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엄마야!”
“여기야.”
언제 웃었다는 건지 살벌한 눈길이 남자들을 스치고 재이의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뒀다.
“아, 놀랐네.”
“여기라구.”
네 자리는 여기잖아.
촉촉이 벌어진 입술에 바로 입을 맞췄다. 방금 전 마셨던 톡 쏘는 주스 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 9년 전 버스 안에서, 그때 마셨던 주스도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참고 참았던 마음이, 스스로가 지독하다며 혀를 찼던 마음이, 사람 넘쳐나는 이 광장에서 가벼이 흘러나올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충동적이나마 다른 남자와 손끝 하나라도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를 이리 만들었다. 그 꼴 보자고 참고 있던 게 아닌데, 그렇게 가볍게 자신을 확인시키려 했던 그의 생각이 묵사발 났다. 한번 맛본 그녀의 입술을 끊어낼 수가 없다.
“바, 반장. 이게. 나는…….”
“너, 앞에 저 새끼들이랑 이러려고 했어?”
“아니야! 내가 무슨!”
“할 거면 나랑 해. 나랑 왔잖아, 여기.”
그녀와의 첫 키스라면, 그 역시 수십 가지 방법으로 꿈꾼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황홀하기보다는 당혹함이 가득한 그녀에게 미안하다 싶으면서도 차마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오늘 그의 인내는 상대편 골대가 흔들릴 때 같이 허물어졌다.
“으음, 제희야…….”
다시 입술을 찾았고 이번에는 키스가 더 길어졌다. 연인들과 이곳에 와 키스를 하는 커플이야 심심치 않게 많았지만 유독 고삐 풀린 윤제희는 더 격렬하고, 무자비했다. 오죽하면 그 와중에도 얼굴을 붉히며 쳐다보는 관람객까지 생겨났다.
“여기 나가면 우리 집 있어. 집으로 가.”
“하, 하지만 아직 안 끝났는데…….”
“이재이, 이 정도면 이긴 거야.”
나도, 대한민국도.
그러니까 이쯤 되면 넘어와줘.
#chapter 06. 대란의 시초
병원 근처에 집을 얻었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그 인파를 뚫고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아 밀쳐지고, 또 헤치고 가는 길이 꽤나 험난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달해 1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에야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 어……, 저기. 손.”
“손 왜?”
윤제희는 초록색 화살표에 시선이 꽂혀 손 같은 건 보지도 않았다.
망할 놈의 엘리베이터는 관리비만 꼬박꼬박 받아먹더니 기어 다니나? 5층 미만이었다면 진작에 뛰고도 남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재이는 그럴 체력이 없다. 오늘 그는 이재이의 체력이 필요했다. 어쩌면 많이.
“아니, 나는 정말.”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 남자도 멋있다지만 한 손으로 비밀번호를 1초 만에 다 누르는 남자도 제법 그럴싸했다. 그리고 커다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세상이 다 울릴 듯한 함성이 퍼져나갔다. 시계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TV를 켜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둘 다 알고 있다.
“……봤지?”
나는 이겼어.
손을 잡고 있던 그가 대번에 허리를 감쌌다. 이미 그에게는 경기 결과 따위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책임감 강하고 약속 잘 지키는 이재이를 묶어둘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남자의 감도 때때로 여자 못지않아 망설임 가득한 그녀의 뉘앙스를 알아들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들을 것도 없이 바로 입술을 찾아들었다.
“으으음.”
윤제희가 이재이의, 반장이 부반장의 입술을 빨아들이자 혀가 닿은 곳에서 시작된 뜨거움이 금세 전신을 감쌌다. 그가 제 성격처럼 가지런한 그녀의 치열을 훑더니 이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바싹 붙였다. 숨막히는 키스도 바깥 함성에 묻히자 별다르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거기다 눈을 감으니 이곳이 밖인지 안인지도 가물거린다.
이런 것도, 참 좋구나.
그래. 어쩌면 오늘만은 다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그녀 인생이나, 대한민국에나 이런 일이 또 있을지는 모르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천하의 윤제희도 휩쓸리는 분위기라면 그녀라고 못 할 것도 없다.
열기가 올랐을 때, 취기 없이도 정신이 혼미한 이때라면. 거기에 상대가 윤제희라면.
“그런 거 아냐.”
감은 것과 다름없는 그녀의 눈, 그 작은 틈에도 제희는 재이의 생각을 읽어 내렸다.
“……으응?”
“나 너랑 자고 싶어.”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그랬어.
겨우 저런 거, 월드컵에 이기고 지고가 영향을 끼칠 만한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었다. 충동이 없다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만 바탕이 없는 충동은 아니다. 차곡차곡 쌓아둔 감정이 한번 드러내지도 못하고 감춰져 있다가 월드컵의 열기에 입구가 열렸다.
