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이재이! 일어나. 내려야지.”
그의 손이 어깨에 닿아 조심스레 흔들었다. 만약 이 손길의 목적이 자는 이를 깨우는 거라면 큰 효과는 없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손길에 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 다 왔네.”
오히려 이재이는 밖에서 들리는 함성에 깼다. 도착한 강남에선 어두운 거리에도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길 닿는 모든 곳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몇 시지? 벌써 시작한 거 아니지?”
“아냐. 한 시간 남았어.”
“아, 놀라라. 다행이다.”
“왜? 며칠 만에 축구에 관심이 생겼어?”
눈가가 살짝 가늘어지는 제희의 웃음은 언제 보아도 낯설고, 또 좋다. 그래서 놀리는 걸 알면서도 마주 웃고 말았다. 그랬더니 또 막상 그의 웃음이 쏙 들어가버렸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뭘 하나 봐. 술집에 자리가 없나?”
평소에도 사람 많기로는 빠지지 않는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많았다. 거리 응원을 접해본 적이 없으니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내가 꼭 반장 고기 사줘야지.”
“……그래. 가자.”
“이러다가 시작하겠다, 얼른.”
사람들이 들떠 있으니 자다 깬 그녀도 같이 들떴다.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신날 것 같은 예감이 벌써부터 강해졌다. 눈앞의 고깃집에 대형 화면도 보이는 것이 딱 적당할 것 같아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돌아보는 순간, 제희에게 한 팔을 잡혔다.
“이재이.”
“어, 응?”
“한국이 16강 갈 것 같아?”
뜬금없는 질문에 문을 잡은 팔에서 힘이 빠져 다시 스르르 닫혀버렸다. 축구에 관심 있냐 놀리더니 한번 이겨본 사람의 승부욕도 못하지는 않았다.
“그게 뭐야. 갑자기?”
“내기 해.”
“내기? 또 이긴 사람 말 들어주는 거야?”
그의 잘생긴 턱과 웃음 띤 시선이 끄덕거렸다. 어려운 폴란드 선수들의 이름도 외워뒀으니 내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은 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걸어. 16강 갈 거야.”
“에이……, 그러면 나는 못 간다에 걸어야 해?”
“그래야 내기가 되잖아.”
그의 말이 맞다. 그사이 장난이라 생각했던 눈이 평소처럼 진지해져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번에는 고기니 다음에는 뭘까?’ 생각하는 중에 그에게 그 생각이 바로 읽혔다.
“미리 말하지만, 이번에는…… 먹는 거 아냐.”
#chapter 05.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고깃집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보니 개막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의 첫 경기라는 이유가 컸겠지만 방금 전 제희의 말이 마음에 남아 TV에서 흘러나오는 북소리처럼 둥둥 울렸다.
“비싼 고기 사줘야 하는데 미안.”
“아냐.”
곁들어 나온 계란찜과 쌈채소를 제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런 시끌벅적한 곳에서도 젓가락을 정갈히 놀리던 그가 흠칫 눈을 들었다.
“많이 먹으라구.”
“응. 너도 먹어.”
계란찜은 다시 재이에게 돌아와 처음처럼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다른 테이블에서는 벌써 난리가 났다. 이번만은 한국이 이길 거라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분분했고, 그사이에 벌써 선수들의 얼굴이 화면을 지나갔다.
“저기 흑인 있잖아. 저 폴란드 선수.”
“응.”
“저 사람이 원래 폴란드 사람 아닌데 귀화시켰대. 워낙 잘해서 데려왔나 봐.”
어젯밤에 찾아본 내용들이 자연스레 입에 올랐다. 그녀의 생각대로 제희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고, 늘 그렇듯 별다른 표를 내지는 않았다. 딱 그녀가 원했던 반응이다.
“넌 잘됐네. 폴란드 이겨야 하니까.”
“아냐, 아냐. 한국이 이겨야지.”
“내가 이기라고?”
웃음에는 웃음으로. 간만에 눈치 볼 것 없는 후련함이 좋았다. 소주잔을 기울이고 목을 축이니 오늘 하루 수원까지 다녀왔다는 것이 벌써 가물거린다.
