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35화 (35/48)

# 35화.

나이가 든다는 게 꼭 주름 생기고 머리 모양 바뀐다는 뜻은 아니니까. 수줍은 듯 예쁘고, 또 단정한 느낌을 말한다면 그때 그대로다.

교복 입은 예쁜 여학생 사진은 아무리 봐도 졸업앨범에 실려야 했겠지만 어쩐 일인지 형의 상자 안에 있었다.

“이제 가볼게요. 부탁 좀 드려요.”

“하지만……, 저는, 저는 이제.”

“에이, 두 사람 문제는 두 사람 문제구요. 저는 일단 부탁했으니 꼭 들어주시리라 믿어요.”

재이가 말이라도 바꿀까 겁이 난 제하는 벌떡 일어섰다. 다시 공원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주제넘게 참견은 못 하겠고,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 제하는 머리가 아팠다.

“혹시 어디 다른 데 가는 중이셨는지.”

“아……,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하루 자고 올 건데……, 혹시 제희한테 가실 거면 걱정 말라고 해주세요. 휴대전화 놔두고 가는데, 음……, 그래도 걱정할까 봐.”

“형이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뭐, 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 않죠. 경험상 우리 엄마 잔소리가 원래 하루 쉬면 잊히거든요. 대신 꼭 내일 돌아오셔야 해요!”

이제야 여유가 생겨 걸음을 멈추고 제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부끄럽다 싶으면서도 그의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제하 씨는…… 제희랑 많이 닮았어요. 형제라 그런가 봐요.”

“네에? 저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사람들이 저 보면 다 넌 어쩜 형이랑 하나도 안 닮았냐 하거든요. 우와! 신기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음 마주치던 순간부터 윤제희와 닮은 곳이 있으려나 그것만 찾았다. 이목구비는 달라도, 표정은 달라도 분명 닮은 곳이 많았다. 제하는 그 형처럼 따스하고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우리 아버지뿐인데! 하하.”

“……정말 닮았어요.”

“그럼 저야 좋죠! 솔직히 성격이 그래서 그렇지, 우리 형 잘생겼잖아요?”

“아, 제하 씨도 제가 보기엔 멋져요.”

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 둔 여자한테 멋지다 소리 듣고 간질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생각하고 일단은 마음을 가뿐히 비워냈다.

“그리고.”

“네?”

“제하 씨한테 저도 미안해요. 그날……, 그날 제가 괜히 찾아가서 제희 불러내선. 제희가 동생한테 이야기했다길래 그런 줄만 알았어요. 그리고 음……, 삐삐도 있고 하니까 별일 없겠지 그러고 말았나 봐요.”

간신히 가벼워졌다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가 머뭇거렸다. 여전히 웃음 지으며 다정한 제하였지만 순간적이나마 진지해졌다.

정말 제희랑 닮은 거 맞구나, 동생 맞구나, 또 한 번 느끼고 만다.

“그거. 삐삐……, 형 번호 몰라요. 우리 식구 다.”

“……네?”

“저희가 모르니 아마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같이 살 때 아직 고지서 날아오는 건 봤는데.”

가는 숨소리를 내고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손가락 끝에 가방이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지금 재이 씨, 아니, 재이 누나 얼굴 보니까……, 그래도 한 사람은 아는가 봐요.”

잠들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했으니 그 피곤은 고스란히 안고 가야 했다. 월드컵으로 얻은 임시공휴일에도 그는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고 이제야 자유를 얻었다.

“너 이제 나가?”

“응.”

“아 참, 너 돈 찾아가야지. 흐흐, 얼만지 알면 놀랄걸?”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으니 급한 일 아니라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대로 병원을 나서다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한 느낌에 벽을 잡고 눈살을 찌푸렸다.

“후유…….”

재이는 그들의 6월을 꿈이라 말했다. 그 말대로 꿈에서 깨고 나니 몰랐던 피로가 모조리 몰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 꿈은 꼭 한 번이 아니었다. 이재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꿈이라 여겼던 건 열아홉의 자신이었고 지금 그는 성인이다.

다시없을 거라 놓았던 시간은 그 몸집을 키워 돌아왔고, 그로 인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희망이라는 게 생겨났다. 재이에게 지난 6월이 꿈이라면 그가 남은 모든 현실을 꿈으로 바꿔주겠다고, 재이는 남은 인생 꿈속에 살아도 좋을 만큼 착한 마음을 지키며 살았다.

조금만 더 영악하고 자신을 위했더라면.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형, 집에 잘 있는 거 같더라.」

제하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으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재이를 안고 제 맘을 달래고 싶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먼저였다. 결심한 대로 험한 길을 조금이나마 갈아놓으려면 순간의 아쉬움은 넘겨야 한다.

