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예르넨.”
“예에.”
“이제 신혈의 맹세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예에.”
예르넨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그저 손안에 있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루하냐?”
“예에.”
“녀석.”
큼지막한 손이 그런 예르넨의 조그마한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려면 이런 지루한 시간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단다.”
예르넨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그놈의 황제. 될 생각도 없는데.’
그의 아비는 매번 입버릇처럼 황제가 되려면, 황제가 되려면 하고 말했다.
“황제는 형님이나 하시겠지요.”
“하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자리를 너는 그저 귀찮아만 하는구나.”
“뭐, 귀찮은 건 아니지만 법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예르넨은 여전히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메가는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음.”
베이넌은 맵시 있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예르넨. 이번에 여인인 데다 오메가임에도 불구하고 변경백의 직위를 물려받은 로지나도 있지 않으냐. 뿐이겠느냐? 바다를 호령했던 선대 포트넘 공작 역시 오메가였어. 오메가의 몸으로, 또 여인의 몸으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이들의 이름만을 적어도 이미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지경인데 요 귀여운 입은 매번 삼백 년도 더 전에 끝났을 법한 도리를 읊는구나.”
커다란 손이 조그마한 입을 아프지 않게 당겼다. 매번 걸어오는 장난이다. 예르넨은 탁 소리 나게 베이넌의 손을 쳐 냈다.
“치우십시오, 아바마마.”
“하하!”
버릇없기 그지없는 그 맹랑함에도 베이넌은 제 위에 앉아 무릎을 동당 거리는 막내아들을 그저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어떤 직위를 받든 그들의 자유의지입니다. 훌륭한 인재가 있다면 그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 역시 옳은 이치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황가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신의 자손이니만큼 더욱 법도와 규범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며 아랫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할 것 아니냐.”
“잘 알고 계시면서 또 장난을 치십니다.”
“하지만 예르넨. 생각해 보아라.”
“무어를요?”
예르넨이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질렸는지 황제의 서류 위에 무엄하게도 탁 소리를 내며 장난감을 올려놓고는 고개를 홱 들어 저를 내려다보는 아비와 눈을 맞춘다.
“누군가는 오메가임에도 황제가 되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
“그 후대의 황족들에게 본이 될 존재가 필요하고 말이다.”
예르넨이 인형 같은 입을 벌려 말을 이었다.
“장자 우선 승계의 원칙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형님이 두 분이나 계시고, 또 별 하자도 없으신데 제가 굳이 이 성가신 자리에 올라야 하는지요.”
그 말에 베이넌은 그만 이마를 탁 쳐 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래. 내가 졌다.”
“이제 지루하니 떠나겠습니다. 누이랑 티타임 선약이 있으니 아무리 아바마마라고 해도 방해하실 수 없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는 이 아비가 선약을 잡아도 되겠느냐?”
예르넨의 고운 미간이 팍하고 찡그려졌다.
베이넌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로서는 황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미리 알려 주려는 조기 교육을 한 것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퍽이나 지루한 시간이긴 했을 것이다.
“아니, 또 집무실에서 아비랑 놀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일 네 약혼자로 삼을 만한 녀석이 하나 황궁을 방문할 예정이어서 말이다. 우리 아드님이 한 번 보고 또, 평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예르넨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지루함에 반쯤 죽어 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제게 부하가 생기는 건가요?”
“아니… 부하는 아니고 약혼자….”
하지만 베이넌의 목소리는 예르넨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르넨은 이미 부하가 생긴다는 사실에 신이 나 버리고 말았으니까.
예르넨은 폴짝 일어나서는 베이넌의 두 다리에 앙증맞은 신발을 떡하니 올린 채 아주, 아주 기분이 좋을 때만 해 주는 볼 뽀뽀를 하고는 폴짝 뛰어내렸다.
“좋아요! 부하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아바마마! 이만 가 볼게요!”
그러고는 작은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베이넌의 집무실을 떠났다.
‘아니, 부하가 아니고 약혼자인데….’
예르넨이 떠난 자리에 베이넌은 그저 허허로이 웃음을 흘리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을 했다. 뭐, 누군들 감히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아들과 결혼을 하는데 부하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저 애 성격상 누가 되든 그렇게 될 거고 말이야.’
그런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베이넌의 눈이 어두운 빛으로 침잠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장 귀애하는 자식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예르넨은 정말이지 그의 자식 중 가장 뛰어난 아이였다. 고만고만한 자식 중에서 유난히도 튀었으니까.
그랬기에 베이넌은 반드시 예르넨이 그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헌데 정작 본인은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히려 예르넨이 욕심이 없기에 황가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지만… 베이넌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헤리엇 그 녀석은 너무 외가에 의지하는 면이 있어.’
대내외적으로 모든 이들이 그가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본 알파 아들인 헤리엇이 황위를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정작 그는 헤리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대계를 잇기에 헤리엇은 외가에 너무 물렀다. 그러니 예르넨이어야 했다.
뭐… 그것도 다 먼 미래의 일이었다. 아직 그는 창창했다. 네 자식이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건재할 터인데 너무 이른 걱정이었다.
비록 지금은 심드렁해 하고 있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룻밤에도 몇 번이고 변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르면 예르넨의 마음도 차차 바뀌어 가리라.
* * *
“어머, 오랜만이에요. 전하.”
“… 뭐야?”
세실과 즐겁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예르넨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의 낯을 바라보고는 얼굴을 형편없이 구겼다.
그의 큰형 헤리엇의 약혼녀인 리지였다.
“황후 폐하를 뵙고 오는 길에 두 분께서 티타임을 가지신다 하여 잠시 들렀습니다.”
예르넨은 떨떠름한 얼굴로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예르넨은 큰형을 좋아했지만, 형의 약혼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엽다면서 자꾸 여기저기를 만져 오는데 그 손길을 받을 때면 어딘가 더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곧 한 가족이 될 사람인데 너무 싫은 티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어머니와 누이의 간곡한 청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식으로만 응수하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귀여우시네요, 전하.”
헌데 예르넨의 얼굴을 향해 리지가 손을 뻗어 왔다.
찰싹.
“예르넨…!”
세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지의 새하얀 손등이 불긋하게 물들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리지, 미안하구나. 예르넨이 아직 어려서….”
세실이 애써 웃으면서 리지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 괜찮아요.”
하지만 리지는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묘해 보였다. 그 표정을 본 예르넨의 기분이 한층 더 나빠졌다.
‘저 표정이 기분 나쁘단 말이야?’
리지의 모든 것이 소름 끼쳤다. 표정도, 손길도.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예르넨은 그 손길에 숨겨진 의미를 알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고 기분 나빠 했다.
“저… 전하, 이만 폐하께 가실 시간이 되셨습니다.”
예르넨의 기분이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는 게 보이자 예르넨의 전속 시종 데이브는 재빨리 끼어들어 예르넨의 신경을 돌리려고 했다. 헌데 정작 원인의 당사자인 리지는 그런 데이브의 노력도 알지 못한 채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전하, 왜 이곳에 야만인이 있는 것입니까?”
“…?”
“예…?”
무슨 소리냐는 듯한 예르넨의 얼굴과 뜻을 알아채고 당황한 세실의 얼굴이 리지 쪽으로 돌아섰다.
“저자… 북부인이 아닙니까?”
“…뭐?”
리지는 동부의 수장 가문인 메리온 가의 고명딸이었다.
제국의 발원지인 동부와 남부의 귀족들은 대대로 문명인이라는 프라이드가 있는 집단이었다. 그랬기에 느지막이 제국의 영토에 편입된 북부인들을 공공연히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다니며 업신여기곤 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평민들 사이에서는 지역에 대한 차별을 부르짖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만의 선민의식을 갖는 일부의 고위귀족들은 북부인들을 얕잡아 부르곤 했다.
특히 북부에서 광산이 다수 개발되어 북부의 귀족들이 부유해지고 그들의 세를 넘어서며 자리를 위협해 오자 그런 비토는 더욱 심해졌다.
예르넨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현 황후인 록시에의 가문인 마리아쥬 후작가는 중부에 속하긴 했지만 북부에 치우쳐진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공공연히 북부의 가문들과 교류를 이어 갔다.
그런 의미에서 록시에가 혼인을 하면서 그녀의 손이 되어 줄 이들 몇을 데리고 왔고 그중에서 북부 출신이 다수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신임하는 황후궁의 시녀장 역시 북부인이었고 말이다.
록시에는 시녀장의 아이를 차차 예르넨을 보좌해 줄 이로 키우기 위해 곁에 붙여주었고 그것이 데이브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북부인에게 아무런 차별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감히 모두가 평등한 황실의 종복이어야 할 귀족 가문에서 저들끼리 급을 나누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르넨에게 있어서 리지의 발언은 무척이나 무례한 것이었다.
“너, 리지 메리온. 지금 뭐라고 했지?”
“아니, 전하! 어떻게 감히 전하의 곁에 저런 야만인이 있을 수가… 아악!”
예르넨이 리지의 뺨을 때렸다. 아직 어린 예르넨이었기에 곁에서 보기엔 그저 몸을 냅다 들이박는 거로만 보였다. 하지만 소리는 제법 세게 났고, 리지의 뺨은 붉어졌다.
평범한 귀족 영애면 울면서 뛰어갔을 것이다. 영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구든 예르넨의 손짓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했었다. 헌데 리지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멍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는 무슨 감히! 네 주제에 감히 내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
예르넨은 어린아이 특유의 쨍하고 높은 소리로 리지를 꾸짖었다. 제 것을 무척이나 끔찍하게 여기는 소유욕이 넘치는 어린 황족은 제 사람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곤 했기에 무척이나 화가 나 버리고 만 것이다.
예르넨의 화난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멀찍이 떨어져서 한가롭게 귀여운 어린 황족들의 티타임을 지켜보던 시동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허둥거리며 달려와서는 리지를 끌고 가다시피 하며 데리고 나갔다.
“다시 한번 데이브에게 그딴 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의자에 올라가서 고래고래 소리치던 예르넨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리지를 향해 제가 마시던 찻잔을 던지기까지 했다.
쨍그랑!
“예르넨!”
그 포악한 몸짓에 깜짝 놀란 세실이 예르넨을 끌어안았다.
“찻잔을 사람에게 던지면 어떻게 하니!”
“쟤가 나를 모욕하잖아!”
예르넨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기에 세실의 품에 폭 안긴 몸은 평소보다 훨씬 더 따끈해져 있었다.
세실은 예르넨의 등을 천천히 도닥였다.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이건 무척이나 나쁜 행동이란다, 다시는 잔을 던지지 않겠다고 누이에게 약속하렴.”
