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손가락으로 한 마디쯤 다시 흐르는, 그녀의 어깨선 조금 넘는 생머리라든가, 지금처럼 불만이 있으면 아랫입술이 살짝 솟는 앙증맞은 입매가 거기에 속했다.
“별로 차이 없는데.”
그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려고 일부러 퉁명하게 굴었다.
“그치만……, 다른 반은 다 원래대로 낸단 말이야.”
“아닐걸.”
“진짜야, 진짠데……, 이게 뭐야. 다 튀어나오고. 으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진작에 집어치웠다.
그럼 네가 하라, 그러고 말았겠지. 그 사람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윤제희라는 인간의 성격일 뿐이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고, 안 하는 사람은 애초에 지적 따위는 하면 안 되는 거고.
“반장. 잘 봐봐. 자를 대고 표부터 만들어야지. 이렇게.”
이렇게 두 번, 세 번 자신의 일을 원칙대로 지적하는 여자애 따위는 상대해서도 안 되는 건데, 분명히 그런데. 그는 또 어느새 그녀의 말대로 자를 찾아 선을 긋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급식 확인표 하나를 만드느라.
“봐봐. 훨씬 깔끔하잖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이가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대로라면 교복 사이로 그녀의 뽀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아니, 더 솔직히 이미 봐버렸다. 그 찰나가 고등학교 남학생의 뇌리에 남아 여름밤을 설치게 만들 줄 알았다면, 이왕 본 거 그냥 조금 더 봐버릴 것을. 그랬다면 쓸데없이 상상을 더해 잠자리를 적시는 유치한 짓은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음, 그래도 다음부턴 이건 내가 할게. 너는 그냥 교탁에 나가서 하는 이야기만 좀 해주라.”
“왜?”
“내가 나가면 애들이 말을 잘 안 들어서.”
“누가 안 듣는데?”
그는 알고 싶었다. 누가 이재이 말을 안 듣는지, 멍청하게 키득거려 그녀를 부끄럽게 만드는지. 만약 알게 된다면 단단히 벼를 마음으로 기다렸더니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다.
“너.”
“뭐?”
“너잖아. 내 말 제일 안 듣는 사람.”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당연히 너지.
마주 보고 웃은 것은 그때가 또 처음이었다.
◇ ◆ ◇
“너 요새 우리 몰래 뭐 하지?”
“뭘?”
“그렇잖아. 왜 차트 보면서 히죽거려? 너 무슨 복권 당첨됐냐?”
영우는 언제나처럼 흰소리를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히죽대지는 않았지만 분명 웃기는 했다.
“제희야, 우리 오늘 미국 경기 볼 때 미리 뭐 좀 시킬까?”
“그래.”
“너 뭐 먹고 싶어?”
호시탐탐 그의 옆자리를 노리던 윤지도 다가왔다. 요새 들어 그가 이상하다는 것은 영우보다 그녀가 더 잘 안다. 짐작 가는 바도 있긴 했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다. 아직 자신이 나설 만한 때는 아니니 저러다 지레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 교수님이 생전에 너 끼고도시더니 오전에는 한소리 하시더만. 자리에 좀 붙어 있어.”
“알았어.”
“그나저나 상현이 형도 너 밥도 안 먹고 그냥 갔다고 하던데. 수원까지 갔으면 왕갈비 얻어먹지 그랬냐.”
“약속 있어서.”
“무슨 약속?”
다시 윤지가 끼어들었고 제희는 대답 자체를 하지 않았다. 슬슬 성가셔진다. 방금도 9년 전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 성격에 재이가 아닌 윤지가 그렇게 나섰더라면 제게 건네는 자를 부러트려버렸을 것이다. 새삼 이재이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렇게 깨달을 계기가 생겨버렸다.
“제희 네가 봐도 상현이 형은 대박 났지? 나도 진작에 벤처로 뛰어들걸. 첨에 학교 그만둘 때만 해도 뒤에서 미쳤다 욕먹더니 지금은 상현이 형이 제일 잘나가. 사람 일 모른다고, 진짜.”
진짜 사람 일은 모른다. 그날 통제된 도로를 피해 평소에 가지 않던 사잇길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서 또.
그의 모든 결론은.
이재이가 보고 싶다.
“야, 너 또 웃었지? 웃은 거 맞지?”
손가락질까지 하는 영우를 뒤로하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의 여름밤을 지새우게 했던 것은 이재이의 하얀 가슴이었지만, 지금 그를 웃게 하는 것은 그냥 여자 이재이였다.