“당신은 요새 왜 이렇게 늦어요? 애들이라곤 다 나가 저 살기 바쁘고 당신이라도 빨리 와야죠……. 어머, 제희 너.”

아버지와 통화를 하던 중인지 어머니는 사람이 들어와도 몰랐다. 이 커다란 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신다는 건 그로서도 마음이 쓰인다.

“아, 아니요. 제희 와서. 그럼 끊어요. 천천히 와요.”

생각지 못한 큰아들의 방문에 어머니는 꽤나 놀란 모양인지 횡설수설했다. 제희가 맞은편에 앉아 잠시 침묵을 지키자 그 자랑스럽던 아들이 조금 불편해졌다. 정말 불편한 거야 자신의 마음에서 기인했겠지만, 왜 많지도 않은 아들을 불편하게 여겨야 하는지 스스로가 조금 처량해진다.

“……제하는 오늘 늦는대.”

“네.”

“아버지도 말은 빨리 온다시는데 뭐, 와봐야 알겠지.”

“오기 전에 전화 드렸습니다.”

“그래…….”

큰아들 제희는 늘 이랬다. 기억하는 순간부터 틈이 없었고 한 번씩은 내가 얘를 젖 물리고 안아 키운 것이 맞았던가 헷갈렸다. 속 깊은 아이니 본 마음이야 어디 그랬겠냐만 어려운 아들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제희는 남편을 꼭 빼닮았다. 서운하던 마음은 시간이 흐르며 유전이니, 성격이려니 받아들였고, 남들의 감탄을 사는 의젓한 아들이 그저 으쓱하고 자랑스러웠다. 거기다 해를 건너 제하가 태어나 톡톡히 딸 노릇을 해주며 평범한 육아에 대한 갈망을 대신 채워주었다.

그러는 새, 제희는 홀로 저만큼이나 커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어른이 되어 있던 아이였다.

“밥부터 좀 먹을래?”

“괜찮아요. 드릴 말씀 있어서 왔어요.”

찔리는 게 있으니 자리를 뜨려 시도했으나, 제희가 다시 불러 앉혔다. 자식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고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제희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혹시 그 애 이야기야?”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라면 빨리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부모 마음이야 다 같은 거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재이입니다.”

“알아.”

“재이, 그날 만나서 뭐라고 하셨어요?”

물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다만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으니 이 이야기가 끝나면 더 멀어질까 한숨이 날 뿐이다.

“직접 물어보지 그러니?”

“말 안 할 거예요.”

“좋아, 그럼. 네가 짐작하는 그대로겠지.”

“…….”

“길 가던 사람 잡고 물어봐. 그런 애를 좋다 환영할 사람이 몇이나 있나!”

안 그래야지 했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편을 닮은 제희는 말 한마디 없이 그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죄지은 듯 몰아대고는 했다.

“그 사람들은…… 재이를 모르잖아요.”

“뭐라구?”

“재이가 어떤 앤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저는 재이가 어떤 앤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구요. 그럼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목소리도 평소처럼 무감하거나 안정되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며 수없이 생각했던 패턴이 그대로 반복되며 머리를 더 아프게 했다.

“내가 지금 다른 거 때문에 그래? 이게 다 누구 좋으라 그런 건데!”

“어머니.”

“…….”

“저는 재이 때문에 이제 좀 사람같이 살아요.”

“너.”

“재이 있어서 숨도 좀 쉬고 옆도 좀 보고 그러고 살아요. 그 애랑 있으면 남들 하는 것도 한 번씩 다 해보고 싶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걸로는 부족하냐? 원망이 가득했다.

「제 할 일은 챙겨서 하고 있어요. 성적도 떨어지지 않았구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재이에게는 절대 아무 소리 말아주세요. 늦게까지 있으려는 게 아니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건 저예요.」

열아홉의 아들은 표현이 조금 더 거칠고 직설적이었다. 늘 한두 시간 늦게 귀가하는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를, 그것도 여자친구를 가르쳐주다 늦는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저도 고3인 것을, 그만두라 한마디 했다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

스스로는 참고 참다 한 말임에도 제희는 곧바로 잘라냈다. 정 없는 애가 정 붙일 대상이 있다면 좋겠지만 고3의 불투명한 미래를 두고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 형편을 아니 더 곱게는 안 보였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그럴 거면 의대는 왜 들어갔어? 죽자 사자 고집부려 의대로 갔으면 후회할 짓을 왜 하고 다녀?」

「저는 벌써……, 더 후회할 게 없어요.」

그녀의 기억으로 2년이 넘는 시간을 주말마다 그러고 다녔다. 집에도 안 오길래 공부하는 모양이다 했는데 주머니에 버스표니 기차표가 한 주먹 가득이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에 기가 막혀 돌아서는데도 제희는 그 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대학 들어갈 무렵부터 부쩍 더 말이 없어진 아들은 꼭 필요한 말만 했었다. 그게 못내 서운하면서도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했던지라 대화가 이어질라치면 적당히 말을 돌려버렸다. 어쩌면 지금 이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신기한 일일지 모른다.

