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어느 순간, 이건 아니구나 싶으면서도 딱히 진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이제는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래를 결정지을 만큼 강력한 계기나 동기가 더 있을 리가 없다. 사람에게 그런 강렬한 계기는 일평생 한 번이면 족했다.
“나 많이 힘들었다구.”
“어, 그랬구나.”
이재이는 자신에게 심심하다, 무뚝뚝하다 했지만 그가 보는 이재이도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 고요함이 참 좋다.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이나 몸짓에 거짓이 없는 아이라 꼭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원래 의대생들 힘들다고 하더라.”
피식, 그가 웃었다. 제 딴엔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긴 한데 영 어색하다. 고맙게 병원 앞까지 그를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다그쳐 몰아대고픈 마음도 든다.
“택시 타고 가. 이리 와.”
정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와 택시를 기다리는 줄로 그녀를 이끌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다 보니 9년 전 여름날에 그가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얼마나 보내기 싫었는지 병원 앞 벤치에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시험을 비관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줄 알았다며 울고 계셨다.
혹시 지금은 그녀가 그 마음이 아닐까, 겪어본 바로는 그건 정말 힘든 일이라 그 마음으로는 못 보내는데.
“나 병원 들어가지 말까?”
“아우, 뭐야.”
“나 가지 마?”
“아니. 가야지. 무슨 소리야.”
다 커선 웬 투정일까 싶어 그를 밀어냈다. 그러면서도 밀려나지 않는 굳건한 그에게 한번 기대보고도 싶다.
“반장, 나, 예전에 우리 아빠 병원에 있을 때 말이야.”
“……응.”
“그때 의사선생님이 흰 가운 입고 다니고 하면 되게 좋아 보이더라. 대단해 보이고, 멋있고.”
“멋있어?”
“응. 너 전에 병원에서 가운 입고 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 정말 잘 어울린다고. 넌 진짜 의사가 딱이구나 그랬어.”
갑자기 여우가 된 건 아닐 텐데 이재이는 진지해서 더 사람을 홀렸다. 그는 무엇을 선택하든 늘 최선을 다했고, 어느 시점이 되자 의외로 이 길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어느 사소한 만남이듯, 그것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도 아주 사소한 한마디였다.
멋있다는데, 이 애교 없는 여자가 멋있다는데, 그가 할 말이야 하나밖에는 없다.
“그럼 들어가볼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이제는 조금 자연스러웠다. 외우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의 삐삐 번호도 단번에 외웠으니 네 자리 숫자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건 머리가 좋거나 암기력이 뛰어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밥해줘.]
도대체 이 문자는 언제쯤 서민스러워질까, 그러면서도 손은 쌀통부터 연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해놓고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다시 만나 제희의 곁에 있게 될 것을.
그를 만난 지 한 달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웃었던 것이 지난 9년의 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 기억과 마음을 확인하는 데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긴 건지, 짧은 건지 모르겠다. 더 길어도, 혹은 더 짧아도 그저 좋을 것만 같다.
[빵 사갈까?]
윤제희는 늘 이런 식이다. 제가 할 말을 먼저 해버리곤 늘 뒤에 사탕을 쥐여준다. 자신도 늘 그런 식이다. 그 사탕 받고 나서 ‘어휴.’ 하고는 웃고 만다.
가져온 재료를 꺼내 손질부터 하고 전에 썼던 도마도 내렸다. 그사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희는 은근히 편식을 했다. 기름진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고기도 삼겹살은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게 생각나 지방이 별로 없는 목살도 풍미가 날 정도만 남기고는 기름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고로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제희의 말은 아마 정말일 듯하다.
- 왜 답이 없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불만이 쏟아지니 그녀도 놀라 동작이 멎었다.
“뭘?”
- 빵 사갈까 물었잖아.
“무슨. 오늘 터키전 한다고 사람들 넘칠 텐테 어디서 빵을 사와?
- 빵 싫어해?
사주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는데 진짜 괜찮았다. 솔직히 빨리 와서 얼굴이나 더 봤으면 좋겠는데.
“싫은 게 아니라 뭐하러 고생을 해? 내일부터 사람 빠지면 그때 사 먹지. 그리고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
어깨로 휴대전화를 받쳐놓고 가스레인지를 돌아보니 벌써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 불을 줄여놓고 다시 도마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고쳐 들었다.
“반장?”
말이 없다. 끊긴 건 아닌데 전화로 말이 없다는 건 정말 최고로 쓸데없는 상황이었다.
- 빵 먹어. 고로케 정말 유명한 데 있어.
“응?”
난데없는 빵 타령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왜 오늘따라 자꾸 빵이야? 고로케 그제도 먹었잖아.”
- 그래서, 고로케 별로야?
“그건 아니고. 그런데 왜?”
- 나 벌써 줄 서 있거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불만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그 웃음에 멎었다. 윤제희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 기억 역시 변하지 않아 한결같은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래, 그럼 잘됐다.”
- 뭐가?
“난 미안해서 그랬지. 나 고로케 정말 좋아하잖아. 간 김에 많이많이 사와. 응?”
알았다는 대답이 없어도, 지금쯤은 다시 미간의 주름이 사라졌겠지.
난 한 달간 너를 이렇게 잘 알게 됐어. 너는? 너는 날 얼마만큼 알까?
이렇게 또 한 번의 웃음이 더해졌다. 9년의 틈도 한 발짝 더 좁혀졌고. 즐거운 생각에 파를 썰던 손놀림이 더 빨라져 가늘게 총총 썬 파가 냄비 속에 마지막 색감을 더했다.
