 있는 냄비를 보면서 예르넨은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는 배를 움켜잡았다. 어제도, 그제도 삶은 당근과 당근 삶은 물을 먹었다. 여전히 당근이 싫긴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편식할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먹기 싫어서 맨 마지막까지 미뤄 두긴 하는데.’
이렇게 막판이 되면 말라비틀어진 당근 하나조차도 소중해진다.
예르넨은 당근이 익는 걸 기다리기 힘들어져서 간절한 눈을 하고는 냄비 안을 들여다봤다. 스스로의 모습이 궁상맞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보는 눈도 없는데 교양이 밥을 먹여 주진 않았다.
고요한 오두막에는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 그리고 예르넨의 조용한 혼잣말만이 울렸다.
“빵 먹고 싶다.”
딱딱하기만 한 검은 빵 한 덩어리가 무척이나, 정말 무척이나 간절했다. 불려서 먹으면 그래도… 그나마 식사를 한 기분이 드니까.
그래도 굶겨 죽이려는 건 아닌지 헤리엇은 불규칙하긴 하지만 대개 한 달 주기로 식량과 생필품을 보내주곤 했다.
고작해야 일 년에 한 벌 정도의 옷과 침구, 마른 검은 빵 몇 덩이와 감자, 당근 같은 보존이 가능한 식품 그리고 소금과 약간의 조미료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마저도 고작 하루에 한 끼 정도, 그것도 아끼고 아껴 먹어야 하는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양만 보내 주었기에 양 조절을 아주 신중하게 해야 했다.
봄이나 여름, 가을이면 숲에서 과일 열매를 먹을 수 있었고 낚시를 할 수도 있어서 그나마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겨울은 달랐다. 예르넨은 섬에서 여섯 번째 겨울을 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몇 번씩이나 아사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 겨울은… 유독 심했다. 한 달 주기로 보급되는 식량은 때때로 그 주기를 넘곤 하는데 지난번엔 무려 일주일이나 배급이 늦어졌다.
그 때문에 예르넨은 남겨 두었던 약간의 식량마저 다 먹은 뒤 생으로 나흘을 굶어야 했고 이후 보급 바구니를 받자마자 빵이며 감자며 가리지 않고 양껏 먹어 버렸기에 아직 한 달이 되기까지 이틀이나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식량이 전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번에도 늦는 건 아니겠지…?”
예르넨은 손톱을 깨물며 걱정했다. 만약에 이번에도 저번처럼 배급이 예정일로부터 일주일이나 밀리게 된다면… 거의 열흘을 굶어야 했다.
열흘이라니. 아무리 굶주림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지만 나흘 굶은 것만으로도 죽을뻔했는데 그만큼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절대로.
“역시… 숲에 가 봐야겠어.”
예르넨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냄비를 꺼내 왔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당근은 불어서 그런지 그나마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으윽.”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당근은… 정말 싫었다.
“이 맛대가리 없는 걸 진짜…!”
한바탕 쏘아붙이려던 예르넨은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참았다.
‘참자, 참아.’
냄비를 뒤엎어 버려도 기다리는 건 며칠이나 굶어야 하는 현실뿐이었다.
“진짜 오늘은 뭐라도 찾아내고 만다…!”
예르넨은 의지를 불태우며 당근을 조금씩 조금씩 떼어서 아껴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 먹어도 맛대가리 없는 당근은 금세 동이 나 버렸다. 애초에 고작 손가락 두 개를 붙인 것 같은 실같이 얇은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냄비 안에 있는 당근 우린 물까지 모두 먹자 그나마 허기가 달래졌다. 그나마, 그으나마 정말 개미 눈곱만큼 정도 배가 불러오는 것도 같았다.
“물을 그렇게 처먹었으니 당연하지.”
예르넨은 툴툴거리면서 구석에 개어 놓은 옷 중에서 입을 만한 것을 모조리 꺼내서 몸에 두르고는 다 해져 버린, 발에 맞지 않은 조금 큰 신발을 신고는 바구니를 들쳐 멨다. 옷만 놔두고 보면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거지꼴이었지만 예르넨이 입고 있으니 어딘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예르넨은 마악 오두막을 떠나려다가 문 앞에서 멈칫 하더니 잠시 멈추어 서서 제 목에 걸려 있는 로켓 펜던트를 한번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아직 어린, 한때 그의 약혼자였던 이의 초상화가 있었다.
이 펜던트는 그 밤, 황자궁에서 끌려 나올 때 목에 걸려 있었기에 유일하게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그림이나 그려 볼까.”
섬에 갇힌 뒤, 예르넨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바빴다.
직접 불을 피워서 요리를 하고 밥을 먹어야 했고, 물을 데워서 몸을 씻어야 하기도 했으며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더러워지는 오두막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조금이나마 먹을 것을 구하러 이리저리 바삐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끝난 뒤,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나름 시간이 나곤 했다. 그때가 되면 예르넨은 오두막 구석에서 발견한 양피지로 된 책과 목탄을 꺼내어 와서는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양피지 같은 걸 쓰지 않는 시대였지만, 과연 오두막 자체가 구시대의 유물이어서 그런지 구석에 양피지로 된 공책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주 가지고 놀았지만, 이제는 목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껴 쓰느라 최근에는 거의 만진 적이 없었다. 헌데 오늘은 왠지 라일의 얼굴을 그려 보고 싶었다.
“그 녀석이 어떻게 컸는지 상상하는 건… 재밌으니까.”
여전히 예르넨의 머릿속 라일은 앳된 모습이었지만 실제는 아닐 것이다. 예르넨이 어른이 된 만큼 라일도 성장했을 것이다. 종종 그런 라일이 보고 싶어질 때면 예르넨은 멋대로 상상해서 라일을 그려 내곤 했다.
감상에 젖었던 예르넨은 이내 펜던트를 다시 옷 속 깊숙한 곳에 숨겼다.
“…잘살고 있을까.”
최근에는 늦은 나이에 혼인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지만 대개 헬리오 제국에서는, 귀한 피를 이은 고위귀족일수록 성인이 되기 전에 약혼자를 정하고 나이 어린 쪽의 배우자가 성인이 됨과 동시에 혼례를 올리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예르넨이 성인이 된 만큼, 라일도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마 라일은… 혼례를 올렸겠지.
“그때 그러지 말 걸 그랬어.”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도망치지 말 걸 그랬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때만큼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제대로, 오메가로 발현하지 못했음을 알리고 이별을 고하는 게 나았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예르넨은 문을 열고, 칼바람이 불어오는 숲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라일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있지 라일.’
잘 지내고 있어? 이젠 모두 나를 잊었을 것만 같은데… 너는 아직 나를 기억해?
