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37화 (37/48)

# 37화.

그 모든 걸 자신만 안다는 게 너무 좋고 신이 나 남들에게는 말 한마디 안 했다. 친구들이 ‘부반장은 너무 착해.’라고 말하면 나는 너희가 모르는 거 안다고, 속으로 웃으며 거만하게 굴었다.

이런 네가 내 속을 한없이 태우고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 말을 누가 믿어줄까? 알면서 입 다문 벌을 지금 받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렇게 못됐니.”

바로 침대에 눕혀 다시는 도망갈 생각도 못 하게 양옆에서 꾹 누르며 내려다보았다. 푸석하게 부어오른 눈을 보니 화가 치민다. 쫓겨난 아이처럼 재이가 그 없는 곳에서 몰래 울고 왔다는 것이 그의 인내를 무너트렸다. 제 딴에 착하고 마음 약해 한다는 짓이 왜 남자를 천하의 바보로 만드는 것임을 모를까.

“왜 그래?”

“왜 그러냐고?”

설명하기도 싫다. 그도 무한 체력이 아니라 입을 열 힘도 없었다. 작은 머리 그대로 두면 또 어떤 무서운 생각을 할까. 이제 그의 뜻대로 몰아붙일 것이다. 이재이를 아껴주는 것도 자신이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하다.

“넌 내가 뭘로 보여?”

그제야 입을 꾹 다무는 재이를 보다가 그대로 윗옷을 벗겨 내렸다. 하나하나 예쁘게 풀 인내심도 없어 적당히 두어 개 남았을 때 그냥 뜯어냈다. 데구르르 구르는 단추 하나를 응시하는 재이의 눈이 한없이 슬퍼 보여 그게 또 그의 화에 기름을 끼얹었다.

“너는…… 겨우 저런 거 하나에도 눈이 가면서. 왜 나를 못 봐?”

“아냐, 그런 거 아냐……, 으음.”

“난 이제 그거 두 번 못 해. 힘들어서 못 해.”

그가 무엇을 못 하겠다 하는지는 어젯밤 공중전화에서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눈물이 핑 고여 대뜸 입술을 파고드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어떻게 이런 사람을 다시 뿌리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다. 제 마음 한 조각, 제 몸 한번 열어 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면, 그게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쉬운 길이라 자책마저 든다.

“으흡.”

어디 너도 아파봐라, 크나큰 불안감으로 체중을 실은 제희가 마음 아프다. 첫날밤보다 훨씬 더 아프고 거칠게 파고드는 그가 밉지 않다. 그저 울컥하고 애틋해 두 손을 들어올려 그의 뺨을 감쌌다. 놀라는 눈에서 상처가 엿보이자 다시 울어버렸다.

“흐윽.”

“왜……, 왜 울어? 아파?”

그게 아니라는 소리를 못 해 그를 끌어당겼다. 뜨거운 숨결에 정상치를 넘어서는 열기가 녹아 있었다.

반장, 아니, 윤제희.

내가 너한테 그런 사람이었어? 응? 말해줘.

수년을 뛰어넘어 속초의 어느 해변에 있는 차가운 수화기로 듣는 거 말고, 내 안에 있는 네 목소리로. 그러면 더 실감이 나고 더 미안할 것 같아. 그래서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알고 있는 답을 무언으로 강요하다 처음으로 그의 입술을 먼저 당겼다. 얼마나 놀란 건지, 확실히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것이 부드러운 움직임에서 느껴졌다. 기교 같은 건 없어도,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뜨거운 그의 입안을 헤집었다.

입안에서 열이 나듯 뜨겁고 부드러워 이대로 녹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하아……, 너 내가 이런다고 화가 풀릴 거 같아?”

“아……, 알아.”

“뭘 아는데? 네가 뭘 알아?”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화가 벌써 꽤 풀렸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프지 않게 배려해주고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이제 제희의 온몸에서 따가운 것은 오직 이 눈빛뿐이다.

“으음. 하앗…….”

“차라리 나더러 죽으라고 하든가!”

“흐읏, 아냐. 아니야.”

“그럼 같이 죽자는 거야?”

“아아. 아냐!”

속도는 줄였지만 그는 여전히 절박했다. 절망의 늪에서 구해줄 듯 제가 있는 곳까지 끌어올렸다가 발 딛기 직전에 밀어버린 느낌이다. 다시 그리 살라면 그건 그에게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녀의 아니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더 크게 듣고 싶어 허리에 힘을 실었다.

“으으응.”

“나 봐, 보라구!”

가슴을 움켜쥐었다. 재이가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 텐데 그 하얀 몸 곳곳에 붉은 자국을 내었다. 특별히 힘을 세게 주지도 않았다. 워낙 하얀 몸이라 흔적도 쉽게 남아 옷으로 가려지는 모든 곳에 자신을 남겼다.

