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25화 (25/48)

# 25화.

윤제희. 반장. 너 정말 좋아 보여. 지금도 꼭 반장 같아서 멋있다, 진짜.

여기까지 왜 왔는지 다음 말을 생각하다가 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망치듯 1층으로 올라왔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입구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남학생과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 무조건 아니라는 소리만 했었다. 제희 이야기가 나오니 더 아니라고 했었고.

꼭 보지 않아도 좋다고, 너 잘 있고 공부 잘하고 있는 거 봐서 좋다고,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너 보니까 나도 예전처럼 꼭 같이 학교 다니는 것 같아 좋았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도망치듯 나오면서도 그녀를 보아주기를 바랐다.

“난…… 안 되나 봐.”

욕심 안 부리고 살았으니 오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직 윤제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몰래몰래 한 번씩 볼 수 있겠다 잠깐이나마 좋아했던 마음도 그렇게 다 버리고 왔다. 미련의 싹을 잘라놓아야, 내일 이 가방 들고 또 출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여러 번 운 얼굴이 얼룩덜룩했고, 다 팔았냐 소리도 없이 그만하면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진짜 자리도 받고, 부끄러울 것 없는 무난한 일거리도 받고. 조금 더 지나고는 명함도 받고 승진도 했다.

아프고 힘들어 죽을 것만 같던 마음이 한 번씩은 웃을 거리도 찾아냈을 때, 그때 윤제희를 다시 만났다. 버린 줄 알았던 욕심은 여전했고, 또다시 그에게 빠져버렸다. 그때는 돌아섰지만 이제는 그러지도 못해 새벽 거리를 서성이다 집 앞에 섰다.

◇ ◆ ◇

“이재이!”

“어! 제희야. 반장!”

아직 안개가 남아 그때만큼 뿌옇던 거리를 두고 그가 있었다. 한 번씩 웃어주던 다정함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나 화났어.’ 얼굴에 쓰여 있는 게 분명한데도 피할 수가 없어 달려왔다.

“으음. 나 말이야……, 가려고 했어.”

“……거짓말 마.”

내미는 손길도 거칠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꼭 잡아 품에 가두자 거기에 기대어 괜히 훌쩍거렸다.

“진짜야……. 가려고 했어. 근데 나 있잖아.”

“그래, 너.”

그의 갈라진 목소리에서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안도도 잠시, 이 새벽에 눈물바람을 하다 돌아온 그녀가 어이가 없을 만큼 미웠다.

“너 좀 맞아야겠다.”

“…….”

“오늘은 때리려고, 너.”

#chapter 11. Polaris

이재이, 왜 난 너만 보면 아무 말도 못 할까. 이제 다 커서 제법 잘하고 산다고 칭찬도 받는데 왜 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울까.

그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거의 도망치다시피 이 새벽에 재이를 보러 와 꽤 긴 시간을 서성거렸다. 네가 보러 오지 않겠다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며 달려 나왔는데 막상 그녀가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달래려 억지로 붉은 피라도 내고 싶은, 그런 유치한 혈기와 충동을 잡아두고 찾아다니다 힘없이 걸어오는 그녀를 보았다.

“이재이!”

달려와 안긴다. 그러면 자신은 안을 수밖에 없다.

“……나 진짜 때릴 거야?”

웃으면, 그녀가 아주 살짝이라도 웃으면 그는 정말 아무 말도 못 했다. 때릴 마음이 남았다면 그는 그 두 눈을 보기 전에 진작 그랬어야 했다.

“너 울었어?”

“아니.”

“울었는데?”

“아냐. 안개 때문에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대답에 다그칠 수도 없어 다시 한 번 폭 끌어안았다. 대신 이른 새벽 공기를 가득 묻히고 온 그녀에게서 차가운 기운을 모조리 털어냈다. 두 손을 올려 뺨에 대자 고개를 약간 움츠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동생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좀 걸었어. 근데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이 시간에 어떻게?”

“그거 알면 너 잠 못 자.”

유독 걱정이 많은 그녀였다. 경험상 큰일이야 없겠지만 원칙적으로 병원에 있어야 할 시간이니 누가 봤다면 단단히 혼이 날 일이다. 급한 대로 후배 하나를 세워놓고 왔으니 얼른 돌아가야만 했다.

“왜? 안 좋은 일이야?”

“아니.”

