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두 손 맞잡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긴장을 푸는 방법은 다양했다. 교회든 절이든 딱히 가본 적이 없는 재이도 눈을 감고 한국의 승리를 빌었다.
이전처럼 미심쩍게 혹은 조마조마한 마음보다는, 이 정도 기적을 보았으니 더 큰 기적도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그녀 인생에 몇 안 되는 욕심을 부려보았다.
“이기라고 기도했어?”
“어, 응. 이겨야지.”
“그러다 지면 어쩌려구?”
그의 놀리는 말에 대한민국을 외치던 앞사람들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조금의 부정이라도 탈까 어마어마한 기를 발산하는 것이 보여 재이가 먼저 나서서 그의 입을 막았다.
“윤제희, 좀!”
“…….”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재이의 손가락이 닿은 입술이 간질간질하다. 그 입술에 잔잔한 미소가 퍼지는 것을 보고야 부끄러운 그녀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 자, 온 국민의 염원을 담은 한국의 4강 진출, 과연 가능할까요? 이제 경기, 시작합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루라기가 울리고 여기저기서 비명들이 쏟아졌다.
사실 그녀는 축구의 규칙 같은 건 전혀 모른다. 상대편 골대에 골이 들어가면 승점을 올린다는 그 하나가 다였기에 작전이나 전법 같은 건 이해도 못 했다.
그저 중앙선을 기준으로 한국이 넘어가면 금방이라도 골이 나올 것처럼 흥분했고, 상대편이 넘으면 실점이라도 할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안 돼! 안 돼! 가야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머리를 묶은 은색 모양의 종이 같이 흔들렸다. 처음 폴란드전을 볼 때는 그의 눈치를 살펴가며 마냥 조심스러웠던 그녀가 이런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좋았다. 웃고, 더 웃고, 심지어 울고 화내는 모습까지 모두 보고 싶다.
“아아아아!”
전반전이 무르익어가다 김남일이 상대편 선수에게 왼쪽 발목을 밟혔다. 이탈리아전에서도 부상을 입은 부위라 어쩔 수 없는 교체에 이어 홍명보와 최진철까지 공을 두고 부딪치자 안타까운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희야! 저거 어떡해! 많이 다쳤을까?”
그가 아무리 의사라도 전공도 아니고 화면으로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레이스를 입은 이재이의 기분이 끝까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제희 역시 한국 사람이니 승리를 기원하고 부상을 염려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는 이미 싱크대에서 19세로 돌아가버렸다. 약간은 이기적이고, 피가 끓고, 오직 그 생각만 가득 찬 그해 무렵으로.
“자, 소리 높여 더 크게 응원합시다!”
아슬아슬 몰리던 전반전이 끝나자 단상에서 북을 울려가며 관중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여기까지가 어디야, 하는 마음 이면에 다들 간절한 바람이 자리해버린지라 기운을 내릴 새도 없이 열기를 더해나갔다.
“우와아아아아!”
축구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에 더 의지했다. 그녀 평생에 이렇게나 인파가 모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같은 소원을 비는 것은 처음 보았다.
“또 기도해?”
“응. 후반전에는 좀 안 다치고 이겼으면 좋겠어.”
“스페인 사람들도 기도할 텐데?”
“몰라. 그럼 그 나라 신한테 하든가. 여기는 한국이잖아.”
마음 약하고 관대한 재이가 어찌 나오나 보려고 놀렸더니 이번만은 가차 없이 군다. 그 단호함도 좋아 크게 웃자 그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아, 차라리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나처럼 심장 약한 사람은 보고 있기도 힘드네.”
“끝나고 나면 우리가 이겨 있고?”
“응!”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제희가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그는 분명 어떻게든 이길 작정이었으니. 저리 아무 걱정 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 것도 없이 제희는 저 좋을 대로만 생각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간 했던 마음고생을 보면 자신은 그 정도의 자격이 있었다.
- 자아, 후반전 시작합니다!
다시 격렬한 오천만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열한 명의 땀이 아니었고 열한 명의 노력이 아니었다. 마음은 모두 그라운드 위에 있어 달리고 넘어지고 치솟는 모든 동작을 함께했다.
“대한민국!”
“우와아아아아!”
될 듯 말 듯, 또 선수들의 체력 고갈이 눈에 띌 만큼 드러났지만 누구 하나 그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아! 아까워!”
후반 32분, 경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박지성의 골 찬스가 스페인 골키퍼의 손에 막혔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발을 동동 구르던 재이가 그의 팔에 매달려 아쉬움을 추슬렀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건 역시 그였다. 물컹하는 재이의 가슴이 그의 오른편에 닿자 얼기설기 엉성하게 봉인했던 욕망의 상자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경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후반전 안에 끝나야 했다. 여기서 더 지속이 되고 연장전에 가다 못해 승부차기까지 가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신의 농간이다.
