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여름, 나는-4화 (4/48)

# 4화.

직장인의 비애라며 내뱉은 푸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겨우 둘만 남은 작은 사무실에서 영미가 기지개를 켜더니 먼저 자리를 털었다.

“우리 나가서 맥주나 마실까? 오늘 날도 정말 좋던데.”

“음……, 아니. 오늘은 그냥 쉬려고. 31일이지? 월드컵 개막하는 날이잖아.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아.”

“그러게. 서두르지 않으면 집에도 못 가겠다. 그럼 나가자. 그런데 너 무슨 약속 있어?”

“어?”

휴대전화를 괜히 만지작거리던 제 손을 보고 하는 말이라 멋쩍은 재이가 얼른 손을 뗐다. 이틀 전, 그렇게 윤제희와 다시 만나고 나서 이틀 내내 휴대전화를 보고 또 봤다.

벨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전화가 오지 않는다 생각하면 될 일인데, 혹시 휴대전화가 꺼져 있는 건 아닐까 두꺼운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하느라 그사이에 배터리가 다 닳을 지경이었다.

“아니, 약속 없어.”

쓸데없이 힘 빠지고 싶지 않은 재이도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그대로 일어섰다. 얼마나 앉아 있었던지 허리가 다 아팠다. 고개도 좀 돌려보고 손을 털며 화장을 고치는 영미를 기다렸다.

“밤에 왜 화장을 해?”

“야, 이러니까 솔로 마인드지. 밤이라 화장하는 게 아니라 퇴근했으니까 하는 거라고.”

콤팩트 속 작은 거울로 재이를 노려본 영미가 보란 듯 분첩을 톡톡 두드렸다. 같은 여자지만 저렇게 공들여 화장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재이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마음속으로야 어차피 집에 가면 지울 걸 왜 일거리 하나를 더 만들까 했는데, 립스틱 하나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보니 그 이유도 알 만했다.

“이거 새로 나온 거야. 김남주가 선전하는 건데 색깔 예쁘지?”

“어, 예뻐.”

“너도 발라줄까?”

“에이, 난 됐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진하다.

“야, 너 전화.”

“어?”

영미의 붉은 입술을 보느라 전화가 오는 것도 몰랐다. 하루 종일 사무실 전화를 붙들고 있으면서도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는데 정작 벨이 울릴 때는 남이 먼저 알았다.

“……여보세요?”

발신자가 누군지도 모르니 함부로 제 피곤을 담지도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하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 이재이.

“어. 어, 반장. 나야.”

제 이름 세 글자 불러준 게 다인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왼손을 든 김에 손등을 가만히 뺨에 가져다 댔다. 뽁뽁, 소리 내며 립스틱을 마무리하던 영미가 대번에 한쪽 눈을 치켜떴다.

- 오늘 시간 돼? 얼굴이나 보자.

“오늘?”

전화는 어제도, 오늘도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건 반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오늘 보자고 하니 갑작스레 목이 탄다.

- 안 돼?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지금 회사라서……, 집에 좀 들렀다가 연락할게.”

- 집엔 왜?

“할 게 조금 있어서. 집 정리도 좀 해놓고 오늘 말일이라 공과금이랑 관리비랑 이런 것도 좀 처리해야 하고……, 또 옷도 좀 갈아입고.”

그녀답지 않게 주절주절 길어진 말에는 눈속임이 있었다. 제일 중요한 용건이 가장 마지막에 슬그머니 숨어 있었다.

- 그래. 들어가서 연락해줘.

“어, 안녕.”

폴더를 닫지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영미에게 틈을 보이면 최소 사흘은 달달 볶일 걸 알면서도 그토록 무방비하게 굴었다.

너무 얼떨떨해서, 이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휴대전화 화면에선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다. 적당히 달아올라 살짝 뜨거워진 표면 온도만이 지금 자신이 윤제희와 통화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너 뭐야? 누군데? 응?”

