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신호대기 상태에서 제희가 나른하게 목을 기댔다. 운전하는 데 좋은 자세는 아니라 어쩜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피곤한 듯싶기도 하고, 만약 조금 더 친했다면 운전 그만하라 말렸을 것이다. 저 데려다준다고 나섰는데 그런 말이 안 나와 문제였지.
“……너 동창회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재이가 입을 떼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너 못 봤다고.”
“아, 안 나갔으니까.”
“왜?”
“……그냥.”
그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원래 그녀가 기억하는 윤제희라는 남자애 자체가 뭘 캐묻거나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앞만 보고 운전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고, 대답할 것 없는 그녀도 어색하게 조수석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보일 듯 말 듯, 하트 스티커가 세 개, 세 개나 붙어 있다.
사람이 아무리 커가면서 성격이 바뀐다고는 해도 윤제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런 거 안 붙인다. 누가 붙였다고 놓아둘 리도 없고.
애인 있나? 아까 그 여자?
아니면 좋을 텐데. 맞는다면 실례도 그런 실례가 없다.
“더 가야 돼?”
눈에 익은 골목길이 나온다 싶더니 그가 갈림길에서 속도를 늦췄다. 그녀가 어느 한 길을 손짓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적당히 중앙 차선에 섰다.
“아니, 여기 세워주면 돼.”
“여기까지 와서 뭘. 어디야?”
그의 말대로 이미 신세는 졌고 자신은 늦었다. 저기, 하고 가장 작은 샛길을 가리키자 그가 군말 없이 차선을 변경했다. 뒤이어 오던 차 한 대가 빵빵, 화를 담았지만 제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에 한 번도 똑같은 길에서 너무 뒤늦게 방향을 일러준 터라 동행한 직원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저기, 저기야.”
굵은 자갈 밭에서 빙그르르 차가 돌았다. 빨리 내리는 게 낫겠다 했는데 여러 감정에 마지막 인사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봤는데 신세만 졌네.”
“언제 마치는데?”
“아……, 그게, 들어가봐야 아는 거라서.”
때맞춰 공장 한구석 뒷문이 열렸다. 직원 하나가 그녀를 보더니 “재이 씨, 늦었어!” 하며 인사와 재촉을 같이 보냈다. 급한 마음에 두 발 다 내려놓고 머뭇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반장!”
차에서 내리지 않은 제희가 자신을 보려는지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표정은 잘 모르겠다. 그녀를 재촉하는 공장 직원 하나가 더 나왔고 그게 그녀의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 돌아가 제대로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반가워, 나 안 그래도 오늘 네 생각 났었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야. 살다 보니까 오늘 같은 날도 있는 게 믿기지가 않아, 윤제희.
이렇게. 적어도 이 정도는.
“너무 얇아서 비칠 것 같아요. 여름옷이라 안감 댈 것도 아닌데.”
“에이, 그러면 단가에 못 맞추지. 금액을 올리든가.”
“저도 그러고 싶죠.”
멀리서 볼 때는 둥그런 무늬의 벽처럼 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면 각각의 무늬를 담은 둥근 단면이 모두 달랐고, 마른 손을 내밀어 만져보니 감기는 천 안쪽으로 제 손의 음영이 그대로 비친다.
“이제 와 그러면 어떡해. 얘기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제 눈에만 그러나 했는데 옆에 선 공장장까지 지레 나서자 이대로는 확실히 문제가 될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얘기가 길어진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말씨름보다는 그저 돈이다.
“일단 가져가서 보여드릴게요.”
“재이 씨 대리라면서 이런 것도 바로 오케이 못 해?”
공장장이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는 잘 안다. 원하는 대로 발끈해주고 ‘알았어요!’ 해주면 좋은데 그러기에는 재이도 사회생활을 좀 오래 했다.
“그러게요. 저도 대리쯤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운이 빠지네요, 빨리 승진이나 해야겠어요.
안 어울리게 연기까지 하니 공장장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것들은 별문제가 없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사무실 들어가서 남은 이야기를 마저 할 때도 목소리는 어느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재이 씨, 근데 그 남자 누구야?”
“네?”
어찌 보면 되묻는 것이 내숭이었다. 같이 있는 남자를 볼 일이라고는 아까 차에서 내렸을 때뿐이다.
