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12화 (12/48)

# 12화.

“오늘은 내가 밥 살게. 가자.”

“아냐. 내가 사야지. 네 덕에 번번이 신세만 지고.”

그가 입을 꽉 다물었다. 이재이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날처럼 낱낱이 벗겨보고 싶다.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이제 좀 살 만하겠구나 했는데, 그녀는 처음 만난 날처럼 눈을 못 마주쳤다. 그러라고 이렇게 차려입고 나온 것이 아니다.

“이리 줘.”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뺏어 들었다. 종종거리며 따라오던 재이가 그제야 그의 차림을 보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눈부시게 멋지다. 만약 길을 다니다 윤제희 같은 사람을 보았다면 사라질 때까지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반장.”

그가 몸을 돌려 다소 부담스럽다 할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뒤에서 오는 사람들은 커다란 남자 혼자 서 있구나 할 만큼 그의 그림자에 그녀의 몸이 완전히 가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생각났어?”

제희는 여전히 감이 빨랐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이미 모두 보았다.

망설이는 눈빛, 초조한 손짓, 어색한 미소까지.

이제 와 한발 물러나겠다면 사절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그건 아닌데. 음……, 저기 너 안 그래도 된다구.”

“뭘?”

갈증이 섞인 단답형의 대답에 지나가는 여자들이 흘끗거렸다. 그걸 재이가 먼저 느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손가락 끝으로 다시 데려왔다.

“엄마야!”

“뭘? 뭘 안 해도 되는데?”

윤제희 정말 남자 맞구나. 정장 입고 이렇게 있으니 교복 입고 있던 그와는 또 달랐다. 유독 반짝거리는 이 남자가 너무 좋고 설레는데 또 마음이 아프다.

“오랜만에 만나서, 월드컵 되고 해서 자주 보고. 그래서 정말 좋아, 난.”

“…….”

“근데, 음, 네 일 하는 것도 힘들다고 들었는데 나 때문에 괜히 사람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고 다니고……, 그러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안 그래도 된다구.”

어찌 들릴지 몰라 중간중간 웃음을 섞었다. 수원에서는 너무 당황해 몰랐는데 어제도 오늘도, 뒤에 제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과장님이나 부장님이나 모두 좋아하는 일을 두고도 이재이는 못 그랬다. 말 나온 김에 제희가 들고 있던 제 가방을 다시 받으려 손을 뻗는데 그가 더 힘을 꾹 주어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살짝 닿은 약지가 그의 손에 바로 엉키자 고개를 올렸다.

“그럼 난 너 언제 봐?”

“응?”

“그렇게라도 아니면 난 너 언제 볼 수 있어?”

간신히 잡은 그녀의 시선을 틈 하나 없이 꽉 붙들어 맸다. 그녀로선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아니, 그거야……, 그냥 마치고 연락해도.”

“월드컵 아니라도?”

“으응? 그, 그럼.”

그럼 난 좋게.

“내기 같은 거 안 해도,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연락하라는 건가?”

“……어?”

“그럼 내일도 나랑 봐. 모레도. 그다음 날은 못 나오는데 주말은 나랑 있어. 다음 주는 내일 병원 가서 확인하자마자 알려줄게.”

너 나한테 자꾸 이러면 어떡해.

욕심 안 부린다 했는데 부리고 싶어졌다. 통장 잔고는 오늘 다시 바닥을 쳤는데 마음은 하늘에 닿아버렸다. 그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그만 웃고 말았다.

“이거 소원 아니다?”

“으응? 뭐?”

“소원 쓴 거 아냐. 네가 먼저 보고 싶을 때 연락하랬으니까 난 매일 볼 거야. 네 말대로.”

“…….”

“약속은 좀 지켜줘, 부반장.”

#chapter 07. 보고 싶었어

“아무래도 마취 풀리면 아이가 많이 힘들어하거나 손을 댈 거예요. 정 힘들어하면 다시 진통제를 투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축 늘어져만 있을 거라. 당분간은 손 안 대게 밤에도 좀 지켜봐주세요.”

“아휴,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지원아, 약속했지?”

