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7월 1일은 임시공휴일이었다. 나라에서 이렇게 날 정해 쉬라고 하는 걸 보면 정말 큰 행사긴 했구나 싶어 아직 남아 있는 여운을 곱씹으며 거리를 걸었다.
“야, 들어가자! 파도친다.”
“하하하, 하지 마! 이거 놓으라구!”
쏴아,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이른 피서에 연인들이나 학생들이나 즐거운 웃음이 넘치는데 이재이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바다에 와본 자체가 처음이었다.
TV랑 똑같구나, 커다란 수영장 같은 게 아니었어.
파도는 어떻게 저렇게 계속 밀려나는 거지?
신발을 손에 들고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발가락 사이로 닿는 까슬한 모래가 생각보다 더 뜨겁게 파고들었다.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인데 쉽사리 털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모래가 흔적을 남겼다. 꼭 제희처럼.
“……차갑네.”
처음 몸에 닿는 바다 모래를 쫓아가다가 그 색이 점점 짙어지는 것도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 했더니 몇 걸음도 안 돼 바다에 닿았다. 조금 차다 싶게 시원함을 느끼고는 눈을 감는다. 제 마음도 빨리 좀 식을 수 있기를, 그러기를 바랐다.
제희와 이전처럼 지내기는 힘들 거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제 몸 하나 숨겨 끝날 일도 아니고 이제는 자기 행동 책임지며 사는 사회인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서서히 멀어진다면, 그래서 한 번씩 얼굴 보고 ‘너 좋아 보이네. 잘 있었어?’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럼 어쩌면 생각만큼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사도 모르고 억지로 지워내다 눈물 가득한 악몽 속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마음을 숨기더라도 현실의 그를 볼 수 있을 테니.
사실 이런 생각이야 어디까지나 소망이었고 다시 제희를 보게 된다면 또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처음 교실에서 만났을 때, 그리고 두 번째의 우연한 만남 모두 눈 뜨니 사랑에 빠져 있었다. 마음 접고 서울로 올라가도 세 번째의 그를 만난다면 다시 그러지 않으리란 장담은 못 한다.
아마 그렇겠지. 그녀가 이재이이고 그가 윤제희인 이상 다시 그를 만나면 또 맥없이 두 발 깊숙하게 빠지고 말 것이다. 장담 같은 거 잘 안 하는 그녀가 어쩔 수 없는 확신에 눈물을 투둑 떨어트렸다.
마찬가지로 짜고 커다란 바다 속에서 그녀의 눈물 한두 방울 정도야 티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는 바다를 자주 찾을지도 모르겠다.
“요 앞에 나가면 먹을 데 많아. 근데 관광객들 바가지 씌우니까 처음 집 말고 쭉 따라 내려가봐. 안쪽 가면 싸고 양도 많이 줘.”
“네.”
“방 닦아놨으니까 와서 바로 자고.”
“네, 감사합니다.”
바다 바로 앞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하루 자고 돌아갈 거니 풀 만큼 큰 가방도 아니지만 주인 할머니가 은근히 쳐다보기에 속을 훤히 아는 가방을 괜히 뒤적거렸다. 꺼낼 것 없는 가방 안을 휘젓다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에 가슴이 꾹 멘다.
다 털어내겠다 생각해놓고 이건 또 왜 가지고 왔을까. 별 네 개가 나란한 폴라리스 목걸이가 그녀의 집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라 저도 모르게 챙겨 넣었다. 기껏 한낮 내내 파도로 식혀놓은 가슴이 단번에 뜨거워졌다.
“저기요, 혹시 공중전화는 어디 있을까요?”
“전화? 휴대전화 안 들고 다녀? 아……, 그럼 우리 집 거 써. 뭐하러 공중전화까지 가? 이리 와.”
“아니에요. 그냥 산책 좀 하면서 있으면 전화 걸어보려구요.”
“음, 그래? 그럼 뭐……. 요새 공중전화 많이 없어졌다는데 그래도 여기는 좀 있어, 시골이라. 저 앞에 골목에도 있고 우체국 앞이랑 바다 쪽이랑 해서 서너 개 될 거야.”
없으면 말자 싶었는데 그 대답이 또 반가워 해변으로 나섰다. 밤바다는 무서울 정도로 검어 한낮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겁이 많아서 다시 발 담글 생각은 못 하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만 들으며 힐끗 쳐다보는 게 다였다.
“너네 왜 몰래 나왔어? 얼른 안 들어가?”
“아우, 선생님. 제발요. 그냥 바람만 쐰 거예요.”
불만 가득한 목소리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피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수학여행을 온 건지 깔깔거리며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더니 몰래 나와 더 즐거웠나 보다. 그녀가 학교를 다닐 때보다 한 뼘은 짧아진 치마 덕분인지 언뜻 봐서는 교복인지도 몰랐다.
“야, 카메라 그거 조심해야 돼. 우리 오빠 거란 말이야.”
“어, 진짜 신기하다. 나 디지털 카메라 첨 봤어. 어떻게 바로 찍어서 보냐? 넘겨봐, 얼른.”