- 응, 반장! 나 이재이.
말을 안 해도 아는 저 이름은 통화할 때마다 늘 앞머리에 붙었다. 하루에 두 번은 통화를 하는데도 꼭 제 이름부터 꺼낸다.
“뭐 해?”
- 친구랑 응원해.
“같은 회사 동기라는 사람?”
- 응.
“집에서?”
- 아니, 집에 있다가 나왔어. 답답하고 사람들 많은 데 가보고 싶어서.
사람들 많은 곳에서 폴짝거리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런 이유로 재이의 대답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가려고?”
- 괜찮아.
나는 안 괜찮아.
- 아, 나 친구가 불러서. 그럼 일 열심히 해!
“응.”
생전 미련 둔 적 없던 휴대전화를 두어 번 쓸어보았다. 만약 급한 얼굴로 달려와 “ER, 인마!” 하고 소리치는 영우가 아니었다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해서 쓸었을 것이다. 그는 그날 미국 경기를 보지 못했다.
“재이야, 뭐 해? 들어가자.”
경기는 1대1로 비겼다. 이만하면 잘한 거라는 반응도 있고 실점 후 득점이라 다행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재이는 썩 내키지가 않았다.
윤제희와 봤을 때는 이겼는데, 윤제희가 없으니까 못 이겼다.
다른 평론가나 동네 해설가들이 제각각 실점 요인에 대해 논문을 써대도 재이에게는 그 한마디로 끝이 나버렸다.
“많이 실망했어? 그래도 잘한 거지!”
“응. 맞아. 잘한 거 같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냥.”
진 경기는 아니라 사람들은 여전히 흥겨워했다. 돌아오는 길에 옆자리의 사람들이 16강 가능성을 점치며 확률을 따지는 것을 들었다. 마지막 상대인 포르투갈이 워낙 강력한 상대라는 것도 그 자리에서 흘려들었다.
지면 안 되는데.
제희가 이겨야 하는데.
어차피 제가 내기에서 이겨봤자 빌 만한 소원이 없다. 욕심을 안 부리고 살았고 얼마 전에 그 보답이라 할 만한 것도 받았다. 그래서 윤제희가 이겼으면, 이번에는 자신이 꼭 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 포르투갈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설령 그녀 사전에 축구 최강국이라 쓰여 있는 브라질이랑 싸운대도, 한국은 꼭 이겨야 했다.
그래도 그날은 제희가 시간이 있다니, 이기겠지. 그렇고말고.
6월 14일은 새벽부터 남달리 고요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비장함이 넘쳐흘렀고 남자들은 둘만 모여도 16강 가능성을 타진했다.
폴란드가 미국을 이겨주면, 포르투갈과 비기기만 해도, 각각의 경우의 수가 펼쳐졌지만 재이가 들어서 알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이제 곧 강남역에서 제희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자, 오늘은 오랜만에 정시 퇴근하지!”
날이 날이니만큼 퇴근시간이 가까워올수록 잔소리를 달고 다니던 김 과장마저 고마운 소리를 했다. 웬일이냐, 믿을 수가 없다 삐죽대는 영미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얼른 나섰다.
그간 두 번의 경기에는 따로 붉은 티를 입지 않았지만 오늘은 입고 싶었다. 이대로 지게 된다면 다시 입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명색이 유니폼 회사 직원인데.
“영미야, 잘 가.”
손을 크게 흔들고 바로 집으로 들어왔다. 스포츠 경기를 보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여자가 자기 말고 또 있을지 모르겠다.
“어, 반장. 나 이재이.”
- 뭐야? 반장이 누구야?
깜짝 놀라 전화를 고쳐 들었다. 발신자 번호는 여전히 신청하지 않았지만 시간만 보고는 당연히 제희라 생각했던 제 잘못이다.
“엄마. 나야.”
- 너 누구 전화 기다려?
“아냐. 친군데, 오늘 경기 본다고…….”
그녀는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뭔지 모르게 마음이 내려앉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았다.
- 너는 팔자도 좋다. 지 에미는 죽자 사자 일해도 아직 덜 끝나 이러고 있는데.
“……응. 미안해. 힘들지?”
- 그걸 아는 애가 목소리가 그렇게 방방 떠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도 좋은 것을 감춰야 하는 걸까? 문득 제 모습이 우스워졌다. 보글보글 부풀어 오른 거품을 입김 한 번에 푹 꺼트려버린 기분이다.
“엄마, 그런데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게……, 재우가 말이야. 뭘 등록을 해야 한다는데…….
