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1권) (1/19)

그 폭군의 해피엔딩 1권

PROLOGUE

황량한 바람이 콧잔등을 스쳤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조국의 공기였다. 그 익숙한 내음을 맡으며 라일은 그리워하던 벨티모어의 땅에 발을 디뎠다.

잎새를 모두 떨군 나뭇가지도, 차갑게 얼어붙은 땅도.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이 땅을 떠나던 그 날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12년 만인가.’

“와아!”

아니, 그사이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 매서운 겨울임에도 영지는 활기찼다. 마을에는 작지만 장이 서 있었고 꼬마들은 그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는 아픈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이런 활기는 기대할 수 없었는데.

지나가는 아이들을 따라서 그의 시선이 이동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닿았다.

음유시인이었다.

“… 이런 계절에도 음유시인이 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부관, 스테핀이 답했다.

라일은 신호를 주어 군대를 멈추고, 몇몇만을 동행한 채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아이들은 합창하듯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해 본 듯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아 가엾은 나의 조국, 헬리오. 그 미래는 어디를 향하는 것인가.”

“흐음.”

음유시인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국경 부근을 지나면서도 내내 울렸던 노래였다.

여색과 남색을 두루 밝히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미친 황제가 형수를 탐하고 제 두 형을 죽인 뒤 황위에 올랐고, 이후 황족과 대신들을 모두 죽이며 폭정을 휘두르고 있다는 내용.

라일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우리 폐하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지네.”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스테핀이 괜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럴 법도 했다.

예르넨 헬리오. 현 제국의 황제이자, 유일무이한 권력을 가진 폭군.

사사로이는 그, 스테핀 마리아쥬의 사촌이 되는 자였으며 공적으로는 그가 모시는 상관인 라일의 가문, 벨티모어 대공가를 멸문시키고 전쟁 노예로 격전지에 던져 버린… 무자비한 전 약혼자였다.

라일이 예르넨 헬리오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는 그로서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유감입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스테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전하…!”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날듯이 뛰어왔다.

“윌리엄…?”

라일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가오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전하, 이리 살아서 다시 뵙게 되어 이 윌리엄은 그저 기쁠 뿐입니다.”

“뭐야, 윌리엄. 이제 영감 다 됐네. 왜 여기까지 나왔어, 날도 추운데 그냥 들어가 있지 않고.”

라일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툴툴대는 어투로 그에게 답했고, 윌리엄의 주름진 얼굴에는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여전하시군요.”

“그래, 자네… 아니. 이제 집사인가. 집사도 마찬가지야.”

“예.”

그는 라일이 떠난 시간 동안 벨티모어를 지탱해 준 고마운 가신이었다.

윌리엄의 가문은 대대로 라일의 집안을 모시며 집사 자리를 세습해 왔다. 그랬기에 그는 전대 대공인 라일의 아비가 죽고 대공가가 고초를 겪게 되는 과정에서 대공을 따라 목숨을 잃은 그의 아비를 대신해 벨티모어 대공가의 집사가 되었다.

그것은 라일과 윌리엄. 둘 모두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였지만, 둘은 모든 것을 덮어 두고 그저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해후를 나누었다.

검은 머리가 창창하던 중년의 사내가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그런 윌리엄을 보고 있자니, 그가 겪은 고난의 시간이 느껴지는 듯하여 라일은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보다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여기까지 나온 거지?”

“그것이… 알버트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알버트 공작…?”

라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수도 위로 넘어오면 죽는 병에 걸린 남부의 대 귀족께서 무슨 일로 이 누추한 영지까지 찾아온 거지?”

“직접 뵙기를 청하신지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폐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윌리엄이 조심스레 라일의 눈치를 보며 운을 띄웠다.

“…….”

라일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날이 꾸물했다. 마치 한바탕 눈이 쏟아질 것처럼.

“눈이 올 것 같네.”

* * *

“오오…! 벨티모어 대공, 오랜만이군.”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짙은 환대가 쏟아졌다.

“무슨 일이지, 알버트 공작.”

알버트 공작. 그는 라일을 저 먼 땅으로 보낼 때만 해도 대전에서 비열하게 웃고 있던 이였다.

또, 그전에는 어떠했는가. 북부 야만인의 핏줄을 이은 짐승이 황궁을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뒤에서 라일을 씹어 대지 않았는가?

그 콧대 높은 남부의 알버트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다니. 대체 그가 제국을 떠나있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라일은 느슨하게 소파에 기대어서는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천천히 훑었다.

