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17화 (17/48)

# 17화.

“나 동물 좋아하거든. 진짜 좋아해.”

마지막 말만 듣고 만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처럼 고개를 흔들어 부끄러움을 표현하지 못하는지라 느리게 정리하던 책상과 필통을 한층 거칠게 쓸어 담았다.

“교차지원 하면 수의대 갈 수 있지 않아?”

“근데 수의대는 등록금이 비싸서 진짜 안 된다고 할 거 같아. 교대도 겨우 허락받은 거라……. 이것도 장학금 받을 점수가 돼야 되지만.”

“무슨 영역이 문젠데?”

“수리. 문과라서 그런가 영 모르겠어……. 틀리는 데서 계속 틀리구.”

“저기. 내가…….”

“응?”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데.”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괜히 자신의 소맷깃을 만지작대다가 “아니야, 정말 괜찮아.” 소리만 하고 나가버렸다. 처음 해본 말을 거절당했지만 그는 조금 전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를 곱씹느라 정리를 다 하고도 한참 더 교실에 있었다.

재이는 집으로 오는 길에 성적표를 세 번 꺼내봤다. 걸음을 멈춘 게 세 번이었으니 꼭 그만큼 꺼내보았다. 전교 1등인 윤제희에게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보통의 눈으로 보기에는 제법 잘 나왔다. 학원 한번 안 가고 이 정도라면 다른 아이라면 굉장히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에휴.”

수리영역 성적이 점수를 다 깎아먹었다. 그래도 장학금만 아니라면 그녀가 원하는 곳은 갈 수 있을 텐데 그놈의 장학금이 문제였다.

“다녀왔습니다.”

“너는 뭐 하느라 지금 들어와? 와서 일 좀 도우라니까.”

“응. 할게. 지금 하려고 했어.”

가방을 벗어놓자마자 다시 행주를 집어 들었다. 네모를 두 번 접어서 테이블을 닦아나가다 안쪽에 누워 있던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당뇨 합병증이 최근 더 심해지셔서는 얼굴이 통 못해졌다.

“우리 재이, 시험 잘 봤어?”

“아빠.”

“못 봤어?”

그런 게 아냐. 누가 물어봐주는 게 좋아서 그래.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잘 봤어.’ 입 모양으로 말하자 없는 힘을 짜내어 허허 좋아하셨다. 물 한 잔 떠드리고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서로가 거친 손을 쓰다듬었다.

아빠의 손은 병색이 완연해 거칠했고 재이의 손은 찬물을 많이 만져 거칠했다. 누구 하나 딱 낫다고 하기도 뭐해 서로 부끄러울 게 없었다.

“우리 재이 수의사 될 거야?”

“되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 안 될 수도 있어.”

“너는 할 수 있지. 내가 알지.”

안쪽 이가 두 개나 빠져 아빠가 웃으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작은 회사나마 다니셨는데 아픈 사람 두고 일하라 떠미는 것도 참 못 할 일이었다.

“당신은 왜 애한테 바람을 집어넣어?”

“내가 무슨! 재이도 대학 가야 할 거 아냐?”

“왜 자꾸 헛바람을 넣냐고! 당신이 보낼 거야? 누구는 좋은 말 못 해서 이러고 살아? 재우는 또 어쩔 건데?”

주방에서 나오던 엄마가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대뜸 화부터 냈다. 그녀는 화를 내는 것이 싫어 비겁해졌다. 아빠가 나가라는 손짓을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버티고 있을 자신도 없었다. 저러다 엄마가 정말 지쳐버리면 다 그만두라 소리가 언제 나올지도 몰랐고.

사실 요새는 엄마와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덜컹거렸다.

“누나, 어디 가?”

“……아냐. 재우 넌 왜 이제 와?”

“엄마 아빠 맨날 싸우니까 그렇지. 앉을 자리도 없고!”

싸구려 과자 하나를 물고 들어오던 재우가 밖으로 나가던 그녀를 잡았다. 덜컹거리는 문 사이로 큰소리가 넘치자 혼자 들어가기는 싫은지 눈을 찡그렸다.

