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으으으응. 아아아, 하앗.”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할게.”
찡그린 미간에 아픔이 고스란해 염치없이 참으란 소리도 못 하겠다. 결국 통보가 되어버렸지만 마음만은 미어진다. 하지만 끝을 향해 가는 극도의 쾌감이 그를 잠식하자 그런 슬픔 정도는 금방 잊혔다. 미숙하고 이기적인 본능이라 그 끝이 더욱더 강렬했다.
“아아앗.”
“하아아아.”
하얀 어깨를 그러쥔 그가 이마를 맞댄 채 깊은 여운을 뱉어냈다. 여름날의 창문도 열지 못하는 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두 사람 사이에 미열이 올랐다.
달아오른 피부를 쓸어내리고 잠시 놓쳤던 그녀의 호흡을 다시 앗는다. 그의 입안에서 뱉어내는 그녀의 숨이 삽입의 순간만큼이나 아찔했다.
“아파?”
“으응……, 나는…….”
눈을 감고 웅얼거린다. 분명히 아프겠지. 알면서도 목소리 한번 들어보고자 말을 걸었다. 잠결에 귀찮은 건지, 부끄러운 건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아 참, 축구는?” 하는 조그만 목소리가 마지막에 붙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8강전이었지. 사람이 이렇게 간사해 한두 시간 전의 일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간간이 오르는 비명과 환호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리모콘부터 찾아 TV를 틀었다. 물론 그사이에도 힘 빠진 나비처럼 침대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어깨를 만지작댔다.
- 우와아아아아아!
- 4강! 4강입니다!
홍명보가 머리칼을 찰랑이며 그라운드를 달려 나갔다. 축구에 큰 관심 있다고는 못 해도 저 선수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으응? 뭐야?”
“아냐. 다 잘됐어. 좀 자.”
홍명보만 그리 환하게 웃을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신이 그에게 인내의 농간을 부려도 천사 같은 이재이가 그를 구원했다.
전 국민이 환희에 빠진 6월 22일 오후 7시 무렵, 그는 거리가 아닌 침대 위에서 조금 더 특별한 환희에 빠졌다. 9년을 기다린 남자의 열망도 4년을 기다린 오천만의 염원 못지않았다.
#chapter 10. 때리려고, 너
반장 윤제희는 쌀쌀맞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 이면에는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을 조심스레 숨겨놓는 아이도 많았고, 또래답지 않은 그의 진중한 분위기에 끌리는 아이도 꽤 있었다. 제희는 늘 묻는 말에나 간신히 대답할 정도로 고요했지만 오직 그만이 왁자지껄한 교실 안에서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다 내. 그 후에는 나도 몰라. 알아서 해.”
“에이…….”
“그리고 전기 절약 운동이라니까 쉬는 시간에는 선풍기 꺼.”
재이가 나갈 때는 웃으며 산만하게 굴던 아이들이 그가 교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만 나가도 말소리를 줄였다. 그게 얄밉기도 했지만 약속한 대로 앞에 나서서 자기가 한 말은 무르지 않고 제대로 해주는 모습에 그녀도 안심했다.
“잘했어.”
“…….”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제희를 쳐다보다 너만 들으라, 그렇게 작게 칭찬을 했다. 분명 들었을 텐데 반응 없이 자리를 찾자 겨우 그 정도 일에 재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랬을까.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학기 초에는 그녀 쪽에서 눈을 마주치면 피하곤 했는데,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한 건 처음이었다. 물으면 아니라 하겠지만 확실했다. 조심스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아도 손짓 하나, 시선 하나 쌀쌀맞기 그지없다.
“반장 쟤는 가위손이 얼음으로 만들었나 봐. 저렇게 냉기가 풀풀 날리고.”
조니 뎁 책받침을 들여다보던 짝이 제희를 보며 흉 아닌 흉을 보았다. 그런 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고 싶다가도 오늘의 제희를 보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부반장, 너 전에 반장이랑 둘이 봤을 때 안 때린 거 맞지? 확실해?”
“야아, 아니야.”
“하기야 넌 때릴 데가 없으니까. 근데 나 분명히 들었었거든. 윤제희가 여자애 때렸다고.”
“설마. 쟤가 왜 여자애를 때려?”
처음에 들었을 때는 같이 겁에 질렸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았다. 아무리 쌀쌀맞고 정말 속은 얼음으로 채웠더라도 그는 누군가를 때릴 사람이 아니다.
