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재이야, 이거 예쁘지? 너 피부가 하얘서 이거 입으면 확 살 거 같아.”
“그럼요. 월드컵 기념으로 나온 속옷인데 붉은색에다 밑에 보시면 큐빅 장식이 있어서 시선을 확 잡아주거든요.”
속옷 입고 시선 잡을 일이라면 하나밖에 생각이 안 나 괜히 눈을 못 마주쳤다. 그렇구나, 하면서도 역시 과하다. 이런 원색의 속옷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야아, 이건 좀 그렇다. 이런 거 어떻게 입어?”
“누가 이거 입고 거리 활보하래? 그냥 투자라니까?”
“그래도 좀. 난 이게 더 예쁜 거 같은데.”
가지고 왔던 것과 별다를 것 없는 색상의 얌전한 속옷을 집었다. 확실히 디자인은 조금 화려했지만 이 정도는 평소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버릇처럼 디자인보다는 한 번이라도 더 입게 될 듯한 실용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것도 청순하게 예쁘긴 한데. 그래도 이게 더 낫지.”
“난 이거 좋은데.”
“그럼 물어봐.”
“뭐? 어떻게 그런 걸 물어봐?”
“야! 그러면 애기는 어떻게 생겨요? 이재이 수녀님?”
눈이 동그래지는 재이를 또 놀려댔다. 영미가 다른 속옷을 구경하며 직원과 수다삼매경에 빠지자 그녀도 조용히 물러섰다. 이렇게 된 거 두 개 다 사고 싶기도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뛰쳐나가야 할 지경이다.
그래도 마음먹었을 때 안 사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까 고심하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반장. 나 이재인데... 일하는 중이지?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일하는 중에 문자 보내서 미안해. 나는 아까 나왔어.]
여기서 문자 하나가 끊겼다. 인사 하나 쓰는데 내용은 이렇게 길어졌다.
[내 직장 동료 중에 영미라는 애가 있는데 그 친구랑 같이 있어. 되게 재밌는 친구거든. 나와서 밥을 같이 먹었는데.]
[밥 먹고 또 같이 있어. 여기 있다가 너한테 가려고. 너는 밥 먹었는지 궁금하다. 병원 밥은 왠지 막이 없을 거 같아.]
[막이 아니라 맛.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힘든 일 할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대. 그런데 사람이 정말 많아.]
[응원할 때 화면 잘 안 보일까 봐 걱정돼. 먼저 자리 좀 봐야 할까 봐. 너는 마치고 나오면 조금 늦겠지? 차 안 가져]
[갔다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너는 빨간색이 좋아? 아니면 하얀색이 좋아?]
보내고 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가만두면 이마가 바닥에 닿을지도 모른다.
윤제희, 제희야. 제발 늘 그랬듯 무심하게 답변 하나만 해줘.
너 좋은 애잖아.
글자 수 제한에 막혀 이거 하나 물어보고자 그녀 인생에 유례없는 큰 낭비를 했다. 꽉꽉 채워 썼으니 돈은 안 아까웠지만 얘가 답이나 보내줄지 모르겠다. 이게 다 뭐야, 하다가 끝까지 안 읽을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
“야? 너 뭐 해? 으휴, 정 그러면 네가 사고 싶은 거 사!”
“어, 그래. 잠깐만!”
딩동, 수신음이 울리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폴더를 열었다.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뜨다가 정확히 한 글자에 10원짜리, 제희의 사치스러운 답변에 숨이 멎었다.
[레이스.]
갈수록 인파는 기록을 경신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사람들도 16강에 진출하고부터는 ‘무슨 일’이 나는 순간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말겠다는 생각에 모두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 사람들이 많으면 짜증부터 내던 이들 역시 월드컵 때만은 그러지 못했다. 이 거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하나의 목표로 동료의식을 가졌고,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라 골목골목 숨어 있던 사람들까지 합류해 광장은 거대한 파도가 넘실대는 붉은 바다가 되었다.
“어떡하지…….”
여기가 어딜까.
분명 출구에 맞게 나왔는데 한번 휩쓸리기 시작하자 재이가 힘을 빼도 몸이 저절로 떠밀렸다. 자리를 잡아놓으려 했는데 그럴 수준이 아니다. 이대로 다시 떠밀려 제집으로 돌아가게 생긴 판이다.
“어, 반장! 나야. 이재이.”
- 넌 그것 좀.
“응? 뭐라구?”
- 아냐. 어디야?
“모르겠어. 어디 건물이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모르겠어. 여기서 만나긴 힘들 것 같아.”
시끄럽고 웅성거리는 사이에서도 제희의 귀는 재이의 작은 목소리만 골라 들었다. 이리저리 치이는지 숨이 잦아들자 거기 더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 안 다쳤어?
“에이, 뭘 다쳐. 사람이 많아서 잘 안 들려서 그래.”
