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첫 수능이 있었던 1993년을 제외하고는 다시 수능은 연 1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나는 수능 두 번 쳤다.’ 이야기를 하면 ‘말도 안 돼!’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같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은 그 동질감에 더욱 끈끈해졌다.
“이리 와봐. 감기 들라.”
부부 사이라면 더욱 그랬다.
“아, 전처럼 8월에 보면 좋은데 너무 춥다. 그치?”
“응.”
2003년 11월 5일, 그녀가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고 겁을 내던 수능을 보기 위해 교문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그가 목도리를 잡아맸지만 수능한파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다. 콜록, 작게 하는 기침 소리 하나에도 그는 미간을 모았다.
“나 들어갈게.”
“재이야, 아가! 여기!”
왜 안 오나 했는데 역시나 왔다. 일찌감치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식구들이 재이를 보자마자 에워싸고 선물을 건넸다.
“어머님, 아버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날도 추운데.”
“당연히 와봐야지. 제희 저게 끝까지 안 가르쳐줘서 겨우 알았어.”
한숨을 쉬면서도 이곳에 모인 수험생 중에서 가장 열렬히 응원받는 사람이 재이라는 것에 그의 불만이 스르르 녹아들었다. 아마 재이는 남은 평생, 다음 생애까지도 이렇게 살게 될 것이다.
“형수! 내가 생각해봤는데 형수는 국문학과 같은 데 가면 잘 어울릴 거 같아요.”
“넌 무슨 소리야? 얘 수의대 간다고 공부한 거 잊었어? 한국대 수의대 갈 거야, 우리 재이는.”
“교차지원 하면 법대도 괜찮지. 안 그러냐, 재이야?”
저 누나 공부 엄청 잘하나 봐. 이리저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그녀가 목도리 속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제 군에서 재우가 보낸 사탕을 받을 때도 그렇게 푹 파묻고 울더니 지금은 부끄러워 그러는 모양이다.
“자, 얼른 들어가. 늦겠다. 난로 넉넉히 넣었으니까 시간마다 바꿔. 그리고 허리 너무 구부려 앉지 마. 배 땅기니까. 과일도 안에 있는데…….”
“엄마, 형수 이러다 못 들어가겠어요.”
“그래. 참, 제희 너도 한마디 해줘야지!”
급한 마음에 너무 수선을 피웠다 싶은지 제일 뒤에 있던 큰아들을 뒤늦게 앞세웠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아직도 고개를 푹 파묻고 커다란 눈만 내놓은 재이에게 제희가 웃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이재이. 고개 들고.”
“어.”
무슨 말을 하려 그리 무게를 잡았나, 어디를 보내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말할 때마다 찡그렸나, 남은 가족들이 더 애태우며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재수해도 돼.”
“…….”
“장학금 받지 않아도 돼. 알지?”
“……으응.”
시험 보러 들어가는 사람에게 어쩌면 저런 소릴 하는지 혀를 찼지만, 그래도 듣는 며느리는 훌쩍거리며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겨우 저런 말이나 하는 남편이 더 좋겠거니, 당연한 사실에 제희의 부모님이 서운한 웃음을 지었다.
“그만 가자.”
“네, 먼저 들어가세요. 차 있으니 천천히 갈게요.”
재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어머니가 이만 돌아가자 아무리 끌어대도 그는 그 긴 수능한파를 온몸으로 버텨냈다. 그녀가 다시 나올 때까지, 거기 그 자리에서.
그것 역시 오직 남편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 열 번째 메시지입니다.
재이야, 오랜만이지? 더 빨리 남기고 싶었는데 아껴두느라 못 했어. 여기 저장할 수 있는 메시지가 딱 열 개거든. 지우려 해도 뭐 하나 지울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아끼고 아끼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오늘은 너한테 정말 해야 할 말이 있어. 내가 널 기다린 건 올해가 겨우 8년인데, 밀레니엄이라고 연도가 바뀌니 꼭 천년을 넘어 기다린 기분이야. 내가 인내심이 없는 걸까?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너 그만 기다리고 싶어. 원망이라도 해주면 좋은데 넌 아직도 답이 없겠지? 하아……, 정말 힘들다, 재이야.
나도 살고 싶어서 그만 기다리려 하는데 그 생각만 해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10년까지는 놔둬보려고. 그때도 못 찾으면 그때 정말 지울 거야. 하지만, 정말 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아,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이야.
2000년 5월 28일에 저장되었습니다.
