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너 혹시 우리 학교에 온 적 있어?
형준이 본 적은?
나는?
입가에서 수많은 말들이 차례를 기다렸다.
“반장? 어!”
유독 말이 없다 싶어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그의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절망적인 질문을 모두 뒤로하고, 그는 오늘도 진심을 담았다. 사실 9년간의 모든 아침에, 그리고 지금, 늘 말해주고 싶던 가장 솔직한 그의 마음이다.
“오늘도 예쁘네, 이재이는.”
“아……, 뭐야. 너 진짜 변했어.”
그러게. 나는 변했어.
변하지 못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감정을 속이는 태도가 변해버렸어.
“그런가?”
그가 입꼬리를 올리자 볼이 발개진 재이가 민망한지 웃지도 못하고 괜히 손에 든 비닐만 뒤적거렸다. 그 어색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자신의 눈이 한층 더 뻑뻑해진 느낌이다.
내가 이렇게 진심이면, 너도 언젠가 네 진심을 보여주겠지.
너는 착하고, 예쁘고, 또 변하지 않으니까.
오늘 그들은 재이가 사는 동네의 작은 공원에 나와 있었다. 꼭 광화문이나 시청 같은 드넓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지금 대한민국은 일정 수준의 사람들만 모이면 응원전이 펼쳐졌다. 동사무소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빔 프로젝터가 스크린을 비추자 그곳에 대전경기장의 광적인 열기가 옮아왔다.
“우아아!”
아직 공조차 잡지 않은 시작에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동네이다 보니 오순도순 가족들이 주를 이루어 정겨운 맛이 있었다.
- 네! 지금 전 국민의 눈이 여기 대전월드컵 경기장으로 몰려 있는데요! 이미 이곳은 열정의…….
아나운서의 말이 시작되자 그녀가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들다가 그를 보았다. 대전이라는 지명 하나에 두 사람의 가슴이 각자 다른 이유로 뛰고 있었다. 재이가 말하지 않고 제희가 묻지 않는 이야기 하나로 인해.
“……우와, 저기도 사람들 저렇게 많구나.”
“대전도 큰 도시니까.”
실제로는 대전 시민보다는 전국에서 몰려온 축구 팬이 더 많았겠지만 그의 눈은 아랑곳없이 어두워졌다. 몇 번 그를 쳐다보다 앞을 보기를 반복하던 재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집 지금 대전인데……. 대전으로 이사 갔거든.”
“알아.”
“…….”
“그리고 넌 여기 사는데 왜 너네 집이 대전이야.”
“아니, 내 말은.”
“시작한다, 재이야.”
그 정도는 알 거라 생각했다. 그거야 한 번쯤 물어보면 아는 일이고, 그 정도를 물어볼 만큼의 관심은 있을 거라 믿었다.
“응.”
지금이 적당한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주저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고 앞을 향했다. 어쩐지 오늘의 제희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열아홉 살의 윤제희도, 다시 만난 스물여덟 살의 윤제희도 아니다. 조금 더 어른 같고 위험한, 그녀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남자의 모습. 그 모습마저 싫지 않아 낯선 남자 앞에서 가슴이 떨린다.
“반장, 오늘은 내기 안 해?”
“하고 싶어?”
달빛 아래, 환한 스크린을 앞에 두고, 그보다 더 빛나는 미소로 제희가 주변을 밝혔다. 내기를 하자면 그러자고 하려 했는데 막상 하고 싶냐 물으니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녀는 이겨도 빌 만한 소원이 없었으니까.
한 가지 있다면 이 순간이 조금이나마 더 지속되기를 바랐는데 6월이면 월드컵은 끝이 난다. 아무리 윤제희가 못 하는 게 없는 천하무적이라도 정해진 월드컵 일정을 늘일 수는 없다.
“너는? 하긴 전에 소원도 못 썼잖아. 그건 언제 쓰려구?”
“너 그렇게 여유 있어?”
“여유는 무슨.”
“내가 말하면 다 되는 거야?”
“들어줄 수 있는 거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주고 싶다. 그간 제희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부탁 하나로 때우려는 자신이 염치없다 싶을 만큼 그를 보면 마음이 따끔거린다.
“그럼 더 생각해봐야겠다.”
“너 은근 얌체야.”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둘 모두 잘 아는지라 피식 웃고 말았다. 그사이 경기는 시작되었고 초반부터 격렬한 몸싸움이 오갔다.
곳곳에서 탄성과 탄식이 번갈아 나오더니 생각보다 빨리 한국 팀에 기회가 왔다. 문전에서 이탈리아 선수와 경합을 벌이던 설기현이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안정환이 키커로 섰다.