맹세컨대 그는 그렇게까지 잘못 산 적은 없었다.
- 자, 경기 종료 휘슬 불었는데요, 이제 이탈리아전처럼 연장전으로 들어가게 되죠? 부디 우리 선수들이…….
어딘지 불길해 그가 손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손끝으로 힘이 쏠리자 겨우 숨만 내쉬며 억지로 진정시켰다.
“반장, 아쉬워서 그래? 연장전 간다잖아. 좀 참아봐.”
재이를 보면서 참자. 4년에 한 번 있다니 이재이를 위해 한 시간 정도 더 참아보자.
9년을 기다렸는데 한 시간 정도야 못 참을 것도 없다,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안정을 찾고자 고개를 돌렸다가 진짜 남고생 하나와 대화하는 이재이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붉은 악마 머리띠를 하고 재이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남고생과, 그런 그가 민망하지 않게 어설피 웃어주는 재이를 보니 그의 인내심은 이대로 끝났다.
레이스.
두 시간 동안 억지로 눌러두었던 세 글자가 튀어나왔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재이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제, 제희야. 왜 그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던 그녀였고 늘 악몽 속의 그를 깨웠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단 지금만은 아무 말 말아주었으면.
“아직 안 끝났는데, 왜?”
“경기 오래 할 거 같아. 절대 금방 안 끝나고 할 수 있는 한 길게 갈 거야.”
“왜? 왜 오래 해?”
신이 나를 자꾸만 시험에 들게 하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를 안았다. 눈이 부시면 못 자는 그인지라 암막 커튼을 쳐놓은 안방으로 들어와 바로 그녀를 눕혔다.
“너……, 왜 그래?”
“나도 잘 모르겠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정신을 차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경기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커 이유라도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급하다 생각했던 그에게 성마른 욕구보다는 말 못 하는 떨림이 녹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보다 거칠다 생각했던 손도, 늘 당당히 내려다보던 눈빛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자 오히려 그것에 안도해 울컥해버렸다.
윤제희, 떨지 마. 나도 떨리는데 둘 다 이러면 어떡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경기는 지워진 지 오래다. 제희를 오래 보고자 계속된 승리를 바랐지만, 그가 이미 가슴 아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녀는 모든 초조와 불안을 버렸다.
“재이야……, 지금 하고 싶어.”
“응.”
그래, 알았어.
망설이지도 않았다. 아직 선명한 빛은 두꺼운 커튼을 뚫었고 열띤 함성은 단단한 이중창마저 뛰어넘었지만 그들은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렸다.
“으읍.”
깊은 키스로 시작된 접촉이 점점 더 깊이와 넓이를 키워나갔다. 뜨거움을 가득 담은 혀가 들어와 그녀를 휘젓고 손은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그의 얼굴이 떨어졌을 때도 옷이 먼저 벗겨져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그가 원했던 속옷의 무늬를 따라 가슴을 더듬었다. 빨아들이고 자국을 내고 쉴 새 없이 탐해도 갈증이 채워지지가 않는다.
“가만히.”
두 팔 아래에는 오늘 하루 그의 손끝을 저리게 하던 이재이가 그가 원했던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이스건 희건 빨갛건, 속옷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상으로 맺히는 것은 오로지 재이뿐이라 그 외의 모든 희뿌연 방해물은 한 번에 해치웠다.
“……반장.”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가슴으로 그를 대하려니 얼굴이 타오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그렁거릴 것 같아 억지로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부르자마자 생각했다.
“왜? 부반장.”
그렇게 부르지 말걸.
“하아아, 아흣.”
숨죽이던 열아홉의 그가 깨어나버렸다. 다급히 오른쪽 가슴을 입에 물고 남은 가슴 역시 엄지손가락으로 그 정점을 굴렸다. 그녀가 걱정하던 땀 냄새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만 뜨겁고 부드럽고 촉촉할 뿐이다. 혀끝으로 가볍게 살짝살짝 맛을 보다가 마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쥐어짜듯 혀와 손에 힘을 주자 그녀의 앓는 소리가 더욱더 강해졌다.
“아아아흐읏……, 제희야. 제희야…….”
침대에서 이름을 부르는 그녀는 최음제나 다름없었다. 그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른 가슴으로 옮겨 유두를 세게 깨물었다. 작게 삼키는 신음까지 그의 것이라 혀로 감아 그 소리를 키웠다.
소담한 가슴의 살짝 솟은 유두가 그 주인만큼이나 귀엽고 예쁘다. 이러니 예쁘다 어루만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지경이라 입이 가면 손이 따르고 손이 가면 입술도 질세라 따라붙었다. 손가락 새에 넣고 세게 힘을 주자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예민한 감으로 바로 느껴진다.
