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11화 (11/48)

# 11화.

아니겠지. 설마 콘돔을 나한테 주면서 어떻게 해보라고는 안 하겠지. 아무리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애라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나, 나 못 해.”

“뭘?”

“이런 거 어떻게 해. 그냥 네가 해. 너 남자잖아!”

“뭘?”

한 글자에 30원짜리 대답이 연이어 들려오자 재이가 눈을 질끈 감고 비닐봉지를 밀어버렸다. 그러다가 알았다. 콘돔은 이렇게 따끈하거나 부피가 크지 않다.

“어……, 어.”

“따듯할 때 먹어. 너 이거 좋아했잖아.”

그가 직접 비닐봉투에서 고로케를 꺼냈다. 김이 아직 모락거리는데도 눈에 뭐가 씌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한입 베어 무는데 그걸 냉소적으로 보던 제희가 제 머리를 감싸고 소리를 높였다.

“아아아아아!”

“왜, 왜애? 무슨 일인데? 밖에 무슨 일 났어?”

“……콘돔 안 팔아.”

먹는 사람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닌데 윤제희도 담고 담아두다 그만 폭발해버렸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참을 수 있다, 세뇌를 하며 들어왔더니 준비한 듯 옷 다 입고 있는 이재이를 보자마자 열통이 터졌다. 그런데도 이 속없는 여자의 표정이 스르륵 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큭큭 웃느라 난리가 났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너는 이게 웃기냐고.

그걸 묻기도 전에 그의 헛웃음이 먼저 나와버렸지만. 예전부터 그는 그녀가 웃으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는 윤제희와 자지 않았지만 잠은 같이 잤다. 무슨 말이냐면, 그녀는 지금 그의 침대에 누워서 제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까는 터무니없는 열기에 녹아 그렇다지만 지금은 설명할 수도 없다. 그냥 이렇게 됐구나, 자연스럽게 여겼다. 아니, 여기려고 노력해보았다.

“지금 집에 못 가. 나가봤는데 밖은 난리가 났어.”

제희나 재이나 안에서도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애써 목청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겁먹은 토끼 같은 이재이는 또 생각에 잠기고 말 것이다.

“아침에 버스 오니까 그때 나가. 아니면 내가 데려다줄까? 그게 낫겠어?”

“아냐, 버스 타고 가면 돼. 버스 타면 되지.”

“그러든가.”

그 대답 후에 정신을 차리니 여기에 누워 있었다. 그의 말에는 한참 후에 생각하면 꼭 함정이 담겨 있는 것을. 내미는 선택지는 항상 그녀가 선택하고도 이게 왜 이렇게 되나 찝찝했다.

“저기, 네가 집주인인데 침대는 네가 써야지.”

“됐어.”

“음……, 그래도 좀 아닌 것 같아.”

남자답게 양보를 했으면 이불 들고 나가주면 고마울 텐데 윤제희는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너 왜 안 나가냐 물어보려다 보니 여기는 제희네 집, 제희의 침대였다.

“그런 소리,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베개에 묻혀 반 정도만 보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쿵 하고 내려앉는 가슴을 애써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나도 잠 오면 갈 거야. 걱정 마.”

“으응.”

“어차피 나도 여기서는 잠 못 자.”

잠이 든 척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만큼 숙맥은 아니었으니. 윤제희 역시도 이런 어설픈 연기에 속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지만 적당히 속아주었다.

그리고 숨 고르는 소리가 몇 번 더 나고, 그 소리에서 적당한 규칙을 찾았다 싶을 때 쌔근쌔근 그녀는 잠이 들었다. 다시 봐도 속 편하다.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

“그래. 너라도 편해.”

그는 잠이 오면 나가기로 했지만 잠이 오지도, 들지도 않아 날이 밝을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래도 그만하면 약속은 지켰으니 더 이상 죄책감은 없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을 한 것은 누구에게나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평소라면 조금의 실수도 억지로 집어내 소리를 질렀을 과장님도 너그러웠고 고객들 역시 알아서 주문을 왕창 넣었다. 당연히 몸은 바빠도 마음은 가뿐했다. 다른 여느 직장인들처럼.

“야, 박지성 완전 멋있었지! 왜 이제껏 그런 사람을 몰랐을까?”

“나도 몰랐는데.”

“아우, 야. 김남일도 멋있고! 완전 야성미가 넘치잖아.”

벌써 국가대표팀 사진을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영미가 컴퓨터를 볼 때마다 황홀한 숨을 뱉어냈다. 그게 지겹지 않은 것은 이미 재이에게도 월드컵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8강 갈까?”

“가면 좋은데. 난 잘 모르겠어.”