“아, 친구요. 오랜만에 만났어요.”
“친구는 무슨.”
“진짜예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무슨 동창이 아직 자기를 기다려?”
믹스 커피를 내려놓는 공장장의 부인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녀가 물 받으러 나갔다 오는 방향이 자신이 내렸던 뒤터의 자갈 밭 쪽 창가와 닿아 있었다.
“그 나이에 연애하는 게 죈가? 혹시 회사에 비밀이야?”
“어……, 지금 밖에 있어요?”
“응? 어, 저기 있네.”
일어선 김에 대신 확인이라도 해주려는지 반대편 창가로 턱을 삐죽 들었다. 그것 보라는 듯 환하게 웃자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하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곳에 발 들이며 마음 한 자락은 떼어놓고 들어왔다.
“뭐 볼일이 남았나.”
일부러 혼잣말을 크게 했는데 노련한 부부라 속지는 않았다. 재이도 얼른 서류를 펼쳐 보이며 디자인지에 동그라미를 쳤다.
“여기 한번 봐주세요. 전에 축구 동아리 유니폼 제작할 때 뒤에 닿는 부분이 까슬하다고 항의가 들어와서요……. 음……, 잠시만요.”
나도 모르겠다.
후유, 한숨을 쉬고 드르륵 의자를 끌어냈다. 이러다 실수하면 그것도 제 잘못이니까.
이미 알고 있는 구조를 따라 두어 번 문이 열렸다 닫히고, 마지막 문에서 자갈 끌리는 묵직한 느낌이 철제 손잡이에 닿은 손끝으로 전해졌다. 밖이다.
“……반장!”
차를 두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면 안에 있을 것이다. 괜히 입술을 물어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급하지 않게 다가갔다.
“어!”
진짜 도망간 모양이다. 운전석이 텅 비어 있었다.
“이재이.”
“아, 놀랐잖아.”
“네가 왜 놀라?”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다가왔으면 소리가 들렸을 텐데 그것도 몰랐다.
“왜 안 갔어?”
그녀는 원래 부끄럽거나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이유를 물어봤다. 본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너 어떤 데서 일하는지 좀 봤어.”
“왜?”
“그냥.”
차 안에선 그녀가 ‘그냥’ 하고 대답했는데 내려서는 그가 ‘그냥’ 하고 말했다. 똑같은 말 한 번씩 주고받았는데 별로 남는 게 없다. 찜찜하기도 하고, 그런데 나쁘지는 않고.
“저기, 나 여기서 일하는 건 아니고, 거래처야. 여기 공장이거든.”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응.”
“뭐 타고 다니는데?”
“그냥, 버스.”
오늘은 네 차 얻어 탔지만. 그런 행운이 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늘 있는 게 아니라 오늘이 더 오래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아직 언제 마치는지 몰라?”
“어……, 아직 할 얘기도 남았고. 여기 공장장님 나가실 때 태워주실 거야, 아마.”
몇 년 동안 딱 두 번 얻어 타본 적 있었다. 이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거짓말을 했는데 별 효과는 없다.
“그래, 그럼.”
딸각, 그가 운전석 손잡이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확실히 나가는 걸 보아야 될 것 같은 마음에 한 걸음 물러서 그의 뒤에 섰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렸고, 걸음을 물리지 않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처신이었다.
“명함이나 한 장 받자.”
“명함?”
“없어?”
직장인, 더군다나 그녀처럼 영업을 같이 뛰다 보면 그 정도는 필수품이었다. 없으면 욕먹기 딱 좋은. 그런데 지금은 없다.
“저기, 가방에 있어. 가방이 안에 있는데.”
“기다릴게.”
잘라 말하는 대답에도 전혀 무안하지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두 번은 없는 사이라는 것을 서로 잘 알았으니까. 세상에는 우연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넘쳐나지 않았다.
재이가 문을 향해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사무실에 있던 공장장 부부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걸 보니 이미 오해를 기정사실화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명함을 좀 달라네요. 주문이라도 하려나.”
속든 안 속든 말이라도 해봤다. 하필 남은 명함의 한쪽이 구겨져 양손 엄지 밑의 손 가장 두꺼운 살 사이로 꾹 눌렀다. 그런데도 접힌 자국이 선명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재이 씨 명함 여기도 있잖아. 내가 바꿔줄게.”
