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43화 (43/48)

# 43화.

#첫 번째 에필로그. 선생님

언뜻 보면 재이는 무척 차분해 보였다. 지난여름 대전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도시락이니 뭐니 준비도 철저했고 지금도 옆에 앉아 지도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러도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거나 지도가 쓸데없이 함경북도에 머물러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재이야, 떨려?”

“어? 아……, 조금.”

한 손을 내밀어 그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 손마저 어머니의 손길이 거쳐가 그새 부들부들해진지라 한참을 더 쓸어보았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왜 이제야 찾았을까. 남은 한 손은 핸들을 잡느라 어찌하지 못하자 조금 멀어도 버스를 탈 걸 싶었다.

“제희 너 운전하느라 피곤하겠다.”

“뭘.”

정확히는 운전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 그녀가 입고 있던 레이스 속옷 덕에 피곤했다. 재이는 방전되어 곯아떨어지기라도 했지만, 그는 그런 그녀가 깨지 않게 또 조심조심 다리를 들어올리느라 동이 트고야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전과는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 본능적인 수면욕만 남았던 이전의 잠보다 그 반도 안 되는 지금이 더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런 그녀가 있다 없는 대부분의 날은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이제 곧 끝나겠지만.

“아 참, 이거 네가 보기엔 어때?”

똑딱거리는 가방 소리와 함께 지도 위로 네모반듯한 카드가 놓였다. 새하얀 공단 리본은 아무리 봐도 어머니의 취향이었지만 재이는 그게 예쁘다며 하루에 백번은 더 들여다보았다.

“예뻐.”

“넌 왜 매번 반응이 똑같아. 어휴, 물어보는 사람 기운 빠지게.”

백번을 물어도 백번 다 예쁘니 그대로 대답을 한 것뿐인데 그녀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내렸다. 그녀와 자신의 청첩장이니 종이 한 장 찢어 날짜만 적었더라도 그에게는 의미가 충분했다.

거기에 그녀가 좋아하는 리본도 달려 있고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담겨 있으니 예쁘다 말고는 무엇으로 표현을 더 해야 할까. 이건 자신의 표현 부족과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 억울할 뿐이다.

“선생님이 보고 웃으실 거 같아.”

“설마.”

“아냐, 선생님 애들 잘 놀리셨잖아.”

“네가 애야?”

“야아. 하긴 넌 몰라. 넌 매일 칭찬만 듣고 혼 한번 안 났잖아. 그런 게 학창시절 추억인 건데, 넌 선생님 봬도 할 말도 없지? 하하.”

그럴 리가. 하지만 그녀가 저렇게 믿고 웃는다면 그냥 웃게 놓아두고 싶었다.

선생님이 우리 남아 있을 때 아이스크림도 사주셨잖아.

선생님이 나만 따로 불러 펜이랑 노트 같은 것도 주셨어. 부럽지?

웃느라 긴장이 풀렸는지 종알대는 재이의 자랑을 기분 좋게 들었다. 그는 원래 담임선생님을 좋아했지만 이재이가 좋다니 그새 더 좋아졌다.

“아, 여기가 국도구나. 난 이런 데는 못 와봤는데. 시골길 같아.”

“재이 너 조금 더 자. 아직 두어 시간은 더 가야 돼.”

“으응.”

어째 차 타고도 오래 깨어 있다 했다. 고르지 못한 국도에 접어들자마자 눈을 깜박거리다 서서히 그 속도가 느려졌다. 저것도 멀미라는데,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도 잠드는 순간까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곱게 끼워진 하얀 청첩장을 보니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이 청첩장을 받으실 선생님은 자신처럼 그저 웃으실까, 아니면 그 성격 그대로 놀려대실까.

◇ ◆ ◇

“제희야, 왔니?”