“황족에게 무례하게 대드는 귀족이 있다면 당연히 가르쳐야 해!”
“예르넨…! 우리 아기.”
세실은 품 안에 안은 작은 동생을 토닥여주었다.
“가르침을 주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단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체벌을 하기도 하지. 하지만 아무리 체벌을 한다고 해도 잔을 던져서는 안 돼. 유리가 박히면 크게 다치잖니.”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씨근덕거리는 숨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어던지긴 했지만 듣고 보니 찻잔을 던진 것은 조금 심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
예르넨이 뾰루통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그래, 우리 아기. 착하다.”
하지만 여전히 리지가 데이브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지 예르넨의 볼은 빵빵하기만 했다.
“하지만 리지 메리온은 꼭 데이브한테 사과를 해야 해.”
“알겠어, 알겠어. 누이가 리지를 따끔하게 혼내고 데이브에게 사과를 하라고 할게.”
“꼭 내가 보는 앞에서 해야 해. 그리고 쟤가 나를 만지는 게 싫어.”
“저런, 그러면 이렇게 누이가 예르넨을 꼭 안고 있는 것도 싫니?”
세실이 힘을 풀어 예르넨을 가볍게 안고는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어 주었다.
“아니, 누이가 이러는 건 좋아. 그런데 리지가 그러는 건… 그냥 싫어.”
“예르넨, 리지를 너무 미워하지 마렴.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한 가족이 될 사이잖니?”
“에이씨, 짜증 나. 형한테 파혼하라 해!”
바스락.
예르넨의 언성이 다시 높아지려던 차였다. 바로 곁에서 바스락거리며 낮은 나무 덤불을 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두 황족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어….”
‘뭐야, 저 얼간이는?’
그곳에는 얼빠진 표정을 한 어린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시릴 정도로 검은 머리에 푸른 빛이 도는 눈을 가진 아이는 예르넨의 또래 같아 보였고, 제법 잘 차려입은 것을 보아하니 귀족의 자제 같았다.
“너는 누구인데 감히 내 궁의 정원에서 나온 것이냐.”
예르넨은 의자 위에 떡하니 서서는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물었다.
“어….”
그런데 기다리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어, 어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예르넨의 눈썹이 또다시 삐죽이며 올라가려고 하는 차였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한 세실이 소년에게 물었다.
“혹시 네가 라일이니?”
“…예.”
“라일?”
흔치 않은 이름이었는데, 어딘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귀족 중에 하나의 자식 이름이었지.
“그러고 보니 벨티모어 대공의 외아들 이름이 라일이었던가?”
“맞아, 라일 벨티모어. 아바마마가 우리 아기 약혼자로 짝지어 주려고 입궁을 명하셨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날이 오늘이었구나.”
“아, 오늘 온다던 내 부하 후보가 네 녀석인가.”
어느 정도 지나자 정신이 돌아온 듯 흐리멍덩했던 라일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눈에 생기가 돌자 그제야 꽤나 그럴싸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북부 태생임이 드러나는 하얀 피부를 가진 귀공자 같은 외향이었다.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가 흐르는 게 크면 사람 여럿 울릴 것 같았다.
‘흠, 썩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첫인상의 여파로 인해 예르넨의 머릿속에서 라일에 대한 평가는 저 아래로 떨어진 후였다.
“얼간이는 부하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예르넨… 부하가 아니라 약혼자…!”
세실이 당황해서는 소곤거렸지만 예르넨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게 그거지 뭐. 에단은 누이의 부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는 예르넨의 눈짓을 받은 세실의 이마에 촉촉이 땀이 배어들었다. 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틀렸다. 이 간극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해서 세실이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둘의 대화를 천천히 살피던 라일이 상황판단을 끝마친 뒤 몸가짐을 가다듬고는 예르넨에게 질문을 해 왔다.
“혹, 당신이 예르넨 황자 전하십니까?”
“그래.”
예르넨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예르넨을 보고 라일은 시원스레 웃으며 우아한 중부식 예법으로 예르넨에게 손을 건넸다. 예르넨은 제법이라는 듯이 그 손을 잡고는 폴짝하고 의자 위에서 뛰어내렸다.
라일은 예르넨이 안전하게 내려온 것을 확인한 후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예르넨의 손등에 키스했다.
“벨티모어 대공가의 라일 벨티모어가 황자 전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유들유들한 말투였다.
“흐음?”
예르넨은 법도를 무척이나 중요시했고, 예법에 있어 자신만의 깐깐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치고는 제법이군.’
그리고 그런 예르넨이 보기에 라일의 예법은 합격점이었다. 첫인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날려 버릴 정도로.
그랬기에 예르넨은 후한 점수를 주어 처음에 어버버거리며 멍청히 예르넨을 바라봤던 부분도 정상 참작을 해 주기로 했다. 기실 대부분의 사람이 예르넨을 처음 보면 그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황족을 모실 줄도 아는 것 같고.’
게다가 그를 모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 보여서 우쭐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다시 뜯어보니 얼굴도 퍽 준수한 것 같았다. 데리고 다니기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바로 내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곁에 두고 부하로 삼아도 괜찮을지 검증해 보는 시간 정도는 줘도 될 것 같았다.
“그래, 네가 내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뺀질거리는 어조도 딱히 싫지는 않았다.
“뭐… 그렇다면 아바마마께 네가 궁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 한번 논해 보아도 될 것 같구나.”
“그리 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라일이 물 흐르듯이 유려한 어조로 말했다. 그 대답은 예르넨을 더 더 기분 좋게 만들었기에 예르넨은 가슴을 활짝 폈다.
“궁에?”
하지만 예르넨의 말에 세실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 부하로서 적합한지 검증을 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예르넨, 리지도 에단도 궁에 머무르지 않잖니.”
“원하면 에단은 궁에 머물러도 좋아. 하지만 리지는 안 돼.”
“하하, 그… 그래? 에단이 고마워하겠다.”
예르넨이 선심을 썼다는 듯 말하자 세실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그리 말한 예르넨은 라일의 손을 잡았다. 라일이 깜짝 놀라 하면서 작게 움찔거렸다.
“…?”
멀쩡히 굴다가 갑자기 또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르넨은 본디 다른 사람의 기분을 그리 헤아려 주는 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평소처럼 세실이나 다른 이들에게 하듯이 손을 꼭 잡고 라일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는 것 같던 라일도 이내 단단히 예르넨의 손을 잡아 왔다.
“누이, 내일도 티타임을 함께 해!”
예르넨은 작고 통통한 하얀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세실에게 인사했다. 세실은 곱게 웃으며 그런 예르넨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라일이 머무르게 된다면 내일은 셋이 같이 차를 마시자.”
“좋아!”
그리 말한 예르넨은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세실이 작아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 뒤 그제야 라일을 바라보았다.
“뭐, 보면 알겠지만, 우리 누이야. 누군지는 알지?”
예르넨이 으스대면서 말했다.
“네. 세실 황녀님이시군요.”
“그래. 맞아. 넌 몇 살이야?”
“올해로 다섯 살입니다.”
동갑이라면 딱 좋았다. 예르넨은 부하로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세울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다섯 살이야! 뭐, 나이도 같으니 특별히 네게 내 이름을 부를 영광을 내릴게. 말도 편하게 하고.”
“그럼 그럴까? 예르넨이라고 불러도 돼?”
예르넨의 거들먹거리는 말에도 라일은 한번 내빼지도 않고 잽싸게 말을 바로 받았다.
“좋아.”
그렇게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황제궁으로 향했고, 예르넨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제와 벨티모어 대공 부부에게 흔쾌히 라일이 황궁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내었다. 그리하여 라일은 그날 바로, 예르넨의 궁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무척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그래야 할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둘은 같은 궁에서 머물며, 함께 밥을 먹었고 함께 생활했으며 때로는 같이 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반년도 채 되지 않아서 약혼식이 치러졌고 라일은 정식으로 예르넨의 약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현 전이라고는 해도 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약혼을 한 사이였다. 같은 궁에 머물러서는 안 됐다. 그러나 라일과 함께 있을 때면 예르넨이 제법 어른스럽게 굴기에 어린 금지옥엽 막내 황자님의 행동 교정을 이유로 황제는 그 사실을 묵과해 주었고 황제의 묵과 덕분에 이후에도 라일은 한해의 반 이상을 황자궁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흘렀고 둘뿐이던 작은 아이들의 세계는 차츰 넓어져 갔다. 예르넨의 곁에는 귀족 가문 출신의 새로운 시동들과 놀이 상대가 생겨났고, 종종 북부에서 벨티모어 대공가의 가신이 될 영식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때때로 예르넨은 테네스 트리지아 같이 새로 생긴 친구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몇몇을 제 영역 안에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라일은 여전히 그 ‘예르넨 헬리오의 사람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예르넨은 일곱 살이 되었다.
* * *
“전하아… 식사하셔야 합니다.”
“싫어. 짜증 나. 저리 가.”
데이브의 애타는 목소리에도 예르넨은 팽 토라져서는 이불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제 저녁도 드시지 않으셨지 않습니까아… 폐하께서 걱정하십니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하신 건 꼭꼭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됐어!”
예르넨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귀를 막고는 이불 안에 폭 파묻혔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며 서글피 울던 데이브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리자 예르넨은 그제야 힘을 풀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은 예르넨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툭툭.
누군가가 이불을 두드렸다.
예르넨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두드린 쪽을 팍 쳐 버렸다. 하지만 상대는 굴하지 않고 은근슬쩍 예르넨의 이불을 걷어 내고는 화가 잔뜩 난 예르넨의 얼굴을 장난스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예르넨, 왜 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싱그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운 소년은 예르넨의 침대 가에 걸터앉아서는 익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예르넨은 그 얼굴을 짜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세상에서 둘도 없을 뺀질이인 예르넨의 약혼자, 라일의 얼굴이었다.
예르넨은 심통이 난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누웠다.
라일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가만가만 제 약혼자의 결 좋은 애쉬블론드를 쓸어내렸다.
“황녀님 뵈러 가야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아 그러니까 왜 남부로 가냐고!”
최근 예르넨의 기분은 무척이나 언짢았다. 제국의 남부에서 작은 국지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국지전이지 바다 넘어 약탈을 일삼는 작은 대륙의 부족들이 얼마나 끈질긴지는 모든 제국민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전쟁은 예르넨의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암투가 판치는 대륙의 다른 왕실과는 다르게 사이가 좋았던 헬리오 황가는 예르넨에게 있어서 세상의 전부였다. 예르넨을 사랑해 마지않는 부모님과 형제들, 떠받들어 주는 여러 귀족 영애와 영식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전쟁이 난 직후부터 예르넨을 늘 끼고 살던 황제는 쉴 틈도 없이 바빠져 가끔 식사할 때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 즈음부터 예르넨과 잘 놀아 주던 첫째 형, 헤리엇도 묘하게 바빠지더니 데면데면하게 되었다.
