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26화 (26/48)

# 26화.

마치자마자 마트에 들러 잔뜩 장을 보았다. 혼자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과자나 안주거리도 사놓고 찌개라도 끓여놓자 싶어 국거리까지 샀다. 마트에서 이 정도로 과소비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일이었다.

- 대한민국!

마트 한구석에 자리한 가전제품 코너에서 일제히 축구장이 비쳤다. 독일전이 열리는 날이었으니 마트에 오는 내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오, 필승 코리아’ 노래를 들었다.

할 게 많고 혼자니 거리 응원을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끝까지 보고 싶은 마음에 얼른 집으로 돌아와 TV부터 켰다. 적응이 무섭다고 혼자 보는 TV가 어쩐지 맥이 빠져 입이 쓰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그래도 제희가 온다니 넋 놓고 있을 수가 없어 아침에 치웠던 집을 다시 치우고 찬거리도 챙겼다. 아직 그대로 남은 반찬이지만 제희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에 그 양이 확 늘어났다.

[꿈★은 이루어진다.]

우엉을 마저 썰다가 함성에 고개를 돌리자 관객석의 카드 섹션이 바로 보였다. 문장의 가운데 놓인 별 모양이 그려놓은 듯 예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와 닿는 표현이 지금 제게 또 있을까 싶어 결국 손을 씻고 TV 앞에 앉았다. 반찬이야 안 해놨다고 심술부릴 제희도 아니고 숨 돌릴 틈 없이 몸을 놀렸으니 목도 말랐다.

“아, 좋다.”

맥주 한 모금에 고개를 침대로 젖혔다. 여전히 봐도 모르는 축구는 그저 한국이 이기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주는 이가 없으니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TV를 껐다 켰다 반복했다. 심약한 가슴이 부풀어 올라 터지기 전에 적당히 조절을 해줘야 한다. 이를테면 그녀만의 생존비법 같은 거였다.

“아아아……!”

후반전 하고도 마지막 무렵에 TV를 끄고 눈을 감는데 창밖에서 커다란 탄식이 들려왔다. 몇 번의 경험상 좋은 의미가 아닌 거라 짐작했고, 과연 TV를 켜니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독일 선수가 떠 있다.

“어휴.”

윤제희가 없으니까 이렇게 되잖아. 괜히 속이 쓰려 맥주 한 캔을 더 가져왔다. 캔을 들어 고개를 넘기고, 화면 한 번을 보고. 줄어드는 시간이 그저 안타까웠다.

- 경기 끝났습니다. 그동안 잘 싸워준 우리 태극전사들에게…….

삐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과 함께 오직 승리를 향해 가던 대한민국의 월드컵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여기까지였구나. 아니, 여기까지 왔구나.

슬프다기보다는 아쉽고, 또 그보다는 뭉클했다. 수많은 관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먼저 코가 찡해져 인사라도 해주고 싶다.

정말 수고하셨고, 또 감사하다고. 덕분에 나도 평생에 잊지 못할 한 달을 보냈다고.

“나야. 문 열어줘.”

살짝 술기운이 도는 몸으로 한쪽 벽을 짚고 문을 열었다. 승리는 끝났지만 제희는 이렇게 곁으로 와주었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면서도 순간의 안도감이 그의 품을 찾아들게 만들었다.

“이재이.”

“응.”

이른 새벽에 다소 차가웠던 몸이 지금은 달아올라 있었다. 제 품에 안겨 살짝 닿는 피부에도 그의 감각이 모두 곤두섰다.

“술 마셨어?”

“응. 기다리다가 조금.”

그녀가 민망한지 그에게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려 걸음을 물리자 제희가 바로 그 입술을 앗았다. 약간의 알코올이 아직도 입에 남아 있다가 그에게 전해지는데 그 미약한 힘으로 벌써 취해버린다. 꼭 직접 술을 마셔야만 취하는 게 아니다.

“으음. 잠깐만.”

“너나 좀.”

그게 뭐냐, 웃는 틈을 타 혀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숨결을 모조리 끌어올 듯 빨아들이자 적응 못 하는 신음이 간간이 그를 자극했다.

식사를 못 했지만 그가 허기진 거야 음식에 한하지 않았고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해졌다.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하여튼 재이를 만나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

“너…….”

얇은 원피스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단숨에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멍해버렸다. 그날은 보지 못했던 하얀 레이스 브래지어가 눈앞에서 아롱거렸다.

“너 뭐야?”

“……나? 나 뭐…….”

어쩌면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 할까. 같은 레이스가 아래도 있을까 기대감 가득해 고개를 내리자 이게 또 무슨 천국인가 싶었다. 오는 내내 한국의 패배에 훌쩍이는 여자들을 보았는데 지금 그는 운다는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눈물이 다 무엇이던가.

“흐으읍.”

벗기지도 못하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대로 그러쥐었다. 낯선 감각에 재이가 몸을 뒤틀자 그대로 허리를 받쳐 작은 침대에 눕혔다.