“제…… 제희야. 흐읏.”

“눈 떠.”

마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도 자신이 들어 있다. 이런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남겨둔다. 그 눈에 얼마나 예쁘게 담았는지 지독한 열감과 아픔이 녹은 와중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다 괜찮다 말하는 이재이가 있었다.

“…….”

착하지 않은데 착한 그녀를 보다가 제 입술로 그 눈을 감겼다. 엉덩이를 잡고 부드럽게 몸을 놀렸다. 자책 사이로도 쾌감이 내려앉는다. 고통이 사라진 그녀의 비음을 듣자 역시 이편이 그에게도 더 좋았다. 몸을 나누며 얻는 모든 쾌락은 그녀와 함께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을.

“하아, 하아……, 으응.”

맞부딪치는 살이 묘하게 박자를 맞췄다. 눈빛으로 그를 달래보려던 재이가 참지 못하고 다시 목을 끌자 그가 본격적으로 하체를 밀어붙였다. 조금 더 강해진 소리가 규칙적일수록 두 사람이 느끼는 선정성과 본능적인 쾌감이 더 진해졌다.

“아아아…….”

마지막에야 보란 듯 몰아붙이더니 뜨거운 그의 흔적이 몸 안 가득 퍼져나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 못지않게 그녀 역시 그 느낌을 즐겼다. 그의 몸 어디 하나 마음을 적시지 않는 것이 없으니까.

“콘돔 안 썼어.”

“…….”

“일부러.”

그가 따가운 눈 그대로 최대한 엄중하게 일렀다. 그래봤자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으로 누워서도 머리 한 자락은 놓지 못하는 그에게 고개를 돌릴 엄두가 안 난다.

오는 내내 묻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는데 막상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 먹먹함을 다 감내하기가 힘들어 여운을 삭히는 중이었으니,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못 한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그래서 일단은, 묻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너 어디 가?”

제 곁에서 자리를 뜨는 그녀에게 제희가 대번 신경을 곤두세웠다. 화장실에 가려나 하고 마지못해 보내줬는데 현관 쪽으로 방향을 트니 두고 볼 여유가 없었다. 옷도 제대로 안 입었으니 가봐야 이 작은 집 안인데도 그 꼴을 못 봤다.

“잠깐만.”

“얼른 안 와?”

현관 앞에 놓아둔 종이가방을 들여다보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인내심 강한 제희가 저렇게 보채는데 제 탓이 절반이라 그게 또 안타깝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저렇게 잘나고 잘난 윤제희에 대해, 또 그런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자신에 대해.

“뭐야? 뭐 하자는 거야?”

“어휴……, 그런 거 아냐. 나 도망 안 가.”

불안한 표정이야 많이 가셨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 어린 표정과 다시 그녀의 몸을 잡아채는 손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다.

“이거 선물. 이거 주려고 했던 거야.”

“……뭔데?”

“얼른 봐. 응?”

엄밀히 말하면 그때 그 사탕이 아니었다. 아무리 제하가 심사숙고했더라도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위에 달린 리본 하나에 처음으로 그가 묘하게 눈을 일렁였다.

“반장, 시험 잘 봐.”

“…….”

“네 동생도 참 멋지더라. 나도 그런 동생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겨우 꺼내놓은 농담에 제희가 웃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잡아왔다. 이렇게 봐서는 모르겠다. 다만 어제의 그녀처럼 리본을 매만지던 손길이 지나치게 느렸다.

“……먹을래?”

“응, 먹고 싶어. 하나만 줄래?”

같은 기억이 반복되고, 둘 다 이렇게 자랐다. 조금 전까지 열락에 빠져 있었고, 한 침대에서 옷도 제대로 안 입었지만 그 순수했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았다.

“맛있어.”

오렌지 맛으로 짐작되는, 오렌지의 빛깔과 모양이 그녀의 목을 가득 메웠던 울음을 넘겼다. 작은 입안에서 사탕이 이와 부딪쳐 타닥 소리를 내자 그가 눈을 들었다.

그녀가 유리병 뚜껑을 덮은 그의 손을 치워내고 사탕 하나를 더 꺼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 정도의 일도 그녀에게는 커다란 용기였다.

“제희야……, 이제 이런 거 있으면 아끼지 말고 다 먹어. 응?”

형편이 좋다고는 못 해도 이 정도를 아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렇겠지만 재이 역시 그때보다는 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아졌다.

“이재이.”

반쯤 기대 있던 팔을 뻗어 그녀를 당겼다. 들고 있던 병이 침대로 쏟아져 선명한 색 그대로 흩어졌다. 9년간 흑백과도 같던 그녀의 삶과 이 작은 방에 이토록 많은 색이 자리한 것은 처음이다. 주워 담을 생각도 못 하고 그 색감에 빠져드는데, 바로 그가 입을 맞췄다.