둘째 형인 일리안 따위는 애초에 예르넨의 안중에 없었다. 일리안은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귀족 영식들 사이에서 대장 놀이나 하며 으스대기 여념 없는 한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르넨은 괜찮았다. 라일과 세실이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세실마저 떠난다.
매번 누이, 누이 하며 따라다니며 하루에 한 번은 꼭 세실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누이 바라기인 예르넨으로서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씨이. 이게 다 에단 때문이야.”
왜 누이가 전쟁이 한창인 남부로 가야 하냐면서 복도 한가운데에 드러누워서 떼를 쓰기도 했다. 국혼을 미루라며 아무도 누이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실의 약혼자인 에단은 포트넘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포트넘 공작가는 제국 남부에 가장 큰 영지를 가지고 해상 무역의 패권을 쥔 부유한 가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대로 제국 해군의 사령관직을 역임하는 무가였다.
그렇기에 해상 전쟁이 발발한 이상 에단은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남부에 머물러야만 했고, 올해 스무 살을 맞이한 세실은 그런 에단과 함께 남부로 내려가기를 택한 것이다. 제국의 법도 상 성인이 된 황족은 황제가 되지 않은 이상 국혼을 올리고 황궁을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랬기에 매번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예르넨의 말을 들어주던 부황은 이 건만은 안 된다고 예르넨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고, 예르넨은 그 길로 팽 토라져서는 저녁 식사도 거르고 아침마저 먹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르넨, 제국의 남부를 수호해야 하는 건 포트넘 공작가의 의무인걸?”
라일은 그렇게 말하면서 따뜻한 수프를 후후 불어서는 예르넨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예르넨은 아직도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기새처럼 입을 벌려서는 라일이 떠먹여 주는 수프를 한입 먹었다.
사실 배가 고프긴 했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진 예르넨은 태어나서 배고픔을 느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삼시 세끼를 때마다 챙겨 먹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나 성장기인 귀한 막내 황자님이 배를 곯을까 하여 시동들이 항상 간식 바구니에 예르넨이 좋아하는 단 간식들과 따뜻한 차를 넣고 다니면서 예르넨이 입을 벌릴 때마다 잽싸게 넣어 주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예르넨이 식사를 거른다는 것은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을 때 시위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예르넨이 끼니를 거를 때면 그깟 한 끼 굶는 것쯤으로 달라지는 건 없는데도 성장기의 귀한 황족이 몸이 축난다며 황후부터 황제까지 난리를 쳐 댔기 때문이다. 두 끼를 굶게 되면 황제가 손수 예르넨의 방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일은 그렇게 예르넨이 시위를 할 때면 잘 구슬려서 끼니를 챙겨 주는 담당이었다.
예르넨은 세 숟가락째 수프를 우물거리다가 퍽이나 속상한 얼굴로 라일을 바라봤다. 그 얼굴은 정말이지 아찔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누이가 다치면 어떻게 하지? 전쟁은 얼마나 계속될까? 역사서를 뒤져봤는데 남부에서 국지전이 발생하면 최소 3년은 정세가 진정되지 않는대. 설마… 그만큼이나 누이를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바쁜 일만 정리하면 수도로 올라올 수 있을 테니까 한 반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반년?!”
반년이나 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예르넨은 빽 소리 지르고 다시 시무룩해졌다. 라일도 무가의 자손이었다. 그것도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는 최전방의 벨티모어 대공가. 그런 라일의 말이니 분명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럼 반년쯤 지나면 누이가 다시 수도로 돌아와서 같이 살까?”
“그럴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일은 힘들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법도 상으로도 그저 수도에 머무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쟁 역시 그 정도면 안정적으로 접어들 테고. 하지만 그 외에도 세실이 수도에 머무르지 않을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세실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세실의 어미인 현 황제의 첫째 황후는 남부 출신이었기에 남부인의 피를 받은 세실은 비교적 선선한 기후인 수도에서, 특히 겨울이 올 때면 잦은 잔병치레를 했다. 그러니 그 때문이라도 라일은 그녀가 소요가 진정된 뒤에도 아주 따뜻한 여름에나 수도에 머무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같이 황녀님을 뵈러 가자. 오늘 마지막으로 예물을 확인하신다고 하셨어. 네가 골라 줘야지.”
“뭐…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 줘야 하긴 하지.”
예르넨은 라일이 잘게 찢어 입에 넣어 준 빵을 마저 오물거리고는 꾸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옷 위에 떨어진 작은 부스러기들을 털어 냈다. 금세 침상이 지저분해졌지만, 예르넨의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돌아왔을 땐 깨끗한 햇볕 냄새가 나는 침구로 바뀌어 있을 것을 아니까.
문가에 서서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데이브는 감격한 듯이 눈시울을 붉히며 시동들을 안으로 들이고는 예르넨의 단장을 도왔다.
잔뜩 구겨진 실크 잠옷을 입고 있던 예르넨은 금세 고귀한 막내 황자님으로 탈바꿈했고 그때까지 침대가에 걸터앉아 예르넨이 치장하는 것을 지켜보던 라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는 손을 건넸다.
“그럼 가실까요, 전하?”
“그래.”
예르넨은 그 손을 잡고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턱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떼를 쓰고 말썽을 부렸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린 황족만이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 * *
크림색으로 꾸며진 세실의 거대한 투왈렛 룸에는 값비싼 원단들과 화려한 예복, 반짝이는 예물과 보석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예르넨도 종종 세실의 투왈렛 룸에 찾아가서는 점잖게 앉아 있어 본 적이 있었기에, 현재 세실의 투왈렛 룸이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정도면 건국제 때보다도 더 붐비는 것 같았다.
“누이….”
예르넨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세실을 부르자 우아한 손짓으로 예물을 목에 대어 보고 있던 세실이 깜짝 놀라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르넨…!”
그러고는 비켜 주는 사용인들의 곁을 지나쳐 재빨리 예르넨에게 다가가서는 작은 예르넨을 폭 하고 끌어안았다. 귀한 예복이 바닥에 쓸리는 걸 본 의상 담당 부인들이 끙끙거렸지만 두 황족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우리 아기.”
예르넨은 그리 속삭여주는 세실을 꼭 끌어안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내면 냈지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예르넨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이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제 진정이 됐니?”
세실이 다정하게 물어 오자 예르넨은 우물쭈물해 하면서도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안 가면 안 돼?”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세실의 목을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아 왔지만, 그간 걱정으로 꽁꽁 얼어 있던 세실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예르넨이 그녀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실이 목에 매달린 예르넨을 들어 올리려다가 비틀대자 바로 곁에 있던 에단이 예르넨을 안아 들었다.
“걱정 마, 예르넨. 세실은 안전할 거야. 내 심장을 걸고 맹세할게.”
“씨이….”
예르넨은 에단의 가슴께를 짜증 난다는 듯이 퍽퍽 쳤다. 그래도 예르넨은 세실 만큼이나 에단도 좋아했기에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헤리엇의 약혼녀인 리지였다면 서슴없이 꺼지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파혼을 주선했을 테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니 예르넨이 너희 아이 같구나.”
그때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에단은 예르넨을 내려주고는 한쪽 다리를 굽혔다. 라일도, 주변에 있는 다른 시동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예르넨만 재빨리 뛰어가서는 록시에의 한쪽 다리에 붙었다.
“다들 일어나거라.”
“이제 괜찮아진 거니, 예르넨?”
“네….”
예르넨이 삐죽이는 어조로 말했다.
“식사는 잘 했고?”
“먹었어요.”
“흐음?”
록시에는 믿음이 안 간다는 듯이 장난스레 웃으며 예르넨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라일, 우리 예르넨이 오늘 아침을 먹었니?”
“제가 손수 떠먹여 드렸어요.”
“먹었다고 했잖아요!”
록시에가 제 말을 믿어 주는 것 같지 않자 골이 난 예르넨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래. 하지만 지지난번에는 먹었다고 하고서는 먹지 않았으니 이 어미가 걱정이 되지 않겠니?”
“…….”
맞는 말이었기에 차마 대거리하지 못한 예르넨은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부렸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식사는 거르지 않기로 어미랑 약속하지 않았니.”
“그래. 식사를 거르는 건 아주 못된 짓이야. 다음에 이러면 세 시간 동안 집무실에서 이 아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벌을 받을 것이니 다시는 식사를 걸러서는 안 된다.”
베이넌도 예르넨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르넨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럼 우리 아기가 세실의 예물을 골라 주도록 하자꾸나. 골라 주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하거라. 이제 여름인데 이 아비가 우리 막내한테도 새 옷에 맞는 장신구를 선물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한 베이넌은 예르넨을 달랑 들어 안고는 투왈렛 룸의 중앙으로 향했다. 록시에는 그런 베이넌을 못 말린다는 듯이 바라봤다.
“저이는 예르넨에게 늘 저리 무르구나.”
“황후 폐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그건 그렇지.”
록시에가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라일, 함께 골라 주겠니?”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라일이 우아한 꼬마 신사처럼 록시에에게 손을 뻗었다. 그 잔망스러운 몸짓이 귀여워 록시에는 희게 미소를 짓고 라일의 손을 잡았다.
“여기 있는 이 백금으로 만든 커프스도요. 아, 그리고 아까 전에 보았던 푸른 사파이어로 장식한 로켓 펜던트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
예르넨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하던 황제궁의 시종장이 깍듯하게 백금 커프스를 꺼내 들었고 푸른 사파이어 팬던트 쪽으로 눈짓을 했다.
예르넨은 조금이라도 눈에 차는 게 있으면 전부 읊어 댔기에 지나간 자리마다 바쁜 손길이 이어졌다.
“라일의 눈 색이랑 비슷한 것 같았어요. 똑같은 거로 두 개 가지고 싶어요.”
“두 개씩이나?”
“라일이랑 나눠 가지려고요.”
“그렇다면 아비가 똑같은 거로 하나 더 만들어서 궁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하마.”
“좋아요!”
예르넨이 베이넌의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베이넌의 입꼬리가 그린 듯이 쫙 올라갔다.
