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chapter 09. Lace
한국이 8강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우리나라 자체가 축구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어느 TV를 틀어도 경기 장면, 혹은 분석만 나왔고 사람들 중에 붉은색 옷 안 입은 사람이 드물었다. 심지어 길 가다 모르는 사람이 뜬금없이 ‘대한민국’을 외치면 무의식적으로 박수부터 치고 봤다.
이런 분위기는 요새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재이의 회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야, 너 김남일이랑 송종국이랑 둘 중에 누가 좋아?”
“나는……, 그래도 홍명보가 좋은데.”
“야! 홍명보는 유부남이잖아.”
영미는 자신이 고르기만 하면 그 사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컴퓨터 바탕화면 사진을 두고 볼펜을 시계침처럼 똑딱였다.
누가 그렇게 축구를 잘하나, 그렇게 잘해서 나한테 이런 기적이 다 생기게 하나, 그게 고마운 재이도 영미의 뒤에 서며 고개를 내밀었다.
“난 그래도 홍명보.”
그녀는 어떤 결정을 하든 간에 처음을 좋아했다. 애초에 변덕이 심한 성격도 아니었지만 보다 많은 시간을 알아온 사람이 좋았다. 실수나 성과는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는 거라 사람만 놓고 보면 항상 처음 마음에 둔 인물로 돌아가고는 했다.
“기집애, 얼굴 밝히기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영미가 웃자 재이도 따라 웃어버렸다. 요 며칠 새 그녀는 웃음이 참 많아졌다. 본인이 느끼기에 그 정도니 주위에서도 모를 리가 없다.
“야, 너 수상해.”
“응? 나 뭐?”
“다 알거든? 너 연애하잖아!”
너무 놀라 영미의 입부터 막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왜? 연애가 죄도 아니고.”
“아니, 그냥. 그래도 일하는 데잖아.”
“그런 걸로 치면 회사에서 주구장창 아이러브스쿨 하다가 첫사랑이랑 바람난 김 과장도 있는데. 너는 양반이지.”
회사에서 익숙지 않은 인터넷으로 딴 일은 안 해봤다. 하지만 회사 일로 오다가다 제희를 만나 이 상황까지 이르렀으니 달리 할 말도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제희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손도 잡고 키스도 했지만 사귀자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오늘도 만나겠네?”
“어, 봐서.”
“봐서는 뭘 봐서.”
영미가 손가락질을 하며 키득거렸다. 그런데도 그만하라는 소리가 안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금 가까이로 영미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있잖아……, 내가 진짜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
“응, 왜?”
“저기……, 남자들은 속옷 같은 거…… 어떤 거 좋아해?”
“뭐? 속옷?”
“아니, 내 이야기는 아니고, 그게…….”
그녀의 손보다 더 크게 벌어진 영미의 입이 한참을 멈춰 있다가 서서히 다물렸다. 늘 얌전하니 제 할 일만 하던 재이라 이런 질문은 그녀도 적응을 못 했다. 하지만 재이의 얼굴이 불에 덴 듯 벌겋게 달아오르자 이대로 입이 닫힐까 얼른 분위기를 이어갔다.
“음……, 오늘이 디데이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넌 세 번이나 부정을 하니 그냥 오늘 자리를 깔겠다는 거네. 뭐, 좋아. 좋은 일이야.”
“야아…….”
“그래서, 너 평소에 뭐 입는데? 아니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재이가 오늘따라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다 했더니 저거구나 싶어 얼른 끌어당겼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지퍼를 열어 뒤적이다 한심한 듯 재이를 쳐다봤다.
“이재이. 너 무슨 수녀원 입소하냐?”
“응?”
그래 봬도 밤새 고민해 가장 최근에 산 속옷으로 골랐다. 막눈인 자신의 눈으로 봐도 섹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소한 희고 깨끗하기는 했다.
“아우, 진짜. 빨리 마쳤는데 우리 백화점이나 가자. 응? 이런 건 평생 기념 되는 밤인데 돈 좀 써야지.”
“……에이, 안 돼.”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도 제법 활기가 차 있었는데 영미의 말을 듣는 순간 힘이 조금 빠졌다. 재우에게 보내준 돈도 그렇고 일정 부분은 항상 대전에 부치는지라 꼭 필요한 생활비 외에는 써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는 달리 사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사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야! 너 좋자고 그러냐? 그게 다 남자를 위한 거라니까?”
“……응?”
“남자를 위한 선물이라 생각하라고! 너 그 남자 안 좋아해?”