“저기, 영미야.”

“응? 누구냐고? 남자지? 다 들렸어, 목소리!”

“나 그거 좀.”

“뭐?”

“그거. 김남주 발랐다는 거.”

어차피 들볶일 거, 이틀이든 사흘이든 큰 차이는 없었다. 그나마 영미는 집요함에 비해 끈기는 없었으니 그 정도로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 하여튼, 내일 봐.”

꼬투리를 잡힐까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실 해줄 만한 말도 없었다. 9년 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이것도 반가운 일이라 식사 한 끼 할 것 같다고. 여기까지가 가감 없는 진실이었다.

“잘 가. 이거 고마워.”

그녀가 입술을 살짝 내밀자 영미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어깨를 밀어냈다.

“너 예쁜 거 아니까 그런 건 남자 만나서나 해.”

“하하.”

“아이 씨. 내가 샀는데 네가 더 잘 어울리면 어떡해.”

듣기 좋으라 투덜대는 티가 단박에 났다. 그래도 이런 동료도 있으니 직장생활도 할 만하구나 싶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허리나 목이나 언제 아팠다는 건지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영미와 헤어지자마자 그녀도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가만있자. 입을 만한 옷이 과연 있기나 한가? 기계적으로 걸으면서도 머릿속에선 이미 옷장을 그려내고, 그 옷장을 열었다가 뒤져대는 이재이가 있었다.

“이재이.”

회사에서 큰 골목으로 내려와 정류장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했다. 다시 봐도 현실감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반장! 너 여기서 뭐 해?”

“나 근처에 와 있었어.”

“아, 그랬구나. 전화할 때 말하지 그랬어.”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당황했을 뿐인데 그 정도가 세다 보니 자연히 소리가 높아졌다.

“기다리려고 했지.”

“어……, 그래두.”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공과금 그거 어차피 지금 시간에 못 내잖아.”

윤제희는 그날과 비슷한 듯, 또 달랐다. 오늘도 정장을 입은 것도 아닌데 그제보다 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집 정리도 꼭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

“…….”

해야 할 집 정리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 마주 보고 천천히, 또 감정을 섞지 않고 말하던 그가 한걸음에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 옷도…… 예뻐.”

#chapter 03. 5월 31일, 꿈의 시작

기억 속에서 늘 두어 발짝 앞서 걷던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녀의 회사가 있는 동네이니 길이라면 재이가 더 잘 알아야 할 텐데,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발길 닫는 대로 걷기만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나는 다 좋아.”

“그래도.”

윤제희가 이곳까지 어떻게 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볼일이 있어 왔다가 연락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날 보러 온 건지.

“우리 회사 근천데 내가 살게. 비싼 것도 괜찮아.”

괜히 웃으며 한 발짝 앞섰다. 돌아보는 그 짧은 순간에 제희의 눈이 닿자 얼른 앞을 향하며 다시 한 걸음을 물렸다. 아무래도 아직은 떨어져서 걷는 게 편하다.

“그래. 네가 사줘.”

“알았어.”

“멀리서 왔으니까, 나.”

아무래도 후자가 맞을 듯했다. 여름이라기에는 아직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데도 목은 후끈 말랐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고깃집 있는데. 거기 갈래?”

그녀가 알기에 거기가 이 동네에서는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거기 맥주도 팔아?”

“어……, 팔걸? 왜?”

“목말라서.”

별거 아닌 대답에도 제 속을 읽은 걸까, 살짝 물고 있던 입술이 간질거렸다. 어색한 와중에도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또 그럼에도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도 많고.

“이재이, 우리 그냥 여기 들어갈까?”

“어?”

그녀가 찾는 고깃집은 역을 지나쳐 100미터는 더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제희는 바로 옆 적당한 술집 하나를 가리키며 걸음을 멈춰버렸다.

“거기는, 거기는 그냥 그런 덴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거기 한우도 팔고 괜찮은 데야.”