“거의 귀에 걸렸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록시에가 라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라일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예르넨이 벨티모어 대공령에서 신혼을 차린다는 말을 들으면 졸도라도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록시에는 본인도 꽤나 섭섭한 얼굴을 하며 라일의 손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어쨌든 먼 미래의 일이니 아직은 걱정하기 이르지 않겠니. 그보다는 지금 눈앞의 일이 더 중요한 법이지. 그런 의미로 라일, 예물을 다 고른 다음에 폐하와 함께 티타임을 갖기로 했는데 함께 하겠니?”
“불러주시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라일은 능청스럽게 록시에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말은 잘하는구나.”
그런 라일이 귀여워서 록시에는 제 하나뿐인 아들의 동갑내기 약혼자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약하게 두드려 주었다.
예르넨이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홍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런데 누이는 정말 남부로 가야 하나요?”
“흐음.”
베이넌이 부들부들한 턱수염을 쓸면서 고민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이른 말이었지만, 예르넨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쉽게 이해할 만큼 똑똑했다.
황후의 가문인 마리아쥬 후작가는 그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가문이었고, 고집이 센 예르넨은 헤리엇처럼 외가가 바람 잡는 대로 흔들릴 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조기 교육이라는 것은 중요했다. 이쯤에서 그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려도 될 것 같았다.
아직도 막내아들을 황제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베이넌은 그의 아들이 장차 그의 의지를 이어 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르넨, 이 아비가 관리들을 많이 뽑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예에.”
“지방 분권적이었던 제국이 이 아비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차츰차츰 시험을 통해 뽑은 관리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죠.”
“그렇다면 그만큼 중앙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베이넌은 이미 알게 모르게 예르넨의 교육에 제왕학을 끼워 넣고 있었고 덕분에 예르넨은 그가 말한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렇죠.”
예르넨은 베이넌이 재미없는 소리를 시작할 것 같은 낌새를 느끼자마자 지루한 표정을 하고는 축 늘어져서 차만 홀짝였다.
“나는 이 나라를, 신의 피를 이은 황실을 중심으로 완벽히 위계를 다질 생각이다.”
“…?”
차를 홀짝이던 예르넨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황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저 먼 지역에는 한해 농사에서 얻게 된 수확물의 반을 세금으로 가져가는 영주들도 있고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귀족들도 있단다.”
“예?”
예르넨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다들 정신 나갔대요? 감히 누가요? 제국의 땅은 모두 신의 피를 이은 황가의 것이잖아요. 귀족들은 그 공을 인정받아 황가에 땅을 빌려 일가를 일구고 살아가는 것뿐인데 어찌 멋대로 세금을 매기고 황가의 백성들을 부린답니까?”
“허허, 이 녀석.”
조금만 더 나아가면 늘 읊어대는 법도를 읊어댈 것 같았다.
“가난한 백성들은 멀리 있는 태양보다 그저 제 곁에 있는 이리떼들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그렇기에 이 아비는 이리떼를 길들이고 해의 권위를 다시 바로 세울 것이란다.”
예르넨은 그제야 베이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관리를 더욱더 양성하고 행정의 기틀을 세운 후, 귀족들의 세를 약화시키고 황권을 공고히 세워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그가 황제로서 품은 대의이며, 그의 자식인 예르넨이 이어 주기를 바라는 의지였다.
“그렇기에 세실이 에단과 결혼을 한 것은 어찌 보면 정략적인 측면이 있단다. 네가 라일과 약혼을 한 것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황권을 공고히 하랍시고 자신들의 권위를 내려놓고자 하는 귀족들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랬기에 역대 황제 중에서 대의를 성공시킨 이는 없었다.
허나 베이넌에게는 다른 역대의 황제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손이 귀한 황가에서 자식을 무려 넷이나 가졌다는 것. 그렇기에 그는 가장 세력이 강성한 귀족들을 그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혼인동맹에 나선 것이었다.
황가에는 신의 피가 흘렀고, 신의 피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었기에 모두 황가를 숭배했다. 그렇기에 모든 귀족은 황가와 혼인을 올리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니 대의를 돕는다면 신의 피를 제 가문에 흐르게 해 준다는 베이넌의 말을 거절할 귀족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황가의 피가 흐르게 되면 그들이 다른 귀족들보다도 우위에 서게 될 테고 이후 황가의 권위가 바로 선다면 그들의 권위도 커진다는 소리이니 말이다.
“그래서 누이가 꼭 남부로 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래. 포트넘 공작가에는 앞으로 세실의 자손들이 그 대를 이어야 하니 말이다.”
예르넨은 그런 베이넌의 말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위정자가 지녀야 할 바른 마음가짐 아닌가. 매번 그의 앞에서 흐물흐물거리기만 하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멋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폐하께서 그리 마음을 먹으셨는데 어찌 한낱 어린아이가 그 길을 막겠습니까.”
“예르넨….”
베이넌의 어조에 감동이 깃들어 있었다.
‘예르넨이 폐하라고 부르다니.’
아마 이것은 예르넨이 태어난 후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위대한 황제는 왠지 대단한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고 말았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예르넨, 그렇다면 이 아비의 의지를 잇겠느냐?”
베이넌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는 조심히 물었다.
“당연히요!”
됐다! 베이넌이 감격스러워서 예르넨이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주먹을 작게 말아 쥐었다. 그 광경을 마치 한 편의 연극을 지켜보는 것처럼 관람하고 있던 록시에와 라일도 작게 감탄했다. 예르넨에게 황위를 넘기려는 베이넌의 치열한 일대기를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온 둘이었다.
“혼인을 한 이후에도 수도에 있을 생각이었는데 제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니 폐하의 뜻을 받들어 라일과 함께 북부를 잘 통치해 보겠습니다.”
예르넨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
허나 그것은 모두의 기대와는 정 반대가 되는 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닌데….”
베이넌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가요.”
예르넨이 다시 예민한 목소리로 심통을 부리듯이 말했다.
“아니, 아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베이넌은 오늘도 그의 막내아들에게 패배를 하고 말았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은 록시에가 작게 자른 레몬 파운드 케익을 각자의 그릇에 나누어 주었다.
라일은 제 곁에 놓인 레몬 파운드 케익을 베어 물었다.
처음 혀에 닿았을 때 케익은 무척이나 새콤했다. 입 안 가득 군침이 돌 정도로. 그러나 몇 번 씹다 보면 이내 혀가 아릴 정도로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마치 예르넨같이.
그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 주는 황후가 보였다. 바로 앞에는 투닥거리면서 황제와 싸우는 예르넨이 보였다. 이제는 대공가의 풍경보다도 익숙해진 시간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무척이나 평온한 시간이었다.
* * *
“예르넨, 오늘도 밖에 안 나갈 거야?”
“안 나가.”
예르넨이 우울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라일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창문을 바라보는 예르넨을 내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침대에 걸터앉아 회색빛이 도는 금발을 간질였다.
“이제 겨울이 찾아오면 밖에서 검을 배우기 어려워질 텐데?”
“…….”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예르넨은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리다는 건, 아무리 머리로 이해한다고 한들 모든 걸 받아들일 수는 없는 미성숙함을 안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황제의 말이 옳다 생각한 예르넨은 8월, 무더운 여름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혼인식을 올리는 누이를 축복하며 남부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멀쩡히 지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늘 티타임에 참여하던 인원이 한 명 줄어든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공허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황제와 황후, 거기다가 늘 집 나간 망아지마냥 궁에 붙어 있지 않는 예르넨의 둘째 형 일리안마저도 호출되어서 예르넨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지만 시무룩해지고 우울증을 앓게 된 아이를 달래는 것은 짜증을 내며 화를 내는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칩거에 들어가다시피 한 예르넨은 두 달이 지난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덕분에 예르넨의 기분에 따라서 굴러가는 황궁은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 같은 상황이었다.
“밖에서 테네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일주일 내내 찬바람을 맞출 생각이야?”
“…그냥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예르넨의 우울이 깊어지자 덩달아 바빠진 것은 라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 제 약혼자에게만 유일하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 줄 정도로 개처럼 구는, 내숭쟁이 라일 벨티모어는 예르넨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도 성과를 내지 못했기에 그는 예르넨과 마찬가지로 내리 저기압이었다.
덕분에 황자궁의 시동들이 라일의 싸한 눈초리를 맞아 가면서 혹여나 책이라도 잡힐까 벌벌거리며 기어 다니다시피 생활한 것도 꼬박 두 달째였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 본 라일은 졌다는 듯이 양손을 머리 위로 털어 버리고는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한번 만나러 가는 건 어때?”
“…만나러?”
그제야 예르넨은 라일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리고 인내심에 한계를 겪고 있던 라일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금 살이 내려 병약해 보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약혼자의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하고는 그 한계를 곧바로 저 멀리로 밀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에단이 아버지께 이제 전선의 대부분이 정리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대. 수도에서 아무리 말을 달려도 남부까지 한 달은 걸릴 테니까 그쯤이면 더욱 안전해지지 않겠어?”
“…그래?”
예르넨이 솔깃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태가 두 달 사이에 무척이나 가늘어져 있었다.
‘일단 뭐라도 좀 먹여야겠는걸.’
약혼자인지 보모인지 알 수 없는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린 라일은 예르넨이 완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쐐기를 박았다.
“폐하께 말씀드릴게. 마침 겨울이니까 따뜻한 남부에서 겨울을 보내고 오겠다고 말씀드리면 될 거야.”
“정말?!”
“그럼.”
물론 안 될 수도 있다. 아니. 안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헤리엇이나 일리안이면 모를까 황제가 소매에 넣고 다니는 옥구슬처럼 아끼는 예르넨이었다. 쉽게 인가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자. 어제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잖아.”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은 예르넨의 쌩쌩해진 얼굴을 보는 게 먼저였다.
“좋아! 데이브! 데이브!”
라일은 신이 나서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저 멀리로 멀어지는 예르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오로지 예르넨에게만 허락된 눈빛이었다.
그리고 황자궁의 시동들은 그런 라일의 눈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조심히, 또 무사히 다녀와야 한단다?”
“제가 어린애인가요?”
“일곱 살이면 어린아이지 그럼 어른이겠니?”
황후는 얄밉게 말하는 예르넨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신년회 전까지는 되도록이면 돌아오렴. 어미가 많이 보고 싶을 테니 말이야.”
“네!”
예르넨은 황후에게 그리 말하고는 마차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라일은 그런 예르넨을 못 말린다는 듯이 바라보며 뒤를 따르려 했지만 황후에 의해 제지당했다.
“라일.”
“왜 그러십니까?”
“아직 너도 어린아이인데 이렇게 매번 예르넨을 부탁해서 무척이나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번에도 예르넨을 잘 부탁한단다. 저 아이, 태어나서 황궁 밖에 나가본 적이 손을 꼽을 만큼 적잖니. 황궁 밖에서는 한 번도 잠을 자 본 적이 없는데….”
