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16화 (16/48)

# 16화.

“여기요. 소개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새로 받은 명함을 내밀었다. 제희를 만났을 때 구깃했던 명함 한 장이 신경 쓰여 다시 채워두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먼저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영업하시는구나.”

“네.”

“힘드시겠어요.”

“일이야 다 그렇죠.”

제희는 왜 안 올까. 낯설고 따끔한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혹시, 저 모르세요? 저는 왜 재이 씨 본 것만 같지?”

“네?”

윤지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마주 앉아 턱을 괴다가 눈을 바로 들었다. 그 눈빛에 너무도 선명한 감정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닌 듯했다.

“혹시 저희 학교 나오셨어요? 한국대요. 학교에서 본 것만 같은데.”

“아니요. 아닐 거예요.”

“그럼 친구네 학교에서 만났을까요? K대? Y대? 음…….”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명문대학이 연이어 나왔다. 그 뜻이 너무 빤하니 재이도 그만 돌아갈 때가 됐구나 몸을 일으켰다.

“어디지? 그럼? 혹시 과는?”

“아, 저 대학 못 나왔어요.”

“네?”

재이가 담담히 미소 짓자 이번에는 윤지 쪽에서 더 놀랐다. 이겼다 웃고는 싶은데 상대편에서 그다지 기죽는 기색이 없으니 다음에는 어째야 할지 생각했다.

“어머,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는 우리 또래는 거의 가니까.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 봤다고 생각했죠. 하기야 IMF도 있었고 사회에 빨리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자기 뜻이 그렇다면야 억지로 대학까지 가서 공부할 필요도.”

“그렇다기보다는.”

“…….”

“저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갔어요. 그래서 선생님처럼 멋진 분들 보면 참 부럽고 그래요.”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은 그녀가 조곤조곤 제 마음을 말했다. 너무 직접적으로 나오니 윤지 역시 더 이상은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렸다.

그때, 이미 열려 있던 문에서 커다란 남자 둘이 들어왔다. 둘 다 그녀가 보았던 사람들이다.

“이재이.”

그중 이 남자는 그녀가 계속 기다려왔던 사람이고.

“어……, 반장. 미안해. 연락도 못 하고 그냥.”

그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가득 차오르는 당황스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그에게 손을 잡혔다.

“……왜 이제 왔어.”

“……응?”

“재이야,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오늘도 보고 싶었어.”

다시 전화를 해도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됐구나 하면서도 다시 전화가 올까 미적대다가 기어이 선배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들어가자, 제희야.”

“네.”

화상 센터로 불려가던 그가 옷부터 갈아입고 소독을 했다.

「내가…… 보고 싶어?」

이재이는 아는 것을 물어보는 바보가 아니었고 애교도 못 부렸다. 한 번씩 맑은 소리로 하하 웃는 게 그녀가 보여주는 최고의 애교라 믿었는데, 공격이나 다름없는 기습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수술 전 딴생각은 접어두어야 하건만 바로 보고 싶다 말하지 못했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몸에 익은 게 있어 실수는 없었지만 나오고 나서도 그 생각에 빠져 있느라 휴대전화 켜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보가 따로 없다.

“지금 끝났냐?”

“아니, 좀 전에.”

새벽에 대전에라도 갔다 올까 하던 중에 병동에서 나오는 영우를 만났다.

“건 그렇고. 오올, 너 나한테 한턱 쏴라.”

“뭐야?”

“네 선물 사놨거든. 아니다, 자기 발로 왔구나.”

의미심장한 눈이 자신을 스쳤다. 실없는 놈, 하고 지나가기에는 그 눈빛이 집요해 턱을 돌렸다. 영우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의국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형준이 그 새끼 뻥만 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맞더라?”

“무슨 소리야?”

“청초하네. 순해 보이고.”

“…….”

“앞으로 봐도 이재이, 뒤로 봐도……, 어! 같이 가!”

그냥 달려갔다. 멈출 수가 없어서.

학창시절 체력장이나 기합받을 때 말고는 뛰는 일이 없던 그가 저절로 발이 떨어져 보폭이 넓어졌다. 영우 놈이 놀려대건 말건 그거야 나중 일이고 부끄럽지도 않다.

이재이가 자신을 보러 와주었는데, 집까지 내려갔다가, 그것도 처음으로.

