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이상하게 이곳에 들어오니 그녀는 한결 여유를 찾은 듯했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 여름, 그녀는 이 안에서 난생처음 슬퍼서 울지 않았다.
“나가 있을까?”
“음, 아냐. 자, 그냥 네가 듣고 이야기해줘.”
마지막에 약해지나 싶어 수화기를 건네받자 재이는 부른 배가 불편한지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눈으로 그 모습을 좇으면서도 수험번호를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담될까 웬만하면 시험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그가 보기엔 아슬아슬한 점수라 더 애가 탔다.
- 제희야, 안녕? 나야. 재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한순간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부끄러운지 사르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유리창 너머의 그녀야말로 가장 그림 같다. 부른 배가 아니라면 수화기 속 목소리를 따라 잠깐 들른 환상같이 보였을 테다.
- 놀랐지? 그럴 거 같아. 나도 그때 정말 놀랐거든. 음……, 네가 너무 안 자는 통에 이거 하나 녹음하는 것도 어려웠어. 나는 요새 잠이 진짜 많이 오거든. 영미 청첩장 받고 속초 가기 전에 꼭 녹음해야지 했는데, 며칠 만에 겨우 성공이야. 거기다 휴대전화는 녹음도 이렇게 오래 할 수 있대. 난 운이 좋은가 봐. 음……, 시험은, 말했던 것처럼 돼도, 안 돼도 다 괜찮아. 비밀인데 난 재수생도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그냥 공부만 하면 되는 사람이라잖아……. 하하.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아는 것처럼 재이가 유리에 가까이 붙어 이마를 기대자 그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울컥한다.
- 난 우리 다시 만났던 여름에 네가 있던 자리에 있었어. 사실 난 네가 없는 시간 동안……, 너만큼 네 생각은 못 했어. 너무 힘들었거든.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사는데……, 왜 사는 건지는 몰랐어. 꾀를 부린 것도 아니고 정말 열심히 사는데도 그걸 모르겠더라. 제희 네가 있었음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그치? 아……,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널 다시 만나려고 힘들면서도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아니, 모르겠는 게 아니라 그럴 거야. 그거 말곤 이유가 없잖아.
그녀는 다시 걸어가 등대를 끼고 돌았다. 몇 번을 그렇게 빙그르르, 그 잠깐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그의 마음은 백 층 난간을 걷는다.
- 우리가 다시 만나고, 또 이렇게 결혼하고, 몇 년, 몇십 년 시간이 흐르면 그때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렇게 살려고 그 시간을 견뎠다고……. 그러니까 너도…… 이제는 그때의 너를 놓아줘. 10년이잖아. 대신 나는 너 20년, 30년, 그렇게 기다릴게. 매일 널 기다리면서 그렇게 너랑 살게. 그걸로 네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줘. 그럴 수 있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을 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면서도 눈물이 글썽거린다. 이젠 그녀를 찾아 달래줘야 할 때가 됐다. 더 이상은 그에게도 벅차다.
- 제희야, 그거 알아? 넌 늘, 볼 때마다 멋있어. 하하……. 사실 1년 전에 여기서 네 목소리 들으면서……, 네가 하는 말 하나하나 다 기억하려고 열 번도 넘게 들었어. 그런데 너는 그러지 마. 왜냐면 난 임신부고 잠이 오거나 추울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그만 들으라 표시를 할게. 음, 뭐냐면……, 그래, 좋은 생각이 났어. 네 옆에서 등대를 막 빙글빙글 돌면 그건 춥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그땐 날 데리러 와줘.
뭐야, 왜 이렇게 늦어, 그렇게 입술 뾰족해진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삐걱대는 문을 열어 그녀를 당긴 그가 바로 그 입술을 찾아들었다.
- 아! 그때 난 그 작은 곳에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졌는데, 너는 어떨지 모르겠다. 제희야, 어때? 넌 지금 행복하니?
- fin.