그러니 이 복잡한 마음을 어느 세월에 설명하고 있을까? 이재이에게 설명해봤자 이해도 못 하겠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도 없다. 아니, 아깝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팔 들어.”
나지막하고 단호한 말에 이끌려 팔을 들자 그대로 그녀의 붉은 티셔츠가 벗겨졌다.
“후우우.”
한숨 한번 비장하게 쉰 제희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제 침대로 이끌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문까지 걷어차버리자 안겨 있던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미안.”
손을 잡아끌고 옷을 벗겨내릴 때도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던 그가 제 발짓이 만들어낸 소리에 깜짝 놀란 그 하나는 미안해했다. 괜찮다고 말할 새도 없이 그녀는 침대에 눕혀졌고 제희와 눈 한번 마주칠 틈도 없이 브래지어가 벗겨져 나갔다.
차라리 안 보면 좋았을 텐데,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 고개를 들고 있다가 타이밍 나쁘게, 혹은 좋게, 벌거벗고 나서야 윤제희를 마주 보았다. 뜨겁다. 그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꿀꺽, 어둠 속에서도 그의 목선이 표가 날 정도로 울렸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그녀의 웃음이 제 차례인가 싶어 나오려다 그대로 막혔다. 윤제희의 입술에, 이번에는 가슴에.
“으으응.”
긴가민가했었다. 제가 제대로 봤었는지, 너무 열망이 강해 만들어낸 상상이었는지.
그런데 분명히 맞다. 자신은 이런 가슴을 보았었다. 상상이건, 현실이건 간에 그의 수많은 밤을 밝혔던 하얀 가슴이 분명 이랬다. 손에 닿는 폭신한 감촉이라든가, 입술에 착 달라붙는 맛에 코끝을 스치는 체향까지, 그의 밤을 여러 번 깨운 가슴이 맞다.
“바, 반장.”
달아오른다.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열아홉 살로 돌아갔다. 이름 놔두고 저 ‘반장’ 소리는 질리도록 한다 했는데 지금은 또 그게 좋았다. 열아홉 살의 그가 하지 못했던 행동을 이제야 하는 느낌이라, 머리가 다 주뼛 선다.
“엉덩이 좀 들어봐.”
제 버클부터 풀어 내린 그가 급한 마음에 재이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확 당겨 내려도 될 텐데 혹여 놀랄까 봐 억지로 숨을 참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재이가 그냥 몸을 뒤척이자 그가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상체를 가까이 붙였다.
“하아…….”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내려와 있던 그의 수려한 얼굴에서 난데없이 길고 짜증스러운 한숨이 쏟아졌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뜨자 이제는 이마까지 붙이고 그녀의 머리칼을 콱 움켜쥐었다. 뭔가 꾹꾹 눌러 담은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여 갑자기 불안해졌다.
“……왜? 왜 그래?”
“콘돔이 없어.”
있으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재이를 생각하고 기다리던 마음 하나에는, 분명 성인 남자인 그가 있었다. 새벽빛 어스름에 본능만 남았을 때, 발가벗고 제 밑에서 몸부림치는 그녀를 수없이 그리긴 했지만 미리 콘돔을 준비해놓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재이, 너만 괜찮으면 돼. 난 전혀 상관없거든.
그런데 차마 그 말을 못 한다. 이건 이재이가 먼저 괜찮다고 말해줘야만 풀리는 주문이었다. 자신이 남자라 본능에 급하고, 상대가 이재이라 더 급하긴 했지만 무책임하게 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책임질게.’ 그 간단한 말을 몰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제 감정이 가벼워 보일까 차마 못 하겠다.
다른 거 아까워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오래된 감정만은 존중받고 싶었다.
“오늘 안 되는 날이야?”
“모,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황이 역력한 대답이 그 와중에도 마음에 들었다. 모른단다. 손끝까지 몰렸던 피가 이제야 제대로 돌기 시작했다.
“나 금방 나갔다 올게. 여기 있어.”
그가 몸을 떼어내자 멍하니 깜박거리던 그녀가 재빨리 가슴을 가렸다. 그래봤자 늦었지만.
벌새가 날갯짓 한번 겨우 할 시간에 잠깐 보았던 그녀의 하얀 가슴이 9년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 있는데, 긴 시간은 아니라도 직접 보고 만지고 맛까지 보았으니 평생 잊힐 리가 없다. 그래도 그 무모한 손짓도 예쁘게 보이니 말리진 않았다.
“나 단추 채워줘.”
“어, 어?”
“네가 해줘.”