“…….”

“아니, 누나한테 화낸 건 아니고, 미안.”

그녀는 미안하다는 소리보다는 너 잘할 수 있다고, 대학도 갈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소리를 해준 두 사람 중 한 명은 아픈 몸 때문에 아무 발언권이 없었고 또 한 명은 그녀가 가까이만 가도 마음이 떨렸다.

너무 먹고살기가 힘드니 제 감정을 짚어볼 생각도 못 했는데 요새 들어 더더욱 심해졌다. 아까만 해도 윤제희답지 않게 무언가를 먼저 가르쳐준다는 소리가 나오자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해버렸다.

“재우야,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빨리 와! 나 혼자 들어가면 뭐해!”

자박자박, 습관처럼 걷는 길이래 봐야 학교 앞이 다였다. 날이 어두우니 고개를 들어도 보이는 것이 없어 마음처럼 끝없이 가라앉는 발을 억지로 한 걸음씩 뗐다. 학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돌아 나올 때 그녀의 앞에 깨끗한 운동화 한 쌍이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반장!”

“부반장, 너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아니, 나 뭐 놔두고 와서.”

거짓말을 했다. 이대로 제희가 가면 그때 다시 할 일을 찾아보려 했는데 그는 가지 않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에 있었다. 학교 앞 좁은 골목에 작은 움직임만 남아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있는지, 어느 거리에 있는지도 모두 알았다.

“집에 들어가.”

“응. 갈 거야. 너도 가.”

문 닫힌 서점 앞에 기대자 제희가 다가왔다. 한 발짝씩 떼는 그의 진중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안 갈 거잖아.”

“아냐, 갈 거야.”

“무슨 일인데?”

“아니……, 그냥…….”

진짜 눈물이 나오면 그것만큼 곤란한 게 또 있을까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나, 둘 가만히 숫자를 세다 보니 금세 원래의 이재이로 돌아왔다. 최소한 겉모습이라도.

“너 오늘 성적 때문에 그래? 그것 때문에 그런 거야?”

“……응.”

시험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의외의 핑계가 되어 거기에 기댔다. 제희는 입도 열지 않고 얼마간을 더 지켜보았다.

“내가. 내가 잘 가르쳐줄게. 마치고 조금씩 하자.”

“…….”

“화 안 내고.”

“…….”

“안 때릴게, 넌.”

푸훗, 웃음이 나와서 이마를 짚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윤제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너부터 가라는 듯 길을 비켰다. 네가 가는 걸 꼭 보고 가겠다는 뜻 같아 고맙게 서점 앞에서 비켜났다.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살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기어이 돌아보고 말았다.

“빨리 가.”

자신이 사라지는 방향을 끝까지 보고 있던 제희를 보다가, 그날 처음 그녀에게 붙은 가난과 잡다한 상황을 떼어냈다. 그러니 제 감정이 바로 보였다.

나는 윤제희가 좋아.

그걸 그날 처음 알았다.

◇ ◆ ◇

마주 앉은 그는 자신을 지켜보느라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어쩐지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왜 안 마셔?”

“응. 마실 거야.”

마시는 시늉만 하고 앞에 둔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겨울도 아닌데 멋쩍게 그 김에 손을 데우자 제희가 그 손을 움켜쥐고 만지작거렸다.

“추워?”

“에이, 안 추워.”

추워서 한 행동이 아닌데도 그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한 번 감쌌다. 커다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그녀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이만큼 잘 보인다.

“……그러고 보니까 나 아까 주스 사놓은 거 거기 놔두고 왔어.”

“가서 내가 마실게.”

“하하. 그래. 케이크도 있어.”

“응. 아무도 안 주고 내가 다 먹을게.”

“어……, 그리고 있잖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는 그를 보고 웃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사실은 대학 못 갔어.”

“……그래.”

“아니, 나는. 미안해서. 네가 나한테 수학도 가르쳐주고 그랬잖아. 그래서…….”

