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정말 좋은 애예요.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도 안 들고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전화기 속 묵음 대신에 옆에서 돈 계산을 하던 영우가 더 놀라 입을 벌리더니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솔직한 마음이니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같이 있고 싶고……, 그래야 제가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윤제희 성격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인 감정 표현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았다. 아직 어리다 믿었던 아들에게 이와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만 같다. 그래도 9년의 시간이 지났다. 혹시라도 하는 기대감을 품고서 목소리에서 애써 불안을 지워냈다.
- 너도 참. 갑자기 그런 소리 하니까 놀랍네. 어쨌든 아직 모르는 사람 두고 너무 성급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얼굴 보고 천천히…….
“아실 거예요.”
- 응?
입 무거운 그가 묻지 않아도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시간의 폭이 길기는 하지만 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의 인상에 깊이 남을 만한 한마디였다. 그의 조용한 성품은 아버지를 닮았다 들었지만 제법 빠른 감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도.
“아시잖아요, 어머니.”
끝도 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한국의 승리가 멈추자 사람들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려 노력했다. 이런 분위기를 몇 번 경험해본 사람이야 스스로를 들었다 놨다 조절이 가능했지만 최대한 몸을 낮추던 재이는 달랐다. 저도 모르게 휩싸여 하늘 끝까지 닿아버린 풍선을 끌어내리기란 쉽지가 않다.
“야, 너 또 그거 봐? 그러다 끊어지겠다.”
아직도 마음이 쿵쿵거려 셔츠 안에 살짝 넣어둔 폴라리스 펜던트를 꺼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웃음이 나 시간이 날 때마다 만지작거리자 퇴근을 준비하던 영미가 기어코 한마디를 했다. 그래봤자 평소의 재이를 알다 보니 살짝 놀리는 것뿐이다.
“아, 그냥.”
“그거 올해 초에 한창 유행했던 거 같은데. 나도 하나 사려다가 내 돈으로 사기 아까워서 안 샀는데. 너 좋겠다.”
“……이거 혹시 비싼 거야?”
“응?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닌데 우리 월급엔 세지. 그래도 넌 남친이 사준 건데 뭘 그런 걸 신경 써?”
가격 같은 건 모른다. 그래도 아주 비싼 건 아니라니 다행스러워 손에 잡히는 별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봐도 봐도 예쁘고 꿈만 같았다.
“참, 너는 맨날 내가 물으면 말 돌리고. 도대체 네 남친 뭐 하는 사람인데?”
“응?”
“그렇잖아. 나는 매번 다 이야기하는데. 너는 사람 처음 만나는 거면서 말도 안 해주고, 나 삐지려고 그래. 너 순진해서 어디서 이상한 남자 만난 거 아냐?”
“아냐, 아냐, 그런 거. 음……, 동창이야.”
“동창? 뭐 하는 사람인데?”
“어……, 의사.”
입을 벌리며 깜짝 놀라던 영미가 재이의 팔을 꼬집었다.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마음이 영 편하진 않았다.
“야아, 너 진짜 좋겠다.”
“내가 뭘.”
그녀는 의사인 윤제희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쌀쌀맞으면서도 늘 그녀를 살펴주던 무뚝뚝하고 속 깊은 그를 좋아해왔다.
“그런데. 그 사람도 너랑 동갑이면 진지하게 만나야 하는 거 아냐? 음……, 우리 나이도 있잖아.”
영미는 그녀의 친한 동료였고 질투라든가 다른 마음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저런 진지한 물음의 뜻은 모를 수가 없다. 보기 드물게 조심스러운 말투라 더욱 바로 와 닿았다.
“그냥. 잘 몰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안 되는 일을 두고 된다는 말은 못 했지만 모르겠다는 말 정도는 괜찮겠지.
재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영미가 괜한 소릴 했다며 후회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라도 한잔하자며 분위기를 띄웠다.
“야, 하여튼 시원한 거나 한잔 마시자. 너 어차피 오늘 남친 못 만난다며. 하여튼 솔로한테 술이나 사라, 빨리.”
“그래, 나가자.”
재이야말로 더 이상은 어두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높이 올라 손에 잡히지 않는 풍선도 언젠가는 내려올 텐데 애써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고 싶지도 않다.
“야, 어디 가지? 밑에 호프집 생겼던데 갈래?”
“어디?”
“여기 밑에. 어제 퇴근할 때 보니까 휴지 나눠주던데, 안주도 하나 무료로 준대.”