공장장이 인심을 썼다. 서랍에서 꺼내준 자신의 반듯한 명함을 돈이라도 받는 것처럼 고맙게 받았다. 아마 자신이 나가고 나면 뒤에서 저녁거리 할 말이 하나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이거, 내 명함.”
원래는 두 손으로 건넬 일이 많았지만 제희는 자신의 친구였다. 스스럼없이 곧게 내밀자 그도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자신의 명함을 꺼냈다. 그 동작이 간결하고 깔끔해서 일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오늘, 여러 번.
“한일 유니폼 영업팀 대리 이재이.”
성적표를 읽어 내리듯 그가 나지막하게 따라 읽었다. 기억도 가물한 성적표 이상으로 부끄럽다.
“하하, 뭘 또 별거라고 그걸 읽어.”
“너는?”
“응?”
“너는 안 봐?”
자신의 명함과 질감부터 달랐다. 천은 아니었지만 질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진 손가락이라 명함 겉면을 쓰다듬어보고는 그 급을 바로 알았다.
“……한국대학병원 피부과 전공의 윤제희. 이야, 멋지네.”
왠지 자신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또박또박 소리로 들려주었다. 웃으면서 올려다보니 제희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리 무감하니 누가 그 속을 알까.
“이제 내 이름 확실히 기억나?”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럼. 너 어쩐지 좋아 보이더라. 의사선생님 됐구나.”
바라만 보는 남자를 놔두고 제 딴에는 호들갑을 떨어보았다.
하지만 이제야 안 척하는 자신의 연기가 썩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의사가 되었을 거라는 것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chapter 02. 3학년 3반, 반장과 부반장
이재이는 평소에 가장 좋아하고 고대하는 것은 늘 마지막까지 순서를 미뤄두었다. 식판에 가득 찬 반찬을 두고도 수북한 콩나물부터 꾸역꾸역 먹다가 계란말이는 마지막 하나 남고서야 아껴 먹었고, 책의 좋아하는 부분은 잠들기 직전에나 열어보았다. 행복한 기분 그대로 잠들 수 있게.
오늘도 그런 습관은 변함이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청소를 하고, 아침 먹은 너저분한 그릇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화장까지 닦아내고 나서야 가방을 뒤졌다.
“한국대학병원 피부과 전공의 윤제희.”
다시 읽어봤다. 피부과 갔구나. 윤제희 피부가 좋더니 피부과 갔구나.
그녀는 태어나 한 번도 피부과에 가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트러블은 없지만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단 갈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데 쓸 만한 돈이 없었다.
“……윤제희.”
누워 있던 방향을 바꾸어 명함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크고 진하게 돋워진 그의 이름만 따로 곱씹었다. 그토록 잘생긴 얼굴에 이런 여자 같은 이름이라니. 그때도 싫어했는데 지금이라고 좋아하지는 않겠지.
3학년 3반 교실에서 새 학기에 누군가 ‘제희야.’ 하고 부르면 둘 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아니면 그녀는 얼굴이 벌게져 고개를 내렸다.
물론 제희가 아닌 경우도 있었는데 그는 그때도 고개는 안 숙였다. 조금 짜증 나고 피곤한 얼굴이랄까, 제 잘못도 아니면서 괜히 주눅 들게 하는 태도에 그녀는 초반에 그를 조금 피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단조로운 휴대전화 음이 울렸다. 10시가 넘었는데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발신자 번호 표시도 신청하지 않아 도무지 알 수 없어 망설이는 사이, 이미 전화는 끊겨버렸다.
[이재이 맞니?]
누굴까 생각하는 중에 문자가 도착했고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나 윤제희야.]
알아. 그럴 거 같았어.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괜히 두리번거렸다.
손이 늦어 키패드를 꾹꾹 누르는데 벌써 다음 문자가 도착해 화면을 덮었다.
[반장.]
제가 할 일은 ‘나 이재이 맞아.’ 하고 보내는 것인데 그가 보낸 성마른 두 글자에 웃음이 먼저 나와버렸다. 내가 정말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생각했을까?
[응. 반장. 나 이재이. 혹시 전화했었니?]
맞춤법 하나라도 틀렸을까 봐 세 번을 다시 읽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성인이 되고 나서 무언가에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맞구나, 너.]
[미안. 씻느라 못 받았어.]