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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나는-3화 (3/48)

# 3화.

둘의 속도가 다르니 문자가 자꾸 겹쳤다. 전화를 하면 좋은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고. 제희가 다시 전화를 걸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받아놓고 말도 잘 못할 것 같아 도로 문자가 편해졌다.

[오늘 너 거기서 볼 줄 몰랐어.]

[나도.]

처음으로 질문과 답이 맞았다. 어쩐지 빙그레 웃음이 났다.

[오늘 잘 들어갔니?]

[응.]

[그래, 푹 쉬고 다음에 보자.]

다음에, 라는 말은 보통 ‘다시 볼 일이 있겠냐만 기회 되면 한번’을 줄인 말로 써왔다. 그녀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썼으니 어느 정도 그렇게 보편화된 말일 텐데, 윤제희도 그럴까?

정확하고 또 정확했던 아이였다.

그러니 윤제희만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다시 보면 말 한마디도 어려운 주제에.

[너 왜 아까 공장 차 안 타고 갔 |]

휴대전화 화면에 커서가 깜박거렸다. 애초에 보내려고 쓴 문자는 아니었다. 마음에 남아 있는 알갱이가 손끝으로 몰렸을 뿐이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온 짧은 문자 몇 줄을 다시 읽었다.

“윤제희 너, 뭐 해?”

“집에 가보려고.”

“아까 윤지가 너랑 나갔다가 혼자 와서 입이 이만큼 나왔던데.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윤지랑 관련해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재이를 다시 만난 것은 오로지 제 문제였다. 누구와도 얽히지 않은 두 사람의 문제.

“아우, 이 짓은 언제 끝나냐. 죽겠네.”

영우는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끝에 ‘죽겠네.’가 붙어 있었다. 처음 병원생활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로 삼천 번을 죽은 사람이 바로 영우였다.

“넌 뭐 해? 수술 들어갔다가 잠이나 잔다며 드라마 볼 시간이 있어?”

“너야말로 내 공경 좀 해봐라. 아무도 안 한대서 어거지로 들어갔다 왔구만 이제 막 TV 하나 보는 걸로 타박이냐? 살맛 안 나서, 참.”

살맛 안 나는 것치고는 영우는 헤벌레,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재방송으로 하는 드라마에 푹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그가 들어올 때부터 얼굴은 저 상태로 고정하고 말만 주고받았다.

“이거, 너 안 봤지?”

“뭐?”

“겨울연가. 너 얼마 전에 의국 애들 난리 날 때도 이거 안 봤잖아. 이거 끝장이거든. 아, 볼 때마다 미쳐버리겠구만, 아주.”

본 적은 없지만 하도 귀가 울리게 듣다 보니 그 제목은 알았다. 다만 해줄 만한 말은 없어 셔츠 단추만 하나씩 채워 올렸다.

“최지우 봐. 아우, 진짜 저 얼굴이 사람이냐?”

답을 정해놓고 묻는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거든? 고등학교 때 둘이 만나서 사귀다가 커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근데 배우들이 죽여.”

“……다시 만나?”

“응. 다시 만나는데, 아, 몰라. 이건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냥 최지우지.”

아침에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던 1년차 여자 후배 하나는 ‘쌤, 이건 그냥 배용준이에요!’ 하고 강하게 외쳤었다. 같은 걸 보고도 사람마다 나오는 말이 달랐다.

“잘돼?”

“뭐가?”

“다시 만나서 잘돼냐고.”

무겁다고 소문난 제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전히 두 발은 캐비닛 앞에 멈춰 있었지만, 이런 드라마 하나에 관심을 비치는 것 자체가 극히 드문 일이라 오히려 영우가 ‘그 최지우’에게서 눈을 떼어냈다.

“알고 보면 무슨 재미야.”

처음으로 영우가 맞는 소리를 했다. 알고 보면 세상에 허무하지 않은 일은 없다. 그 옛날의 일 하나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괜히 돌려받지 못하는 감정을 주고받고, 혼자 남겨지고. 영문도 모른 채 천하의 바보가 되는 그런 것은 여전히 질색이다.

「……한국대학병원 피부과 전공의 윤제희. 이야, 멋지네.」

벌써 외워버린 그녀의 명함은 큰 의미가 없었다. 제 이름을 다시 부르는, 조금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윤제희, 저기 나 이재인데, 넌 잘 모르겠지만 내가 부반장이거든……. 근데 이거 다른 반은 반장이 다 하는 거래.」

기억에 남은 첫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미묘하고 긴장된 그 떨림도.

눈 감으면 선한, 어느 교실 창가에서 세 번째 줄, 마지막 자리에서.

◇ ◆ ◇

“그래서 뭘?”

제희가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처음 했던 말이다.

당시에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다고. 누구는 자기한테 말 걸고 싶어서 그런 줄 아나.