“하아, 하아…….”
“벌써부터 힘 빼지 마.”
아직 난 시작도 안 했으니까.
거칠한 청바지의 느낌이 아직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돌린 틈을 노려 바로 바지를 벗기고 작은 팬티 위에 시선을 멈췄다. 그 아찔한 모습에 골반을 잡고 있던 손아귀 힘이 강해지자 그녀가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려버렸다.
“보, 보지 마.”
팬티를 보지 말라기에 벗겨내고 보았다. 자지러지듯 고개를 저었지만 벌써 이러면 곤란해 다시 가슴을 쥐고 고개를 파묻었다. 기교 따위 생각할 시간도 없어 마구 빨아대다 제 얼굴을 비볐다. 뺨 맞을 소리일지언정 고3의 그는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었다.
「반장, 너도 이리 와. 덥지 않아?」
결코 성적인 향이 묻어나는 순간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저 싱그럽게 웃거나 선풍기 앞에서 더위를 털어낼 때, 혹은 제 앞에서 조신하게 수학 문제를 풀 때조차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본인이 이상하다 생각은 안 했지만 이재이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미안해 며칠 동안은 독하게 마음먹고 먼저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늪에서 발버둥을 치듯 무모했던 시도를 하던 그는, 재이의 미소에 며칠 만에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아하아……, 아, 아니, 아니…….”
“좋아?”
그는 이재이를 두고 경건하다거나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꾸는 로맨티시스트도 아니었다. 한번 싱그럽게 웃었다면 밤에는 제 품에서 울리는 상상을 했었다. 뒷목이 뻐근한 생각들로 버티다 지금에 이르자 결국 자신이 옳았음을 알았다.자신은 이런 걸 너무 보고 싶었다.
이재이가 한계까지 얼굴이 붉어져 눈물이 그렁하는 걸.
쾌감을 주체하지 못해 작은 손을 움켜쥐며 겨우 버티는 것도.
“……예쁘다, 너.”
수백, 수천 번을 더 본대도 과연 이게 질리는 날이 올까.
“으으으응. 거긴 하지 마, 거긴.”
힘을 주기 전에 손을 먼저 뻗어 그녀의 소중한 곳을 감쌌다. 위에서부터 살짝 쓸어내리다 원하던 부위에 닿자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미끈거린다.
“으응, 으으응. 하지 말라구.”
“왜?”
“그냥, 그냥 하지 마. 으응?”
그야말로 울상이다. 마음은 아프지만, 까놓고 말해 아프지도 않다. 이 역시 생각해본 적 있는 장면이고 상상 이상으로 좋아 손을 조금 더 안으로 놀렸다.
“흐으읍.”
“힘 좀 빼봐.”
한 손을 더 내려 허리를 감싸고 빠듯한 그녀의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착 달라붙는 뜨겁고 질척한 느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조금 더 이런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이게 손가락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그게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었다. 빨리, 더 빨리, 들어가고만 싶다. 이제껏 도리질치는 재이를 보며 인내심은 탁탁 털어내고 달달 긁어낸 지 오래였다.
드르륵, 서랍에서 한 주먹이 넘게 자리를 차지하던 콘돔 하나가 그의 잇새에 포장이 뜯겨나갔다. 마지막까지 재이의 안에서 손을 빼지 못하다가 완전히 콘돔을 씌우고 나서야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아아아아아아! 아, 으응.”
손가락을 조이던 황홀한 느낌도 지금과 비교하니 장난도 그런 장난이 없다. 피가 곤두서고 온몸의 세포가 한곳으로 몰려 깨어난다. 겉으로는 따스한 이재이의 속은 뜨겁고 끈끈했다.
오밀조밀 감싸더니 사력을 다해 그를 죄는데, 그도 생각만큼 조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격통을 참지 못해 있는 대로 찡그리고 훌쩍이는 재이의 모습에 안타깝고 애틋한 이면으로 말로는 하지 못한 쾌감이 넘쳐났다.
“숨 쉬어봐.”
“으흐응. 으응. 나 못 해, 못 하겠어.”
저한테 뭘 하랬다고 못 하겠다는 소리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 역시 재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그럼…… 가만히 있어.”
결합된 상태로 내려다보는 그녀는 그가 생각해온 모든 순간을 압도했다. 본능만이 내려앉은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입술까지 꼭 깨물고 참아보려던 그녀가 급기야 눈물을 터트렸다. 엉엉 우는 것도 아니고 주체 못 하는 신음에 흘러내리는 가는 눈물 한 줄기를 제희가 고개를 숙여 핥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