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방이라는 게 없었다. 한쪽이 닫힌 공간이 방이라면 그녀는 많지 않은 옷과 책을 넣어두는 정도로만 자리를 차지했다. 조금 컸다고 작은 싱크대 앞에 이불 펴고 자면서도 비참하다는 생각은 딱히 안 했었다.
그러다 윤제희를 만나며 그런 생각이 스며났다. 원래 있던 생각이 그때야 나온 건지, 누가 그러라 꼬드긴 것도 아닌데 기다린 듯 흘러나왔다. 더 잘 살고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다.
이만하면 현실에 만족하고 잘 적응한 거라, 그래도 한 번씩 스스로가 대견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즐겁고 달콤한 맛을 너무 많이 알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세상 쓴맛 볼 때마다 이 기억에 비교해가며 불만을 품지나 않을까. 그럼 안 되는데.
“이제 정말 월드컵 다 끝났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안 끝날 줄 알았거든.”
“…….”
“나 이제 들어가볼게. 조심해서 잘 가.”
#chapter 15. 0125023952
“윤제희, 김수민 환자 들여다봤어? 소독 다 하고?”
“네. 봉합한 거 확인하고 통증 호소가 심해서 진통제 처방 새로 했습니다.”
“너무 사정 봐줄 거 없어. 수술을 하면 아픈 게 당연한 거지. 그거 가지고 또 트집 잡혀.”
“네.”
“영우 넌? 넌 인마, 어제도 일 빨리 안 한다고 간호사들 짜증 내던데 일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하고 왔는데…….”
“뭐? 하고 와? 어휴, 이걸 그냥.”
영우만 보면 씩씩거리던 의국장이 눈으로만 몇 번 벼르다 밖으로 나갔다. 잔뜩 쫄아 눈치를 보던 영우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아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돈 날린 게 내 잘못이야? 안 그러냐?”
“…….”
“하기야 네가 내 맘을 어떻게 알겠냐? 우리 지우 히메가 날 위로해주겠지. 흐흐.”
바깥 눈치 봐가며 소리 죽여 켠 TV였지만 다른 말소리가 없는지라 그만하면 들을 만했다. 휴대전화만 들고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제희의 귀에도 그 울먹거리는 음이 그대로 머물렀다.
-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아도 돼.
영우는 울먹이는 최지우의 미모에 감탄했지만 그는 그 말에 공감해 눈을 감았다. 드라마 보면서 이런 기분이 든다는 게, 누구를 비웃을 일이 아니었구나.
그는 정말인지 누군가의 축복 같은 거 원한 적도 없다. 남들 시선이나 생각이 자신보다 중요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재이와의 관계에 한해서라면, 받아보고도 싶다. 제 스스로 남들 칭찬 듣고 웃을 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좋은 소리만 듣고 밝은 생각만 하길 바랐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릴 말이라도, 재이가 나아가는 걸음걸음에 돌덩이는 치워놓고 평탄하기를 바랐다. 꽃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 아이이니 제 신발이 닳아 없어질지언정 험한 일은 모두 막아주고 싶다.
“제희 넌 뭘 하루 종일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어? 재이 씨 전화 기다리냐?”
TV 속 주인공들의 결혼식이 중간에 깨지자 괜한 짜증이 제희에게로 향했다. 아는 것을 보고 또 보고 하면서도 볼 때마다 감정을 싣는다. 그래도 같은 결말을 두고 매번 안타까워하는 영우가 그다지 밉지는 않다.
“누가 보면 너 휴대전화랑 연애하는 줄 알겠다. 내일까지 나가지도 못하는데 뭘 벌써 그래?”
“알았어.”
“싱거운 놈. 말도 없는 놈이 휴대전화는 죽자 사자야. 그러고 보니까 너 우리 과 동기 중에서도 휴대전화 제일 먼저 사지 않았냐? 은근히 사치스럽다니까. 하여튼 나가자.”
가운을 챙겨 입고 손 안에서 달궈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재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바빠서 미안하다는 문자 한 통이 다였다. 정말 미안한 그에게 미안하다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밉다. 그러면서도 그 약한 마음에 이 정도 단호하게 구는 속이 얼마나 아릴까 안쓰럽다.
그 생각에 헤매다 다 커서 드라마 대사 하나에 울컥하고 마는 자신도 안쓰럽고.
이렇게 안쓰러운 사람들끼리 얼른 만나 위로하고, 또 위로받고 싶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씁쓸함을 삼켰다.
이재이, 네가 날 깨웠잖아.
그 밑바닥에서 사람 사는 데로 끌어올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가 널 축복해줄게. 그걸로는 안 될까? 난 누구보다 진심이잖아.
- 뭘 어쩌겠냐……. 그래도 애썼다.