“재이 한 번만 만나주세요.”

“그날 봤잖아. 나한테 더 어쩌라고.”

“그렇게 말고, 진짜 이재이요.”

“…….”

“그 애한테 좋은 말도 많이 해주시고 같이 웃어주시고 하면, 진짜 재이가 어떤 앤지 보이실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제희가 목소리에 떨림을 담고 고개까지 숙인다. 그녀가 피할 새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아들을 꺾거나 고개 숙인 모습을 바라지는 않았건만. 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착잡해 절대로 꺼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야기 하나가 나와버렸다.

“제하 말로는……, 네가 안다고 하던데.”

긴 설명이 필요할 만큼 제희에게 엄마로서 잘못한 것이 많지는 않다. 그 아가씨 말로는 제가 가게까지 찾아갔던 거야 얘기 안 했다 했으니, 제희를 찾아 집 앞까지 왔던 그 아가씰 매몰차게 잘라낸 것만 알겠거니 짐작했다.

사탕병을 깨트렸을 때 제하에게 하던 걸 보면 집안 한번 뒤엎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몹쓸 호기심이 또 생기고 만다. 며칠 전에도 이러다 후회했는데.

“제하한테 그해 겨울쯤 들었다며? 왜 나한테 말 안 했니?”

“……제가 무슨 말을 꺼낼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요. 한마디라도 입 밖에 냈다가 어머니를 원망하게 될까 겁이 났어요.”

“넌 벌써 날 원망하고 있었잖아!”

“아니라고는 못 하지만……, 그보다는 저는 어머니 아들이고 또 어머니 역시 제가 정말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성인이 된, 그 무뚝뚝한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기분이 이렇게나 착잡하다. 그래서 주책없이 눈물이 나버렸다.

제희의 말이 정말이라면, 아마 정말이겠지만, 그건 제 나름대로의 방식이었겠지.

생각해보면 작은아들이 종알종알 재롱을 부려도 막상 무거운 짐 들면 뒤에서 받아 가는 건 제희였다. 귀가가 늦어지면 택시가 들어오지 못하는 골목 앞까지 내려와 있던 것도 제희였고, 명절 끝나고 끙끙대며 누워 있을 때 말없이 파스 사다 놓고 가는 아들도 제희였다.

“재이는, 어떻게든 찾을 거라 믿었어요.”

“…….”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한 건 알아?”

아마 모르겠지. 제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놈이라도 부모가 되지 않는 이상 이 마음을 모른다. 그리고 부모라 사람같이 살고 싶다는 아들 두고 차마 안 보겠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 들었으면 모를까, 이미 들어버렸다. 뭐하러 오늘 빈집에 처량히 혼자 남아 있었을까.

머리를 파묻고 눈물이 흐르려던 새, 제희가 먼저 다가와 그녀 곁에 묵묵히 앉았다. 이게 아마 제희가 보여주는 최대치의 공감과 위로일 것이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난 몰라. 말 그대로 만나는 게 끝이야. 만나고 나서 싫다고 할 거야, 난.”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제 엄마에게 이런 식으로 신뢰를 드러내는 놈이 또 있을까. 그 심술이 결국 그녀를 유치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내가 걔 앞에서 안 된다 하면 어쩌려고?”

“못 그러실 거예요.”

“내가 왜?”

“진짜 재이를 보면, 좋아하실 수밖에 없으세요.”

기가 차 제대로 쏘아보아도 아들은 더없이 진지했다. 늘 조심스럽던 아들 앞에서 이 정도로 화를 표현하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까마득하다.

“하! 너희 아버지도 가만히는…….”

“재이랑 있으면……, 제가 좋은 사람이 된 거 같아요. 남들이 말하는 못된 윤제희가 아니라…… 그 눈을 보다 보면 싫은 말이나 나쁜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누가 너더러 나쁘대? 넌 그냥 말이 없는 거지.”

“……저는 두 분 아들이니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분명 제 말뜻을 아시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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