근심과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또, 저 까다로운 입에 식사가 맞을지 모르겠구나. 황자궁 요리장이 따라간다고는 해도 제때 재료를 구할 수가 있을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르넨의 식사를 책임지기 위해 따라붙은 식료품 마차만 세 대였다. 특히나 차를 즐겨 마시는 예르넨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마차에는 3년 치 차가 실려 있기도 했다.
“제가 곁에서 잘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너만 믿으마.”
라일은 정중히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우리 예르넨에게 좋은 약혼자가 되어 주어 고맙구나.”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듯이 라일은 예르넨과 판박이 수준으로 독립적이고 오만한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가 많은 어른일지라도 그가 인정할 만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의 발아래에 두는, 대단히도 싸가지가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예외라는 게 존재했다. 록시에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의 온 마음을 가져간 약혼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도 컸지만, 라일은 록시에라는 사람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라일은 그저 얌전한 또래의 어린아이마냥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라일이 록시에에게 인사를 마치고 다가간 마차에서는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소요가 일고 있었다.
“그래, 그래. 미안해. 예르넨.”
“됐어!”
헤리엇이 마차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예르넨을 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사과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라일은 곁에서 한가로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시동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그것이 황태자 전하께서 황자 전하를 배웅하러 오셨는데 황자 전하께서 그동안 얼굴 한번 보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배웅이냐고 황태자 전하를 형으로 두신 적이 없다 화를 내시고 계십니다.”
“아아.”
라일은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이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근에 헤리엇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르넨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마 올해 초부터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의 나이가 이제 열일곱이었고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공사가 다망하긴 했다.
하지만 이 제국에서 제일로 공사가 다망한 황제조차도 이틀에 한 번꼴로 예르넨의 얼굴을 보러오는 판국이었기에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라일마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서열에 민감한 예르넨이 제게 문안 인사를 오지 않는 헤리엇에게 단단히 화가 나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헤리엇이 손위 형제였기에 문안 인사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은 예르넨이 황족들의 방문을 문안 인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형이 사과의 의미로 이리 꽃까지 가져왔는데도?”
“…꽃?”
“그래.”
그리 말하며 헤리엇이 꺼내 든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꽃이었다.
‘뭐지…?’
왜일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꽃 같았다.
“웬 꽃이야?”
예르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꽃을 받아 들었다. 꽤나 기꺼워하는 모습이었다. 한번 냄새를 맡고는 꽃냄새가 별로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동부를 사찰하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네 생각이 나서 가지고 왔지.”
헤리엇이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확실히 은색 꽃망울을 가진 소담한 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예르넨이 떠오를 만했다.
“그럼 이제 용서해 주는 거지?”
“뭐… 이번만은 용서해 줄게.”
그 말을 할 때에 예르넨의 목소리는 확실히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고마워.”
그리 말한 헤리엇은 예르넨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인사를 하고 마차를 떠났다.
“…?”
“아, 라일.”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래. 예르넨과 함께 세실을 보러 간다고 했지?”
“예.”
“잘 다녀오렴.”
“…예.”
그렇게 헤리엇은 완전히 떠났다.
‘잘못 본 건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언뜻 보기엔 그의 표정이….
“라일 벨티모어. 대체 왜 탈 생각은 안하고 거기서 멍하니 있는 거지?”
예르넨의 부름에 라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예르넨이 마차 창문에 턱을 괴고는 지루하다는 듯이 라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볕이 좋은 정오의 태양 빛이 그런 예르넨에게 내려앉았다.
“…….”
한 폭의 명화 같은 그 모습에 라일은 홀린 듯이 예르넨의 얼굴을 보다가 씁 하며 혀를 차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탈 거야. 잠시 황태자 전하랑 인사 나눴어.”
“그래. 우리는 이제 곧 한 가족이 될 테니까 네 친형이라고 생각하고 막 대하고.”
라일은 작게 피식대면서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방금 전에 보았던 헤리엇의 얼굴을 머릿속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피곤한 일이 있었겠지.’
그리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르넨을 그토록 사랑하는 그가 그렇게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찝찝함이 혀끝에 쌉싸래하게 따라붙는 듯했다.
* * *
여정은 황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꽤나 괜찮게 흘러갔다. 제국이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정교하게 도로가 놓여져 있었는데 특히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남부와 동부는 도로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기로 유명했다. 그랬기에 예르넨을 태운 거대한 행렬은 빠른 속도로 남부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정 내내 예르넨은 의외로 불평불만을 잘 늘어놓지 않았고 말이다.
어린 황자를 무척이나 걱정한 황후는 푹신한 침대를 그대로 마차에 욱여넣어 주었고 뿐만 아니라 예르넨이 좋아하는 놀잇거리들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온종일 라일과 함께 흔들림 하나 없는 편안한 마차 안에서 놀이를 하고, 교육을 받았고, 책을 읽었으며 마차 안에서 하는 일들이 지루해질 때 즈음에는 야외에서 승마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말을 타고 놀았다.
행렬이 멈출 때면 틈틈이 라일에게 검을 배웠고 이리저리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용인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기도 했다.
황제의 과보호로 평생을 황궁 안에 갇혀 살다시피 생활한 예르넨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황자궁의 요리사는 매 끼니 예르넨이 황자궁에서 먹는 것과 같은 수준의 요리를 제공했으며 대동한 정령사들은 항시 예르넨이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황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주가 모두 최상의 것으로 준비된 나날이 이어졌기에 예르넨은 퍽이나 만족스러워했다.
마차의 창 사이로 밤하늘에 초롱히 뜬 별을 바라보며 라일과 함께 잠이 드는 여행 내내 예르넨은 무척이나 즐거워했고 평소보다 짜증도 덜 내는 편이었다.
예르넨을 보필하기 위해 따라 나온 황궁의 시동들은 그런 예르넨을 보며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가며 예르넨을 모셨다. 그랬기에 마차의 행렬은 이동형 황자궁 수준을 완벽하게 유지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제국 중남부에 위치한, 거대한 빌레로이 공작령 인근의 대산맥을 지나갈 때 즈음까지는 말이다.
“…?”
라일은 한밤중에 기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으응.”
곁에서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약혼자가 그에게 몸을 붙여 왔다. 이제 날씨는 제법 쌀쌀한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아무리 불의 정령을 집어넣은 화로를 발아래에 둔다고 해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예르넨은 늘 라일의 품 안에 파고들어 잠에 들고는 했다.
라일은 예르넨을 찬찬히 토닥이고는 마차 밖을 조심히 살폈다.
‘역시.’
황제의 온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막내 황자의 이동 행렬이었다. 정예 중의 정예로 구성된 호위기사 중에는 아직 어린 라일보다도 뛰어난 기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랬기에 밖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은 모두 꺼져 있었고, 끄고 남은 모닥불에서 혹여나 연기 한 줄기라도 날릴까 모조리 모래로 덮어 버린 뒤였다.
라일은 아버지인 벨티모어 대공에게 배운 대로 바로 곁에서 마차를 지키는 기사에게 군에서 사용하는 수신호를 통해 상황을 물었다.
- 무슨 일이지?
마차를 지키던 기사도 조용히 그에 응수했다.
- 위험 상황. 마수의 기척.
라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문을 조심스레 닫은 뒤 검을 챙겼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이제 겨우 가문의 비전 검술을 익히고 있는 라일이었지만,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장의 자식답게 타고난 육감만은 이미 어엿한 기사와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아버지인 벨티모어 대공을 따라가서 토벌전을 참관하기도 했고, 두어 번 정도는 혼자서 소형 마물을 잡아 본 경험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냥터에서 사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문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안전하게 마물을 사냥했던 때와는 달랐다. 위기 상황이니만큼 소형 마물조차도 버거운 상대가 될 것이다.
‘활을 사용한다면 검을 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테지만, 이곳에는 활이 없어.’
황자궁에 전용 석궁을 두고 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운 순간이었다.
설마 이리도 많은 기사가 있는데 그들을 뚫고 마물이 이곳까지 올까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에 라일은 긴장했다.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최우선은 예르넨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해.’
이곳은 북부가 아니라 남부였다. 물론 마물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경향성이라는 게 있었다. 북부와 달리 이런 남부의, 심지어 도시 근처에 마물이 나타나는 경우는… 전무했다. 혹여 누군가 풀어놓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륙의 중남부 아래에 위치한 지역은 원체 마물이 많지 않았기에 주기적인 토벌만으로도 매해 봄이면 씨를 말릴 수 있었다.
게다가 마물이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한 겨울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겨울이 혹독한 북부는 마물의 침공이 잦은 편이었다. 허나 현재는 수확기였다. 짐승도 열매도 풍족한데 마물이 뒤를 쫓다니.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야?”
“쉿.”
라일은 재빨리 다가가 막 눈을 비비고 있는 예르넨의 입을 막았다.
“읍….”
예르넨은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표정을 짓다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예르넨이 가볍게 라일의 손을 두드리자 입을 막고 있던 손이 풀어졌다. 예르넨은 머리맡에 놓아둔 간밤, 자기 전에 읽었던 책과 펜을 꺼내서는 라일에게 쥐여 주었다.
- 마물의 습격이 있는 것 같아.
그 글자를 본 예르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물이라니. 책과 이야기를 통해서만 들어봤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예르넨은 라일의 도움을 받아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겉옷을 잠옷 위에 입고는 신발을 신었다. 혹시나 대피해야 한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어두운 마차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차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는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행렬을 이끄는 아이닌스 백작의 종자 중의 하나였다.
“전하, 곧 출발하겠습니다.”
“마물이 쫓아온다는데 이대로 가도 되는 것이냐?”
“수가 많고, 이대로면 포위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근에 있는 빌레로이 공작령에 원군을 요청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리하거라.”
“절대 마차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알겠다.”
예르넨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창문이 닫혔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라일은 예르넨을 이불로 감싸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물론 괜찮겠지. 감히 누가 나를 해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예르넨은 이불 속에서 손을 삐죽 내밀고는 라일의 손을 꼭 잡았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격전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이잉!
“뿌리쳐!”
“무시하고 달려가라!”
우어어!
말이 거세게 우는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막아!”
“막아라!”
조용히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둘은 이내 상황이 급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멀리에서만 느껴지던 소란이 점점 가까워져 갔다.
쿠웅!
“…!”
그리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마차의 외벽에 부딪혀왔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헌데 이번에는 전에 달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젠장…! 저게 대체 뭐야!”
“떼어 내!”
“마차로 붙어!”
“전하!”
아이닌스 백작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예르넨과 라일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둘의 얼굴에는 똑같이 ‘큰일 났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쿠웅! 쿠웅!
