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야, 너 정말 윤제희랑 둘이 이야기하려고?”
“그럼 어떡해?”
“근데 이거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윤제희가 1학년 때 자기 좋다고 불러낸 여자애 때린 적도 있대.”
“뭐어?”
짝이랍시고 기껏 하는 말이 한층 더 심란함을 가중시켰다. 비밀은 끝까지 지켜야 비밀이지.
그건 그렇고 여자를 때릴 애로는 안 보였는데.
아니, 이제는 남의 일도 아니구나.
“하, 하지만 나는 윤제희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니까! 윤제희가 자기 좋다는 애도 때리는 판에 일 시키려고 혈안이 돼 있는 애는 때리고도 남지!”
아, 그럴싸하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짝의 말에는 알 수 없는 신빙성이 있었다.
“내가 무슨 혈안이 돼 있었다고 그래? 그냥 말 좀 한 것뿐이야…….”
“아냐. 내가 딱 보니까, 윤제희가 너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어. 지금 감히 어디서 나한테, 막 이런 분위기였다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 안 그랬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윤제희한테 말해야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짝이 슬그머니 발을 뺐다. 1초에 1센티씩 고개를 돌려 윤제희의 의중을 떠보려고 했는데 한순간에 1초가 길어졌다. 그렇게 두 눈이 마주쳤다.
아, 진짜 때리겠는데.
아무리 봐도 윤제희는 앞뒤로 앉은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달랐다. 장난기 하나 없이 서늘해서는. 바로 제 고개를 찾아왔지만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그가 밖으로 나가버린 것도 몰랐다.
“이재이, 이거 애들 책상에 하나씩 올려놓고 여기 명단에 적힌 애들 불러다가 주소 고치라고 해. 요놈들이 주소를 바꿔놓네. 내가 모를 줄 알고, 나 참.”
“네.”
“재이야, 3반만 이거 제출 왜 이렇게 늦어? 너 여기 온 김에 이것 좀 보고 가!”
그날따라 참 일도 많았다. 지금 자신은 윤제희를 잡고 일 좀 나누자고 말해야 할 참인데 한번 교무실에 내려왔다가 일거리만 가득 쌓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뭐 시키기 좋은 인상인가 보다, 그렇게 원망스레 한 팔 가득 짐들만 늘려 왔다.
있으라고 했으니 설마 딴 데 가지는 않았겠지!
날 잡은 김에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 오늘 같은 기회가 또 오지는 않을 텐데.
두근 반 세근 반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때린다는 건 백 퍼센트 과장된 소문일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전교 1등인데 설마하니 여자나 때릴까. 평소에 하는 거 보면 귀찮아서라도 손도 안 올릴 애였다. 늘 묵묵히 제 자리만 지키거나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대답도 거의 없는 고요한 모습만 보여왔다.
“뭐야!”
들어오는 김에 복도에 널어둔 분필지우개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그렇게 뒷문을 슬그머니 여는데 교실이 텅 비어 있다.
이럴 수가, 윤제희가 튀었다.
“이 씨, 없어! 또 없어!”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쩌면 그냥 갈 수가 있을까. 나는 저 때문에 고민하느라 세 시간을 날려먹었는데!
“야! 윤제희! 너는 무슨 인간이!”
며칠간 쌓아두었던 열이 확 올랐다. 들고 있던 분필지우개를 그대로 들고 윤제희의 책상을 퍽퍽 내리쳤다.
“네가! 알려달라며! 이 나쁜 놈아!”
넓적한 책상과 얇은 얼굴 어디에 닮은 점이 있다고, 있는 힘껏 뿌연 먼지를 만들었다. 그래도 속이 안 풀려 신나게 더 내리쳤다.
“사람을! 혼자! 다 부려먹고!”
“내가 언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앞문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던 윤제희의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굳어 뽀얀 분필가루를 몽땅 뒤집어썼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도 심상치 않다.
‘닦아놓을게.’, 아니면 ‘미안해.’ 둘 중 하나가 나와야 할 입에서 책임감 없던 짝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버렸다.
“때, 때리지 마…….”
“…….”
“말로 해! 때, 때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호기롭게 외치고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은 또 달라 먼저 뒷걸음질 치던 발이 책상다리에 엉켜 그 자리에 넘어졌다.
확실히 올려다보는 윤제희는 또 다르다.
“……안 때릴게, 넌.”
올려다봐서 다른 게 아니었다. 웃으니까 달리 보였을 뿐. 믿을 수 없게도 그 날카로운 얼굴 가득히 웃음이 넘쳤다.
그리고 또 한마디, 그가 했던 말이.
◇ ◆ ◇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사이즈별로 유니폼을 챙겨 들어온 낯선 사무실에 윤제희가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창에서 돌아보는 방향까지 같았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함에, 마음을 한껏 끌어올리는 그 웃음도.
“반장!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이번에는 내가 알려줄까?”