#외전. 그 이후, 나는
7개월이 된 지원이는 이제 제법 낯을 가렸다. 품 안에서 옹알거리며 놀다가도 낯선 이를 보면 순식간에 입술을 삐죽거려, 그 모습을 보는 어른들을 즐겁게 했다. 이 집안 식구들 중 누구도 지원이처럼 제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눈 한번 찌푸리기도 힘든 아이의 투명함은 탐내는 사람이 지극히 많았다.
“‘엄마, 다녀오세요.’ 해야지.”
아웅,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며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지원을 대신해 제희의 어머니가 고사리 같은 아이 손을 잡아 흔들었다. 문 앞에서 몇 번을 돌아보며 망설이던 재이가 못내 아쉬워 서성였다.
“우리 지원이, ‘엄마 학교 잘 다녀오세요.’ 하자. 저러다 너네 엄마 첫날부터 지각하겠다.”
“어머니, 엄마도 제대로 못 하는 애한테 뭘 그런 걸 시키세요?”
손을 내밀면 꼭 감아쥐는 하얗고 포동한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는 건 제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러다 재이가 정말 늦게 생겼다.
“아, 어머님. 저 이제 갈게요. 지원아, ‘엄마 안녕.’, ‘엄마 안녕.’ 해봐.”
방금 그의 말을 뭐로 들었는지, 재이 역시 돌도 안 된 아기를 두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거기다 정말 그 말을 할 것처럼 아이의 입을 바라보는 온 집안 식구들의 기다림도 제법 볼 만했다.
“백번 쳐다봐도 아직 못 해, 빨리 나가.”
“알았어, 알았다구.”
결국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서야 이산가족 상봉이 끝났다. 하지만 재이는 그의 옆자리에 타고도 영 집중을 못 한 채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까지 지원이가 매달리듯 꼭 잡고 있던 손가락이다.
“그렇게 해서 학교 다니겠어?”
“으음……. 아냐. 왜 그래?”
그래도 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그녀도 조금은 울적한 마음을 환기시켰다. 입학식을 고작 사흘 앞두고 출산을 한 그녀는 그해 약대 입학생들 중 처음으로 신입생이 되자마자 휴학을 신청했다.
대학생치고는 몹시 드문 이유로 휴학까지 하고 나니 2학기가 시작하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수의대 못 가서 어떡해?”
“아닌데? 난 좋은데?”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살짝 웃었다. 이제 아이 아빠가 되었으니 새신랑은 아니지만, 제희가 왜 지원이 못지않게 뾰로통한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연기는 잘 못해도 가진 관심을 모두 돌려 몇 번이나 매만지던 집게손가락을 그의 오른손 손가락에 엮었다. 당기듯 힘을 주자 바로 감겨드는 강한 힘이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난 지원이 엄마랑 결혼한 게 아니야.”
그는 착하고 예쁜, 그리고 윤제희의 여자인 이재이와 결혼했을 뿐이다.
“알아, 알아. 그만 좀.”
“하여튼.”
뭐가 하여튼이라는 건지, 어울리지 않는 여우짓도 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제희는 여전히 그녀가 이리 나오는 것이 떨렸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그 묘한 긴장감이 학교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맴돌다 문이 열리며 흩어졌다. 그의 아쉬움과 함께.
“잘하고 와.”
“응.”
“괜히 지원이 생각한다고 수업 허투루 듣지 말고.”
“응.”
“내 말도 좀 잘 듣고. 딴생각하지 마.”
“그럼 네 생각은? 그것도 하지 마?”
조그마한 그녀의 얼굴만큼 남은 틈으로 재이가 싱긋이 장난을 쳤다. 알아들었으니 이만 가라는 뜻인데 제희가 또 말을 아끼는 모양새를 보니 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네가 언제 내 말 들었어?”
“응?”
뜬금없는 타박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상황 봐서 하든가.”
그가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없는 상황도 만들라는 뜻이다.
