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제하가 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대답이 얄미운지 살짝 뿌리치고는 거실로 돌아와 바로 등을 붙였다. 9년 전 그녀를 보았을 때 아이답지 못한 슬픔이 묻어 있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또 거짓 없는 눈이 아이 같기만 하다.
「애한테 할 소리는 아닌데 난 네가 달갑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둘 다 학생이잖니. 더군다나 넌 여학생이고. 학교에서 보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걸로 끝이었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녀에게도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아들과 동갑인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잘한 행동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약 재이가 여느 또래처럼 적당히 철없고 어른 봐도 별 예의랄 것 없이 가볍게 굴었다면 그런 소리도 안 꺼냈다. 제 아들을 아니까,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에게 큰맘 없을 것을 아니까.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제희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저 도와주느라…….」
하지만 그게 아니라 더 불길했다. 눈이 몹시 맑았고 태도도 차분했다. 속에 어른이 앉아 있는지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다만 푹 숙인 얼굴이 붉어져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꼭 오늘처럼.
“제하야, 물 한 잔만.”
작은아들 제하는 애교가 많았다. 아들임에도 눈치를 보게 만들던 제희와는 달리 늘 그녀의 편을 들어 즐겁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아들마저 컵을 건네주는 손길이 불퉁하다.
“엄마, 형 손님이에요. 형이 경솔하게 아무 여자나 집에 들이는 사람 아니잖아요.”
“누가 뭐래?”
“그러면 안 되셨어요.”
제하가 마주 앉아 바라보는데 어딘가 뜨끔거렸다. 장난스럽고 살가운 아들이지만 저렇게 들여다보는 눈빛은 제 형과 닮았다.
“네가 뭘 알아?”
“엄마, 아까 그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지만 누군지 알아요. 알 거 같아요.”
“뭐?”
“사탕 주인 맞죠?”
“그게 기억나?”
기억 안 나면 그게 바보다. 동생이 아무리 제 앞에서 까불거려도 ‘싱거운 놈.’ 하고 말던 제 형이 깨진 사탕병 앞에서 분을 쏟아내다 그 손에 피까지 냈었다.
“사탕 하나 먹다가 목숨 날릴 뻔했는데 그걸 왜 몰라요? 그날 형이 살인 한번 내나 했는데.”
“……넌 무슨 애가 심각한 걸 모르고.”
“진짜 심각한 걸 모르는 건 엄마세요.”
“기가 차서 원…….”
“그리고 엄마. 진짜 그분 맞다면……, 형 알아요.”
“뭘?”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불안이 깃들었다. 곤란하고 안쓰러움이 든 제하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다. 그 눈이 자신을 향한 건지, 제 형을 향한 건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저야 잘 모르지만……, 집 앞에 왔던 날을 말하는 거라면, 형 그거 알아요.”
먹는 것에 큰 취미를 못 느끼던 제희라 먹을 걸 사자고 줄까지 서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그것도 주로 여자들로 이루어진 긴 줄에서 몇 번씩 앞을 넘겨다보았다.
“자, 몇 개요?”
“여섯 개요.”
“한 사람에 세 개씩밖에 못 사는데…….”
그런 대화가 귀에 들릴 때마다 초조했다. 하나씩 모두 사면 좋은데 수북하던 고로케 더미 중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종류도 있다. 눈대중으로 그의 앞에 자리한 사람 수를 훑고 계산을 해본다. 다른 건 괜찮은데 카레 맛은 영 아슬아슬했다.
“으음……, 카레 할까? 카레요. 아니다, 치즈요. 치즈 주세요.”
하아,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괜히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어이가 없다면 ‘끝내주는 고로케’라는 영우의 한마디에 퇴근길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부터 짚어봐야 했다.
“야아, 우리는 하나만 살 건데 너무 오래 기다리잖아. 그냥 갈까?”
“여기까지 기다렸는데 하나만 맛보자, 왜.”
그의 바로 앞 여자들이 소곤대는 소리에 그의 귀가 번쩍 틔었다. 아는 여자라도 말 한마디 걸기가 천금같던 그가 재이를 위해 체면을 버렸다.
“저, 죄송합니다만…….”
무심히 돌아본 여자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잘생긴 외모에 한 번, 그 내용에 두 번, 세 번 놀라 자기들끼리 팔을 꼬집고 난리가 났다.
“세 개씩 아홉 개 주십시오. 종류별로 모두 넣어주시구요.”
“한 사람에 세 개씩인데요?”
“여기 세 사람입니다.”
그가 돌아보자 젊은 아가씨들이 그의 말이 맞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스럽게 봉투를 건네받자 곧바로 하나씩 다시 꺼내 아가씨들에게 들려주었다.
“감사드립니다.”