전적의 불안함도 있어 이번에는 결국 엄마와 통화를 했다. 재우가 잘 도착했다 소리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 칭찬도 들었다. 어떻게든 좀 다잡아 데리고 있지, 소리가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스럽고 피곤 가득한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말에서 이미 재우가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짐작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미처 말리지 못했던 것은, 아마 너무 피곤해 그럴 힘조차 없었거나 그럼에도 기대를 했기 때문이겠지.
왜 사람은, 뻔히 짐작하는 결과를 두고도 매번 눈을 빛내게 될까.
거기에 발 담근 내가 과연 엄마를 비난할 수 있을까.
윤제희는 오늘 하루도 쉴 새 없이 전화를 했다. 손으로 닿는 것에나 뜨거울 줄 알았던 남자가 그녀의 휴대전화도 달궈놓았다. 오는 전화를 받지 못하면서도 그 휴대전화를 놓지는 못해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나는 간신히 버텨내려는데, 너는 왜 나한테 기대를 하게 만들어?
누군가한테 들은 기억에, 쓸데없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가장 잔인한 사람이라 했는데. 그렇지만 이미 자신은 제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녀에게 제희는, 이런 손도 예쁘다 말해주는 유일한 남자였다. 말수도 많지 않아 그 한마디가 더 신빙성을 주는 따스하고 좋은 남자였다. 제 자신만 그걸 알아 몰래 열어보는 보물상자 같은 설렘을 주는 그런 남자였다.
“어, 영미야.”
- 어? 어떻게 난 줄 알았어? 너 발신자 표시 안 하지 않았어?
“그냥. 이번에 했어.”
매번 울리는 같은 전화벨조차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설렘도 이렇게 끝이 났다. 정작 제희가 ‘왜 그리 전화를 조심스레 받냐?’ 멋모르고 투정할 때는 웃으며 버텼는데 이런 식으로 그 고집도 끝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전화를 반겨달라 그리 말했을 텐데 반대가 되어버렸다.
- 너 일요일인데 뭐 해? 우리 집 안 올래? 엄마가 음식 많이 해놓고 어디 갔거든. 내일도 임시공휴일인데 여기서 자고 가.
“어쩌지? 나 갈 데가 있어서.”
- 어디 가려고? 아……, 남친? 아우, 좋겠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서 영미의 웃음기 어린 질투를 듣고만 있었다. 그냥 혼자만 알고 지낼걸, 구름 위로 떠다니느라 무엇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을 못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유난인가 싶다가도 이 집에서 하루나마 벗어나 있고 싶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현관에서 휴대전화도 내려놓았다. 제희의 번호가 뜨는 화면이 그녀를 나약하게 할까 벌써 겁이 난다.
파란 칫솔 하나, 수저통에 반짝거리는 새 수저 한 벌, 깨끗하게 빨아놓은 회색 양말.
그의 말대로 좁은 집이라 그런지 잠깐 옮기는 걸음에도 제희의 체취가 가득이다.
“저기, 이재이 씨?”
그와 닮은, 그리고 닮지 않은 남자가 계단 아래서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이제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역시 괴롭다.
그의 가족에게서 그의 흔적을 찾게 되는 건.
동생의 이름은 제하라고 했다. 어떤 한자를 쓰는지 몰라도 시원한 웃음을 보며 혹시 ‘여름 하’ 자를 쓰지는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저, 재이 씨?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초면에 누나라고 할 수도 없고. 하하.”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모습에 마음을 한결 놓으면서도 저를 찾아온 의도를 알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차마 좁은 집에 들일 수 없어 집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앉자 제하가 먼저 달려가 캔커피를 사왔다.
“아, 죄송해요.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아니에요. 제가 너무 갑자기 왔죠. 그럼 다음에 사주세요.”
말도 잘하고 잘 웃는 그의 동생이 신기했다. 제희도 환하게 웃으면 이런 느낌을 주려나.
옆으로 앉은 탓에 얼굴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 꽤나 안타깝다.
“저……, 제희 일 때문이라면 그건 제가.”
“네? 아! 아닌데요? 형 일은 형이 알아서 해야죠. 저희 원래 그런 거 노 터치거든요.”
오해하지 말라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심각한 표정 같은 건 전혀 없어 가만두어도 혼자 이런저런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겸사겸사 왔어요. 형 심부름도 좀 하고, 저도 부탁드릴 것도 있고…….”
“네? 심부름이라면 무슨?”
“그냥 잘 있나 보고만 와달라고 했어요. 형이 오늘 못 나온다고, 전화 안 받는데 집에 잘 있는지만 확인해달라고 했어요.”