* * *
들리는 소리라곤 거센 호숫가의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뿐인 겨울 아침의 오두막은 늘 고요했다.
운이 좋으면 불씨정도는 살아 있긴 했지만, 대개는 간밤에 불을 지피기 위해 넣어 둔 나무나 낙엽 따위가 모두 타 버려 잔불마저 꺼져 있었기에 타닥거리며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오늘은 왠지 평소와 달리 벽난로에서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공기도 따스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긋나긋하게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
“전하.”
여인의 목소리였다.
‘뭐지…?’
예르넨의 몸이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해졌다. 6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퍼뜩 눈을 뜬 예르넨은 누군가가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이 달라졌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예르넨은 어쩐지 여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리…지…?”
그곳에 있는 것은 예르넨의 첫째 형, 헤리엇의 반려인 리지 메리온이었다.
“꿈인가….”
꿈이라고 해도 짜증이 나는 상황이다. 뭐 이런 개떡 같은 꿈이 다 있단 말인가. 라일이나 세실, 부황이나 모후가 나와도 부족한데.
“세상에, 종종 이 리지에 대한 꿈을 꿔 주시기라도 한 겁니까?”
리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르넨에게 안겨 왔다.
“…?”
예르넨은 인상을 팍 쓴 채로 그런 리지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뭔 헛소리야?”
6년 동안 단 한 번도 리지 메리온에 대한 생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니, 그보다….”
‘꿈을 꿔 주시기라도 했다니? 꿈이 아닌가?’
예르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인…즈…?”
익숙한 기사 하나와 처음 보는 기사 셋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예르넨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과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와 갖은 장신구를 끼고 있는 리지의 차림새를 살피고는 다 헤어진 거적을 두르고 있는 제 차림이 너무도 초라한 것 같아 얼굴을 붉힌 채 얇고 낡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닿았다.
‘헤리엇이 드디어 나를 내보내기로 마음먹은 걸까?’
이 지독한 섬에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섬에서 나간다면… 황궁에서 내쫓길 것이다. 그러면 갈 데가 없이 길바닥을 전전해야 했고, 그러다 혹여나 알던 이들을 만난다면 체면을 구길 게 분명했기에… 싫었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적막만이 흐르는 미쳐 버릴 것 같은 이 섬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단 몇 마디라도 말을 주고받을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적어도 언제 배급을 주나 호수 너머만을 애처롭게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황궁에서 나가라는 말 따위를 할 거라고 생각한 리지가 보인 태도는… 예르넨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리지는 예르넨의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투둑.
우악스럽게 잡아당긴 틈을 타고 삭을 대로 삭은 얇은 실에 매달린 단추 두엇이 떨어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예르넨은 당황해서는 리지를 밀어냈다. 리지는 예르넨이 밀면 미는 대로 어물어물 밀려났다.
“하하.”
그러고는 또 빙글거리며 웃어 댔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 웃음이 아까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건 마치… 예르넨의 몸을 더듬을 때마다 리지가 보이던 웃음과 닮아 있었다.
세실은 리지가 예르넨을 예뻐해서 그러는 거라 이야기했지만, 예르넨은 저 웃음을 볼 때마다 왠지 몸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하.”
“…뭐야.”
예르넨은 마치 알파에게 겁탈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오메가처럼 벌어진 옷깃과 이불을 쥐고는 리지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벽 쪽으로 당겼다.
“그거 아세요?”
그러나 그런 예르넨을 지켜보던 리지는 손짓을 했고, 그 손짓에 기사들이 다가와서는 예르넨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쿵.
불길함을 예감한 짐승처럼 예르넨의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었다.
“뭐 하는 짓이냐! 이거 놔!”
기사들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예르넨의 무릎을 꿇리고 종아리와 팔을 결박한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틈에 가까워진 리지가 천천히 예르넨의 옷을 끌어 내렸다. 그 손길에 새하얗고 여린 나신이 드러났다.
“폐하를 설득하느라 힘들었어요.”
“뭐?!”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짓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당황하던 예르넨은 헤리엇의 이름이 거론되자 얼굴을 가득 찌푸린 채 거친 말투로 쏘아붙였다.
“지금… 지금 네가 내게 이런 미친 짓을 하려는 걸… 헤, 헤리엇이 허락했다는 거야?”
“물론이죠.”
그렇게 말한 리지의 손이 예르넨의 바지춤 사이로 파고들었다.
“…!”
예르넨은 온몸을 비틀며 거세게 저항했다.
“이거 놔!”
그 몸짓에 예르넨을 붙든 두 명의 기사가 이를 악물고 그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와… 일부러 나흘이나 굶겼는데 아직도 팔팔하시네요?”
“뭐?!”
예르넨이 허망한 얼굴로 리지를 바라봤다.
이번 달에도 식량의 배급은 늦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이틀이었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러나 실질적으로 예르넨이 물로만 겨우 연명한 것은 나흘이 맞았다.
예르넨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지를 바라봤고 리지는 샐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야… 저어기 보이는 궁이 제 궁이기 때문이죠.”
“…?”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대로 황후가 사용하는 궁은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대한 호수가 있는 황성의 북부는 말 그대로 낙후된 곳이어서 황궁에 속해 있되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호숫가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궁이 황후의 궁이라니.
예르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는 것을 느꼈다.
“늘 전하를 지켜보기 위해서 제가 특별히 저 궁을 가지고 싶다고 폐하께 말씀드렸답니다?”
“…뭐?”
“잘 좀 잡아 보아라, 전하께서 아직도 힘이 넘치시잖니?”
“너…! 으윽…!”
예르넨은 분노해서 리지에게 따지려 들었지만, 남은 기사마저 가세해서 압박해 오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예르넨은 걸치고 있는 옷이 모두 찢어발겨진 채 사지를 결박당했고, 리지는 그런 예르넨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예르넨의 성기를 매만졌다.
“하지 마…!”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소리를 치는 것뿐인 예르넨은, 옷을 다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발가벗겨졌다는 사실에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면서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리지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전하, 그렇게 보시면… 이 리지, 오싹오싹하옵니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리지 메리온은 정말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뭐 이런 미친…! 으윽, 만… 만지지 마!”
리지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하늘에 군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고하시던 전하께서 이렇게, 비천한 취급을 받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으로, 이 리지를 보고 계시네요. 하아.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순간을, 얼마나 그려왔는지. 전하께서는 모르시겠죠?”
“…!”
예르넨은 리지를 노려봤으나 리지는 그런 예르넨에게 푹 하게 웃어 주고는 허리께를 쓸어 대면서 아인즈에게 말을 걸었다.
“아인즈 경.”