“아악!”
마차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부딪쳤지만, 속도가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경사가 진 곳을 오르는지 몸이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기 시작했다. 라일은 예르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는 마차 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예르넨을 감싼 이불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 현재 상황을 알아봐야 해.”
“하지만 창문을 열 수는 없어…!”
예르넨이 라일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래도 해야만 해. 들어 봐, 병사들의 목소리가 멀어지다가 이젠 들리지도 않아. 분명 이 마차만 따로 산 위로 빼돌려지고 있는 거야. 사람이 하는 짓은 아니야, 마물이 하는 짓인 거야. 이렇게 거대한 마차를 끌고 이 속도로 산을 오를 만한 마물을 알고 있어?”
라일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어릴 적부터 마물을 토벌하는데 있어서는 조기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그였다.
집 안에는 여기저기 마물의 외향과 특성을 묘사하는 그림이 그려진 사전이 있었고, 라일은 틈틈이 그림책을 보듯이 그 사전들을 보았다.
모든 마물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은 아니더라도 지식이 부족하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빨리 생각해 봐…!”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전혀 감도 안 잡혀.”
라일이 괴로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겠네.”
“외관을 본다면… 몰라도.”
“어떻게 생겼는지 보면 알 수 있어?”
“단서가 더 있으면 좋지. 그림은 많이 봤으니까. 주기적으로 토벌할 때 따라나서면서 가신들한테 들은 것들도 있고.”
“그럼 창문을 열자.”
“예르넨!”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밖에 있는 것이 뭔 줄 알고 그런단 말인가.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지 알 수 없어. 기사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지금은 어두운 밤이야. 게다가 지금 우리가 끌려가고 있는 곳은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빌레로이 대산맥이겠지. 더 가다가 조난을 당하면 그때야말로 끝장이야.”
“…….”
“그뿐이야? 아무리 남부일지라도 산맥 안은 위험해. 저곳이야말로 마물들의 소굴일 수 있다고. 더 이상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면 기사들이 우리를 찾지도 못할 거고.”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빨리 창문 열어. 짜증 내기 전에.”
“…하.”
라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펴보는 건 나 혼자서 할게. 너는 어차피 봐도 알아낼 수 없잖아.”
“알겠으니까, 빨리.”
라일은 예르넨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창문을 살짝 열려고 했지만….
쾅!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창문은 활짝 열리다가 지나가는 나무에 부딪혀서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망했다.’
예르넨과 라일은 얼굴을 맞대고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돌이킬 수 없었다. 라일은 슬쩍 고개를 빼고서는 밖을 바라봤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꼈다.
“…!”
“미친 저게 뭐야.”
충격받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예르넨!”
“왜!”
“바닥에 엎드려 있으라고 했잖아!”
라일이 환장할 것 같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미 문짝도 날아간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그보다 저게 대체 뭐야? 알고 있어?”
라일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느 분류에 속하는 종인지는 알 것 같아.”
라일은 천천히 몸을 구부렸고 예르넨도 라일을 따라서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위를 주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뭔데?”
다행스럽게도 동부의 마물과 관련된 책을 읽어 둔 게 도움이 됐다.
“일전에 동부의 마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어.”
라일은 조금 전에 보았던 마물의 생김새를 곱씹어보았다. 굵고 거대한 다리 한 쌍이 마차를 두르고 있었고, 그 다리보다 조금 작은 수많은 다리는 비탈을 달리고 있었다. 피부의 표면이 마치 사막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그것은 점액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같고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같은 괴상한 모양새의 생명체였다.
게다가 피부 위에 수많은 입이 새겨져서는 여기저기서 뻐끔거리고 있었는데 그 입들의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이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긴 남부인데?”
“그러니까 비슷한 거라고 했잖아. 조금… 다르게 생겼어. 똑같은 건 아니야.”
“그러면 저게 왜 굳이 콕 집어서 이 마차만 노린 건데?”
“그건… 사실 이해가 안 가. 내가 알기로 저건 사람을 공격하는 종류의 마물이 아니야. 아니, 아예 공격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이렇게 마차만 데리고 갈 리는 없어.”
“왜?”
“저건… 채식을 하거든.”
“뭐?”
예르넨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지금 저따위로 생겨 놓고 초식동물이라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얼굴이었다.
“책에는 그렇게 써 있었어. 그래서 딱히 위험하지는 않을 텐데 왜 공격하는 건지 모르겠어. 민가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건 저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일 텐데….”
라일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저것의 아종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아종 정도만 된대도 저것이 사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왜 마차를 끌고 가는 건데? 나무를 먹으려고? 주변에 널린 게 나무잖아. 찻잎? 근데 그건 뒤쪽 마차에 더 많은데? 아니 그보다 진짜 이 덩치가 채식으로 유지가 된다고?”
예르넨은 말을 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러면 마차 밖으로 나간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네?”
“뛰어내리자.”
“뭐?!”
“네가 말했잖아. 끌려가서 조난을 당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라고. 게다가 아까부터 조금씩 느려지고 있어. 저 마물의 체력이 다 떨어진 거나 기사들을 다 따돌렸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이 마차 안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는 거라면 이 안으로 들어올 거고.”
“으으.”
아무리 채식을 한다고 해도 그건 곤란했다. 저런 거대한 게 마차 안으로 들어온다면 둘은 바닥에 떨어진 푸딩처럼 무참히 뭉개질 것이다.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는 예르넨을 본 라일이 예르넨의 머리 위를 감싸고 있는 이불을 쭉 끌어당기며 말했다.
“절대로 네가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쉼 없이 스쳐 지나가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달빛을 받아 빛나는 라일의 얼굴엔 예르넨을 안심시키기 위해, 평소에 그가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르넨과 라일은 달랐다. 신전으로부터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고 귀띔받은 예르넨과 달리 라일은 알파로 발현할 거라 전해 들었다.
그리고, 마치 그에 대한 증거라도 되는 듯이 라일은 또래보다 머리 하나만큼 컸고, 체력도 근력도 독보적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어린 만큼 무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르넨은 라일이 이런 일에 있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가 예르넨을 다치지 않게 한다면, 정말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라일은 어떻게 되겠는가.
“어떻게 할 건데?”
예르넨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떻게 할 거냐고.”
예르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 이 이불로 돌돌 말아서 데리고 뛰어내릴 생각이지.”
“…….”
“그럴 줄 알았다.”
역시나 맞는 모양이다. 이 공간 안에 충격을 완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은 지금 예르넨을 감싸고 있는 이 거대한 이불뿐이었다.
“지금 너 감히 나를 결혼하기도 전에 과부로 만들 생각이야?”
“과부라니….”
황제의 금지옥엽이 과부 같은 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너… 너… 내 부하하기로 했잖아…!”
“예르넨.”
라일은 예르넨의 머리 위에 손을 떡하니 올리며 말했다.
“나는 네 약혼자이기 이전에 네 기사야. 너를 지키는 게 우선인.”
절대로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라일은 장난스레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예르넨은, 그 미소에 확신하고 말았다. 라일이 정말로 그를 들고 이 마차 위에서 뛰어내릴 생각이라는 것을.
예르넨이 머리 위에 올라간 손을 퍽 하고 내치고는 라일의 머리를 손날을 세워 때렸다.
“아야.”
라일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게.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어! 라일 벨티모어 이 멍청아! 너가 그렇게 죽으면…! 이 산에서 내가 혼자 떠돌아야 할 텐데 살아서 나갈 리가 있겠어?!”
라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가 없다면 예르넨의 생존 가능성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것이다.
“군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해! 집도 땅도 없어도 사람이 있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으니까!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건 내가 사는 것, 그다음 아군이 사는 거야! 군주가 해야 하는 일은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건데 너는 장차 대공이 될 놈이 제가 죽을 생각부터 먼저해?!”
베이넌이 피땀 흘려 교육한 제왕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리 말한 예르넨은 다시 손날을 세웠다.
“아야!”
라일은 맞지도 않았으면서 엄살부터 부리고 나섰다.
“내가 이런 한심한 놈을 부하로 삼았다니!”
“하지만 예르넨, 이 상황에서 그거 말고 방법이 뭐가 더 있겠어.”
“아니, 있어.”
“…?”
“말했지. 군주가 해야 하는 일은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거라고. 보고 배워.”
그렇게 말한 예르넨은 매트리스를 낑낑대며 끌어내기 시작했다. 라일은 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예르넨을 거들었다.
‘매트리스를 던지고 그 위에 올라가려는 건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고는 해도 그건 상대적인 속도였다. 아직 마차가 이렇게나 빨리 달리고 있는데 매트리스를 떨어뜨려 봤자 순식간에 멀어지기밖에 더할까.
“이걸 봐.”
“…?!”
하지만 땀을 흘려가면서 매트리스를 빼낸 예르넨이 매트리스의 커버를 벗기고 구석의 지퍼를 열자 매트리스의 속이 드러났다.
“이게 무슨….”
“예전에 세실이랑 숨바꼭질하다가 찾아냈지.”
“어….”
그 말을 들은 라일은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막내 황자를 찾기 위해 고생고생을 했을 세실과 황자궁의 시동들이 가여워져 마음속으로 심심찮은 위로를 표해야 할 것만 같았다.
분명 한참 동안 찾지 못한 예르넨이 이런 곳에 들어가 있었음을 알아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위험하다며 다시는 이런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어르고 달래기나 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예르넨은 선심이라도 쓰듯이 알았다고 해 주었겠지. 뻔히 그려지는 황자궁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예르넨이 말한 대로 이건 대단한 방책이었다. 라일은 벌어진 안을 살펴보았다. 스프링으로 되어 있는 끝부분은 천에 덮여 있고 사이는 거위 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충돌할 때에 완충작용을 해 줄 것이다.
“반대쪽을 문밖으로 나가게 한 다음에 안에 들어가고 지퍼를 잠그자.”
“그래.”
계획을 세우니, 실행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둘은 재빨리 매트리스를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등 쪽으로 힘을 싣자, 순식간에 갸우뚱하면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위 털 사이에 파묻힌 두 아이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충돌을 대비했다.
쿠웅!
“윽!”
충돌은 생각했던 것보다 거셌다. 예르넨은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등이 터질 것 같은 아픔에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쿵!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커다란 나무에 한 번 충돌한 매트리스는 고대로 흙바닥에 떨어졌는지 이내 주위가 잠잠해졌다.
“…예르넨.”
시야가 온통 어둠뿐이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와중에도 라일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왜.”
“다행이다.”
“뭐가?”
“살아 있어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라일이 작게 웃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유리 인형이라도 돼? 이 정도로 죽게.”