◇ ◆ ◇
원래 급한 일은 없는 과였고 4년차에 국시가 가까워오자 관례상 잡다한 일에선 제외되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기에 나오긴 했지만 제희의 마음은 7개월 지원이의 그것만큼 싱숭생숭했다.
“……그러니까, 이거 너네가 마저 정리하고. 꼼수 쓰다 걸리면 죽는다? 알겠냐?”
이제는 의국장이 된 영우가 1년차들을 불러놓고 제법 감투 쓴 흉내를 냈다. 잔뜩 졸아 있는 새내기의 모습에 괜히 의기양양해서는 한껏 어깨를 펴고 뿌듯함을 드러냈다.
그의 지시에 따라 1년차들이 후다닥 사라지자 영우가 평소보다 배로 심각해 있던 제희를 툭툭 건드렸다.
“야, 나 제법 그럴듯하지 않냐?”
“……뭘?”
“애들이 나한테 확 쫄잖아. 아, 이게 권력의 맛이라는 거지.”
싱거운 놈, 한마디 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제희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영우를 향해 눈을 가늘였다. 못마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친 눈빛에 영우가 괜히 주춤거렸다.
“야, 뭐? 또 왜 그래?”
“……1년차 애들 대강 좀 잡아.”
“뭐라는 거야? 갑자기 웬 착한 척?”
뭐라는 건지는 알 바 아니고 착한 척도 아니다. 다만 잔뜩 몸을 움츠리며 선배의 눈치를 보는 1년차들에게서 재이를 떠올렸다.
물론 이곳처럼 군기가 센 과도 아니었고 그녀는 나이가 있으니 대놓고 뭐라고 하지도 않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만약 재이가 방금 전 영우 같은 선배에게 걸려 한소리 듣는다면 마음 같아선 벌써 방망이를 들고 나섰다.
“아, 뭐 어쨌든. 우리도 이 생활 얼마 안 남았고 말이지. 나는 또 우리 장금이 누님 보러 간다는 거지, 흐흐.”
1, 2년차 시절에도 사방에서 눈치 줘도 꿋꿋이 TV를 틀던 영우였으니 이제 누구 하나 뭐랄 것 없는 상황에서는 대놓고 시청자 패널로 나섰다. 그 여름 겨울연가에 허우적대던 영우는 이제 장금이의 손맛에 빠져 있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다.
“야 그런데 말야. 제수씨도 약간 장금이 과지 않냐?”
“뭐라고?”
“생긴 건 다른데 얼굴도 하얗고 눈도 크고 그렇잖아. 거기다 동안이구, 솔직히 누가 제수씨 보고 애 엄만 줄 알겠냐? 이제 신입생 됐을 테니 남자들이 가만히 안 놔둘 텐데. 아우, 뭘 또 째려보고 난리야? 아니 뭐, 그렇다구. 흐흐.”
영우가 의미 없이 흘리는 말에 제희의 촉수가 물 먹은 듯 돋아났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그런 촉수가.
“……내가 왜.”
“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재이처럼 예쁘고 또 예쁜 애가 구박당할 걱정을 왜 했을까. 정작 걱정해야 하는 건 늑대들의 음흉하고 빤한 시선인 것을.
“하여튼 신입생이라고 술도 엄청 먹이고 그럴 텐데. 우리 때도 그랬잖아. 약대도 만만찮을걸? 흐흐, 너 걱정돼서 어쩌냐?”
“일이나 해. 안테나 뽑아버리기 전에.”
“아이고, 또 눈에 불을 켠다! 농담이야, 농담! 어디 제수씨가 그럴 사람이냐? 집에서 지원이 데리고 너 오기만 눈 빠지게 기다리겠지.”
영우는 뒤늦게 눈치를 살피며 그의 기분을 맞춰보았다. 그러면서도 정말 안테나가 뽑힐까 제희의 시야로부터 TV를 슬그머니 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빠르기도 했지만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바보도 아니다.