널 봤는데 그게 어떻게 안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징계나 꾸중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학창시절에 받아보지 못했으니 뒤늦게 한번 받더라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이재이에 한해 다 해보고 싶던 것 중 하나로 묶어두면 그만이었다.

“나 이제 가봐야 돼.”

“벌써?”

“더 있을까?”

잠깐 고심하는 듯 눈이 커졌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옷깃을 잡은 두 손은 놓지 못하기에 그게 좋은 그가 뺨에 입을 맞췄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단순해질 수 있구나.

“오늘은 빨리 못 와. 경기 끝나고야 올 수 있을 거야.”

“응.”

말부터 해놓고 머릿속으로 셈을 하는지 혼자 심각하더니 뭔가 깨달은 모양이다. 옷깃에서 손을 떼자마자 “아니야, 아니야.” 손사래를 쳤다.

“너무 늦잖아. 11시 넘을 거 같은데 너도 쉬어야지.”

“쉬려고 오는 거야.”

네 옆에서 숨도 좀 쉬고. 그래야 나도 힘내서 남 앞에선 칭찬받고 살지.

그사이 찬기가 많이 가셨다. 사실 재이가 웃기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는 대낮의 여름 한 자락이 펼쳐졌다. 보고 들어가겠다는 걸 억지로 집 안에 넣어두어도 돌아서는 발걸음에 어딘지 허술한 현관문이 삐죽 열렸다.

그 작은 틈으로 비치는 재이의 작은 얼굴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어 현관으로 다시 돌아섰다. 불을 켜지 않은 그늘 속에서도 예쁜 콧날과 붉은 입술이 꼭 유리장 안의 보석 같다. 한번 손대면 꺼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거란 직감에 손 하나만 잡아내어 거기에 살짝 입을 맞췄다.

보는 것보다 까칠한, 그리고 잔 상처가 남은 손.

“야아.”

제희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 재이는 부끄러워 제 손을 당겨댔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큰 흉은 없지만 자신의 몸에서 제일 거칠한 곳이다.

“예쁘다.”

“넌 진짜…… 내가 아는 윤제희 아닌 것 같아.”

그때도 같았다. 말을 못 했을 뿐이지. 그녀와 헤어져 있었던 것 중에서 딱 하나 좋은 점을 억지로 찾아내자면 이거였다. 애틋함과 불안함에 매순간 미룰 것 없이 제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영리했으니 다시는 경험할 리 없는 감정이었고 한 번이면 충분히 습득했다.

“넌 누가 더 좋은데?”

“음……, 둘 다 좋아.”

그로서는 역시 몸과 마음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좋다. 성인이 되었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일이다.

“여기서 저녁 먹을 거야.”

“먹고 와. 너무 늦을 텐데.”

“아니.”

“어휴……, 그럼 뭐 좀 해놓을까? 뭐 먹고 싶은데?”

“멸치볶음이랑 우엉. 오징어채도.”

네가 훔쳐간 내 반찬 모두. 그거 다시 내 거야.

내가 이렇게 유치해지는 게, 너한텐 어떨지 모르겠다.

비교적 한가한 과 특성도 있겠지만 병원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자리를 지켜준 후배에게 간식거리를 안겨주고는 그도 얼른 회진에 따라 나섰다.

미리 외워야 할 것들을 상기하며 기습적인 질문도 무리 없이 넘기고 수술을 연이어 두 개나 다녀왔더니 오후가 훌쩍 넘어 전에 없이 허기가 졌다.

“제희야, 이것 좀 먹어봐.”

손을 씻고 나왔더니 자신을 기다리던 윤지가 도시락 봉투를 내밀었다. 유명 일식집의 마크가 고급스러운 금박으로 입혀져 있다.

“식당 갈 거야. 너 먹어.”

“너 주려고 사왔어. 여기 되게 유명한 데야.”

“그럼 다른 사람 줘. 의국에 사람 많으니까.”

“윤제희!”

그를 제외하고는 거절 따위 당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조심스레 기회만 엿보다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될까 초조함이 더욱 짙어졌다.

얼마 전 보았던 초라한 차림의 여자와 제희가 꾸준히 만난다는 것도 알았지만 접하지 못한 호기심이나 동정심 정도로 여겼다. 거기다 제희의 어머니와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난 후라 자신감이 한층 살아났다.

“너희 어머니가 그날, 자꾸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하시더라.”