- 그럼 집에 가 있어. 우리 집에는 갈 수 있지?
“응? 집?”
- 하나만 마저 해놓고 바로 갈게. 나 배고픈데 밥 좀 해줄 수 있어? 너 맛있는 거 해준다며.
“밥?”
- 안 돼?
제희에게 안 되는 게 어디 있을까. 누가 더 잘하고 아니고를 떠난 그녀의 마음이 그랬다. 거기다 힘든 일 하고 밥도 못 먹는다니 마음이 부쩍 기울었다.
“많이 배고파? 그럼 먼저 뭐라도 먹어. 여기서 기다릴게.”
- 집밥 먹고 싶어.
벌써 짐까지 싸 와놓고는 막상 먼저 가 있으라니 영 발이 안 떨어진다. 다행히 오늘 같은 날 좋은 건 가만있어도 저절로 걷게 만드는 물결이 있는 것이라 그녀도 그 흐름을 탔다.
윤제희가 굶고 있다니, 그 생각만 하자.
“역시.”
“응?”
“아냐. 나 가볼게.”
이재이를 공략하려면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약하고 힘들고, 그런 걸 도무지 못 보는 애였다. 그간은 뻔히 알면서도 다시 만난 놀라움과 조급함이 앞서버려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사실 지금도 여유 있다고는 못 하지만 최소한 그런 체하는 정도는 가능해졌다. 여러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눈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바로 나갈 거야?”
“아니. 집에 좀 들르고.”
“그래, 인마. 가서 붉은 악마 티라도 좀 입어라. 그게 태극전사에 대한 예의지!”
24시간 꼬박 입고 버텼던 흰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무리 단정해도 땀에 절어버린 셔츠는 어쩌지 못하는지라 인상을 썼다. 급한 대로 옷장을 뒤적거리다 부질없음을 깨닫고 바로 달려 나갔다. 무얼 입든 어차피 뛰어갈 예정이니 땀에 젖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과연 그의 선택은 옳아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끝도 없는 인파에 정상적인 경로는 포기해야 했고 사람에 떠밀려 겨우 앞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정도만 가능했다. 그는 그때도 하나의 생각만 했다.
이재이가, 재이처럼 몸집도 작은 애가 어떻게 이 길을 다녔을까. 그건 꼭 길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9년 전 그녀의 앞길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말을 안 해도, 표시를 안 해도 그는 늘 알았다. 환하게 웃다가도 눈가가 떨리는지, 고개를 숙였을 때 한숨을 내쉬지는 않는지, 집에 가는 발걸음이 유독 느려지지는 않는지. 보고 또 보다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너 뭐야? 왜 안 들어가 있어?”
“반장, 왔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집이 있는 복도를 내달렸다. 그가 소망했던 재이라면 지금쯤 그의 집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요리를 하고 있어야 할 텐데, 그가 아는 이재이는 주인 없는 집, 그것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그렇게 마음 편할 여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울컥하는 감정이 화인지 아닌지도 몰라 잠시 바라만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환자도 많을 텐데 일하고 오느라 진짜 힘들었지?”
“……너는?”
“나는 괜찮았어. 짐이 좀 있어서…….”
불현듯 생각이 난 건지 우물쭈물 종이가방 하나를 뒤로 감췄다. 다리 아팠겠구나 미간을 모으던 그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시 숨을 멈췄다. 잠시 보였던 종이가방에는 이곳에서 가까운 백화점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오늘 그는 성인 남자이기도 했지만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했다. 눌러둔 무신경함이 모두 깨어나 그 억울한 한을 풀려는 듯 오직 하나의 인물에게만 촉수를 뻗었다.
“줘. 내가 들게.”
“아니야! 아니야! 무슨! 내가 들면 되지, 왜!”
당황에 가득 찬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했다. 어차피 내 집 앞이니 지금은 네 하고픈 대로 하라 생각하며 무표정하게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이걸 설치하고 처음으로 손이 미끄러져 삐빅 소리를 들었다.
“……안 돼? 왜 안 되지?”
네가 옆에 있으니 그렇지.
그녀의 작은 턱이 그의 어깨를 스치자 붉은 악마 티셔츠, 그중에서도 ‘Be the Reds’의 강렬한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문구 아래에는 더 강렬한 무언가, 지금 그의 손가락을 미끄러지게 하고 어젯밤을 새우게 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박영우가 뭐라든 간에 윤제희는 더 이상 응원복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이미 그는 누구보다도 ‘Be the Reds’ 해 있었다.
그의 집은 처음이 아니었고 심지어 하루 신세도 졌다. 그런데도 마음 편히 앉을 수도 없어 괜히 주방을 서성이자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제희도 싱크대 옆에 기대었다.
“나는 친구랑 밥 먹었거든. 이거 내가 집에서 가져온 반찬이야.”
“뭔데?”
“멸치 볶은 거랑 우엉 조린 거. 이건 오징어채야.”
