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사실 이름도 생소한 나라였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구본 주고 짚으라 한다면 아프리카 어딘가를 짚고 말, 이재이와는 평생을 두고 전혀 상관없는 나라다.
“아무도 응원 안 해줄 거 같아서.”
“넌 참.”
그때랑 변함이 없구나. 쓸데없이 마음만 약해서 늘 그렇게 남들 눈 안 닿는 구석 자리부터 살펴보는 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화면을 물끄러미 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지에 무심히 닿은 입술 색에 눈이 가 그도 입을 다물었다.
진하다. 낯설다. 그런데 또 예쁘다. 화장품의 인공적인 향을 딱 잘라 싫어하는 그였지만 가까이에서 맡아보고 싶어졌다. 무향, 아니면 그녀의 체향 정도나 간신히 나지 않을까.
“그럼 내기할까?”
“무슨 내기?”
“프랑스가 이길지, 세네갈이 이길지.”
“하하, 그럼 난 프랑스. 응원은 세네갈 할 건데 그래도 프랑스가 이길 거 같아.”
제가 해놓고도 얌체 같고 치사한 대답에 재이가 먼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진지하게 그 입술만 보던 제희가 타는 갈증을 맥주로 잠재웠다.
“좋아. 나는 처음부터 세네갈 걸려고 했으니까.”
“진짜? 혹시 세네갈이 잘하는 데야?”
“아니. 우승 후보는 프랑스야.”
“그런데 넌 왜 세네갈에 걸어?”
“나는 세네갈도 저력이 있다고 봐.”
하기야 월드컵까지 출전했으면 모르긴 몰라도 잘하는 나라겠지. 져주려 그러는 모양인가 했는데 역시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따져보면 감정은 접어두고라도 윤제희는 배려심 깊은 아이는 결코 아니었다.
“내기면 뭘 걸어야 하잖아.”
“네가 이기면 고기 사줄게. 너 아까 고기 이야기 했잖아.”
그런 거 아닌데, 고기는 내가 너 사주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왜 그 말을 못 하고 있을까.
“네가 이기면?”
“생각해보고.”
승낙의 의미로 짧게 두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축구라는 게, 아는 거야 홍명보 정도지만, 오늘만은 참 좋았다. 아니, 9년 만에 만나는 윤제희를 두고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줬으니 고맙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힘든 일이나 피하고 싶은 주제도 모두 미뤄두고 이렇게 흥겨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월드컵의 힘이었다.
“어떡해!”
마음으로는 세네갈을 응원하겠다는 재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오는 와중에 프랑스의 골대가 출렁이는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세네갈이 넣었어! 봤어?”
같이 앉아 있었고 그도 눈이 있으니 잘 알았다. 앞에 앉은 이재이가 아니었더라면 그도 제법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초연해 있었던 것은 축구에 가야 할 눈이 여전히 이재이의 입술에 가 있었던 탓이다.
“아, 뭐야! 세네갈이 아프리카 강호 뭐 이런 건가 봐! 난 전혀 몰랐어!”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제희가 자신의 입술을 살짝 문지르며 웃음을 눌러두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감정 표현이 덜하다 여겼는데 그는 저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자신만 아는 모습이라 더 좋았고.
“아, 정말. 역시 윤제희는 안 되는 게 없구나.”
두 시간 후, 이것도 내기라고 기운이 축 처져버린 재이가 계산을 하고는 짧게 투덜거렸다. 진짜 속이 상해서라든가, 경쟁심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윤제희가 가진 운이 부러웠을 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내가, 정말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해?”
작은 맥주집 앞에서 제희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는 정말 안 되는 게 없었는데, 사실을 너무 진지하게 물으니 조금 얄미웠다.
“넌 매번 이겼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질 때도 많았어.”
그때도, 지금도.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을 무심함으로 받았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이 영 쉽지가 않다. 자신의 말에 ‘아, 그랬나?’ 하고 마는 그녀의 무심함이 전혀 고마운지도 모르겠다. 네가 언제 그랬냐고 따져주기를 바라본다.
“재이 씨! 여기서 보네!”
계단을 먼저 내려간 재이가 술집 입구에서 남자들 서넛이 모인 일행과 마주쳤다. 깜짝 놀라다가 웃는 모습이 영 마땅치 않다.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다행스럽기도 하고, 더 못마땅하기도 하고. 이틀 전부터 그의 기분은 늘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축구 보러 왔어?”
“네, 조 과장님은요?”
“우리는 보고 왔어. 2차 가려고! 아, 프랑스가 질 줄이야. 말도 안 돼!”
우승 후보라더니, 잘하는 나라 맞구나. 길 가던 모든 사람들이 프랑스가 진 데 대해 한마디씩 하고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제희는 운이 좋은 아이였다.