예르넨은 벌레가 기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끔찍한 촉감을 느끼면서, 아인즈가 허리춤에서 꺼내 드는 무언가를 보자마자 움찔했다.
“그, 그건 뭐야!”
“아아.”
리지는 물약이 보이는 것을 예르넨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전하께서는 모르시겠군요. 전하와 저의 관계를 조금… 도와주는 약이지요. 처음이시라서 제대로 하지 못하실까 봐 준비해 봤어요.”
그렇게 말한 리지는 기사들에게 손짓했고 예르넨의 상체를 결박하고 있던 아인즈가 예르넨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읍…!”
예르넨은 부들부들 떨면서 짙은 배신감이 느껴지는 눈으로 아인즈를 올려다보았다. 한때 아인즈는 예르넨을 지키는 기사였다. 허나, 그날 밤 예르넨을 이 섬까지 끌고 온 것도 아인즈였다.
이제야 알았다. 그는 헤리엇이 붙여 둔 끄나풀이었다는 것을. 그 충실하고 순종적이던 태도 모두가 거짓이었던 것이다.
“자아, 전하. 드세요.”
리지가 강제로 벌려진 예르넨의 입안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삼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전부 흘려 넣고는 입과 코를 모두 막아 버리자 참지 못한 예르넨은 결국 약을 마시고 말았다.
“컥…! 콜록, 콜록!”
약의 일부가 기도로 흘러 들어갔는지 예르넨은 거세게 기침을 했다. 그 와중에도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과 조금이지만 허기가 가시는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에 다시 비참해졌다.
그리고 한 차례 더, 리지가 새로운 약병을 같은 방식으로 예르넨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예르넨은 전보다도 더 거세게 반항을 했고, 때문에 미처 다 흘러 들어가지 못한 우윳빛 진득한 액체가 예르넨의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지독히도 색정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긴 고통의 시작이였다.
* * *
리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떠나갔다. 그리고 마치 적선이라도 하듯이 두툼한 옷 한 벌과 평소에는 볼 수조차 없던 흰 빵과 예르넨이 좋아하던 초콜릿 따위가 들어가 있는 식재료 바구니를 남겼다.
예르넨은 한동안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침대 구석에 박혀 있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서 차디찬 물로 몸을 닦았다.
“하아, 하아.”
더러운 것을 모조리 닦아낸 예르넨은 뒤이어 화대처럼 놓여 있는 두툼한 옷을 들어서는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리지의 손이 닿았던 찢어진 옷도 마찬가지였다. 이불마저 던져 버리려는 듯이 들고 있던 예르넨의 눈이 불빛을 받아서 일렁였다.
“흐으….”
차마 이불만은 태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 진짜로 얼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억울함을 가득 담은 눈이 그렁거렸다.
오늘 입고 있었던 옷은 예르넨이 가진 옷 중에서 그나마 제일 따뜻한 옷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거라곤 그것보다 발목과 팔목이 손가락 한 마디는 더 드러나는 옷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저 옷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빌어먹을 정도로 쓰잘데기없는 자존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옷을 다 꺼내 덮어도 당장 얼어 죽을 이 계절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 때문이라도 이번 겨울은 다른 겨울보다 유난히도 추울 것이다. 그러니 예르넨이 한 짓거리는 객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유린당한 대가로 주어지는 그런 옷 따위는 입고 싶지 않았다.
예르넨은 이불을 움켜쥐고 불가에 주저앉았다. 벽난로의 앞은 그나마 가장 따뜻한 곳이었지만 예르넨의 입술은 여전히 새파랬다. 그리고 화와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 남은 것은 의문이었다.
‘대체 왜 온 거지.’
도대체 이 섬의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르넨에게는 그저… 6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일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그리고 그 폭력적인 변화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만이 들 뿐이었다.
* * *
“귀여우신 전하.”
리지가 들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번 말씀드렸는데… 우리 영특하신 전하께서 학습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리 말하며 리지는 예르넨에게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저를 보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구시면… 이 리지는 도리어 오싹해진답니다.”
“…….”
예르넨이 리지를 살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예상했던 대로 이후에도 리지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예르넨을 찾았고 때로는 그 이상한 물약을 먹이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지 않으며 기사들을 대동해 예르넨을 짓밟곤 했다.
리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섬은 예르넨에게 끔찍한 공간이 되었고, 오두막의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그리고 리지가 올 때가 되면 예르넨은 무척이나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르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리지가 섬에 찾아오고 그다음 두 번까지는 예르넨은 미친 듯이 발악하며 리지와 기사들을 거부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제는 그저 모르는 척 시체처럼 누워서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리지는 지금까지 총 다섯 번을 섬을 오갔고 이것은 여섯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뭔가가 달랐다. 배를 타고 섬을 찾은 사람이 리지와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알버트 공작을 비롯한 고위귀족들이 있었고, 더 많은 기사가 있었다.
예르넨은 아직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그들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번엔 또 어떤 미친 짓거리를 벌이려는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헤리엇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폐하요?”
“그래.”
예르넨은 잔뜩 경계하면서도 리지에게 작은 의혹을 내비쳤다. 혹시, 헤리엇이 죽거나 변고를 당한 게 아닐까. 그랬기에 대를 이을 황손을 잉태할 필요가 있어서 예르넨을 찾은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폐하께서는 몸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지요.”
“…….”
“제국을 위해 과중하신 국무를 수행하시면서요. 기실 황족의 의무라는 것이 저희 귀족들을 돌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는지요.”
“…뭐?”
예르넨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눈에 힘을 주고 리지를 바라봤다.
“황가에서 태어났으면 무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리지 메리온.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찢어 죽일 것 같은 시선이었으나 리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망부석처럼 서서는 예르넨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괴상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사이, 리지의 웃음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이 기사들이 점점 가까워져 왔고 뒷걸음질 치는 예르넨이 벽으로 몰리자 그에게 달려들어 우악스럽게 사지를 결박했다.
“으윽…!”
“무슨 소리긴요, 전하께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뒤라도 대어 줘야 한다는 소리지요.”
“리지 메리온!”
예르넨이 온몸을 비틀면서 악을 썼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잘 훈련된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뚜벅거리는 발소리들이 가까워지고 이내 바닥으로 처박힌 예르넨의 시선에 신발들이 여럿 비쳤다.
한둘이 아니었다.
불안함에 예르넨의 호흡은 가빠져만 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지 메리온…!’
예르넨은 이를 빠드득 갈며 씹어 삼켜도 모자를 여자가 서 있을 곳을 바라봤다.
“황자 전하께서 그동안 어디 계셨는지 모두들 찾았는데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려.”
허허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버트 공작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공작.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녀석이 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랬던가요?”