사실 16강에 가는 것도 생각 못 해봤으니 8강은 감이 안 온다. 지금처럼 경기를 여러 번 하는 건지, 한 번 하고 끝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랑 누가 이길까? 아까 복도에서 보니까 과장님이랑 남자 직원들 완전 난리 났더라. 내기 수준을 넘었다니까?”

“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자신은 그 내기에 빠져 9년 만에 본 동창 집에서 밤을 보냈으니 내기 수준을 넘어선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속내는 달랐지만 남이 보기엔 그럴 것이다.

“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냐? 축구 엄청 좋아하나 했는데 뭘 아무것도 몰라.”

“아……, 그냥. 다른 직원들도 입길래…….”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잡히는 대로 팸플릿을 들고 나서니 별달리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제 볼이 벌써 티셔츠만큼이나 붉어졌다.

「소원이 너무 터무니없이 날아가서 어떡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나서는데도 제희가 기어이 차 키를 들고 따라나섰었다. 눈 뜨고 나니 부끄러움이 밀려와 아무 소리도 못 하다가 겨우 한 말이 그 한마디였다.

「나 소원 안 썼어.」

「응?」

「어젯밤엔 너도 원했잖아. 아니야?」

그러니 그게 왜 소원이 되냐는 거였다. 너무 태연하니 대꾸를 못 했다. 그가 고작 자신과 한번 자는 것에 소원을 걸지는 않았을 텐데. 잘 알면서도 정작 소원이 뭔지는 몰랐다.

어쩌면 사귀자거나 그런 게 아닐까 간질간질한 바람도 담았었는데 윤제희는 별말이 없었다. 그게 다행인지 실망인지, 마음이 복잡하다.

소원을 빨리 써버려야 다음 내기가 있는데. 그래야 이탈리아 경기를 기다리는 남은 나날을 선물처럼 받을 수 있을 텐데. 약속이 없으면 다음도 없는 이 관계가 목을 꽉 조였다. 이제껏 잘 살아놓고는,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여보세요?”

- 누나. 나야.

“어, 재우야.”

- 어제 내 문자 못 봤어?

“어어, 아침에 봤어, 미안.”

- 저기……, 엄마가 전화했지?

남동생인 재우였다.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임감이 더해 마음이 제법 무겁다.

“어, 맞아.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건 거짓말이다. 하기야 할 테지만 되도록 안 하고 싶었다.

- 누나, 너무 신경 쓰지 마.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번에는 재우의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재우를 잘 알고 늘 돌아가는 패턴도 잘 알았다. 엄마가 화를 내거나 푸념을 하고, 재우는 적당히 손을 내젓고, 자신은 결국 돈을 보냈다.

“그래?”

- 맨날 누나가 해줬는데 또 그러긴 좀 그렇잖아.

말에 자신감이 없다. 재우는 엄마처럼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아도 늘 그녀에게 기대고 싶어했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건지, 다른 방법이 없는 건지 꼭 이렇게 한 바퀴를 빙 둘렀다. 그런 생각 안 하려 해도 엄마와 다른 말이 오간 건지 궁금하곤 했다.

“그래, 그럼. 해주면 좋은데 나도 요새 좀 힘들어서.”

- 응?

되묻는 음성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확실히 제 생각이 맞았다. 뭐랄까, 어쩐지 서글프다. 그런데도 네 일은 이제 알아서 하라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 나이에는, 자신처럼 억지로라도 기대고 손 벌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눈 딱 감고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었다.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재우도 그렇겠지. 모른 체 한 발 뺐지만 그녀는 자신의 다음 행동도 잘 알았다.

“재이야, 너 나가야지! 강남 쪽 병원이라는데?”

“응, 갈게!”

힘을 붙였다. 동생이든 가족이든, 그녀 역시 돈이 필요했다. 물가 비싼 서울에서 버텨내려면,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도 한 번씩 보고 살려면.

두 시간으로 예상됐던 흉터 제거 수술은 세 시간이 훌쩍 넘어 끝났다. 환자가 아직 아이이다 보니 더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고, 나오자마자 보호자에게 잡혀 시간을 꽤 많이 보냈다.

아직 레지던트인 그가 해줄 만한 말이야 일단 기다려봐야 한다거나 차차 경과를 살펴보자 정도였지만 그는 그 말도 최대한 진중하게 해주었다. 분명 같은 말인데도 더 안도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영우는 장난스레 그 말투를 흉내 내려 애쓰기도 했다.

“아우, 좀 쉴 만하다 싶으니까 수술이야.”

“네가 다음인가?”

“응. 요새 사람들이 넋 놓고 살아 그런지 사고가 많네.”

제희가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넋 놓고 말았던 날. 그는 그날, 앞으로의 밤을 괴롭힐 새로운 핀업걸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너는 무슨 동문회 회장 자리 노리냐? 상현이 형한테도 그러더니 왜 요새 전화질이야?”