“뭘요. 저희도 공짜로 하나씩 얻어먹고. 저기, 음……, 이것도 인연인데 다음에는 제가.”
“아닙니다. 덕분에 애인이 맛있게 먹을 것 같습니다. 그럼.”
무안함 반, 부러움 반 속에서 그림 같은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그의 바쁜 발걸음은 1층 정문으로 향하다 어느 연인들의 뒷모습에서 그대로 멎었다. 망설임 한번 없는 발걸음이 이끌리듯 매장으로 들어가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유리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그가 아는 보석이라곤 색으로 구분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보다는 재이의 손에 어울릴 만한 것만 눈에 들였다. 그러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매장 가장 안쪽에 있는 가는 반지 하나였다.
보석이 크지도 않고 주변의 반지들에 비해 화려함도 덜했지만 그래서 더 눈이 갔다. 떠올리면 가슴 아픈 그녀의 손을 부조화나 위화감 없이 빛내줄 것만 같다.
“한번 보여드릴까요?”
“……아니요. 같이 와서 보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거 안 사도 된다는 재이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녀가 소망하고 기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지, 그녀의 말을 듣기로 결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게 어떠냐?’ 하고 물으면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거 참 예뻐.’라고 할 재이의 대답을 짐작해버렸다. 오래 두고 볼 반지는 하나하나 다 껴보고 눈총을 받더라도 제 손으로 직접 고르게 하고 싶다.
웃음이 난다. 사다주면 분명 고개를 저으며 어쩔 줄 몰라 눈을 크게 뜨겠지. 구매욕이라는 게 없는 그가 몇 번 지갑에 손을 대다 말았다면 벌써 말 다 했다.
자신은 이제 재이를 이만큼이나 잘 알게 되어버렸다. 오늘은 뭘 해놓고 기다릴까 생각하다 손에 든 고로케가 식을까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백화점 밖에는 터키전을 보려는 인파들이 끝도 없다. 그 붐비던 백화점 안이 차라리 한적할지도 몰랐다.
「나 고로케 정말 좋아하잖아. 간 김에 많이많이 사와. 응?」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변형된다. 애교스럽게 사근거리다가도 또 달리 생각하면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는 수줍음이 보였다.
“이제 월드컵 진짜 끝나네.”
“에휴,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우울하다는 건, 분명히 아는 감정인데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재이를 놓치고 나서는 하루하루 마지못해 살았다. 그냥 숨이 쉬어지니까 살았다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3년 정도 그녀를 기다리며 찾을 때는 우울하다기보다는 화가 나고 초조했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모든 것에 무감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또 때로는 취미생활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그의 감정선은 한 지점에 고정되어 좋은 것을 몰랐다. 대신 싫은 감정이 쌓여갈수록 그 기준이 점점 내려와 어느 순간 그의 희로애락은 깊은 바닥에 닿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재이를 다시 만난다 해도 설렐 거라는 장담도 못 했다. 그런 감정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번 맛본 감정을 강제로 뜯겼을 때의 상실감이 더 무서워서.
그런데도 그 늪 같은 밑바닥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이 혹여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재이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의 모든 감정을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재이였다.
[지금 다 와가. 조금만 기다 |]
문자 보내는 시간도 아까워 봉투를 손에 꼭 쥐고 달렸다. 오늘로 한국은 유례없던 축제가 끝나겠지만 자신만은 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그녀와의 시간을 꿈꿨다.
“이재이!”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소리를 높였다. 옆집에서 나오던 여자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불렀다. 집 안에 있을 텐데, 불안한 나머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차에 문이 열렸다.
“형.”
맥이 다 풀렸다. 형제간 우애가 별달리 나쁜 것도 아닌데 기대하는 인물이 아니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너 어쩐 일이야?”
“엄마 와 있어.”
“…….”
“안에 엄마 계셔.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감정을 잃은 대신 상황 판단이 빨라졌다. 다시 만난 재이 덕에 웃고 산다고 해도 그 판단력을 잃지는 않아 바로 거실로 들어섰다.
“제희야.”
어색하게 웃는 어머니를 보니 목울대가 표 나게 출렁였다. 뜨겁게 마른 입술이 힘겹게 열린다.
“재이는요?”
“너, 무슨.”
“재이 어딨어요?”
잠깐의 정적으로 재이가 어머니와 만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당황한 어머니가 따라 나오며 그를 잡았지만 아들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칠게 뿌리치지 않는 게 다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잡았을 때 겨우 입을 열었다.
“재이 찾아올게요.”
“윤제희!”
“재이 여기서 저 기다리기로 했어요. 약속 잘 지키는 애니 어머니가 평범하게만 대하셨더라도 여기 있었겠죠.”