“야반도주라도 한 꼬라지군.”

알버트 공작은 그 모욕적인 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빌어먹을 애새끼…!’

상황이 급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 빌어먹을 뺀질이 녀석에게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황제를 치기 위해서는 이 애새끼의 힘이 필요했다.

알버트 공작은 애써 유들유들한 얼굴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대공이 오랜만에 이 땅에 다시….”

“용건.”

“…?”

“용건만 말하도록 해.”

“…….”

‘북부 야만족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알버트 공작은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을 숨기려 애를 썼다. 정말 상대하기 싫은 놈이었다.

“북부를 정벌하고 온 그대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현 황제는 미쳤네.”

“호오.”

라일이 팔짱을 끼고 더 해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치광이 폭군을 죽이려고 하네.”

“예르넨을 말이지.”

“그래… 예…르넨 헬리오. 그자를 말이야.”

“그다음엔?”

“그다음?”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황위를 이을 만한 황족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잖아?”

라일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듯, 알버트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작. 내가 오랫동안 제국을 떠나있긴 했지만 머저리는 아니야. 이 땅에 남은 황족 중 계승권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도 없잖아? 예르넨을 제외하면 유일한 황족이 되는 포트넘 공작부인이 절대 황위를 잇지 않겠다며 예르넨에게 신혈의 맹세를 했으니까.”

“…포트넘 공작부인 말고도 황족이 한 분 더 계시지 않나.”

“하, 그 18년 동안 눈도 못 뜬 어린애? 시체나 다름없는 녀석을 황위에 올리자고? 공작, 노망났어?”

예르넨이 폭군이라는 사실은 온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끄트머리에까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예르넨을 폐위시킬 수 없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대대로 황제의 자리에는 신의 피를 이은 황족만이 오를 수 있었는데, 그가 즉위하자마자 황족을 모두 숙청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거라곤 황위 포기 각서를 쓴 그의 누이와, 태어난 뒤로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한 그의 반쯤 죽어 있는 조카뿐이었다.

“아니.”

그럼에도 알버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라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공작, 지금 설마….”

“그래, 자네가 황제가 되는 걸세. 자네는 포트넘 공자의 약혼자가 아닌가…!”

“지금 나보고 눈도 못 뜬 애새끼랑 관계해서 후사를 가지라는 건가?”

알버트 공작의 눈이 흔들렸다. 그 역시 무리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대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네! 자네는 저 넓은 북부를 모두 제국에 복속시켰지! 그 어떤 황제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룬 거나 마찬가지야! 황제가 될 자격이라면 충분해!”

라일은 씨익 미소지었다. 나른히 짓는 그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성전에 있는 신의 초상처럼.

“내 말뜻을 알아듣겠나?”

알버트 공작은 침을 삼키며 라일을 바라봤다. 그가 반쯤 넘어왔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림도 없지.’

“뭐, 이거 하나는 알 것 같군.”

“뭐지?”

“그대가 지금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

스릉.

라일은 검을 꺼내 들었다.

“이, 이봐…!”

“반란 모의는 즉결 처형이다.”

새하얀 검신은 순식간에 응접실을 스치고 지나갔다.

“…….”

털썩.

알버트 공작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전… 전하…!”

있는 듯 없는 듯 뒤를 지키고 있던 스테핀이 식겁하면서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아니, 대신의 목을 베다니요!”

“스테핀.”

“아, 왜요!”

스테핀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면서도 말을 걸어오는 라일이 짜증 난다는 듯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도 알고 있었다. 반란 모의는 발견 즉시 즉결 처형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것을.

그래도 그렇지. 상대는 무려 공작이었다…!

“너는 내가 알버트 공작과 손을 잡으면 네 사촌을 죽이고 황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나?”

“그… 그건….”

스테핀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녀석들은 중간에서 박쥐같이 간이나 보다가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아 죽이듯 나와 포트넘 공자 사이의 약혼을 파기한 뒤 나를 죽일 거야.”

“예…?”

스테핀은 그런 가정은 해 보지도 못했다는 듯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메리온 공작이 죽었다. 공작의 영지는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지. 구심점을 잃은 이들은 아마 그다음으로 세력이 강한 이의 아래에 모여들었을 거야. 그게 누구겠어?”

“알버트 공작님이요…?”

그렇다면 더 죽여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스테핀의 눈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쯧쯔. 멍청한 놈. 이놈을 부관 자리에서 해고할 수도 없고.”