“그나저나 너, 이기면 뭘 부탁하려고 그렇게 분위기는 잡는 거야?”
“부탁 아닌데.”
“그럼 뭔데? 알고는 있어야지. 내가 못 들어주는 거면 어떡해?”
“약속은 좀 지켜줘, 부반장.”
천하의 윤제희도 술이 들어가니 단단하던 몸에서 한결 힘이 빠졌다. 9년 전, 그녀가 반장 윤제희에게 입에 달고 다닌 말이라 모른 체할 수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걸 마음에 다 담아뒀어?”
“너무 많이 들었지.”
그건 사실이다. 선생님의 지명으로 억지 감투를 쓴 날과 별개로 어느 토요일, 선생님이 쥐 잡듯 잡히는 장면을 본 후 마음으로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 후 제희가 멀뚱히 앉아 손을 놀리면 그녀가 다가가 같은 말을 했었다.
「약속은 좀 지켜줘, 반장.」
딱히 꾀를 부린 것도 아니었고, 어떤 때는 이미 일을 마친 경우도 있었는데 이재이는 윤제희가 놀고 있는 꼴을 못 봤다. 가만가만, 정말 하나 보자, 그렇게 벼르고 감시를 했었다. 도대체 자신이 평소에 어찌 보였기에 저렇게 못 믿는 건지,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는 했다.
“에이, 어쨌든 일은 내가 더 많이 했어.”
“아닐걸?”
“아, 네가 그런 소리 하면 억울하지!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될 텐데.”
아직 의정부에 사시려나,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제희가 다시 술을 따랐다. 취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적당히 달아올라 흥겨운 모습이 좋았다.
수원에서 보았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밝게 웃기도 했지만 피곤해 보였다. 그녀가 느끼고 싶지 않았다는 어른의 무게가 가득이라 그의 마음도 무거웠다.
“예전에 아이러브스쿨 이런 거 할 때 꼭 찾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학교에 안 계시겠지?”
“찾고 싶던 사람이, 선생님이 다야?”
“어? 아니. 아……, 애들 다 궁금했지.”
그 애들과 선생님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보고 싶던 사람이 너였고.
옛 이야기에 마냥 웃을 수 없는 그녀가 말 대신 그의 술잔에 투명한 소주를 따랐다. 불만스레 바라보던 그도 더 이상은 묻지 않고 잔을 들었다. 쨍, 하고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함성에 묻혀버렸다.
“어! 골 넣었나 봐! 한국이 넣었대!”
입을 가리고 어쩔 줄 모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이미 안팎에서 오르는 환호에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다.
“그렇게 좋아?”
“응. 넌 안 좋아? 아, 이러면 내가 지는 건데! 어쩌지? 나 어쩌지?”
마음껏 좋아하기에는 제희의 의미심장한 눈이 못내 걸리는지 휙휙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웃겼다.
그래, 마음껏 좋아해. 한번 좋아해봐.
긴장을 풀고 입가를 올리자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더 좋아 빙글거렸다. 이재이는 술이 오르면 남자 어깨도 이렇게 막 만지는구나.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까. 그녀와 닿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버렸다.
“아, 말도 안 돼. 진짜 이기려나 봐!”
“그러게.”
큰 관심이 없던 그까지 눈을 떼지 못하는 경기가 이어졌고, 후반전에 유상철이 쐐기골을 넣자 이제는 앉아서 경기를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떡해, 어떡해! 제희야.”
“뭐?”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뚫어져라 화면만 보고 있던 그녀를 마찬가지로 그렇게 봤다. 제 입에서 반장, 윤제희 따위의 한발 물린 호칭이 아닌 ‘제희야.’라는 부름이 처음 나왔다는 것은 알까?
“우와아아!”
두 골을 먼저 넣기도 했지만 후반 들어 더욱더 강해진 한국 대표팀은 결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 흥분한 사람들은 테이블에 올라가기도 했고 그걸 말려야 할 주인은 숯불을 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이재이 정도는, 옆에 있는 윤제희의 눈에만 들어왔다.