“다, 당연히 들어가겠지? 응?”
멋모르는 아이 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두 손 모으고 입을 다물었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염원하던 그녀가 결정적 순간을 볼 자신이 없는지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
“에휴, 어떡해……. 안 들어갔나 봐. 안 들어갔어.”
기운이 쭉 빠지니 입술이 나왔다. 부담감이 클 거라 생각은 했고 이탈리아가 강국임은 알았지만 저런 상황에서 안정환이라면 당연히 넣어줄 거라 생각했다.
“들어갈 줄 알았는데…….”
“본인도 넣고 싶었겠지.”
“응. 알긴 아는데……, 그냥 당연히 넣을 줄 알았어. 잘하는 선수잖아.”
아무리 그 실력이 뛰어나도 보장된 것은 없었다. 감히 축구로 안정환에게 댈 실력은 아니지만 윤제희도 당연할 거라 생각한 순간을 놓쳐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기보다는 저 사람이 얼마나 참담할지부터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쩌나 안타까워하겠지만 그건 본인 마음과 비할 순 없었다. 저 상황쯤 되면 스스로가 제일 미쳐버린다. 너무나 당연하다 믿었기에 심장이 뜯기는 그 기분, 그건 겪어본 사람만 안다.
“아우, 나 못 볼 것 같아.”
전체적으로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 아슬아슬하더니 결국 이탈리아가 먼저 골을 넣었다. 섣불리 입조차 떼기 힘든 상황에 재이가 울상을 지었다.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제희는 스크린을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잘하긴 잘하나 봐, 깡패처럼.”
불만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웃던 그가 재이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긴장된 마음을 대변하듯 멈출 줄 모르던 작은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잡히자 그제야 움직임이 멎었다.
“아……, 반장.”
“왜? 부반장?”
나 축구 봐야 하는데. 이러면 어떻게 보라는 건지.
손을 잡지 않았을 때는 화면도 보고 제희도 구경하고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손을 잡히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제희의 손은 따듯하다. 눈으로 살피지 않아도 길고 날렵한 손가락의 모양새를 그려낼 수도 있을 만큼 깊이 엉켜들었다.
“벌써 가는 사람들도 있네? 음.”
“너도 가고 싶어?”
“아니. 난 끝까지 보고 싶어.”
“질까 봐 못 보겠다면서.”
“혹시 모르잖아.”
그녀는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지식의 90퍼센트도 이번 월드컵으로 처음 알았다. 한국이 이겼으면 하지만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계속 제희와 이렇게 손잡고 있고 싶다.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손은 놓지 않는 그가 마음을 간질였다. 경기 시작 전에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아닌가 했는데 지금 보니 윤제희는 여전히 윤제희였다.
“너는? 나보단 잘 알잖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이기고 싶겠지.”
그가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안정환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이기고 싶은 사람이 바로 저 사람 아닐까. 눈앞에서 기회를 놓쳐보면 그 미련과 회한이 때때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는 했다.
“그럼 끝까지 보자.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끝까지 보는 게 예의지.”
“그래.”
후반전에 들어서자 경기는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은 전반보다 많이 자리가 잡혀 분위기가 살기 시작했고 역시나 이탈리아는 수비를 강하게 했다. 중반을 넘어서고는 모 아니면 도인지라 한국은 무리수다 싶을 만큼 공격수의 비중을 높여갔다.
“저렇게까지 하다가 또 뚫려서 골 먹으면 어떡해.”
“뒤가 없잖아.”
그냥 단순한 친선 경기가 아니라 4년에 한 번 있는 월드컵이었다. 8강 티켓이 걸려 있었고 여기서 지면 다음이 없다. 사생결단이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해보고, 손놓고 있어봤자 패배밖에 없다면 지더라도 곱게 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게 생겨난다.
“어어…… 어어어…… 아아아아!”
“우와아아!”
“골! 골!”
사람들이 반쯤 일어서고, 또 남은 반도 슬슬 자리 정리를 하려던 후반 43분에 설기현의 동점골이 터졌다.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숨죽였던 그녀가 이번에는 헷갈리지 않고 바로 제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목에 손을 꼭 감고 고개를 파묻는 그녀를 들어 그대로 한 바퀴를 돌렸다. 비명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와도 동네가 떠나가는 사람들의 함성에는 못 미쳤다.
“제희야, 제희야!”
반장 대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흥분을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1분여가 지나고야 진정이 되는 듯 그의 목에서 손을 떼어냈지만 그는 감싸 안은 재이의 허리를 놓지 않았다.