이런 식으로 물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녀가 윤제희를 안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니까. 결국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다 화면 속의 홍명보와 눈이 마주쳤다. 꼭 아는 사람에게 비밀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 침을 삼켰다. 너무 오래 알아도, 이런 단점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 대학병원에서도 여자들 눈은 다르지 않아 인기순위라는 것이 분명 존재했다.
월드컵 전까지야 피부과의 윤제희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부동의 1위로 자리매김했었지만 요새는 조금 달랐다. 비정상적인 분위기가 병원까지 휩쓸며 만년 100위권 밖에 있던 박영우가 남녀 할 것 없이 황제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자, 걸어. 걸어. 얼마 안 남았어. 형은요?”
“아, 어디 하지? 너 어디 했는데?”
“그걸 물어보면 어째요. 빨리 하기나 해요.”
“야, 이거 도대체 돈 딴 사람이 있기는 있냐? 너 수수료만 떼어먹고 뻥치는 거 아냐?”
“그걸 알려주면 어떡해요? 영업 비밀인데.”
“없는 거 아냐? 너 진짜 없으면 나중에 그 장부 압수수색 할 줄 알아.”
“있어요. 거의 없지만 있기는 있어요. 요새 세상 다 가진 놈.”
영우가 그 운 좋은 놈을 노려보다가 장부에 줄을 그어나갔다. 찍기 운이 없는 자신은 처음부터 수수료 장사로 나간 지 오래였지만 이 상황에 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윤제희, 너 나 몰래 축구 좋아했냐?”
“아니.”
“그럼 그렇지.”
그는 대학 때도 농구니 축구니 공 차는 무리와는 크게 어울리지 않았다. 공부가 밀려 있으니 그럴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시간 좀 있는 예과 때도 주말마다 휭 하니 어딘가를 다녀오고는 했었다. 그러고 나면 쉽사리 다가서기 힘들 만큼 고독해 보여 월요일이 될 때까지 한발 떨어져 쳐다만 보았던 기억이 난다.
“너는 오늘도 나가서 보겠네?”
“응.”
“나도 가면 안 돼?”
원래 제희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말에는 대꾸를 잘 안 했다. 그리고 말 한마디 정도는 더 해준다 쳐도 이미 그의 머릿속은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때 의연하게 구는 남자들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이재이.
재이가 그를 기다리고, 오늘 이곳으로 온다. 속옷까지 챙겨서.
그 사실 하나에 매달려 어젯밤도 버텼다. 그녀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그 담담한 고백이 가슴을 엘 듯 쥐어짜다가도 이제는 제 품에 가둘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흥분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라는 게 한 방향에서조차 미묘하게 어긋나기 마련이라 눈 뜨고 감는 모든 순간에 그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그것도 잠이라 부를 수 있다면, 간이침대에 눕기 전에는 확실한 안도를 주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고, 그 마지막 순간에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을 두고 고민했을 그녀가 미웠다.
또 눈을 뜨자마자 현실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는, 이렇게 다시 만날 때까지 변하지 않은 그녀에게 마냥 감사했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그는 상상이나마 늘 그랬다. 재이가 그저 그런 사람 만나 고생을 할 거라는 생각조차도 지웠으니까. 안 그래도 가느다란 몸을 떠올리면 차마 못 했다, 그런 거.
“야, 그나저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내가 그 새끼 주머니 털었는데 진짜 없더라? 그사이에 어디 감췄나?”
“누구?”
“최기영이. 여기서 콘돔 다 털어 갔잖아. 내가 그날 나가자마자 습격했는데 죽어도 아니라더니 진짜 아닌가?”
“…….”
“좋은 건 알아서. 도대체 누굴 잡으려고 그걸 다 훔쳤대?”
“……몰라.”
“짐승 같은 놈. 그거 다 쓰면 여자 죽을 텐데, 오늘도 걸리면 목 한번 졸라봐?”
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을 가만 만져보았다. 구차하게 목숨 구걸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살아야 재이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너 누구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야, 혹시 모르잖아. 대한민국에 이런 날이 얼마나 있겠냐?”
그가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기는 했다. 이번 여름 그에게 일어난 하루하루가 모두 그랬다.
“나 사실 오늘 내과 1년차 중에 주연희라고, 너도 알지? 같이 경기 보기로 했거든. 뭐 어쩌겠다는 건 아닌데……, 흐흐. 혹시 모르잖아. 먼저 덮쳐주면 나도 준비는 하고 있어야지, 흐흐.”
인턴 돌다가 피부과로 올 때부터 영우가 찍어놓았던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가 바로 떠올랐다. 인기가 많아 자신은 상종도 안 해준다 울상을 하더니 최근 도박사로 이름을 날리며 다시 연이 닿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작든 크든 기적이 누구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여튼 잘 보고 와라. 나는 최기영 족치러 가야지. 새끼 죽었어! 얍삽한 놈!”
