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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나는-44화 (44/48)

# 44화.

벌써 흰머리가 제법 눈에 띄었다. 장난 좋아하시고 웃음도 많으시던 입가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고 힘주면 무섭던 눈도 둥글어졌다.

“가만있자, 너희 결혼하는 거지? 맞지?”

결혼 적령기의 두 남녀가 함께 있어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같이 서 있는 걸 보자마자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웃음이 났다.

“말 안 하면 모를까 봐? 이래 봬도 여기서 내 별명이 천리안이야. 하하하.”

“……선생님.”

“잘됐다, 정말 잘됐어, 우리 예쁜 부반장.”

“……흐윽.”

“그리고 우리 멋진 반장도.”

◇ ◆ ◇

- 여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학교에 다녀왔어. 선생님이 이제 멀리 가신대. 그럼 나는 이제 어디서 너를 기억하지? 선생님은 널 착하고 예쁜 이재이라 하셨는데 누가 널 그렇게 말해줄까. 너무 쓸쓸하다, 재이야. 지금 술을 좀 마셔서 더 그런가 봐.

아직 나타날 마음이 없다면……, 대신에 선생님 말고도 네가 착하고 예뻤던, 그런 사람이라도 좀 알려줘. 그럼 나는 거기 가서 또 물어볼게. 이재이 기억하냐고, 너 어땠냐고. 그렇게라도 버텨볼게.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하면……, 넌 정말 착한 애가 아냐. 그런데 네가 착하지 않다는 건 나만 알아서……, 그것도 쓸쓸하긴 매한가지네.

1997년 4월 1일에 저장되었습니다.

◇ ◆ ◇

[어느 주례사]

자, 오늘 여기 93년 중앙고등학교 3학년 3반 친구들이 제법 많이 모였네요. 누가 보면 결혼식이 아니라 동창회 하는 줄 알겠어요.

그래서 저도 마음 편하게 여기를 교탁이라 생각하고 짧고 간결하게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요새는 이런 것도 짧게 해야 센스 있다고 하네요. 너네도 짧게 하는 게 좋지? 으흠.

일단 우리 반장, 윤제희. 제희는 학교 다닐 때 웃는 걸 통 못 봤어. 다른 흠이 없으니 그거 하나 참 안타깝다 했었는데, 남들 다 울상 짓는 고3 되니 웃더라구. 그래서 임자는 다 따로 있구나 했었지, 허허.

나는 네가 한 가정을 이루어도 그때처럼 늘 깊고 진지한 마음으로 가족을 보살필 거라 믿어. 어른이 되었다는 것과 가장이 되는 것은 그 책임의 무게가 다르니까. 그래도 네가 보여준 그 인내와 사랑으로, 네 가정도 그렇게 잘 이끌어나가길 바란다.

다음 우리 재이, 예쁜 부반장. 내가 교사생활 하면서 맡은 제자가 좀 더 있으면 얼추 천 명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거 하다 보면 유독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더니, 나한테는 그 사람이 너야. 착하고 잘 웃고, 또 싫은 소리도 못 하던 우리 재이. 그러면서도 늘 솔선수범하고 꾀 한번 부리는 걸 못 봤지.

1학년 때나 3학년 때나 한결같이 성실해서 난 재이 네가 조금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 끝은 누구보다 좋을 거라 생각했어. 지금 보니 역시 내가 맞네. 그렇지 않니?

그리고 뭐든 늦은 게 없다는 말, 지금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하하.

둘 다 참 조용해서 어떻게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하기야 이중에 그거 아는 사람 별로 없겠지? 안준우, 넌 인마. 어째 남의 결혼식에서도 떠들고 있냐. 아이구.

하여튼 그때 우리 반이 중앙고에서 제일 모범적이고 잘나가던 거 다들 인정할 거야. 그렇지? 거기 이경욱, 너는 대답할 자격도 없다, 이놈아.

아, 마지막으로, 아, 정말 마지막이야. 뭘 소리를 질러, 이놈들!

제희야. 재이야. 너희가 9년 전에 그 교실에서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고, 또 다른 애들의 본이 되었던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하는 날들도 그러기를 바라.

생각해보면 교실이나 가정이나 별로 다른 게 없더라. 뭐든 지금처럼이 어려운 말이라는데 이상하게 너희는 늘 그럴 거 같아 불안하지도 않네. 그 긴 시간 동안 증명이 된 거겠지. 둘 다, 이렇게 착하고 훌륭하게 자라 가정을 꾸린다니 나한텐 그저 고맙고 기쁜 일이야.

잘 살거라, 우리 반장, 부반장.

얘들아, 이만하면 진짜 짧게 한 거 맞지?

#두 번째 에필로그. 그녀의 남편 제희, 그의 후배 재이

제희가 살던 아파트가 신혼집이 되며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사실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신축 건물에 리모델링 자체가 낭비였지만 그 이면에는 뒤늦게 극성 엄마가 된 어머니가 있었다.