재이는 조금 억울했을 뿐이다. 다른 반은 다 반장이 할 만한 일을 두고 그가 손 하나 꼼짝하지 않으니 저에게 모든 일이 돌아왔다. 애초에 윤제희라는 애 자체가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사실 처음부터 기준도, 일관성도 없는 반장 선거이긴 했다.

“자, 주목! 우리 반도 반장을 뽑아야 하는데, 지원자 있어?”

당연히 없었다. 1993년도의 고3 교실은 그만큼 혼란에 가득 차 있었다. 작년까지 시행되던 학력고사가 폐지되면서 올해부터 수능이라는 새로운 입시제도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암기력 대신 사고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이제껏 접하지 못한 문제들이 밀려오자 누구 하나 여유로운 사람이 없었다.

“정말 없어?”

8월과 11월, 두 번의 수능시험을 친다고 들었다. 비명만 없었지 아비규환이 된 교실에서 귀찮은 감투를 쓸 사람이 어딨을까. 결국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 ‘성적순 지정제’가 그 귀찮은 일을 해결해줬다. 단점이라면 한 사람이 모든 불만을 떠안기도 하는 그런 민주주의의 모순 정도.

“윤제희. 올해도 네가 해줘야겠다.”

“싫습니다.”

글자 사이의 빈틈을 습관처럼 검은 칠로 메우던 재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뿐 아니라 귀를 열어놓고 있던 모든 아이들이 그랬다.

우와, 쟤 말하는 것 좀 봐.

“별로 할 건 없어. 이름만 올려놓는다 쳐. 아무리 이름뿐이라도 수긍 갈 만한 애가 하는 게 옳지.”

버릇없는 대답에도 선생님이 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제희의 그런 태도가 의도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이유가 컸다.

치기 어린 반항도 아니고, 그냥 쟤는 원래 저런 놈이지. 거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특권이 있었다.

“자, 다음 부반장은.”

아무리 윤제희가 자기표현을 바로 하는 학생이라도 선생님이 말하는 중간에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 또한 잘 아는 선생님이 알아서 다음 지목으로 넘어갔다.

“음……, 이재이가 해볼까?”

“네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차라리 성적순대로 2등이라 치면 억울하지나 않지.

길게 살지는 않아도 평생 감투와는 인연이 없이 살았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3학년 때 다시 담임이 되어 신기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부메랑이 있을 줄이야.

“이재이가 잘할 거 같은데.”

“아니, 저는.”

“재이 잘할 거야. 성실하니까.”

이재이도 윤제희처럼 토를 달지 못했다. 그저 도리질 두어 번에 멍하니 망연자실해 있었다. 권력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 쳐도 52명 정원의 반에서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는 돈 걷는 일밖에는.

“하아…….”

한숨을 쉬다가 처음 제희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윤제희를 잘 알았다.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윤제희 진짜 잘생겼지? 김원준보다 나은 거 같아.」

입학식 이후로 매점이든, 화장실이든 여자아이들이 둘 이상 모이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소리였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비밀로 속닥거리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윤제희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공공의 연인이랄까, 나 하나 더 좋아한다고 해봤자 별 흥밋거리도 안 되는 그런 존재.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에도 먹고사느라 바쁜 가족의 일원일 뿐이었고 그 덕에 또래다운 소녀 감성은 가지지 못했다.

“인마, 안준우! 너는 제발 입 좀 다물어라. 그리고 윤제희, 이재이, 마치고 나 좀 따라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쉬다가 그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도 제희는 앞서고 재이는 두어 발짝 떨어졌다. 할 말도 없고, 동병상련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고.

“재이야, 아니, 제희 말고, 너. 부반장 재이. 하하.”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은 고3 담임인 선생님을 한 번 더 웃게 만들었다. 제희나 재이나 뚱하니 서 있었고 다 큰 어른만 혼자 즐거워했다.

“더 잘됐네. 이름도 헷갈리는데. 반장, 부반장 하고 부르면 편하겠다.”

“선생님, 저는 사정이 조금.”

“왜, 재이 너 성실한 거 내가 잘 아는데.”

칭찬인지, 아부인지 모를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열기가 식기 전에, 그대로 이재이는 부반장이 되었다. 윤제희는 아무 말도 없었고 돌아설 때도 먼저 등을 돌렸다.

“제희가 성격이 저래 봬도 나쁜 애는 아니야.”

“……윤제희가 문제가 아니라요.”

“자, 선생님이 우리 부반장 선물 줘야지. 이거.”

교사용으로 나온 문제집이 재이의 팔에 가득 안겼다. 이런 뇌물 누가 좋아한다고. 그러면서도 주는 거니 또 받아들었다. 이건 윤제희랑 나눠야 하는 건지, 내가 다 가져도 되는 건지, 금방 다른 고민에 빠져버려 부반장 감투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오오, 부반장. 이재이 졸업하기 전에 출세했네.”