삐삐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뚜껑을 덮자마자 놀란 숨을 들이켰다. 제희는 자신이 집에 있을 때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그 조용한 애가 복도가 울릴 만큼 ‘재이야, 문 열어줘!’ 이렇게 자신을 불러냈다. 불안감이 가득 차올라 어쩌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형한테 바로 가지. 집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형 오면 또 나가야 되잖아요.”
“걔 언제 올지 알고. 집도 좀 치워놓고 기다리지.”
“얼마 전에도 왔다면서 왜 요새 형을 찾아요, 엄마는?”
“그런 게 있어. 너도 챙길 거 있다며 그거나……, 아.”
제희의 가족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9년 만에 보는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쳐다보았다. 놀란 거야 당연하지만 절대 반기는 눈빛이 아니다.
“엄마, 주방에서 뭐 해요? 아아, 놀라라…….”
“…….”
“저기, 누구신지?”
“아……, 안녕하세요. 이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들 말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앞치마를 풀어놓고 거실로 나와 그의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실 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숫기 없는 성격에도, 이런 때는 인사가 입에 붙은 일을 한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
“어, 형 여자친구세요? 하하……, 저희도 몰라서 그냥 왔다가. 아, 민망하네.”
“아니에요. 제가 괜히.”
“형이 병원에 있음 전화도 잘 안 되고 해서. 어, 여기 앉으세요. 엄마, 인사하시는데 왜 그러고 계세요?”
대답 없이 물끄러미 그녀만 보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자 그녀에게는 그게 곧 대답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제희를 기다리던 고소하고 얼큰한 향이 맵게 느껴져 가스레인지부터 끄고 나왔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붉어진 얼굴을 얼른 수습하고 옷과 가방부터 챙겼다. 재이의 손이 닿는 곳에 그의 어머니의 시선도 따라붙다가 낡디낡은 가방에서 멈춰버렸다.
“에이,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형 오면 같이 봐요. 저희 때문에 불편해서 그러세요?”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가족분들 오실지 몰라서…….”
“엄마, 뭐라고 말 좀…….”
그러지 말라고 동생을 향해 애써 웃었다. 마주 웃는 어색함 가득한 얼굴이 어머니를 신경 쓰는지 난처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아가씨, 저 알죠?”
“……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해요.”
#chapter 14. 안 끝날 줄 알았어
그녀가 신발장으로 다가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분이, 막 발을 꿰어 넣으려던 차에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엄마 알아요? 아시는 분이세요? 언제 보셨지?”
“제하 넌 좀 나가 있어. 방에 들어가 있든가.”
“에이, 왜 그러세요.”
“아가씨, 여기 좀 앉아요.”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자 가방을 내려놓은 재이가 조심스레 다가와 거기에 앉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제하가 몇 번 더 만류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딱 잘라내며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내버렸다.
“저……, 마실 거라도.”
“아가씨가 손님인데 제가 대접해야죠.”
맞는 말을 하는데도 괜히 마음이 시렸다. ‘괜히 왔다.’ 이런 생각보다는 ‘왜 벌써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의 어머니 앞이 아니라면 오늘도 여러 번 본 펜던트를 다시 꺼내 만져보고 싶다.
“이름이 이재이, 맞죠?”
“네.”
방금 전 그녀가 말해서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러나 반기지는 않는 이름이었다.
“우리 제희, 언제부터 만난 건가요?”
“아, 한 달 전에 우연히…….”
“우연히요?”
제 처지가 처지다 보니 만남마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제법 단단해졌다 생각했는데 코끝이 시큰거린다. 자신에게는 꿈 같던 나날이라, 기적 같다 생각했던 소중한 나날이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흙이 묻었다.
“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났습니다.”
“하아.”
“아, 정말입니다. 그게.”
“알았어요. 그렇다고 해두죠.”
자신의 대답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주 무례한 말투도 아니었고 대놓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럴 만큼 잘못한 것도 없건만 어쩐지 작아지는 제 모습이 초라해졌다.
“혹시 지금 하는 일 정도는 물어봐도 될까요? 우리 제희랑 만난다기에……, 그 정도는 물어도 될 거 같은데.”
“아, 네.”
급한 대로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제희에게 줄 때처럼 구겨진 것도 아니었는데 뭐 하나 묻은 것이 없나 눈이 두 번씩 갔다. 그의 어머니에게 건네자 그 얼마 안 되는 글자를 읽느라 명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나이에 대리면, 승진이 빠른 건가요? 아니면 일찍 들어간 건가요?”
“아, 일찍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길래?”
“으음……, 그게, 저, 스무 살 되고 나서.”
조금 더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마를 가만히 짚더니 명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명함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어쩐지 뿌예진다.
“반장, 아니, 제희랑은 한 달 전에 만나서. 저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니, 그건 따로 말할 거 없어요. 나도 내 아들을 아니까.”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와 닮은 점을 찾는 제 자신이 이렇게 우스울 수 없다.
“일단은 돌아가주면 좋겠어요.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의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기꺼운 것이 아니더라도 들어야 했다. 잡을 일도 없겠지만 얼른 나가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 따라 나온 부인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건넸다.
“혹시……, 예전에 그 일, 우리 제희한테 말했나요?”
아들과 관련된 일이라 여태까지보다는 훨씬 더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살짝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말 안 했어요.”
“…….”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서로 안 되는 일에 기운 빼지는 마요. 아가씨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으음…….”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요.”
“아……, 안녕히 계세요.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쿵 소리와 함께 아가씨가 사라지자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심장 뛰는 만큼 머리가 조여 어딘가에 기대고만 싶다.
“엄마.”
“……너, 들어가 있으랬잖아.”
“저 성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