“미안한 게, 그것뿐이야?”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낮고 단정한 그의 음성에 감정이 실리자 듣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아래를 향했다.

“야아. 넌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럼? 병신처럼 너 잘했다고, 이제라도 만났으니까 괜찮다고 맘 없는 소리라도 해야 할까?”

“…….”

“난 안 괜찮아. 미칠 것 같았어! 그 이유가 다라면 네가 날 우습게 만들었어.”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재이가 이런 모습에 놀랐다면 미안하지만 아직 제 감정의 백분의 일도 채 표현을 못 했다.

“……그런데도, 네가 오늘 와준 게 너무 좋아서. 더 이상 화를 못 내겠어.”

“으음…….”

“너 진짜. 나 보러 자주 와야겠다.”

“응, 그럴게.”

그녀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화가 난다는 것이, 어디에 어떻게, 누구에게 화가 나는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폭넓은 마음으로 다독여줄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건지도.

“내가 이상한 거야?”

이번에는 재이가 눈을 크게 뜨는 정도만이 아니라 고개까지 세차게 저어댔다. 재이는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은 확실히 이상하다. 이 와중에도 안고 키스하고, 꼼짝도 못 하게 제 몸 아래에 눌러놓고 싶어졌다.

“야! 너 왜 호출 안 받아? 이제 슬슬 가야 돼. 치프 올 때 다 됐어!”

그들이 왔던 복도 끝으로 달려온 영우가 불 꺼진 휴게실을 찾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재이가 있는데도 이러는 것을 보면 급하긴 한 모양인지 그도 벌떡 일어섰다.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도 괜히 폐가 될까 반대편으로 먼저 몸을 돌렸다.

“반장.”

여러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웃어 보였지만 변함없이 쌀쌀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하다. 이상할 정도로.

만약 그가 다 괜찮다, 나는 상관없다고 했으면 고개 들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희는 늘 그녀를 편안하게 해줬다. 화를 내든, 무뚝뚝하게 굴든, 어떤 빈말보다도 더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남은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이제 좀 자연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고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입술을 한일자로 길게 늘였다. 곤란하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다.

“이재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자신을 쫓아 뛰어내려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그는 먼저 아래에 도착해 손을 내밀었다.

“왜 왔어? 너 들어가봐야지.”

“너, 내일 경기 보기로 한 거 안 잊었지?”

8강까지 간다는 걸 생각도 못 했으니 따로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약 경기를 본다면, 아마 보겠지만, 그러면 당연히 제희와 볼 것 같기는 했다. 누군가 내일 경기를 같이 보자 물었다면 그와 다른 말이 없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응. 안 잊었어.”

무슨 말이 오갔다고 그처럼 그녀도 뻔뻔하게 굴었다. 말해놓고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 약속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별로 기분이 안 좋아.”

“그, 그러면 어떡해. 따, 따로 보자고?”

눈썹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바로 그녀와 이마를 콩 부딪쳤다. 하여튼 이재이가 생각하는 거라곤 변함이 없다.

“그런데 딱 오늘까지만 안 좋으려고.”

“…….”

“내일은 우리 웃으면서 보자.”

“으응.”

윤제희. 윤제희.

다시 봐도 네가 너무 좋아.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널 안 좋아해.

“그래도 맛있는 거 많이 싸 와.”

“알았어. 저번처럼 동네에서 볼까?”

음식쯤이야 얼마 되지 않는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해주고 싶다. 자신은 음식 솜씨가 좋으니 그걸로 잘 보이고 싶기도 하다.

“아니. 여기서 봐.”

“어, 그래. 내가 올게. 음식도 많이 싸 갈게.”

“갈아입을 옷도.”

“……어?”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제희의 눈은 더없이 냉철했다.

“속옷이랑 다 챙겨 와.”

“…….”

“아니면 내가 사줘? 이 앞에 백화점 있으니까 내일 들러서.”

“아니, 아니야.”

“그럼 가져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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