방과 후 둘이 남아 그녀가 아무리 같은 문제에서 헤매며 시간을 끌어도 그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재촉한 적이 없었다.
‘반장,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그 한마디가 어려워 방과 후까지 울적해 있었다. 상투적인 내용이나마 그녀에게 종종 말을 걸던 나직한 목소리도 그날따라 행방을 감췄다.
“저기, 오늘 공부하는 거 어렵겠지?”
“……할 건 해야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 한 문제도 제대로 못 풀었다. 풀다가도 고개를 들면 그의 눈은 더없이 차가웠고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혹시 어디 아파?”
“아냐.”
“무슨 안 좋은 일 있으면…….”
“그런 거 아니야. 다음 문제 풀자.”
서럽기까지 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윤제희는 원래가 이런 애였는데 그간 자신이 착각이라도 한 걸까.
그래도 난 벌써 네가 좋아졌는데 이런 마음을 어떻게 물러. 그건 이제 와 제희가 따스하지 않다고 해서 접어둘 마음이 아니었다.
“고마워, 매번.”
“내일은 두 장 더 풀어 와. 오늘 못 한 거. 이과 애들 따라잡으려면 턱도 없어.”
“어어. 근데 너 시간 없으면 꼭 이렇게 안 해줘도 되는데.”
“너 이 성적으로 수의대 장학금 못 받아. 거기다 한국대 갈 거라며.”
콕 집어 말하는 그가 얄밉다기보다는 어색했다. 타인같이 거리를 두는 그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도 못하고 조용히 웃었다. 그때서야 제희의 표정에 아차 싶은, 그런 찡그림이 어렸지만 이미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만한 숫기가 없었다.
그렇게 사흘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친한 듯했지만 원래 대화를 많이 주고받던 사이가 아니니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변화는 본인만 아는 것이라 재이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차라리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 전에 그럴 일이지, 하다하다 별 원망이 다 생겼다. 그런 와중에 방과 후 과외는 빠지지도 않으니 얼굴을 맞대면서도 눈 한 번을 못 마주쳤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야말로 시간낭비만 계속했다.
이제 더는 안 해줘도 돼. 아무래도 안 하는 게 좋겠어. 이제까지는 정말 고마워.
먼저 말을 꺼내고자 기다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동급생인 제희도 수험생인 건 마찬가지인데 익숙해지다 보니 너무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정말 하기 싫은 말이지만 자신이 먼저 하는 게 서로가 편할 것 같아 그날은 신경 써 기회를 노렸다.
“자, 다들 집에 바로 가고 학원 차 타는 애들은 도로에 내려가 있지 마. 야, 안준우, 이경욱! 이놈의 자식들, 지금까지 놀다가 이제 와서 무슨 공부야? 이상!”
선생님의 종례사가 끝나자 와르르 빠져나가는 소리가 우레처럼 울리다가 둘만 남은 교실은 적막해졌다. 말을 해야 하는데, 오늘쯤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못 하겠다. 찬바람에 몸이 얼더라도 같이 있고만 싶다.
“어휴.”
미적미적 문제집을 챙기다가 그를 쳐다보자 며칠 만에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제희는 자신을 보고 있었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여러 생각을 했다.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님 내가 너한테 뭘 실수한 거 있니?
생각만 했는데 눈물이 핑글거려 그냥 웃었다. 어색하게 보일지라도 살포시 웃었다. 그러자 제희가 며칠 전 보았던 찡그림을 다시 비추다 제 이마를 꾹 누르더니 그대로 파묻었다. 왜 그런지 몰라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반장, 어디 아파?”
“……미안해.”
머리칼을 콱 움켜쥐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믿지 못할 말을 했다.
“응?”
“내가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내가 속 끓인 것을 알기는 하는지.
의자 하나를 끌어 조심스레 앉았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찌푸린 윤제희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괜찮아.”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
“나 좀…… 무서웠던 말이야.”
말끝에 자신이 울었던지 웃었던지 애매했다. 다만 제희의 표정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다 안다는, 미안하고, 흔들리면서도 열이 오르던 지금의 이 표정.
◇ ◆ ◇
“무슨 생각 해?”
“응……, 아니.”
“무슨 대답이 그래?”
이불을 가득 움켜쥔 그녀가 새벽빛 아래 몸을 돌렸다. 누가 먼저 깨어났는지 몰라도 한참을 이렇게 말이 없었다. 눈을 잠깐 떴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애태우던 제희가 이불 안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말 안 해?”
