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42화 (42/48)

# 42화.

그녀가 이야기해주겠다던 11월은 그사이 무정하게도 아홉 번이나 지나버렸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가 이곳에 다시 섰다.

“……제희야.”

“응.”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시 만난 그날부터 오늘을 기다려왔다.

수줍지만 약속을 잘 지키는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물리지 못할 말을 해주길 바랐다. 만날 때마다 수백 번 사랑한단 말을 삼켜가며 9년 전의 이재이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기를 기다렸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그래.”

“나 사실은, 너 정말 많이 좋아했어. 흐흑.”

포기하고 지내던 날에도 이 순간은 포기하지 못했다. 꿈에서 여러 번 들어본 말이 그에게야말로 현실이 되었다.

“……그래?”

“응. 내가 너 정말 좋아해서, 그래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으흐흑……, 그 말 해주고 싶었어.”

“지금은?”

“흐윽……, 지금은 너무 사랑해서……, 이제는 떨어진대도 겁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그사이 생겨버린 자신감과 믿음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쯤은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그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남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왔는지, 어디로 향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 이제 떨어지지는 말자.”

“으흐흑……, 응.”

“사랑한다, 재이야.”

윤제희는, 그가 잠깐 보았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수없이 그를 시리게 만들던 그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아냈다. 더 이상 바람이 드나들 수 없이 견고해진 자리에 마음껏 안고 입맞출 수 있는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2002년의 여름,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 일곱 번째 메시지입니다.

이재이, 이제 아무도 나한테 반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어. 대신에 ‘제희야.’ 하고 부르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싶다. 내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여자 이름 같아서 그다지 맘에 든 적은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좋아.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네가 생각나. 네가 근처에 있을 것만 같고, 이름 듣고 달려올 거 같아. 너는 어떠니? 누가 네 이름 부르면 내가 생각나? 나는 근처에 없어도……, 멀리서라도 달려갈 수 있는데. 하아……, 재이야. 이재이……, 재이야. 나 한번 불러봐. 응?

1998년 2월 19일에 저장되었습니다.

- 여덟 번째 메시지입니다.

재이야, 나 이제 휴대전화를 샀어. 이거 있으면 아무 때나 전화가 된대. 번호를 전부 맞추는 게 안 된다길래 뒷번호만 맞췄어. 공일일 오일육 삼구오이야. 삐삐만 들고 다니다가 휴대전화는 훨씬 무거워서 적응이 안 되네.

그래도 너 연락 오면 바로 받을 수 있으니까 좋아. 어디 멀리 가 있거나 외진 지역으로 가면 안 될 수도 있다길래 되도록 서울에만 있을 거야. 그래도 혹시 안 받으면 놀라지 말고 문자 보내줘.

아, 문자 보낼 줄 알아? 삐삐처럼 번호만 남기는 게 아냐. 그래도 헷갈리면 난 상관없으니까 번호만 남겨줘. 휴대전화 있으니 바로 전화할게. 네가 바로 전화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떨린다. 공일일 오일육에 삼구오이. 알았지?

1998년 7월 22일에 저장되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단장까지는 아니라도 거울 한 번은 보고 나왔다.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그때의 너를 찾게 된다고. 잘 웃고 싫다는 소리도 한번 못 하던 입가를 살피고, 늘 사람을 따스하게 보던 눈을 마주쳐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때의 너보다 지금의 네가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라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좋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감정의 증폭이 처음으로 불안을 넘어가고 있었다.

“너 이제 가냐? 가는 김에 나도 같이 가자.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하나 사와야겠다.”

퇴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우를 만났다. 목하 열애 중이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영우는 아직도 제희를 볼 때마다 몇 개월 전의 일로 배를 잡고 웃어댔다. 사실 대놓고 웃지 않아 그렇지 영우를 제외한 수많은 병원 사람들 역시 입을 가리며 웃음을 감추곤 했다.

“뭐야? 오늘도 보는 거야? 오올, 이 엉큼한 놈.”

로비에 서 있는 재이를 보자마자 영우가 두 손을 입에 대고 야우했다. 떨쳐내기에는 지나치게 끈질긴 놈이라 괜한 힘 빼지 않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 제희야. 이제 나와? 영우 씨, 안녕하세요.”

“그럼요. 안녕해야죠! 흐흐흐.”

