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그가 빙그레 웃었다. 이재이한테는 처음부터 이렇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풀어주면 딴생각이나 하고 있고, 그날부로 자신의 몸은 이재이에게 묶여버렸으니 마음이라도 자신이 움켜쥐고 싶다.
이렇게 흐뭇한 계획은 그의 인생에 처음이다.
“어……, 반장!”
커다란 병원 로비에 있던 그를 주위 사람들이 흘끔거렸다. 멋모르고 그를 불렀던 재이가 뒤늦게 눈치를 보며 민망해했다.
“약속 잘 지키네, 부반장.”
이 소리 어디에 부끄러울 데가 있다고 그녀가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이 너무 속없는 여자는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해본다.
“밥은 먹었어?”
“응. 오늘 거래처에서 얻어먹었어.”
“거래처 어디?”
“어디라고 하면 알아?”
커다란 눈을 찡그리며 장난스레 놀려도 제희는 대답을 기다렸다. 모른 체 장난을 치기에는 그녀도 그의 마음을 잘 알았다. 자신 역시 궁금하다. 병원에서 밥을 먹었을 윤제희가, 누구랑 어떤 식사를 했는지.
“너 바쁘지?”
너무 당연하니 제희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안 바빴으면, 아니, 덜 바빴으면 이리 번거롭게 그녀를 오라고 할 일도 없었다. 달려왔을 그녀를 보는데 목덜미 한쪽에 물기가 서렸다. 화장기 없는 모습과 어우러져 사람만 없으면 장소가 어디든 다시 눕혀놓고 싶다.
“반장 너 가운 입은 거 보니까 진짜 의사선생님 같다.”
“그래?”
“응. 신기해.”
처음 본 건 아니지만 그때완 또 다르다.
그의 마음이야 알 바 없는 재이는 드라마 속 배우 같은 제희의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깔끔하게 다림질한 가운을 보니 그래도 그 계통에서 일하는 티를 내려는지 시선에 제법 꼼꼼함이 서려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참 위의 제희가 웃으며 지켜보았다.
“아, 호출 왔다.”
“호출?”
“응. 들어가봐야 될 것 같아.”
채 10분을 채우지 못했다. 제희야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도 자신이 미적대면 괜히 그가 미안해할까 먼저 등을 돌렸다.
“그럼 나 갈게. 너도 얼른 가봐.”
“이재이.”
호출기를 들여다본 그가 그녀를 먼저 쫓아왔다.
“우리 집에 가 있을래?”
“……으응?”
“어딘지 알잖아. 나 새벽에는 들어갈 수 있어.”
“아냐. 어떻게 그래.”
당황하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의도적인 건 아니겠지만 그날 이후 제희가 꺼내는 모든 말이 자꾸 한 지점으로 몰렸다.
“그래, 그럼.”
안으로 들어가야 할 제희가 먼저 밖을 향했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야 할 그녀 역시 자연히 그의 옆에 서서 보조를 맞췄다.
“들어가지.”
“택시 타는 거 보고.”
“뭐하러. 아직 버스도 다니고 지하철도 다니는데.”
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택시승강장에 섰다. 앞에 있던 사람이 빠져나가자 그가 그녀의 등을 밀어 한 걸음 같이 옮겼다.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안 그래도 돼. 너 일하느라 그런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왜 미안해?”
“뭐?”
“이재이는 약속 지키는 거잖아. 두고 볼 거야.”
이런 면이 다 있었나 싶게 능글거렸다. 그럼에도 택시를 잡아 자신을 태우는 손길이 더없이 다정해 차마 눈을 흘기지도 못했다. 말과 마음이 다른 것, 그것이 윤제희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집 앞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의자에 똑바로 앉기도 전에 그가 앞문을 열어 돈까지 미리 쥐여주고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문자가 왔다.
[나야. 너무 억울해하지 마. 내일은 내가 갈 테니까.]
묘하게 설득력 있고, 묘하게 마음을 끌고, 묘하게 시선을 잡아둔다. 다른 사람에게는 뻔뻔스러워 보일 문자가 오직 이재이에게만 그렇게 보였다.
“남자친구가 아주 멋있네요? 잘 챙겨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직은.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게 남자친구가 아니면 뭘까 싶으면서도 아직은 관계가 명확치 않다. 윤제희의 진중함을 믿으면서도,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어린 나이에 사회로 나와 자연히 터득하고 말았다. 그 씁쓸함을 혀 밑에 녹여 살고 있는 그녀가 조용하고 수줍게 말했다.
“네에.”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아저씨니까, 집에 가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제희를 그녀의 연인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머뭇머뭇 거짓말 한번 하고, 누가 알까 그게 또 부끄러워 문자만 살폈다.
윤제희, 너 모르지?
나 지금 네 여자친구 됐어. 이 택시 안에서.