“진짜 좋지? 그거 이백만 화소래. 모래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돼.”
잡혀 들어가면서도 어느새 희희낙락 카메라 하나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누가 잘 나왔네, 이건 지우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재이는 ‘너희 다 예쁘다.’ 말해주고 싶었다.
「너 좀 웃어라.」
1차 수능 치기 얼마 전에 졸업사진을 미리 찍었다. 2교시 마치고 강당에 모여 일렬로 서서 찍었는데 당시에도 멋 부리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립스틱 하나를 돌려 바르고 앞머리를 붕 띄우고. 그러다 발각되어 수포가 되면서도 고개만 돌아가면 다시 머리를 띄웠다.
「부반장, 너도 머리 좀 이렇게 해봐.」
친구가 둥근 빗을 들고 다가오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멋을 부리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게 뭐라고 또 부끄러웠다. 평소보다 머리만 조금 더 단정하게 손보고 사진 찍으러 나가는 그녀에게 명단을 체크하던 제희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좀 웃어보라고.
그 말 안 들었으면 자연스럽게 찍었을 사진인데 그 말에 신경 쓰느라 얼굴이 굳어버렸다. 평생 지적 같은 거 안 당해본 그녀가 사진사에게 긴장 좀 풀라 소리를 두 번이나 듣고, 사진사 바로 뒤에 있던 제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피식 웃던 모습에 살짝 따라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사진이 찍혔다.
그 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진짜 졸업사진은 그거 하나뿐인데.
“아아.”
짧은 거리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하얀 등대에 닿았다. 해변의 끝이다. 다시 돌아가야지 생각하다가 등대 옆 공중전화 앞에 섰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걸 찾아 해맸던 건지도.
심호흡을 하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요새 찾는 사람이 있으려나 하던 전화박스 옆면엔 갖가지 사랑의 낙서들이 빼곡했다. 동전을 넣자 신호음이 들렸고, 그녀는 숨을 참았다.
첫날에 외워버린 그의 휴대전화 번호를 반 정도 눌렀을 때, 아직 태연히 굴 만큼의 준비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어느 순간에도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못 하겠다. 수화기를 내리며 참았던 숨을 내뱉고 불현듯 떠오르는 번호에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윤제희와 관련된 것이라면, 휴대전화 번호 이전에 깊이 묻어둔 열 자리의 숫자가 있다.
0125023952.
대전에 내려갔을 때 하루에 백번, 천번씩 되뇌던 그의 삐삐 번호. 그렇게 새기고 새기다 세월로 억지로 덮어둔 그의 번호였다.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제하에게서 들은 말이 하루 종일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시간이 다 얼마라고, 자신조차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설마 아직도 있을까. 마지막 번호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껏 참고 참다 단 세 번 끝까지 눌러보았고 오늘이 겨우 네 번째다.
- ……재이야. 나야. 듣고 있니?
순간적으로 휴대전화 번호를 누른 걸까 착각했다. 인사말이 나와야 할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렸다. 이 번호는, 정말 제하 말대로 자신만 알고 있나 보다.
“으흐흑.”
- 왜 요새는 전화를 안 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음……, 이건 오래 녹음이 안 돼. 사서함 꼭 확인해줘. 비밀번호 3325야. 알지? 네 반번호. 꼭 좀 들어줘. 그리고……, 지금이라도 전화해줘서 너무 고마워, 재이야.
흐느낌에 그 목소리를 놓칠까 간신히 버텼다. 그런데도 참지 못해 결국 그 울음에 제희의 떨리는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chapter 16. 소원
-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어, 반장, 나 이재이. 음……, 너무 늦게 연락했지? 너한테 제일 먼저 삐삐 쳐보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됐네. 미리 연락도 못 하고 내려와서 정말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냐, 진짜. 네가 혹시 화났을까 봐 걱정이야.
그래도 나 좋은 소식 있어서 알려주고 싶어. 우리 아빠 요새 많이 좋아졌거든. 나 11월에 수능 다시 치고 점수 잘 나오면, 그러면 꼭 서울에 갈게. 알았지? 우리 한국대 앞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고로케 사줄게, 응?
1993년 9월 16일에 저장되었습니다.
-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반장, 나 이재이……. 잘 지내지? 너는 어디에 있으나 잘할 거야. 네가 이제 대학생이라니 나는 잘 상상이 안 가. 머리는 길었어? 넌 머리 조금 더 길러도 잘 어울릴 거 같아. 나는……, 나도 잘 있어. 잘 있는데, 으음, 아니다.
대학생 된 거 정말 축하해, 기분이 어때? 모르겠다고만 하겠지, 넌? 난 되게 좋을 거 같은데……. 그래도 내년에는 너 대학생 된 거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올해만 조금 더 고생하면……, 음, 오늘 처음 학교 가는 날인데 내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하네. 미안해. 학교 잘 가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축하해.
1994년 3월 2일에 저장되었습니다.