예르넨은 그들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치고 저 북부의 광산으로 노역을 보내 버리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어…!”
“풉.”
어디선가 비웃음이 들렸다.
“가만히 두지 않겠다면 뭘 어쩔 텐가. 어차피 자네는 영원히 이 안에서 나갈 수 없는데 말이야.”
“뭐라고?!”
버럭 화를 내려던 참이었다.
“그럼 시작하게.”
“뭐… 뭐를 하려는 거야?!”
시작이라니.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냉정하려고 했음에도 볼썽사납게 목소리가 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허리께에 닿았다.
“하, 하지마!”
예르넨은 깜짝 놀라서 파드득 몸을 떨었다. 날카로운 가위가 그의 옷을 잘라내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하의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드러난 새하얀 엉덩이를 누군가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살집이 없군요.”
마치 짐승의 가치를 품평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장 손 떼지 못해?!”
예르넨은 발버둥을 치다 그를 차 내었다. 그러자 발에 채인 상대는 불쾌하다는 듯이 도리어 예르넨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차 내었다.
“아윽…!”
곧 멍이라도 들 것처럼 끔찍하게 아파 왔다. 허나 그 통증보다도 끔찍한 건 지독히도 밀려오는 수치심이었다.
하의를 찢기고 엉덩이를 걷어차이다니.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는 치욕스러움에 예르넨은 몸을 벌벌 떨었다. 눈가가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발긋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황족도 아닌데, 아무래도 아직 그 하늘 같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복종시킬 필요가 있겠어요.”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누가 누구를 복종시킨다는 것인가. 예르넨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
“아윽!”
허나 예르넨은 이제 그리 말을 한 상대를 째려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의 옆얼굴을 바닥으로 처박은 것이다.
“…!”
예르넨은 곧 헐벗은 엉덩이만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린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본 시야에 알 수 없는 기구들이 잡혔다. 처음 보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것들이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예르넨은 멀쩡한 척 소리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라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뭘 하긴, 베타 남창은 구멍이 더러워서 안을 수 없으니 뒤처리를 먼저 하려는 거지.”
“남… 창…?”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지칭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윽…!”
그리고 제대로 반박할 새도 없이 무언가가 그의 엉덩이 사이에 꽂혔고, 그 무언가로부터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아흑…! 놔아! 놓으라고! 아악!”
그 전까지의 반항은 장난이라도 된다는 듯이 예르넨은 미친 듯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들이 하려는 ‘뒤처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뒤처리라는 건 남자 오메가가 발현할 적에 행해지는, 뒤를 성기로 사용하기 위해 직장 내에 마법진을 새기는 시술이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기에 반드시 수면제나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는 약물이 들어간 뒤에야 시행되곤 했다.
또한, 남자 오메가가 아닌 다른 형질의 사람들이 받기에는 무척이나 변태적인 행위로 여겨져, 남성 베타 중에서도 밑바닥의 계급에 속하는 뒷골목의 남창들이나 하는 시술이었다.
“이, 이게!”
“으윽!”
차마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예르넨은 결국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반항에 성공해, 두 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뿌리쳤다.
“아악!”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머리채를 휘어 잡히고는 끌어당겨졌다.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느끼며 예르넨은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사 하나가 예르넨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깔아뭉개 왔다.
“으윽…!”
그 와중에 배를 눌리자 방금 들어왔던 얼마간의 물이 비질비질 새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그 광경을 들킬까 싶어서 예르넨은 힘이 안 들어가 벌벌 떨리는 몸으로 겨우겨우 항문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반항이 너무 심한데? 그거 가져와.”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은 짐승에게나 채울 법한 가죽 목줄을 가지고 왔고 예르넨의 희고 곧은 목에 목줄을 거칠게 채우고는 반대편을 쇠로 된 낡은 침대 프레임에 걸어 버렸다.
“반항하는 개는 묶어 둬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하.
여기저기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목줄을 채우고 추가로 세 명의 기사가 더 달려들어 압박을 한 뒤에야 꼼짝도 하지 못하는 예르넨의 뒤로 다시 예의 차가운 물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흐윽…! 그, 만해…!”
물은 순식간에 배를 가득 채웠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 차가움에 벌벌 떨면서도 예르넨은 제 배가 터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고개를 내려 살핀 배가 평소와 다른 모양새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두 눈에 글썽이는 눈물이 맺혔다.
“흐으으, 흐으으.”
그러나 두려움보다 예르넨을 작아지게 만든 것은 겁에 질린 예르넨의 전신을 훑듯이 살피는 열 쌍의 눈초리였다.
비참하고, 죽고 싶었다. 지금껏 이 엷은 목숨줄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조차 흐려질 만큼, 당장이라도 자결을 하고 싶은 끔찍한 수치였다.
“아흑…!”
상의가 빠듯해질 정도로 배가 부풀어 올랐다.
“…거야.”
“으응?”
겁에 질린 예르넨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알버트 공작이 되물음을 했다.
“지금 뭐라 하셨소, 황자 전하?”
“죽, 죽을 거야. 배가 터져, 죽을 거야.”
흐으으.
겁에 질린 작은 신음이 뒤를 이었다.
“풉.”
“하하하하!”
예르넨을 둘러싼 인간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그리 쉽게 죽지 않지.”
하지만 말과는 달리 다행히도 물은 더 이상 밀려들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흐윽….”
이제 더 이상 기사들은 예르넨을 결박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르넨은 목줄이 허락하는 한 가장 구석에 처박혀서는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눈으로 그를 둘러싼 눈들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은 각자 다른 곳을 향했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것이 예르넨의 신체라는 사실에서는 일맥상통했다. 누군가는 예르넨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누군가는 예르넨의 부풀어 오른 배를, 누군가는 예르넨의 새하얀 엉덩이를, 누군가는 그 아래에 가느다랗게 뻗은 종아리를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
그러나 시선 같은 건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예르넨의 머릿속에는 당장 뒤에 가득 들은 물을 배출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뒤는 막아주는 것조차 없었기에, 정신이 흐트러질 때면 비질 거리며 더러운 물이 새어 나왔다. 양다리를 비비 꼬아 앉으면서 예르넨은 겨우겨우 변의를 참아 내었다.
얼굴이, 등이, 전신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당장 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내고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절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들어갈 때는 물뿐이었지만 나갈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광경을 여기 있는 이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콧대를 타고 눈물 섞인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화… 화장실에… 보내 줘.”
예르넨은 눈을 치켜뜨면서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지독히도 모멸감을 준 이들에게 사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다시 울컥, 하고 눈가에 눈물이 고여 왔다.
“그럴 수는 없지요.”
“뭐?! 그, 러면 지금 여기에서…! 그 짓을 하란 말이야?”