그 당시 한국대표팀의 객관적인 시각을 보면 대충 이러했다. 특출하진 않아도 내 자식이니까 잘하면 좋겠는데, 그 자식이 터무니없이 잘해버리니 부모의 어안이 벙벙해 꼬집어도 믿지 못할 현실 같은 거랄까. 그 부작용으로 비정상이다 싶을 만큼의 열기와 자신감이 대한민국 전체에 퍼져갔고 세상에 별 낙이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심했다.
“영우야, 나 바꿔줘. 나 한국 우승하는 걸로.”
“에이, 형.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되죠.”
“박 쌤. 제발요. 저는 마지막에 했잖아요. 바꿔줘요.”
“그러니까 더 안 되지. 이 기회주의자야.”
물에 물 탄 듯 하던 영우가 수첩 들고 있는 오늘만은 가차 없었다. 잘하면 얼마 안 되는 월급보다 더 건지겠다 싶어 그는 병원 전체를 주무르는 도박사로 우뚝 서는 중이다.
“오, 조형준이. 드디어 왔구만. 꽁보리 주제에 근무이탈 하면 쓰나!”
“넌 아직도 이러고 다니냐? 이 인간 말종아.”
그들의 대학 동기이자 인턴만 하고 공보의로 가 있던 형준이 오랜만에 병원을 찾았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어 전라도 어느 섬에 가 있던 그가 거의 흑인이 되어 나타나자 영우가 손가락질까지 하며 웃어댔다.
“얌마! 너 온 김에 표백 좀 하고 가라.”
“너는 못 믿겠고 제희한테 좀 해달라고 할랬더니 안에서 자더라?”
“걔는 잘 때 됐지. 요새 계속 밤샘했거든. 안 그래도 시간 되면 깨워달라고 했는데. 그나저나 선물 안 사왔어? 경기 볼 건데 먹을 거나 좀 사오지.”
“내가 뱃삯도 없어서 헤엄쳐서 나왔는데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 그래도 급한 대로 특산물 좀 가져왔지!”
“오! 뭔데? 회? 아니지, 마른 오징어 그런 거?”
“아니. 콘돔. 평균 연령 72세 신월도 보건소에서 다 뽀려 왔지. 요새 이거 구하기 어렵다며?”
형준이 자랑스레 오케이 표시를 해 보였지만 김빠진 영우는 바로 팔꿈치로 그를 찔렀다.
“영우 너도 후회하기 전에 챙겨. 내가 여자애들 볼까 봐 의국 안에 넣어놓고 왔어. 그거 수입 초박형이야.”
“야, 너는 손에다 콘돔 쓰고 하냐?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근데 어딨는데?”
시시껄렁한 장난을 치다가 의국 문을 열자 제희는 없고 1년차 하나가 벌써 TV를 틀어놓고 오늘의 경기를 분석하고 있었다.
“야, 인마! 네가 지금 TV 볼 때야?”
“오늘만 좀 봐주십쇼!”
“으이구, 벌써 돈 다 꼴아박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근데 제희는? 제희 여기서 자고 있었는데.”
“나 왜?”
화장실에서 머리를 털고 나온 그가 영우를 보다가 옆에 있는 형준과도 인사를 나눴다. 형준은 그와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해 말없는 와중에도 꽤 친하게 지냈다.
“형준아, 근데 콘돔 어딨어? 말 나온 김에 수입 콘돔 구경 좀 하자!”
“위에, 여기 상자 안에 놔뒀는데……, 없네?”
“뭐? 그게 왜 없어? 발이 달렸나?”
“말이 되냐? 어……, 너 인마. 수상해! 너지?”
영우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1년차 후배의 의자를 툭툭 걷어찼다. 평소에 하도 여자를 밝혀 병원 내에서만 뺨을 여러 번 맞은 후배였다.
“네에? 제가 왜요? 저 지금 여친도 없는데!”
“여친이 아니니까 더 쓰고 다니겠지.”
수건을 뒤집어쓴 제희가 영우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반대의 이유로 콘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너 뒤져서 나오면 하나에 십 원이야.”
“아니라니까요! 뒤져보시라구요!”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내가 뒤지라면 못 뒤질 줄 아나? 흐흐.”
“조용히 좀 하지?”
수건을 걷어낸 제희가 크게 한소리 하니 원래 한가득이던 위압감이 증폭했다. 밤샘을 하더니 심기가 사납나 싶어 영우도 장난을 멈추고 TV 앞에 앉았다.
“최기영, 넌 이제 나가봐.”
억울하다는 표정의 후배가 제희의 말에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진짜 이게 어디 갔지?”
“보면 모르냐? 딱 봐도 최기영이지. 걸어 나갈 때 폼도 어정쩡하잖아. 주머니에 쑤셔넣었구만. 내가 여친 없어서 봐준다.”
“내가 저딴 놈 준다고 배 타고 기차 타고 여기까지 가져온 게 아닌데.”
“뭐 좀 먹을래?”
시계를 보던 제희가 우두커니 서 형준을 보았다. 거절할 리 없는 형준이 어깨까지 흔들어가며 전단을 뒤적였다.
“두 마리 이거 시키자. 딱 봐도 비둘기 살인데 맛은 있어.”