“알 거 없어.”

“알 거 없어도 들리는 게 많습디다.”

알아도 모르는 척, 영우가 그의 어깨를 털었다. 그도 부인할 생각은 아니라 턱을 들어 넥타이를 조였다. 거울 뒤로 보이는 그 모습이 같은 남자끼리도 탄성을 내뱉게 했다.

“너 무슨 선보냐? 어휴. 눈이 부시네, 부셔.”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정장을 입었다. 병원에서 쉴 새 없이 뛰다 보니 머리가 다소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완벽한 차림의 그는 그마저도 매력적이다. 윤제희가 그럴 리 있겠냐만 여기서 귀만 하나 뚫으면 TV에 나오는 섹시한 외국 선수 같은 느낌도 들 것 같다.

“나 이제 갈게. 수고.”

“얌마, 너 그런데.”

“왜?”

“윤지 말이야.”

평소에 실없어 보이는 영우지만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급한 와중에 시선을 기울였다.

“윤지가 요새 분위기 안 좋더라구. 너 알잖아, 걔가 너 예과 때부터……, 음. 내가 웬만하면 참견 안 하는 주읜데. 여기 분위기도 그렇고.”

“갈게.”

어떤 뜻인지는 알아 이번에는 제희가 영우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다만 별달리 해줄 만한 말은 없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마자 길을 막듯 서 있던 윤지를 만났다. 이 바쁜 곳에서 일부러 사람 없는 이곳에 서 있었다면 그를 기다렸다 봐도 좋을 것이다.

“저기, 제희야!”

“응.”

“어디 가? 너 어제도 나갔잖아.”

“허락받았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최근 들어 더 초조해졌다. 그녀의 감이 가리키는 사람은 분명 그녀보다 못했는데. 옷차림이나, 들고 있던 가방이나 자신과는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날 이후 윤제희는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음. 너 좋은 데 가나 보다 싶어서. 영우한테 들으니까 너 요새 선배들한테 전화도 하고 그런다길래. 좋은 데 있으면 같이 가자. 나도 너 따라 선배 찾아다니면서 밥이나 얻어먹게.”

“그건 곤란해. 식사라면 따로 찾아가보든가.”

“야아. 너 옷까지 이렇게 차려입고. 정말 선이라도 보는 거야?”

“그런 거 안 봐.”

대화를 할수록 초조함이 거세지던 윤지가 돌려 말하기를 포기하고 의문점을 바로 짚었다. 그런 방법은 좋지 않다 여겼지만 지금 와 그냥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럼 옷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

“그래서 이렇게 입어봤어. 옷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여잔데도.”

눈을 내린 그가 바로 앞을 향했다. 실연이라도 당한 듯 구는 윤지가 입술을 물어뜯더니 몇 발짝 더 따라오다 멈췄다.

그는 평소대로 걸었고 병원을 벗어나자마자 차를 향해 달렸다. 야간진료 시작 전 저녁시간에 맞추려면 그도 서둘러야 했다. 액셀러레이터를 조금 강하게 밟고, 지하에 내려갈 것 없이 발레파킹을 맡기고, 엘리베이터 대신 3층 계단을 달려 올라가고, 그래야만 이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어……, 반장. 안녕!”

아직도 민망한지, 반쯤 웃으면서도 살짝 손을 드는 이재이의 목소리를.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실 수 있게 준비할게요.”

“감사야 이놈한테 해야죠. 뜬금없이 전화 와서는, 하여튼.”

옆에 붙어 서 있던 제희를 보니 그녀가 알 정도로만 살짝 입매를 늘였다. 심란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앞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오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그래요. 제희야, 너 약속했다! 나중에 여기서 일하기로!”

듣고 있기가 곤란해 뒤로 빠져 있다가 먼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제희도 급히 내려왔다. 결 좋은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보고 있는 마음도 흐트러진다.

“천천히 내려오지.”

“왜 먼저 내려가?”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화가 났구나.’ 착각하기 딱 좋았다.

“그냥. 너 편하게 얘기하라고.”

“회사에서 바로 나왔어?”

“어. 은행 좀 갔다가……, 그리고 왔지.”

“뭐 타고 왔어?”

“지하철. 지하철이 제일 빨라.”

“그거 다 들고 안 힘들었어?”

“에이, 이 정도야 뭐. 지하철 안 다니는 데는 버스 타야 하는데 그거 몇 번씩 갈아타면 어떤 때는 눈이 안 떠져. 하하.”

웃으라고 한 이야긴데 제희는 통 웃질 않았다. 말할수록 못마땅해하니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도 부끄럽다. 어제나 오늘이나 제희 얼굴만 봐도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난생처음 남자가 제 벗은 몸을 보았는데 그녀 성격에 멀쩡한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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