그는 졸업을 하고 나서 선생님을 더 자주 뵈었다. 등교를 하던 횟수로 따지지는 못해도 마주 앉아 대면한 것은 그랬다. 쉽사리 마음 주지 앉는 그였지만 달리 찾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아는 이재이를 같이 기억해주고, 또 좋아해주던 사람은 선생님뿐이었으니.

- 대학생 된 거 정말 축하해. 기분이 어때? 모르겠다고만 하겠지, 넌?

1994년 4월, 봄이라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에 그는 추위를 몰랐다. 좁고 따듯한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반복청취를 누르는 손가락이 다 닳도록 재이의 목소리만 들었다.

축하한다는 너는, 왜 목소리는 전혀 축하하지 않는 건지. 내 기분이 어떤지는 직접 와서 봐야지, 그렇게 울음 참고 멋대로 단정 지으면 나는 어쩌란 건지.

“야! 윤제희, 너 어디 가?”

신입생 때였고 술을 마시다 울컥, 자신이 허상을 보고 환청을 들었던가,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에 부서져라 힘이 들어갔다.

이재이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자신은 그 허상을 좇아 무언가에 홀려버린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냐고. 그런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잡는 이를 뿌리치고 늦은 밤 술기운 가득한 채 교문 앞에 섰다.

야간자율 감독을 마치고 오던 선생님이 그를 보자마자 크게 놀라 양팔을 잡았다.

“반장! 윤제희 너!”

“선생님, 재이 기억하시죠? ……부반장이요.”

“제희야.”

“저한테 음성도 남겼거든요. 하아……, 그럼 진짜 있다는 뜻이잖아요.”

인사나 제대로 했는지 기억이 가물거려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었다. 선생님은 화도 내지 않고 그를 근처의 고깃집으로 데려가셨다.

“재이는 워낙 착하고 예쁜 애라 잊기도 힘들지.”

기억하시는구나, 내가 틀리지 않았어.

재이는 정말 있었어.

그 안도감에 다시 손을 뻗는 그에게 선생님은 술 대신 물을 들려주셨다.

“윤제희, 네가 이러면 안 돼.”

“죄송합니다, 선생님.”

“우리 부반장, 재이는 어디서건 잘 지낼 거야. 마음이 너무 약한 애라 네가 이러는 거 알면 잠도 잘 못 들지 않을까?”

“…….”

그때는 그녀를 그리던 마음에 원망이 크게 남아 있을 때였다. 찾기만 하면 싶다가도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럴 수가 있나 이른 아침마다 화기가 차올랐다.

그런데도 마음 불편해 잠 못 잘 그녀가 결코 통쾌하지 않다. 이미 그에게는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해 창가에서 꾸벅이던 재이만 마음속에 가득 차버렸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렇게 또 후회한다.

“……선생님. 혹시, 제가 재이 좋아했던 거 아셨어요?”

택시를 타러 큰길에 나와 기어이 제자 먼저 타고 가는 걸 보겠다는 분이셨다. 재이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시켜준 더없이 고마운 분께 그는 방향 잃은 고백을 던졌다.

자기가 왜 이 밤에 이런 무례를 범하나 이해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마음이 다른 이의 눈에 보였는지 궁금했다. 다른 이에게 보일 정도의 감정이라면 재이도 알지 않았을까.

“알았는데, 이렇게 좋아하는지는 몰랐지.”

“…….”

“인마, 네가 재이 아니면 아무리 붙잡아다 씌워도 반장 감투 그대로 쓰고 있었을 놈이냐? 당장에 내려와서 나 못 하겠다 싹퉁머리 없이 굴 줄 알았지. 하하.”

어깨 몇 번을 두드리던 선생님이 지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역시 아셨구나, 자신도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어른은 또 다르구나, 그렇게 씁쓸함을 머금고 인사를 드렸다.

“제희 너, 다음에 제정신으로 오면 내가 선물 하나 줄게.”

“……네?”

“술 마시지 말고. 우리 부반장 맘 편히 자게 해줘야 선물 줄 거야.”