오늘도 시작은 예외가 없었다. 오늘만은 이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았는데. 차라리 엄마가 일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본인의 말대로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을 서서 일했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그저 듣고만 있던 재이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미안해! 내가 늦었어.”
“아냐, 아냐. 나도 방금 왔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하나 늘어났다.
“……무슨 일 있었어?”
“아, 피곤해서.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퇴근 직전에 통화했던 이재이는 이렇게 피곤해하지 않았다. 아직 묻지 못한 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지금, 그녀가 정말 피곤한 게 나을지, 차라리 거짓말이라 감추는 것이 나을지 똑똑한 그로서도 알 수가 없다.
“병원까지 나오느라 힘들었지?”
“아냐, 여기 근처 구경도 하고.”
“미안, 요새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까.”
그가 병원 코앞이나마 이렇게 나오는 데는 그 대가가 혹독했다. 아직 병원에 매인 몸이다 보니 미국전 때에는 차마 나올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시간을 마련하고자 그는 또다시 며칠 밤을 새웠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 강철도 아닌데, 가운 벗고 달려 나오는 순간부터 발에 힘이 붙었다.
“반장 너는 그래도 많이 변한 거 알아?”
“뭘?”
“미안하다는 말도 그렇게 하고.”
재이가 장난스레 들고 있던 풍선 봉으로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호루라기를 불고 지나가던 무리들이 바짝 옆을 스치자 제희가 똑바로 서라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밤에도 붉어져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사람이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아.”
“그러게.”
“오늘 꼭 이기면 좋겠다.”
오늘 이겨야 둘 다 좋았다. 윤제희는 내기에서 이길 테고 이재이에게는 또 다음 기회가 생길 테니. 둘 다 피 끓는 스포츠 정신과 애국심보다는 9년 만에 만난 서로에 대한 생각이 더 깊었다.
옆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며칠 전보다 더 단단한 것 같다. 만약 그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면, 그 소원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아 그녀 역시 여러 날을 지새웠다. 그렇게 둘 다 다른 이유로 밤을 새우고도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다.
“시작한다! 저기 봐!”
커다란 스크린에는 이곳과 같은 붉은 기운이 넘실댔다. 경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기다린 듯 대한민국을 외쳤다. 간간이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오면 얼굴을 파묻는 이도 있었고 전반에 포르투갈 선수 한 명이 거친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자 고함도 높아졌다.
“와, 어떻게 저렇게 해?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잘못했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사람이 월드컵에 나왔지?”
얼굴이 벌게진 이재이는 화를 낼 때도 얌전했다. 퇴장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구시렁거리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파노라마로 지켜보던 그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박지성이 백태클을 당했을 때에도 웃고 말았다. 다행히 그를 보는 사람이 없어 그렇지 흥분한 사람들 눈에 띄었으면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반장, 반장. 이것 좀 마셔.”
어떤 골도 나지 않았던 전반전을 마치고 하프타임이 되자 좀 쉬려는지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사이 미리 준비해둔 음료를 꺼내 그에게 건네려던 재이가 앞에서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과 부딪혀 휘청거렸다.
“조심해야지.”
제희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잡아 안쪽으로 옮겼다. 얼마나 놀랐는지.
얘는 여자 허리도 막 만지나? 거의 들어버렸는데? 나 허리에 살 좀 있지 않나?
그때나 지금이나 놀란 그녀가 하는 거라곤 커다란 눈만 깜박거리는 것뿐. 곧 아무렇지도 않은 채 다시 음료수를 건넸지만 이미 그 손이 떨렸다. 당연히 후반전이 시작되고도 경기에 집중을 못 하고 옆에 있는 제희에게 그 관심이 돌아갔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또 퇴장이야, 또! 이러다 정말 이기겠다!”
후반전에도 경고 누적으로 또 퇴장이 나왔다. 설마설마하며 두 손을 모으던 사람들이 목청을 한계치로 높이자 그녀도 제 힘을 짜냈다. 구호를 크게 외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는 모습에 그도 무심함을 버렸다. 이 분위기에, 이 열기에도, 저 혼자 갓 쓴 양반 행세를 하던 윤제희 역시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한국의 골이 터졌다.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폴짝폴짝 난리가 났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뻐하는데 유독 앞자리의 남자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눈에 잡히는 대로 사람들을 껴안다가 뒤에 있던 미녀 이재이를 발견했다. 거기다 더 가관은 이재이도 넋이 나가 자기를 끌어안으려는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손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