“아! 진짜 이겼어! 이길 수도 있구나!”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이미 내기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특별히 애국심 가지고 산다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녀도 한국인이라 몸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부글부글 끓어 넘칠 듯, 한계점에 다다를 것 같은 그런 쾌감. 얼마나 좋았는지 제희를 몇 번이나 잡고 흔들면서도 그걸 몰랐다.
“오늘 진짜 잠 안 올 것 같아. 진짜 잘했지?”
“응. 잘하더라.”
그도 사람이니 놀라고 즐거운 마음이야 같다. 거기다 그는 경기에서만 이긴 것이 아니니 이재이보다 두 배는 더 놀라야 했고.
“넌 왜 그렇게 좋아? 아는 사람도 홍명보뿐이라며?”
“아냐, 황선홍도 있었어! 그날은 그냥 말을 못 했던 것뿐이야!”
“아아, 그래?”
“진짜거든?”
여자들의 쨍쨍한 울림을 싫어하던 그였지만 이재이의 높아진 목소리만큼은 듣기가 좋았다. 그래서 그답지 않게 농담을 던지고, 끊임없이 말을 시켰다. 어린 시절 옆에 두던 장난감처럼, 자꾸 말하게 만들고 싶고 움직이게 하고 싶다.
“아, 있잖아. 정말 좋아. 아침에만 해도 그냥 경기 하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
“하하하.”
그의 나직하고, 몹시 드문 웃음이 흘러나오는데도 제 감정에 취해버린 재이는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이길 거라 생각 못 했잖아.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랬을 거 아냐. 어떻게 이기겠냐고. 그런데도 이겨서 더 좋아. 아, 정말…….”
“그렇게까지?”
“응. 막 전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도 잘하는 게 좋아. 잘해서 보여주는 게…….”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짧은 눈맞춤에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변의 열기도 전해지지 않을 만큼 재이의 마음 역시 뜨거웠다. 잘 걷고 있던 그의 걸음이 먼저 멎을 만큼.
“어, 반장. 왜?”
“…….”
“아 참, 너 소원이 뭐야? 왜 말을 안 해줘?”
“16강 가면 그때 말할게.”
뭘 그렇게 뜸을 들이냐 타박도 잠시, 여러 곳에서 나온 사람들의 물결에 휩싸여 그저 앞으로 향했다. 손 한번 안 잡고도 제희는 재이 옆에 꼭 붙어 그 자리를 지켰다. 꼭 16강이 아니더라도 그냥 말해버리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을 넘겨버린 것은, 아직 그녀가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긁고 또 긁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재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건 채근해서 들을 만한 일들이 아니었다. 이제 막 제 눈앞에 두었는데 재촉하듯 몰아대고 싶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니까.
그러니 이런 일 하나에 뛸 듯 좋아하는 이재이의 모습을 두 번 정도 더 본 다음에, 그리고 그녀가 정말 스스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그때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미 제 옆에는 두 팔을 쭉 뻗고 흥분 가득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는 이재이가 있으니까.
“하아, 반장. 너무 신나! 정말 너무 좋아.”
나도.
나도 그래. 이재이. 재이야.
◇ ◆ ◇
열아홉 살의 그는 이재이를 좋아했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꼭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지 않아도, 그런 감정은 얼마든지 찾아왔다. 처음부터 허락받아 정중히 약속 잡고 오는 감정도 아니었고.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돼. 선생님이 여기 적힌 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서 있는 여자애 하나를 두고도 그런 감정은 생겨났다.
아무리 무심해도 그 역시 남자라 이재이가 예쁘다는 것은 알았다. 같은 반 남자애들이 ‘이재이는 눈이 진짜 예쁘지 않냐?’ 하고 쑥덕거릴 때 그도 침묵으로 동의했었다.
또 다른 아이들이 ‘이재이는 피부가 정말 하얘서 밀가루 같다.’ 할 때도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누군가는 ‘부반장은 코가 그린 것처럼 오똑하다.’ 감탄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그는 격하게 공감했다, 속으로만.
쟤는 도대체 안 예쁜 데가 어디 있을까, 그러다 그걸 못 찾아 제 눈에 지나치게 예쁘단 걸 알았다. 물론 그만 아는 예쁜 점은 남들 입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