거기다 공직에 있는 몸이라 옷 한 벌도 마음대로 사지 않는 그의 아버지도 이번 일은 적극 방관했다. 불편한 거 없이 새집처럼 고치라며 공사 현장까지 오셔서 훈수를 두셨으니까.

사실 어머니나 아버지나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엄마! 아버지 전화 오셨는데 선반 위에 서류봉투 좀 가져다 달라시는데요?”

“뭐? 이 양반은 혼자 다 알아서 한다더니. 알았어, 금방 간다고 해.”

“어……, 아뇨. 엄마 말고……, 형수더러 오라시는데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던 어머니가 2층에서 내려오던 재이를 불렀다. 여자들끼리 나가서 쇼핑 좀 하고 오려 계획을 잡았더니 이런 식으로 망가트려놓았다.

“재이 네가 가야겠다. 아버지가 나는 싫다시네.”

“네에? 아니에요. 설마요.”

“됐어, 얘. 나도 미련 없다.”

그러면서도 미련 가득한 얼굴로 재이를 보고 있었다. 이렇듯, 그녀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단 하루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하루는 아버지가, 저녁이 되면 제하까지 가세해 재이와 있고 싶어 했다.

새 식구가 든다는 건 이런 거라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님.’, ‘아버님, 오늘 멋지세요.’ 같은 곱상한 인사를 받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 이건 들어봐야만 그 기분을 안다.

두 아들 중 제희는 입을 여는 게 드물었고 제하는 집에 붙어 있는 게 드물었으니 노년의 부부가 더욱더 딸 키우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서류, 여기. 어딘지 알지? 제하 네가 나가면서 형수 태워줘.”

길 모르는 어린애도 아니고 도련님 차 얻어 타고 편히 가는 길인데도 어머님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셨다.

“어머님, 들어가세요. 어머님 옷도 제대로 안 입으시고 감기 드시면 어떡해요.”

“응, 됐어. 이 날씨에 뭐.”

“그래도 들어가시는 거 보고 출발할래요.”

이런 예쁜 말만 하는데 더 보내는 게 아쉬워 발을 굴렀다. 제희 같았으면 뒤를 안 돌아보니 제 엄마가 서 있는지도 몰랐을 거고, 제하는 안 봐도 벌써 운전석에서 키득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 커다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문득 공사 다 되고 나가면 어쩌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하나하나 더 꼼꼼하게 해달라 들러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 ◆ ◇

죄를 지은 것도 없지만 경찰서나 법원은 발을 들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신경이 쓰이고 큰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몇 번 와본 곳이라 두리번대지 않고 바로 사무실로 찾아갔다.

“어머, 며느님 오셨네. 판사님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 금방 오실 거예요. 안에 들어가 계세요.”

한문 가득한 법전이 한 면을 채우는 개인 사무실에서 혹여 제가 알 만한 것은 없나 살펴보았다. 책상에 몇 개씩 놓인 액자는 그녀도 처음 보는 거라 제일 먼저 눈이 갔다.

결혼식 사진부터 신혼여행 때 보내드린 사진, 그리고 생신을 맞아 함께 외식했던 사진까지 모두 최근에 찍은 것들이다.

그런데.

“어.”

모두 교묘하게 사진의 초점이 모두 재이 자신에게 맞춰져 있었다. 결혼식 사진은 그녀가 중간에 서 있으니 옆에 사람들이 잘려나가도 어쩔 수 없겠지만 다음 사진부터가 문제였다. 일단 신혼여행 사진에선 그녀가 웃으며 하트를 그리는 모습이 하트 모양 액자에 담겨 있었다.

언뜻 봐서야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원래 이 사진은 제희와 같이 찍어 그녀가 그린 반쪽 하트 너머로는 제희가 있어야 했는데, 액자 속에는 처음부터 독사진인 것처럼 제희는 온데간데없었다. 거기다 별 모양에 담긴 외식 사진은 그녀가 중간에 있고 제하가 별 귀퉁이에 팔만, 제희가 또 다른 귀퉁이에 어깨만 출연했다.

“재이 왔니?”

“아버님!”

어머니 말씀처럼 아버님은 제희와 많이 닮았다. 말수도 별로 없는 데다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는 누구보다 깊었다.

“힘드시죠?”

“아니다.”

“이거 가져왔어요.”

집에서부터 가져오라는 서류니 중요한 거겠거니 했는데 뜯어보지도 않으시고 다시 그녀에게 내미셨다. 열어보라는 뜻 같아 조심히 서류를 꺼내다 어쩔 줄을 몰라 올려다보았다.

“우리 재이도 학교 가야지.”

“……아버님.”