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방만히 벌어진 셔츠 자락을 그녀 앞으로 내밀며 선이 예쁜 어깨를 짚었다. 한 손으로는 이불을 움켜쥐고 남은 손을 간신히 놀리다가 주뼛 시선을 드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이야말로 명백한 키스 타임, 놓치는 놈이 바보다.
“으음……, 음.”
입술 하나도 그냥 떼지 않고 살짝 핥아 마무리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지만 이재이는 제집에, 그것도 침대 위에 있었고 오늘 밤은 길었다.
“기다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집게손가락만 움직여 뺨을 도닥였다. 손가락 닿는 곳마다 얼굴이 붉어진 재이가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간신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꼭 자신이 경기에 나가 뛴 듯, 그렇게 숨이 가빴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윤제희는 또 왜 저러는 거고.
“어, 없는데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3년이 넘었으니 웬만한 요구에는 이골이 난 아가씨가 말을 더듬었다. 열기가 풀풀 날리는 조각 같은 남자가 제 대답에 인상을 쓰니 마음이 다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있는데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정말 없었다.
“아까 다 나갔어요. 경기 끝나자마자.”
“후우…….”
“여, 여기서 100미터 정도만 더 내려가시면 거기 지점은 외져서 아마 남았을 거예요……, 아마도.”
일곱 번째로 들른 편의점에서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야말로 이 밤중에 콘돔을 찾아 삼매경에 빠질 줄도 몰랐고 여직원에게 직접 묻게 될 줄도 몰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못 찾는 거겠거니 했는데 가는 편의점마다 그 칸이 황량했다. 눈 씻고 봐도 비슷한 것조차 없다. 망연자실 걸어 나오는 계단에서 고개를 드니 심지어 모텔들도 간판이 다 꺼져 있다.
만실이구나.
영우한테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처음 보았다. 오늘의 열기가 그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콘돔이 품절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자신은 16강이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휩쓸려 이 꼴이 나버렸다.
차라리 발 빠르게 콘돔이 비치된 모텔로 갈 걸 그랬나 싶다가도 그건 아니다, 잘한 거라 억지로 다독였다. 일단은 이재이가 제집에, 저만의 공간에 있는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오다가다 길에서 마주친 것이 아니라, 돌아서면 모른 체할 것도 아니라, 그가 번호 누르고 들어가는 그의 집에 있는 것을, 자는 것만큼이나 원했다.
“저기, 혹시 모델이나 탤런트 쪽에 관심 없으……시구나.”
이런 큰길을 다니면 종종 듣던 경쾌한 소리가 갈수록 음량이 줄어들었다. 누구 놀리나 싶어 힘을 준 눈이 뒤편 유리에 비쳐 제가 봐도 우스웠다.
사람 꼴이 참 별거 없구나. 결국 오기가 끓어 100미터만 더 가면 있다는 외진 편의점으로 향하다 편의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 걸음이 멎었다.
“어서 오십쇼! 방금 나왔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작은 포장마차 앞에서, 그렇게 잘 웃던 재이가 당황해 말도 못 하던 것을 떠올렸다. 혼자 두고 나왔는데, 지금 자신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결코 오기나 충동으로 안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나마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았다. 외지다는 편의점을 지척에 두고 그는 더 급한 것부터 사려 지갑을 열었다.
처음 10분 정도 그의 말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던 재이가 몸을 벌떡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찾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했는데 그건 스스로가 생각할 일이다.
자신은 제희가 좋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으니 이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열기에 슬그머니 묻어 가는 감정이 괜찮을까 하는 우려 역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지…….”
다른 건 다 둘째치고라도 벗고서 반장네 집에 누워 있는 자체가 낯부끄럽다. 벌써 정신이 들었으니 이제 와 술 마실 게 아니라면 멀쩡한 척 연기는 못 하겠다.
그가 벗겼던 티셔츠와 바지도 꿰입고, 그러고 나니 침대에 앉아 있기도 뭐해서 거실로 나왔다. 남의 집 거실을 두리번대다 우두커니 벽에 기대었다.
“너 뭐 해?”
띠띠띠, 전자음이 들리더니 바로 현관에 불이 들어왔다. 갈 때는 빈손이던 그의 손에 검은 비닐봉투 하나가 들려 있자 그녀는 흡, 입을 다물었다.
저 안에 콘돔이 있는 걸까. 그러면 또다시 옷 벗어야 하나.
“느, 늦었네.”
성큼 걸어온 제희는 몹시 못마땅해 보였다. 옷을 다시 입어서 그런 건가 했는데 어찌 말하기도 전에 손목이 끌려 소파로 데려갔다. 말 못 할 어색함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검은 봉투가 제 앞으로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