“그 짓이 뭔데 그러십니까?”
예르넨은 이를 으드득하고 갈면서 방금 말한 이를 쳐다봤다. 페트라 후작…! 대대로 가문에서 교황을 배출한 데다 형이 현역 교황씩이나 되는 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지금 몰라서 물어?”
그리 말한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폈다.
“벌써 10분이 지났네요. 본디 뒤에 마개를 한 이들도 참기 힘든데… 참으로 잘 이겨 내셨습니다. 소질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뒤를 조이는 소질 말입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예르넨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화를 내었다. 하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 중앙의 외딴 섬에 갇힌 예르넨 헬리오. 한때 선황과 선황후의 사랑을 받고 북부의 제왕, 벨티모어 대공의 반려가 될 예정이었던 금지옥엽은 이제 그들이 마음대로 주물러도 될 성노예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해 있었으니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지.”
“뭐…? 하윽…!”
기사 하나가 구석에 쭈그려 있는 예르넨의 발목을 쥐어 잡고는 들어 올렸다. 그 거친 손짓에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깊은 곳에 자리한 구멍이 모두의 앞에 공개되고 말았다.
“싫, 싫어…! 싫어! 으윽!”
움찔…!
깜짝 놀라 순간 힘 조절에 실패한 예르넨의 뒤에서 더러운 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뚝, 뚝.
물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끔찍했다.
“흐윽, 흐….”
하지만 예르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벌려라. 이 자리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하지 마아!”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기사들은 무자비한 손길로 예르넨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이내 누군가의 손이, 이제는 축축해져 버린 가랑이와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끔찍하고 추잡스러운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손이 결박되어 할 수가 없었다.
“으흑, 흑….”
“하하하!”
예르넨의 가랑이 사이에서 끔찍한 촉감과 더러운 냄새가 올라왔다. 예르넨은 입술을 짓씹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몰라하다가 이내 분한 얼굴을 하고는 눈을 치켜뜨고 알버트 공작을 노려봤다.
불긋한 눈가에서 주륵주륵 흘러나온 눈물이 수치심에 잘게 떨리는 뺨 위로 흘러내렸다.
“더러워도 이리 더러울 수가 있는지요.”
“이거, 오물 냄새가 지독하군요.”
잔뜩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코를 잡아 쥐고서는 여기저기서 예르넨을 비웃는 말들을 흘렸다.
“으윽…!”
예르넨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들을 모두 노려보았다.
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군들 이런 더러운 광경을 본다면 성욕 따위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 같던 막내 황자가 비참한 꼬라지로 전락한 것을 보고 있는 모두의 아랫배 속에는 들끓는 정염이 자리했다.
알버트 공작은 아랫도리가 뻐근해짐을 느끼며 말했다.
“계속해라.”
그 소리에 기사들이 다시 우악스럽게 예르넨의 얇은 팔을 잡아챘다.
“하지 마!”
기사들은 예르넨을 실례한 아이같이 다루었다. 끌려 일어나는 예르넨의 사타구니에 몇 번이고 물이 끼얹어졌다. 그리고 기사들과 시동들의 손길에 의해 순식간에 오두막은 다시 청결해졌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것은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직감은 언제나 정확했다.
“뒤처리를 다시 이어 하도록 하지.”
“흐윽…!”
그 말에 예르넨의 고개는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고 엉덩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세워졌다.
“이거 놔!”
다가올 고난을 예감하며 수치로 달아오른 새빨간 몸이 바르작대었지만, 고작 감자 따위로나 몇 년을 연명한 가느다란 몸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잘 훈련된 기사들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내 예르넨의 엉덩이 사이로 다시 물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차가움에 예르넨은 파드득 떨며 몸을 비틀어 댔다.
“아흑…! 으흑…!”
흘러들어오는 물에 저항하기 위해 양 엉덩이는 움푹 패일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갔지만 헛된 저항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한 지독히도 비참한 처사에 예르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쉼 없이 뚝뚝 떨어졌다.
“흐윽… 끅…!”
그리고 한번 무너진 감정은 더 이상 절제할 수 없어졌기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허나 예르넨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이 비참해하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 얼굴이,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음심을 더욱 부채질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쪼르륵.
듣기에도 수치스러운 소리가 다시 한번 아래에서 새어 나오자 더 이상 빨개실 수도 없을 만큼 새빨간 예르넨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놔줘….”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가 형편없게 흘러나왔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을 잡은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다섯 번이나 관장을 당한 예르넨은 저항할 힘도 없이 축 늘어져서는 그저 기사들이 벌리는 대로 벌리고는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배설할 뿐이었다.
초점 없는 눈이 아래를 향했다. 이제 대야에 고인 것은 투명한 물뿐이었다. 안이 모두 비워졌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그 소리는 이제 곧 직장 내에 마법진이 새겨진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아프다던데.’
역시나 이들은 예르넨에게 수면제든 진통제든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랬기에 어떤 고통이 따를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프다는 걸 안다고 해도 예르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이자 다시 눈물샘이 여려지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대단해서 타인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예르넨이었지만 처음 내던져진 폭력적인 상황은 그런 그를 속수무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였다.
역시나 기사들은 다시 예르넨의 고개를 처박았다. 하지만 그다음은 예상 밖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구의 촉감이 엉덩이께에 닿은 것이었다.
“으윽…! 이게 무슨…!”
예르넨은 엉덩이를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뒤로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인즈에 의해 우악스럽게 바닥에 처박아진 고개는 전혀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
예르넨의 눈이 충격에,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뜨였다. 무언가 얇고 말랑한, 허나 날렵한 것이 예르넨의 안에 파고들었다.
“으윽…! 윽…!”
다섯 번이나 물을 머금고 뱉어 낸 예르넨의 속은 녹진하게 기구를 받아들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배출의 용도로만 사용한 부위에 기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인다는 사실에, 또 그 기구가 쉬지 않고 더욱 깊숙이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윽…!”
얇은 기구가 정말로, 끝도 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흐으, 흐.”
이미 한참이나 밀고 들어온 것 같은데도 부족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더욱 밀고 들어온 기구가 아랫배에까지 올라온 것 같아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더한 충격이 예르넨을 덮쳤다.
“으흑…! 이, 이게 대체 무슨… 아흑…!”
끝을 모르고 들어오던 그 기구가 멈추고는, 배 안쪽을 긁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악…!”
예르넨은 뒷목을 꺾어 올리며 척추를 타고 올라가는 끔찍한 감각들에 몸서리를 쳤다.
“하하하!”
고통받는 예르넨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주변에서 잔뜩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예르넨은 제 호흡과 남자들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서 먹먹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으윽…! 흑…!”