벌써 흥이 오른 영미가 계단을 두어 단씩 내려갔다. 재이도 뒤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며 펜던트를 다시 옷 안에 넣었다. 애도 아닌데 자꾸만 잘 있는지 꺼내서 확인해보고 싶다.
“재이야.”
“어어……, 반장.”
입구 앞에서 기대 있던 제희가 그녀를 보자마자 이름을 불렀다. 작은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임을 알았다.
“너 오늘 못 나온다며?”
“선배한테 일이 생겨서 바꿔줬어. 10시까지만 들어가면 돼.”
“아, 그랬구나. 전화하지. 어, 여기 내 직장 동료야. 전에 말했지? 영미라고.”
“안녕하세요?”
그를 보았을 때부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영미가 얼른 나섰다. 수려한 제희의 외모에 두 번 놀라 괜히 재이의 팔꿈치를 꼬집어댔다.
“저기, 그런데, 나는 너 올지 모르고 친구랑 술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어쩌지?”
“아냐, 둘이 데이트해. 아무리 솔로라도 눈치마저 없으면 되겠어?”
“그럼 같이 가시죠. 저는 술은 못 마시겠지만 재이 동료분이시라니 식사라도 대접했으면 하는데.”
제희가 그렇게 말하니 그를 보는 재이나, 또 재이를 보는 영미나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금세 흥이 오른 영미는 가는 내내 목소리를 높였고 재이 역시 조금 불안했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자신만 알고 있던 윤제희를 주변에 알린다는 것이 이렇게나 들뜬다. 나 혼자만 마음에 두고 애면글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유치하지만 알리고 싶었다. 남자나 여자나 그것 또한 본능이니까.
“야,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다음에 더 좋은 걸로 대접하겠습니다.”
영미가 닭다리를 집자 제희도 남은 다리 하나를 집어 재이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너 먹지 왜, 하면서도 그녀는 좋아 웃었다. 영미는 원래 밝고 명랑한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도 어색함 없이 잘 어울렸다. 그녀가 질문을 하면 제희가 대답을 하고, 또 재이는 그 대답에 웃기도 하고 곤란해하기도 했다.
“재이 얘는 인기도 많았어요. 영업이라 밖으로 나갈 일이 많으니까 거기서도 좋다는 남자들 많았는데. 왜 전에, 영등포에 스포츠센터 큰 거 개관할 때. 거기 사장 아들도 너 한참 쫓아다니지 않았어?”
“야, 무슨 그런 얘기를 해.”
술을 마셔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친구도 이곳저곳 모자라지 않다는 의미였다. 재이보다는 제희가 먼저 알아챘음에도, 뻔히 아는 그 고마운 의도보다는 다시는 영등포에 못 가게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는 중이었다.
“저기, 그런데요.”
“네.”
그는 심각했지만 궁금한 게 많은 영미는 그사이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냈다. 이런 걸 물어도 되나 싶다가 뭐 어떠냐 했는지 생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 주위에 의사선생님이 없거든요. 좀 신기해서……, 그런데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거예요? 하기야 성적이 되면 당연한 건가? 하하.”
재이도 모르던 일이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크게 궁금하다는 생각도 없었던 이유는, 이미 대학교라는 데에 미련 두기 싫어 모든 생각을 접은 탓도 있지만 그 전에 제희라면 전국 어디라도 모셔갈 성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희 학교는. 의대만 수의대 건물이랑 붙어 있어서요.”
“네?”
다소 뜬금없는 대답에 영미가 그게 뭐냐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던 재이는 울렁임을 억지로 삼켰다. 입 안쪽, 여린 살을 물고 있던 이에 힘이 들어가도 아픈지 몰랐다.
“아아, 원래 수의대 가려고 했는데 성적이 너무 좋아서 의대 가셨구나. 맞죠? 동물 좋아하시나 보다.”
“아뇨. 알러지가 심해서 동물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수의대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재이의 손을 꼭 잡았다. 재이가 푹 떨구었던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에 보기 드문, 엷은 미소가 배어난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래서 저한텐 갈 수 있는 데가 의대밖에는 없었어요.”
#chapter 13. 병사탕
제희가 옆에 앉아 있으면 여러모로 복잡했다. 심장이 두 배로 빨리 뛰니 쉽사리 피곤해지다가도 막상 한번 졸아보지도 못했다. 힘들게 가르쳐주는 그에 대한 예의를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아 혼곤한 상태에도 그가 옆에 있으면 서늘한 긴장이 피를 타고 돌았다.