“……별거 아니라서.”
“너 혹시 후회해? 나랑 잔 거?”
되묻는 목소리가 까칠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했다.
그런 게 아닌데, 둘만 있는 방에서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희와 이래도 되는 건지 망설이기는 했지만 어떤 종류의 후회도 없다. 아직도 저릿한 둔통에도 지난밤은 분명 자신 역시 원했던 일이다.
“그럼 왜 말을 못 해?”
고개를 젓는 그녀의 머리칼 한 움큼을 손 안에 쥐고 흘러내리게 했다. 한결 안정되기는 했지만 아직 그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아니다. 혹여 공허한 건지, 아니면 아직 아파 그런 건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너, 예전에 말이야, 나한테 말 안 하고 모른 체했을 때.”
“…….”
“한 사흘 정도 그랬던 거 같아서. 기억나?”
터무니없이 부족한 설명에도 그는 단숨에 알아들었다. 그때의 미안한 감정이 그대로인지 조용히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뺨을 얹었다.
“으음. 그때 네가 왜 그랬는지, 뭐가 미안했다는 건지 계속 궁금했어. 그 생각이 나서.”
“……왜 그때는 안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어. 그냥 좀 무서웠던 거 같아.”
“뭐가?”
“음, 네가 때릴까 봐?”
금세 장난기가 어려 작게 웃어댔다. 좋으면서도 애틋한 마음에 부드러운 살갗에 닿는 족족 입을 맞췄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이라도 알려줘?”
귓가를 타고 오르는 간지러움에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무모한 시도는 바로 봉쇄돼 그러쥔 이불마저 단번에 걷혔다.
“야아, 이게 뭐야.”
가녀린 두 무릎 사이에 다리를 세운 그가 상체를 낮춰 붉어진 두 뺨을 쓰다듬었다. 지난밤과는 또 다르다.
“넌 어제가 첫 밤이지만 난 그쯤이었거든.”
“응?”
“너만 보면 계속 만지고 싶었어. 이런 데, 이런 데, 모두.”
닿을 듯 말 듯 은근히 쓸어내리던 그의 손짓이 적당하다 싶은 자리에서 멈춰 포인트를 짚었다. 쏙 들어간 허리 라인에서 잠깐,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가슴 언저리에서 오래.
“……아.”
“이렇게 잡으면 어떨지, 내 손아귀에 얼마나 차오를지 그 생각만 가득했어.”
“그, 그때 네가 그랬다고?”
“그때도, 지금도.”
목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이 가볍게 유두를 긁었다. 손 안에서 작은 공처럼 튕기는 감촉이 두 사람 모두에게 짜릿했다. 거기서 멈추기 힘든 그가 기어이 혀를 내밀어 핥자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으흣, 왜 그래, 아침부터.”
“원래 남자는 아침이 더 그래.”
“……으음, 제희야.”
“여기도. 사실 여기가 제일 궁금했는데.”
서늘한 목소리에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손을 내려 여성을 감쌌다. 씻지 못했으니 그 끈적함이 그대로일 텐데 전혀 거리끼는 기색 없이 만족스레 입가를 올렸다. 그녀가 알던 윤제희가 아닌 것만 같다.
“으으응. 하지 마. 하지 말라구.”
“봐. 지금도 넌 이런데.”
“으응…….”
“그때의 너한테 어떻게 이런 말을 해.”
난 잘못 없어.
그때는 미안했을지 몰라도 그녀를 안고 나니 이거야말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몸을 두고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그게 정말 불구였다. 무서워했을 그녀가 안타까울망정 자신은 전혀 이상한 놈이 아니었다.
“으흐응. 왜, 왜 그래. 으음.”
이미 젖기 시작한 여성 안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허리를 뒤트는 재이를 보면서도 한쪽 골반을 눌러가며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첫 밤보다 더 어두워 그런지 그녀의 거부감도 덜한 듯하다. 제희는 얼굴을 내렸다.
“내가 솔직하게 말했으면 네가 뭐라고 했을까?”
진짜 궁금한 듯 그녀를 재촉했다. 이미 부끄러움과 다시금 뜨거워지는 몸의 감각에 적응하지 못해 신음을 참는 그녀를 알면서도 두 손은 멈출 수가 없다.
“흐읏, 으으응.”
“여기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입술로 깨물어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