#세 번째 에필로그. Winter Sonata
2004년 1월, 다시 찾은 겨울 바다는 그 색이 더 짙어졌다. 여름처럼 들어와보라 손짓하는 맑은 초록은 아니었지만 앉아서 차분히 감상을 하기엔 이편이 더 좋았다. 짙고 푸른 바닷물에 하얀 눈이 녹아들자 어디 밤하늘을 뚝 떼어내 펼쳐놓은 기분이다.
“추운데 바로 서울로 가지, 왜 여기까지 와선.”
“그냥, 좋잖아. 너랑 꼭 같이 오고 싶었어.”
제희가 깔아준 자리 위에 접고 있던 다리를 펴자 절로 손이 허리 뒤를 짚었다. 배가 부를 만큼 불러 이렇게 앉는 것도 쉽지가 않다.
“괜찮겠어?”
“뭘. 그래도 오늘은 겨울치고는 따듯하다, 그치?”
보는 것도 불안해 그 어깨를 감싸며 찌푸리는 제희와 달리 그녀는 몹시 밝았다. 1년 반 만에 다시 찾은 속초는 바다 색 말고는 변한 것이 없다. 세상을 다 내려놓을 듯 힘겹게 걸음 했던 그때는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 알았을까.
“영미 오늘 예뻤지?”
그랬었나, 그가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이제 여자라면 이름과 얼굴을 짝짓는, 딱 그 정도 인지력이 다였다. 이재이가 옆에 있는데 다른 여자 꾸민 모습이 눈에 들어올 리 없으니까.
설령 미끈한 여자가 벌거벗고 다닌다 해도 ‘춥겠네.’ 이 말 말고는 해줄 것이 없다. 원래 그리 무심했고, 그에게 예외는 한 사람으로 족했다.
“응. 예쁘더라.”
“맞아, 예뻤어. 하하.”
그래도 영미는 그녀의 친한 친구였고, 오늘 갓 결혼한 신부에게 빈말 해줄 정도의 공감능력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듣자마자 싱긋 웃는 그녀가 너무 해맑아 거기에 또 빠져버렸다. 이런 때 질투라도 한번 해주면 좋은데 이재이는 그럴 여자가 아니다.
“저기 있잖아, 제희야.”
“응.”
“그럼 나 드레스 입었을 때, 그때는 무슨 생각 했어?”
질투는 아니라도 이렇게 예쁘다 소리는 듣고 싶어 했다. 그가 뭐라고 할지 기다리는 짧은 순간 두근두근 박동을 높였다.
“그냥.”
“그게 뭐야……. 하긴 너한테 뭘 기대해.”
실망한 듯 입이 삐죽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졸라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삐죽대는 입 끝에 웃음이 걸렸다.
달리 무슨 말을 해줄까.
그들은 그날 처음부터 함께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혼자 들어올 그녀를 두고 볼 수 없어 시작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느라 보이는 거라곤 오직 그 얼굴뿐.
인사를 할 때마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부터 발그레한 뺨과 한 번씩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까지, 그 기분을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 이상한 일이다.
오래 두고 보아온 사람도 아니었고 때로는 환상 속에 존재하지는 않을까, 취해 있을 때 살짝 다녀가는 그림자가 아닐까 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실제로 존재해 고운 손 내밀어 그를 불안의 늪에서 건졌다는 것이 이미 그에게는 기적이었다. 옷이나 머리, 또는 화장이 달라졌다 해서 그 벅찬 마음이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는 않는다.
「야, 윤제희! 이 자식 말하는 거 보게? 으아아아, 소름 돋아. 들었죠, 다들?」
다만 나중에 그날의 사진을 보고서야 ‘이재이가 확실히 예쁘긴 예쁘구나.’ 그렇게 누구나 들을 만한 혼잣말을 한 적은 있다. 사람이 많은 스테이션이었고 신부 사진을 구경하고자 더 많은 이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나마 그 말을 한 사람이 윤제희라 다행이지, 만약 영우가 그랬다면 가루가 될 때까지 두고두고 야유를 당했을 것이다.
“에이, 난 그날 너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흐음, 그래?”
“어. 그런데 나도 취소하려고.”
새침한 척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도 입은 벌써 웃고 있다. 연기 참 못 한다.
“말 바꾸지 마.”
어디까지나 자신은 자신이고, 그럼에도 재이에게 멋진 남자가 되고픈 마음은 같다. 오늘 아침에도 거울을 보았을 때 앞머리가 제법 길어져 막 눈을 뜬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낮췄다.