가녀린 몸 위로 바로 올라타 귀부터 물고 늘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 같기도 한 그의 애무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그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레이스. 이거 정말 나 때문에 산 거야?”

“야, 뭐야. 뭐 그런 걸 물어…….”

“칭찬하는 거야.”

살짝 들떠 쉰 듯한 목소리에 겁이 난 그녀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꿈쩍도 않고 버텼다. 둥근 어깨에서 바로 내려온 손이 가슴 위에 머물다가 꾹 눌러 잡았다.

“으응. 왜 그래. 으으음.”

벗기기는 아깝고 그냥 두자니 만질 수가 없다. 대충 위로 올려놓고 연한 색으로 곱게 물든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벼댔다. 감촉이 보드라워 그걸 즐기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을 정도다.

“흐으응……, 아아.”

“다리 조금만.”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가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슬한 느낌을 지나 그녀의 몸 그 어느 부위보다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바로 닿았다.

이미 젖어 있는 곳에서도 자극을 참지 못해 몸을 감추려 들자 그가 한 손으로 허리를 감아 단단히 고정했다. 본능적이라도 그에게서 도망가는 꼴은 더 볼 마음도, 자신도 없다.

“으으응. 제희야……, 하으응.”

정점을 누르고 다치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손을 움직였다. 찡그리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다가 팬티 안에서 적나라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만하라는 무의미한 말 대신 그의 손을 떼어내려 힘을 주어도, 귓불을 잘근대던 그에게선 장난스러운 웃음만 터져 나왔다.

“흐음, 왜? 여기가 아냐?”

“제, 제희야. 으으응…….”

이만하면 준비는 충분하다 싶자 여유를 모두 내버린 그가 그녀의 팬티를 내렸다. 모두 벗길 시간도 아까워 발목께에 걸린 속옷에서 들려 있는 오른발 하나만 간신히 빼놓았다. 제 무릎으로 벌려놓은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다 입구를 찾자마자 그의 분신을 맞춰 넣었다.

“으음.”

분명 충분하다 했는데도 넣고 나니 빠듯해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로서는 그조차도 극한의 쾌감이라 움직임 하나 없이도 사정해버릴 것만 같다.

“흐응. 으으응……, 으응.”

“후우……, 아파?”

“……아, 아니.”

뒤에서 파고드는 느낌은 또 달랐다. 뭐든 적당히라는 건 없어 보다 깊고 적나라하게 들고 났다. 그녀 역시도 가쁜 숨을 참느라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그 틈을 탄 제희가 등으로 바짝 붙으며 제 다부진 몸을 재이에게 실었다.

척, 척, 땀에 절어버린 살결이 부딪친다.

결합의 순간은 짧게 머무를수록 그 쾌감을 더해갔다. 고개를 내릴 때마다 시야에 잡히는 선정적인 모습에 그가 움켜잡은 허리를 한층 더 파고들었다.

내일이면 자국이 남을 것 같아 아차 하면서도 그게 또 나쁘지 않다. 어차피 그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니 흔적 하나 새겨놓는 셈 치면 만족스러울 정도다.

“흐응. 아아아아.”

베개 속 억눌린 신음마저 그를 부추겼다. 힘이 빠져 매트를 파고드는 그녀의 엉덩이를 바짝 세워 올려 더 빠르게 몸을 붙여나갔다.

타악, 커다란 한 번의 동작이 그 무엇보다 강렬해 부끄러움도 잊은 그녀가 비명을 터트렸다. 그 반응은 이어진 그의 몸으로도 여실하게 전해져 전기가 통한 것처럼 손끝까지 저렸다.

이거구나. 여기였어.

그때부턴 끝도 없이 몰아치다가도, 눕혀진 몸에 정적이 흐른다 방심할 쯤엔 이렇게 강하게 그녀를 일깨웠다. 너 그렇게 마음 놓을 때 아니라고.

“제, 제희야. 나……, 으응.”

이미 현관에서 시각적인 절정을 맛본 그였다. 몸이라고 다를 바 있겠냐만 그에게는 달리 절정이 아니었다. 손목 잡혀 누워 있는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재이라는 것, 그것 하나로 모든 순간이 절정이었다. 손가락 하나 맞닿는 간지럼조차 그를 그렇게 몰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무섭다.

취기가 두 뺨 위로 살짝 올라 흐느끼는 재이를 보며, 그는 시간 안에 잡아먹히는 희열을 맛봤다.

기억은 희미한데 기분 좋은 꿈을 꾼 느낌이었다. 서향이라 덥고 더운 집에서 재이의 등을 타고 오르는 그의 손가락이 서늘하게 그녀를 깨웠다.

“반장. 으음……, 왜 안 자?”

“나랑 자자고?”

윤제희는 모든 걸 잘해도 농담에는 재주가 없었다. 진담이나 다름없고, 또 반쯤은 진실인 말에 그녀가 얼굴을 파묻었다.

이 베개가 원래 이렇게 폭신했던가.