그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조금 전까지 ‘보고 싶다.’ 빨리 말하지 못했던 후회 역시 말끔히 지워버렸다.

말을 안 하니 먼저 오기도 하는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그의 마음에 서린 불안에서부터 늘 보고 싶던 이재이도 좋았지만 제 발로 자신을 보러 와주는 이재이와 비할 수는 없을 테니. 어른스러운 남자이기 이전에 열아홉 살의 미성숙이 남아 있어 아직도 매해 여름마다 그 불안함의 발작을 동여매던 그였다.

“우와, 얘 좀 봐라. 난리 났네!”

재미있는 일을 놓치기라도 할까 영우도 바로 달려왔다. 그러다 생각났다. 설마 아직까지 윤지와 둘이 있지는 않겠지? 괜한 찝찝함에 자신은 이만 빠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었을 땐 벌써 의국 앞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없으면 좋았을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저는 우리 또래는 거의 가니까.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 봤다고 생각했죠. 하기야 IMF도 있었고 사회에 빨리 나오는 것도…….”

본능적으로 제희를 먼저 살폈다. 문 앞에 선 그는 무표정했다. 대화를 더 듣고 싶어 기척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큰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조각 같던 사람이 정말 조각이 되자 쉽사리 말도 걸지 못하던 중에 작고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저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갔어요. 그래서 선생님처럼 멋진 분들 보면 참 부럽고 그래요.”

“…….”

“……제희야, 안 들어가?”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문을 열었고, 또 영우가 발을 들였을 때는 벌써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영우의 눈으로 보기엔 화장기 없는 재이의 청초한 모습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여고생 같기도 했다. 그 앞에 선 자신의 친구도 그 또래로 보였고.

“……왜 이제 왔어.”

“……응?”

“재이야,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오늘도 보고 싶었어.”

박영우는 눈치가 제법 빨랐지만 우물같이 고요한 제희만큼은 그 속을 모르겠다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의 윤제희는, 어른이 아닌 어느 한 시점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바로 알았다.

“어, 저기…….”

더 잡지도 못할 만큼 둘만의 감정에 싸여 있던 사람들이 손을 잡고 빠르게 나갔다. 그녀의 무릎에 있던 낡은 짐가방도 이미 제희의 손에 들려 있었다.

“뭐, 뭐야!”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대 있던 윤지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 소리에 영우가 자신을 쳐다보자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불평이 연이어졌다.

“여자친구도 아니라면서, 아니, 내가 뭐랬다고? 요새 세상에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어딨어? 안 그래? 내가 알고 그랬냐고!”

“너 알고 그랬잖아.”

“……뭐?”

“너 나보다 더 눈치 빠르잖아. 그러니까 윤제희가 너한테 관심 없는 거 뻔히 알면서도 그러고 있는 거 아냐?”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작작 좀 하라고.”

“박영우!”

“너 불쌍해 보여, 진심으로.”

특별히 제희가 그의 친구라 편을 든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라면, 누구를 좋아해봤다면, 아무리 평화주의자라도 자신과 다르지 않았겠지.

“반장, 반장!”

두어 번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던 그가 불 꺼진 복도 어디에서 걸음을 멈췄다. 잡힌 손이 욱신거리는데도 놓지 않더니 서서히 고개부터 돌렸다.

“좀 앉자.”

“응. 아, 나는 너 바로 볼 줄 알고. 그래서 왔는데 네가 없더라구. 먼저 연락이나 하고 올걸.”

그가 일하는 병원이었다. 불은 꺼졌지만 이 커다란 병원에 눈이 한둘은 아니겠다 싶어 저답지 않게 쾌활히 굴었다.

“언제 왔어?”

“응. 30분 좀 안 된 것 같아. 내가 이런 델 잘 안 와봐서 몇 시에 닫는지도 모르고. 운 좋게 아까 네 친구분들 만나서, 그래도 안에서 기다렸어.”

“안 힘들었어?”

“응. 고속버스 타고 편하게 왔어.”

들고 있던 짐가방이 평소보다는 컸다. 모르는 사람이야 뭐 별다를 게 있냐 하겠지만 그녀가 자그마한 몸에 저 가방을 들고, 또 시외를 벗어나는 버스를 타고, 그렇게 밤길을 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는 않다. 짧은 순간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뀐다.