“너 안 가고 뭐 해?”

“간다, 가!”

그러면서도 영우는 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 안다는 듯 의미심장한 그 눈길에 재이가 어쩔 줄 몰라 제희의 등 뒤로 얼굴을 감췄다.

“그나저나 재이 씨, 안에 와서 기다리죠. 여기서 뭐 했어요?”

“아,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어떤 꼬마를 봤거든요.”

“아는 사람?”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전에 여름에 왔을 때 여기 모금함에 있던 아기 사진 말이야, 그 사진이랑 똑같은 애 같아서 잘못 봤나 보고 있었어. 어, 벌써 갔나 봐. 저기 편의점 앞에 분명 맞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재이는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고 그 아이는 사연 한 줄마다 얼굴을 보느라 단 한 번임에도 분명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머리는 더 자랐지만 활짝 웃는 보조개까지 같아서 긴가민가했다.

“아, 걔 벌써 퇴원할 때 됐나? 항암하러 병원 다닐 텐데, 아직.”

“네? 그럼 그 애 맞아요?”

“네. 수술 잘 마치고 조만간 뛰어노느라 바쁠 거예요.”

정말 잘됐다, 두 손 꼭 잡고 그녀가 제 일처럼 기뻐했다. 심드렁하게 보던 제희가 그녀의 등을 밀었지만 이미 그 기쁜 소식에 빠져 윤제희는 안중에도 없었다.

“돈 많이 들었을 텐데. 그때 적힌 거 보니까 형편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아 걱정했거든요. 영우 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피부과 환자도 아닐 텐데.”

“하아……, 그런 게 있어요. 돈이야 어느 미친놈……이 아니라 마음 좋은 놈이 기분 좀 냈나 보죠. 안 그러냐, 제희야?”

아무리 공돈이라도 그게 다 얼마였는데, 월드컵 도박 최후의 승자인 윤제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그 돈을 봉투째 넣어버리니 그보다 윗년차나 체면 차리는 사람들 모두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뜻을 따랐다. 그렇게 그는 욕도 많이 먹었지만 대신 복을 더 많이 받았다.

“밖에 눈 와?”

“지금은 조금만. 그래도 춥긴 추워.”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의 겨울 거리를 걸었다. 춥다면서도 같이 걷고 싶다기에 목도리도 다시 꽁꽁 묶고 단추도 다시 잠그고는, 그래도 모자라 제 품에 쏙 넣었다.

“답답해.”

“감기 드는 것보다는 나아.”

병원 로비에서도 느꼈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꼭 그의 오른편에 섰다.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가만있다가도 빙 둘러 오른편에 서니 그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띠 샀어?”

“어? ……어? 그, 그게 표가 나? 아, 역시 너 눈썰미 좋다, 반장.”

처음부터 못 보던 거다 했는데 머리띠 왼편에 달린 보석 장식이 유독 반짝거렸다. 저 어색한 연기는 어찌 안 되나 보다 하면서 그게 또 말할 수 없이 좋다.

“이거 있잖아. 어머님이 오늘 사주신 거야.”

“엄마가?”

“응. 이것도 사주시고 나 여기 코트도.”

받아들면서도 뭔가 싶었는데 커다란 쇼핑백은 제법 그득했다. 그녀가 날이 갈수록 반짝이는 데는 어머니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아들만 둘 키우다 뒤늦게 인형놀이에 빠져버린 어머니는 이재이를 충실히 본인의 입맛에 맞춰 공주로 만들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집에만 가면 제희 앞에서 장신구니 옷이니 백번을 더 입어보고 빙글빙글 돌며 웃었다.

어머니나 재이나 저것도 여자들 낙이겠거니 넘어갔지만 그 역시 싫을 리 없다. 그는 공주인 이재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공주가 된 이재이는 봐도 봐도 좋았다.

예쁘고 귀한 것 모두 그녀 손에 닿기를 바랐고 이번 주 토요일에는 가장 귀한 보석 하나로 여왕님이 될 순서였다.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의해.

“있잖아, 배 많이 고파?”

“아니. 아직.”

“으음……, 그럼 우리 한 군데만 들렀다 가자.”

“어디?”

생긋생긋 웃으며 가는 팔로 그를 당겨댔다. 어디든 못 갈까 싶어 따라간 곳은 어이없게도 강남역 근처에 있는 복권방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하려는 건데?”