“그러니까. 죽을 리가 없는데… 걱정했어.”
“됐고, 이다음은 어떻게 해?”
“흐음.”
어찌어찌 탈출하긴 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산에는 마물뿐만 아니라 굶주린 맹수들도 있는 법. 어린아이 둘이 밤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나가야겠지.”
기본적으로 매트리스 안은 물은커녕 공기도 통하지 않을 만큼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이 안에서 버틴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 부족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매트리스 밖으로 나와서 둘러본 밖은 정말이지 첩첩산중의 한가운데였다. 풀이 꺾여 있거나 땅이 다져져 있는 것처럼 사람이 오고 간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다니는 예르넨은 몰려오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주춤하고는 바닥을 살피는 라일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뭔가 흔적이 있어?”
“으음… 있지.”
“뭔데?”
“우리가 망했다는… 흔적?”
“뭐…?”
“큰일 났다고.”
대체 뭐가 있길래 그리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르넨은 라일이 짚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이리떼의 흔적이야.”
“…!”
듣고 보니 그곳은 어딘가 주변과 다른 것 같았다. 땅에 발자국 같은 게 무수히 많이 찍혀 있었다.
“…밤인데 자러 가지 않았을까?”
“애석하게도 늑대는… 야행성이야.”
예르넨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일단… 이리와!”
라일은 예르넨의 팔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예르넨은 순간적으로 뒤를 살폈다. 저 멀리에서 노란 안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헉…!”
예르넨은 라일의 손을 잡고 라일이 이끄는 대로 미친 듯이 달렸다.
“그렇게 큰 소리가 들리는데 저것들은 안 도망가고 뭐한 거야…!”
하지만 예르넨도 알았다. 그리 말한다고 한들 현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둘은 이리 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어둠이 내려앉은 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려갔다.
아우우!
뒤편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를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라일은 아직 단 한 번도 늑대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잡아본 것은 기껏해야 사슴이나 토끼, 흰 여우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잡고 나서 가신들에게 나이치고는 대단하다고 추켜세움을 받을 정도였다.
‘석궁도 없고.’
지금 그에게 있는 것은 고작 어린아이의 체격에 맞춘 검 한 자루뿐. 게다가 예르넨까지 지켜야 했다.
“허억, 허억.”
예르넨과 라일은 몸을 숨길만 한 곳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나무를 헤치면서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행운이 얼마나 갈까. 요행조차 바랄 수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기 그지없었다.
퍼억!
“헉!”
“아악! 라일!”
“예르넨!”
예르넨의 작은 등 위에 거대한 회색 늑대가 커다란 앞발을 얹고 있었다. 금세 신호를 받고 온 늑대 몇이 동료들을 따라 사냥에 나선 것이다.
챙!
라일은 검을 빼 들고 겁도 없이 예르넨의 몸을 앞발로 누르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늑대의 옆구리에 칼을 박아 넣었다.
컹!
‘제길!’
그저 얕게 베였을 뿐이었다. 이 검으론 저 정도가 한계였다. 라일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예르넨의 팔을 잡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늑대가 세 마리나 따라붙어 있었다.
“힘, 힘이 안 들어가.”
예르넨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벌벌 떨면서 비틀거렸다. 하지만 탓할 수가 없었다.
벨티모어 대공과 기사들을 따라서 몇 번이나 산이며 들이며 쏘다니며 맹수와 마물들을 보았던 라일조차도 전신이 떨려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마저 그럴 지경인데 하물며 황궁 안에서 어화둥둥 귀애만을 받던 예르넨은 오죽할까. 예르넨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겪는 목숨의 위협이다. 이 정도로 따라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라일은 예르넨의 허리에 팔을 감고 일으켜서는 품 안에 끌어당겼다. 뒤를 맡길 수조차 없으니 그저 앞에 두고 보호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절대 저들에게서 눈을 떼면 안 돼. 눈을 떼고 뒤를 도는 순간 달려들 거야.”
늑대들은 점차 포위망을 좁혀 왔고 라일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크르릉.
“…?”
헌데 이상하게도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라일은 딱 한 번,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이런 상황에서 뒤에 있던 것은….
‘낭떠러지였어.’
정말이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르넨.”
“으, 으.”
“뒤로, 가 봐.”
“뒤…?”
“내가 앞을 보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저 녀석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천천히 뒤로 가서 아래를 봐봐.”
예르넨은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라일의 말을 따라서 뒤로 향했다.
“헉.”
눈앞에 드러난 것은 절벽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솨아아.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소리가 들려.”
“뭔데?”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일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바람이 거세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어. 조금만 가까이 와 봐.”
예르넨은 라일의 뒤에 붙어서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굴러떨어질 수준까지 다가간 뒤에야 예르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밤의 어둠을 헤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있어. 라일. 커다란 강이야.”
모든 것을 삼킬 것만 같은 강이, 밑바닥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뛰어내리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모르겠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군주께서 결정하신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이 그건가?”
라일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이 지금 농담할 상황이야?”
라일이 긴장한 와중에도 작게 피식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지. 예르넨. 내 검집을 살펴봐.”
그 말을 듣고 살펴본 라일의 검집에는 긴 가죽끈이 늘어져 있었다.
“…?”
“그걸로 네 손을 묶어.”
“왜?”
“혹시나 떨어질 수 있잖아. 빨리. 저것들 우리가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했나 봐. 달려들려고 하고 있어.”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예르넨은 재빨리 제 손을 라일의 검집에 달린 끈에 묶었다.
“온다!”
“아, 아직 제대로 안 묶었어!”
“빨리!”
“묶었어!”
“뛰어!”
라일이 뒤를 돌더니 예르넨의 허리를 잡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아악!”
순식간에 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둘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시커먼 어둠이,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이 그대로 둘을 집어삼킬 것처럼 위압적으로 넘실거렸다.
예르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
물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떨어진 것만 같은 엄청난 파공음이 귓가를 때렸다. 고통에 차 벌어진 입 사이로 커다란 공기 방울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매트리스 안에 들어가서는 탈출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느껴졌다. 이건 말 그대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예르넨은 시린 물에 둘러싸여 숨이 막혀 오는 와중에도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깊은 물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갔다.
* * *
차가운 공기가 볼을 두드렸다. 냉기가 가득 담긴 그 두드림에 밝은 잿빛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다 들어 올려졌다.
“아윽…!”
예르넨은 죽을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고, 지독한 추위가 엄습했다.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뜬 예르넨은 제 곁을 살폈다.
“하아.”
끈이 끊어진 건 아니었는지 다행히 라일이 곁에 있었다.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높이에서 떨어져 내렸음에도 용케 둘 다 살아남은 것이다.
예르넨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올려서 라일을 흔들었다.
“라일, 라일 벨티모어.”
“으윽.”
“일어나.”
새벽빛이 비쳐서 그럴까. 라일을 흔드는 예르넨의 손은 유달리 새파래 보였다.
“예르넨…?”
“…주변에 늑대는 없는 것 같아. 다른… 동물 같은 것도 없어 보여.”
라일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예르넨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여기저기 크고 작은 멍이 들긴 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픈 데는 없어?”
“…머리가 아파.”
“떨어질 때 어디 부딪쳤나 봐.”
“그리고… 추워.”
확실히 외상은 없지만, 예르넨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이 너무 창백했다.
“불을 피워야 할 것 같아.”
예르넨은 산에서 노숙도 해 보고, 토벌이랍시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험하게 자라온 라일과 달랐다.
가신들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곱게 자란 어린 귀족 도련님은 험한 일을 겪으면 충격을 받고 집에서 키우는 식물처럼 쉽게 죽어 버린다는 말. 그러니까 이런 경험도 해 보아야 한다며 으스대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적엔 라일도 산행 한번 해 보지 않고 평생 책이나 본 샌님들은 그럴지도 모른다며 동조했지만, 절대로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예르넨이 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불을 피우고 몸을 데워야 할 것 같았다. 물가 주변은 위험하니 조금 떨어질 필요도 있었다. 라일은 제 컨디션을 살폈다. 통증은 심하지만, 따로 이상은 없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하지만 예르넨은 그저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마저도 어딘가 힘에 부쳐 보였다.
“여기… 있을게.”
“…….”
“괜찮으니까… 표정 좀 풀어.”
라일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동굴 같은 데를 찾아서 숨어드는 건 힘들겠어.’
험준한 산맥이었다. 동굴을 찾는다 한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서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여기에서 불을 피울까.’
산맥 한가운데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둘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겨왔다. 마차에서 탈출할 때도 이리 떼에게 쫓길 때도. 하물며 저 높이에서 떨어졌을 때마저도.
라일은 그리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신의 도움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대단하신 황손이 함께 계시는데.’
황가에는 신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대단한 황실에서도 특히나 사랑을 받는 게 예르넨이었다. 그러니 예르넨에게는 어쩌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 대단하신 신이 있다면… 짐승 정도는 쫓아 주겠지?’
물론 이리떼는 쫓아 주지 않았지만, 지금은 작은 가능성에라도 걸어 봐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라일은 빠르게 숲으로 달려가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들을 긁어 왔다. 다행히 계절이 계절이어서 그런지 나뭇가지들은 잘도 말라 있었다.
“후.”
라일은 가신들이 하던 모양새를 떠올리며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을 만들었다. 그도 보기만 했지 실제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인데 지금 붙이고 있는 이 불이 예르넨의 생명의 불씨라고 생각하니 팔근육이 저리지도 않았다.
손에 온통 가시가 박히고 붉게 달아오를 때가 되어서야 라일은 겨우 불씨를 살려낼 수 있었다.
평소라면 꽤 한다며 빈정거릴 예르넨인데 정말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인지 그저 힘없이 바위에 기대어만 있었다. 이젠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머리? 머리 아파?”
조금 전 살폈을 때 딱히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걱정이 됐다.
“…….”
“체온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우선 옷부터 벗자.”
라일은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예르넨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너.”
그리고 라일은 그제야 예르넨의 목과 어깨 주위를 모두 점령한 거대한 멍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이거 몇 개야.”
라일은 진심으로 걱정을 하면서 예르넨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두…개 이 미친놈아.”
욕을 하는 걸 보아하니 정신이 살아 있는 건 맞았다. 라일은 안도하며 말했다.
“그래 제정신인 건 같네.”
라일은 예르넨의 옷을 벗기고 제 품 안에 끌어안은 채로 축축한 겉옷을 들춰 입었다.
“옷이 마를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
걱정과는 달리 곁에서는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 들려올 뿐 마물이나 짐승의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주변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니까… 곁에 있는 사람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예르넨.”
“…….”
“예르넨.”