“재이야.”

“응?”

“……아냐, 이것 좀 마셔.”

웃는 모습도 순했다. 무슨 말을 하건 그러냐고, 알았다고, 한 번씩 기분이 상했는지 입술을 내밀다가도 금방 웃어버리던 이재이는 여전하다.

그녀는 친구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고 잘 챙겨주기도 했다. 눈치 봐서 곤란한 일은 먼저 하기도 했고,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선생님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이런 것도 없고, 그저 흘려들은 말 한마디로 몇 군데의 교대 앞을 서성인 적도 있었다. 그랬었다.

◇ ◆ ◇

93년, 모의고사 점수가 나오고 나서 교실은 발칵 뒤집혔다. 아직 수능의 포맷이 완전히 적응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서열화된 등수에서도 제법 변동이 있었다.

평소에 저보다 못하던 애가 잘 나오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고 있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유독 변함없는 사람은 윤제희 하나였다.

“야, 너는 또 1등이지?”

“등수 안 나와 있어.”

“이 점수면 당연히 1등 아니야? 전국에서도 손으로 세겠다!”

성적표를 받자마자 그의 주변으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얽히고설킨 사이로 아주 작은 틈 하나가 있어 그는 그 사이로 재이를 보았다.

성적표를 들고 앞에 붙은 배치표와 대조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자신의 성적표는 한번 보고 말았는데 이재이의 성적표는 금칠이라도 한 것처럼 보고 싶어졌다.

“반장, 너는 좋겠다.”

그는 늘 가방을 천천히 챙겼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면 창문도 닫아놓고 우유통도 밖에 내놓는 재이의 속도에 맞춰야 했으니까. 앞에서 배치표도 다시 정리해놓고 자질구레한 일거리까지 들고 지나가던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

그 역시 느릿느릿 닫던 필통을 놓아두고는 재이의 일거리를 넘겨받았다. “웬일이야?” 그녀가 놀렸지만 따지고 보면 일은 비슷하게 했던 것 같다.

“음, 너는 가고 싶은 데 다 갈 수 있잖아.”

“……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먼저 그런 소릴 꺼냈다는 건 잊은 모양인지 그가 꺼내는 말에만 부끄러워 웃었다.

이재이. 부탁인데, 나한테 좋은 대답을 해줘.

그는 재이가 그가 관심을 둔 모든 학교에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나는, 나는 잘 안 나왔어.”

“그래?”

“잘 안 되네. 난 예전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외우는 게 더 쉬운 거 같은데.”

“몇 점 나왔는데?”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1등의 여유냐, 무심하다, 그렇게 놀렸는데 그녀는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다. 시험은 둘째치고 사람 보는 눈이 저렇게 없어서야.

“어찌어찌 맞추면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이번에는 라군까지 있어서 재수 걱정은 훨씬 덜하다던데.”

“나는 진짜 재수하면 안 돼. 재수 절대 안 돼.”

늘 나긋하던 그녀의 말치고는 꽤나 진지했다. 재수하기 싫은 마음이야 누구나 같을 텐데 재이는 더 그래 보였다.

“……우리 집은 재수시켜줄 형편이 안 되거든. 그래서 꼭 이번에 가야 돼.”

“……어.”

“사실은 장학금도 받아야 돼. 그래서 성적에 딱 맞추는 것도 안 되고……, 바로 취업해야 하니까 교대에 가야 돼. 음, 그렇다구, 그냥.”

뭐하러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나 후회가 스쳤다. 윤제희 앞에서는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제희가 1등이라서가 아니었다.

“저기, 나 갈게.”

“이재이.”

“응?”

“그럼 원래 가고 싶은 데가 어딘데?”

후다닥 가방을 먼저 들고 나서다가 그를 보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입 한번 떼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네가 들으면 웃을 텐데.”

“안 웃어.”

“……그러면 너만 알고 있어. 꼭.”

둘만의 공간에서 한층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도 속닥거림에 귀가 가려울 지경이다. 비밀이 하나 생기고 그것을 간직하는 기쁨이 생겼다.

“음, 나 원래는 수의사 하고 싶었어.”

“수의사?”

“하하, 웃기지?”

웃기지도 않는 걸 두고 웃고 만 재이가 방금 한 말을 지우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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