“응. 나 이거 사려고. 아저씨 로또 다섯 장이요.”

“하아…….”

몇 주 전부터 이재이는 뜬금없이 일확천금의 꿈에 빠져 있었다. 생전 욕심은 부릴 줄 모르더니 사람 잘못 본 모양이다. 침대 속에서 TV를 보다가 ‘인생역전, 로또 탄생’ 소리 한번 주워듣고는 그가 알기로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복권방에 들렀다.

“너 도대체 이거 되면 뭐 하려고?”

“응? ……하하.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제희야, 네가 운이 좋으니까 숫자 좀 불러봐. 빨리.”

한번 고민하면 끝도 없이 이곳에서 보낼 거라 어쩔 수 없이 내키는 대로 마구 숫자를 불러댔다.

“야아……, 이거 45까진데 100이 뭐야. 으음, 그런데 이거 1등 돼도 문제야.”

“왜?”

“아니, 나는 1등 해서 10억만 있으면 되는데 누적돼서 엄청 올라가버렸어. 아, 그거 다 생겨도 할 게 없는데……, 큰일이야, 큰일. 그냥 2등 하고 말까? 에휴.”

중얼중얼, 수능 치듯 혼신의 힘을 쏟아 마킹을 했다. 웃음을 꾹 참고 팔을 괸 채 그녀를 기다렸다. 부질없다 여기면서도 재촉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재이한테는 그간 고생만 시켜서……, 그래도 이런 훌륭한 혼처를 만나서 제가 뭐라 더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못 해도……, 이제 결혼하면 재이 찾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짐은 되지 않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난감해 손을 내저어도 재이의 어머니는 아니라 고개를 숙였다. 그날 입 꾹 다물고 있던 재이가 집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알기에 그 돈 생기면 뭘 할지는 살짝만 짐작했다.

더군다나 그녀도 보고 듣는 게 있고, 아무리 어머니가 욕심을 접었다 해도 그와 결혼하려면 마음 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재이, 너 진짜 그 돈 생기면 뭐 할 거야?”

“나? 나……, 그냥 다 쓸 거야.”

“진짜?”

“응. 너 병원도 차려줄 거고……, 봐서 좀 얄밉지만 우리 엄마 가게도 내주고……, 나 학교도 다시 갈 거야……. 제하 씨랑, 아니다, 어머님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셨는데, 으음, 도련님. 도련님 옷도 사주고 재우도 옷도 사주고……, 아, 다 됐다!”

기나긴 고뇌 끝에 마킹을 끝낸 그녀가 복권용지를 들고 활짝 웃었다. 못 말린다 포기해버린 제희의 곁에 섰다가 다시 아차 싶어 오른편으로 섰다. 작은 종이를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그의 어머니가 사주신 예쁘고 작은 가방 안 깊숙이 넣어두었다.

“근데 제희야, 토요일에 어디 가?”

“가서 봐.”

“음, 근데 로또 이거 토요일에 발표하는데.”

“이재이.”

“알았어. 농담이야.”

두 사람이 처음 맞이하는 겨울 거리였다. 외로움으로 버티며 지냈던 수많은 겨울날의 만년설은 이미 녹은 지 오래, 그저 여름 열기 그대로 가져온 따스함만 가득했다.

2002년 12월 28일 토요일, 그녀는 로또에 당첨되지 못했지만 또한 로또에 당첨되었다.

- 아홉 번째 메시지입니다.

재이야, 오늘 처음으로 여자 동기 결혼식에 다녀왔어. 멀리서 그걸 보는데……, 그 애랑 동갑인 너도 이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지금까지 넌 교복 입은 이재이였는데, 그런데……, 하얀 드레스 입고 그렇게 결혼할 수 있다는 나이라는 게 너무 무섭더라. 네 옆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도, 나만 아는 네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다 힘들다 생각했는데……, 네가 결혼을 해버릴 수 있다는 건 숨이 막힐 만큼 무서웠어.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라……, 난 늘 너 웃는 거부터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손 한 번만 보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손 보고 나면, 그래야 잠이 올 거 같아. 네가 기다려달래서 난 아직 여기 있는데, 너도 날 위해 손가락 하나 정도는 비워줘. 그럴 수 있지?

1999년 6월 27일에 저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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