딸기 맛이었구나.

태연한 체 사탕을 내밀었지만 그게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 맞닿은 입안에서야 그 맛을 알아 그녀가 물고 있던 새콤함과 뒤섞였다. 뜨거운 열기에 사탕까지 엉겨 붙어 그 모양이 금세 허물어졌다.

“너……, 내, 내가 이대로 넘어갈 거라 착각하지 마.”

“알아.”

“뭘 아는데?”

세상 그 누구보다 언변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느꼈던 불안과 피 말리는 초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말없이 웃기만 하는 이재이라면, 아마 죽어도 모를 거다.

“다시 한 번 그래봐.”

“나는.”

“너는 정말…… 착하지 않아.”

- 네 번째 메시지입니다.

재이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지금에야 알았어.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나 봐. 재이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왜 연락을 안 해? 혹시 시험을 못 쳐서 그래? 그럼 다시 하면 되잖아……. 내가 그때보다 더 잘 가르쳐줄게. 때리지도, 화내지도 않아……. 알잖아.

재이 네가 이걸 다시 듣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네 목소리 떠올리니 화가 난다. 재이야, 내가 어떻게 널 잊어? 나한테 어떻게 그런 걸 물어?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1995년 1월 2일에 저장되었습니다.

졸린 듯 눈을 비비기도 하고 때로는 하품을 해가면서도 모두들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전 국민을 휩쓸던 열기가 털어낸다고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넋 놓고 살기엔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특히 병원에서는.

“윤 선생님, 박 선생님 병원 오시다 다리 삐끗하셔서 오늘 대신 좀 계셔달라 하시는데요?”

“영우가요?”

“네. 김 교수님 수술 잡혀 있어서 거기도 들어가셔야 해요. 지금 검사 들어갔는데 준비 좀 해주세요.”

대학병원에서 피부과는 비교적 한가한 과고 응급도 드물었지만 병원이다 보니 이렇게 뜻하지 않게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트 보니 오늘 집에 들어가긴 틀린지라 수술 준비부터 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 응, 왜?

“어머니, 저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고 내일도 당직이라 모레나 들를 거 같아요.”

-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집에 자주 왔다고? 됐어, 얘.

말은 그리 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실망이 섞여 있었다. 겨우 집에 가는 일에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자신이 썩 좋은 아들이 아니었구나 깨달아 마음이 무겁다.

- 너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그 재이 걔가 오늘 약속 어긴 것 때문에 네가 미리 내 기분 맞추려 그런 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재이도 어머니 뵙자고 하는 거 미리 알았으면 약속 취소했을 거예요.”

- 뭐야? 너 그럼 나 만날 거라 이야기도 안 한 거야? 무슨 애가 참.

사탕 하나 주고 입안으로 어르던 이재이는 요 며칠간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어머니와 약속을 잡아 시간 비우라 했더니 ‘어쩌지? 나 친구랑 약속 있어서.’ 하고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게 다였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와 보기로 했다면 다른 말은 더 못 했겠지만 일부러 결심한 바 있어 따로 일러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긴장이 가득해 주눅 들 그녀가 그 걱정에 잠도 못 자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할까 그것부터 염려했다. 그런 상태라면 말은 고사하고 재이 최대의 장점인 사람을 녹이는 웃음도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 하여튼 너 맘에 안 들어. 나한테 그렇게까지 다짐을 받더니 정작 재이 그 애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해? 넌 엄마만 그렇게 쉽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닌 거 아시잖아요. 어머니도 제하랑 따로 약속 잡으셨다면서요. 오늘 즐겁게 보내세요.”

- 아니긴 뭘. 아들 키워봤자 하나 소용없다더니 그 말 한번 틀린 데가……, 어머!

“왜 그러세요?”

- 아니, 아니야. 음……, 그럼 다음에 보자. 일 잘하고. 음.

뭐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바쁜 일 있으신가 하면서도 그 역시 수술장으로 돌아가봐야 해 바삐 몸을 놀렸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재이가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한 건지, 생각해보면 이것도 천생연분이 아닌가, 혼자 좋을 대로 단정하고 기분이 으쓱해졌다.

한편 그의 집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어머니가 있었다. 제하가 왔다길래 나갈 차비 하고 반겼더니 뜻밖의 손님이 허리 굽혀 인사를 건넸다. 원래라면 오늘 제희와 함께 왔어야 할 아가씨다.

“안녕하세요. 제가 따로 연락도 없이 이렇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어떻게, 난 이게 뭔지……. 오늘 시간이 안 된다 들었는데…….”

“네?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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