라일은 끈질기게 예르넨의 이름을 부르면서 맥을 짚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로 맥이 지독히도 느리게 뛰었다. 뭔가 탈이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라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번 가신들이 주는 약만 먹어왔기에 약초 같은 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만약 약초를 찾는다고 해도 어디가 다쳤는지 알 수 없으니 사용할 수도 없다.
그 이전에 예르넨의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맥이 천천히 뛰는데 체온까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르넨…!”
“…왜.”
몇 번이나 부른 끝에 겨우 예르넨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목 안 말라?”
“…….”
다시 예르넨은 입을 닫았다. 말할 힘도 없으니 조용히 하라는 듯이 눈을 감기까지 했다.
라일은 다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왠지, 지금 눈을 감고 쉬게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예르넨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점 새파래져 가는 예르넨의 안색을 살피며 라일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조그마한 몸에서 점점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그저 예르넨이 잠에 들지 않게 말을 걸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라일의 얼굴이 굳었다.
“…….”
더 이상 호흡도 맥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일은 바닥에 예르넨을 눕히고 심장을 압박했다. 한참을 가슴을 누르고 있자니 콧잔등을 타고 물이 떨어졌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제발… 제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이 끔찍이도 괴롭고, 무서웠다. 그리고 간절히도 보고 싶어졌다. 늘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건방진 시선이. 여기저기 패악을 부려 대면서도 그를 볼 때면 유해지는 눈빛이.
“예르넨…!”
잃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모두 살아간대도 결코, 다시는 찾을 수 없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그의 약혼자를.
“제발…!”
얼마나 그렇게 심장을 압박했는지 몰랐다. 여전히 예르넨은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팔이 찢어질 것 같았음에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손을 뗀다면 영영 예르넨을 잃고 말 테니까.
그때였다. 기척이 느껴졌다. 라일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
발소리가 들려왔다. 딱딱한 군화를 바닥에 디딜 때면 날 법한 그런 소리가.
“전하! 여기다!”
뒤이어 들려온 아이닌스 백작의 목소리에 라일은 확신했다. 그들을 찾으러 기사들이 왔다는 사실을.
라일은 풀숲 사이로 그들의 얼굴이 얼핏 보이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치료사… 아니, 신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라일의 말은 모든 이들의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라일은 낯빛이 어두운 것을 제외하고는 무척이나 멀쩡해 보였다. 산에서 조난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신관이 필요한 게 과연 누구겠는가.
황제가 예르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예르넨을 말 그대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숨을 쉬면 꺼질까 허공에 띄워진 얇은 깃털 대하듯이 대했다.
당장 달려온 신관이 재빨리 예르넨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한참을 처치한 끝에 그 신관은 기어코 아주 미약하게나마 예르넨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르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치료는 마차에 예르넨을 태우고, 빌레로이 공작성을 향하면서도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 * *
“…….”
예르넨은 눈을 떴다. 어쩐지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르넨!”
“황자 전하!”
“라… 큼!”
목이 꺼끌꺼끌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일어나려고 해도 힘이 없었다.
“너, 지금 당장 예르넨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폐하께 말씀드리고 오도록.”
“네!”
예르넨은 저를 일으켜 주는 라일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입가에 대어지는 미지근한 물을 아기새처럼 받아먹었다.
“라일.”
그제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것 같았다.
“예르넨….”
늘 뺀질거리던 놈이 답지 않게 울먹이는 얼굴을 하고 예르넨을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누가 죽다가 살아나기라도 했어?”
예르넨은 입을 삐죽이고 눈을 치켜뜨면서 라일을 보고 말했다.
“너… 지금 일주일 만에 일어났어.”
“뭐…?!”
예르넨을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어쩐지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이곳은 황성에 있는 예르넨의 방이었다.
“일주일 만에 왔다고…?”
아직 세실이 있는 포트넘 공작령까지는 가지도 못했었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분명 남부의 빌레로이 공작령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되어 황성으로 돌아오다니.
“설마….”
예르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일을 보며 말했다.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썼다는 거야?”
“플뢰르 변경백께서 도와주셨지.”
예르넨은 힘없는 팔을 들고는 눈가를 덮었다. 마법사는 무척이나 귀했고 개중에서도 공간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특히나 더 귀했다.
“아바마마 진짜… 뭘 잠깐 쓰러진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해?”
예르넨은 불만의 말을 종알거리려고 했지만 라일이 그를 꽈악 끌어안아 왔기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라…일…!”
‘이 미친놈아 나를 터트리기라도 할 작정이냐!’라고 말하며 등을 팡팡 두드리고 싶었지만 지금 예르넨에게는 그럴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서 늘 뺀질거리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이던 약혼자가 지독히 애끓는 마음으로 걱정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예르넨은 그저 픽 하고 웃어 보이고는 라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예르넨!”
“어마마마….”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넨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록시에와 베이넌이 새파래진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이후 예르넨이 한참이나 걱정 어린 목소리들을 듣게 된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말이다.
“예르넨!”
그러나 그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귀족들의 문안 인사가 줄줄이 이어진 뒤 뒤늦게 찾아온 헤리엇은 말 그대로 황궁이 떠나갈 것처럼 서럽게 울며 예르넨의 상태를 살폈고 지극한 태도로 몇 날 며칠 동안 예르넨의 곁을 지켰다.
황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헤리엇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던 예르넨은 다시 자주 문안을 오는 헤리엇에게 완전히 화를 풀고 기껍게 대해 주었다. 물론 그의 약혼녀인 리지에게는 별개였기에 여전히 리지는 예르넨의 궁에 출입할 수 없었다.
원래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한숨을 쉬면 꺼지기라도 할까 고이고이 키워지던 예르넨에 대한 황실의 관심은 사고 이후 더욱더 지극해졌다.
황명을 받아 새로이 예르넨의 곁에 배정된 황제궁의 시동들은 예르넨이 혹여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늘 조마조마한 눈을 하면서 그를 돌봤고 그런 황제의 과보호는 한 달 가까이 솜털 취급을 받던 예르넨이 짜증을 내며 황궁을 뒤엎을 때까지 계속됐다. 크게 다쳤던 것에 비해서 별달리 이상이 없었기에 모두는 그저 나이가 어리기에 쉽게 털고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 추운 겨울이 지났고, 봄이 왔다. 그리고 황궁에는 한가지 경사가 전해졌다.
바로 이제는 포트넘 공작부인이 된 세실과 에단 사이에 결실이 생겼다는 것.
“누이에게 아기라니.”
예르넨은 충격을 받았다. 세실에게 그보다 더 소중한 대상이 생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든지 제 것이어야 하는 욕심 많은 막내 황자님은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질투를 느끼며 록시에의 품에 안겨 볼멘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라일이 대공령으로 떠났기에 대신 불만을 들어줄 존재가 없어 택한 차선이었다.
“예르넨, 세실에겐 소중한 것이 늘어나는 것뿐이야. 결코, 네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아니란다.”
“하지만…! 누이는 이번 봄에도 수도에 오지 않았는걸요. 여름에도 오기 힘들다고 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단다. 홑몸이 아니지 않니.”
록시에의 다정한 말에도 예르넨의 마음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예르넨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가 보고 싶어요.”
“예르넨.”
록시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겨울이 되면 플뢰르 변경백의 도움을 받아 포트넘 공작가에 잠깐 들르도록 하자. 이 어미와 같이. 그때가 되면 알게 되지 않겠니. 이 어미의 말처럼 여전히 우리 아기가 세실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거 보렴. 세실이 이번 달에도 우리 아기에게 이렇게 긴 편지를 보내 주었구나.”
록시에는 세실이 보내온 두툼한 편지를 꼭 끌어안고도 속상해하는 예르넨을 가만가만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세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듯이 앞으로 예르넨에게도 전과 같은 큰일이 없이 무탈하고 행복한 날들만 계속되기를 바라 주었다.
하지만 록시에의 바람은 사그라지는 봄꽃처럼 덧없는 것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세실의 아이는 태어났으나 첫울음을 토해 내지 않았으며, 눈조차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황실에 닥친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포트넘 공자가 달을 채우고 태어나지 못한 이듬해, 눈을 뜨지 않는 공자를 살려보겠다며 세실은 아기를 데리고 수도로 왔다. 하지만 수도의 고위신관들이 몇이나 달라붙었음에도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아이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예르넨이 10살이 되었을 무렵, 건강하던 황제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급사했다.
체기를 느끼던 황제는 이내 복통을 심하게 호소했고 일주일이 채 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수많은 궁의와 신관들이 책임을 명목으로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정해진 수순대로 황위는 예르넨의 첫째 형인 헤리엇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록시에는 헤리엇에게 황위를 내려 주기 직전, 끝의 끝까지 예르넨에게 황제가 되고 싶지 않냐는 물음을 건네어 왔지만, 여전히 황제의 자리 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예르넨은 언제나처럼 유야무야 하며 대답을 넘겼다.
그맘때의 예르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저 라일에게 검을 배우고, 또래의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그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한 가지 더. 예르넨의 온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있었다.
황제의 서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일은 알파로 발현했다. 발현된 이후 라일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키가 커졌고 힘도 훨씬 강해졌다.
예르넨은 자신은 여전히 아이 같은데, 똑같은 꼬맹이였던 라일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커가며 그를 꼬맹이라고 놀려 대니 화가 나서는 매일같이 녀석을 목검으로 흠씬 때려 주곤 했다.
그럴 때면 라일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전부 맞아 주었고 그런 라일의 태도에 예르넨은 또 기분이 좋아져 자그마한 어깨를 으쓱했다.
라일이 알파로 발현한 이후로 한 방에서 같이 잘 수는 없게 되었지만, 라일이 수도에 있을 때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르넨은 늘 라일과 함께했다.
그리고 라일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건 예르넨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성인이 되고 성대한 혼인을 치른 뒤 라일과 함께 벨티모어 대공가를 이끄는 것은 정해진 미래나 마찬가지였다.
베이넌은 예르넨에게 늘 말했다. 제국의 권력을 중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예르넨이 북부를 통치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예르넨은 라일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라일의 부하랍시고 종종 같이 오는 놀이 상대들도 퍽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라일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뜻 보이는 그의 위정자로서의 자세도 좋아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예르넨은 라일과 함께 벨티모어 대공령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밥을 먹고 열심히 크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예르넨은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다. 분명 열네 살이 되기까지 모든 알파와 오메가가 발현했고, 이후에 발현하는 사례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예르넨은 그게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사이, 예르넨이 열세 살을 맞이한 해의 10월. 예르넨의 모후이자 선황비인 록시에 마리아쥬 헬리오가 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