「이 정도면 돼?」
「으음……, 뭐야, 그게. 나 잘래.」
무슨 말이냐 밀어내고 다시 잠드는 그녀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거치적거리는 게 딱 싫은 그가 왜 평균보다 조금 긴 머리를 고수하는지, 재이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전화 속 자신의 말 한마디에 의지해 지금까지 다른 모양은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을 언제쯤 알까.
지금 와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온 말을 취소해서는 안 된다, 이재이는.
“아야.”
“왜?”
허리를 짚던 그녀가 답지 않게 콧등을 살짝 찌푸렸다. 배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로 보아선 배가 땅기는 듯했다. 아직 산달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누가 보아도 만삭의 임부라 그의 눈썹에도 같이 힘이 들어갔다.
“아니……, 갑자기 조금 아파서.”
“빨리 들어가자니까 왜 고집을!”
기어이 큰소리가 나왔다. 배가 나올수록 얼굴이나 팔목께는 더 가늘어 보여 한 번씩은 보기조차 위태롭다.
친구의 결혼식이니 꼭 와보겠다 고집을 부리더니 거기까지만 들어줄걸, 한 시간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겠다는 것은 말렸어야 했다. 아무리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심란해하더라도 그랬어야 했다.
“화내지 마. 응?”
“…….”
“그냥 좀 세게 차서 그래.”
“아까는 아프다며.”
“구분을 못 한 거야.”
왜냐면 첫아기잖아. 저것도 변명이라고 입 모양이 벙긋거린다. 그래도 첫아이라는 말의 어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뭐든 처음이 있어야 둘도, 셋도 있으니까.
뒤에서 허리를 감아 조심스레 일으키는데 축 내린 손이 그녀의 배에 닿았다. 어제 만져볼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루가 다른 모습에 뭔가 코가 찡하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겨울치곤 푸근해 결코 그럴 만한 날씨도 아니었는데.
“아!”
이번에는 제희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그녀의 배가 나오는 만큼 아이도 자라고, 놀랄 일도 많아졌다. 과연 이 정도 세기라면 헷갈릴 만도 하다 싶어 두 손을 들었다.
“좋아, 인정할게.”
“……뭘?”
“나도 첫아기니까.”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뒤로 돌아 눈을 빛냈다. 그거 보라는, 너도 모르지 않느냐는, 아주 의기양양한 턱이 얄밉지 않게 들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 턱 끝이 그의 입술에 살짝 닿자 저 파도만큼이나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우아, 꼭 붓으로 그린 거 같다. 그치?”
“응.”
손을 꼭 잡고 눈 오는 해변을 걸었다. 모래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한결 더 부드럽게 밟힌다. 하늘, 바다, 그리고 그들이 발을 내린 설원까지, 각자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그 색감도 병사탕 못지않다. 잡으면 잡힐 듯, 그런 행복이다.
“이재이, 자신 있나 보네? 긴장도 안 하는 거 같은데?”
“내 남편이 그랬거든. 재수해도 된다고.”
“아, 부반장, 너 결혼 잘했구나?”
드문 농담이 오가자 마냥 웃던 그녀도 날이 저물어가며 조금은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지금쯤이면 합격자 발표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말로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꼭 하나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대학생’이 되고 싶던 사람이었으니.
“5시야.”
“……어.”
겨울의 5시는 여름의 그것과는 달랐다. 벌써 붉은색 노을이 져 조금 전 그 예쁜 색감에서 살짝 부족하다 싶었던 화사함까지 더해졌다. 그 아래 그녀의 뺨이 같이 물든다.
“음……, 떨어졌음 어쩌지?”
“괜찮아, 재이야. 다 괜찮아.”
응, 그녀가 밝게 웃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곳이니 미리 적어뒀던 번호를 꺼내자 그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수험번호가 있다는 것이 꿈 같기만 하더니, 이제는 합격자 명단에도 들어 있기를 바라본다.
“아, 저기, 잠깐만.”
“응?”
“우리 저걸로 하자. 저걸로 듣고 싶어.”
해변 끝의 등대를 향해 두 손으로 그를 끌었다.
하얀 등대 아래 공중전화를 보고서 여자는 여자구나, 설핏 웃음이 났다. 여름과 달리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나란한 발자국을 찍어가며 전화기 앞에 섰다.
“내가 할까?”
“아니,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