고개를 다시 들기 싫을 만큼 나른해진다. 언제 일어났는지 몸을 세운 그가 침대 헤드에 기대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어깨와 등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림같이 고요하면서도 선정적이다.

“재이 너 축구 져서 어떡해?”

“아, 맞다. 그렇지.”

역시나 축구는 핑계였다. 웃음이 녹아 있는 제희나 이제야 생각난 재이나 심각함이란 없었다.

“그게 뭐야? 흐음……, 너 홍명보 팬이라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도 돼?”

“아, 맞다. 나 팬이지. 하하.”

재이의 웃음소리가 흐르자 새삼 그의 시선이 이끌렸다. 몸을 내려 그녀의 목 아래에 귀를 대자 공기를 통하지 않은 소리의 진동이 그에게 바로 닿았다. 맑은 웃음소리가 공명해 이내 그의 입가에도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 마. 간지러워.”

“계속 말해봐. 잘 들리나 보게.”

“야아.”

“더. 더 말해봐.”

듣고 싶은 것은 말이 아니다. 가슴 사이에 닿은 귀에는 이재이, 그녀가 들렸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는 자신 때문이 아닐까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본다.

“그래도 어쩌면 이기지 않으려나 했거든. 너무 이기니까, 진짜 이러다 우승까지 하는 거 아닌가 했었어.”

“아쉬워?”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그래도 정말 잘했어. 내가 설명을 잘 못 해서…….”

그런 거야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귀로 듣고 있었으니까.

“반장 너는 병원서 봤어?”

“아니. 어제 응급도 있고 갑자기 환자들이 밀려들어서 보다 말다 했어.”

“아! 그거였구나!”

뭔가를 알아낸 목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쨍하니 귀에 울렸다. 맞닿은 오른쪽 눈을 찡그린 제희가 벌을 주듯 허리를 꼬집자 재이가 깔깔거리며 몸을 뒤챘다.

“하하, 야아. 그만, 그만. 나는 알아낸 게 반가워 그랬지.”

“뭐가?”

“네가 안 봐서 진 거야. 그건.”

확신하는 말투에 그렇다, 아니다 따지고 싶지 않아 “아, 그래?” 하고 말았다. 간신히 찾아놓은 명당을 놓칠까 다시 고개를 숙여 귀를 꾹 붙였다.

“그러면 너 시작할 때 카드 섹션 하는 거 못 봤겠다.”

“카드 섹션? 저번 경기에도 했던 거?”

“응. 언제 다 준비했나 몰라. 신기하고 예뻐서 그 장면만 한참 봤어.”

“흐음.”

관심 없다는 투다. 그에게 신기하고 예쁜 것은 그 말을 하는 본인이었으니 다른 거야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진짠데? 진짜 예뻤는데.”

“그래?”

“응. 별 모양도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모양도 정확하고 삐뚤어진 데도 없고……, 정말 그린 것처럼 예뻤어.”

너도 봤어야 하는데, 꼭 그런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손가락까지 나와 그의 눈앞에서 직접 별 모양을 그려보았다. 그림 솜씨는 없어 허공에 대고 그리는데도 잠깐 고개가 갸웃했다.

“이런 별이 아닌데, 음……, 반듯한 모양인데. 난 왜 이게 안 되지?”

“이런 거?”

“응?”

고개를 들고 한 팔을 괸 제희가 이불 안에서 감춰져 있던 작은 사슬을 끌어냈다. 제 목에 그런 게 감겨 있는지도 몰랐던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가슴이 드러나자 황급히 이불로 가리면서도 목에 걸린 작은 펜던트를 보느라 이불을 쥔 손이 작게 떨렸다.

“이, 이거 뭐야? 언제 걸었어? 응?”

“모양이 이게 맞아?”

일부러 목선을 쭉 따라 가슴 골짜기로 내려간 그의 짓궂은 손가락이 펜던트를 들어올렸다. 작은 별이 쪼르르 네 개, 그중 가장 아래에는 큐빅이 박혀 새벽녘 어둠 속에서도 혼자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빛냈다.

“비슷해?”

“으응…….”

한마디라도 했다간 울음이 나와버릴까 봐 조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태어나 이런 선물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선물이란 것 자체도 처음일지도 모른다.

“타이밍이 좋았네. 카드 섹션이니 뭐니 모르고 산 건데.”

“하아……, 하하. 예뻐, 정말.”

“비싼 건 아냐.”

“아니야, 아니야. 나 그런 거 필요 없어.”

오해할 리 없는데도 벅찬 마음에 다급해졌다. 흔드는 손이 곧 그에게 잡히더니 손목 안쪽 여린 살에 제희의 입술이 닿았다.

“갑자기 사느라. 나 원래 미신 안 믿거든. 그런데도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미신?”

“음……, 이게 폴라리스래.”

남자인 제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자체가 쑥스럽다. 그 감정을 떨치고자 어느 하나 더 예쁘달 거 없는 네 개의 별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으음, 그렇구나.”

이런 선물 하나에도 떨리는 손짓이 민망할 뿐이라 재이가 어설피 웃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