뜨거운 물을 엎어버려 화상을 입은 꼬마 환자가 울먹울먹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표현은 못 했다. 달리 해줄 게 없으면서도 성인 환자만큼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아 다시 무릎을 굽혔다.

“조금만 참으면 돼. 세 밤만.”

“세 밤이요?”

“응.”

아이의 가는 머리를 쓸어주자 손가락 새가 간질거렸다. 아파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킥킥 웃는 것을 보니 달리 표현을 안 해도 그의 마음을 아는 듯하다. 원래 아이들이야말로 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감이 가장 뛰어났고 그게 그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솔직하니까.

“지원아, 너 줄 거 있댔잖아.”

꼬마 숙녀가 부스럭대면서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히히, 웃음소리부터 흘렸다. 그가 다시 앉아 손을 내밀자 그 위에 곧 빵 봉투가 놓였다.

“선생님. 내가 이거…… 주려고……, 히히.”

“고마워, 잘 먹을게.”

“그거 선생님이 먹어야 돼요. 이마에 점 있는 이상한 선생님 말고.”

“응. 그래.”

며칠 밤을 새우다가도 이런 때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니 조금 더 다정하게 굴면 좋을 걸, 타고난 성격이 있어 잘 그러지 못했다. 그걸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요새는 종종 궁금해진다.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이재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오오, 웬 빵? 나 좀 먹자.”

“이마에 점부터 빼고 와.”

멋모르는 영우가 이마를 만져보다가 그래도 고픈 배가 먼저라 체면 불구하고 달려들었다. 원래 제 것은 아니니 미안하기는 한지 손에 잡히는 대로 제희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꼬마 숙녀 성의를 생각해 그도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거 맛있다, 야. 백화점에서 파는 거잖아, 이거.”

“그래?”

“응. 이거 다른 쌤들이 맛있는 데라던데. 그런데 난 입맛이 싸구려라 그런지 옛날 빵이 더 좋아. 학교 앞에서 팔던 소보로빵이랑 고로케 같은 거.”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식성이 같았다. 그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고로케 좋아하지 마.”

“……응? 지금 뭐란 거야? 왜?”

“너는 안 돼.”

이재이가 고로케 좋아하니까.

엮이지 마. 그게 티끌만 한 거라도.

◇ ◆ ◇

하굣길에 서면, 그 오른편엔 작은 동네 제과점이 있었고, 그곳 유리창 앞에는 잔돈을 세는 이재이도 있었다. 왼쪽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세어보던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설 때도 있었고 한숨과 함께 돌아서기도 했다. 주로 후자가 많았다.

그는 당시에 지금의 배로 무뚝뚝해선 멈춰 서서 ‘너 뭐 하느냐?’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옮기다가 재이와 눈이 마주쳐 ‘반장!’ 하고 불러주면, 그날은 윤제희에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자, 반장 어머니가 간식 넣어주셨어. 재이야! 네가 좀 하나씩 나눠줘.”

“네?”

“부반장 재이. 둘 다 헷갈려서 반장, 부반장 안 하면 어쩔 뻔했어! 내가 선견지명이 있지. 하하. 아이구, 경욱아. 너도 줄 테니까 자리에 좀 앉아라, 이놈아.”

선생님이 주고 간 커다란 박스에는 그 제과점에서 파는 모든 빵이 골고루 있었다. 그렇게 주문을 했으니까. 이왕이면 이재이가 제 것 먼저 골라놓기를 바랐는데 역시나 안 그랬다.

“저기, 이거 다 다른 거라서 먹고 싶은 거 하나씩 가져가면…….”

조그만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반장, 고맙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심기가 사나워졌다. 아이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겁먹은 재이는 또 뒤로 물러서 손도 못 댔다.

와글거리는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그녀는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꼭 다물며 웃는 것이 뭔가 있구나 했는데 그녀가 조심스레 빵 두 개가 남은 상자를 제일 뒷자리의 그에게로 들고 왔다.

“반장, 너도 먹어. 너네 엄마가 보내셨잖아.”

“됐어, 난.”

“그래도 먹어야지.”