그렇게 한참이나 속을 긁어대던 기다란 기구는 내벽을 모두 훑어냈는지 마치 뱀이 빠져나오는 것 같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체… 뭘 한 거지…?”
예르넨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려고 하며 위협적으로 대신들에게 쏘아붙였다.
“흐윽…!”
그러자 구둣발이 예르넨의 볼기를 벌리고, 퉁퉁 부어오른 새빨간 구멍을 짓눌렀다.
“전하께 이 더럽고 지저분한 구멍으로 저희의 소중한 양물을 받아들이셔야 하는데 고작 배 속을 비우는 것만으로는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너…!”
예르넨이 분노로 몸을 떨며 페트라 후작을 노려보았다.
“감히…! 감히…!”
너무 분노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으려고 했다.
“감히… 대대로 황가를 수호해야 하는, 교황을 배출하는 가문의 수장인 네가…!”
말끝에 옅은 울먹임이 묻어났다. 그 울먹임을 들은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의 새하얀 엉덩이에서 발을 뗀 뒤 예르넨의 앞으로 와서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치켜올렸다.
“흐윽…!”
“저런… 하지만 저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신께서 벌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졌어야지요.”
그는 어딘가 분노에 찬 것 같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 않습니까? 사실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께서는 당신들 황족을 도구로만 사용할 뿐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 비열한 미소가 담긴 젊은 얼굴의 후작은 예르넨의 양 볼을 아프게 눌렀다.
“으윽…!”
그리고 작게 벌어진 예르넨의 입안으로, 알약 하나를 흘려 넣었다. 예르넨은 혹여나 그 약이 리지가 매번 먹여 왔던 이상한 약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기에 먹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쳤다.
“먹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느끼게 될 통증이, 혀를 빼물고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할 텐데.”
“…!”
예르넨의 커다랗게 뜨인 눈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화대라고 생각하십시오. 앞으로 전하께서 제 욕구를 풀어 주실 테니, 그에 대한 대가를 미리 지불하는 거죠. 다른 분들에 비해 신사적이지 않습니까?”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페트라 후작의 손이 예르넨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예르넨은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바로 알약을 뱉어내 버렸다. 엄지손톱 크기의 새하얀 알약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화대 따위 필요 없어. 차라리 죽여라.”
예르넨이 눈물이 가득 달린 눈을 하고서는 표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하. 이 와중에도 자존심은.”
페트라 후작은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 예르넨에게 비웃음을 흘리고는 그 알약을 구둣발로 밟아서 뭉그러뜨려 버렸다.
“전하, 전하 하니까 아직도 당신이 귀애받는 황족인 것 같습니까?”
“뭐…?”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예르넨의 귓가에 속삭였다.
“더러운 남창 주제에.”
“…!”
페트라 후작이 다시 허리를 펴고 예르넨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 개새끼야!”
예르넨의 입에서 험한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안에서 그런 예르넨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고상하신 얼굴로 입이 험하시네요. 뭐… 좋습니다. 은혜를 좀 베풀어 보려고 했는데… 거절한다면, 직접 겪어 보시죠. 제발 약을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페트라 후작이 차게 웃으며 그를 잔뜩 노려보는 예르넨에게 말했다.
“통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말씀하세요. 제 구두 바닥을 핥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하셔도 되니까요.”
“절대 그럴 리는 없어!”
예르넨이 이를 갈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뭐, 그러시다면야. 볼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시작하시죠, 공작.”
“그러지. 아인즈 경.”
예르넨의 뒤에서 무언가 부산스레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철로 된 도구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예르넨은 움찔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의 오두막 바닥에는 쇠말뚝이 박혔고, 예르넨의 양팔과 다리엔 수갑과 족갑이 채워져 그 말뚝에 연결이 되었다. 저항은 전혀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리고 다가올 고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벌벌 떨고 있는 예르넨의 뒤에 차갑고 미끈거리는 점액질의 액체가 발린 쇠가 닿아왔다.
“…!”
직전과는 달리 얇지도, 말랑하지도 않은 그 커다란 쇠몽둥이가 주는 중압감에 예르넨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 아흑… 아파… 아파….”
자존심을 세우며 결코 약한 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몇 초 전의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처음 겪어보는 고통은 예르넨을 한없이 약해지게 만들었다.
“으흑…끄윽…!”
어디까지 밀려오는지 모를 그 막대에 예르넨의 얼굴은 서서히 공포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딘가까지 밀려간 그 기구는 막힘없이 휘어지고 파고들어 와서는 끔찍한 복통을 일으켰다.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는 예르넨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꺾은채 꺽꺽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한참을, 도저히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간 그 기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예르넨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의 아주 깊숙한 곳이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뜨끈한 내부에까지 닿아와 여린 점막을 아리게 만들었다.
“아흑…! 아악!”
짤랑, 짤랑, 짤랑!
예르넨의 발작을 따라서 구속구가 속절없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예르넨은 몸이 산 채로 둘로 쪼개지는 끔찍한 감각을 느꼈다.
둘러싸고 있는 상대들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르넨의 입에서는 연신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파! 아파! 아흑…! 아파…!”
정신을 차릴 수도 없는 끔찍한 통증에 두 눈을 타고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런, 이런 거로 아파하시면 되겠습니까? 전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리 말한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의 엉덩이를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겨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렸다. 뒤로 다가온 이들이 예르넨의 가랑이 사이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게 느껴졌다. 예르넨은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벽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엉덩이를 숙이려고 했다.
“으윽…!”
더욱 삽입이 깊어지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하체를 숙이려 했으나, 누군가의 손이 그런 예르넨이 허리를 숙일 수 없도록 고정해 왔다.
“당…장 놔!”
하지만 발악에 가까운 예르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꿈틀거리는 걸 보세요.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는 어리던 전하를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소질이 있으실 것을요.”
소름 돋는 손길이 예르넨의 곧게 뻗은 등줄기를 훑었다.
“그나저나 아직 팔팔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아이들은 이 정도까지 이르면 전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말이죠.”
“재능이 있으신 게지요.”
“어디 한번 이다음에도 견디실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럼 이제 하는 겁니까, 르크루제 후작?”
“하하! 물론입니다.”
“천한 남창이 감히 르크루제 후작에게 마법진이 새겨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군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 말한 르크루제 후작이 예르넨의 훤히 벌어진 엉덩이골 사이의 구멍 안을 유심히 살폈다.
“속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고는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예르넨의 몸 안으로 약물을 흘려 넣었다.
“흐윽…!”
‘이… 이상해…!’
기구가 넓히지 못한 안까지 흘러 들어간 약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예르넨의 안을 난폭하게 넓혀 가기 시작했다. 예르넨의 허리는 그 폭력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편해지고자 잔뜩 휘어졌다.