친구 몇이 놀리며 웃었다. 같이 웃어줄 기분도 아니라 그대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색상도 화려한 문제집을 어쩌나, 말이라도 걸어볼까, 나는 있어봤자 다 풀지도 못하는데. 종례가 다가올 때까지 힐끔힐끔 윤제희를 쳐다봤다.

그러다 마지막에 택한 방법이 윤제희의 책상에서 잘 보이는 대각선 위치에 문제집을 쌓아두는 것이었다.

제가 필요한 게 있으면 먼저 말을 걸겠지. 제발 좀 걸어라. 나도 이거 싫다구.

“……다 있는 건데.”

마지막 쉬는 시간에 뒤에서 윤제희가 걸어오는 것을 알았다.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두 번 만에 자신의 책상에 닿았다. 여러 색상의 문제집이 그의 손을 한 번씩 거쳤다가 처음과 반대 방향에 쌓였다. 그 끝에 조용한 혼잣말이 수려한 입술의 움직임으로 읽혔다. 딱 그 앞에 있던 재이에게나 스칠 정도로.

저만큼 소심한 그녀의 짝이 놀라 입을 떡 벌리는데도 윤제희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러냐, 그럼 이거 내가 다 가지겠다, 그 말도 못 하고 재이는 주섬주섬 문제집을 챙겼다.

그래. 어차피 이름만 올린다는 거, 이제 와 무를 수도 없고 받은 거나 챙기자. 이참에 공부나 하지.

결심은 열심히 해봤는데 제 대답 기다리는 윤제희를 앞에 두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10여 초 그녀의 책상 앞에서 날이 서지도, 곱지도 않은 직선의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둘 다 혈기가 입으로 솟구친다는 여느 고등학생들보다 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저기, 국사가 빽빽이 안 낸 애들 열두 명 빨리 내래. 지금 나한테 줘.”

“아, 뭐야.”

“그리고 수학이 정석 푼 거 풀이 과정 없는 애들 다시 검사한대.”

“으아, 수학 진짜 짜증 나.”

“우윳값 13일까지 다 내래. 나 잔돈 없으니까 미리 끝에 600원 맞춰서 좀 주라.”

“잔돈 나도 없어, 아우, 미리 말 좀 하지!”

교탁에 선 그녀가 한마디씩 할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제 얘기다 싶은 아이들이 귀찮음과 짜증을 드러냈다.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의 열에 아홉은 해당사항 없는 그녀로서는 무급 봉사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공을 알아주는 이는 누구 하나 없었다. 꼭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재이도 한편으로 묶는 듯 곱게 보지 않았으니, 그녀는 매일매일이 억울했다.

“아, 우리 부반장. 이거 설문조사 하는 거 쉬는 시간에 좀 돌려줘. 고마워.”

딱 일주일째 되던 날, 선생님의 무심함에 이재이가 폭발했다. 그렇다고 불을 뿜거나 교탁을 세게 두드릴 만큼 막나가지는 못했다. 그간 앞에서는 쳐다도 보지 않던 윤제희를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용기라면 그녀에게는 대단한 거였다.

이제 네가 좀 해라! 나 벌써 문제집 값 하고도 남거든? 처음 패기는 꽤 그럴듯했다.

“윤제희, 저기 나 이재인데, 넌 잘 모르겠지만 내가 부반장이거든……. 근데 이거 다른 반은 반장이 다 하는 거래.”

그러나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나는 여기서 왜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까. 명색이 같이 감투 쓴 사람들이니 그 이름은 알았을 텐데 주절주절 따라붙는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뭘?”

서로 주고받는 말을 대화라 한다면 이 둘이 대화를 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인간적으로 너도 좀 하라구!”

“…….”

“넌 반장이잖아!”

윤제희는 처음으로 무감한 눈을 버렸고 이재이는 화가 났었다. 그날의 소감이었다.

◇ ◆ ◇

월드컵이라 그런지 어부지리로 이런 특수가 없었다. 각종 경기 유니폼에, 동호회 모임까지 평소의 두세 배로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명함을 들고 주요 거래처를 돌아다녔을 재이 역시 오늘은 전화 주문을 받느라 의자에서 엉덩이도 떼지 못했다.

“네, 네. 알죠. 프린트 박으려면 시간이 더 걸리는데……, 아, 그러시겠어요? 저희야 감사하죠. 그럼 홈페이지에서 한번 보시고 다시 전화 주세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얼른 펜을 찾자 옆자리의 영미가 바로 건네주었다. 방금 받은 주문을 메모한 재이도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 뻗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월드컵도 한 번 하니 다행이지 매해 하면 죽어나겠다.”

“그래도 남의 돈 받으면서 바쁘니까 더 낫지. 안 되면 눈치 보이잖아.”

“그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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