“장소야 무슨. 고기는 다음에 내가 사줄게.”

꼭 고기 먹고 싶다 떼를 쓰던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그사이 벌써 문이 반쯤 열렸고 풍경 소리, 음악, 종업원들의 인사까지 연이어 들려왔다.

뭐 해? 문을 받치는 제희의 눈이 가늘어지자 무언의 압박이 그녀의 발을 끌어왔다.

어유, 저 고집. 저런 건 컸다고 변하는 게 아닌가 보다.

“아……, 여기 오랜만이다.”

“오긴 와봤나 보네?”

“회사 근처잖아.”

치킨과 맥주를 시켜놓고 테이블에 두 팔을 얹어두었다. 이틀 전 만났을 때는 서로 다른 일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 그대로 대화를 위한 시간이 충분해 긴장감이 돌았다.

“일은 할 만해?”

“어. 그냥.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것도 제법 오래돼서 그런지 할 만해……. 너는?”

윤제희가 이제 의사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에게 윤제희는 그냥 반장이었는데. 그가 의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만 있는 것과 이렇게 직접 보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나도.”

그가 어떤 성격인지 몰랐다면, 아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러나.’ 하고선 차인 여자처럼 자리에서 그만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장가라도 가려면 저런 거 고쳐야 할 텐데. 요즘 여자들이 얼굴만 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래도 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날 의사선생님 됐다는 소릴 들어서 그런지, 다른 직업은 잘 매치가 안 되네. 하하. 처음에는 좀 이상했는데.”

“나도 너 보니까 이상하더라.”

자신과 동갑이니 이재이도 어디선가 사회생활은 하고 있겠지 했었다. 세월이 그 혼자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당연한 법칙이었으니.

그런데도 이상했다. 이렇게 혼자,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또 배신감도 들었다. 넉넉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어른의 조건이라면, 자신은 아직 덜 자라 열아홉 살 여름에 그 끈이 매여 있었다.

“아저씨, 저기 월드컵 개막식 틀어줘요! 시간 다 됐는데!”

뒤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시끌벅적한 테이블에서 젊은 목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리모컨 한 번에 우아, 하는 함성이 울려퍼지자 제희와 재이의 테이블에서도 어색함이 한결 걷혔다. 저게 입장권이 50만 원이래, 거짓말하지 마, 자연히 오르는 이곳저곳의 대화가 재이를 한번 돌아보게 했다.

“……들었어? 진짜 비싸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 못 가겠어.”

“입장권?”

“응.”

“가보고 싶었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닌데. 얼만지도 몰랐거든. 근데 알아도 못 갔을 거 같아서……. 저게 그렇게 재밌나?”

이날을 위해 달았다는 대형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하나하나의 표정은 잡히지 않아도 얼마나 들뜨고 설레는지는 익히 알 것 같았다. 눈 아파 별로라 생각했던 붉은색의 물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우와, 사람 봐. 한국 경기하나?”

“아니. 프랑스랑 세네갈.”

“아, 반장 너 축구 좋아하는구나.”

축구 안 좋아해도 남자라면 그 정도는 알았다. 오늘 시간을 비운다고 어젯밤을 새우면서도 축구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었다. 힘들어 죽고 심심해도 죽는 영우는 오늘 아침까지 수첩을 들고 다니며 도박사 흉내를 냈었다.

“이재이, 넌 축구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볼 일이 잘 없으니까. 그래도 홍명보는 알아.”

더 생각해보니 황선홍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랑은 아닐 것 같아 가만히 맥주만 한 모금 마셨더니 제희가 흐음, 작게 웃었다.

“누가 이길 것 같은데?”

“나? 나는…… 사실 잘 모르니까. 그래도 이름 들으니까 프랑스가 왠지 이길 거 같은데 응원은 세네갈 하려구.”

“세네갈?”

“응. 세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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