-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어, 반장, 나 이재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반장 이재인데……, 이제 알겠어? 으음……, 아마 앞으로 많이 바빠져서 당분간 연락하기 힘들어질 거 같아서……, 흐읍. 반장 너는 학교 잘 다니지?
친구도 많고 공부도 잘할 거야. 꼭 그럴 거 같아. 그런데 있잖아……, 흑, 나 너한테 할 말 있다고 한 거, 그거 꼭 해줘야 하는데……, 너무 늦어버렸어. 그런데……, 나중에, 흐윽, 아주 나중에라도 꼭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좀 기다려줄 수 있어? 절대로 번호 바꾸면 안 돼, 응?
1994년 12월 17일에 저장되었습니다.
적지 않던 잔돈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처음 세 개는 자신이 남긴 음성이었고 남은 일곱 개는 제희의 목소리였다. 제가 남긴 세 개의 메시지는 그저 흘려들어도 남은 것들은 그러지 못해 그 밤에 눈물을 쏟아냈다.
네 그런 마음을 알았더라면, 나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수화기를 들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제 맘을 동여매어서라도 제희에게 그런 긴 기다림을 주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세 번 모두 수십, 수백 번의 망설임이 앞서 자리했지만 한 번은 더 참았어야 했다.
제희의 그 떨리고 조심스럽던 목소리들, 때로는 감출 수 없는 원망과 아픔이 드러나는 목소리까지. 그 모든 목소리가 어젯밤 그녀의 새벽을 쥐고 흔들었다.
「재이야, 내가 어떻게 널 잊어.」
편안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죄책감이 생길 만큼 힘들었다. 그저 두 눈 뜨고 날이 밝아오기만 기다렸다는 것이 옳을지도.
“흐읍.”
서울로 돌아가는 첫차에 올라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을 때의 자신을 떠올려본다.
간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대전으로 내려왔지만 가장 헛된 희망에 차 있었을 1993년 9월, 11월 2차 시험을 치지 못하고 몇 달간을 제 자신이 아니게 살다, 그래도 캠퍼스로 새 걸음 할 그에게 축하한다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던 1994년 3월, 재수마저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와 의대에 있던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1994년 12월.
그 후로는 차마 그 번호를 웃으며 기억 못 했다. 의대 건물에서 멀찌감치 제희를 보고 온 후 있는 것이 맞다고, 그 하나만 깨닫고 왔다. 친구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를 보며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짐이 되리라 믿었으니까.
당장에 내일도 일하러 나가야 할 어린 그녀에게는 마음속 안식처를 두는 것마저 사치였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만 생각했다. 기다리는 이의 상처도 못지않음을, 두 손 두 발 묶여 문이 열리기만 바라는 이의 갑갑함을 모르고 있었다.
“어머, 아가씨. 이제 와? 어디 갔다 왔어?”
“아, 네……. 안녕하세요?”
“응. 나야 뭐. 그런데 아가씨 친군지 뭔지……, 어제 밤새 앞에서 웬 남자가 기다리더라. 키 크고 훤칠한데……, 혹시 이상한 사람 아니지?”
“……아니에요. 좋은 애예요.”
무슨 대답이 저런가 싶은 주인집 아주머니가 적당히 끄덕거리고 올라가려다가 계단에서 큰 소리를 내며 멈췄다.
“엄마야! 이 사람이네. 또 왔어. 아가씨, 친구 맞아?”
“아……, 네.”
찾아올 사람이야 하나밖에 없다. 새벽 귓가를 울리던 목소리 때문에 음성으로 내뱉는 그의 감정을 한층 더 섬세하게 이해했다.
“이재이.”
지금 저 목소리는 화가 가득하다는 것도.
“아가씨, 괜찮은 거야?”
“아, 네. 괜찮아요. 제 친구 맞아요.”
얼른 문을 열자 그녀와 채 한 걸음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뒤를 따랐다. 걱정스러운지 한참 더 기다려보다가 별 소리가 나지 않자 젊은 사람들이 사랑싸움 한 모양이라며 웃고서 계단을 올랐다. 요란도 하지. 그럴 아가씨같이 안 보이던데. 하기야 저맘때 저렇게 연애 안 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제희야, 아침 먹었어?”
“아침? 넌 지금 아침 소리가 나와?”
“그런 게 아니라.”
“넌 왜 나를 못 믿어?”
“…….”
“그게 날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생각해봤어? 뭐든 너 혼자야? 내가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알고 싶은 거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그 와중에도 어디 다친 데 없나 얼굴이나 옷매무새부터 살피는 자신이 바보 같다. 나는 저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괴롭던 나날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렇게, 그렇게 날 놀리고 싶어?”
“제희야.”
“……넌 전혀 착하지 않아.”
남들이 다 열아홉의 재이를 천사같이 순한 아이라 해도 그의 눈에는 고집이 보였다. 마음에 안 들면 아주 잠시나마 뾰로통하기도 했고, 한 번씩은 눈물이 흐를까 고개 푹 숙이고 억지로 눈을 깜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