“안 그래도 어제 전화했던 거 메모 봤지? 4일까지 유니폼 꼭 보내줘. 우리 그거 입고 응원도 하고 체육대회도 해야 하거든.”
“네, 봤어요. 미리 주문 넣어놨으니까 꼭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응. 그런데 그거 가져올 때 영미 씨 보내지 말고 꼭 재이 씨가 와! 내가 재이 씨 생각나서 3층에 연합의원에도 홍보해놨거든. 거기 직원 되게 많은 거 알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사람이 가는 게 좋지. 영미 씨는 너무 말이 많아서.”
자신의 칭찬보다는 동료의 흠을 잡는 것이 더 귀에 들어왔다. 영미가 말이 많기는 했지만 지금 제 앞의 남자보다는 적었다. 그래도 신경 써주었다니 감사는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네. 정말 감사해요. 가는 김에 들러볼게요.”
“감사하면 우리랑 2차 하자!”
“그래요, 재이 씨. 가요!”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안면을 튼 건축사무소 직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제희가 바로 뒤로 다가와 어깨를 잡을 때까지 모두 신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어, 반장.”
“아……, 재이 씨 일행 있었구나. 몰랐네.”
못내 아쉬워하는 눈들을 평소의 배로 무심하고 날카롭게 대면했다. 보는 사람은 절로 웃음이 걷힐 만큼.
“이재이, 너 여기.”
“응?”
자신을 기다렸을 제희에게 미안해 건축사무소 일행을 먼저 보내려 고개를 꾸벅했다. 그러나 제희가 한발 빨라 그 무리가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립스틱, 번졌어.”
그 떠들썩하던 무리가 조용해졌다. 어색하게 웃더니 얼른 술집으로 자리를 피하듯 들어갔다. 그중에 제일 어색한 이재이는 꼼짝도 못 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아……, 고마워. 맥주 마시다 보니까……. 저기, 내가 하면.”
“됐어. 거울 없잖아.”
뿌리치지도 못하는 새, 손수건이 가만히 입가에 다가왔다. 입술에 닿는 천의 느낌이 보들거린다. 그냥 한번 문지르고 말 일인데 이렇게 우아하게 공들일 줄은 몰랐다. 꼭 천이 아니라 다른 어디, 보드랍고 뜨거운 것이 닿는 느낌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하하, 안 바르던 거 발랐더니. 어쨌든 고마워. 손수건 그거 빨아야 할 텐데.”
“4일날, 나 고기 사줘.”
말투가 썩 다정하지는 않았다. 축구를 보며 휘기도 하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누가 보면 평생 절간에서 자란 사람인 줄 알겠다.
“프랑스가 졌잖아. 나 고기 사줘.”
“너 그날, 정말 누군지 말 안 해줄 거야?”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한 시간이나마 앉아 있으려 들어온 의국이 편한 덴 아니다. 제희가 들어오자마자 그를 기다리던 윤지가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더니 물러날 줄을 모른다. 정작 자신의 기분을 물어봐주었으면 하는 여자는 따로 있으니 지금은 그저 귀찮기만 했다.
“부반장. 이 말 한마디 해놓고 가버렸잖아. 그건 매너가 아니라구.”
“난 처음부터 따로 가자고 말했었어.”
분원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애써 제희와 시간을 맞추느라 무리를 했었다. 다른 이유 하나 없이 오는 길에 식사라도 단둘이 할 기회를 가지고 싶어서. 병원처럼 사람 많고 눈은 두 배로 많은 곳에서는 그럴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날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황당하다기보다는 화가 났었다. 그런데도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제희의 곁을 맴돌았다. 그녀에게는 그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남자가 바로 윤제희였고, 그 옆에 있으려면 그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아야 했다.
“자아, 첫 배당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왔어요, 왔어.”
휘파람을 불며 의국으로 들어온 영우가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움찔거렸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제희 옆에 손톱을 매만지며 초조해 보이는 윤지가 있었다.
“뭐야? 둘이 싸웠어?”
눈치라면 또 빠지지 않는 영우다. 처음 본 광경도 아니고 둘 모두 성격 대단한 사람들이니 얽히고 싶지 않아 적당히 화제를 넘겼다.
“싸우긴. 나랑 제희랑 그럴 일이 뭐가 있어. 그냥 얘기 좀 한 거야.”
“얌마, 넌 자? 오늘 집에 안 들어가?”
영우가 의자 하나를 끌어와 제희를 툭툭 치자 그가 무거운 눈을 들며 어깨를 폈다. 영우는 벌써 장부를 뒤적이며 볼펜으로 줄을 긋느라 흥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자, 우리 의국도 전멸이구나. 나 말고는 다 프랑스 하더니 꼴좋아, 요것들. 제희 너도 10만 원 날렸네. 세네갈 돌풍을 믿었어야지! 하하하.”