택시 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따라 탄 말에 그는 그때부터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술을 들지 않았다. 취기로 잊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숙취보다 더한 괴로움만 남겼다.

“또 왔냐? 무슨 의대생이 이래?”

밝은 날, 맨 정신으로 다시 찾아온 그에게 선생님은 타박 아닌 타박을 놓으셨다. 전에는 미처 드리지 못한 음료수 박스를 건네다 다시 재이 생각에 잠겼다. 그날 그녀는 음료수를 세 병이나 마셨는데, 지켜만 보던 그가 다 목을 축일 정도였다.

“넌 나 찾아와서도 딴생각이야? 옛다, 이놈아.”

서랍에서 꺼내신 것은 명함 크기의 작은 봉투였다. 졸업 전 같은 봉투를 받았던 기억에 그것이 사진임을,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예쁘게 나왔더라. 갑자기 가느라……, 돈도 미리 내놨던 거라서 혹시 다시올까 봐 챙겨놨어. 네가 가지고 있다가 주는 게 더 낫겠지.”

단정히 교복 입고 머리를 내린 재이는 가지런히 웃고 있었다. 모든 날을 기억하는 그에게 이 사진은 단지 카메라를 향하던 것이 아니다.

아주 미묘한 높낮이의 차이지만 카메라 너머에서 보는 시선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마 맞은편에서 같은 사진을 찍었다면 자신도 이렇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닳겠다. 잘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전해줘.”

지갑을 꺼내 가장 깊숙한 곳에, 그 봉투의 모서리라도 접힐까 조심스레 넣었다.

그 후로 선생님은 재이 이야기를 잘 꺼내진 않으셨다. 한 번씩 들를 때마다 바뀐 수능이 어떻다, 애들이나 부모님이나 갈수록 극성이다, 그런 푸념을 하셨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말할 사람이 없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생각은 안 했지만 그에게 있어 그건 일종의 보답이었다. 저 살기 바쁜 세상에도 이재이를 기억해주고, 그 기억 속에서 예뻐해주고 착하다 말해주시는, 그런 고마운 선생님께 호응 같은 거 못 해도 해드리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그에게는 첫 사회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네, 우리 반장! 못 보고 갈 뻔했어.”

본과 2학년에 올라 바쁜 생활에 지치고, 또 그녀를 찾는 스스로에게 지쳤을 때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았다. 곧 지방으로 가신다는 선생님은 이제 보기 힘들 거라는 걸 직감하셨는지 전보다 더 서운해하셨다.

“넌 연락도 안 하고 오는 놈이라, 혹시나 올까 해서 가져다 놨어. 이거.”

만년필 한 자루와 무늬 없는 티셔츠 하나가 그의 손에 건네졌다. 만년필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남색 티셔츠는 그 계절에 맞지 않아 아리송했다. 그래도 따로 물을 것 없이 고맙게 받자 선생님은 잘 맞을 거라 웃으셨다.

재이를 알고 추억하는 사람이 서울을 떠나고, 그날 잠을 영 이루지 못해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취기에 서랍에 넣어둔 티셔츠는 딱 적당할 때 다시 발견해 몇 년을 편히 입고 다녔다. 눈대중도 좋으신 모양이라 그 말씀대로, 정말 맞춘 듯 편안했다.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그 셔츠에 팔을 꿰고 머리를 빼낼 때마다 어쩐지 그리운 향기를 맡고는 했다.

「우리 반장! 다음에 우리 꼭 웃으면서 보자.」

마지막 그 말을 지키고자 다시 나선 길에는 곤히 잠든 재이 못지않게 그 역시 설레고 떨렸다. 원망과 화로 가득했던 그를 졸업 후에도 학생처럼 바로잡아주신 분이었으니까.

◇ ◆ ◇

“재이야, 일어나. 다 왔어.”

“응……, 벌써?”