“네가 그런 것도 해 먹어?”
“아, 응. 밖에서 사 먹으면 비싸잖아. 작년까지는 도시락도 싸 다녔거든. 이런 거 하나 해놓으면 며칠은 문제없어.”
봉투를 풀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반찬통을 쌓다가 제희가 전화로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아 참! 너 밥 먹어야지!”
“됐어.”
“왜? 배고프댔잖아. 반찬이 좀 그래서 그래?”
어쩌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싶어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쓸데없는 걱정과 실망이 가득하던 얼굴이 그가 다가오는지도 모르다가 흠칫 놀랐다.
“밥 먹고 왔어.”
“아까는 안 먹었다며?”
“너 여기 있는 거 보고 싶어서.”
“…….”
“내 집에 있는 게 보고 싶었어. 그뿐이야.”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파르르 떠는 재이를 내려다보다 그 작은 진동을 직접 느꼈다. 처음에는 손으로, 다음에는 입술로.
“아, 으음…….”
아직도 반찬통을 들고 있던 그녀가 손에서 힘을 빼자 반들한 싱크대에 쨍그르르, 유리가 구르는 소리가 맑다. 그 가벼운 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아 작은 회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주방을 울려 그녀의 작은 신음을 감췄다.
“하아……, 반장.”
그렇게 부르면 경기 보러 못 간다. 4년에 한 번이건, 100년에 한 번 있을 법한 기적이건 이 공간을 절대 못 벗어난다. 28세의 그는 아직은 자제심이 남아 있지만 19세의 그를 불러내자면 피 끓는 혈기에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
“……나 옷만 좀 갈아입고 올게.”
겨우 참아냈다. 그는 그녀에게 이번 월드컵이 일반적인 의미 이상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안 될 게 없다는 것을 매번 깨닫는 재이의 모습을 직접 보고픈 28세 윤제희의 욕심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기, 나 너 줄 거 하나 더 있어.”
“뭔데?”
입술을 떼고 나자 눈도 못 마주치더니 들고 있던 검은색 종이가방에서 붉은 티셔츠를 꺼냈다. 병원에서도, 이곳에 오면서도, 또 눈앞의 그녀에게서도 지겹도록 본 티셔츠다. 받아들면서도 영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너 전에도 이거 안 입었잖아. 내가 그래도 유니폼 회사 다니는데 하나 가져왔어. 주려고.”
유행이니 열풍이니 남의 이야기로 살았지만 일단 이재이와 같은 옷이라니 입어주는 게 맞다.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젖히자 떠듬떠듬 말을 이어가던 재이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야아, 놀랐잖아!”
“뭐 어때서?”
지금 보나, 이따 보나.
뭔가가 자꾸 마음에 걸려 평생 있는지도 몰랐던 심술이 나왔다. “어휴, 너도.” 하며 괜한 소리를 해보던 재이가 그가 옷을 다 입자 어색하게 웃었다.
“넌 이것도 잘 어울린다, 정말.”
그녀가 웃으면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의 기대와 미묘하게 어긋난 무엇에 손가락이 굽어들었다. 과신한 적은 없어도 분명하다 생각했는데.
선물이야 고맙지만 저 종이가방에 겨우 이런 티셔츠가 들어 있으면 안 됐다. 약속한 적 없던 그의 순정이 천사 같은 그녀에게 농락당한 기분이다. 결단코 이재이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뭐 해? 뭐 찾아?”
다리처럼 곧고 긴 손을 뻗어 바로 가방을 낚아챘다. 없다. 아무것도.
얼마나 허탈한지 마음에 난 구멍으로 영하의 바람이 다 스쳐 지났다. 침착함을 찾기도 전에 무겁기만 하던 입이 먼저 열려버렸다.
“너! ……진짜 레이스 안 샀어?”
“어어?”
단호한 말에 재이는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아무것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재이가 종이가방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가 친히 몸으로 막아섰다. 타오르는 눈에 붉은색 티셔츠의 음영까지 묻어나니 거기에 옴짝달싹 사로잡혀버린다. 최면에 걸린 양 진실만을 말하는 입이 조심스레 그를 묶었다.
“……이, 입고 왔는데.”
우글대는 사람들에 재이가 치이기라도 할까 봐 그가 바짝 긴장을 세웠다. 어깨에 두른 손이 방향을 틀다 허리로 내려오자 흐읍,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 그의 집에서 들었던 제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
「……잘했어, 아주.」
윤제희를 무섭다고 생각해본 것은 처음이다.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열아홉의 그날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나온다! 나와!”
광고를 내보내던 스크린에 광주월드컵 경기장의 영상이 떠올랐다. 태극전사들의 얼굴을 쭉 훑는데 벌써 승리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거기에 대형 태극기가 관중석을 뒤덮고 ‘Pride of Asia’의 하얀 카드 섹션까지 떠오르니 대낮의 열기가 무색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