“곤란하단 소리야?”

“아닌 거 알잖아. 너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알고 싶지 않아.”

“…….”

“꼭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야 알겠다면, 일이나 좀 똑바로 해. 보니까 차트 정리도 엉망에 네가 한 일은 다시 내 손 거치는 게 대부분이야. 여기 남 사정 봐주기 힘든 곳 아닌가?”

허기에 짐까지 하나 늘어나자 그가 평소보다 배로 싸늘해졌다. 그간 윤지라면 성가신 동료 정도로 생각했는데 재이의 일로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졌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여자들 일에 나서본 경험도 없거니와 윤지의 성격을 뻔히 알다 보니 괜히 재이에 관한 뒷말이 나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너 어쩜 그렇게……. 이, 일 때문이면 진작 말을 해주지! 어디가 잘못됐다 이야기를 해줬음 내가 고쳤을 건데.”

“그런 말마저도 섞기 싫어서. 너랑은.”

그만 좀 하자, 휴대전화를 꺼내서 본 그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이쯤 되면 정말 그만할 법도 한데 콧대 높기로 유명하던 윤지도 폭발해버렸다.

“겨우 그런 여자가,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질문 하나에도 우월감과 무시가 녹아 있었고 그것을 모를 윤제희도 아니었다. 그녀만큼 목소리를 키우지는 않아도 얼어붙을 듯한 차가움이 마디마디 뚝뚝 떨어졌다.

“착하고 좋은 애야. 누구나 하는 말이라도 이재이는 특별해. 거기다 나는 그 애만큼 예쁜 사람도 못 봤어.”

“뭐?”

“너처럼 보이는 걸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냐. 넌 남한테 우월감 느끼려 의사선생님 소리 듣고 싶을지 몰라도 실제로 길에서 사람이 죽어가면 업고 뛰는 건 그 애일 거야. 네 비싼 옷에 피 묻을까 봐 못 하는 일을 이재이는 해. 뭐가 더 중요한지 아는 애거든.”

똑똑히 들으라는 그의 말이 무서울 정도로 낮게 깔렸다. 곱게 가꾼 윤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불규칙한 숨결이 점점 커졌다. 기어이 분을 이기지 못해 반쯤 이성이 나가버렸다.

“네가 그런 애 뭐에 홀렸는지 몰라도 정 그렇게 말한다면!”

“닥쳐.”

무뚝뚝해도 험한 소리를 입에 담은 적 없는 그였다. 곱게 자라긴 한 모양인지 그 정도 말에도 얼어붙은 윤지가 이제 상대하기도 우스워졌다.

“일 얘기 아니라면 제발 내 앞에서 닥쳐주라. 그게 아니면 꺼져주든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놀라 뒷걸음질 치던 윤지가 옆에 있는 화분에 걸려 제풀에 넘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곁눈질로 구경하던 간호사 몇이 달려와 윤지를 잡아 일으키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나마의 자존심일 수도 있겠지만 윤지라면 그 와중에도 저 유리할 방향으로 생각할 것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10여 년 전에 학교에서도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고 입 다물던 그의 뒤로 한 가지 소문이 퍼졌다.

「윤제희가 드디어 여자 때렸대!」

날파리를 쫓을 목적이라면 차라리 잘됐다 여겼는데 1년 후 그 소문에 예쁜 나비가 걸려들어 겁먹고 파득였다. 조심조심 다칠까 거미줄 걷어내고 손으로 꼭 감싸쥐며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던 후회와 억울함이 생겨났다.

저런 여자 때문이라면 지금은 더 싫고.

“박윤지 선생, 병원서 굽 높은 거 신지 마. 꼴사납게 걸음도 못 걸어 넘어질 거라면.”

평소에 조용해도 다들 귀 기울여 듣던 윤제희의 목소리가 이 정도 울렸으면, 병원 안 사람들은 모두 듣고도 남았다. 소리보다는 빛의 속도가 빠르다지만 단 하나, 소문의 속도는 빛을 능가했다.

“그리고 서 선생, 잠깐 나 좀 보지.”

제희를 찾으러 왔다가 잘못 걸린 1년차 여선생이 제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라 눈을 꾹 감았다. 요새 의국에서 겨울연가 재방송을 몰래 볼 때 눈감아주길래 좀 유해졌나 했는데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이대로 끌려갔다 괜히 죽는 것은 아닌지 십자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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