자리를 빠져나온 동네 꼬마가 둘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히죽히죽 웃을 때까지 둘은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아쉽게 떨어지던 손이 제자리로 오기 전에 그녀의 손을 먼저 찾았다. 두 번째라 덜 부끄러운 그녀가 땅을 보며 웃었고 바로 경기는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또 하나 봐. 얼마나 하는 거지?”
“15분씩.”
그때는 이기고 지고의 문제보다는, 이런 일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구호를 외쳐야 할 힘마저 눈으로 쏟아 집중했다. 경고 누적으로 이탈리아 선수 하나가 퇴장하고는 하나 둘 소리가 높아지더니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기회는 한국 쪽에 더욱 빈번히 찾아왔다.
골이 들어가지 않아도 모두가 생각하는 마음은 같았다.
되겠구나. 이거 정말 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그가 자신처럼 투영하던 안정환이 역전골을 넣으며 한국은 결국 8강에 올랐다.
“우아아아아!”
“대한민국!”
“제희야! 이겼어!”
상황이 극적이라 더욱 감격했다.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고 자동차 클랙슨까지 박자 맞춰 울려댔다. 얼마 멀지 않은 그녀의 집으로 오는 내내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 눈물 나더라. 정말.”
“그랬어?”
“응. 16강만 가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또 막상 욕심이 자꾸 생겨서.”
그런데 그 욕심이 자꾸만 이뤄지니까 무서울 정도야.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아.”
작은 몸에 감당 못 할 감격인지 그녀가 제희보다 몇 발이나 앞서더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살짝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눈웃음을 흘리자 어딘가에 홀려 가는 것처럼 그녀의 자취를 좇는다.
“위험해.”
“안 위험해. 반장 네가 보고 있잖아.”
팔까지 벌려서 장난을 치는 그녀가 깔깔거리며 그의 밤을 데웠다. 가만가만 본다. 그늘 없는 웃음이 오랜만이라 그의 불안도 조금은 걷혔다. 애초에 포기를 모르는 그였지만 그야말로 이번 경기를 보고 평생에 남을 만한 생각을 몇 가지 했다.
끝은 끝이 아니었고, 간절한 사람이 결국에는 승리했다.
“어어…… 어어! 놀랐잖아.”
마냥 좋아 뒤로 걷던 그녀가 등에 무언가 닿는 느낌에 놀라 그만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바로 제희가 그녀의 방향을 바꿔 안았다.
“아우, 차 있는 거 봤음 말 좀 해주지.”
“내가 왜?”
“의리 없어.”
의리 없을지언정 이렇게 한 번 더 제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정정당당한 건 여유가 있는 사람한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음……, 저기. 우리 집에 갈래?”
“너네 집?”
“응……, 아, 다른 뜻이 절대 아니고, 차 막히고 그러니까 잠시라도.”
“그럼 안 돼.”
“왜?”
“난 다른 뜻이 급해서. 그 생각밖에 안 날 것 같아 자신이 없어.”
아껴주고 싶고 예뻐해주고 싶다. 그래서 이재이가 방금처럼 깔깔 웃으면, 오늘 가졌던 그의 불안도 과거의 어느 일로 묻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콘돔도 없고.”
“아, 뭐야? 뭐야! 왜 여기서 그런 말을…….”
누가 보기라도 할까 소심한 재이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사실 그러면서도 웃었다.
그녀는 무슨 자신감인지 제희가 당연히 자신의 집에 갈 거라 믿고 있었다. 전 같은 상황이 온다면, 오늘 괜찮은 날이라고 먼저 말하려 했었고. 뭐든 이뤄질 것 같은 날이니 몸보다는 기분이 괜찮았다. 이렇게 이재이 인생에 가장 큰 결심을 했는데, 그걸 몰라주는 윤제희가 얄밉다.
“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돌아가, 반장.”
한 손을 들고 돌아서던 그를 끝까지 지켜봤다. 뒷모습이 왜 저리 훤칠하나 했는데 이번에는 제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심해! 앞 보고 가!”
“재이야!”
장난이라기에는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거리가 제법 멀어졌는데도 작은 골목엔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만 선명하게 남았다.
“응?”
“나, 너 정말 보고 싶었어! 그동안 하루라도 생각 안 해본 적이 없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를 두고 못 본 체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 그게 아무리 너라도.
그런데 이 감정은 오늘로 묻어두려고.
우리 둘 사이엔 내가 더 간절하니까.
그리고 언젠간 내가 이길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