작은 도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 면소재지에 있는 작은 중학교였다. 아이러브스쿨이니 뭐니, 알려고만 들면 금방이라 무심했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웃으며 살게 된 것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어쩌지? 임 선생님 퇴근하셨는데. 집이 여기 바로 앞이거든요. 조금만 내려가시면 되는데 전화 해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저희가 가볼게요.”

한창 사춘기인 뾰족거리는 여학생들도 제희가 복도를 지나가니 꺄르르 비명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사람이 내 애인이다 하며 그녀가 당당히 팔짱을 끼자 무심하던 그도 피식 그 팔을 죄었다.

“저기 주택 봐. 예쁘다!”

“주택 살고 싶어?”

“하하. 개도 키울 수 있고 좋잖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던 재이는 약도 속의 반듯한 전원주택이 눈에 보이자 걸음이 느려졌다. 일부러 연락도 안 드리고 왔는데 기어이 제가 들겠다던 선물 꾸러미를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우, 아빠! 학교에서 제발 애들 좀 뭐라 하지 마!”

“뭐? 이놈의 자식!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아빠한테 하는 말 하고는.”

“애들이 아빠보고 맨날 짖는다고 개장수라고 한단 말이야!”

“뭐? 개장수? 내가 왕년에는 핵주먹 타이슨이었는데 뭐? 그러기에 요놈들이 옷을 옷같이 입어야 야단을 안 치지.”

그들의 뒤에서 쌩하니 자전거 하나가 앞질러 나가 주택 앞에서 멈췄다. 뭐가 그렇게 분한지 씩씩거리던 중학생 아이가 원망이 가득해 입이 나왔다. 그때 그 꼬마가 저리 컸나 할 것도 없이 마당에 물을 주던 선생님이 보였다. 아주 뿌옇게.

“당신이나 옷 똑바로 좀 입어! 매번 옷을 허물 벗듯이 벗어놔! 당신 뱀이야? 도대체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왜 사람 일을 두 번씩 하게 만들어.”

“아이구, 예. 마나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창문을 벌컥 열어젖힌 사모님이 아이를 불러들이고, 선생님은 한숨을 쉬시다 다시 물을 틀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는 옆모습이 그때 그대로다.

“……들어가자, 왜.”

“어, 응.”

이번에는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재이의 눈에 벌써 눈물이 그렁거렸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들이켜던 그녀가 매달린 그의 팔에 힘주어 몸을 지탱했다.

“거기 누구세요? 어…….”

“선생님…….”

“우리 부반장 아냐! 재이야! 이재이!”

몸을 돌리던 선생님이 그녀를 보자마자 호스를 던져놓고 대충 머리에 얹어둔 밀짚모자도 벗어버렸다. 한 걸음도 바로 떼지 못하던 그녀가 선생님이 손을 내밀자마자 곧장 달려가 거기에 안겼다. 뜻밖의 적극적인 표현에 두 남자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굳었다.

“흐으흑, 선생님. 죄송해요. 흐윽.”

“뭐가, 뭐가 죄송해! 제희도 왔구나. 둘이 같이 왔어!”

사모님이 안에 계신데도 무서운 것도 없이 그녀를 꼭 안고 등을 두드렸다. 마주 보던 제희가 고개를 숙이자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손짓했다.

“흐으윽.”

“잘됐어, 정말 잘됐다. 우리 반장, 부반장.”

“서, 선생님. 뵙고 싶었는데……, 흐흑. 너무 죄송해서……, 흐으윽.”

“너는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약해. 제희 너도 이리 좀 와라. 이제 의사선생님 된 거지?”

입술 꽉 깨물고 울음을 참는 그녀에게서 한 손을 떼어 가까이 선 제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생님,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됐어. 여기까지 와줬으면 됐어.”

“으흑.”

“이놈들, 만날 사람은 다 어떻게든 만나는구나. 짐을 덜었지, 덜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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