“예?”

스테핀이 여전히 맹하게 되물었다.

“그러니 죽여야지. 녀석들의 목적을 아직도 몰라? 첫째로 황제를 죽이고 둘째로 나를 죽이고 셋째로 이 나라를 통째로 먹는 게 이 녀석들의 목적인데. 그러니 폐하께서 명하신 거 아니겠어? 나한테 이 녀석을 죽이라고 말이야.”

“무슨 소리십니까. 폐하께서는 12년째 전하의 편지를 씹고 계시는데요?”

라일은 혈압이 오르는 걸 느꼈다. 녀석이 록시에 전 황후의 조카만 아니었어도 배에 칼침을 놓았을 거다.

“공작이 저 대륙의 끝 남부에서 이 북부까지. 횡단한 것 자체가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신 거나 마찬가지다. 아니었으면 녀석이 이 땅을 밟을 수나 있을 것 같나?”

“아…!”

스테핀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그러고는 라일의 입에 제 귀를 갖다 대었다.

“글쎄.”

라일은 그의 얼굴을 밀어 버리고 느슨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답했다.

“일단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얼굴을 뵈러 가볼까.”

“하지만 지금 수도로 간다면… 폐하께서 다른 대신들에게 그리하신 것처럼 전하를 숙청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라일은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예르넨이 보고 있을 수도의 하늘도 이와 같을까.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래도 간다. 눈이 내리기 전에 출발하도록 하지. 기사들에겐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줬으면 한다고 전하도록.”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몇몇 사용인이 알버트 공작의 시체를 치우고 떠났기에 응접실에는 오롯이 라일 혼자만이 남았다.

“예르넨.”

지독히도 증오하는 이름. 라일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수많은 밤 동안 되뇌었던 이름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정신을 놓고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라일은 그 모든 순간에 그 이름을 떠올리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담아 정말 지독히도 저주하고, 증오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리워했다.

그의 두 눈이 시린 빛을 띠었다.

묻고 싶은 게 잔뜩이었다. 왜 황족들을 모조리 죽인 건지, 왜 대신들을 숙청한 건지, 왜 미친 폭군이라는 소문이 전 대륙에 퍼질 정도로 엉망으로 살아간 건지. 그리고 왜.

‘나를 버린 건지.’

“…수도로 가면, 들을 수 있겠지.”

그 조그마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 * *

“맙소사.”

성벽을 바라본 스테핀이 얼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늘 호들갑을 떨곤 하는 스테핀뿐만 아니라 진중한 성격의 발렌마저도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수도는 정말이지… 아비규환이었으니까.

라일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성벽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우선은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너.”

“예, 옛!”

발렌의 호명을 들은 어린 기사가 군기가 바짝 들어간 대답을 했다.

“대공께서 방문하셨음을 문지기에게 알려라.”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기사는 재빨리 말을 달려 성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벨티모어 대공께서 북부를 정벌하고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얼마나 쩌렁쩌렁 외쳤는지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일에게까지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쿠궁.

그리고 고작 그 한마디에, 굳게 닫혀서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성문이 쉽게 열렸다.

“말 한마디에 문을 열다니, 전장이었으면 문지기의 목이 날아갔겠네.”

스테핀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작은 킥킥거림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 지나야 하는 수도의 성벽에, 온통 귀족들의 목이 걸려 있었으니까.

벨티모어 대공의 정예병들은 수도로 진입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미치광이 폭군이라는 위명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 * *

‘… 이상해.’

라일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도에 들어오고, 황궁에 진입할 때까지 내내.

무엇이 이상하다 콕 집어 말하긴 힘들었다. 그저 이상하다는 감각만을 느낄 뿐.

라일의 발걸음이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예르넨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침내 연회 홀에 도착했을 때, 라일의 의문은 최고조에 달했다.

“오랜만이군, 테네스.”

“…대공 전하.”

“왜 너가 문지기 따위를 하고 있는 거지?”

“…….”

오랜만에 만난 친우는 여전히 과묵했다. 그렇기에 라일은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나.”

“그렇습니다.”

“비켜라.”

테네스는 망부석이라도 된 듯이 비켜서지 않고 문을 지켰다.

스르릉.

그 모습을 본 라일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검을 뽑아 들고는 테네스의 목덜미에 갖다 대었다.

“기어이 피를 봐야 문을 열겠다는 소린가?”