영우가 나가고 나자 오늘 정신 차리고 나서 계속 그러하듯 피가 끓는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영우처럼 덮쳐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암시를 줬대도 이재이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얼굴이 빨개져 눈을 못 마주치던 걸 보면 알아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때와 변한 것이 없다면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 ◇
“지수 로그에서 또 틀렸네.”
“응. 이거 쉬운 거라 했는데 헷갈려서. 문과 애들이랑 문제도 같이 나온다는데 큰일이야.”
“한번 봐봐. 93년 교육 예산이 GNP의 3.7퍼센트라고 하면 이걸 식으로 먼저 만들어야지……. 여기까지 알겠어?”
“응. 알겠는데 이 부분에서 잘 이해가 안 가서. 식은 세우겠는데 말이 무슨 뜻인지 잘…….”
“…….”
“반장?”
재이가 자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 더 가까이 의자를 당기자 저도 모르게 말이 멎었다. 연필 소리를 사각사각 내며 그가 쓴 식을 따라 쓰는 모습에 넋이 나가 질문도 잘 못 들었다.
자신에게는 이재이의 성적을 올려 장학금까지 받게 만들어 같은 대학에 진학시킬 의무가 있는데 이 상태로는 심히 곤란했다. 그는 전날도 고개를 숙였을 때 살짝 비친 이재이의 가슴선 때문에 자다가 두 번이나 깬 전적이 있었고.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응.”
“와, 나 진짜 이러다 한국대 가겠다.”
“……한국대 가고 싶어?”
“애들 다 그렇잖아. 하하.”
생각만 해도 좋은지 턱을 괴고 즐거워했다. 그도 같이 즐거워하고 싶은데 가슴이 두근거리다 보니 쉽지가 않다. 그래도 저리 즐거워하는데 칭찬 한마디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잘했어.”
“정말?”
짝, 활짝 웃는 재이가 치는 박수 한 번에 그의 정신도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까이 앉은 그녀의 체향에 정신이 혼미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뒤쪽 창문을 열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데 초여름의 바람이 들어오다가 그녀의 머리를 휘날리게 했다. 첩첩산중이다.
“아아. 머리가 날려서.”
두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보드라운 머리칼이 그의 얼굴이 닿았다. 신경이 없는 머리칼이라지만 그에게 닿는 순간 올올이 살아나 그를 깨웠다.
“미안해.”
그 곤두서는 느낌에 숨을 참은 그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재이가 먼저 사과했다. 주머니에서 노란 고무줄 하나를 꺼내 얼른 머리를 묶자 아쉬움은 잠깐이고 이제는 희고 가는 목선이 그를 괴롭혔다.
처음 일주일간은 그녀의 신체 하나하나, 아주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적응을 못 해 공부를 가르쳐준다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반장, 이것 좀 봐줘. 풀긴 풀었는데 맞나 모르겠어.”
“…….”
“……윤제희?”
못 알아들을까 상냥하게 이름까지 부르는데 익히 알고 있던 목소리의 울림에도 그는 찡그렸다. 반듯한 얼굴에 억지 주름을 만들어서라도 깨어나야 했다.
“가르쳐준다면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었다. 남 탓이나 타박도 못 하는 애가 제 딴에는 장난을 걸어왔다.
“난 너는 다 아는 줄 알았어.”
“다 알아.”
“거짓말.”
“진짜야.”
안 믿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얗고 가지러한 이가 드러나자 그가 먼저 눈을 피했다.
이재이는 꼭 장학금 받고 대학에 가야 한다. 나랑 같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우느라 질문 하나를 놓쳤다.
“너 정말 다 아는 거 맞아?”
“……응.”
“그럼 내가 물어보는 건 바로 대답해줄 수 있겠네?”
“당연한 거 아냐?”
못 믿을 테면 관두라는 냉정한 눈빛을 겨우 지어내자 재이도 설익은 장난은 그만두었다. 그러고도 그날은 여러 번 대답이 없거나 늦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 ◆ ◇
“하아…….”
지금의 그는 같은 고민에 휩싸였다.
딩동, 딩동딩동. 끝도 없는 문자 수신음과 더 밑도 끝도 없는 재이의 문자들을 받고 2, 3초간 이마를 짚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별거 아닌, 그러나 의미심장한, 꼭 의미심장해야만 할 문자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히 세 번 읽어봤다.
“그렇단 말이지…….”
딩동, 성격처럼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손짓 몇 번에 문자가 갔다. 성인이 되었으니 뜨내기 머저리 같은 짓은 이제 정말 사절이다. 그는 이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