“사람이 꼭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건 아냐. 안 그래도 선하게 살고 성공한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넌 아직 젊잖니. 이것저것 해보기에는 뭐라도 배워놓는 게 나쁘지 않아.”

텅 빈 수능원서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떨군 그녀에게 아버님이 직접 펜을 건네주셨다. 이 서류를 직접 작성할 거라 상상도 못 하고 나왔다가 펜 대신에 눈물 한 방울이 먼저 종이에 뚝 떨어졌다.

“이걸 어쩌나.”

결혼식 때도 그랬지만 며느리가 울자 그보다 당황한 일이 없어 얼른 손수건부터 건넸다.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닌데, 일전에 제희한테 듣자하니 하고 싶었던 게 있다길래.”

“……네.”

“늦게 해도 유일하게 용서되는 게 공부라더구나.”

아버님이 지켜보는 와중에 펜을 잡은 손에 힘을 꾹 눌러 한 자 한 자 제 이름을 적었다. 이른 나이에 사회에 나오고 나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름을 적을 만한 일이 없었다.

인사를 건네거나 명함을 주는 것으로 제 이름은 잊힌다 생각했는데 하얀 서류에 이름을 써 넣으니 그 자체로 벅차올랐다.

“아버님,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다.”

“저 진짜…… 잘해볼게요. 지금 시작하면 좋은 대학은 못 갈 수도 있겠지만 허락만 해주시면 내년까지는 준비해보고 싶어요.”

“내 허락이 왜 필요해, 네 스스로 허락을 해야지.”

벅찬 숨이 완전히 가라앉자 벌써부터 머릿속이 빙글거렸다. 어느 과를 가야 할지, 어느 학교가 좋을지, 이걸 누구에게 먼저 말하면 좋을지.

“제희 생각하니?”

“아? 네. 아버님 진짜 대단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재이가 통찰력이 대단하다 추어올렸지만 그거야 새색시 발그레한 표정만 보면 누구나 알 만한 것이라 속으로 웃었다. 사실 이렇게 다 커서 생긴 딸이 박수를 치며 감탄하자 그 기분도 말로는 다 못 했다.

“나가보자. 집에서 기다릴 텐데. 재이 넌 병원 갔다가 제희랑 같이 오너라.”

“아니에요. 같이 들어갈래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가뜩이나 제 아들이 빨리 분가 못 해 심술이 가득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다 수틀리면 월세방이라도 찾아 나서겠다 할 테니 그 전에 적당히 풀어주는 것도 수였다.

“이쪽으로 가자꾸나.”

그대로 나가면 뻥 뚫린 입구로 편히 나갈 텐데 아버님은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을 가리키셨다. 반박할 마음도 없었지만 품에 안은 서류를 놓칠까 꼭 끌어안고 뒤를 따랐다.

“안녕하십니까, 윤 판사님.”

“……지금 올라가나?”

“아, 네.”

“……그래.”

“아……, 하하. 그런데 같이 계시는 분은?”

“우리 며느리. 재이야, 이리 와 인사드려라.”

분명 친한 사이도 아닌 듯했고 어려운 상사 만나 민망해하는데도 아버님은 자리를 뜨지 않고 뒷짐을 지셨다.

“며느님이셨구나. 어쩐지. 결혼식 때도 뵀지만 정말 미인이시네요.”

“요리도 잘해.”

“네?”

“그뿐인가. 차분하니 손도 야무지고. 목소리가 고와서 그런지 노래도 잘해. 거기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일찌감치 대리 달고 인정도 받고…….”

끝도 없는 자랑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마 앞을 못 봤다. 단순한 칭찬도 아닌 제 자랑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은 것은 처음이라 불타는 얼굴에 손부채를 흔들었다.

“그럼 바빠서 이만. 재이야, 우리는 저쪽으로 내려가자.”

다시 한 무더기 사람들이 모인 곳을 가리키고는 먼저 방향을 트신다. 얼굴을 가릴 원서가 제법 커 다행이다 하면서도 눈물이 핑글거렸다.

만약 아빠가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좋아하고 감사할 것인가. 재력이나 직업, 위치는 다르다 하겠지만 어린 시절 동네에서 그녀를 목말 태워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예쁘다 소리 듣게 하던 아빠의 그 마음은 그대로였다.

“아버님.”

무슨 용기가 났을까.

잰걸음으로 그 옆에서 살짝 팔짱을 끼자 생전 놀랄 게 없어 보이던 분의 목이 크게 울렸다.

“흐흠.”

“저는 그냥, 음, 죄송해요.”

“아니다. 우리 그냥 저쪽으로 내려가자꾸나.”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단체버스에서 내려 올라오던 커다란 무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을 향해 손을 드셨다. 멀리서도 주춤대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아버님은 팔짱을 낀 손이 풀릴까 남은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작게 두드리셨다.

“우리 재이, 이제 보니 손도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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