그녀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던 시선이 이탈리아전 응원을 하던 날 제희와 앉았던 어딘가에 가 멎었다. 제집뿐 아니라 그사이 참 많은 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형이 저한테 부탁 같은 거 하는 게 거의 처음이거든요. 사실은 두 번짼데……, 처음 걸 제가 못 지켜서 이번에는 들어주고 싶었어요.”
민망한지 제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원래 웃음이 서린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로 시선을 끌었다.
“아주 예전에……, 형 고3 여름방학 때요, 원래 그런 거 잘 기억해두진 않는데 제 생일 며칠 후였거든요. 여름에 태어난지라.”
역시 그랬구나, 처음으로 재이가 살짝 미소를 짓자 제하의 가슴이 괜히 쿵덕거렸다. 자신은 형과는 통하는 점이 없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형이 정말 늦게 들어온 날이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 형이랑 같이 마당에 있었어요. 갑자기 형이 나가야 하니 집에 아무 말 말아달라 했는데, 너무 늦게 들어오고 엄마 아빠도 걱정하고 그러셔서……, 그래서 어떤 예쁜 누나가 불러서 나갔다 말해버렸어요.”
“아…….”
“저는 어렸을 때도 형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말 들어야겠다 했는데 엄마 놀란 거 보니까 겁도 나고 해서. 음……, 그렇게 돼버렸어요.”
그날의 일이라면 그녀가 가장 소중히 묻어둔 기억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 기억 한 자락 가져갈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꼽을 만큼 비할 바가 없었고, 그 때문에 대전에서의 시간이 더 힘들었었다.
“하여튼 뭐, 그거야 형한테 사과할 일인데, 재이 씨한텐 이거요.”
“이게 뭔지…….”
“최대한 비슷한 걸로 사왔어요.”
제하가 처음부터 들고 왔던 예쁜 종이가방에서 커다란 병을 꺼냈다. 어찌 같은 것을 찾겠냐만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하던 병사탕과는 모양도, 크기도 달랐다. 단 하나 같은 것은 그 위에 달린 리본 하나라, 갈 데 없는 손이 그 리본의 끝을 매만졌다.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 리본이다. 눈앞이 아무리 방울져 아른거려도 제희의 손이 그렇게 섬세히 닿았던 리본을 잊을 리 없다.
“제가 사실 형이 이거 받아 온 날 깨트려버렸어요. 얼마나 세게 닫아놨던지 뚜껑이 안 열려서. 수능 전이라 친척들도 워낙 많이 줘서 별생각도 없었고, 형도 집에 없어서 엄마가 다친다고 다 치워버렸죠.”
“…….”
“그런데 그날 형 와서는, 어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저 혼내시던 아버지까지 나중엔 형한테 큰소리 내시고.”
정말이지, 그때 제하는 심각한 걸 몰랐다. 형의 방에 수없이 쌓인 선물 중 가장 작고 볼품없는 사탕병 하나였을 뿐인데. 저거 하나 정도는 표도 안 나겠지 싶어 병을 흔들어대다 놓쳤다. 와장창, 깨져버린 조각들 사이로 색색의 사탕이 한순간에 도망가버렸다.
「엄마, 어떡해?」
「뭘 어떡해? 치워야지. 너도 참 애가!」
따로 말할 생각도 안 했다. 무심한 형이 설마 저걸 알아채려나 했는데, 방에 들어간 지 1초도 안 돼 다시 나와선 고함을 질렀다.
「……너야?」
이를 악물던 음성에 겁을 먹어 그대로 도망쳤다. 어머니가 말리고 아버지가 화를 내고, 그리고 그는 이해를 못 했다. 진작 봉투에 넣어서 버렸다는 말에 기어이 달려 나가 쓰레기 더미에서 이 리본 하나 모셔온 형은 밥도 안 먹고 방에 들어갔다. 유리에 스친 건지 피가 송골송골 맺혀서도 리본을 꼭 쥐던 손이었다.
그날 이후 어렵던 형은 더 어려워졌다. 분명 큰소리도 내지 않고 그만하면 잘해준 걸 텐데 같이 사는 동안 그 간격을 못 좁혔다.
“그날 재이 누나, 아니다. 재이 씨 봤을 때 이제는 빚 좀 갚으려나 했어요. 어제 본가에서 형 방 뒤져서 상자에서 이것도 찾아내고. 알면 또 죽겠네요, 하하.”
“……그럼 제희한테 직접 주시지. 이미 제희 줬던 건데.”
“아시잖아요. 형이 원한 건 이런 사탕병이 아닐 거예요. 재이 씨 손으로 주는 사탕병이겠죠.”
말없는 재이는 무척 단아하고 고왔다. 어제 형 방 깊숙한 곳에서 손대지 말아야 할 상자를 뒤적거리다 발견했던 사진과 변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