“…….”

“당장 열어.”

라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테네스는 눈을 감았고, 이내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

사방이 피바다였다. 라일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 미친놈.”

절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누구의 작품인지 보나 마나 뻔했다.

“…왔어?”

“예르넨.”

“폐하라고 해야지?”

커헉.

삐뚜름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예르넨은 눈을 내리깔며 피거품을 물고 있는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알버트 공작은 어떻게 했지?”

“…죽였어.”

“잘했어. 그럼, 기다려.”

키우는 애완견에게 하듯이 명한 예르넨은 머리칼을 쥐고 있는 피투성이 귀족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고,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칼을 뽑아낸 자리로부터 울컥거리며 튀어나온 피가 예르넨의 바짓단을 적셨다. 허나, 바지의 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새까만 바지는 이미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라일은 멍하니 대연회장을 훑어보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피바다가 된 연회장의 한가운데에서 마찬가지로 피를 뒤집어쓴 예르넨이 지친 얼굴로 비웃음을 흘렸다.

“보고도 몰라? 못 본 사이에 멍청해지기라도 했나.”

12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라일은 윌리엄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라일은 화난 얼굴로 질척거리는 피바다를 지나 예르넨에게 다가갔다.

“예르넨 헬리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야?”

예르넨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피비린내 사이로 비릿한 꽃내음이 나는 것도 같았다. 페로몬 향은 아니었다. 예르넨은 베타였으니까. 그런데, 예르넨에게서 나는 그 향은 페로몬 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치게 만드는 듯했다.

“글쎄.”

그리 대답하는 예르넨의 두 눈은 그저 흐릴 뿐이었다.

예르넨은 눈을 내리깔며 손을 털어 냈다. 검에 묻은 피를 제거하려는 듯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털어 내기를 포기한 예르넨은 제 머릿결을 가다듬었다.

짙은 고수머리를 가다듬는 건 예르넨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어린 시절보다 조금 더 짙어진 잿빛이 섞인 금발 머리는 피에 젖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아래,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목구비와 검은색 눈 역시. 크면서 못나지기는커녕… 더 아름다워졌다.

여전히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를 홀려 버릴 만큼.

머리카락보다 채도가 옅은 긴 속눈썹이 하늘거리며 움직여 음영이 질 때마다 마치 세기의 천재가 빚어낸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스물다섯 살이나 먹었으면 이제 다 자란 게 분명한데도 예르넨은 여전히 소년 같았다. 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의 미를 가진 얼굴은, 말 그대로 꽃 같았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은 아니었다. 만개한 뒤에 사그라짐을 앞두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예르넨이 어떻게 커갔을지, 머릿속에서 그렸다. 수십, 수백 번을. 그러나… 실제의 예르넨은, 그 상상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자라 있었다.

‘나도 참 어련해.’

라일은 화를 내며 따져야 하는 이 상황에서까지도 예르넨에게 홀려 버린 자기 스스로가 글러 먹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 마음은 순수한 사랑과 애정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았다.

“라일.”

예르넨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고 부른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작게 읊조려 보는 것 같았다.

“라일 벨티모어.”

그리 그를 호명한 예르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마주친 얼굴에서는 어딘가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처연함이라니.’

‘그’ 예르넨 헬리오였다.

라일의 부모를 죽이고 그를 전쟁 노예로 만들어 북부에 내던진 그 예르넨 헬리오.

그래도, 그럼에도. 그를 증오하면서 빌어먹게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해서 보낸 전서에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은, 지독히도 잔인한 첫사랑.

항상 턱 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악을 부리는 미친 망나니. 그러나 얼굴만은 지독히도 아름다워서 누구든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사랑스러운 황궁의 작은 폭군.

그런 녀석에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거 알아?”

예르넨이 다시 검을 들고는 피가 말라붙은 검신을 빛에 비춰 보았다.

이곳에 죽어 있는 시체들에게 한 것처럼 라일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으려는 걸까?

‘하라면 해 보라지.’

라일은 12년을 전장에서 구르면서 무위를 갈고 닦았다. 이 대륙에서 그보다 검술에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예르넨을 가르친 것도 그였다. 자질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르넨이 그를 뛰어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예르넨이 무작정 내리치는 목검을 모조리 맞아주기만 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는 예르넨에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뭘?”

라일은 나른한 어조로 되물었다. 제압하기 전에, 뭐라고 변명할지 정도는 들어 볼 생각이었다.