허나 애석하게도 그 몸짓 덕분에 더 넓은 공간을 개척할 수 있게 된 약물은 예르넨의 안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우욱….”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이 끔찍이도 괴로웠다. 예르넨은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만해….”
하지만 여전히, 예르넨에게 건네져 오는 것은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조소뿐이었다. 그리고, 몸을 열어 대는 지독한 통증을 더 이상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겨우 견뎌내는 예르넨에게 그 전까지의 고통은 그저 장난이었다는 듯이, 신경이 발기발기 찢어지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허억…!”
눈이 커다랗게 홉뜨였다.
“아악!”
횃불을 몸 안에 집어넣고 산채로 태워진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아랫배의 안쪽에서 끔찍한 작열감이 들자 예르넨은 체면이고 뭐고 신경을 쓰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르크루제 후작이 흘려 넣은 약물이 작은 칼날이 되어 예르넨의 내벽 안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뱃속을 잘 벼린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입을 뻐끔대며 배를 끌어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빛이 꺼진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짓밟힌 벌레같이 꿈틀거리는 예르넨의 모습을 대신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공연을 보는 것처럼 즐거운 눈을 하고 관람했다.
“허억… 허억….”
거의 끊겨가는 숨을 이어가면서, 흐려지는 청각 속으로 르크루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하면 노예들이 제일 고통스러워하더군요.”
‘아파….’
굽힐 수도, 그렇다고 펼 수도 없이 뱃속에서 일어나는 불길에 예르넨은 정신을 차릴 수도, 더 이상 몸을 세울 수도 없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예르넨의 몸을 페트라 후작이 받쳤다.
“시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세를 바꾸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
“흐으….”
예르넨은 힘없는 몸으로 겨우겨우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그때였다. 르크루제 후작이 두 번째 약물을 예르넨의 안으로 흘려 넣었다. 마석을 갈아 넣은 그 약물은 잔뜩 난도질당한 예르넨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 마법진의 궤도를 따라 선회했다.
살아 있는 몸에 마법진이 새겨지는 그 감각은 지독히도 끔찍하다고 여겼던 내벽이 난도질할 당했을 때의 통증과 비교한대도 정말이지 댈 수 없을 정도의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어디 이제 제 구두 바닥을 핥을 생각이 드셨는지요?”
꺼지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예르넨은 결국 끔찍한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처음 느껴진 감각은 청각이었다.
“허억, 허억.”
귓가에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통증이었다.
“우웁….”
가장 아픈 것은 아랫배, 그리고 꼬리뼈와 척추였다. 그리고 한 번 고통을 자각하기 시작하자 전신에서 크고 작은 통증들이 전부, 여과 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느껴진 것은, 짐승들의 손길.
예르넨은 눈을 번쩍 떴다.
알버트 공작이 예르넨의 머리를 잡고 올라타고서는 냄새나고 흐물흐물한 성기를 입안에 집어넣고는 왕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커헉…!”
숨이 모자란 예르넨은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여전히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기에 전혀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예르넨과 눈을 마주친 알버트 공작은 예르넨이 그의 성기를 물어 버리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재빨리 예르넨의 볼을 움켜쥐었다.
“우웁!”
결국, 예르넨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액과 타액이 엉겨 붙어 지저분해진 털이 코끝을 스치는데도 가만히 당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알버트 후작의 몸통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예르넨의 뒷구멍을 탐하고 있었다. 허벅지를 움켜쥔 손의 주인이 연신 예르넨의 구멍 안으로 제 성기를 들이밀었다 꺼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끔찍해.’
투명한 눈물이, 정액으로 더러워진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뜨겁게 달아오른 눈꺼풀을 내리자 눈가에 잔뜩 고여 있던 눈물이 굵은 궤적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더러워.’
예르넨은 아랫배에, 입안에, 엉덩이에 닿아 오는 끔찍한 타인의 손길에,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다. 전부. 가장 잔인한 처벌을 내려서, 이런 짓을 한 것을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가 이 지옥에서 그를 꺼내 주기를.
* * *
“…….”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타액과 정액이 엉겨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몇 번씩이나 정액이 끼얹어졌기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내벽 안에는 어찌나 정액이 가득 차 있는지 숨을 쉴 때마다 다물어지지 않는 구멍을 타고 덩어리진 정액이 흘러내렸다.
“정말 대단한 명기였어요.”
르크루제 후작이 그리 말하며 예르넨의 다리를 휘적 들어 올리고는 드러난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프게 때렸다. 움직일 힘조차 없는 예르넨은 반항했던 처음과는 달리 그저 움찔거릴 뿐, 대거리하러 달려들지 않았다.
“폐하께 말씀드린 것보다도 시간을 훨씬 많이 지체해 버렸군요, 이거.”
“그래요, 이만 가십시다.”
몇몇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구둣발 소리 하나는 멀어지지 않고 도리어 예르넨에게 다가왔다. 가죽구두가 예르넨을 툭 하고 쳤다.
“혹여나 전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
하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일 벨티모어를 기억하십니까?”
움찔.
미동도 없던 예르넨의 몸이 일순, 작게 움직였고 페트라 후작은 예리하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파혼한 지가 언제 적인데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십니까?”
페트라 후작이 정액 범벅이 된 지저분한 애쉬블론드를 쥐고는 끌어 올렸다.
“흐윽….”
예르넨의 목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그 자식이 그립습니까?”
“흐으….”
“저런, 그런가 보네.”
여기 가둬 뒀는데도. 작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으윽!”
뱀같이 사이한 목소리가 예르넨의 귓가를 간질였고, 머리칼을 뜯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당겨왔다. 예르넨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손을 겨우겨우 움직여 그를 밀어냈다.
“우웁…!”
하지만 그 같잖은 밀어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의 머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볼을 아프게 잡아 입을 열고 그 안을 폭력적으로 유린했다.
“흐으….”
치열과 치열이 맞닿는, 학대에 가까운 키스가 이어졌다. 예르넨은 여전히 힘이 실리지 않는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아, 하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페트라 후작의 입술이 예르넨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럼 이거 하나 알고 계십시오. 폐하의 진언이십니다. 만약, 자결하여 신의 피를 이은 황가를 더럽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벨티모어 대공이 전하의 저승길 동무가 될 거라고 하십니다.”
“…!”
페트라 후작은 품에 안은 예르넨의 몸이 차갑게 경직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럼, 다음 연회 때 뵙지요.”
그리 말한 페트라 후작은 예르넨의 머리채를 가지고 놀다 버린 인형처럼 던져 버렸고 예르넨은 힘없이 오두막의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하하.