자신을 향해 내밀던 손까지.
너무 같아서, 또 너무 달라서. 재이가 두 눈을 감아버렸다.
#chapter 04. 미리 말하지만
아침부터 도로 곳곳에서 흥겨움이 넘쳐났다. 6월 4일, 한국의 첫 경기가 있는 날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재이였지만 하루 전, 열심히 폴란드를 검색했다.
“올리사데베. 이름도 어렵네.”
흑인 스트라이커의 이름이 작은 모니터에 가장 먼저 떴다.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일 텐데 왜 흑인이 있을까. 인종차별은 아닌 순수한 궁금증으로 기사를 읽어 내리다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기고 싶은가 보다.”
나처럼.
이재이는 윤제희를 이겨보고 싶었다. 하는 일도 다르고, 겹칠 일도 없다지만 작은 내기 하나라도 이겨보고 싶었다. 단순히 약이 올라 그런 것은 아니고, 지는 것 못 참는 윤제희가 다시 한 번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려나, 그런 사소한 바람 때문이다.
그녀는 윤제희 앞에서 말도 잘하고 활발하고 싶었다. 9년 전 어느 날처럼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침묵에 휩싸여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내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렇게 커서 축구도 보고 아는 것도 꽤 많고 세상일에 제법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 대리! 재이 씨!”
“아, 네.”
윤제희한테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축구 선수 이름을 외울 것이 아니라 제 일부터 열심히 해야 하는 건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찾는 곳으로 속도를 붙였다.
“오늘따라 왜 넋이 빠졌어? 요즘 같은 특수에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여튼 요새 사람들은 말이야, 돈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몰라. 나 때는…….”
잔소리가 평소보다 길어졌다. 이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하나 보다. 멀리서 넘겨다보던 영미와 다른 직원들이 쯧쯧 혀를 찼지만 특별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과장님이 이 시간쯤이면 히스테리 한번 부리는 것은 예사였고 오늘은 그 차례가 드물게 자신에게 돌아왔을 뿐이다.
“오늘 퇴근하는 길에 사거리 건축사무소에 갔다가 가.”
“아…….”
“왜, 못 간다는 거야?”
“과장님. 거기 제가 대신 가기로 했는데.”
미리 말을 맞춰둔 영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는데도 김 과장은 가차 없었다. 손짓 한 번으로 두 사람의 입을 막아버렸다.
“영미 씨는 제 할 일이나 똑바로 해! 이게 다 뭐야? 한 칸씩 어긋난 거 안 보여? 그리고 인터넷 좀 미리 배워두라 했지! 창이 안 뜬다잖아! 이제 인터넷 주문이 대세라는데 언제까지 이럴래?”
영미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재이를 쳐다보았다. 이미 영미가 해야 할 내일의 일을 미리 해둔 재이였지만 다른 말 할 것 없이 ‘나는 괜찮아.’ 멋쩍게 웃고 말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더니.
“간 김에 이 대리는 3층에 연합의원 거기도 들러. 단체 티 맞춘다는데 말 좀 잘해서 가을 유니폼도 이야기 한번 던져봐. 알았지?”
“네.”
입술을 꾹 다물고 자리로 돌아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정말 왜 이럴까. 견본 몇 장과 배달할 짐을 챙겨서는 터덜터덜 사무실을 나섰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이렇게 기죽을 필요는 없다.
건축사무소야 이미 맞춰둔 티셔츠만 전달하면 되는 것이고 의원에 가서도 늘 하던 대로 설명만 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굳이 윤제희에게 연락해 ‘오늘 늦을지도 몰라.’ 말해놓기는 일렀다.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재이야!”
계단을 채 내려오기도 전에 영미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자신에게 향한 표정이 애매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감을 못 잡겠다.
“거기 나더러 가래!”
“응? 너?”
“어, 방금 양 부장님이 오셔서 나보고 가래. 연합의원 거기는 오늘 바빠서 다음에 보자고 했고.”
“아, 정말?”
이 정도면 그녀에게는 희소식 중에 희소식이었다. 그런데도 봉투를 건네받은 영미가 가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남은 말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너 다른 데 가야 할 일이 생겨서.”
“어딘데?”
“그게, 수원……. 좀 멀지?”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결코 영미의 탓이 아닌데도, 원래처럼 괜찮다 말을 못 꺼냈다. 웃어주지 못한 것은 물론이었고.
「전에 거래했던 사람한테 소개받았대. 네 명함 받아 연락했다고. 부장님 되게 좋아하던데……. 그래도 마치고 바로 퇴근하라니 좋게 생각해, 재이야.」
직장인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고 여자 이재이에겐 슬픈 일이었다. 지하철 한구석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벌써 열 번도 더 확인한 문자함의 끝에 ‘마치고 전화 줘.’ 하고 군더더기 없는 제희의 흔적이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지만 수원까지 갔다 와서 다시 만나 경기를 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아쉽거나 좋지 않은 일로 연락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으면 했는데 현실은 꼭 그녀의 마음 같지가 않다.