이제는 제하가 어머니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평화주의자였고 집안이 조용한 게 좋았다. 그래서 때로는 원치 않게 딸 노릇까지 하며 어머니의 비위를 맞췄지만 지금은 편을 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쟤 왜 저래? 저 할 말만 하면 다야? 나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니? 무슨 아들이란 놈이!”
“엄마.”
형은 자신과 달라 과묵하고 진지했다. 그런 형이 무섭다 느낀 적은 딱 두 번이었는데 오늘이 그 두 번째였다. 꼭 따지자면 자신은 형보다는 어머니였지만 그건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상냥하고 옳고 그름을 잘 아는 자신의 어머니일 때 그랬다. 지금을 보자면 그가 아는 어머니와는 많이 다르다.
“형이 왜 그런지 아시잖아요. 엄마 아들인데.”
“하아……, 누가 보면 늘 나만 나쁜 사람이야.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실망과 화가 섞여 한숨을 내뱉다 생각이 바뀌었는지 부엌으로 갔다. 성가시다는 눈으로 냄비를 보다가 뚜껑을 열자 김치찜 위에 맺힌 거품이 쑥 가라앉는다.
“와, 이 누님 요리 좀 하시는데?”
“너 조용히 좀 해. 엄마 지금 농담 들을 기분 아냐.”
복잡한 심경을 내려놓는다면, 그야말로 정성이 한가득이다. 송송 썬 대파와 나란한 팽이버섯, 커다란 김치포기 속에 켜켜이 자리한 돼지고기도 눈에 띈다.
육수까지 따로 냈는지 멸치와 다시마도 젖은 채 사기그릇에 담겨져 있다. 그냥 듬성듬성 손 가는 대로 마구 넣은 모양새가 아니다.
“하아…….”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자의든 타의든 30년간 요리를 해왔지만 별것 아닌 음식에도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오직 주부라 그걸 알았다.
어쩌다 이런 호기심이 들었을까.
뚜껑을 열어본 저를 뒤늦게 후회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가슴만 무거워졌다.
멈춰 서 있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디 들어가 있으려 했는데 가게 간판이 뿌옇게 보여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사람 빈자리만 찾아 걸음을 옮기다 입술 꾹 깨물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 정류장에 서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은 드물어도 목청은 높아 똑똑히 들렸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오르는데도 인적 없고 어두운 골목은 독방만 같았다. 처지는 게 싫어 아무런 감정 없이 들리는 대로 따라 되뇌었다.
‘대한민국.’
그러고 보니까 아직 월드컵 안 끝났구나.
결승까지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하루는 더 남았을 텐데.
“으음……, 음.”
울음을 꿀꺽 넘겼다. 혹독하게 사회생활 처음 경험할 때는 이보다 더한 소리도 숱하게 들었다.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까지 수없는 시도를 하며 덮고 또 덮었다. 그런데도 그 파동이 너무나 커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말도 여전히 남아 있다.
◇ ◆ ◇
제희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따로 인사를 드린 것은 아니었고 제희가 특출하다 보니 이런저런 일로 학교에 자주 오셨다. 교무실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상담 중인 제희 어머니를 보고는 어쩔까 망설이는데 선생님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우리 반 부반장이에요. 그나마 얘가 우리 반에서 제희랑 제일 친할 겁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재이입니다.”
“……그래요. 예쁘게 생겼네.”
그게 다였다. 의례적인 따스한 말 한마디조차 이어지지 않자 선생님이 민망했는지 그녀를 먼저 올려 보냈다. 그래도 그녀는 좋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보며 예쁘게 생겼다는 칭찬을 떠올렸다.
정말 그런가?
그리고 거울 속으로 창가에 기대 있던 제희와 눈이 마주쳤다. 너 뭐 하느냐는 듯한 눈빛에 괜히 거울 위 먼지를 쓸다가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나 너네 엄마 봤는데 나한테 예쁘다고 하셨어. 넌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닌데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왜였을까. 엄마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소리라 그런지, 아니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제희 어머니라 그런 건지. 그닥 따스하게 건넨 말도 아니었는데 괜히 신이 났었다.
“나 아까 교무실에서 너네 엄마 봤어.”
“……그래?”
“응. 정말 미인이시더라.”
그가 답을 채점하고 있을 때 조용한 시간이 아까워 말을 걸었다. 잠깐 고개를 드는 제희의 눈빛은 뭔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너한테 뭐라고 하셔?”
“응? 아니……, 별말 안 하셨어.”
‘나한테 예쁘대.’ 이 말은 안 나왔다. 대신 또 얼굴이 빨개져 펜을 찾아 들었다. 두근두근, 마음이 딴 데 팔려 있어 아는 문제도 여러 번 틀렸고 그만큼 제희의 불만도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