빌어먹을 웃음소리들이 멀어지는 게 들려왔다. 아마도 배를 타고 섬을 나간 것이리라.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예르넨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벽빛이 밝아올 때야 깨어난 예르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여기저기가 끔찍한 통증을 호소해 왔다. 그 통증을 느끼며 예르넨은 말없이,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오두막을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 몸은 속절없이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예르넨은 다시 걸었다. 몇 번을 쓰러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예르넨이 한참을 기다시피 해서 도착한 곳은 호수였다. 거대한 물이 넘실거리는, 아직도 공포스럽기만 한 검은 물.
이제 막 떠오른 새벽빛이 주변을 시리게 물들이고 있었다. 밤의 끝을 알리는 빛이었다. 밝아지는 하늘이 그 지독한 지옥이 이제는 모두 끝나 버렸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예르넨은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몸으로 겨우겨우 물가에 다다랐다. 혼곤한 와중에도 검은 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때는 아직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추운 겨울이었다. 평소라면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고서도 춥다면서 동동거렸을 터다. 하지만 예르넨은 추위보다도, 짐승들이 흘린 더러운 체액으로 범벅이 된 몸을 닦아 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으.”
예르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미끌거리는 체액이 모두 씻겨나갈 때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한참을 곱아드는 손으로 차가운 물을 끌어다가 몸을 씻었다. 작은 부딪침에도 손이 깨질 것 같이 완전히 꽁꽁 얼어붙었지만, 예르넨은 미친 듯이 몸을 씻어 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심연이 보이지 않는 물을 바라볼 때면 구역감이 일고 머리가 핑 돌았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더러워… 더러워.’
더럽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어 몸을 씻은 예르넨은 주저했다.
아직, 씻어야 할 곳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눈가에 그렁이게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더러운 놈들의 흔적을 몸에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예르넨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은 뒤 가랑이 사이를 벌렸다.
움찔.
퉁퉁 부어올라 새빨개진 항문에 깨질 듯이 차가운 손이 닿자 칼로 살을 저미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빼내야 해.”
그렇게 중얼거린 예르넨은 벌리는 것만으로도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안을 겨우겨우 열고, 자꾸 허물어지려고 하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끄으윽….”
간신히 아랫배에 힘을 줄 때마다 울컥거리며 덩어리진 정액이 빠져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힘을 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액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기에 예르넨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안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울컥.
눈물이 다시금 올라오고 눈 아래에 잔뜩 고여서 잔디마저 흐리게 보이게 했다.
“윽… 흑….”
아무리 정액을 빼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제길….”
물로 열심히 씻어 냈는데, 아무리 씻어도 코끝을 맴도는 더러운 사내들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더러워… 더러워…!”
‘여전히 남아 있는 게 분명해.’
이미 아침이 밝아왔는지 세상은 점점, 밝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벽 속을 씻어 내던 예르넨은, 그 밝아 오는 빛을 보며 아무리 씻어 낸들 결코 더러워진 자신이 깨끗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윽, 흑.”
목 너머에서 울음이 밀려 나올 것만 같았다.
간신히 그 울음을 억누른 예르넨은, 그제야 전신이 깨질 것처럼 차갑게 얼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온몸이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가지고 나온 얇은 담요를 둘러썼다. 정액이 묻어 지저분한 그 담요를 걸쳐봤자 여전히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예르넨을 너무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예르넨은 목에 걸려 있는 로켓 펜던트를 쥐었다.
안을 열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감히, 안을 열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라일.”
예르넨은 메어오는 목으로 조용히 라일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웅크렸다. 잔뜩 고여 있던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라일….”
록시에는 말했다.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는 예르넨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꼬옥 손을 붙잡고 밤을 보내면 생긴다고.
관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답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아챈 예르넨은 코웃음을 치며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진정 아이를 갖는 밤을 보낸다면, 그것은 반드시 라일과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이인 세실처럼 성인이 되어서, 모두에게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리고 벨티모어 대공령으로 떠나서 라일과 첫 밤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예르넨은 이제 록시에의 말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을 보낸다는 것은 아마도, 간밤에 예르넨이 했던 그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단 한 사람과만 밤을 보내고 아이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에게 서로만이 있어야 하는 아주 숭고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예르넨은 어쩐지, 이제 라일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만 주고, 그 역시 예르넨에게만 줄 것이라고 생각한 몸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으흑… 라일….”
파혼을, 했으니까. 이제 서로에게 유일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것을 아는데도.
“라일….”
라일이 보고 싶었다.
펜던트를 꾹 쥐고 얼굴에 가져다 댔다. 마치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 같은 무척이나 간절한 몸짓이었다.
“흐흑, 라일….”
꽉 쥔 두 손 위로 연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데리러 와 줘.”
짐승들의 흔적으로 뒤덮인 초라한 어깨가 비참하게 떨려 왔다. 예르넨의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호수 너머의 어딘가에 있을 북부를 향했다.
“데리러, 와 줘…!”
그 말을 하자 이내 7년의 시간 동안 꾹꾹 억눌러 왔던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윽, 흑! 흐엉!”
예르넨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서 엉엉 울었다.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면서, 그렇게 아이처럼 울어 버렸다.
“나, 흐흑, 나가고 싶어!”
7년 만에 처음 꺼내 본 진심이었다.
“내보내, 흐윽, 내보내, 줘! 으흑!”
괜찮은 척, 의연한 척 버티고 있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스스로를 놓아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버텨 왔다.
배를 곯을 때도, 며칠이나 끼니를 거르는 게 익숙해졌을 때도,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변변한 이불 하나 덮지 못해 비참해졌을 때에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리지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당했을 때도.
모두 참아 왔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었다. 고귀한 그를 저 밑바닥의 남창처럼 다루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 더러운 손길이 아직도 전신을 훑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참하고 끔찍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모멸적인 처사에 예르넨은 목숨이라도 끊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럴 수조차 없어졌다. 그랬다가 혹여나 그들이….
‘라일을 죽이면 어떻게 해.’
“으흑, 끅, 끄윽!”
예르넨은 주먹을 쥔 손으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세실이, 라일이, 너무 보고 싶었다.
예르넨은 이 공간 안에서 그를 구해낼 수 있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목놓아라 울부짖었다. 하지만, 결국 예르넨이 사랑하는 이들보다 먼저 예르넨을 찾은 것은 예르넨을 짓밟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예르넨은 그가 그리워하는 이들이 그를 구하러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계속 흘렀고, 예르넨을 욕보이는 이들은 이제 주기도 없이 쉬지 않고 섬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렇게 겨울만큼이나 차갑던 봄과 무더운 여름이 지나간 뒤에.
예르넨은 결국 모든 기대를 저버렸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