“책은 두 번씩 풀었으니까 큰 실수만 안 하면 돼. 체크해준 건 다시 한 번 보고 계산에서 막힌다 싶으면…….”
“저기, 반장. 이거.”
오늘이 마지막이다. 교실에서야 계속 보겠지만 둘만의 수업은 오늘이 끝이었다.
“……뭔데?”
“어, 수능 잘 보라고. 이제까지 너한테 너무 고마워서…….”
몇 번을 주려고 기회를 노렸다. 요 며칠 아이들끼리 주고받고, 또 그녀 역시 몇 개의 사탕과 초콜릿을 받았지만 유독 이것만은 꺼내기가 쑥스러워 가방에만 넣어두었다.
“고마워.”
“어.”
“나는 없어.”
알아, 안다구.
바라지도 않았어, 난.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저런 소릴 하니 바라고 있던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하루 종일 고심하던 임무를 끝냈으니 하나 남은 문제를 마저 풀면 되는데 제희는 아직 어깨를 세우고 있었다.
부스럭, 그의 손에서 나는 소리가 익숙하다. 하루 종일 그녀의 가방에서 났던 소리다.
“뭐 해?”
제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건넨 봉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 있는 사탕병이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커다란 그의 손 안에서는 더욱 작아 보였다.
하지만 용돈을 따로 받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 정도도 최선이었다. 사탕 서너 알이 고로케 하나 값은 될 테니 제희에게 줄 것이 아니었다면 그런 낭비는 하지 않았다.
“……먹을래?”
입이 심심한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 큰 손이 움직이는 모양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또 지극히 섬세했다.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병을 담은 비닐 하나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뜯지, 왜.”
그는 입 대신 손으로 ‘싫다.’고 말했다. 리본이 풀리지 않게 비닐 입구를 조여 덜어내는 모습을 보다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제희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작은 생각에도 가슴이 뛰기 시작해 그 열기가 곧 얼굴로 번졌다.
“먹어.”
“어, 그래. 고마워.”
자신이 준 사탕병에서 단 하나만 꺼낸 사탕이 그녀의 손바닥에 올랐다. 먹고 싶지 않았는데 제희가 지켜보니 입에 넣었다. 표면에 묻은 하얀 사탕가루가 사르르 입안에서 녹는다.
“반장, 넌 왜 안 먹어?”
“나중에.”
제희는 처음 리본을 풀어낼 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공들여 사탕병을 넣었다. 그 위로 리본까지 다시 매어놓고서야 펜을 들었다.
“천천히 풀어.”
하나 남은 마지막 문제.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 아는 문젠데 풀고 싶지가 않다. 평소라면 시간까지 재가며 인상을 썼을 그가 그 어떤 재촉도 하지 않았다.
“……잘했어.”
아쉬움이 담긴 마지못한 칭찬.
입안에 있는 오렌지 맛 사탕은 분명 새콤해야 할 텐데, 위에 덮인 사탕가루는 녹은 지 오래일 텐데, 점 하나만큼 남아 한순간에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달콤함만 느꼈다. 1993년 1차 수능을 치기 일주일 전이었다.
“누나, 큰일 났어. 어떡해!”
“왜애?”
하굣길에 가게 앞에서 재우가 울고 있었다. 열한 살짜리 동생 입에서 상황을 설명할 말이란 기대할 수도 없는 터라 가게 문부터 열어젖혔다. 언젠가부터는 늘 이렇게 불안했고 집 안에는 아무리 지워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빠!”
당뇨로 얻은 만성신부전증으로 아빠는 전신이 부어 있었다. 눈을 뜬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빠는 먹은 걸 모두 게워내고 그 위에 누워 간신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만 냈다.
“으으……, 추워. 춥다. 재이야……, 아빠 춥다.”
응급차로 실려 가는 중에도 손을 떨었다. 기록적인 더위에 폭염 칭호를 달았던 날이다. 그런 날에 춥다는 소리만 반복하다 나중에는 이까지 덜덜 떨었다. 보고 있던 그녀와 재우도 부둥켜안고 덜덜 떨었다.
“엄마…….”
중환자실로 들어간 아빠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응급투석을 받고서야 호흡이 돌아왔다. 환자가 가득 찬 8인실 병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애가 탄 그녀가 먼저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