하나 집고 말면 그만인데 남은 빵이 두 개였다. 고로케와 단팥빵. 복권 추첨도 아니고 그깟 것에 윤제희가 긴장을 다 했다. 중간에 손을 놓고 고심하다 고로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담백한 아이이니 기름기 많은 거 안 좋아할 것 같다 싶어 손이 갔는데 살짝 올려다본 그녀의 표정이 허탈했다.

이거구나. 고로케.

설마 할 것도 없이 바로 단팥빵을 집자 재이의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 가득 돌았다. 별로 감출 마음도 없는지 다른 아이들처럼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먹을게, 반장.”

역시나 잘 먹으라 소리도 못 했다. 그러나 다음부터 그의 어머니가 간식을 넣을 때면 다양성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고로케 53개가 배달되었다.

오늘처럼 남으면 이재이가 하나 더 먹겠지. 한번 향한 마음은 끝을 볼 수 없어 그는 지난 9년간 단 한 번도 고로케를 입에 대지 않았다.

◇ ◆ ◇

늦어진 퇴근에 눈이 가물하면서도 끊임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안 되겠다 싶어 부러 거실에 놓아두고 할 것 좀 하려 했더니 그것도 마음 같지가 않다.

이를 닦다가도 괜히 거실에 나와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물을 끓이다가도 다시 돌아와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그렇게 의미 없는 행보만 계속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그녀라 적어도 살은 빠지겠거니 기지개를 켰다.

“윤. 제. 희.”

이제는 심심하니 명함을 또 들여다보았다. 닳을까 조심조심 보다가 손으로 매끈한 감촉을 즐겼다. 제 것도 이런 거면 좋았을 텐데.

“여보세요?”

- 나야.

그는 이제 발신자 표시가 없는 전화에도 ‘나야.’라는 애매모호하고 확실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을 때 호칭이 없는 사람들은 가족 아니면 그뿐이었는데 그 둘의 느낌이 많이 달랐다.

- 뭐 해?

“응. 그냥 씻고 누워 있었어.”

전화 속 침묵이 길어진다 싶으니 제 대답이 조금 민망하다는 걸 알았다. 그날의 일이 없다면 모를까, 그는 이미 자신이 벗고 누워 있는 것도 본 사람이다.

“어……, 책도 보고.”

- ……그래.

“넌 뭐 해? 병원이야?”

오전에 들었으니 당연한 걸 또 물어봤다. 아직은 아무렇지 않게 일상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만큼 자연스럽게 굴지는 못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사실이다. 어디서 뭘 하는지, 밥은 먹었는지, 그런 것 전부가.

모르고 살았을 땐 어디서 잘 있는지나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당연히 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제희를 멀리했다. 처음에는 그래야 한다고만 생각했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용기가 없어져 무의식의 꿈에서만 간간이 그려보았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하고 살았는데. 어른이 된 윤제희가 어떠할지 상상해보다 고개를 떨군 적이 몇 번 있었다.

원망하려나, 날 선 눈빛으로 보려나, 그게 두려워서.

그런데 다시 만난 제희는 그때보다 말도 잘하고 한 번씩 이상한 열감으로 그녀를 꼼짝 못 하게 사로잡기도 했다. 처음 한두 번은 월드컵 탓이다 미뤄놓았는데 지금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는 월드컵이 아니라도 자신이 보고 싶다 말해주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마냥 행복했다.

- 왜 이렇게 빨리 자?

“오늘은 그냥 조금 피곤해서.”

- 많이 피곤해?

“아니, 많이는 아냐.”

걱정할까 싶어 말을 바꿨다.

- 그럼 여기 와.

“응?”

- 오늘은 도저히 못 나가겠어. 보고 싶으니까 네가 와.

“뭐라고?”

- 안 돼? 네가 보고 싶을 때 연락하면…….

“알았어, 알았다구.”

전화를 끊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덜 마른 머리에 닿은 목덜미가 서늘한데도 굳이 새 옷을 찾아 입었다. 늘 그리던 윤제희를 다시 보고, 보고 싶을 때 보고, 이렇게 밤에도 보자는데. 몇 벌 없는 옷이 젖는 정도가 아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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