[반장. 나 이재이. 오늘 일이 갑자기 생겨 수원에 가야 할 것 같아. 미안한데 다음에 봐도 될까?]
지금이라도 회사에서 돌아오라는 벨이 울릴까, 그 한계까지 전화를 기다려보았다. 이런 문자는 안 보내고 싶어서.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던 터라 더 늦기 전에 엄지를 눌렀다.
“아.”
집에서는 한 번씩 전송 실패 화면으로 짜증을 돋우던 문자가 너무 제때 망설임 하나 없이 가버리니 그것도 허탈했다.
올리사데베. 두덱.
폴란드 선수들의 발음도 어려운 이름들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기껏 외워봤는데 제 입에서 나올 일은 없을 듯하다. 아쉬운 대로 입에서 가만가만 되뇌다가 바로 불이 들어오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래.]
조금 전까지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왠지 쓸쓸했다. 단답형의 문자가 그 마음의 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꾸만 눈이 간다. 그래, 그래. 그녀가 하루에도 열 번도 더 하고 듣는 말인데 그 흑백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에 언제 보자는 말도 없었고, 이렇게 늦게 연락한 자신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요새 문자 한 통에 30원이라니 한 자에 15원짜리 비싼 문자를 받았다.
다른 사치 안 하고 살았는데 이건 정말 분에 넘친다. 윤제희 얘는 경제관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조금은 변했나 싶었더니 손가락도 주인처럼 단호해 꼭 필요한 말만 하나 보다.
그렇게 재이는 수원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제희를 생각하고, 미안해하고, 욕하고, 아쉬워했다. 그곳이 종점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목적지를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저, 한일 유니폼에서 왔습니다. 이재이라고 하는데, 오늘 5시까지 온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아……, 잠시만요. 확인 좀 해볼게요.”
힘들게 도착한 곳은 들어서기가 무서울 만큼 대리석 바닥에 윤이 났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회사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건물에 어쩐지 주눅이 들 것만 같았다. 자신이 못나서라는 생각보다는 사실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네. 확인되셨구요. 이거 걸고 3층 오른쪽 끝으로 가시면 돼요. 거기 담당자분 내려와 계실 거예요.”
“네.”
짐가방을 고쳐 들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조명 하나까지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 구경할 것이 많다는 좋은 점도 있었다. 그러느라 3층의 응접실은 더 갈 것도 없이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 닿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일 유니폼에서 나왔습니다.”
노크 두어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남자 하나가 창가에 서 있는데 뒷모습이 어딘지 낯익었다. 장신에 모델 같은 사람이니 잡지 어딘가에서 보았나 했는데 그건 아닐 듯하다. 그녀는 잡지를 안 보니까.
“……일단 여기 견본부터 좀 봐주시면.”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한 번에 몰랐던 것이 이상했으니까.
저렇게 늘씬하고 날카로운 사람이 윤제희 말고 또 있을까.
“그럼 디자인만 고르고, 치수만 알려드리면 돼요?”
“네. 여자분들은 아무래도 입어보시는 게 나으니까 저희가 견본 보내드리면 입어보시고 체크해주셔도 돼요.”
책상 위 팸플릿에 시선을 두면서도 마음은 창가로 가 있었다. 책 한 권을 뽑아 와 뒤적거리는 제희의 옆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남자들 위에 셔츠는 하나 더 있어야겠는데.”
“……네?”
“저기, 셔츠 이야기 했는데.”
“아, 그렇게도 많이 하세요. 아무래도 여름이니까 매일 빨기가 번거롭잖아요.”
뺨이 달아올랐다. 쳐다보지는 않아도 아마 저를 보면 웃지나 않으려나. 재이는 아직 영문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통 집중을 못 했다.
“형, 저 잠깐 사무실 구경 좀 할게요.”
“그래. 내 방에 가 있든가. 이거 끝나면 밥 같이 먹을까?”
“아니요. 약속 있어요.”
“넌 여기까지 내려와서 무슨 약속을 하고 와? 취소 못 하는 거야?”
“못 해요.”
“무슨 약속인데 취소를 못 해?”
“……고기 사준대서요.”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가 입을 꼭 다물었다. 힘을 풀면 웃음이 나와버릴지, 헛기침이 나와버릴지.
문이 닫히고 다시 자신을 향해 앉은 남자가 “저 자식이 왜 갑자기 고기야.” 혼잣말을 했다. 그 이유를 알 듯, 모를 듯한 재이가 싱긋 웃자 이야기는 다시 팸플릿의 앞뒤로 돌아갔고,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매끄러웠다.
제희와 한 공간에서 조마조마하고 산만했던 그녀의 마음 하나는 이미 그가 문을 나설 때 손잡아 데리고 나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