“……너 내가 말한 거 알아봤어?”
“어? 응. 상현이 형한테 이야기해놨어. 거기 직원 수 엄청나잖아.”
“그래. 고맙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피곤도 같이 떨어져나갔다. 아직 10분가량 남아 있어 세면대로 가 찬물부터 틀었다. 아직은 조금 차다 싶은 물에도 망설임 없이 얼굴을 적시니 머리가 쨍하다.
“어? 너 오늘 당직 아니지 않아?”
“바꿨어.”
“어제도 바꿨다며? 왜?”
“4일날 빼려고.”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이다. 그 정도 되는 날에 당직을 빼려면 사흘 정도는 얹어줘야 거래가 가능했다.
“이 짜식, 축구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그날은 응급 아니면 어차피 경기 보여줄 텐데 여기서 다 같이 보면 되지 뭐하러 사서 고생이냐?”
축구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서 보건 저곳에서 보건, TV를 통해 보는 거라면 별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다만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아닌데. 네가 그런 거 볼 놈도 아니고……, 어, 혹시 무슨 여자라도 만나냐?”
영우가 목청을 높이자 듣고 있던 윤지까지 자세를 바로 고쳤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소개팅도 안 했고……. 무슨 첫사랑이라도 만났어?”
이재이를 첫사랑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간 크게 그에게 첫사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도 따로 누군가를 첫사랑이라 지정하는 유치한 짓은 안 했다. 그래서 지금 처음 그 생각을 해보느라 손에 괴어놓은 물을 지그시 응시했다.
“영우 너도 참, 첫사랑이 뭐 어때야 첫사랑인데?”
끼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윤지가 드디어 틈을 찾았다. 제희의 입에서 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여자의 촉수가 돋아나고 있었다.
“남자랑 여자랑 의미가 다르지.”
“그러니까 남자 입장에서는 뭔데?”
“생각하면 아련하고……, 한 번씩 생각도 나고. 다시 보면 막 얼굴에서 눈을 못 떼고 그런 여자겠지. 아, 윤제희. 너 진짜 맞아?”
영우나 제 맘이나 같을 수야 없겠지만 ‘첫사랑’의 일반적 의미가 저러하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이재이를 자주,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많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얼굴에서 눈을 못 뗀다고? 에이, 그거 들으니 제희는 확실히 아니었다, 뭘.”
윤지의 말이 맞다, 얼굴은 잠시였으니. 그가 늘 그려보고 떠올리던 이재이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찰나에 알 만한 것이라 바로 시선을 내렸다.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가 있는지부터.
그거야말로 그의 본능이었고, 스물다섯 무렵부터 못내 자라던 불안의 뿌리였다. 그로 인해 원망과 포기로 눈가림해놓은 감정의 깊이가 제 생각보다 더 깊었음을 알았다.
“나 콜 왔어. 나갈게.”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흐르다 턱 끝에서 방울져 내렸다. 그 모습에 넋을 잃은 윤지가 문이 닫히자마자 환상을 걷어내고 시치미를 뗐다.
“자! 박윤지 선생, 16강 진출 빨리 걸어. 내가 특별히 팁을 줄게. 된다에 걸어, 그게 배당이 세거든.”
“……그게 되겠어? 아무리 우리나라라도 이긴 적 한 번도 없는데!”
“으이구, 왜 나한테 성질이야.”
가만있자. 오늘 아침에 윤제희는 어디에 걸었나. 뒤적거리던 영우가 제희의 이름이 적힌 곳을 따라가다 웃음을 흘렸다. 안전빵 추구하다 한번 져보더니 무슨 각성이라도 한 걸까? 이 정도 베팅은 모 아니면 도였다. 똑똑한 체하더니 바보 같은 놈.
◇ ◆ ◇
세상에, 윤제희가 뭐라고.
일 좀 하라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반 아이들이 그녀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순하디순한 아이로만 대하던 그녀까지 동시에 그 위치가 상향될 만큼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쌀쌀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후회했다. 그녀는 윤제희처럼 주목받는 아이와 대화해가며 그 시선이 제게까지 몰리는 것이 싫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표정을 보니 그다지 할 분위기가 아니다. 차라리 반장 자체를 그렇게 기를 쓰고 안 한다고 하든가.
“에휴……, 이게 생각보다 할 게 좀 많아. 마치고 교실에서 잠깐만 볼 수 있어?”
“여기서?”
“응. 잠깐이면 돼. 꼭.”
제 자리에 돌아가서도 한참을 더 신경 썼다. 몇 번의 수업과 같은 수의 쉬는 시간이 이어졌지만 윤제희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이성으로서의 의식은 아니었다. 불편한 상대, 거리가 먼 존재, 거기다 남학생. 이런 사항들이 얽히고설켜 얌전한 여학생을 심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