「야! 저거 올인에 송혜교 좀 봐봐! 여자랑 남자랑 헤어지는데 기다리는 게 말이 되냐? 으유, 말도 안 돼. 요새 누가 미련스럽게 기다려? 소설을 써라, 써!」
그 말 했다가 작년에 뽑힌 안테나에 감긴 하얀 테이프엔 아직 끈적함이 마르지도 않았다.
◇ ◆ ◇
기대는 잠시였고, 지원이와 함께 그가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려야 할 새색시 이재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떠날 때처럼 여전히 할머니에 품에 안긴 지원이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재이 안 왔어요?”
“응? 전화 안 왔어? 나한테 전화했길래 좀 놀다 오라 그랬는데.”
“놀다 온다구요?”
“어. 걔한테는 첫날이잖아. 친구도 사귀고 해야지. 과에서 사람들 모여서 술 한잔씩 한다길래 그러라고 했어. 어머, 제희야. 지원이가 그래도 아빠라고 너 아나 보다. 얼른 안아줘.”
내가 이렇게 손을 내미는데 아빠는 왜 모르는 체해!
그게 화가 나는지 지원이가 바로 입술을 삐죽하며 그의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꼭 제 엄마가 토라질 때처럼 통통해진 입술에 웃음이 나 얼른 한 팔로 받아들었다.
“아, 나도 이제 좀 살겠네. 손이 타서 하루 종일 안고 있었더니, 네 아버지 오기 전에 장도 좀 봐야 하는데.”
“……힘드셨죠, 어머니?”
“어어…… 뭘. 우리 지원이 보는 건데. 제희 너도 참.”
생전 입을 딱 붙이고 살던 아들이 결혼하곤 조금이나마 변했지만 아직도 이런 말에는 쑥스러워 손사래를 치게 된다. 육체적인 피로가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하나뿐인 손자를 안는 즐거움은 그런 피로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다 생각만 하고 입 밖에 안 낼 말이지만 손자 지원이는 아들인 제희나 제하보다 훨씬 더 예뻤다. 얼마나 예쁘냐면, 고민 하나 없이 그저 예쁘고 또 예뻤다. 내리사랑에 막중한 책임감을 덜어낸 핏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모양이다.
“나 앞에 마트 좀 다녀올게. 할머니 갔다 올게, 지원이 안녕. ‘할머니 다녀오세요.’ 해야지.”
“……못 할걸요?”
“하, 제희 너도 참. 네가 이렇게 고지식하게 구니까 재이가 들어오고 싶겠어?”
어머니다 보니 영우한테처럼 화는 못 내겠다. 그렇지만 그가 싫어 안 들어오겠다고 하는 재이를 떠올려보니 저절로 팔에 힘이 들어가버렸다.
“아.”
이가 올라온 지원이 제법 아프게 어깨를 깨물고서야 그는 정신이 들어 아들을 고쳐 안았다. 애가 무슨 잘못이라고, 이게 다 뭔가 싶다.
“……윤지원. 엄마가 아빠 때문에 안 들어오는 거 같아?”
식구들에게 핀잔을 날리던 것과 별개로 이 답답한 마음을 어디 물어볼 데가 없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인 7개월 지원이를 찾았다. 멀뚱히 깜빡거리는 초롱초롱한 눈을 보다가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참.
“……아웅, 아이, 아이야.”
“뭐라고? 아니라고? 아빠 때문이 아니라고?”
사람이 간절하면 저 좋을 대로 듣게 된다. 깜짝 놀란 제희가 옹알이하는 지원이를 높이 들어올리자 자그마한 입이 한계치만큼 벌어지더니 지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엄마는 아빠 때문에 안 들어오는 게 아니란 거야? 우리 지원이가 이렇게 똑똑했어?”
“……못 봐주겠네 진짜.”
신발 벗자마자 조카를 찾아 들어오던 제하가 멀리서 제희를 보고는 혀를 찼다. 제희는 아이에게 괜한 대답을 바라는 가족들을 팔불출이라 단정 지었지만 정작 고슴도치는 따로 있었다. 그래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다정한 부자라 제하는 따로 흠을 잡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