과연 사과할까, 아니면 얌전히 죽어 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다시 복종하라고 할까.

그러나 예르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보고 싶었어.”

“뭐?”

푹.

예르넨이 스스로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예르넨 헬리오!”

작은 신형이 쓰러지기 전, 라일은 달려나가 그를 받아 들었다. 지혈하려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피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갔다.

“젠장… 젠장…!”

새하얀 얼굴에서 금세 생명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고 싶어.”

“예르넨!”

쾅!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창백한 얼굴을 한 그의 부관이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헉! 예르넨 헬리오가 죽었어…!”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설, 설마 전하께서 저 폭군을 죽이신 겁니까?”

누군가가 열기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일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유리스 카멜리언. 북부, 카멜리언 자작가의 차녀였다.

그녀는 분명, 황제를 수호하는 신혈의 기사였다. 그럼에도 어딘가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폭군 예르넨 헬리오가 정의로운 북부의 지배자 라일 벨티모어의 손에 죽었다.

그 소식은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들불처럼 수도 전역으로 번져 갔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라일을 구원자라며 칭송했다.

유일하게 남은 황위 계승권자, 포트넘 공자의 약혼자인 벨티모어 대공이 폭군을 물리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를 것이다.

소문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었고, 발이 없는 말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갔다.

허나 불안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것이, 헬리오 제국은 스물아홉의 황제를 모시는 동안 단 한 번도 신의 피를 이은 헬리오 가의 사람이 아닌 자가 황제가 된 역사가 없는 나라인 것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영원히 빛날 제국.’

그것은 모든 제국민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는 말이었고 그 때문에 황가의 피를 잇지 않은 라일이 황위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민중은 도리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포트넘 공자의 약혼자의 자격으로 황위에 오른다니.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폭군 예르넨의 누이인 세실 포트넘 헬리오의 아들이자 폭군의 조카인 그 공자가 태어나서 첫울음을 터뜨리기는커녕, 눈을 뜨지도 못한 채 18살의 생일을 맞이한 건 제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제국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 라일 벨티모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라일 벨티모어의 즉위식 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던 포트넘 공자가 눈을 떴기 때문이다.

* * *

“예르넨!”

언젠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그 말은 맞았다.

예르넨은 죽었고, 그런 예르넨의 귀에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절규였다.

‘사랑하는 이의 절규라.’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인생에 걸맞은 최후가 아닌가.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험한 짓을 당했던 끔찍한 나날들이 지나고 난 후엔, 그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독하게 참아 내던 눈물이었다. 그런데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꾹 참아 왔던 것들을 이제는 털어 내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잠깐.’

그런데 죽었는데도 눈물을 흘릴 수가 있나?

예르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떠진다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아무리 깜빡여도 시야는 그저 흐리기만 했다.

“아아악!”

‘윽, 뭔 미친놈이야?’

옆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자 성격 더러운 예르넨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 도,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뭐?!”

골이 절로 울릴 정도로 짜증 나는 목소리들이었다.

예르넨은 그 짜증 나는 목소리들에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어 몸을 지탱했다.

풀썩.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예르넨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그러듯이 금방 침대 위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몸에 왜 이렇게 힘이 안 들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몸이 돌아갔고, 눈앞에 있는 거울을 살필 수 있었다.

“도, 도련님, 움직이시면 안 돼요!”

‘씹, 도련님이라는 녀석은 어딨는 거야? 저놈 입을 좀 막지 않고.’

예르넨은 날파리를 무시하듯이 어딘가에 있는 도련님을 부르는 정신 나간 하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잡았다.

한참을 바라본 끝에야 겨우 눈앞이 제대로 분간이 되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것은.

“어…?”

예르넨 헬리오. 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어딘가… 조금 작아 보였다. 그러니까 한… 열여섯 살쯤의 모습이었다.

‘과거로 회귀하기라도 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가 거울에 비치는 소년의 나이 즈음일 때, 그는 이런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낡은 오두막에서 감금당하고 있었다.

그럼 여긴 대체 어디지? 천국이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예르넨은 곧, 그가 어디 있는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예르넨!”

찢어지는 비명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그 익숙한 목소리는 누이, 세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호명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가 죽이지 않은 이 땅에 단둘뿐인 황족 중 하나이자 그의 하나뿐인 조카.

예르넨 포트넘 헬리오. 동명이인의 이름이었다.

‘이게 뭔 미친 짓거리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예르넨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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