“그래. 제희야 돈! 퇴근할 거면 돈 좀 내주고 가라!”
“앞에 지갑 있어.”
며칠간의 밤샘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이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식염수를 넣고 눈을 깜빡이는데 형준이 돈 대신 다른 것을 찾아 들었다.
“어? 한일 유니폼 이재이? 이재이?”
“이재이가 누구야?”
영우까지 거들자 제희가 얼른 다가와 때라도 묻을까 명함을 뺏어 들었다. 그도 아까워 지갑 앞면에 끼워놓고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이재이……, 이재이. 흔한 이름은 아닌데 내가 이걸 어디서……, 아! 혹시 예전에 그 부반장 아냐?”
“부반장은 또 누군데?”
“아, 있어.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재이라고. 이 자식이랑 이름 비슷해서 3반 놀러 가면 다들 부반장이라 불렀어. 난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거든, 재이랑.”
“오, 예뻐?”
“응. 걔는 청초한 스타일이지. 예쁜 것도 예쁜데 잘 웃고 착해서 인기 많았지……. 어, 제희야, 얘 진짜 그 이재이 맞아?”
좋은 뜻으로 그녀의 이름이 나왔지만 제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래도 이참에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도 무언의 긍정으로 형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 진짜 맞나 보네?”
“응.”
“얘도 참, 웃긴다. 이렇게 결국 만날 거면서 그때는 왜 그랬지?”
뜻밖의 말에 그가 옷깃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것이 재이와 관련된 이상 귀를 닫을 수도, 이야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숨만 쉬었다.
“왜? 이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예과 땐가, 본과 땐가 헷갈리네. 하여튼 나 얘 학교 식당에서 봤었거든. 나름대로 반가워서 아는 척했는데 당황했는지 피하더라고? 엄청 큰 가방 메고 있었는데 들어준다고 해도 아니다 하고. 인사도 잘 안 하고. 그런 애 아니었는데 내가 괜히 민망해서.”
“어? 우리 학교 다녔나?”
“아니야, 내가 물어봤는데 아니래. 그냥 뭐 하다 들렀댔나? 뭐 횡설수설하길래 온 김에 제희도 불러서 밥이나 먹쟸더니 손을 막 내젓더라고. 절대 안 된다고.”
그가 뻑뻑한 눈을 감았다. 영우가 옆에서 이 자식이 오죽 괴롭혔나 보다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말에 나올 웃음은 이미 말라버렸다.
“이렇게 다시 볼 거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피했지? 너한테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하도 그러기에 알았다 하고 또 까먹었는데 너네 다시 만났나 보네. 유니폼이면 영업하나? 아직 예쁘지?”
바로 지갑을 낚아채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본 친구라도 마음 쓸 여유가 없다.
이재이가, 어째서, 자신을 피했을까. 모른 척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저를 보지 못한 시절을 피 마르게 아쉬워하는 요즘, 이재이는 제게 고개를 내저었단다. 단순히 불쾌한 감정이 아니다. 교류가 단절된, 돌아오지 못하는 마음이 뜯겨나간 전선처럼 너덜거려 지지직 소리를 냈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한번 느껴본 적 있었다.
“제희야, 뭐 해?”
윤지가 어제와 같은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잡았다. 어젯밤 재이를 바래다주고 다시 병원에 들어오다 이렇게 마주쳤었다. 그때 자신은 마냥 귀찮고 성가셔 적당히 고개만 끄덕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재이도 그랬으려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운전대에 올랐다. 이대로 재이의 집 앞으로 그녀를 데리러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충실한 몸을 놓아두고 정작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전에, 그 아까운 시간에 이재이는 제게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으로 그러지 않았다. 그게 그의 마음을 할퀴어 기어이 피를 냈다. 이재이에 한해 그의 자존심은 접었으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라면 차라리 좋을 정도다.
“너는…… 어떻게…….”
빠앙! 지나가던 행인이 돌아볼 만큼 거세게 핸들을 내리쳤다. 이건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었다.
서서히 눈을 뜨니 앞유리에 그날의 우연을 천운으로 여긴 천하의 바보가 자신을 향했다. 그는 그날 자신이 죄짓고 살지 않았던 지난날의 모든 보답을 한 번에 받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너한테 나는 뭐였을까 하는 흔하디흔한 유치함이 그를 잠식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턱없이 많았지만 그 이전에 물어야 할 것조차 겨우 덮어둔 상태였다. 제 감정을 누르고자 힘겹게 침을 삼키고 시동을 걸었다.
어둠 너머로 부끄럽고,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재이가 보였다. 가까워올수록 환하게 웃는 것이 환상같이 흐릿하다.
“왔어? 빨리 왔네? 천천히 와도 되는데.”
“…….”
“이제 가자. 내가 오늘 샌드위치도 싸놓고 간식거리하고 다 챙겼어. 거기 사람 많으면 뭐 사 먹기도 그렇고 오늘 같은 날은 바가지 쓸 거 같아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종알거렸다. 이재이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